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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00장면 [10~20/100]

구름위 2013. 6. 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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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00장면 [10~20/100]

 

도서명 :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11. 한니발, 알프스를 넘다-포에니 전쟁 발발(기원전 26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209년/연, 제로부터 수 만호 이주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흐르고 있는 티베르 강 언덕에 로마라는 작은 도시국가가 세워졌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를 세운 것은 로물루스레무스라는 쌍둥이 형제로 이들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한다. 어쨌든 로마는 날로 발전하여 전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까지 세력을 뻗 치게 되었다. 
로마를 부흥케 한 것은 상업이었다. 이때 지중해 해상권을 쥐고 있던 나라는 카르타고였다. 자연 로마와 카르타고는 해상권을 둘러싸고 주도권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 전쟁이 바로 포에니 전쟁이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에 세워진 도시로, 페니키아 인이 지중해 연안에 세운 여러 식민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로마 인들은 페니키아인을 포에니 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카르타고 역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도시였다. 
포에니 전쟁은 근 120년간 세 차례에 걸쳐 발발했다. 최초의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 시작되어 241년 로마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무렵 로마는 아직 농업국이었기 때문에 경제력이나 해군력이 카르타고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강하게 결속된 시민군 덕택에 용병과 피 정복민으로 편성된 카르타고 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로마는 막대한 배상금과 시칠리아 섬을 수중에 넣었다. 
제2차 전쟁은 기원전 218년에 일어났다. 복수의 칼을 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보병 7만,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 군선 30척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에스파냐를 걸쳐 피레네 산맥과 험준하기로 이름난 알프스를 넘는 대장정이었다. 피레네 산맥 기슭에 도달하는 데만도 4개월이 걸렸다. 험준한 산을 보고 기가 질린 병사들 중 상당수가 도망쳐버리고 남은 것은 보병 5만, 기병 9천뿐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산맥을 넘은 한니발 군은 론강을 단숨에 넘어 알프스로 향했다. 하얗게 눈 덮
인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과감하고 또 용의주도했다. 
추위에 떨면서, 코끼리와 기병을 위한 길을 만들어 가며 20여 일을 강행군한 한니발 군은 마침내 롬바르디아 평야에 내려섰다. 그의 군대는 출발 당시의 절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니발도 눈병 때문에 한쪽 눈이 멀고 말았다. 
그렇지만 로마와의 첫 싸움에서 한니발은 특유의 지략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병사들은 용기백배했다. 알프스를 천연의 요새로 여기고 방심했던 로마는 한니발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갔다. 로마군은 연전연패 당했다. 
이듬해 벌어진 칸네 전투에서 한니발 군은 또 한 번 대승을 거두었다.
한니발은 이때 전군을 초승달 모양으로 늘어서게 하고 양쪽 끝에 최 정예부대를 배치, 이들로 하여금 적을 포위공격케 하는 전법을 썼다. 이 싸움에서 7만의 로마 군은 전멸하다시피했다.
하지만 한니발 쪽의 피해는 보병 5천, 기병 2백에 불과했다. 
위기에 처한 로마는 장군 스키피오로 하여금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본국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들은 한니발은 군사를 되돌려 급히 귀국, 자마에서 스키피오 군과 일대 회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니발의 작전이 먹혀들지 않았다. 게다가 숫적으로도 열세였다. 
전쟁에 패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에스파냐를 비롯한 해외 식민지를 떼어주고 군함도 20척만 남기고 빼앗겼으며, 50년간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한니발은 로마 군에 쫓기다가 기원전 183년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켜 지중해 무역을 손안에 넣는 것이 로마의 목적이었다. 기원전 149년, 로마가 다시 공격하자, 카르타고 시민들은 성문을 닫아걸고 결사적인 항전을 벌였다. 이들의 농성전은 무려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총공세 앞에서 마침내 성벽이 무너졌다. 로마 군은 시가지에 불을 질렀다. 이 불은 카르타고가 완전히 잿더미가 될 때까지 17일간이나 타올랐다. 
살아남아 항복한 카르타고 인은 5만, 이는 전인구의 10분의 1에 불과한 숫자였다. 로마는 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카르타고를 속주로 편입시켰다.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12. 만리장성과 분서갱유 -진시황제의 중국통일(기원전 22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195년/요동의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 기원전 193년/위만,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됨
  
