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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항로 도전기 4. 허드슨의 비극

구름위 2013. 6. 1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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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스

존 데이비스

드레이크의 북미대륙 서해안 조사와 프로비셔의 실패로 북서항로 발견의 가능성은 희미해졌지만, 포기하지 않은 일부 영국 상인들은 북서 항로의 단서를 더듬어나갈 유능한 항해자를 찾았다.

유능한 항해자로 정평이 나있던 존 데이비스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쉽게 실망하거나 개인적인 욕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북서항로를 탐사해 나갔다. 1585년의 첫 항해에서는 폭풍때문에 배를 돌려야 했지만 프로비셔가 조사했던 지역보다 훨씬 북쪽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컴벌랜드 해협을 발견했다. 다음해의 2차 항해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1587년의 세번째 항해에서 데이비스는 그린란드를 거쳐 베핀 만까지 진출했고 그때까지의 항해가들 중 가장 높은 위도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이 세번째 항해에서 그는 "73도까지 가서 바다가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육지와 바다 사이의 거리는 40리이그로, 통로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 희망적 관측을 남겼지만 다음 항해준비가 갖추어졌을 때, 데이비스는 불귀의 객이 되어 있었다.

데이비스는 북서항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희망어린 관측을 했지만 이렇게 성과없이 실패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탐험을 계속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정신이 그러했듯, 불가능하고 가망없어 보이는 일에 희망을 걸고 도전하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허드슨

아들과 버려진 허드슨

헨리 허드슨은 1607년 모스크바 회사[각주:1]의 의뢰를 받아 북동항로를 찾아서 북극해를 항해한 끝에 북극점에서 1,069km 남쪽까지 도달했지만 영국부빙계의 한계를 만나 돌아왔다. 이듬해에 다시 북동항로에 도전한 허드슨은 노바야젬라를 탐사했으나 역시 부빙계의 한계계를 넘을 수 없었다.

1609년에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고용되어 델러웨어 만이나 알바니에 이르는 허드슨 강 일대를 탐험했지만, 태평양으로 통하는 항로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모험을 통해 모히칸족을 비롯한 몇몇 원주민 부족들과 교역을 해서 조개나 수달의 고급모피들을 얻을 수 있어 나중에 네덜란드는 이 지역에 뉴암스텔담을 건설한다.

1610년, 허드슨은 버지니아 회사와 영국 동인도회사의 출자를 얻어 4번째 항해를 시작했다. 탐험대는 디스커버리호 1척으로 구성된 단촐한 규모였지만 북쪽으로 항해해서 5월에는 아이슬랜드에 도착했고 6월에는 그린랜드 서쪽을 돌아나와 북미해안에 도착했다. 7월 25일에는 허드슨 해협을 통해 레브라도 북단을 통과했고 8월 2일 이후에 자신의 이름이 붙게될, 남쪽에서 서쪽으로 펼쳐진 대해원을 발견했다.

그는 태평양이 손에 닿을 만큼 가깝다고 생각했고 일대의 지도를 작성해 나갔지만 허드슨 만을 남하하던 도중 11월이 되자 얼음은 두꺼워져 그의 항해는 제임스만에서 막혀버렸다. 불행히도?캐나다 북부의 혹독한 겨울을 나던 중 식량 배급 문제로 선원들과 갈등하게 된 허드슨은 부하들과의 불화를 빚게 되었다. 이듬해 봄에 해빙기가 도래해 항해를 재개했지만 6월이 되자 승무원은 반란을 일으켰다. 배를 장악한 선원들은 허드슨에게 충실한 5명의 선원들과 16살난 아들을 보트에 태워서 빙산 사이를 끌고 다니다가 밧줄을 끊어버렸고 그후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각주:2]?이후 본대는 남하했지만 본대는 인디언들과의 싸움에 말려들어 대부분 전사하고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살아남아 간신히 영국에 돌아왔다. 그들의 반란죄는 명백했지만 그들만이 미래의 항로를 조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수형은 모면되었고 이들은 다음번 탐험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허드슨의 탐사

?항해로 허드슨만의 남단에서 동방으로는 갈 수 없음이 입증되었지만 아직도 북서항로가 허드슨 만의 서쪽에 있을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켄터베리 대승정은 3인의 반란자를 포함한 300여명의 투자자를 중심으로 비상한 열의를 갖고 북서항로 회사를 설립하여 계속적으로 북서항로의 탐사를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초인적인 고집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원정대를 파견해서 허드슨 만을 탐색해 나갔다. 15년간에 걸쳐서 북방항로를 계속 조사했고 1631년에는 루크 폭스와 토머스 제임스가 북서항로 발견을 노린 최후의 시도를 감행했으며 지만, 끝끝내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거듭되는 탐사로 북부 레브라도, 베핀섬, 허드슨 만 북부의 섬들이 차례대로 해도에 기재되어 캐나다 북부에 대한 지식은 늘었지만 끝끝내 북서항로는 발견되지 않았다.

