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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항로 도전기 3. 프로비셔의 실패

구름위 2013. 6. 1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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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프로비셔

마틴 프로비셔(Martin Frobisher 프로비서 아님)는 잉글랜드 웨이크필드 출신으로 5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아프리카의 기니만 무역선에서 항해술을 배웠다. 영국 해협을 근거지로 플로렌스 지방과 오가는 에스파냐 운송선단을 습격하는 해적행위를 통해 프로비셔는 용감하고 노련한 뱃사람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일찍부터 북방항로 탐사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1576년 멕코비 회사의 자금 지원을 통해 20~25톤급 선박 가브리엘 호와 미카엘 호와 10톤급 핀네스 한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하는데 성공, 6월 엘리자베스 여왕을 알현한 후 북미대륙의 북동부를 통해 카타이로 통하는 북서항로를 찾아나섰다.

영국 최고의 두뇌진이 제시한 낙관적 견해에 고무되기는 했지만 탐험대의 항로는 험난해서 그린란드 남쪽에서 폭풍을 만나 핀네스는 침몰했고 미카엘 호는 함대를 이탈해 버렸다. 하지만 프로비셔는 가브리엘 호 단독으로 항해를 계속해 오늘날 허드슨 해협 입구에 있는 리졸루션 섬 앞을 지나 카타이로 통하는 해로로 알려져 있는 아니안 해협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

그는 이 수로에 프로비셔 해협(지금의 프로비셔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얼음으로 막혀있는 북쪽대신 서쪽으로 항해를 해 8월 18일에는 배핀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탐험대는 에스키모들과 교역을 하려고 했지만 그가 만난 원주민들은 비우호적이라 이들과 싸우는 중에 5명의 선원과 대형 보트 1척이 나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프로비셔는 배에 접근하는 이누이트 한명을 완력으로 들어올려 생포하고는 영국으로 귀환한다. 그는 남은 선원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누이트 전승에 의하면 이들 중 한명은 살아남아 몇년후 직접 만든 보트로 동쪽을 향해 떠났다고 한다.

10월 9일, 런던으로 귀환한 프로비셔는 이누이트 한명과 금이 함유된 것으로 보이는 검은 돌을 가져왔는데 이 "선물"들은 많은 투자자들에게 희망적인 관측을 가져왔다. 붙잡혀온 이누이트족은 "머리털이 검고 얼굴이 넓적하며 코가 납작해서 타타르인과 비슷"했는데, 타타르 인은 중국 근처에 산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프로비셔가 발견한 새 해협이 카타이로 이어지는 바다의 입구라는 근거로 충분해 보였다. 게다가 프로비셔가 제시한, 검은 돌도 후원자들에게 많은 기대감을 불러왔지만 나중에 이것은 가짜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덕분에 프로비셔는 이후에 1577년과 1578년에 있은 다음번 탐험에서 쉽게 후원자를 얻을 수 있었다. 두번째 항해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1천파운드나 지원금을 제공했고 약 150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탐험대가 파견되었다. 이 항해에는 16세기에 신대륙 원주민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남긴 영국화가 존 화이트도 승선하여 베핀섬에서 프로비셔가 베핀 섬 주변에서 데려온 이누이트 원주민 모자를 그린 그림을 남겼다. 하지만 두번째 탐험은 규모에 비해서 성과는 미미했다.

다시 영국으로 귀환한 프로비셔는 어렵지 않게 지원을 얻어내어 세번째 항해에 나섰지만 프로비셔는 이번에도 과거에 진출했던 지역보다 더 진출하지 못했고 마지막 항해에서는 유감스럽게도 항로보다는 금을 찾아다녔지만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프로비셔는 이 마지막 탐험 항해에서 훗날 많은 탐험가들을 괴롭히게 될 묘한 관측을 기록한다. 그는 캐나다 근처의 섬들과 빙산 사이를 항해던 중, 70년 전에 세바스티앙 가보트가 처음 목격했던 큰 만을 다시 발견했고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찾고있었던 "카타이로 통하는 해로"라고 생각했다. 이렇게해서 "재발견된" 허드슨 만은 북동항로의 탐험가들을 혼란시켰던 카라해처럼 북서항로를 찾는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미궁이 된다.