중국 섬서성 임동 지방에는 진시황제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묘가 있다. 높이 47m, 둘레가 무려 1,410m에 달하는 대규모의 능으로 주위에는 이중의 성벽이 둘러쳐져 있다. 
1974년, 묘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서 또하나의 거대한 무덤이 발견되었다. 동서 210m, 남북 60m에 달하는 이 무덤 속에는 등신대의 병사와 병마상이 가득차 있었다. 약 7천 개 정도 되는 이 상들은 아마도 시황제의 묘를 지키기 위해 매장된 것으로 보여진다. 
진시황제-그는 500여 년 동안 제후들의 각축장이었던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이다. 이름은 정, 그의 출생에는 다음과 같은 비화가 전해진다.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를 대상인 여불위가 도와주었다. 여불위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자초가 왕위에 오르도록 적극 후원했다. 그리고 자신이 총애하던 여자까지 자초에게 주었다. 그녀는 뱃속에 여불위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 태어난 아이가 자초가 죽은 뒤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시황제이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그는 종래의 왕이란 호칭을 고쳐 황제라 하고 스스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시황제가 꿈꾼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다. 그는 주나라 이래로 시행되어 온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이른바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화폐와 문자, 나아가 도량형과 수레바퀴 폭까지 통일시켰다. 
그의 여러 치적 가운데 후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으로 만리장성 축조와 분서갱유가 있다.
시황제는 제자백가의 사상 가운데 법가만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상은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법가는 군주가 정하는 법에 따라 통치한다는 사상으로, 신상필벌 원칙에 의해 엄격히 법을 적용, 신분의 고하나 귀천을 구별치 않는다는 상당히 혁신적 면모를 지닌 정치철학이었다. 
법가 사상의 창시자는 상앙이며, 한비자, 이사가 대표적 인물이다. 
진시황은 이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제자백가의 저술들을 불살라 버리고 많은 유생들을 생매장시킨 이른바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제자백가의 저술을 숨긴 자는 노역형, 그에 대해 논하는 자는 참수형, 옛일을 돌이켜 지금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했다.
'음풍농월하는 쓸모 없는 사상은 단호히 배격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오늘날 독재정권의 사상 및 언론탄압의 예로 인용되고 있다. 
한편 진시황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자주 일으켰다. 그중 유명한 것이 만리장성이다. 만주에서 시작하여 서쪽 감숙 지방까지 장장 2천 4백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은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인데, 본래 전국시대 때 연, 조, 진나라가 흉노를 막기 위해 각각 쌓았던 것을 시황제가 통일 후 연결, 보수해서 완성한 것이다. 
진의 세력은 날로 뻗어 멀리 서양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다. 오늘날 중국을 차이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진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시황제의 혁신정책은 백성들에겐 몹시 가혹한 것이었다. 그가 죽자 각처에서 농민반란이 폭발했다. 불만을 품고 있던 구귀족들과 신흥세력이 이에 가세했다.
결국 진은 기원전 206년, 초나라 귀족의 후예 항우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통일국가를 세운지
불과 15년 만이었다. 
그후 5년간 구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항우와 신흥세력을 대표하는 유방이 중국천하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승리는 유방에게 돌아가, 기원전 202년 유방은 제위에 올라 국호를 한이라 했다. 이가 곧 한 고조이다. 
   
13. 유라시아를 이은 비단길-한나라 장건, 비단길 개척(기원전 139-12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110년 경/고조선, 한강 이남의 진과 한의 교역 방해
  
