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세계사 100장면 [80~90/100]

구름위 2013. 6. 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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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81. 노구교 사건 -중, 일정쟁 발발(193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36년/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말소 사건
  1938년/한글 교육 금지됨
 
  1937년 7월 7일 밤 10시 30분경, 북경에서 남서로 6km 지점에 있는 노구교 근처에서 한 일본군 부대가 야간 훈련중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별안간 10여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전부대원에게 집합명령이 내려졌다. 병사 한 명이 행방불명이었다. 전부대는 일시에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사실 그 병사는 용변중이었다. 그는 20분 뒤 대열로 복귀했다.

그러나 일본군 대대장은 중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하며 주력을 현지로 급히 출동시
켰다. 당시 노구교에는 송철원이 지휘하는 중국군이 주둔중이었다. 새벽 5시 반, 일본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노구교를 점령해버렸다.
  7월 11일 양측은 현지협정을 맺어 사태는 일단 해결된 듯했다. 그런데 7월 28일 일본군은 갑자기 북경과 천진을 총공격했다. 이로써 노구교 사건은 전면전으로 확대,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측에 가담, 승전국이 된 일본은 전후 빠른 성장을 했다. 그렇지만 방직공업과 군수산업에만 치우쳐 산업구조는 매우 불안정했다.
  19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으로 일본경제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노동자, 농민의 생활이 몹시 빈궁해졌으며,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파시스트 세력이 고개를 들어 국가개조를 통해 위기를 타개하자는 운동을 폈다. 그 중심세력은 군부였다.
  1932년 5월 15일, 파시스트 청년장교 일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 5,15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정당정치를  부정하고 군부, 관료의 주도하에 천황제 파시즘이란 일본 특유의 전체주의를 만들었다. 즉 독일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담당했던 절대자의 위치에 천황을 앉힌 것이다. 이들은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심으로 국민의 의식과 생활감정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그리고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들의 목표는 만주였다.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 자원 및 군수물자 공급처로 삼기 위해서였다.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의 관동군은 봉천 근교의 유조구에서 자기네가 경영하는 만주철도를 몰래 파괴했다. 그리고는 이를 중국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관동군은 순식간에 봉천을 점령하고 만주 일대를 손에 넣었다. 이것이 만주사변이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이 지역에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세웠다.
  일본은 다음엔 화북지방으로 진출했다. 일본의 방적업 때문에 중국의 민족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국민들은 배일감정에 불타올라 있었다.
  그런데 이때 국민당 정부의 총통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2만 5천리 장정 끝에 섬서성으로 들어간 홍군의 뒤를 쫓아 토벌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36년 12월 7일, 장개석은 전용기를 타고 섬서성 서안으로 날아갔다. 홍군과의 싸움에 소극적인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을 다그치기 위해서였다. 장학량은 만주군벌 장작림의 아들로 장작림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뒤부터 국민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저항해왔다.
  그의 부대는 홍군 토벌을 위해 서안에 주둔중이었으나 양군은 사실상 정전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인끼리 싸워선 안된다.'  '빼앗긴 국토를 우리 힘으로 되찾자'는 홍군의 항일 통일전선 전술에 장학량군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12일 새벽, 장학량의 부대가 장개석이 머물고 있는 온천장을 급습했다. 장개석은 잠옷 바람으로 달아났다. 뒷산 바위 틈에서 그를 찾아낸 수색대 지휘관은 정중하게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저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길 바랄 뿐입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하고 8개항으로 된 구국의 요구를 제출, '내전 정지'와 '거국일치의 항일'을 요구했다. 이것이 유명한 서안 사건이다.
  사건이 터지자 즉시 홍군의 군사위원회 부주석 주은래가 장학량의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날아왔다. 주은래는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정치주임을 지냈었다. 주은래 또한

국공합작에 의한 거국적 항일운동을 요구했다. 장개석은 할 수 없이 이를 수락하고 남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내전은 종식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홍군은 적기를 내리고 붉은 별을 떼었으며 장개석 휘하의 '제8로군'이 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대대적인 중국침략을 감행했다.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무려 30만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살륙한 '남경대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무한, 광동, 산서에 이르는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점령했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은 실로 잔혹했다. 중국인들은 이를 '삼광작전'이라 불렀다. 즉 죽이고, 태워버리고, 약탈한다는 뜻이다.
  삼광작전으로 학살당한 중국인 수는 무려 1천 2백만 명을 헤아렸다. 한편 일본은 점령한 남경에 왕조명을 중심으로 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82. 5천만 명이 희생된 최대의 비극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3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38년/ 국가총동원법 공포, 전시통제체제 시행
  1939년/ 강제징용,  1940년/ 창씨개명 강요, 중국 중경에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폴란드의 단치히 항에 정박해 있던 독일 순양함이 별안간 항구의 요새를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독일군 정예부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었다. 장갑사단, 기계화부대, 공격용 전차를 앞세운 53개 사단과 고성능 폭격기를 동원한 독일군은 삽시간에 폴란드를 제압했다.
  그러자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1년 만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폴란드 침공 7개월 뒤인 1940년 4월, 독일군은 이번에는 북쪽으로 화살을 돌려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했다. 그러더니 5월에는 돌연 서부로 진출, 네덜란드를 5일 만에, 벨기에를 2주일 만에 항복시켰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마지노 선을 돌파,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6월 10일 이탈리아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독일측에 가담했다. 14일에 파리는 함락되고 말았다. 독일은 페탱을 내세워 괴뢰정부인 비시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대해 드골을 중심으로한 저항세력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항전결의를 표명했다.

