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세계사 100장면 [70~80/100]

구름위 2013. 6. 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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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명 :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71.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 -신해혁명 발발(191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09년/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총살,
  1910년/한일합방, 조선총독부 설치, 토지조사령 발표
 
  거대한 중국대륙에서도 혁명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러, 일전쟁이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의 청왕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서태후는 일본의 승리는 일찍이 입헌군주제를 채용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못해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그리하여 1908년 헌법대강을 발표하고 1911년 최초로 내각을 소집했다.
  그러나 이 내각은 만주족 출신의 황족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인들의 불만을 샀고, 입헌군주제 아닌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혁명운동이 드높아갔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손문은 1866년 광동성 향산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홍수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제2의 홍수전으로 자처했다.
  13살 때 맏형을 따라 호놀룰루로 간 손문은 1894년 그곳에서 흥중회를 조직했다. 이듬해 청, 일 전쟁이 일어나자 손문은 광동에서 청왕조 타도를 내걸고 봉기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후 손문은 미국, 영국을 두루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의 삼민주의는 이때 골격이 완성되었다.
  삼민주의란 민족, 민권, 민생주의를 말하는데 정치적 독립, 왕정타도와 공화정 수립, 경제조직의 개혁을 뜻한다. 삼민주의는 신해혁명을 이끈 지도이념이 되었다.
  1905년 러, 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문은 동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흥중회, 광복회, 화흥회를 발전적 해체하고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총재가 되었다. 중국혁명동맹회는 새로운 중국의  이름을 '중국화민국'으로 정했다.
  동맹회는 기관지 (민보)를 발행하여 삼민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회원을 국내로 보내 활발한 조직활동을 폈다.
  1911년 10월 9일 한구의  러시아 조계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혁명당원이 비밀리에 만들고 있던 폭탄이 터진 것이다. 다음날인 10월 10일 무창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 중 혁명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병사들이 거사를 하고 이에 혁명당원들이 가세, 무창을 점령했다. 이를  '무한봉기'라 한다.
  이를 계기로 혁명운동은 각지로 번져, 한 달도 되기 전에 14개 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각 성 대표들은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중화민국 임시정구 조직대강을 가결했다.
  그때 미국에 있던 손문은 급히 귀국, 이듬해 1월 1일 남경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이를 신해혁명이라 한다. 이후 10월 10일은 쌍십절이라 하여 중화민국 건국기념일이 되었다.
  한편 청왕조는 화북지방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북양군벌 원세개에게 혁명군을 물리쳐줄 것을 청했다. 원세개는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그는 내각총리 자리에 올라 전권을 장악하고 혁명군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다.
  그때 혁명군은 심한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남경정부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손문은 어쩔 수 없이 원세개와 밀약을 맺었다.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세우되 원세개를 초대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조건이었다.
  혁명군과의 타협에 성공한 원세개는 청조에 압력을 가하여 마침내 1912년 2월 황제인 선통제를 퇴위시키고, 3월 10일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혁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1913년 10월 정식 대총통에 취임한 뒤 국민당 해산령을 내려 사실상 국회를 정지시켰다. 그의 야심은 제정을 부활시켜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 찬 계획은 혁명세력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다. 원세개는 제정취소를 포고하고 1916년 6월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후 약 10년 간 중국은 군벌들이 할거하는 혼란기를 맞았다.
  손문은 중국공산당과 제휴, 국민당을 개편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이루었으며, 군대를 길러 군벌 축출을 꾀했다.
  그러나 손문은 혁명 완수를 보지 못하고 1925년 3월 12일 60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병으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무릇 40년간을 국민혁명에 힘써온 목적은 중국의 자유평등을 구하는 데 있었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중을 환기시키고 또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으로 대하는 민족들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현재까지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동지들은 내가 저술한 건국방략, 건국대강, 삼민주의와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 의거하여 계속 노력하여 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이다...'
  
72. 지구 최후의 자연보고, 남극 -아문센, 남극점 도착(191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1년/조선총독부, 어업령, 삼림령, 교육령 발표. 105인 사건
 
  지구의 양극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20세기 초 북극과 남극이 각각 정복됨으로써 이러한 의문은 풀리기 시작했다. 북극은 바다, 남극은 두터운 얼음으로 뒤덮인 대륙이다.
  남극대륙은 면적 1,350만제곱킬로미터, 한반도의 약  62배이며 평균 두께 2,450미터의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지구상에 있는 얼음의 약 90%가 이곳에 있는 셈이다. 평균 기온은 여름 영하 30도, 겨울 영하 70도에 이른다. 남극대륙은 불모의 땅으로 보이지만 실은 금, 은, 크롬, 니켈, 우라늄 등 지하자원과 석유, 천연가스가 풍부히 묻혀 있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최후의 자연보고이다.
  1961년 노르웨이, 뉴질랜드, 미국, 벨기에, 소련, 남아프리카, 아르헨티나, 영국, 호주, 일본, 칠레, 프랑스 12개국이 남극조약을 체결, 남극대륙의 국제법상의 지위를 정하고 남극 이용의 원칙을 세웠다. 조약가맹국은 1986년 현재 28개국으로 늘어났다.
  세계최초로 남극점에 발을 디딘 사람은 아문센이다. 북극점은 그보다 조금 먼저 미국의 피어리에 의해 정복되었다.


