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홀로코스트(Holocaust) (3)

구름위 2013. 5. 1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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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대학 지망생]

 

1938년 3월 고향인 브라우나우 암 인을 방문한 히틀러를 시민들이 크게 환영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서북방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에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는 3살 때에 가족을 따라 독일 파싸우(Passau)로 이사 갔으며 5세 때에는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돌아와 린츠(Linz) 부근의 레온딩(Leonding)에 와서 살았고 1년 후인 6세 때에는 람바흐(Lambach)로 이사 가서 살았다. 아버지 알로이스는 작은 밭을 가지고 농사를 지었으며 양봉업자들을 위해 겨울에 벌을 맡아서 보관해주는 일도 했다. 아버지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14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아돌프는 15세 때에 가톨릭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가정형편상 제대로 공부를 마치지 못했다. 아무튼 히틀러는 가톨릭중학교에 다니면서 정식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히틀러는 16세 때인 1905년에 비엔나로 와서 고아원과 같은 시설에 들어가서 지냈다. 어머니 클라라가 돈을 벌어서 가끔 고아원 경비를 보내주었다. 그러던 어머니 클라라는 아돌프가 18세 때인 1907년에 요단강을 건너갔다. 여동생 파울라는 먼 친척 집으로 흩어졌다.

 

히틀러가 입학하려던 비엔나미술대학교. 만일 입학을 허용했더라면 히틀러는 나치를 이끄는 총통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2차 대전도 없었을 것이고 수천만명의 인명도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비엔나미술대학교의 원인제공이 크다는 설명이다. 

 

아돌프는 혼자서 벌어먹어야 했다. 재산도 없고 직위도 없으며 배운 것도 없는 아돌프는 용하게도 그림 그리는 재주는 있어서 미술을 공부하여 화가로서 벌어먹을 결심을 했다. 1907년, 당시 린츠에 살던 아돌프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에서 알아주는 미술대학인 비엔나 미술대학(Akademie der bildenden K?nste Wien: 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 들어가고자 입학원서를 냈다. 하지만 ‘그림에 적성이 맞지 않음’(Unfitness of Painting)이라는 코멘트와 함께 입학이 거부되었다. 아돌프는 그림엽서를 그리거나 풍경 수채화를 그려서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유화도 그렸다. 아돌프는 비엔나의 제1구 헤렌가쎄(Herrengasse)에 있는 미노리텐교회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가 미노리텐교회를 그린 유화 한 점은 현재 그 교회에 보관되어 있다.

 

히틀러가 시간만 있으면 와서 그림을 그리던 비엔나 중심가의 미노리텐교회. 이 교회는 히틀러가 그린 유화 1점을 보관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 다음해인 1908년에도 다시 비엔나미술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다. 또 거부당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 사회가 나의 미술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화가가 되려는 꿈을 포기했다. 만일 그 때에 비엔나미술대학이 히틀러를 학생으로 받아 들였더라면 세계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며 수백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들도 홀로코스트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돌프 히틀러가 비엔나미술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유태계통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태인으로서 이 대학을 나온 유명화가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비엔나미술대학을 거친 유명화가로서는 고트프리트 헬른봐인(Gottfried Helnwein), 알프레드 흐르들리카(Alfred Hrdlicka), 에곤 쉴레(Egon Schiele), 파울 트로거(Paul Troger), 프란츠 안톤 마울버츄(Franz Anton Maulbertsch), 루돌프 폰 알트(Rodulf von Alt), 오토 바그너(Otto Wagner),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써(Friedensreich Hundertwasser) 등이 있으며 그 중에는 유태계도 상당히 있다. 이들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비엔나에서 활동한 미술가들’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히틀러의 인생에 영향을 준 세 사람. 왼쪽으로부터 칼 뤼거 비엔나 시장,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독일 국수주의자인 게오르그 리터 폰 쇠너러. 모두 반유태주의자들이었다.