  독일은 이어 발칸 작전을 개시했다. 유고슬라비아를 2주 만에 정복하고 그리스를 점령한 다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독일측에 가담시켰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독, 소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일제히 소련으로 진격했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카프카즈의 유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 소련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소련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국토의 서반부가 독일군 손안에 들어갔고 자그만치 2천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 발생했다. 이는 학살로 죽어간 유태인의 3.5배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1940년 9월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외치며 남방진출에 나섰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문자 그대로 세계전쟁으로 화했다. 지구상에 전화와 포염이 일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하고 이탈리아가 이를 보조한 유럽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고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점차 연합군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태평양에서의 양상도 비슷했다. 일본은 초기에 기습공격으로 주도권을 장악, 1942년 전반까지 필리핀, 말레이지아, 버마, 네덜란드 령 동인도, 서남태평양 제도를 차례로 점령하여 동남 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대동아 공영권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질 듯이 보였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 의외로 시간을 끌었고, 태평양 일대의 남방전선은 너무 넓어서 보금로 유지가 곤란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8월에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은 일본은 각 지역에서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사이판에서 전멸당하고 10월에는 레이테 만에서 함대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1945년에는 필리핀을 빼앗겼다.
  한편 1944년 6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파리를 수복하고 라인 강으로 진격, 1945년 4월 소련군과 엘베 강에서 만나 독일진격을 눈앞에 두었다.
  4월 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유격대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5월 1일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히틀러는 전날 자결하였고 독일은 5월 7일 항복, 이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한편 일본은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8월 8일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여 만주로 진격하자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연합군측 49개국, 동맹국측 8개국, 동원병력 1억 1천만, 인류의 5분의 4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전사자 2천 7백만, 민간인 희생자 2천 5백만, 총 5천만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3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유태인 학살,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간 20만에 달하는 조선여성들, 그리고 가공할 신무기 원자폭탄 등... 제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땅에 떨어뜨린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었다. 
  
83. '엄마 따라 갈 거야' -미국,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194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43년/학병제 실시,

  1944년/여자정신대근무령 공포, 20여만 명이 정신대로 끌려감,  1945년/8, 15해방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경, 일본 히로시마의 하늘에 은빛 B29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8시 15분, 9천 6백미터 상공에서 비행기는 지름 71센치미터, 길이 3.05미터, 무게 약 4톤의 원자폭탄을 떨구었다. 50초 후 섬광이 번득이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히로시마의 60%가 파괴되고, 반경 500미터 이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즉사했다.
  34만 가량의 히로시마 인구 중 7만 8천 명이 죽고, 부상자와 행방불명이 5만 1천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후 5년 동안 24만 명이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했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한 순간에 엄청난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그 희생자 가운데는 한국인도 수만 명 포함되었다. 이들은 징용으로 끌려갔거나, 가난에 못 이겨 살길을 찾아 일본에 건너갔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과 원폭 피해자라는 꼬리표였다. 그후 4만 3천 명이 후유증으로 앓다가 사망하고 현재 2만 명 정도가 살아 있다.
  어둠의 그림자는 2세, 3세에까지 전해졌다. 원폭병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말과 달리 피폭 2세들은 기형적인 외모로 태어나거나 정상이더라도 갖가지 선천성 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더욱이 이들은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이들 한국인 피폭자들과 그 2세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시대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이들의 삶은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는지. 그 한 예를 보기로 하자.


  *이름: 이정자
  *일본 이름: 구니모토 사다코
  *당시 나이: 15세
  *주소: 히로시마 시 후쿠지마 마치 673
  *학교: 후쿠지마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덴마치 국민학교로 옮겨 졸업.
            천만 여자고등학교 2학년 중퇴
  *가족: 앵친과 5남매. 그 중 장녀.
  *피폭지: 집 앞 들판에서 맞은편에 있는 양피주머니 공장 여공들과 어울려 양털을 늘어놓

            다가 등에 불길을 느끼고 마차 밑으로 기어듦.
  *피폭상태: 등 전체 화상. 1주일 후 뒷머리에 풍선처럼 커다란 혹이 부풀어 절개수술을 받

            았는데 한 동이에 가까운 피고름이 쏟아진 후 계속 부풀어 2, 3회 더 수술을  받았


  독일은 이어 발칸 작전을 개시했다. 유고슬라비아를 2주 만에 정복하고 그리스를 점령한 다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독일측에 가담시켰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독, 소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일제히 소련으로 진격했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카프카즈의 유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 소련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소련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국토의 서반부가 독일군 손안에 들어갔고 자그만치 2천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 발생했다. 이는 학살로 죽어간 유태인의 3.5배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1940년 9월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외치며 남방진출에 나섰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문자 그대로 세계전쟁으로 화했다. 지구상에 전화와 포염이 일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하고 이탈리아가 이를 보조한 유럽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고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점차 연합군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태평양에서의 양상도 비슷했다. 일본은 초기에 기습공격으로 주도권을 장악, 1942년 전반까지 필리핀, 말레이지아, 버마, 네덜란드 령 동인도, 서남태평양 제도를 차례로 점령하여 동남 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대동아 공영권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질 듯이 보였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 의외로 시간을 끌었고, 태평양 일대의 남방전선은 너무 넓어서 보금로 유지가 곤란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8월에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은 일본은 각 지역에서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사이판에서 전멸당하고 10월에는 레이테 만에서 함대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1945년에는 필리핀을 빼앗겼다.
  한편 1944년 6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파리를 수복하고 라인 강으로 진격, 1945년 4월 소련군과 엘베 강에서 만나 독일진격을 눈앞에 두었다.
  4월 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유격대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5월 1일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히틀러는 전날 자결하였고 독일은 5월 7일 항복, 이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한편 일본은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8월 8일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여 만주로 진격하자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연합군측 49개국, 동맹국측 8개국, 동원병력 1억 1천만, 인류의 5분의 4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전사자 2천 7백만, 민간인 희생자 2천 5백만, 총 5천만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3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유태인 학살,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간 20만에 달하는 조선여성들, 그리고 가공할 신무기 원자폭탄 등... 제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땅에 떨어뜨린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었다. 