로알 아문센은 1872년 7월 16일 노르웨이의 작은 항구 보르게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14살 때 사망했다. 아문센은 일찍부터 탐험가가 될 생각으로 축구, 달리기, 스키 등으로 체력을 단련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문센이 의사가 되길 바랐으므로 그는 오슬로 대학 의학부에 들어갔다.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1893년 21살이 된 아문센은 학교를 그만두고 탐험가가 될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우선 일등항해사 자격을 얻고, 이어서 선장이 되었다.
  1903년 6월 16일 밤, 아문센은 요어 호를 타고 북극으로 떠났다. 그의 항해목적은 북서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9월 12일 킹 윌리엄 섬의 남쪽에 도착한 아문센 일행은 에스키모들과 겨울을 지내고 1905년 8월 13일 다시 항해를 떠났다.
  8월 26일 그들은 요어 호로 다가오는 배 한 척을 발견했다. 베링 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고래를 잡으러 가는 포경선이었다. 이로써 노르웨이 오슬로를 떠나 그린랜드와 알래스카 북안을 거쳐 베링 해협을 통과하는 북서항로가 처음 개척되었다. 아문센이 33살 때 일이다.
  아문센은 곧이어 북극점을 탐험할 계획을 세웠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탐험가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아문센은 남극점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1911년 1월 17일 프람 호는 남극대륙 서쪽의 로스 섬 연안에 닻을 내렸다. 거기서 65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는 영국의 스코트 탐험대가 기지를 세워놓고 있었다. 그 역시 남극점이 목표였다. 아문센은 스코트 일행을 앞지르기 위해 극점에 이르는 최단거리 코스를 선택했다.
  1911년 10월 20일 아문센 일행은 네 대의 개썰매를 타고 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스코트 탐험대는 11월 1일 출발했다. 그들은 아문센과는 다른 코스를 선택했다.
  아문센 일행은 모두 52마리의 개를 데리고 있었다. 예정된 지점에 이르면 개를 차례로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전진했다. 한 달 후인 11월 21일 남위 85도 39부, 높이 3,200미터 지점에 이르렀다.
  12월에 들어서자 맹렬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동상 때문에 아문센의 얼굴에선 피고름이 흘렀다. 그러나 아문센은 멈추지 않았다.
  12월 14일 오후 3시, 일행은 드디어 남극점에 도달했다. 위도계의 바늘이 남위 9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문센은 그곳에 노르웨이 국기를 꽃았다.
  극점에서 3일을 머문 후 일행은 귀로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은 더욱 험난했다. 아문센은 만약 돌아가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뒤에 올 스코트 일행에게 증표를 남기고 출발했다. 그러나 일행은 2,976킬로미터를 걸어 무사히 프라미 호로 귀환할 수 있었다.
  한편 아문센 일행이 극점을 정복한 지 한 달 뒤인 1912년 1월 17일 스코트 탐험대가 극점에 도착, 바람에 휘날리는 노르웨이 국기를 발견했다. 이들의 실망은 대단했다. 4명의 스코트 탐험대는 곧 귀로에 올랐다. 그러나 3월 대설폭풍을 만나 조난,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아문센은 다시 북극으로 관심을 돌려 비행기를 타고 북극해를 횡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비행기는 얼음 위에 내릴 수가 없었으므로 비행선을 타기로 했다.
  1926년 5월 11일 노르웨이, 이탈리아, 미국 세 나라의 공동탐험대가 비행선 노르게 호를 타고 킹즈 만을 출발, 다음날 1시 25분 북극점에 도달하고 비행을 계속,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북극해 횡단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2년 후인 1928년 5월, 아문센과 함께 북극횡단 비행을 했던 이탈리아의 노빌레가 다시 북극탐험에 나섰다가 행방불명 된 사건이 일어났다. 아문센은 즉시 그를 구조하기 위해 비행선을 타고 북극으로 향했다.
  6월 16일 오전 4시, 아문센이 탄 프랑스 비행선 라탐 호가 노르웨이의 도르모소 비행장을 이륙했다. 그것이 로알 아문센의 최후였다. 노빌레를 태운 이탈리아 호는 다른 탐험대에 구조되어 무사히 돌아왔지만, 아문센의 비행선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73. 세계를 불사른 두 발의 총탄 -사라예보 사건, 제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3년/안창호, 로스앤젤레스에서 홍사단 결성
  1914년/경원선, 호남선 개통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인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은 맑고 쾌청한 날씨였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 조세핀은 사라예보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육군대연습을 참관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오픈 카가 잠시 멈칫했다. 그때 길모퉁이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권총을 겨누었다. 순간 총성이 울리고 차에 타고있던 황태자 부부가 쓰러졌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황태자 부부는 15분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범인은 세르비아 인 카브리엘로 프린체프, 19살의 병약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세르비아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조직원으로서, 세르비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항거하는 뜻으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한 것이다. 이를 세칭 사라예보 사건이라 한다.
  사건이 일어나자 전 유럽은 긴장했다. 발칸 반도는 각국의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만큼 향후 정세가 어떻게 급변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발칸 반도는 유럽 제국주의 열강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독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 게르만주의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 슬라브주의가 팽팽하게 맞서 문자 그대로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 있었다.
  세르비아는 1389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래 러시아, 투르크,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1878년 투르크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세르비아는 독립을 이루었지만 1908년 다시 오스트리아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당하고 말았다.
  세르비아 인들은 오랜 외세의 지배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독립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사라예보 사건은 이런 역사적 배경아래 일어난 사건이다.
  황태자의 죽음을 전해들은 오스트리아 황실은 냉담했다. 황태자가 신분 낮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황실의 냉대를 받고 있었다. 황태자비 조세핀은 보헤미아 백작의 딸로서 신분의 격이 낮아 공식 사교석상에서는 정식 황태자비로 대우받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두 사람의 장례식엔 황제도 황족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 것은 세명의 자식들뿐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취한 대외적 태도는 몹시 강경했다. 7월 23일 오후  6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 내의 반 오스트리아 출판물의 금지와 반오스트리아 단체의 해산''반오스트리아 운동을 금지하기 위한 협의회와 암살자 재판에 오스트리아 대표 참여''오스트리아 정부가 지목하는 세르비아 관리 파면'등 세르비아의 민족감정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세르비아는 그중 일부분만을 받아들이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때  독일은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낸 통첩을 온건하고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공식 발표했다.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지 꼭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유럽 각국은 각자의 이해관계, 동맹관계에 의해 급속하게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당시 유럽은 이른바 삼국동맹 세력삼국협상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삼국동맹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삼국협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각기 동맹국으로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동원령을 내린 것은 발칸을 잃고 싶지 않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차르 타도를 외치는 혁명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므로 그 같은 내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다.
  독일도 이에 대항코자 8월 1일 러시아에, 3일에는 그 동맹국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군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단숨에 제압하고 프랑스로 향했다. 8월 2일 이번엔 일본이 영, 일동맹에 따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처음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영국도 중립국 벨기에를 침범했다는 명목으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발했다.
  11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투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온 아라비아가 투르크에 대항하여 영국 편을 들었다.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역시 참전하면 독립시켜 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적극 협력했다.
  발칸의 여러 나라들도 각각 참전했다. 불가리아는 독일 편에, 루마니아와 그리스는 연합국측에 가담했다. 바야흐로 세계전쟁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한편 사라예보 사건의 주인공 프린체프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은 면했다. 그러나 자신이 불지른 세계전쟁의 종말을 보지 못한 채 1918년 봄 지병인 폐결핵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는 세계대전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견할 만큼 통찰력을 갖고 있진 못했지만, 그가 쏜 몇 발의 총탄은 제국주의 열강의 해묵은 모순을 일거에 터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74.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러시아 혁명 발발(191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15년/박은식, (한국통사)간행,  1916년/박중민, 원불교 창시
  1917년/한강 인도교 완공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2월 22일,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전쟁이 시작된 후 독일식 이름인 페테르스부르크를 페트로그라드로 고쳤다)에서는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배급품이 떨어지고  없다는 사실을 알자, 굶주림과 분노에 사로잡힌 이들은 빵가게, 식료품점을 습격했다. 대부분 여성들인 이들은 가난한 병사의 아내, 그리고 여공들이었다.
  다음날 사회주의 단체들은 (부녀자의 날)을 선포하고 시위를 벌였다.

