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홀로코스트(Holocaust) (2)

구름위 2013. 5. 1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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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총체적인 홀로코스트 추진]

 

히틀러의 나치가 집권하자 독일은 한데 뭉쳐서 유태인 말살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독일인들은 유태인들을 추방하고 학살하는 것이 독일 국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독일은 어느덧 ‘유태인 인종청소 국가’로 변하였다. 독일의 모든 조직은 유태인 학살 프로젝트에 관계하였다. 교구교회들과 내무성의 하부조직들(우리로 치면 동사무소)은 출생기록부를 전부 조사하여 유태인들을 가려냈다. 우편국은 유태인들에게 추방명령서와 독일시민권을 박탈한다는 통지서를 열심히 전달했다. 재무성은 유태인들의 재산을 압수하는데 앞장 섰다. 독일의 기업과 공장들은 유태인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했고 유태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증권들을 무효화했다. 대학교에서는 유태인들의 입학을 거부했고 재학 중인 유태인 학생들에게는 학위를 주지 않았다. 유태인 교수들도 모두 파면했다. 정부의 교통부서는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수송하는 화물열차편을 제공하였다. 독일의 제약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있는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신약 테스트를 하였다. 독일의 건설업체들은 강제수용소와 화장시설을 건설하는데 주력했다. 독일의 히틀러유년대는 유태인들을 못살게 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독일 경찰들이 길에 쓰러진 유태인을 조롱하며 모두들 기뻐하고 있다.

 

강제수용소에 들어온 유태인들은 우선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들을 압수당했다. 유태인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금은보석들을 챙겨 가지고 왔지만 모두 나치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치는 유태인들로부터 압수한 귀중품 목록을 정리하여 독일로 보냈다. 상당수 물건들은 군수품으로 재활용되었다. 독일인들에게 있어서 유태인들에 대한 파이널 솔루션(엔드뢰중: 최종해결)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독일의 사회단체, 종교단체, 학술단체로서 유태인 말살 정책이 부당하다고 나선 단체는 하나도 없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유태인들에 대한 독일의 처우를 부당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일부 기독교회는 유태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핍박에서 재고되어야 한다는 말을 꺼냈지만 그야말로 말뿐이었으며 아무런 후속조치도 없었다. 히틀러의 유태인 말살 정책이 순풍에 돛을 단듯 거침없이 추진될수 있었던 것은 독일 내에서조차 양심적인 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르드하우젠 수용소의 참상. SS는 최대 20만명의 포로들을 살해했다. SS는 인종청소 임무를 자랑으로 여겼다.

 

[허구적 배경의 홀로코스트]

유태인 말살정책과 관련하여 나치가 내건 명분은 무엇이었나? 구체적인 이유는 없다. 허구적이며 환상적인 이유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태인들이 세계를 통치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기 때문에 우수한 민족인 아리안들이 저급한 민족인 유태인들을 말살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옛 전설과 신화에 의하면 아리안민족이 선의 상징으로서 악의 상징인 유태인을 물리친다고 되어 있다. 독일인들을 이러한 '전설 따라 3천리'를 믿었다. 세상에 어떠한 인종핍박 정책도 신화와 환상과 추상적이며 비실용적인 주장에 근거를 두고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 나치독일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다. 나치독일에서는 비현실적이며 비실용적인 주장이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이라는 주장과 함께 집행되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국가 지도자가 앞장서서 노약자와 여자들과 어린이들과 갓난아이까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조속히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유럽의 거의 전역에서 추진되었다. 오늘날로 보면 유럽에 있는 35개국 이상이 나치의 학살에 직접 참여하거나 동조한 셈이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소련, 헝가리, 폴란드, 체코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사이프러스, 말타,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지브랄타르,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우즈베키스탄, 카자크스탄, 아제르바이잔, 타지크스탄, 키르기스탄,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무수한 나라들에서 유태인 박해가 진행되었다.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가장 극심했다. 스웨덴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정말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중동부 유럽에는 약 7백만명의 유태인들이 살았다. 그중에서 5백만명이 학살당했다. 폴란드가 가장 많았다. 3백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소련 땅에서는 1백만명이 살해되었다.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서도 수천명이 죽었다. 나치의 ‘파이널 솔루션’(최종해결) 계획에 의하면 영국과 아일랜드의 유태인들도 말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치가 영국을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과 아일랜드의 유태인 말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봔제 빌라의 식당 겸 회의실. 이곳에서 유태인 말살(최종해결) 계획이 수립되었다.  