프로비셔는 1580년 부터는 탐험활동을 중단하고 에스파냐와의 대립양상이 심해지는 중에 영국해군에 편입되어 모험보다는 전투에 재능이 있음을 입증했다. 1594년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전사한 프로비셔는 훌륭한 군인이거나, 또는 숙련된 해적으로써의 자질이 있었고 용기있는 항해사였지만 탐험항해보다는 전쟁에 적합한 인물로, 현지인들과의 교섭에 실패하여 소모적인 전투를 치르느라 북서항로의 탐험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그의 실패로 북서항로 투자자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게되면서 북서항로 탐사의 열기는 급격히 시들게 된다.

 

거듭되는 실패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파산했고 탐색의 열기는 식었지만 북방을 통해 카타이로 향하려는 항로 탐색의 의지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그때까지 볼가강 유역을 통해 러시아의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오던 동방물자가 차단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북방항로 탐사에 도전해야할 새로운 필요성이 생겨나자 이번에는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1580년부터 재개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북동항로 탐험대는 당시로서는 만전을 기해서 준비되었다. 우선 스테판 버로우가 재차 호출되었으며 존 디는 북방항로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의논할 자세를 보이면서 북아시아의 어떤 해안도 노르웨이의 노드 곶보다 북쪽에 있지 않다고 보장한 것은 관계자들에게는 이론적인 보증수표였다. 일찌기 윌로우비와 버로우가 북위 71도의 노드 곶을 통과했었으므로 그 이상 항해하기 힘든 곳이 없다면 거리의 문제일뿐, 불가능한 항로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유럽 최고의 지리학자였던 게르하르트 메르카토르도 "동방항로를 통한 카타이 항해는 의심할 바 없이 용이하며 거리상으로도 가깝다"라고 찬성의견을 표시했다.1

이리하여 많은 준비를 갖춘 엄선된 탐험대를 이끌고 북동항로 탐사에 나선 것은 아서 페트와 찰스 잭맨이었다. 그들은 "버로우의 해도를 참고해서 카라해를 통과할 때까지 전진하고 다음에는 전설적인 타빈 곶을 우회하여 측량하면서 전진"하라는 상세한 지시를 받고 있었으며 디는 이렇게 항해할 경우 1개월도 안 걸려서 카타이의 수도나 북중국의 항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당대의 명망가들의 보증과 지지를 받아 성대한 출발연을 벌인 탐험대는 용기백배해서 5월 30일 울위치 항을 출발했지만 이론과 실제는 달랐다. 예상과 달리 탐험대는 1개월은 커녕 3개월이 지난 8월에 들어서도 카라 해에서 얼음과 절망적인 싸움을 벌여야 했다. 결국 북해의 끔찍한 빙산들과 태풍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잭맨의 탐험대는 노르웨이 해안 앞바다에서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고 페트는 빈사상태에 처한 선원들과 폭풍에 시달린 끝에 구사일생으로 영국에 돌아왔다.

이 실패의 파장은 심각했다. 무엇보다 실패가 반복되자 기회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지리학적 발견의 유용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동시기, 존 호킨스나 프랜시스 드레이크같은 유명한 사략해적의 대성공도 이런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원래는 테라 오스트랄리스-남방대륙의 탐험이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1577년 항해목적이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과 국무대신 프랜시스 월싱검의 계산에 의해 항해의 목적은 출발직전에 사략활동으로 변경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가능하다면 아니안 해협을 통해 북미해안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아니안 해협

북서항로의 도전은 대부분 유럽과 북미동해안에서 서쪽으로 진행되었지만 역으로 서쪽에서 북서항로를 찾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일찌기 1539년 멕시코를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프란시스코 데 우욜라(Francisco de Ulloa)를 파견해 북미 서해안을 탐험하게 했다. 우욜라는 아카풀코를 출항하여 태평양 연안을 따라 북상해 켈리포니아만 깊숙히가지 진행했지만 출구를 찾지는 못했다. 이는 당시의 통설과 달리 캘리포니아가 섬이 아니라 반도라는 증거였지만 오히려 캘리포니아 만이야말로 북미동안의 세인트로렌스 만에서 아니안 해협을 통해 이어지는 항로의 남단이라는 견해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니안 해협(Strait of Anian)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등장하는 중국지명 아니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이 해협은 이탈리아의 지도제작자 지아코모 가스탈디(Giacomo Gastaldi)가 1562 발행한 지도에서 등장하기 시작해 5년후 보로니니 자루티에리 (Bolognini Zaltieri)가 발행한 지도에는 아시아와 미국 사이에 좁고 구불구불한 상상의 해협이 그려져 있었다. 유럽인들은 점점 상상속의 해협을 키워나가 중국과 유럽을 잇는 직통항로로 그려져 북서항로를 탐험하는 사람들은 샌디애고 부근의 위도에 있다고 알려진 이 항로를 찾는데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월싱검은 1570년,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하려한 음모를 적발해 이른바 리틀리 사건을 해결하는데 공을 세우며 여왕의 총신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사를 거치며 1577년에 귀족 칭호(Sir)를 수여받은 월싱검은 도버항구를 재건하는 한편 북서항로 탐험의 지원자가 된다.