 

히틀러는 1910년부터 1913년까지 비엔나의 브리기테나우(Brigittenau)의 멜데만슈트라쎄(Meldemannstrasse)에 있는 극빈노동자숙소에서 지냈다. 지금도 이 집은 히틀러가 머물렀던 집으로 기념되고 있다. 히틀러는 비엔나에 머물면서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다. 캐른트너 링(K?rntner Ring)에 있는 제국호텔(Imperial Hotel)에서 포터 및 청소부로 일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1938년 독-오 합병 직후, 마치 개선장군처럼 비엔나에 입성하여 헬덴플라츠(Heldenplatz)에서 20만 시민이 모인 가운데 ‘이제 오스트리아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며 합병의 타당성을 강조한 후 제국호텔에 보란 듯이 투숙하였다. 히틀러는 비엔나에서 힘든 생활을 하면서 유태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고 배가 아팠을 것이다. 히틀러는 비엔나에 있으면서 세 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비엔나 시장이던 칼 뤼거(Karl Lueger: 1844-1910)였다. 그는 기독교사회당을 창당하였으며 반유태주의 정책을 지향하였다. 다음이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였다. 아리안민족의 우수함을 은연중 강조한 바그너의 신화적 작품이야 말로 히틀러의 취향에 맞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종교지도자 겸 국수주의자라고 할수 있는 게오르그 리터 폰 쇠너러(Georg Ritter von Sch?nerer: 1842-1921)였다. 쇠너러는 이른바 Los-vom-Rom-Bewegung(Away from Rome Movement)을 주도하였다. 독일의 영향을 받아 로마가톨릭을 개신교인 루터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운동이었다. 그는 진부한 로마가톨릭이 유태인들과 결탁되었다고 보았다.

 

히틀러가 비엔나에서 거의 3년동안 지냈던 멜데만슈트라쎄의 노동자 기숙사. 이때 웬만한 직장만 구했어도 히틀러라는 인간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터인데...

 

공식적으로는 2일간의 미시스 히틀러인 에바 브라운(에바 히틀러)은 1912년 뮌헨에서 태어났으며 뮌헨에서 17세 때에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에바 브라운은 학교 선생님의 딸이었다. 히틀러는 한번 다른 여자와 약혼한 일이 있는데 정치하느라고 바빠서 관심을 끊자 결국 파혼되었다. 그후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은밀하게 함께 지내며 자기 딴에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에바는 승승장구하던 히틀러가 수세에 몰리고 결국은 파멸할 기운이 돌자 역사에 이름이나 남기자는 생각해서인지 느닷없이 정식 결혼을 요청하여 두 사람은 동반자살하기 한달전에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에바는 청산가리를 깨물고 죽었다. 향년 33세.

 

버그호프 산장에서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두 사람은 동반자살하기 하루 전에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결혼식을 올렸다. 정치지도자들이 개를 마치 자기 자식처럼 미친듯이 좋아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자기들도 동물을 사랑하는 천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제스추어이라고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환경보호주의자, 동물애호주의자 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개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법적으로 옥죄기]

 

1930년대부터 유태인들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옥죄이려는 시도가 착착 진행되었다. 우선 ‘누가 유태인인가?’부터 규정하기로 했다. 나치는 조상이 유태인이면 무조건 유태인으로 간주키로 했다. 유태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도 1871년 1월 18일 이후에 개종하였으면 유태인으로 인정하였다. 1871년 1월 18일은 독일제국이 창설된 날이다. 나치는 독일이 ‘순수한 혈통’으로 힘을 얻는다고 선전했다. 그리고 ‘신성한 독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사람’만이 독일의 순수혈통이며 다른 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은 순수 독일인이 아니라고 보았다. 1933년에는 사회, 경제, 문화, 교육의 각 분야에서 유태인을 추방하고 순수 아리안족이 주도하는 사회가 되도록 한다는 법률들이 통과되었다. 예를 들면 ‘공직자 회복법’은 공직사회에서 유태인들을 몰아낸다는 내용이며 ‘농업법’은 유태인들이 농토를 소유하거나 농사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었다. 유태인 변호사들은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유태인 의사가 아리안 민족을 진찰하거나 수술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법도 마련되었다. 드레스덴에서는 유태인 변호사와 판사들이 법정에서 끌려 나가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차 대전 중인 1916년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1847-1934). 힌덴부르크는 1925-1934년간 독일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그의 재임기간중 마지막에 히틀러가 수상을 지냈다(1933-34).