지식인간의 결합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의 연인이자 동지인 크루프스카야도 8개월 뒤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결혼했다.
  1900년 레닌과 크루프스카야는 망명길에 올랐다.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을 전전하는 망명생활을 하며 그는 한시도 쉼없이 혁명을 준비하고 지도해나갔다.
  1917년 2월 혁명 직후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전국적으로 솟아오르는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었다. 그리고 '전쟁 반대''임시정부 반대'를 외쳤다.
  이윽고 10월 25일 새벽, 적위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시가를 재빨리 장악했다. 그날 밤 제2차 전 러시아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는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인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레닌이 의장, 트로츠키가 외무위원, 루이코프가 내무위원, 스탈린이 민족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이 11월 혁명(볼셰비키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주요한 사건의 하나이다. 러시아에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짐으로써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은 레닌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고, 레닌 또한 러시아 혁명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레닌의 친구였던 막심 고리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원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는 나라 러시아에서, 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력하게 불행과 슬픔과 고통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처음 보았다...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치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특히 위대한 인물이었다'
  
75. 민족자결주의와 세계평화 -윌슨, 14개조 평화원칙 제창(191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8년/이동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결성
  1919년/3, 1일 운동 발발. 상해에 임시정부 수립

지식인간의 결합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의 연인이자 동지인 크루프스카야도 8개월 뒤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결혼했다.
  1900년 레닌과 크루프스카야는 망명길에 올랐다.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을 전전하는 망명생활을 하며 그는 한시도 쉼없이 혁명을 준비하고 지도해나갔다.
  1917년 2월 혁명 직후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전국적으로 솟아오르는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었다. 그리고 '전쟁 반대''임시정부 반대'를 외쳤다.
  이윽고 10월 25일 새벽, 적위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시가를 재빨리 장악했다. 그날 밤 제2차 전 러시아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는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인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레닌이 의장, 트로츠키가 외무위원, 루이코프가 내무위원, 스탈린이 민족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이 11월 혁명(볼셰비키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주요한 사건의 하나이다. 러시아에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짐으로써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은 레닌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고, 레닌 또한 러시아 혁명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레닌의 친구였던 막심 고리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원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는 나라 러시아에서, 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력하게 불행과 슬픔과 고통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처음 보았다...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치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특히 위대한 인물이었다'
  
75. 민족자결주의와 세계평화 -윌슨, 14개조 평화원칙 제창(191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8년/이동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결성
  1919년/3, 1일 운동 발발. 상해에 임시정부 수립