 

바렌츠의 모험

네덜란드의 탐험

17세기의 지도

영국인들은 거듭되는 실패로 북방항로 탐사에서 손을 떼었지만 1588년 에스파냐에서 독립한 네덜란드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동방으로 통하는 새로운 항로를 찾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북방항로도 그 후보중의 하나였다. 1594년과 1595년, 네덜란드 의회는 "메소포타미아와 타타르(오늘날의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지역)? 북부를 따라가는 탐험여행"을 시도하게 된다.

1차 항해에서는 탐험대는 오렌지 군도 일대를 탐사했으며 바다코끼리 떼를 발견하여 상아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고무되었지만 북극곰을 만나 생포하려다가 탐험대원 일부가 사망했다. 원하던 목적달성에는 살패했지만 몇가지 새로운 발견에 고무된 네덜란드는 다시금 카타이와의 무역을 희망하면서 탐험대를 파견했다. 불행히도 두번째 탐험대는 악천후를 만나 새로운 발견은 거의 못했고 또다시 북극곰에게 인명피해를 입었다. 거듭되는 실패로 네덜란드 의회는 북방항로 탐색 의지를 단념했지만 두번의 항해에 참가했던 네덜란드의 위대한 항해자 윌렘 바렌츠는 항로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렌츠의 모험

1596년 바렌츠는 모든 것을 걸고 시도한 마지막 탐험에 나선다. 그의 탐험대는 그때까지의 어떤 유럽인보다 북쪽으로 전진하여 노바야젬랴를 지나 스피츠베르겐 섬까지 진출했고 그곳에서 나무와 풀이 자라는 땅을 발견했다. 이 지역을 조사한 바렌츠는 동쪽으로 더 전진했으나 밀려드는 얼음에 둘러쌓이게 되어 그해 8월 26일 결국 배는 얼음위에 좌초했다.

탐험대는 자신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희망도 불분명한 상태로 노바야젬랴 동안의 황량한 만에서 기나긴 북극권의 겨울을 지내야만 했다.?바렌츠와 승무원들은 떠다니는 나무들을 모아 집을 지었고 사로잡은 북극곰을 얼려서 굳어버린 다리로 곰을 세우고 집의 파수로 삼았다. 북극권의 겨울이 닥치가 밤이 계속되었고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바렌츠의 죽음

북극권의 혹독한 겨울을 지내는 생활은 가혹했다. 계속 쌓인 눈은 문을 뒤덮어 버렸고 선원들은 차례차례 괴혈병과 영양실조로 쓰러져 갔다. 생존자들은 목숨을 걸고 사냥에 나서 26마리의 북극여우와 3마리의 북극곰을 잡아 간신히 목숨을 이어갔고 끝끝내 바렌츠와 탐험대원들은 이듬해 여름까지 살아남았다. 이듬해 봄이 지나고 6월, 북극권의 짧은 여름이 오자 바렌츠의 탐험대는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지난 겨울에 좌초되었던 배로 돌아갔다. 겨우내 얼음에 갇혀있던 배는 밑바닥이 파손되어서 더이상 항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천만 다행으로 6개월 전 안전하게 보관해두었던 4m 길이의 보트 2척은 무사했다.

탐험대는 이 작은 보트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하고 타고온 선박을 해체해서 일부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보트를 수리해 용골을 강화하는데 사용했다. 그 동안에도 약해진 육체로 북극곰과 싸우며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린 끝에 최후까지 살아남은 선원 14명은 갑판이 없는 보트 2척에 의존해서 6월 13일, 모든것을 운명에 맡기고 노바야젬랴를 떠났다.?바렌츠는 출발에 앞서 만약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지 못할때를 대비해서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을 적은 노트를 겨울을 지낸 그들의 피난처에 남겼다.?

바렌츠 본인은 항해도중에 육체의 쇠약을 견디지 못했고 다른 승무원 한명과 노바야젬랴 해안에서 죽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다른 이들에게 주의해야할 점들을 일어주었다. 그의 탐험대원들은 표류하던 중 러시아 배에 구출되어 구사일생으로 그해 11월 1일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북방항로 탐험은 더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다.