 

당시 대통령인 힌덴부르크(Hindenburg)는 히틀러의 나치에 의한 조치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가지 제안을 하였다. 그중의 하나는 1차 대전에서 공을 세운 유태인들은 공직사회에서 축출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또 아버지나 아들이 1차 대전에서 공을 세웠으면 그 사람도 공직에서 쫓아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사람들을 단순히 유태인이라고 하여 제외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믿었다. 수상인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937년 그러한 예외조항을 모두 무효로 했다. 유태인 교사들은 학교에서 내쫓겼다. 언론인들도 모두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추방되었다. 언론기관을 소유하고 있던 유태인들도 모두 제외되었다. 그나마 존재했던 유태인들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히틀러는 탄넨버그(Tannenberg)에서 힌덴부르크 대통령 추모집회(1935년 10월)를 거창하게 열었다.

 

[히틀러의 결혼정책]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법’을 도입키로 했다. ‘뉘른베르크 법’의 골자는 독일의 명예와 독일의 순수혈통을 보호하기 위해 유태인과 아리안간의 결혼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유태인과 아리안인이 결혼하여 있으면 무효로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내용은 독일에서 모든 유태인의 공직근무를 금지한다는 것이다. 유태인을 하다못해 시청 환경미화원조차 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모든 유태인의 독일시민권과 민권을 박탈한다는 내용도 포함하였다. 독일사회에서 유태인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법안이었다. 히틀러는 이 법안들의 도입을 소개하면서 ‘만일 이들 법으로 유태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최종해결(파이널 솔루션: 엔드뢰중: Endl?sung)을 위해 나치당이 직접 나서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일종의 협박이었다. ‘뉘른베르크 법’은 제국의회를 통과하였다. 이로부터 ‘엔드뢰중’이라는 단어는 유태인 말살을 위한 나치의 표준용어가 되었다.

 

제3제국의 라이히 마르크. 제3제국은 순수 아리안 여성을 통한 종족 보존을 중요시했다. 화폐에 등장한 여인이 전형적인 순수 아리안 여인이다.

 

[떠나가는 지식인들]

‘뉘른베르크 법’의 통과와 함께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유태인들이 하나 둘씩 독일을 떠나기 시작했다. 어떤 유태인들은 ‘설마 독일이 우리에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더 두고보자’고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설마가 사람 잡는 판국으로 치달았다. 사실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기 이전부터 나치의 수상하고 음흉한 속셈을 간파한 유태인 지식인들은 속속 독일을 떠나 피난처를 구하였다. 1933년 3월에는 저명한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파리로 떠났다. 작가인 레온 포이히트반거(Leon Feuchtwanger)는 스위스로 떠났다. 저명한 지휘자인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는 만일 그가 베를린 필을 지휘한다면 베를린 필의 연주회장에 불을 지르겠다는 심각한 협박이 있은 후 역시 저명한 지휘자인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와 함께 독일을 떠났다. 독일의 유력 신문인 프랑크푸르터 차이퉁(Frankfurter Zeitung)은 그해 4월, 독일 정부는 브루노 발터와 오토 클렘페러를 더 이상 보호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그 같은 독일의 분위기(무드)를 알고 스스로 독일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약간 젊은 시절의 아인슈타인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1933년 1월에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왔으나 독일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동안 벨기에에서 지냈다. 아인슈타인은 ‘카이저 빌헬름 협회’와 ‘프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서 추방되었으며 독일시민권도 박탈당했다. 프러시아예술원 명예원장인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이 사임했을 때에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독일인들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는 믿었던 독일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자 2년후에 속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몇 년후인 1943년 경찰들이 85세 노령인 리버만의 미망인을 추방하려고 들것을 들고 왔을 때 리버만 부인은 이들에게 끌려가 추방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여 약을 먹고 자살했다. 대단한 할머니였다.