            음. 까까중 머리로 그해 10월 귀국.
  *피폭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섯째 동생 병준의 죽음. 7살이던 병준은 둑에서 피폭당했는

           데, 상처를 비집고 곧 창자가 쏟아져 나올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온몸에 주먹만한 물

           집이 생겨 가위로 잘랐는데 자꾸 생겨났다. 어머니가 쌀물이며 송진가루며 구해서 발

           라주고 필사적인 간호를 했지만 파리가 상처에 수없이 구더기를 슬었고 어린 동생은

           아직도 살아있는데, 마치 시체에 달려들듯이 파리떼와 구더기가 무섭게 온몸을 뒤덮

           으며 기승을 부렸던 그 참상. 동생은 결국 1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 정자 여인은 한국에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들 둘, 딸 셋을 낳았다. 그러나 영하 20도의 엄동설한에도 차오르는 열기 때문에 알몸으로 냉방에서 지내야 했고 숨이 차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
  1970년 보다 못한 고1짜리 큰 딸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 갱지 열장에 이르는 긴 사연이었다. 두 달만에 온 회신은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가 있으니 그리로 가보라.'는 내용이었다. 보사부장관 명의로 온 답장이었다. 그러나 달려간 협회에서는 신입회원 명단에 이름을 써넣었을 뿐이었다. 가난한 피폭자들의 이름뿐인 모임이었던 것이다.
  그후 이 여인은 울산의 바닷가로 이사를 했다.
  '큰딸애 직업요? 한동안 병원 청소부로 다녔는데 오래 못 가네요. 목과 눈이 튀어나오고 한동안 갑상선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다녔어요. 올해 서른 셋인데 날 닮았나 봐요. 큰아이뿐 아니라 모두 약해요. 성한 아이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 막내딸은 나 때문에 늘 밤잠을 잘 안 자요. 내가 혹시 숨이 막히지 않았나, 살아 있나, 흔들어보기 위해서지요. 그애의 제일 고약한 증세는 겨울이고 여름이고 겨드랑이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증세예요. 온몸이 항상 습하고 냉한 그애는 엄동설한에도 그 땀 아닌 물 때문에 속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겨드랑이의 맨살이 꽁꽁 얼어붙고 만답니다.

난 그애가 조용해지면 겁이 덜컥 나요. 그러면 여지없이 '엄마 왜 날 낳았어요? '내가 제일 싫고 무서워하는 그 말을 하구 말지요. 아무 대답을 못하는 엄마에게 그앤 다짐하듯 말을 보탠답니다.
  '엄마 따라 갈 거야'
  8월 9일 또 한 개의 원자폭탄이 이번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인구 27만 가운데 2만 4천이 죽고 부상 4만 1천, 행방불명 2천, 기타 피해자 17만 7천을 기록했다.
  두 차례에 걸친 원자폭탄 세례와 소련군의 선전포고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일본은 8월 15이 마침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리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고 전후 세계정세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원폭투하를 감행한 것이다. 7월 16일 뉴멕시코에서 세계 최초로 실험에 성공한 지 한달도 채 못되어서였다. 
  
84.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위해 -국제연합 성립(194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45년/북위 38도선 남북에 미,소 양군 각각 진주. 송진우 피살
  1946년/신탁통치 문제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반탁운동 일어남
  1947년/여운형, 장덕수 피살
 
  1991년 9월 18일 새벽 4시 20분, 현지 시각으로 17일  오후 3시 20분 제46차 유엔 총회는 남북한 동시가입을 표결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3시 10분경 회의가 속개되자 의장은 남북한 가입안을 시작으로 마셜군도, 미크로네시아 그리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 가입안 등을 일괄상정했다. 그는 먼저 제1안건인 남북한 가입안에 대해 찬반여부를 물었다.
  '남북한 가입안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가입심사 과정을 만장일치로 통과했고, 인도를 공동발의 조정국으로 한 120여 개 회원국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
  의장의 설명이 끝나자 회원국 대표들은 일제히 박수로 찬성을 표시했다. 이로써 영문표기에 따라 북한, 정식명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160번째, 남한은 161번째의 유엔 회원국이 되었고, 해방 이래 46년간 남북의 쟁점이 되어온 유엔 가입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국제연합, 약칭 유엔은 국제평화의 유지 및 확립과 사회적 인도적 문화적 제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1945년 설립되었다.
  항구적인 세계평화에 대한 열망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국제평화기구로 발족한 국제연맹이 출발부터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파시즘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자, 좀더 강력한 국제기구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전쟁중 일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8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은 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 8개조로 된 대서양헌장은 영토병합 반대, 침략국에 대한 무장해제, 군비축소 등을 천명했다. 당시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이 대서양헌장은 1942년 1월 29개국이 발표한 연합국선언의 기초가 되고, 이것이 발전, 국제연합이 되었다.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합국을 뜻하는 말로 제안한 United Nations가 그대로 명칭이 되었다.
  그후 1945년 4월 51개국 대표가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국제연합헌장을 채택하고 10월 24일 정식으로 국제연합이 설립되었으며, 46년 1월 제1차 총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국제연합의 조직으로는 전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 국제사법재판소, 사무국과 그밖에 유네스코, 국제노동기구, 국제통화기금, 국제식량농업기구, 국제민간항공기구, 세계보건기구, 군축위원회 등 각종 산하 기구들이 있다.
  총회는 국제연맹의 만장일치제와 달리 과반수 결의를 원칙으로하며, 안전보장이사회는 5개의 상임이사국과 6개의 비상임이사국 총 11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사안에 대해 이를 방지하는 조치를 결정하는데, 필요하면 무력사용도 할 수 있다. 절차상의 문제는 7개국의 찬성에 의해 가결되고 실제적인 사항은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7개국의 찬성이 있어야 가결된다. 그리고 상임이사국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가 있다.
  국제연합 출범 당시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이었으나, 1971년 대만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대표로 상임이사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1991년 9월 18일 제46차 총회에서 남북한을 비롯한 7개국이 새로 가입함에 따라 국제연합 회원국은 166개국이 되었다. 국제연합 본부는 현재 미국 뉴욕에 자리잡고 있다. 
  