  1918년 11월, 독일이 휴전조약에 서명함으로써 4년간에 걸친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판도를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립을 천명하고 유럽으로부터의 주문으로 자국의 산업을 번영시키는 데 골몰하고 있던 미국은 1915년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 호가 독일 잠수함에게 격침당해 타고 있던 미국인 백여 명이 사망하자, 참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17년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하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마침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200만 명의 육군을 서부전선에 보내는 한편, 막대한 규모의 군수물자와 재정원조를 투여,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영행을 미쳤다.
  한편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당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종식을 추진했다.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으며, 유럽 노동자 계급의 지원 없이도 러시아에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1918년 3월 3일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 독일과 강화하고 연합군을 탈퇴했다. 이에 여유가 생긴 독일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로 돌려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오히려 대패하여 후퇴하고 말았다.
  동맹국 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투르크는 영국에게 메소포타미아를 점령당한 뒤 10월 30일 항복하고, 불가리아도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패하여 휴전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는 부다페스트에서 혁명운동이 일어나 황제가 스위스로 망명, 합스부르크 가가 무너지고 11월 3일 항복했다.
  독일에서도 혁명운동이 일어났다. 11월 3일 킬 항의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어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독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사회주의당이 이끄는 새 정부는 11월 11일 프랑스의 우아즈 강 연변에 있는 콩피에뉴 숲에서 휴전조약에 서명,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났다.
  1919년 1월 전승국 27개국 대표가 프랑스 파리에 모여 강화회의를 열었다. 회의의 중심인물은 미국의 윌슨, 영국의 로이드 조지, 프랑스의 클레망소였으며, 그중에서도 윌슨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파리 시민들은 윌슨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정의의 사도 윌슨에게 영광을!'이란 현수막이 드리워지고 사람들이 그에게 꽃을 던졌다. 윌슨이 이처럼 유럽인들의 인기를 한몸에 얻은 것은 그가 발표한 이른바 '14개조 원칙'은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의 식민지 약소국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었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소수민족들은 독립국가를 세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헝가리가 독립하고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등 남 슬라브 인의 거주지와 합쳐 세르보 크로아트 슬로벤 왕국이 되었다. 이는 나중에 유고슬라비아로 개칭되었다.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의 헤자즈는 독립을 했다.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우도록 약속받았다.
  그러나 승전국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의 독립운동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1919년 일어난 3, 1운동은 일본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일본에 대한한 중국의 5,4운동 역시 무시되었다. 영국을 도왔던 식민지 인도도 원하던 독립을 얻지 못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한편 윌슨은 패전국 독일에게 너무 가혹한 강화조건을 제사하면 오히려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면서 독일에 대한 보복을 가벼이 하자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입장은 강경했다. 사실 서부전선의 전투는 거의 대부분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이루어져 프랑스의 피해는 실로 막심했다. 독일은 자기 나라 땅에선 전투를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난항을 거듭한 끝에 파리 강화회의는 6월 28일 베르사유 궁에서 조인식을 갖게 되었다. 독일의 영토와 해외 식민지는 갈갈이 찢겨 승전국에게 넘어갔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러야 했다.
  한편 윌슨이 14개조 원칙에서 주장한 '대소 국가의 구별없이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의 상호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연맹의 설립'은 이의없이 가결되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포함되었다.
  1920년 11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제1회 국제연맹 총회가 열렸다. 국제연맹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국제평화기구였지만, 출발부터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주창자인 미국이 상원의 조약 비준 거부로 참가하지 못했으며, 러시아와 패전국이 제외되었다.
  그 뒤 패전국의 가입이 허락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독일 등이 차례로 가입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할 수 없는 약점을 갖고 있어 침략의지를 누를 수가 없었다.
  1933년 일본과 독일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7년에는 이탈리아가 탈퇴, 이들 파시즘 세력은 또 한 차례의 세계전쟁을 을이켰다.
  
76. '파쇼',로마로 진군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 취임(1922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 승리.(동아)(조선)일보