 

어떤 유태인들이 집단 학살의 대상이 되었는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물론, 증조할아버지(3대조) 또는 고조할아버지(4대조)가 유태인이었으면 예외 없이 청소대상이 되었다. 역사상 종교적인 이유에서 박해를 당하는 경우에 만일 개종을 했거나 또는 어떤 방법으로든 동화되어 살면 예외로 인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예를 들어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살고 있다면 기독교 국가에서는 그를 박해를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는 그런 예외가 통하지 않았다. 비록 기독교로 개종을 했어도 본적지가 유태인이면 무조건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할아버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의 후손이면 예외로 인정하였다. 이 날을 기점으로 삼은 것은 그 날이 독일제국이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독일이 통치하는 영토에 옮겨 와서 산지가 50년이 안되는 유태인들은 비록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도 모두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이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직행하는 기차길. 돌아오지 못하는 길. 

 

[가공할 생체실험]

 

유태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것은 생체실험이었다. 나치독일의 의사들은 아우슈비츠, 다하우, 부헨발트, 라벤스브뤼크, 작센하우젠, 나츠봐일러 등지의 강제수용소에서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였다. 가장 지독한 의사는 요셉 멘겔레(Josef Mengele)였다.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수행한 생체실험은 사람이 심해와 같은 조건의 압력방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수 있는지, 새로운 약을 복용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완전히 냉동시킨후 살아날 수 있는지, 화학약품을 안구에 주사하여 눈의 색깔을 바꿀수 있는지, 산 사람의 장기를 떼어내고 죽은 사람의 장기를 이식하였을 때 살아날 수 있는지 등 참으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실험들이었다. 요셉 멘겔레의 실험이 어느 규모로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치 친위대는 멘겔레가 세밀하게 작성하여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 보낸 한 트럭분의 보고서를 나치의 패전이 확실시 되는 시점에서 모두 파기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멘겔레의 생체실험으로 수많은 유태인들이 죽었으며 요행으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즉시 연구용으로 해부되었다는 것이다.

 

다하우 수용소에서의 생체실험. 차가운 물속에서 얼마나 지탱할수 있는지를 실험하였다. 많은 포로들이 실험 중에 얼어 죽었다.

 

요셉 멘겔레는 특히 집시(Romani) 아이들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관심이 많았다기 보다는 그는 집시 아이들을 마치 개구리나 쥐처럼 생각했다. 그는 집시 아이들을 산채로 해부하였다. 그는 수술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을 주었다. 아이들은 멋도 모르고 멘겔레를 ‘아저씨’(옹켈)라고 부르며 따랐다. 수많은 집시 아이들이 멘겔레의 개인적 취향의 수술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아우슈비츠에 있던 베라 알렉산더라는 여자는 멘겔레가 실험용으로 쓰기 위해 각지에서 집시 쌍둥이 어린이 50명을 데려왔다고 증언했다. 베라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나는 특별히 귀도(Guido)와 이나(Ina)라는 쌍둥이 자매를 기억합니다. 아주 귀엽게 생긴 아이들이었습니다. 아마 네 살쯤 되었을 겁니다. 어느날 멘겔레가 두 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데리고 갔습니다. 한참후에 돌아왔는데 보니까 아이들의 등을 서로 꿰매어 붙여 놓았습니다. 마치 샴의 쌍둥이와 같았습니다. 멘겔레는 쌍둥이 자매가 몸이 붙은채 어떻게 지내는지 관찰하기 위해 두 아이의 등을 붙여서 꿰매 놓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너무나 아픈지 울기만 했습니다. 아이들의 어머니인 스텔라라는 여자는 의무실에 있는 병사에게 몸을 팔고 간신히 마약을 얻어와 아이들에게 주사했지만 아이들의 고통은 막을수 없었습니다. 결국 스텔라는 아이들의 고통을 끝내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체실험에 참가했던 집시 어린이들 