모험의 뒷이야기

그로부터 300년 후, 노르웨이의 바다표범 사냥꾼인 엘링 칼센 선장은 우연히 이 네덜란드인들이 겨울을 보낸 피난처를 우연히 찾아 바렌츠가 남긴 노트를 발견했다. 그의 노트에는 항해 중 일어났던 일들이 담담한 필체로 세부사항까지 잘 기록되어 있었고, 자신들이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적어두었다고 적혀 있었다.

"우리가 고향을 다시 보는 것을 신이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중에 우리의 잔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캐나다 북부의 탐험을 통해 북서항로를 찾으려고 하거나,?러시아 북부를 통과해 북동항로를 찾으려는 시도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1631년에는 루크 폭스와 토머스 제임스가 북서항로를 탐사했고 러시아도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을 찾아 탐험대를 파견했다.

비투스 베링

베링해협

1725년 덴마크 출신의 위대한 러시아 탐험가 비투스 베링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을 받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육로로 시베리아를 횡단, 2년간의 여정을 거쳐 캄차카 반도의 오호츠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선박을 건조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과 북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하여 수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1730년 페테르스부르크로 귀환한다.?

1733년 베링은 쿠릴열도의 지도작성과 일본과의 항로등을 탐사하기 위해?두번째 탐험에 나선다. 야크츠크에서 머문 3년간을 포함해 7년에 걸친 고된 여정 끝에 오호츠크에 도착한 베링은 그곳에서 성표트르호와 성파벨호, 2척의 배를 건조해 캄챠카 반도를 탐사하고 동해안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캄챠키를 거쳐 북미대륙을 향하던 중 안개속에서 헤메다가 알류샨 열도를 발견했지만 북극권의 험난한 환경에서 시달린 끝에 배는 난파했고 선박의 잔해를 모아 선원의 일부만이 간신히 귀환할 수 있었다.

비록 탐험대장 베링은 죽었지만 그의 탐험대는 베링해협과 베링섬을 발견했고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북부의 생태계를 세밀하게 조사했으며 유라시아 대륙과 북미대륙이 육로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로써 현실성은 둘째치고 극지방의 항로를 통해서 항해하는 자체는 이론적으로 가능할 가능성이 보다 높아졌다.

증기선 시대

무수한 실패만을 남기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가던 북방항로는 증기선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바렌츠의 항해에서 282년이 지난?1878년에 스웨덴 출신의 닐스 아돌프 에릭 노르덴쇨드 남작은(Adolf Erik Nordenskiold)증기선 베가호를 타고 스톡홀름에서 예테보리를 거쳐 북동항로를 통해 일본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출항했다. 베링해에서 유빙에 갇혀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이듬해 7월에 유빙을 벗어난 베가호는 1879년 9월 2일 일본의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마침내 북방항로를 통해 아시아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했다.이후 1906년에는 아문센이 3년간의 항해끝에 북서항로를 개척했으며?1958년 5월 8일, 세계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 호는 노바야젬랴 군도 서쪽의 바렌츠 해를 통과하여 북극점에 도달했다.

오늘날에는 온난화가 진행되면서 북극권의 얼음이 많이 녹고있으며 1991년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북방항로를 공개하면서 정기적인 상업항로를 개설하여 북방항로로는 더이상 생명을 건 모험만은 아니고, 점점 주목받고 있는 대권항로이다. 실제로 이 항로를 이용할 경우 유럽까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항로보다 1/3이상 거리를 단축할 수 있어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전체 물동량의 30%가 이 항로를 유지할 것으로 예측된다.[각주:1] 수백년전 목숨을 걸고 탐험에 나섰던 사람들의 희생이 이제서야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테라 인코그니타

북방 항로에의 도전은 탐험사에서도 이색적인 에피소드다.

사실상 부빙계의 한계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의 항해가들이 가진 장비와 지식으로는?어떠한 방법으로도 중국까지 갈 수는 없었다.

대항해시대에 유럽인들은 남쪽으로는 테라 인코그니타를 보자도르곶 너머, 저 멀리 테라 아우스트랄리스까지 확장시켰고 서쪽에서 신대륙을 발견했으며 동쪽으로 지팡그까지 도달했지만 북쪽에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의 장소, 세계의 끝을 만났다.

대항해시대의 모험가들에게 북방항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하지만 일찍이 불가능한 목표에 도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은 불가능에 도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