85. 불씨 하나가 중원을 불사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194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48년/남한 총선거 실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승만 초대 대통령취임. 제주 4,3사건. 여

  순반란 사건, 1949년/국회프락치 사건. 김구 피살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이 열렸다. 1927년 일단의 청년들이 정강산에 모여 적기를 꽂음으로써 시작된 중국 혁명운동은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성공을 거두었다. 세계인구의 5분의 1이 사는 거대한 나라 중국에 소련에 이어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중국혁명은 수많은 영웅을 낳았다. 모택동, 주덕, 주은래, 팽덕회, 등발, 항영, 임표, 등소평 등등 이들 중 몇몇은 현재도 중국정치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모택동은 1893년 호남성 상담현 소산 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남성은 예로부터 혁명적 전통이 짙은 곳이다. 3남 1녀의 장남인 그는 6살 때부터 농사일을 시작했고, 글을 익히자 곡물장사에 나선 아버지를 도와 장부정리를 맡아 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일상생활에 필요한 유교경전과 주산 같은 것을 배우라고 강요했지만,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상향의 신식학교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16살때이다.
  그는 이 학교에서 중국역사와 세계역사를 배우며 중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호남 혁명군에 가담했다가, 손문이 남경정부를 세운 후 면학에 힘써 호남 제1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그는 스승 양창제의 딸인 양개혜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장사에서 모택동의 여동생과 함께 국민당 군에게 처형당했다.
  모택동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북경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중국공산주의 운동의 창시자이며 중국공산당 창설자인 진독수를 만나고부터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카를 카우츠키의 '계급투쟁'등 공산주의 이론서를 섭렵한 모택동은 1921년 상해에서 열린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고 당원이 되었다.
  1927년 장개석이 4,12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파기하자, 모택동은 호남성으로 돌아와 노동자, 농민부대를 조직, 9월에 추수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하고 모택동은 천여명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가 최초의 소비에트를 수립했다. 정강산은 호나, 강서, 광동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모택동은 이 강서 소비에트에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시행하고 홍군을 길렀다. 그는 정강산의 산적들까지 교화시켜 홍군의 전사가 되게 했다.
  한편 장개석은 '악랄한 홍비'의 보금자리인 강서 소비에트를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홍군은 장개석군의 공격을 피해 소비에트를 안전한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유명한 대장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모택동은 장개석에게 연립정부수립을 제안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사실 중, 일 전쟁으로 이루어진 제2차 국공합작은 이미 와해되어 있었다. 1940년 상해 남쪽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기 위해 이동중인 홍군을 국민당군이 공격, 4천 명의 홍군이 전사한 사건이 일어낫다. 이후 국공합작은 사실상 깨어지고 양군은 항일전선의 주도권을 놓고 공공연히 투쟁을 벌여왔던 것이다.
  장개석은 1946년 11월 국민대회를 열고 신헌법을 제정한 다음 48년 5월 총통이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에게 무기와 물자를 대규모로 지원했다. 그러나 국민당군은 10분의 1밖에 안되는 홍군에게 변변히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민중들이 국민당 아닌 홍군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 홍군은 서주회전에서 국민당 주력군을 무너뜨리고, 이듬해 대만과 티벳을 제외한 중국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1949년 미국은 '중국백서'를 발표, 국민당군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버렸다. 더 이상 장개석을 지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국의 원조를 잃은 국민당은 일시에 무너져 대만으로 도피했다.
  1949년 3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북경에 입성했다. 모택동은 노동자, 농민, 지식인, 민족주의적 부르주아 대표로 구성된 인민정치협상회의를 소집, 중국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미군 중장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1947년 공산당의 승리를 이렇게 예견했다.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의 침범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의 도전을 받은 것이다....이 이념이란, 정부가 정부와 사회의 모든 분야와 계층에서 정치적, 경제적 부패를 도려내고 무능과 안일을 제거하여 민중에게 평등과 사회정의를 제공하고 모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여 개인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토대는 가난한 농민과 민중을 존중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무력으로 이기려 하면 중앙정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오직 정치적,
경제적 개혁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민중의 충성과 열성과 지지를 얻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영국, 소련,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스위스는 이를 승인했으나 미국은 중국 주재 외교관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그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 함께 사회주의 세력의 양대 지주로 국제정치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86. 한민족을 둘로 가른 비극의 전쟁 -6, 25전쟁 발발(195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51년/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1952년/발췌개헌으로 이승만 대통령 재선