기원전 4세기 말 이래 중국은 흉노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몽고 고원에 살고 있던 흉노는 진시황의 토벌로 잠시 주춤했다가 진이 멸망한 틈을 타서 다시 세력을  얻어 인근지역을 정복하고 중국을 위협했다. 
한 고조 유방은 항우를 물리친 후 대대적인 흉노토벌에 나섰으나 도리어 대패 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그러자 수많은 금은보화와 공주를 보내 회유책을 썼다. 
기원전 2세기, 흉노는 감숙성 일대와 중앙 아시아를 손에 넣고 서방과 비단을 교역,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기원전 159년에 즉위한 한 무제는 역대의 굴욕을 씻기 위해 흉노를 칠 것을 계획했다. 그는 흉노에게 쫓겨 멀리 서쪽으로 이동해간 월지국과 손을 잡고자 했지만, 월지국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이때 나선 인물이 장건이다. 기원전 139년 그는 백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월지국을 찾아 떠났다. 그러나 중국 국경을 벗어나자마자 흉노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간신히 죽음을 면한 그는 흉노인으로 정착, 흉노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장건은 탈출하여 드디어 목적지인 월지국에 도착했다. 월지국은 아무르 강 북안, 지금의 소련 우즈베크 공화국 부근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나라와 손을 잡고  흉노를 공격할 생각을 전혀 하고있지 않았다. 한나라가 그만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중국으로 돌아오던 장건은 또 흉노의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감시병이 술에 취
한 틈을 타서 가까스로 도망친 장건은 기원전 126년, 떠난 지 실로 13년 만에 돌아왔다. 
비록 월지와의 동맹은 실패했지만, 장건이 10여 년간 보고 들은 서역지방에 대한 이야기는 무제를 한껏 들뜨게 했다. 
'월지를 찾아 헤매던 중, 대완에 들어갔습니다. 그곳 포도주 맛도 기가 막히지만 말 또한
뛰어납니다. 피땀을 흘린다는 이 말은 하루 천리를 달립니다. 말이 좋은 까닭에 병사들도 말 탄 채로 활을 쏘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
이것이 천마로 유명한 한혈마이다. 
기원전 123년 무제는 이 말을 얻을 욕심으로 장건을 다시 파견, 흉노를 쳐서 대완에 이르는길을 뚫게 했다. 대완은 현재의 소련 키르기즈 공화국 페르가나 분지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이다. 
또한 장건으로 하여금 일리 강 유역의 오손과 동맹을 맺게 하였다.
장건은 기원전 112년 좋은 말 수십 필을 이끌고 돌아오는 한편 부하들을 파키스탄 북부, 이란, 인도 등지로 보내 사정을 살피게 했다. 
무제는 흉노를 토벌하고 이광리를 보내 대완을 정복했다. 결국 흉노는 동서로 갈라진 끝에 동흉노는 한에 항복하고, 서흉노는 외몽고로 물러갔다. 
장건의 여행경로는 천산산맥 북쪽 기슭의 천산북로를 거쳐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아 아시아로 드어갔다가, 천산남로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천산산맥은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한여름에도 흰눈에 덮여 있다. 
장건은 이 길을 무려 네 번이나 여행했다. 그가 개척한 길은 중요한 동서교역로가 되었다. 비
단, 거울, 칠기, 약재, 향신료, 복숭아, 살구, 닭, 제지법 등이 서역으로 전달되고, 거기서 다시 유럽과 지중해 세계로 전해졌다. 한편 석류, 오이, 호박, 호두, 수박, 마늘, 참깨,  견직물과 모직물 등 서역의 문물이 중국으로 건너왔으며 불고,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와 역법, 점성술도 이 길을 통해 소개되었다. 
중국인들은 서역에서 들어온 문물에 '호'자를 붙여 불렀다. 호떡, 호적, 호복, 호반볶음밥, 호무는 다 이렇게 생긴 이름이다. 
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온 서역문물은 그대로 우리 나라에까지 전해졌다. 격구, 축구, 그네, 윷놀이가 건너왔고, 줄타기, 땅재주, 탈춤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봉산탈춤의 주인공들이 서역 사람을 닮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로마가 비단길의 서쪽 종착역이었다면, 우리 나라는 그 동방 종착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4. 로마제국을 뒤흔든 노예들-스파르타쿠스의 봉기(기원전 73-7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108년/한 무제에게 고조선 멸망, 한4군 설치
  기원전 69년/박혁거세 탄생, 기원전 59년/북부여 건국