  창간,  1921년/이동휘, 상하에서 고려공산당 결성. 자유시 참변,
  1922년/방정환, 일본에서 색동회 조직하고 어린이문화 운동 시작
 
  베르사유 조약 이후 유럽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장 이득을 본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보기 드문  경제적 부흥을 이뤄 채무국에서 일약 채권국으로 변신했다. 세계금융의 중심은 런던에서 미국의 월가로 옮겨졌다.
  미국의 참전과 경제적 원조에 힘입어 승리를 거둔만큼 전후 미국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다. 미국은 세계경제의 정상에 앉은 동시에 국제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체제는 유럽 다른 나라들에겐 적잖이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는 가장 불만이 컸다.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의 일원이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연합국측에 가담했다. 그 이유는 아드리아 해안지방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화회의는 이탈리아의 요구를 거부, 이탈리아는 60만 명의 전사자를 냈음에도 그 대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승리의 열매를 도둑맞았다고 분개했다.
  1919년 다눈치오가 이끄는 병사들이 피우메 항구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시인으로서 철저한 국수주의자였다. 그의 행동은 이탈리아 국민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전후 이탈리아는 극심한 인플레와 외채에 시달렸다. 국왕 빅토르에마뉴엘 3세의 통치는 무능했고, 사회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무솔리니이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1883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으며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래서 19세기 멕시코의 혁명가이자 대통령이였던 베니토 파레스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지었다. 국민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한 무솔리니는 사회주의 신문 (아반티(전진))의 주필로 활동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참전을 주장, 사회당으로부터 제명을 당했다. 그는 자원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사회주의는 명확한 이론이 없었으며, 니체와 마키아벨리에게서 배운 권력지향적 개인주의와 뒤얽혀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1919년 3월,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파시스트 당을 결성했다. 이탈리아 어로 파쇼'결속'을 뜻한다. 여기서 유래한 파시즘은 후에 전체주의, 독재를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파시스트 당은 사회주의 반대, 의회정치와 정당정치 반대, 강력한 국가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들의 주장은 전후 무력감에 빠진 퇴역군인들과 사회주의 운동에 두려움을 느끼던 자본가, 지주,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거액의 자금을 주어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파시스트 당은 그 자금으로 '검은 셔츠'란 행동대를 만들어 사회주의 단체와 노동조합을 습격하거나 파업을 분쇄하고 다녔다.
  파시스트 당은 1922년 피우메 항에서 돌아온 다눈치오와 손을 잡고 총선에서 22석을 확보했다. 그해 10월 무솔리니는 나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파시스트 내각수립을 주장했다.
  '우리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으면 우리가 로마로 진군하여 정권을 인수하자. 이는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군중들은 열광했다. 낙담과 실의에 빠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무솔리니는 난국을 타개하고 이탈리아의 영광을 되찾아줄 영웅으로 생각외었다.
  무솔리니의 선동에 고무된 파시스트 당원들은 로마로 진군했다. 국왕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솔리니를 수상에 임명하는 파격적 조치를 취했다. 국왕 역시 무솔리니야말로 이탈리아를 구원할 인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수상이 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를 중심으로 새 내각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선거법을 개정, 독재를 준비했다. 그러나 1924년의 총선에서 파시스트 당은  65%의 지지를 얻어 개정한 선거법에 기대지 않고도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는 국왕, 지주, 자본가의 지지를 받아, 파시스트의 테러를 비난한 사회주의자 마테오티의 암살을 시작으로 반대세력을 제거해나갔다.
  한편 무솔리니는 교회를 사회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여 교황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카톨릭 신자인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지지를 받는 일은 대단히 중요했다. 1929년 무솔리니는 교황청과 라테란 협정을 체결, 바티칸 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해주었다.
  무솔리니는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는 비단 무솔리니뿐만이 아니라 히틀러의 나치즘,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이 공히 사용한 대중조작술이다.
  무솔리니는 강철 헬멧에 번쩍이는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고대 로마제국의 영웅 케사르를 연상케 했다. 이탈리아 인들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국민학교 교과서는 물솔리니를 가리켜 '민족의 구세주'라고 찬양해 마지않았다.


77. '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세계 대공황 발생(192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5년/조선공산당 결성,
  1926년/6, 10만세운동 발발. 나석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투척,
  1927년/신간회 발족,  1929년/원사총파업. 광주학생운동 발발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오후, 미국 뉴욕의 증권가 월 스트리트의 한 빌딩 꼭대기에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틀림없이 뛰어내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 무려 11명이 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증권에 투자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날은 치솟기만 하던 주식값이 별안간 대폭락을 기록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지 못해 안달이던 사람들이 이날은 주식을 팔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암흑의 목요일'이었다.
  5일 후인 10월 29일 주가는 다시 대폭락했다. 불과 30분 사이에 325만 주가 팔렸고 그 손실액은 20억 달러에 달했다. 이후 5시간 동안 쏟아져나온 주식은 무려 1,650만 주였다.
  이날을 역사는 '비극의 화요일'이라고 부른다. 하루 만에 43%나 떨어진 주가는 이후 계속 하락, 11월에는 9월의 절반 이하로, 다음해 7월에는 8분의 1수준으로 떨어졌다.
  은행에서 돈을 꾸거나 살 주식을 미리 담보로 잡히고 대부받았던 투자가들은 가진 주식을 다 팔아도 빚을 갚을 수 없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파산했다. 그러자 이번엔 대출한 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이 부도를 내기 시작했다.
  은행을 믿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예금을 돌려받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은행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부도를 낸 은행이 무려 5천 여개, 9백만 명의 저금통장이 휴지로 변하고 수만 개 기업이 파산했다. 당장에 2,500만 명의 실업자가 거리로 쫓겨났다.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상점과 창고에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사람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었다. 상품은 너무 많은 데 살 능력을 가진 사람은 너무 적었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니 공장주들은 생산량을 줄였다. 실업자가 더욱 늘어났다.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구하러 거리를 배회했지만 돌아가는 공장은 너무 적었다.
  아이들은 석탄과 먹을 것을 훔치러 다녔다. 캘리포니아 농장주들은 오렌지 값이 곤두박질치자 오렌지를 땅에 묻거나 석유를 뿌려 썩였다. 그때 농장 밖에선 영양실조에 걸린 가난한 사람들이 오랜지를 훔치려다 붙잡혀 감옥으로 가거나 경비원의 총에 맞아죽기도 했다. 성난 실업자들은 항의시위를 벌였지만 그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미국경제의 불황은 곧 전세계로 파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경제의 왕좌에 앉은 미국은 매년 막대한 규모의 무역흑자를 올려 그 돈을 유럽과 세계 각지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황이 시작되자 미국은 유럽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였다. 세계의 금의 60%가 미국의 금고 속에 사장되었다. 케나다는 밀을 불태우고 브라질은 커피를 바닷속에 처넣었다.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불황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이후 약 4년 간 지속된 이 세계대공황은 수천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와 공업생산력 저하, 무역감소를 낳았으며 농산물 가격폭락, 금본위제 정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경우, 1923년부터 25년의 평균지수를 100이라 할 때 1933년에는 공업 60, 건축 14, 고용 61, 노동자 임금 38의 수준으로 떨어졌고, 실업자는 1930년 3백만, 33년에는 1천 5백만으로 늘어났다. 지엔피는 1928년의 850억 달러에서 30년엔 680억 달러, 32년엔 37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세계 공업생산액은 1925년을 100으로 할 때 1932년에는 65.9를 기록했고, 세계무역량은  무려 70.8%나 감소했으며 실업자는 5천만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공황은 자본주의 경제의 독특한 현상이다. 공황의 근본원인은 '생산의 무정부성' 즉, 사회전체의 구매력을 계산하지 않고 개별 자본가의 이윤추구 욕구에 의해 상품의 종류와 수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소비자의 구매능력과 관계없이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판다. 가격이 떨어지면 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이 오르면 생산량을 늘린다. 그러면 가격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그 대답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가격이 조절되고 상품의 수요공급이 균형을 이루어 전반적인 과잉생산 공황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이론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드가 처음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완전한 자유경쟁''자유방임주의'를 최선의 것으로 생각한 당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겐 금과옥조 같은 신념이었다.
  그러나 공황은 실제로 10년을 주기로 반복되어왔다. 1929년 시작된 공황은 그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세계적이었으므로 이를 세계대공황이라 한다.