  '25일 새벽 4시경, 38선을 경계로 서로 맞대고 있는 옹진, 개성, 동부해안 지구에서 북한군과 한국군 사이에 전투가 개시되었다'
  로이타 통신은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의 시발을 이렇게 보도했다.
  38선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연합군측이 그어놓은 임시 군사분계선이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 이북에 소련군이, 이남에 미군이 각각 진주한 이래 남과 북의 정치상황은 급변했다.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기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3년간은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몹시도 중요한 시기였다.
  전쟁은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동두천, 포천, 의정부를 점령하고 28일 서울시내로 진입했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한강 인도교 폭파를 명령했다.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호언장담하던 이승만 정부는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후가중인 트루먼 대통령을 대신하여 미군의 개입을 결정하고 유엔에 북한을 제소했다. 26일 오전 3시, 현지 시간으로 25일 오후 2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소집되었고, 여기서 28선의 원상회복을 권고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소련은 대만의 중국 대표권 문제로 유엔 참석을 보이코트하고 있었다.
  26일 밤 10시, 일본에 주둔중인 극동사령관 맥아더에게 '즉시 한국에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트루먼은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27일 한국에서 미군 개입 성명서를 발표했다.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미국이 최고 사령부를 구성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엔 창설 이래 최초로 유엔군이 조직되기에 이른 것이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유엔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동원된 유엔군은 공군의 98%, 해군의 83.3%, 지상군의 88%를 미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에게 넘기는 한편 주한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을 인정해주었다.
  한국군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한 채 낙동강까지 후퇴해 있었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28일 서울을 탈환했다. 그리고 북진을 계속, 38선을 넘어 평양, 원산을 점령하고 두만강으로 진격했다.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38선의 원상회복이란 애초의 목표는 북한일대의 석권, 나아가 중국까지 겨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맥아더는 만주 일대를 폭격했다.
  만주폭격이 감행되자, 임표 휘하의 제4야전군을 주력으로 하는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의용군'이라는 이름하에 북한군 복장을 하고 싸웠다.
  유엔군은 북한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1950년 9월말까지 한반도에 쏟아진 폭탄은 9만 7천 톤, 네이팜 탄은 780만 갤론으로 태평양전쟁에서 사용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평양은 건물 두 채만 남기고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으며, 40만에 달하던 인구는 종전 무렵 8만으로 줄어 있었다.
  1951년 6월 24일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가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이승만은 휴전회담 개최를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부르짖었지만, 1951년 7월 10일 유엔군 대표와 북한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휴전회담 본회의가 열렸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미국의 해리슨 소장과 북한의 남일 중장은 적대행쥐 중지, 양군의 접촉선으로 하는 군사분계선 설정, 비무장지대 설치, 휴전 이후의 병력증강 방지, 외국군 철수와 통일방안 모색을 위한 참전 관계국간의 정치회의 개최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한편 그보다 한달 전인 6월 18일 이승만은 부산, 마산, 논산에 수용되어 있는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 휴전회담을 난항에 빠뜨렸다. 이것이 이른바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다. 이는 중립국 감시하의 자유교환이라는 휴전회담의 합의내용을 무시한 행동이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무마시켜 휴전을 받아들이게 하는 대신 몇가지 사항을 약속했다. 즉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미국은 200만 달러를 1회분으로 하는 장기경제원조를 준다, 정치회의가 90일 내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한, 미 양국은 회의참가를 중지한다, 한국군의 증강은 계획대로 진행시킨다, 정치회의 개최 전에 고위급 한, 미 회담을 연다.
  1954년 4월 26일, 휴전협정이 밝힌 대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치회의가 열렸다. 남한대표 변영태 외무장관은 '유엔 감시하의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을, 북한대표 남일은 '남북한 대표로 구성되는 전조선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대표로 참석한 주은래는 '한국전쟁 교전 당사자의 하나인 유엔은 선거감시를 공정히 할 수 없으므로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으며, 한반도는 그 상태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전쟁은 양쪽 군대와 민간인을 합쳐 도합 51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남북을 막론하고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상처는 남북이 각각 안게 된 뿌리깊은 대립과 불신감이었다. 남과 북을 적대국가로 만든 휴전선은 단지 지리적 군사적 분계선만이 아니라, 한민족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차단하는 두꺼운 벽이 되고 말았다. 남과 북은 동족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후 남한 사회를 휘어잡은 흑백논리와 반공 이데올로기, 외세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 민족주체성의 상실 등은 실로 그 연원을 6, 25에 두고 있다.
  