기원전 73년, 강대한 로마를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다. 노예들의 대규모 무장봉기가 그것이다. 봉기의 지도자는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의 검투사였다. 검투란, 노예 가운데 체격이 좋고 건강한 자들을 골라 무예훈련을 시킨 다음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 싸우게 하여 그를 즐기는 놀이를 말한다. 검투사는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으므로 그야말로 일회적인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거대한 원형극장에서 수천 명의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보면서, 로마 시민은 흥겨워하며 박수를 치곤 했다. 이들에게 노예는 인간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검투는 닭싸움 정도의 오락이나 스포츠로 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트라키아 사람 스파르타쿠스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왔다. 그는 처음엔 광산에서 일하다가, 카푸아의 바티아에 있는 격투경기 훈련소로 팔려가게 되었다. 그곳의 잔혹한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기원전 73년, 78명의 동료들과 함께 훈련소를 탈출, 베스비오스 산으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곳을 기지삼아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주인의 가혹한 채찍도, 비인간적 대우도 없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새 보금자리에서 그들은 미래를 위해 싸울 준비를 해나갔다. 때마침 기근이 들어 노예와 파산한 농민들이 속속 대열에 가담해 왔다. 이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봉기군은 단순한 도망 노예들이 아니라, 귀족과 노예 소유주들이 판치는 로마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세워보려는 희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72년 봉기군은 12만 명으로 늘어났다.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보잘 것 없는 무기로 지중해 최강을 자랑하는 로마의 2개 군단을 격파,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점령한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여기서 전열을 정비하여 각자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로마로 진격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71년, 같이 싸우기로 했던 그리스 인들의 배반으로 봉기군은 로마 군의 포위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가까스로 아드리아 해안 부룬티움으로 퇴각했으나, 크라수스가 이끄는 토벌군의 추격을 받아 아폴리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노예군의 주력부대가 전멸당했으며, 패주한 5천여명도 귀국하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전멸되고 말았다. 포로로 잡힌 자만 해도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하여 6천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어갔다. 그 십자가 행렬은 무려 수십 리에
달했다고 한다. 
  로마의 정치는 원로원에 의해 움직여지는 공화제였지만, 실제 생산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수십만의 노예였다. 라티푼디움이라고 불리는 대농장에서 노예들은 감독관의 채찍 아래 포도나 올리브를 재배하고 밤이면 도망칠세라 창고에 갇혀 지냈다. 
  농장, 광산뿐 아니라 가내노예도 수없이 많았다. 수위, 요리사, 이발사, 심지어는 의사까지도 노예의 역할이었다. 여자 노예들은 한층 더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쉴새없이 일을 하고 밤에는 주인의 성적 희롱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로마 인들은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수레나 삽처럼 소리를 내지 못하는 도구, 소나 말처럼 소리를 내는 도구, 그리고 노예처럼 말하는 도구. 노예가 수레나 가축과 다른 점은 '말할 줄 안다'는 것뿐이었다. 
  노예의 공급원은 주로 전쟁이었다. 케사르는 갈리아 정복 때 무려 100만의 노예를 얻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노예시장이 있던 델로스 섬에서는  하루에 1만 명 정도의 노예가  매매되었다.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이탈리아에는 총인구 450만 중에 150만이 노예였다고 한다. 
  로마의 노예봉기는 스파르타쿠스가 처음이 아니다. 기원전 138년과 기원전 104년 두 차례에 걸쳐 시칠리아 섬에서 노예봉기가 일어났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로마 본토에서 일어나 3년동안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고서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로마 군과 팽팽히 맞서 싸운 일대 무장투쟁이었다. 
  그의 영웅적인 투쟁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그의 이름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며 역사에 기록된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15. 브루투스, 너마저도!-케사르, 공화파에게 암살(기원전 4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58년/동부여에서 주몽 탄생,
  기원전 37년/주몽 고구려 건국, 기원전 18년/온조 백제 건국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걸출한 영웅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알렉산더가 그렇고 칭기즈칸이 그렇다. 그 영웅 중에 영웅으로 율리우스 케사르를 꼽는 데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마 그의 정복사업과 명성에 곁들여 극적인 그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로마 지배층은 족벌당과 빈민당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전자는 귀족 중심의 지배를, 후자는 군사독재를 목표로 했다. 
족벌당 영수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여 명성을 떨쳤지만, 원로원은 그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폼페이우스는 빈민당 영수 케사르, 부호 출신인 크라수스와 손을 잡고 원로원에 맞섰다.
제1회 삼두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60년의 일이다. 
케사르는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훌륭한 웅변술과 정치력으로 시민들의  인기를 한몸에 얻고 있었다. 그는 갈리아 총독이 되겠다고 자청, 4개 군단을 이끌고 정복의 길을 떠났다. 갈리아 지방은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일대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원주민인 갈리아 인은 용맹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케사르는 이 지방을 평정하기만 하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훨씬 탄탄해지리라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싸움에 앞장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산망을 얻은 그는 라인 강 너머 게르만 땅까지 공격, 승리를 거두었고,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 즉 지금의 영국에 까지 쳐들어갔다. 당시로서는 미지의 세계요 야만인들이  사는 미개지인 이곳에서 거둔 케사르의 전과는 그 명성을 한층 높여주었다. 
그러던 중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던 크라수스가 그만 패하여 죽고 말았다. 삼두정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케사르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데 불안을 느끼고 원로원과 다시 결탁, 케사르를 타도하고자 했다.
  음모를 알아차린 케사르는 분노하여 로마로 진격할 결심을 했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단숨에 루비콘 강에 이르렀다. 이 강은 이탈리아 본국과 속주를 가르는 경계선으로서,  원로원의 승인 없이 이 강을 건너는 것은 곧 반역행위에 해당되었다. 케사르는 망설였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는 이 유명한 말을 남기고 말을 몰아 강물 속으로 들어섰다.
  그의 군대는 순식간에 로마에 입성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케사르의 쿠데타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쉽게 원로원과 시민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케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까지 진격해갔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폼페이우스는 거기서 자객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케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여왕으로 봉했다. 지혜롭고 아름다운 젊은 여왕과 영웅 사이에 사랑이 무르익었고, 케사리온이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로마로 돌아온 케사르는 권력을 한손에 쥐었다. 원로원은 그를 종신 총통으로 임명했다. 로마는 이제 이름만 공화정일 뿐, 사실상 케사르 한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케사르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으며, 그 역시 나약한 공화정보다는 강력한 제정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건국  이래 이어져 내려온 전통인 공화정을 무너뜨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에 나가던 케사르는 광장 입구에서 40여명의 공화파에 둘러싸였다. 그들은 일제히 단검을 휘둘렀다. 케사르는 칼에 맞아 비틀거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일격을 가했다. 바로 그가 친아들처럼 아끼던 브루투스였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비통한 외침을 남기고 케사르는 쓰러졌다.
  케사르의 죽음은 공화파와 제정파간의 권력투쟁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도 공화정은 지킬 수 없었다. 이미 로마의 공화정은 건국 초의 건강함을 다 잃고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번엔 케사르의 조카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친구 안토니우스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은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주었다. 불행한 연인들이었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결의 길을 택했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은 그 막을 내리고 제정이 시작되었다.
    