 

[광인 히틀러]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드디어 정권을 잡았다. 그로부터 즉각적으로 독일에 살고 있는 52만 5천명의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독일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의 일부는 미리 독일을 빠져나갔지만 대부분은 체포되어 모진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다. 히틀러는 1935년에 쓴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만일 자기가 집권하게 되면 유태인들을 독일의 정치계, 문화계, 학계에서 모조리 추방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유태인들을 말살(처형)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유태인들을 모조리 없애겠다고 분명히 얘기했다. 예를 들어 1922년 그는 조셉 헬(Joseph Hell)이라는 언론인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진실로 미친사람(광인)이 아니면 하지 못할 얘기였다.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와 아버지 알로이스. 아버지는 구두만드는 견습공 출신이었다가 국경수비대의 세관원이 되었다. 아버지 알로이스의 아버지(히틀러의 친할아버지)는 그라츠에 살던 유태인이었고 알로이스의 어머니(히틀러의 친할머니)는 그 집의 하녀였다고 한다. 알로이스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을 정식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성을 따라 지내다가 어머니가 히들러라는 사람과 결혼하자 비로소 히들러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히들러는 동사무소 직원이 호적증명서에 히틀러라고 쓰는 바람에 그로부터 히틀러가 되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유태인 증오는 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내가 정말 집권하게 되면 가장 우선되는 임무는 유태인들을 제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서 뮌헨의 중심가인 마리엔플라츠에 교수대를 한줄로 만들어 놓고 유태인들의 목을 매달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게 만들겠다. 나는 교수형으로 죽은 유태인들의 몸이 썩어서 악취가 날 때까지 이들을 매달아 놓겠다. 그러다가 위생적으로 도저히 더 이상 매달아 놓기가 어렵다고 생각되면 이들을 내려놓고 다음 차례의 유태인들을 데려와 목을 매달 것이다. 그래서 한줄로 길게 대기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목을 매달 것이다.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도 이와 똑 같이 할 것으로 생각한다. 전독일 내에서 유태인들을 완전히 쓸어낼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이것이 어찌 인간으로서 할수 있는 말이라는 말인가? 더구나 히틀러는 자칭타칭의 지도자(휘러)가 아니던가?

 

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의 중심가. 브라우나우 암 인은 잘츠부르크에서 서북쪽으로 독일과의 국경지대 부근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서 잠시 괴물 히틀러가 기본적으로 어떤 인간이었는지 살펴보자.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서쪽 끝, 독일과의 접경 지역인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이라는 마을의 가스트호프 춤 폼머(Gasthof zum Pommer)라는 여관집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히틀러가 순수 독일 출신이 아니고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것은 희한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히틀러는 독일국민이야말로 1등 국민이며 오스트리아 백성들은 2등 국민이라는 식으로 얘기해 왔다. 히틀러의 옆에 바짝 붙어서 유태인 학살의 총책임을 맡았던 악명 높은 아돌프 아이히만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라고 할수 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수상집무실 지하벙커(F?hrenbunker)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깨무는 것과 동시에 권총으로 관자놀이를 쏘아 자살했다. 환갑잔치도 치루지 못한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Eva Braun)이라는 약간 관찮게 생긴 어린 여자와 12년 동안 정부로서 함께 지내다가 자살하기 바로 하루 전날인 1945년 4월 29일 뜻한바 있어서 결혼식을 급작히 올렸다. 측근 몇 명만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자녀는 없다.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가 자살하기 비로 직전에 청산가리를 깨물고 자살했다.