87. 떠오르는 제3세계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개최(195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54년/사사오입 개헌,  1955년/한, 미 잉여농산물 원조협정 조인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이며 아프리카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프란츠파농은 이렇게 말했다.
  '유럽의 복지와 진보는 흑인, 아랍 인, 인도인, 황색 인종의 땀과 시체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 말은 제3세계의 등장 배경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세계역사는 사실 유럽 인에 의해 유럽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에게 아메리카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이며, 인도양 항로의 개척자는 바스코 다 가마이고,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마젤란이다.
  사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아메리카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고, 인도양 항로는 아랍 인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며, 태평양의 무수한 섬들에는 각각 저마다의 문화가 꽃피어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새로 '발견'한 땅이 당연히 자기네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기를 앞세워 깃발을 꽂았다. 원주민의 존재란 이들에겐 거추장스런 방해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용감무쌍한 서부개척사는 바꿔 말하면 아메리카 인디언(그 이름도 유럽 인들이 붙인 것이다)의 멸망사이고, 미국의 번영은 흑인노예의 비인간적인 희생 위에 피어난 꽃이며,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의 부유함은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가혹한 착취의 대가였던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은 그 본질상 이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약 80여 개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이루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유색인종 국가이며 강대국의 지배 아래서 뼈아픈 역사적 경험을 해야했던 나라들이다. 이 신생국들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굳어진 서양 중심의 질서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독점하고 있는 자본과 기술의 도움 없이는 자립은커녕 제대로 국내경제를 운용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과거 종주국이었던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론 독립했지만 경제적, 내용적으론 여전히 예속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대립으로 이른바 냉전시대를 맞았다. 세계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대표로하는 사회주의권으로 양분되었다. 어제의 동맹국이었던 미, 소는 적대국이 되어 세계 곳곳에서 팽팽히 맞섰다.
  그러자 또다시 강대국의 세력다툼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신생국들은 동맹과 단결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것이 제3세계의 등장이다.
  인도의 수상 네루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6, 25전쟁을 보고, 냉전은 결국 세계평화를 위협하리라고 생각하여 '비동맹 중립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즉 국제분쟁은 궁극적으로 강대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므로 신생국은 이러한 분쟁을 없애도록 노력하여 세계평화 유지를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루의 주장은 1954년 '평화 5원칙'으로 구체화되었다. '평화 5원칙'이란 영토 주권의 상호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을 말한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열렸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생국 29개국이 참가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대륙간 회의'였다. 여기서는 평화 5원칙을 토대로 한 '반둥 10원칙'이 채택되었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국제연합에 의한 분쟁 해결 등을 중심으로 하는 '반둥 10원칙'은 이후 신생국들이 국제정치에 임하는 기본철학이 되었다.
  1960년 유고의 티토, 이집트의 나세르, 가나의 엔크루마,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 5개국 수뇌는 국제연합 제15차 총회에 미, 소 양국의 수뇌회담을 요청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했다. 냉전을 지양하고 국제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양국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양국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비동맹 5개국 수뇌들은 따로 수뇌회담을 열기로 했다.
  1961년 마침내 제1회 비동맹 수뇌회담이 유고의 베오그라드에서 열렸다. 회의는 비동맹 회원국의 가입조건을 결정했다. 즉 비동맹과 평화공존에 입각한 독자적 정책, 민족해방운동  무조건 지지, 냉전에 휘말릴 수 있는 어떤 조약이나 동맹, 외국군 주둔, 군사기지 설치의 거부 등의 조건을 갖춘 나라만이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비동맹 운동은 신생국들의 공감을 얻어 그 세력이 급속히 증대했고, 1980년 현재 회원국 수는 120여 개국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제3세계'라는 개념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권을 제1세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을 제2세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들을 제3세계라고 했으나, 점차 경제적 측면이 강조 부각되면서 미국과 소련을 제1세계, 유럽과 일본을 제2세계, 경제적으로 후진인 개발도상국을 제3세계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제3세계의 존재는 선진국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제3세계를 대변하고 나선 중국이 대만 대신 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아랍 어가 국제연합 공용어로 채택되었으며, 국제연합의 다수를 제3세계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88. 아랍의 바다에 둘러싸인 유태인 섬 -제3차 중동전쟁 발발(196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60년/4, 19혁명으로 이승만 하야,

  1961년/박정희, 5, 16쿠데타 일으킴,  1965년/한일조약 비준
  1967년/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작

  1991년 10월 30일 오전 10시 30분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팔라시오  데 오리엔테 궁에서 중동평화회담이 열렸다. 미국과 소련이 주선한 이 회담에는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6개국으로 구성된 걸프 협력협의회 대표가 모여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해묵은 문제들을 토의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한 이래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주변 지역을 점령, 영토를 확대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때 빼앗은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이다.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은 이곳에 거주하는 17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자치 또는 독립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분쟁은 그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두 민족은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총인구 50만 가운데 유태인은 2만 5천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들었다.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말하는데, 유태인들이 신성시하는 예루살렘의 산 시온에서 따온 말이다.
  1896년 빈의 유태인 언론인 헤르즐은 (유태인 국가)라는 책을 집필,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따로 독립국가를 세우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시오니즘의 출발이다. 유태인들은 어디다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울 것인지 찾던 끝에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당 가나안'이야말로 유태국가를 세울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다.
  1915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영국은 (맥마흔 서한)을 발표했다. 아랍이 전쟁에 협력하면 전후 팔레스타인을 아랍 인에게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터키는 독일 편에 가담하여 영국과 싸우고 있었다. 이에 '메카의 수호자'후세인은 영국인 로렌스의 도움을 받아 터키군을 무너뜨렸다.
  그런데 1917년 영국 외상 발포어는 미국 내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참전시키려는 목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발포어 선언을 이행하려 했다. 유태인들은 영국의 비호하에 이민을 계속, 1936년에는 총인구의 28%를 차지하게끔 되었다. 이들은 우수한 기술과 자본으로 정착촌을 건설하고 협동조합과 각종 산업시설을 갖추었다. 과격한 일부 시오니스트들은 비밀리에 군대를 길렀다.
  독립의 꿈이 무산된 아랍 인들은 시오니스트와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테러와 파업, 시위가 잇달았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할, 유태인과 아랍 인이 각각 독립국가를 세우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그  제안을 거부했다.
  1945년 3월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아랍국가들은 아랍연맹을 결성, 이스라엘에 대항키로 했다. 이에 영국은 문제를 국제연합으로 넘기고, 철수를 선언해버렸다.
  영국군이 철수하기 전에 좀더 넓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8년 5월 15일 영국은 마침내 철수했다. 같은 날,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 벤 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한 아랍은 아랍해방군을 조직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100여 만에 달하는 아랍 인들은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었다. 이들에게 이스라엘은 수많은 동족을 살던 땅에서 몰아낸 침략자요, 제국주의의 첨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이스라엘이 삼면을 포위한 아랍국가들 속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내 유태인들이 보내는 성금과 미국정부의 차관 덕분이었다. 더욱이 미국은 이스라엘을 아랍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교두보로 삼아 적극 지원했다. 때문에 이후 아랍의 반이스라엘 투쟁은 자연스럽게 반미투쟁으로 전화되었다.
  1964년 5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결성되었다. 아랍 연맹은 이를 팔레스타인의 유엔 대표로 인정했다.
  이스라엘과 그를 전폭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테러, 그에 대항하는 이스라엘 군과 민병대의 보복학살, 75년부터 계속되어온 레바논 내전 등으로 얼룩진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으로 변한지 오래이다. 이 모든 중동사태의 밑바닥에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항하는 아랍 민족주의가 면면히 흐느고 있다.
  1974년 11월 13일 게릴라 복장을 한 피엘오의장 아라파트가 유엔총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투쟁목표는 유태인 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종차별적 시온주의와 노골적인 침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혁명은 인간으로서의 유태인을 위한 혁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유태교와 시온주의를 구별합니다. 우리는 시온주의적 식민주의의 책동에 반대하지만 유태교의 신앙은 존중할 것입니다...나는 미국 국민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다시 묻노니, 팔레스타인 인민이 당신들에게 저지른 범죄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나는 미국과 아랍 세계 전체의 진정한 우호관계가 보다 새롭고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알아 주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89. 우주시대의 개막 -아폴로 11호, 달 착륙(196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68년/1,21사건 발발, 김신조 생포.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9년/3선개헌안, 국민투표로 가결
 