현대적 첩보개념의 선구자로도 유명한 그는 스페인 전쟁을 준비하면서 그 일환으로 후원하고 있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통해 에스파냐 상선대의 약탈 작전을 세운다.

존 홉킨스 밑에서 경력을 쌓아올린 경험많은 해적이며 노련한 항해자인 드레이크는 방비가 부족한 페루연안에서 에스파냐 상선대를 마음껏 약탈하고는 북쪽으로 향해 캘리포니아를 거쳐 아니안 해협의 서쪽 출구를 찾아나섰다. 북미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벵쿠버 근처까지 접근한 드레이크는 그 지역에서 해안선이 북동방면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북서방향으로만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탐험을 중지한 다음, 진로를 바꾸어 남하해서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 근처를 "뉴 알비온"이라고 명명한다. 이후에 추적함대를 피해 태평양 횡단을 횡단, 서쪽으로 지구를 일주하고 영국의 플리머스 항으로 귀환 거국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몰루카 제도를 거쳐 귀환한 드레이크는 이로써 마젤란에 이어 역사상 두번째로 세계일주를 달성했으며 그가 가져온 보물은 약 30만 파운드 이상으로 당시 잉글랜드의 연수입보다도 많았다.

드레이크의 탐험으로 아니안 해협의 실체는 더더욱 불분명해졌지만 그의 해적활동으로 얻은 이익은 실망감을 상쇄하고도 남았으며 위험으로 가득한 모험항해보다 손쉬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잉글랜드에서 북방항로 탐사의 열의는 서서히 식어갔다.

북서항로를 찾아서

러시아의 세미욘 데지노프는 1648년에 동시베리아의 콜리마 강 하구에서 북극해를 거쳐 캄차카 반도 동쪾으로 향하는 항해를 통해 알래스카와 유라시아가 바다로 갈라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이 기록은 19세기 후반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1762년 영국의 무역선 옥타비우스(Octavius)호는 서쪽에서 북서항로를 통과하기 위해 베링해협을 통과했으나 실종되었고 13년뒤인 1775년, 그린란드 근해에서 포경선 헤럴드 호(Herald)가 표류중이던 옥타비우스 호를 발견하여 갑판밑에서 얼어죽은 선원들의 시신을 발견하여 서양선박으로서는 최초로 북서항로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통과했다. 이런 단편적인 기록들은 있었짐나 여전히 북방항로는 오리무중이었다.

남미 전역을 장악하고 마닐라와 태평양을 횡단하는 선단을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스페인은 18세기 후반에 멕시코를 거점으로 이따금씩 북서항로 발견을 위해 북미대륙 서해안을 탐험했다. 1775년부터 1779년까지 후안 프란시스코 데 보데가 이 콰드라(Juan Francisco de la Bodega y Quadra)는 서해안을 탐사해 상세한 조사를 실시했고 그의 자료는 나중에 제임스 쿡이 북미 서해안을 탐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었다. 1791년에는 알레산드로 마라스피나(Alessandro Malaspina)가 알래스카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항로의 입구로 소문이 나있는 야쿠타트 만(Yakutat Bay)에 이르렀고, 1790년에 프란시스코 데 에리사(Francisco de Eliza) 도 북서항로의 입구로 알려져 있던 후안 데 후카 해협을 항해하고 조지아 해협을 발견하였으나 북서항로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져갔다.

  1. 현실적으로 북위 71도에 있는 노르웨이의 노드 곶을 지난다 해도 북위 78도상의 타밀 반도를 지나야만 하고 이 항로는 만년빙의 외연에 해당되어 범선이 헤쳐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