78. 자유방임주의에서 수정자본주의로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193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32년/이봉창, 윤봉길 의거,

  1933년/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제정
 
  1933년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미국 제3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곧 특별의회를 소집, 뉴딜 법안을 만들었다.
  미국은 대공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생산은 반으로 줄고 실업자는 1,300만을 넘어섰다. 새 대통령의 임무는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 미국경제를 하루바삐 재건하는 일이었다.
  뉴딜 정책의 골자는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공공사업을 일으켜서 유효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경기를 되살린다는 것이었다. 이는 아담 스미드 이래 자본주의 경제의 철칙이 되어 온 자유방임주의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뉴딜 정책의 이론적 지주는 케인스 경제학이다. 영국 사람 케인스는 자본주의 경제의 치명적인 약점, 즉 생산의 무정부성을 통찰하고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제시한 최초의 부르주아 경제학자이다.
  그는 지금까지 부인되어온 과잉생산 공황을 이론적으로 입증하고 그 해결책으로서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를 주장했다. 즉 정부가 공공사업을 일으켜 실업자를 고용하면 국민소득이 늘어나며, 국민 소득이 늘면 소비재 수요가 늘고 수요가 늘면 생산설비를 늘이기 위해 투자와 고용이 늘어난다. 그러면 다시 소득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자유방임주의를 최선의 경제제도로 여기던 당시로서는 그의 주장은 처음엔 별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공산주의자나 하는 이야기로 간주되고 있었으므로, 케인스는 한동안 공산주의자냐는 질문을 기자드로부터 받아야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이론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국가에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루스벨트는 제일 먼저 농업의 부흥에 손을 댔다. 1933년 5월 농업 조정법을 제정, 정부통제하에 경작면적을 제한하고 과잉생산물을 사들여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켰다.
  또한 테네시 강 유역 종합개발공사를 시작했다. 이는 테네시 강에 16개의 댐을 건설하여 홍수를 막고 수력발전에 의해 종전의 3분의 1의 요금으로 전력을 공급하며 주변의 토지개량과 삼림조성을 꾀하는 대규모의 다목적 개발공사였다.
  6월에는 전국산업부흥법을 만들어 각 산업마다 생산제한과 최저가격을 정하고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며 최고노동시간, 최저임금을 규정했다.
  1935년 8월에는 사회보장법을 만들어 65세 이상 된 노인에게 양로연금을 지급하고 실업자에게는 일정기간 동안 실업수당을 제공하며 신체불구자, 무능력자 구제 및 의료시술 투자를 시행했다.
  그리고 중앙은행을 만들어 통화량을 조절하고 외환관리를 하여 은행의 신뢰도를 높였다.
  또 누진세 제도를 채택, 호경기에 소득이 높아지면 자동으로 세율이 올라 소비를 억제하고 불경기에는 그 반대작용을 하게 하여 경기변동 폭을 줄였다.
  뉴딜 정책에 따라 대외정책도 바뀌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소비에트연방을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외채를 지불하지 않고 각국에 사회주의 혁명을 선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공화타개책의 일환으로 1933년 11월 소련을 승인하고 34년 5월에는 보호국이던 쿠바의 독립을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이른바 '서린정책'를 천명, 중남미 여러 나라들과의 경제 협력을 추진했다.
  뉴딜 정책으로 미국은 서서히 불황을 극복해나갔다. 루스벨트는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뉴딜 정책은 미국경제와 정치를 중앙집권화시켰으며, 자유방임원칙에 입각한 고전적 자본주의로부터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라는 수정자본주의로 나아가게 했다.
  세계대공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와 이론을 낳았다. 민주주의 전통이 강하고 식민지를 통해 나름대로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미국과 영국은 수정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갔지만, 그렇지 못한 후발자본주의 국가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라는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생겨났다.
  파시즘은 국내경기의 불황을 전쟁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또 한 차례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이때부터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79. 게르만 족의 세계지배를 위하여 -히틀러, 독일총통에 취임(193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34년/진닥학회 설립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세관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두 번이나 아내를 잃고 24살 연하의 클라라와 결혼,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이 아돌프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는 그림에 상당한 재능이 있어 빈의 미술대학에 들어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1907년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3년간 빈의 무료숙박소에서 살면서 그림엽서나 작은 풍경화를 그려 팔았다.