  1969년 7월 16일 오전 9시 32분, 아폴로 11호가 미국의 케이프 케네디 기지를 출발했다. 1주일 후인 21일 오전 2시 47분, 아폴로 11호에서 달 착륙선이 떨어져나왔다. 닐 암스트롱 선장과 조종사 올드린이 탄 착륙선은 오전 5시 17분 19초 달 표면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암스트롱이 사다리를 내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달 표면에 왼발을 내디뎠다.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이들이 내린 '고요의 바다'에는 막 떠오른 태양이 강렬한 빛을 내리비추고 있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겐 작은 일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비약이다.'
  암스트롱은 달을 밟은 첫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주에 인간이 만든 인공위성을 맨처음 쏘아올린 나라는 소련이다. 1957년 10월 4일, 무게 83.6kg의 스푸트니크 1호는 타원형을 그리며 지구궤도를 도는 데 성공했다. 한달 후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생물이 견딜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1958년 1월 31일 미국도 최초의 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올렸다.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고 돌아온 동물은 두 마리의 개다. 1960년 8월 19일 소련은 스트레르카, 베르카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를 실은 우주선을 발사했다. 이 우주선은 지구를 18바퀴 돈 다음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 실험은 인간이 지구밖을 여행한 다음 지구로 귀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우주시대의 개막을 한층 앞당겼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공간을 여행한 인간이 탄생했다. 그는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다. 가가린1961년 4월 12일,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를 한바퀴 돈 다음 무사히 귀환했다. 같은 해 8월 보스토크 2호는 치토프 소령을 태우고 지구를 17바퀴 돌았다.
  미국도 뒤질세라 '머큐리 계획'에 의해 인간의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두 나라는 우주시대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한편 인류의 오랜 꿈인 '달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959년 가을, 소련은 루니크 2호를 달에 명중시켰다. 그리고 10월 4일 발사된 루니크 3호는 달의 뒷면 사진을 찍어 영원한 수수께끼였던 달의 뒷면을 인간에게 보여주었다. 1966년 1월 루니크 9호가 달의 '폭풍의 바다'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잇달아 미국의 서베이어 1호도 달에 착륙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마침내 1968년 12월 세 사람의 비행사를 태운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아폴로 11호가 인간을 달에 내려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달에 갔다온 인간은 이번엔 인간이 과연 우주에서 살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1년 6월 소련은 세 사람의 승무원을 실은 살류트 1호를  발사했다. 살류트 1호는 23일간 우주에 머물렀지만, 세 사람 모두 숨진 채로 돌아오고 말았다.
  1973년 5월 이번엔 미국이 최초의 우주정거장 스카이랩을 발사했다. 스카이랩은 작업실, 공기저장실, 도킹실, 태양 망원경대, 사령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침실, 식탁, 샤워실, 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변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빨아내는 장치를 사용했다. 물과 음료수ㅡ70여 가지의 식품이 골고루 비치되었고, 일과가 끝나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휴식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스카이랩 계획이 성공리에 끝나자, 미국은 스페이스 셔틀 즉 우주왕복선 계획에 착수했다. 1981년 4월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에 이어 챌린저 호, 디스커버리 호, 어틀랜티스 호 등이 차례로 발사되었다. 그런데 1986년 1월 28일, 유인 우주왕복선 챌리저호가 발사 후 73초 만에 16km 상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 계획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지구 궤도에는 약 4,500개의 비행물체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통신이나 기상관측 위성 같은 실용목적의 위성뿐 아니라 군사 목적의 위성들이 상당수 있다.
  1983년 3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의 전략 유도탄이 목표물에 도달하기 전에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개발, 즉  전략방위구상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인공위성으로 미사일을 감지하여 공격위성이나 지상에서 레이저 광선 혹은 입자 빔을 쏘아 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공상과학영화 '스타워즈'가 현실화된다는 뜻이다.
  다가올 우주시대가 인류에게 희망과 평화를 안겨줄 것인지, 아니면 지상에서 일어났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전쟁과 파괴를 가져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시대를 독점하려는 소수가 있는 한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는 우주공간에서도 계속되리라는 사실이다.