 

막스 리버만. 화가이기도 했다. 

 

[크리슈탈나하트]

 

1938년 11월 7일, 헤르셀 그륀슈판(Herschel Gr?nspan)이란 유태인 청소년이 파리에서 나치독일의 외교관인 에른스트 폼 라트(Ernst vom Rath)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나치로 하여금 유태인 박해를 법적수단이 아닌 물리적 폭력수단으로 수행토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난후 나치 선전상인 요셉 괴벨스(Joseph Goebbels)는 외형적으로는 나치당원들과 돌격부대(SA: Strumabteilung)에게 냉정할 것을 주문했지만 실제로는 유태인에 대하여 마음대로 폭력을 행사하라고 조장했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부터 며칠에 걸쳐, 나치에 의한 유태인 집단만행(포그럼)은 독일 전역에서는 물론 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인 주데텐란트(Sudetenland)에서 동시에 발생하였다. 이날 밤의 포그럼을 크리슈탈나하트(Kristallnacht), 또는 ‘11월의 포그럼’이라고 부른다. 크리스탈나하트는 글자그대로 보면 ‘수정과 같은 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깨진 유리의 밤’(Night of Broken Glass)이었다. [크리슈탈나하트를 '유리의 밤' 또는 '수정의 밤'이라고 번역한 경우가 있지만 그냥 크리슈탈나하트라고 부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크라스탈나하트를 유발한 유태인 열혈 청년 헤르셀 그륀슈 

 

유태인들은 길거리에 개처럼 끌려나와 폭행을 당했고 유태인 상점들은 약탈을 당했다. 경찰들을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독일에서만 7천개 이상의 유태인 상점과 1,668개의 유태인 시나고그(회당)가 파괴되었다. 시나고그만 따지면 독일에 있는 유태인 회당이 거의 전부 공격을 받은 셈이었다. 당국은 이날 밤에 91명의 유태인이 살해되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 살해된 유태인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 하루밤 사이에 운명이 바뀐 유태인들은 부지기수였다. 이날 밤과 이튿날 아침에 독일에서만 3만명의 유태인이 체포되어 다하우(Dachau),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부헨발트(Buchenwald), 오라니엔부르크(Oranienburg)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이유도 모른채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겠다고 약속을 하거나 재산을 모두 독일 당국에 헌납한다는 조건으로 일부가 석방되었다. 크리슈탈나하트로 인하여 건물이 파괴되거나 공공시설이 손상된 것은 모두 유태인의 책임으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유태인들은 크리슈탈나하트로 인한 보이지 않는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감당해야 했다. 예를 들면 독일인이 유태인들 때문에 정신적인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면 보상을 해주어야 했다. 유태인들은 수백만 마르크를 모아서 나치정부에 바쳐야 했으며 더구나 당국으로부터 수십억 마르크에 해당하는 ‘참회세’(Atonement Tax)를 통보받아 강제로 납부해야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고 주객이 전도된 주장이었지만 유태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무언지도 모르는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한 후 돈을 바쳐야 했다. 크리슈탈나하트 이후, 나치독일을 피하여 다른 나라로 이민의 길을 떠나는 유태인의 숫자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독일에서 유태인들의 공식적인 활동은 이것으로 막을 내렸다.

 

크리스탈나하트의 전형적인 상점파괴. 진열되어 있던 물건들은 모두 약탈 당했다.

 

크리스탈나하트 이후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체포되어온 유태인들이 줄을 서서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 1938년.

 

크리스탈나하트에 파괴된 베를린 최대의 유태인 시나고그(회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