16.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다-기독교의 성립(33년경)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42년/김수로 6가야 왕으로 추대, 53년/고구려 태조왕 즉위
 
  기원전 4년경 로마 제국의 식민지 유대 땅에 한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은  예수, 목수인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었다.
  예수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대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란 곳에 살았고, 아버지처럼 목수일을 했다는 것뿐이다. 그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30살이 되어서였다.
  유대인에겐 옛날부터
내려오는 믿음이 있었다. 언젠가 야훼가 보낸 메시아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란 예언이었다.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민중들은 예수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여러 종류의 당파로 갈라져 있었다. 왕헤롯을 지지하는 파와 사두개 인은 친로마 파였다. 사두개 인이란 대제사장을 비롯, 상류층을 차지하는 종교귀족들이다. 이들은 로마에 빌붙어 일신의 영화를 보위하기에 급급했다.
  바리새 인은 중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반 로마적이었으나 무력사용은 반대했다.
  한편 무장봉기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열심당이 있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로마에 대항했다. 반면, 에세네 파는 속세를 떠나 황야로 가서 금욕적 생활을 했다. 세례 요한은 이 에세네파 출신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그 어느 당파와도 달랐다. 예수가 한 첫 번째 설교는 '때가 이르렀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멸시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는 회개하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사제나 율법학자들처럼 민중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고, 아무와도 가림 없이 어울려 먹고 마셨다. 그런가 하면, 부와 권력을 믿고 위세 부리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예수는 사두개 인이나 바리새 인들에게 위험인물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롯 유다를 꾀어 예수를 체포한 다음, 민중을 선동하여 왕이 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했다. 정작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이렇다 할 죄목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이들의 강력한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로마에 반역한 정치범으로서 '유대인의 왕'이란 팻말을 달고서 말이다.
  예수가 생각했던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고통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나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이었다.
  그가 외친 하나님 나라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누르는 자도 눌린 자도 없는' 그런 나라였다.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의 사상은 열심당의 무장봉기나 에세네 파의 금욕생활을 뛰어넘어 인간평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부활 후, 그 제자들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특히 바울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는 예수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지식인이었다. 사실, 바울은 예수의 사상을 기독교라는 종교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문화는 기독교를 모르고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종교이며 우리 나라에서도 그 영향력은  매우 크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인 천만 명 정도가 교회에 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가 2천 년 전 예수가 행했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17. 모든 길은 로마로 -로마제국의 영토 최대가 되다(100년경)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46년/고구려 요동군 서안평과 낙랑 공격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대부분 평온한 죽음을 맞지 못했다. 음욕으로 이름 높았던 칼리굴라, 그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는 모두 암살당했고, 네로는 자기 어머니를 죽였으며 자신도 자살하고 말았다.
  폭군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한 후 원로원은 원로원 의원 출신인 네르바를 즉위케 했는데,
그는 지금까지의 세습제를 바꾸어 게르마니아 총독 트리야누스를 양자로 지명했다. 이때부터 가장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맞아 제위를 계승케 하는 관례가 이어져 연달아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등장, 로마는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때를 5현제 시대라고 한다.
  트라야누스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경계에까지 진출하고 시리아 남부와 나바타에아를 아라비아 속주로 만들었으며, 도나우 강 건너 다키아 지방을  정복, 주민을 이주케 했다. 이곳은 로마의 이름을 따서 현재도 루마니아라고 불리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치세의 절반을 속주 시찰여행으로 보냈다. 그는 트라야누스가 이룬 판도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여 브리타니아 지방에 장성을 쌓는 한편 파르티아와 화친을 맺었다.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근검절약하고 공정한 재판을 행해 원로원으로부터 피우스, 즉 '경건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두 명의 양자를 지명하여 로마 제정 이래 처음으로 두 사람의 황제가 공동 통치하는 전례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인 루키우스 베루스가 재위 8년 만에 죽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단독 집권했는데, 그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어 로마제국의 판도를 유지하는 한편 '명상록'을 집필한 스토아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관례를 깨고 친자식인 코모두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고 타락한 정치를 펴다가 근위사령관과 애첩의 공모로 욕실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5현제 시대는 끝나고 로마는 군대가 마음대로 황제를 갈아치우는 군인황제 시대를 맞았다. 그후 50년 동안 무려 26명의 황제가 난립, 로마 제국은 위로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5현제 시대에 로마 제국의 판도는 최대를 이루었다.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팍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로마를 중시으로 포장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만들어져 식민지의 물자들이 활발히 이동되었다. 그야말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동방무역도 활발했다. 이집트로부터 홍해로 나가서 인도양을 건너 인도의 향료와 보석을 사들였으며, 비단길을 통해서 중국의 비단을 수입했다.
  '누가 만일 세계 역사상 인류가 가장 행복을 누리고 영화를 구가한 시대를 지적하라고 한다면,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으로부터 코모두스의 즉위에 이르는 시기를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기번이 한 말이다.
  그런데 이 찬란한 '로마의 평화'의 그늘에는 수많은 노예들, 그리고 식민지 주민들의 희생이 숨어 있었다. 로마 시민에게 빵과 서커스, 원형극장에서 펼쳐지는 검투경기가 무료로 베풀어지는 동안 밀가루 생산지였던 이집트에선 노예들이 굶어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로마의 평화'에 기여한 것은 바로 군대였다. 로마 군의 주축은 평민이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쟁이 터지면 병사가 되어 전선에 나갔다. 이들은 무장을 모두 자비로 충당했는데, 긴 창과 양날 단검, 갑옷에 방패를 들고 무기를 자기 몸의 일부처럼 다루며 용감하게 싸웠다.
  그중에는 공병도 있었다. 공병의 임무는 점령지와 로마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들이 만든 도로는 실로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로마 인들은 '도로는 일직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높은 산에 굴을 뚫고, 골짜기에 다리를 놓는 난공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건설된 도로의 총길이는 8만 5천km, 그 숫자는 372개에 달했다. '팍스 로마나'는 점령지와 로마를 연결하는 도로의 발달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8. 조조, 적벽에서 무너지다 -중국, 삼국시대의 시작(20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1년/을파소 고구려 재상이 됨, 194년/고구려 진대법 실시
 