  1913년 5월 그는 오스트리아의 징병검사를 피해 독일 뮈헨으로 도망을 쳤다.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독일제국 병사로 자원입대했다. 그는 용감히 싸웠으며, 부상당했어도 미처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전선으로 달려갔다. 독일은 그에게 무공훈장인 철십자훈장을 두 번이나 수여했다.
  전쟁중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했다. 웅변술에 뛰어났던 그는 곧 이름난 연사가 되었다. 1920년 독일노동자당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 개칭했다. 사람들은 국가사회주의를 줄여서 나치라고 불렀다.
  나치의 지지자들은 군부와 바이에른 지방의 왕당파들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히틀러는 당의 이론가, 선동가로 급성장했다. 그는 돌격대를 조직, 나치의 집회를 방해하는 자들에게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1923년 11월 8일 히틀러는 뮌헨의 어느 맥주홀에서 열린 왕정복고 연설회에 100여 명의 돌격대를 이끌고 나타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맥주홀 폭동'은 군부의 반대로 실패하고 히틀러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명성은 오히려 높아졌다. 재판과정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 사회주의자와 유태인 배척 등 자신의 소신을 마음껏 주장함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이때 감옥 안에서 그는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다음해 11월 히틀러는 석방되어 당 재건사업에 착수했다. 1925년에는 2만 7천 명에 불과하던 당원이 1929년 거의 7배로 늘어났다. 그는 친위대 에스에스란 비밀조직을 만들어 당내 사조직으로 삼았다. 훗날 악명을 떨친 친위대가 바로 이것이다.
  독일경제는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패전으로 영토의 상당부분을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데다가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독일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실업자가 쏟아져나오고 기업과 은행이 파산했다. 1932년의 실업율은 무려 44.4%에 달했다.
  실의와 절망에 빠진 독일국민들에게 나치는 베르사유 조약의 부당함과 독일국민의 우수성을 역설했다. 이에 호응한 것은 안정을 바라는 중산층과 농민, 사회주의 혁명에 공포를 느끼는 자본가와 지주, 전후의 사회적 불안에 상처입은 퇴역군인,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 등 실로 다양했다.
  그 결과 1932년 나치는 37.3%의 지지를 얻어 제1당이 되었다. 1933년 1월 85세의 노대통령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한달 후 나치는 이른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조작,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선전하여 81명의 공산당 의원들을 추방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1933년 3월 5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나치의 대승리였다.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마침내 대통령과 수상을 겸하여 총통이 되었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우선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괴멸시키고 노동조합 운동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신문, 방송을 철저히 검열했다. 나치의 이념에 어긋나는 책들은 모조리 불태워졌고, 유태인이거나 나치에 동조하지 않는 교수들은 대학에서 추방당했다. 학교는 나치즘의 선전교육장으로 바뀌었다.
  나치의 문교장관은 교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할 일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치의 이념에 일치하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한편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도로건설과 토지개량사업, 대규모 병영과 비행장 건설사업을 시작하고 기계 대신 사람의 노동력을 사용케 했다. 군대와 경찰을 늘리고, 감옥을 대폭 증설하여 징집제를 실시하고 대규모의 군수산업을 일으켰다. 미혼여성에게 결혼대부금을 주어 직장을 떠나도록 한 다음 그 자리에 남자들을 고용했다. 이렇게 하자 무려 6백만이 넘던 실업자가 불과 몇 년 안에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다. 나아가 합성고무와 석탄액화에 의한 인조석유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나치의 경제정책에 독일국민은 환호했다. 게다가 나치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교묘한 대중조작으로 독일국민을 사로잡았다. 선전상 괴벨스는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위대한 독일인의 신화를 만들어낸 다음 그 지도자 히틀러를 영웅화시켰다. 신문, 영화, 연극, 포스터 등등 그는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대중매체를 총동원했다.
  그 희생물이 된 것이 유태인이다. 나치는 그저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572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온갖 생체실험의 도구로 썼다. 이들에게 유태인은 인간이 아니라 '더럽고 위험스런 바이러스'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철저한 부정, 이것이 나치즘의 특징이다.
  '...개인주의 및 마름크스주의의 인간개념을 없애고 한 핏줄의 유대와 조국의 흙에 기반을 둔 민족 공동체의 건설이다'
  히틀러는 나치즘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5년 4월 29일 새벽, 히틀러는 그간 동거해온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다. 다음날 오후,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했다. 에바는 독약을 마시고 히틀러는 권총으로 머리를 쏘았다. 며칠 후 독일은 항복을 했고 '게르만 족의 세계지배'라는 히틀러의 야심도 끝장이 났다.
  