90. 상처입은 거인-베트남 전쟁 종결(1975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1970년/경부고속도로 개통, 1972년/7,4남북공동성명 발표.10월유신
  1975년 4월 23일 미국의 포드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11년 전 통킹 만 사건으로 시작된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어 4월 26일 베트콩은 사이공 총공격을 개시했다. 사이공을 함락한 베트콩은 남북 베트남 총선거를 실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1964년 7월 30일 발, 미 해군은 북베트남의 영토인 통킹 만에 있는 두 섬을 공격했다. 북베트남은 이 같은 사실을 즉각 비난하고 나섰지만, 미군은 이를 허위조작이라고 역공했다. 사흘 후인 8월 2일 밤 미국의 구축함대가 통킹 만에 접근해 들어왔다. 북베트남은 이를 공격했다. 그러자 8월 4일 오전, 미국 대통령 존슨은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다.
  북베트남 통킹 만 밖 공해상을 순찰중이던 미 구축함 매독스 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항공모함 탑재기가 반격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통킹 만 사건 이다. 다음날 미 공군은 북베트남의 어뢰정 기지와 석유 저장소 4개 지역을 폭격하고 선박 25척을 격침시켰다. 존슨은 의회에 전쟁권 부여를 요청했고, 의회는 이를 가결시켰다. 이로써 미국과 베트남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베트남의 근대사는 매우 험난하다. 1883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병합, 인도차이나반도의 절반 이상을 손에 놓고 냉혹한 지배정책을 실시했다. 베트남 인들은 의병운동, 게릴라전 등을 펼치며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에 대항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호지명이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19살에 선원이 되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후 1918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했으며, 1924년 중국 광동으로 가 국공합작을 지도하던 러시아인 보로딘의 비서가 되었다. 그곳에서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내로 들여보내던 그는 국공합작이 깨지자 모스크바로 갔다. 그리고 1930년 2월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베트남에는 새로운 지배자 일본이 나타났다. 베트남은 이제 일본과 프랑스 두 제국주의 국가와 싸워야 했다. 공산당은 각계각층의 혁명세력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모으기 위해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조직했다. 독립을 얻지 못하면 민족 전체가 노예가 되어 나라도 계급적 이익도 영원히 잃게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베트민은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8월 13일 일제히 봉기하여, 1945년 9월 2일 호지명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를 8월 혁명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 다시 돌아온 것은 프랑스였다. 연합군은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에서 남북으로 분할하여 북엔 장개석군이, 남엔 영국군이 진주하도록 결정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영국을 따라 들어와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베트민을 진압했다. 북의 장개석군은 일찌감치 손을 뗐다.
  베트민은 다시 항전을 개시했다. 베트민은 1954년 봄, 디엔 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궤멸시켰다. 프랑스는 휴전협정을 맺고 17도선 이남에서의 총선거 실시를 약속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총선거 시한을 3개월 앞두고 철수해버린 것이다. 전국적 총선거는 무산되고, 17도선 이남에는 베트남 공화국이 들어섰다. 원수가 된 고 딘 디엠은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잠정적인 군사 분계선이었던 17도선은 국경선이 되었고 베트남은 남북으로 양단되었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수천 명의 장교를 파견하고 대규모 군사시설을 지었다.
  디엠 정권의 전횡과 탄압, 무능, 부패는 남베트남 인들을 다시 저항의 길로 내몰았다. 이들을 디엠과 미국은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이라 불렀지만, 처음부터 이들이 공산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1960년 남베트남의 혁명세력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해방전선은 지지기반을 확대하여 심지어는 디엠 정부의 고위 공무원과 그 군대에도 상당수의 협력자를 갖게 되었다. 미국은 베트남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주둔병력을 계속 증강시키고 나아가 통킹 만 사건을 조작, 전면전을 시작했다.
  초강대국 미국과 베트남의 싸움은 당연히 미국의 승리로 예견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미국을 실컷 괴롭히고 공포에 떨게 한 다음 마침내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 무기는 첫째 교묘한 유격전술, 둘째 대중을 겨냥한 정치투쟁, 셋째 남베트남 군에 대한 설득공작이었다.
  해방전선은 신출귀몰하게 이동하면서 전후방도 없이 기습공격을 벌여 미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한편, 정글 속에 소형 레이더와 대공화기를 숨겨두고 미군의 최신예 전투기를 격추시켰다. 남베트남 병사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총부리를 돌리는 일이 허다했다. 막대한 군수물자가
투입되고 애국심에 넘치는 미국 젊은이들이 베트남 정글에서 목숨을 바쳤지만 미군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고립되었다. 식수는 필리핀에서 공수해오고 음식은 통조림만 먹어야 했다. 베트남인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3년 2월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은 지칠 대로 지쳐서 아시아의 일개 후진 민족과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상처를 입고 물러갔다. 참전했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목숨을 걸었던 전쟁의 의미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번민에 빠졌다. 미국이 하는 일은 무어든 정당하며 또 승리한다는 미국의 우월감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100여 년에 걸쳐 프랑스, 일본, 미국과 차례로 싸워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운 베트남, 세계 역사상 이들처럼 강대국과 맞서 끈질긴 싸움을 벌인 예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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