  후한 말, 중국천하는 다시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외척과 환관의 권력다툼으로 정치가 혼란에 빠지고, 생활고에 시달린 농민들의 반란이 쉴새없이 일어났다. 농민들의 불만은 황건적의 난으로 폭발했다. 황건적이란 가담자들이 누런 헝겊으로 머리를 싸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황건적의 난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각지에서 일어난 군신들은 저마다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들 중 조조, 손권, 유비 세 사람이 천하통일의 대업을 두고 경쟁하게 되니, 이때를 삼국시대라 부른다.
  흔히 조조는 꾀 많고 간사한 인물로, 유비는 덕망 높고 온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조조는 당대의 전략가로서 전투시에는 항상 진두지휘를 했다. 그의 아버지는 환관의 양자였다고 하니, 몰락했을지언정 황족의 후예인 유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문인 셈이다.
조조를 두고 일찍이 허소라는 사람은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 될 상이라고 평하였다.
평화시대엔 유능한 관리가 되겠지만, 난세에는 간사한 영웅이 되리란 뜻이다.조조는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의 보호자가 되어 최고의 명문 출신인 원소의 대군을 격파, 중원을 수중에 넣었다. 중원 땅은 중국 대륙의 중심부로, 천하를 얻으려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곳이었다.
  한편 유비는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짚신이나 자리를 짜서 생계를 유지했다. 유비는 팔이 유난히 길고 귀가 컸으며, 말수 적고 희로애락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의형제 관우, 장비와 토벌전에 종군, 그 공으로 말단 관리직을 얻었다.
  손권은 손견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19세 때 대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주유, 노숙, 장소 등의 보좌를 받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강동지방에 세력을 굳혔다. 그의 세력권은 양자강 중류에서 절강에 이르렀으며, 기름진 곡창지대가  대부분 그에 속해 있었다.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제갈공명이다. 제갈공명의 이름은 량, 공명은 자이다. 낭야군 양도현, 지금의 산동성 기수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를 따라 형주로 와서 살았다. 17세 때 숙부마저 죽자 융중으로 옮겨와 초가를 짓고 밭을 갈며 경전과 사서를 공부했다. 스스로를 춘추전국시대의 명재상 관중과 연나라 명장 악의에 비유했는데, 사람들은 때를 기다리는 용이라하여 '와룡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이일어났을 때 조조는 30세, 유비는 24세, 손견 29세, 손권 3세, 제갈공명 4세였다. 유비와 제갈공명이 만난 것은 그로부터 23년 후, 유비의 나이 47세, 제갈공명의 나이 27세 때이다.
  유명한 적벽대전은 서기 208년에 벌어졌다. 당시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형주와 강동을 향해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중이었다. 당황한 손권에게 제갈공명은 연합을 제의, 손권의 군사 3과 유비의 수상부대가 공동작전을 펴게 되었다.
  조조의 군사는 적벽(호북성 가어현 양자강 연안)의 강언덕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모두들 북방 출신인지라 풍토병에 시달리는데다 수전에 익숙치 못해 뱃멀미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자 뱃멀미를 덜기 위해 배들을 전부 쇠고리로 연결,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이른바 연환선을 만들었다.
  이를 알아차린 주유의 부장 황개가 계책을 냈다.
  '조조군은 배의 꼬리와 머리가 맞닿아 그 진퇴가 자유롭지 못하니, 화공으로 일거에 격파할 수 있습니다. '
  주유는 몽충(;폭이 좁고 길며 적선과  충돌하여 침몰시키기 쉽게 만든 배), 투합(;지금의 전함) 10척에 마른 섶과 갈대를 가득 싣고 기름을 부은 다음 포장을 덮고 깃발을 꽂게 했다. 그 뒤에는
쾌속선이 따랐다. 준비를 마친 후 부장 황개로 하여금 항복하겠다는 편지를 보내도록 했다.
  황개가 거느린 전선이 나타나자 조조의 군사들은 환호했다.
  '저기 봐라, 황개가 항복하러 온다!'
  1km 지점까지 다가갔을 무렵, 황개의 신호에 따라 가득 실은 섶과 갈대에 일제히 불이 댕겨졌다. 때마침 불어온 동남풍을 타고 황개의 선단은  맹렬한 불꽃을 일으키면서 조조의 함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쇠고리에 묶인 조조의 배들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일대는 온통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주유의 정예부대가 종횡무진, 조조 군사들의 목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 적벽 일대는 문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조조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허창으로 도망을 쳐버렸다.
  만약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했더라면 중국천하는 이때 조조의 손에 통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명전략가였던 그도 남쪽 지방의 변화무쌍한 기후, 특히 계절풍에 대해선 무지했던 모양이다. 바람 방향이 동남풍으로 바뀌는 것을 알았다면 지략가인 조조가 연환선을 허락했을 리 없었을 테니 말이다.
  여하튼 이 싸움을 계기로 조조의 세력은 위축되고, 유비는 형주와 익주를 얻어 발판을 굳혔으며, 손군은 강동을 지켜 동남쪽으로 그 세력을 뻗게 되었다. 바야흐로 위, 오, 촉 삼국이 정립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약 80년 후인 서기 280년, 위나라의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하고 진을 세웠다.
  