80. 대도하의 영웅들 -중국 홍군, 대장정 시작(193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34년/부산-장춘 간 직통열차 운행 개시
 
  대장정,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대도하 횡단이다. 이곳을 무사히 건너느냐 못 건너느냐에 중국 홍군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만약 이곳을 건너지 못하면 홍군은 자그마치 2천 리 길을 되돌아가야 하고, 그것은 곧 홍군의 전멸을 뜻했다.
  1935년 5월 임표가 이끄는 제1군단의 선봉대가 대도하에 도착했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홍군의 도강을 저지할 목적으로 배를 모두 불태우고 들판의 곡식까지 남김없이 거둬들였다. 선봉대는 남아 있던 세 척의 배를 배앗는 데 성공했다. 빼앗은 세 척의 배로 1군단 병력이 강을 건너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홍군은 속속 강가로 집결했다. 그러나 물살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도하작전을 끝내기 전에 적에게 포위당하고 말 형편이었다. 임표, 주덕, 모택동, 주은래, 팽덕회 등은 급히 군사회의를 열고 서쪽 4백 리 지점에 있는 노정교를 점령하기로 했다. 노정교는 수세기 전 노정이란 사람이 설치한 것으로 깎아지른 듯한 협곡 사이에 매달린 다리였다.
  홍군은 지체없이 출발했다. 수백 길까지 솟았다가 강 수면 높이로 낮아지는 험한 협로였다. 이미 강을 건넌 부대도 함께 이동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들은 서로 격려하듯 발길을 재촉했다. 때론 서로의 외침이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가 때론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닐까 두려워질 정도로 멀어지는 협곡을 타고 홍군은 쉬지 않고 행군했다. 밤이면 이들이 든 1만 개의 횃불이 강 수면을 꽃처럼 아름답게 수놓았다. 휴식은 10분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홍군은 이 작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는 정치지도원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고 서로를 격려했다. 망설임도 피곤도 있을 수 없었다. 팽덕회는 병사들을 독려했다.
  '승리는 곧 삶이요 패배는 죽음이다'
  마침내 다리에 다다랐다. 강물은 깊고 물살이 매우 빨랐다. 노정교는 길이 약 900미터, 16개의 육중한 쇠고리줄이 강을 가로질러 뻗어있고 바닥에 두꺼운 널빤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적이 벌써 바닥판자의 절반 이상을 들어내 버린 후였다. 강의 중간지점까지는 쇠사슬만 노출된 채였다. 더욱이 강 저편에는 적의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고 그 뒤로 1개 연대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홍군이 미치지 않았다면 쇠줄만 밟고 이 다리를 건너진 않을 거라고 적은 생각했다. 그런데 홍군은 바로 그 미친 것을 하고야 말았다.
  돌격대로 30명이 자원을 했다. 이 용감한 전사들은 쇠줄에 매달려 넘실거리는 강물 위로 나아갔다. 맞은편 언덕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맨앞장을 섰던 홍군이 총에 맞고 강물로 떨어졌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운명을 같이했다. 그러나 다른 용사들은 좀더 전진했다. 드디어 바닥판자가 있는 곳까지 다다른 용사들 중 하나가 수류탄을 적의 기관총 진지에 던져넣었다. 적은 판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20여 명의 홍군 용사들은 차례로 수류탄을
퍼부었다.
  그때였다. 강기슭에서 기쁨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홍군 만세! 혁명 만세! 대도하의 영웅들 만세!'
  적이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돌격대는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다리 위를 전속력으로 달려 적의 기관총 진지로 뛰어들었다. 그동안 홍군 병사들이 몰려들어 불을 껐다.
 도중에 적과 교전하느라 지체했던 1사단도 이때 도착, 측면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적은 전면도주했다. 그중 100여 명이 홍군에 합세해왔다.
  몇 시간 후 홍군의 전병력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건넜다. 대도하의 영웅들에게는 홍군 최고의 영예인 금성훈장이 수여되었다.
  홍군이 대장정을 시작한 것은 1934년 10월 16일이다. 손문이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후 숙원사업인 군벌타도를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병으로 죽자, 장개석이 총사령관이 되어 북벌을 지휘하게 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갑자기 총 부리를 함께 싸워온 공산당에게 들이댔다. 지주, 대자본가, 상인 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북벌이 성공을 거두자 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파기한 것이다. 이 4, 12구데타로 공산당원의 5분의 4가 살해당하여 1만명 정도만 살아남았다.

  그후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지로 하여 강서 소비에트를 세우고 세력을 키웠다. 장개석은 총 5차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했다. 1933년 10월 시작된 제5차 소공전은 막대한 물자를 동원한 봉쇄작전이었다.
  소비에트는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소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국민당 기관지는 강서 소비에트 탈환 과정에서 100여만 명이 살해당하거나 굶어죽었을 거라고 보도했다.
  그러자 1934년 1월 서금에서 소집된 제2차 전중국 소비에트대회는 혁명 본거지를 서북 내륙지방으로 퇴각시키는 문제를 검토했고, 드디어 10월 16일 장정을 개시한 것이다.
  장정은 1년 만인 1935년 10월 끝이 났다. 그동안 홍군은 중국 대륙을 남쪽으로 반 바퀴 돌면서 2만 5천 리, 즉 1만킬로미터를 걸었다. 이는 미국 대륙을 두 번 횡단하는 거리이다. 홍군은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넜다. 그중 5개 산맥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12개 성을 지나면서 62개 도시와 마을을 점령했으며 6개의 이민족 지역을 통과했다.
  정강산에서 섬서성 연안까지 이른 장정을 완수한 사람은 열명 중 하나 꼴이었다. 그 가운데 여성은 35명뿐이었다. 모택동의 두 번째 아내 하자정은 임신한 몸으로 장정을 완수했다.
  그러면서도 홍군은 가는 곳마다 농민의 지지를 얻어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농민들은 더 이상 홍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훗날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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