 

  

히틀러의 2일간 정식 부인이었던 에바 브라운.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 전속사진사의 조수 겸 모델이었다. 17세에 뮌헨에서 23세 연상의 히틀러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좀 정신이 어떻게 된 여자 아닌가? 대단하다. 오른쪽 그림은 히틀러가 직접 그린 에바 브라운의 모습. 히틀러의 그림 솜씨를 보면 과연 비엔나미술대학교가 '자격 없음'이라면서 입학을 거부한 심정을 이해할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은 독일 졸링겐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에 오스트리아의 린츠로 이사와서 살았다. '홀로코스트의 설계자'라고 하는 아이히만은 1932년에 나치당에 가입하였으나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이 불법단체로 규정받자 다시 독일로 가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에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이디시어(語)에 능통한 그는 빈에 설치된 유대인이주국 책임자가 되었으며 후에 국가안보경찰본부(RSHA)의 유대인담당 과장이 되었다. 그는 나치스친위대(SS)의 중령으로서, 독일점령하의 유럽에서 유대인 탄압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친위대 장교 시절의 아돌프 아이히만과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아이히만. 아이히만과 같은 작자는 사진도 크게 쓸 필요가 없어서 작게 사용했다.


사실상 아이히만의 지휘로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 수는 약 600만명에 이른다. 그는 독일의 패전 무렵, 남부 독일에 진주한 미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서 가족과 함께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숨어 살았다. 그러나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발각되어 직장에서 돌아오던 중 강제연행되어 이스라엘까지 비밀리에 호송되었다. 그는 1961년 4월부터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재판에 회부되어 그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재판은 이스라엘에서 1961년 4월부터 4개월간 열렸는데, 그해 12월 사형이 확정되어 이듬해인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재판은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한 집요한 추적, 타국의 주권을 무시한 체포와 연행, 공판 중 아이히만의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단지 통계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망언으로 유명하다.

북부 오스트리아의 람바흐(Lambach). 히틀러가 1897-98년간 살면서 초등학교 3학년에 다녔던 마을이다. 트라운강변의 람바흐 수도원이 유명하다.

 

[히틀러도 유태인?]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 암 인에 있는 히틀러 생가 앞을 행진하는 나치 국방군. 건물은 나무잎으로 장식을 했으며 벽에 Hitlers Geburtshaus(히틀러 생가)라고 쓴 간판을 걸어 놓았다. 1938년 3월.

 

히틀러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시민이었다가 청년 시절에 독일 시민이 되었다. 히틀러가 태어난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이라는 마을의 가스트호프 춤 폼머(가스트호프는 여관이라는 뜻)의 앞에는 돌로 만든 기념비(Manstein)가 있다. F?r Frieden Freiheit und Demokratie / Nie wieder Faschismus / Millionen Tote Mahnen 이라고 적혀 있다. 성의껏 번역해 보면 ‘평화스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 다시는 파치슴이 없어야 / 수백만의 사람이 희생되었다’라고나 할까? 독일어의 만슈타인(Manstein)은 보통 기념비가 아니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내용의 석조 기념비를 말한다.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 암 인의 히틀러가 태어난 집 앞 길에 세워진 경고비(Mahnstein). 경고비에는 '평화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파치슴은 결코 다시는 없어야. 수백만명 죽은 사람들이 훈계를 한다'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F?r Frieden, Freiheit und Demokratie Nie Wieder Faschismus Million Tote Mahnen 를 영어로 번역하면 For peace, freedom and democracy, Never again Fascism, Millions of dead admonish 이다.