19. 게르만 인의 대이동 -서로마 제국의 멸망(4세기 말-5세기 초)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313년/고구려 낙랑군 멸망시킴,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불교 전래
 
  375년 중국의 한나라에게 쫓긴 훈(흉노) 족이 드네프르 강을 넘어 흑해 연안에 살고 있던 게르만 족의 일파인 동고트 족을 공격해 왔다. 그 여파로 동고트 족의 서쪽에 있던 서고트 족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갈 곳은 로마 제국의 영토뿐이었다.
  410년 서고트 왕 알라리크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침입, 무자비한 약탈을 감행했다. 설상가상으로 훈 족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신의 채찍'이란 별명을 가진 훈 족의 지도자 아틸라의 용맹은 로마 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로마는 게르만의 힘을 빌어 가까스로 아틸라를 막아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달 족이 쳐들어왔다.
  잇단 외적의 침입 앞에 흔들리던 로마를 일격에 무너뜨린 것은 게르만 출신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였다. 그는 476년 유명무실한 서로마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 지중해의 패자였던 로마제국의 절반이 야만인이라 업신여기던 게르만 인의 손에  떨어지고 만 순간이었다.
  당시 로마는 안으로부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5현제 이후 황제 자리를 둘러싼 암투가 그치지 않았고, 그나마 삼위일체가 정통이냐 이단이냐 하는 기독교 교리 싸움에만 정신이 팔려 황제 이하 정치가들은 이민족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처를 못하고 있었다.
  사회의 골간을 이루던 노예와 자영농이 급속히 감소하는 바람에 경제활동은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노예는 주된 공급원이던 정복전쟁이 한계에 다다른 탓에, 로마 군대의 주죽을 이루는 자영농들은 그간의 잦은 전쟁에 나가느라 농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에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황제는 하는 수 없이 그 해결책으로 게르만 인의  이주를 허용, 4세기 말경에는 이미 상당수의 게르만 인이 국경지대에 섞여 살고 있었다.
  이주해온 게르만 인은 노예대신 농사를 짓고, 용병이 되어 전쟁터에 나갔다. 그 가운데는 로마 군대의 지휘자가 된 자도 상당수 있었다.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이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동서로 갈라져 예전의 강대함을 상실한 상태였다. 395년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죽으면서 제국을 동서로 양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분할통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넓은 지역을 혼자 통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던지, 2명의 정제와 2명의 부제를 두어 각각 나누어 다스렸던 것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이르러서는 아예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겨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뒤였다.
  그러나 게르만 족의 대이동은 초기의 산발적이고 평화적인 이주와는 전혀 달랐다. 집단적으로 그리고 무기를 들고서 로마로 진격해 들어온 것이다.
  게르만 족은 본래 발트 해 연안에 살고 있던 민족으로, 비옥한 땅과 목초지를 찾아 잦은 이동을 하고 있었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왕 또는 추장의 지도를 받았으며, 대이동을 시작할 무렵에는
선교사의 포교로 아리우스 파의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되어 있었다.
아리우스 파는 아타나시우스 파를 정통으로 여기는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힌 교파이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 그 자리에는 수많은 게르만 왕국들이 세워졌다. 북갈리아의 프랑크, 라인강과  다뉴브 강 상류의 알라만, 론 강 유역의 부르군도, 남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반달 왕국 등이 서로 세력을 다투며 부침을 거듭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그후로도 천 년이나 명맥을 유지하다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 당했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은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이름은 중세 봉건사회, 그 주인공은 게르만 인이다.
  