 

6백만명의 유태인을 무자비하게 죽인 히틀러도 사실은 유태인 혈통을 이어 받은 사람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 히틀러의 할아버지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유태인이었다. ‘할아버지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란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히틀러의 할머니가 되는 쉬클그루버(Schiklgruber)는 농부의 딸로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 그라츠(Graz)에 있는 프랑켄버거(Frankenberger)라는 유태인집의 하녀로 들어가 일했다. 그 집에는 레오폴드(Leopold)라는 19세의 문제아가 있었다. 이 문제아가 쉬클그루버를 유혹하여 관계를 갖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Alois)가 태어났다. 정식으로 결혼하여 낳은 아이가 아니므로 사생아로 기록되었다. 하녀 쉬클그루버는 프랑켄버거의 집에서 쫓겨났다.

  

1938년 4월 클라겐푸르트에서 나치 친위대를 사열하는 히틀러. 그 뒤로는 하인리히 히믈러가 따르고 있다나치 친위대는 '충성은 명예'라면서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쉬클그루버는 어린 알로이스를 데리고 고생하며 살았다. 알로이스의 아버지라고 생각되는 레오폴드는 관심도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런 알로이스가 히틀러의 아버지이다. 실제로 알로이스는 오래 동안 어머니의 성을 따라서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쉬클그루버가 히들러(Hiedler)라는 사람과 새로 결혼해서 살게 되자 알로이스도 쉬클그루버라는 이름 대신에 새아버지의 성을 따라서 히들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히들러라는 이름은 휘틀러(H?ttler)로 변했고 다시 Huettler가 되었다가 동사무소 직원이 서류를 정리하면서 히틀러(Hitler)라고 잘못 쓰는 바람에 히틀러가 되었다. 히틀러(휘틀러)는 ‘오두막집(Hut)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히틀러의 아버지가 되는 알로이스는 어린 시절에는 구두 만드는 견습공이었으나 18세 때에 국경수비대에 들어가 세관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히틀러. 이 놈이 커서 나중에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처음에 안나 글라쓸(Anna Glassl)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두 아이까지 두었으나 3년후에 헤어지고 클라라 ?츨(Klara P?lzl)이라는 친척이 되는 여자와 결혼했다. 원래 클라라는 알로이스 집의 살림을 도와주기 위해 가정부로 들어왔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많았지만(23년의 차이)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문제의 아돌프 히틀러는 그중에서 4번째 자녀였다. 큰 아들 구스타브(Gustav), 큰 딸 이다(Ida), 둘째 아들 오토(Otto)는 모두 아돌프가 태어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돌프 히틀러는 56세까지 살다가 잘 아는 대로 1945년 4월 30일 바로 하루 전날 결혼식을 올린 부인 에바 브라운과 권총자살하여 황천길로 떠났다. 아돌프의 남동생인 에드문트(Edmund)는 일찍이 1900년에 세상을 떠났고 막내인 여동생 파울라(Paula)는 그나마 오래 살아서 1960년에 세상을 떠났다. 히틀러의 여동생 파울라는 결혼후 미국으로 도피하여 이름과 신분을 감추고 숨어지냈다.

 

나치 독일과 연맹을 맺었던 일본은 전국민이 히틀러를 '히또라'라고 부르며 무척 존경했다. 역사상 가장 악인을 보려면 이 사진을 보면 된다.

 

어린 아돌프 히틀러는 아마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레오폴드가 할머니 쉬클그루버를 비정하게 버린 이야기, 아버지 알로이스가 할머니의 손에서 어렵게 자랐던 얘기 등을 들었을 것이다. 어린 아돌프 히틀러의 가슴 속에서는 은연중에 할아버지인 유태인 레오폴드를 증오하는 마음이 자라났을 것이다.

 

 스트리아 브라나우 암 인에 있는 히틀러 생가.  생가 앞에는 파치슴을 경고하는 비석이 놓여 있다.

 

오늘날의 브라우나우 암 인의 모습.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 도시에서 히틀러가 태어났으며 나치 시대에는 이 마을이 마치 성지와 같은 대우를 받았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어떤 시민들은 히틀러의 고향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히틀러의 여동생 파울라. 오스트리아에서 1945년까지 독일 군병원에서 비서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미국으로 도피하여 미국에서 신분을 감추고 결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