20. 수 양제, 대운하를 건설 -양제의 중원 통치(58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503년/신라 국호와 왕호를 정함, 527년/신라 불교 공인,

  612년/고구려의 을지문덕 살수대첩에서 수군을 섬멸
 
  400여 년에 걸친 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천하를 재 통일한 사람은 수의 문제 양견이다. 그는 589년 수나라를 세우고 유능한 정치를 폈다.
  604년 그 아들 광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양제이다. 일설에 의하면, 양제는 병상에 누워 있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며, 바로 그날 밤 아버지가 총애하던 선화부인을 범했다고 한다.
  양제의 통치중 가장 두드러진 일은 대운하 건설이다. 그는 장안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부유한 상인들을 대거 이주케 하여,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지금까지 역대 왕조들이 파놓았던 운하들을 정리, 통일하기 시작했다.
  중국대륙에는 백하, 황하, 회수, 양자강, 전당강의 5대 강이 흐르고 있다. 운하 건설은 이들 강의 지류를 연결하고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강바닥을 파내는 것이다. 먼저 황하와 회수를 이어 황하와 백하, 끝으로 양자강과 전당강을 연결하여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데, 운하의 폭은 60m, 길이는 2천km에 달했다.
  운하 곁에는 길을 닦고 가로수로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뿐 아니라 장안에서 강도에 이르는 사이사이에 40여 개의 궁전을 짓고, 황제가 탈 용선과 유람선 수만 척을 만들어 띄웠다.
  대운하가 완성된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6년 만인 611년이다. 양제는 낙양을 떠나 강도까지 순행길에 올랐다.
  용선을 타고 운하를 따라 내려가니 배 젓는 사람만 8만 명이요, 꼬리를 문 배의 행렬이 무려 2백 리에 달했다. 말탄 기병이 운하 양옆의 길을 따라 호위행진하고, 형형색색의 깃발과 병사들의

갑주가 눈부신 태양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지나는 5백 리 이내의 고을에 음식을 헌상토록 하여, 산해진미와 진수성찬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음식이 너무 많아 종자와 후궁들이 실컷 먹고 떠날 때는 모두 땅에 묻고 갔다고 한다.
  운하가 중국사회의 교통, 경제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남쪽의 풍부한 물자가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북쪽으로 대량 운반되기 시작, 남북간의 경제교류가 원활해졌고, 바다로부터 대륙 중심부로 들어가는 수로가 트이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운하의 물은 관개용수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운하건설은 몹시 어려운 공사였다. 그에 바쳐진 백성들의 피땀과 생명은 수도 없었다. 황하와 회하를 잇는 통제거 공사에 동원된 사람만 백여만 명이었다고 하니, 전체 공사에 동원된 총인원수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낙양 동쪽과 북쪽 수백km 도로변에서는 매월 인부교대가 이루어졌는데 공사에서 희생된 시체가 '도로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운하 양 언덕에도 도처에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농가는 황폐할 대로 황폐해지고 남편 잃은 여인들과 고아들의 가련하고 처참한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남정네들은 무서운 노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팔다리를 잘랐다고 한다. 만리 타향에서 버려진 시체로 뒹구느니 평생 불구로 살지라도 노역을 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복수복족'이란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양제는 운하건설을 마치자 마자 이번엔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친히 용선을 타고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 탁군, 즉 지금의 북경에 도착,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612년 1월, 황제의 사위 우문사급 아버지 우문술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113만 8천 명의 대군이 탁군을 출발했다. 원정군은 매일 1개 군단씩 순서에 따라 떠났는데, 전군이 출발하기까지 40여일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고구려 정벌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육군은 요하를 건너 진격하고 수군은 산동반도에서 황하를 건너 패수(지금의 대동강)를 거슬러 올라가 육군과 합류, 일거에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작전이었지만, 게릴라식 전법으로 싸우고 도망치는 고구려군에게 골탕을 먹어 수나라 군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의 뜻을 보이자, 우문술은 철수를 결심, 군대를 돌렸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도처에 군사를 매복시켜 돌아가는 이들을 공격했다. 그중 유명한 싸움이 살수대첩이다. 여기서 수나라 군사 30만 5천 명 중 2천 7백 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참패한 양제는
613년, 614년 연거푸 원정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번엔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두 번 다 중단되었다.
  가혹한 토목공사와 연이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잃은 양제의 최후는 비참했다. 반란군에 쫓겨 강도로 도망친 그는 체념한 채 술과 여인들에 빠져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목이 참 보기좋게 생겼다만 누가 이 목을 차지하게 될지 모르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618년 3월, 양제는 그를 호위하던 친위대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주모자가 어느 놈이냐?'
  '온천하가 똑같이 원망하고 있으니, 어찌 한 사람에 그치겠소?'
  '천자에겐 죽는 방법이 따로 있는 법이다. 독약을 마시고 죽게 해달라'
  그러나 그의 마지막 소원도 거절당하고, 양제는 친위대 장교의 손에 목을 졸려 죽어갔다. 이로써 진시황 이래 중국 대륙을 재통일, 강력한 전제국가로 군림한 수나라는 3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