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미아 전쟁 (크림전쟁) - 1853년 ~ 1856년
크리미아 전쟁(영어식 표현, Crimean War), 크리미어 전쟁(프랑스식 표현, Guerre de Crimée), 또는 크림 전쟁
(러시아식 표현, Крымская война), 키림 전쟁(터키식 표현, Kırım Savaşı)은 1853년부터 1856년에 걸쳐 일어났던
크리미아 반도를 주 전장으로 하여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19세기 중엽에 나폴레옹 이후, 유럽사회에 비교적 장기간의 안정을 가져왔던 빈 체제는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복잡한
사유로 인하여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광대한 토지에 이질적인 문화 및 종교를 가진 민족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던
오스만 제국같은 다민족 국가에서는 피지배 민족을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보스니아 및 헤르체고비나는 민족적으로 슬라브 계열이었지만 종교적인 지배층은 무슬림이었다. 그리고 피지배층은
기독교도가 다수를 점유했으며, 아직 공업화가 진행되지 않은 지역에선 인구의 과반수가 봉건영주에게 착취당하는 빈농이었기에
곧잘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의 반오스만 운동의 선전에 사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근대화보다도, 먼저 이들 지역의 안정화를 우선시하여 기독교도으 피지배층에게 어느 정도 평등을 선언하여
세금의 공정화를 꾀하는 등, 문제해결에 분주했다. 그러나 1848년부터 일어난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일련의 혁명을 계기로
일어난 운동이 실패했기 때문에 농노상태의 농민이 더욱 비참한 상황으로 몰리는 것을 우려한 오스만 제국은 불안정하긴 했지만
다시 지배권을 확립한 후 이 지역의 농업개혁(자작농화)을 구했다.
이에 대해 지배층인 무슬림 귀족들은 농노의 이탈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1850년에 도나우 방면군 사령관이던
오마르 파샤를 파견하여 반대파를 사라예보에서 쫓아내고 일시적으로 질서회복에 성공했지만 봉기한 농민의 무장해제는 실시할 수
없었다.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직접적인 대립의 원인이 된 것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지관리 문제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개인적인 명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국내 카톨릭 교도에게 비위를 맟추기 위해 성지 관리권을 획득하려하자
정교회를 국교로 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이에 반발했다.
러시아는 정교도의 보호를 구실로 오스만 제국에 정치간섭을 실시하여 이것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 병력투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852년에 몬테네그로 공 다닐로 2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찬동 하에 제정된 신헌법에 오스만 제국이 반대한 것을 이유로 거병하여
그 해 헤르체고비나 동부에서 발생한 농민반란을 지원하며 오스만 제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현지 지리에 밝아 게릴라전을 펼친 반란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한 오스만 제국측은 오마르 파샤에 의해 무기를 사들인 후 보스니아인
무슬림병으로 이에 대항했다. 결국 싸움은 점차 이전투구화 되어갔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로부터 지원을 받아 선전했는데,
병력상으론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이에 1852년 12월에 오스만 제국이 아드리아해로 함대를 파견하자 러시아의 조언 하에 평화협상의 준비에 들어가 1853년 1월에
다닐로 2세의 숙부인 카라죠르지에 페트로비치가 사자로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가 러시아에게 오스만 제국과의 중재를
의뢰했다.
한편, 전선의 확대를 희망하지 않던 오스트리아도 오스만 제국과의 강화를 타진하기 위해 2월부터 협상을 벌여 오스만 제국과
몬테네그로의 쌍방이 강화에 합의하는 것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에 더해 알바니아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군 앞에
몬테네그로가 대패배를 만끽했다.
몬테네그로가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며 발칸반도를 무시할 수 없었던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중개로 내 세워 오스만 제국에 사절단을 보내 쌍방에 정전을 합의시켰다. 이 시점에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문제에 관해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는 측에 선다면 반드시 영국과 프랑스와도 대립하게 될 것이라 여겨 오스만 제국령을 분할하는 것으로
타협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이 인식이 러시아의 강세를 조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외무상이던 카를 로베르토 네셀로데가 고언한 것처럼, 이해관계가 복잡화되고
만 이상, 여러 나라들의 의혹을 불러 일으키는 행동은 현명한 것은 아니었다. 니콜라이 1세에게 있어, 영국에는 수상으로 제 2차
필 정권에서 외무상으로 온건외교를 펼치던 친러시아측의 애버딘 백작이 있었기에 관계가 악화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오스만 황제인 압둘메지트 1세는 제 2차 시리아 전쟁으로 아군으로 끌어들인, 당시 외무상이던 팔머스톤 자작이 내무상으로
있던 에버딘 정권에서 영국은 원호사격을 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있었다. 에버딘 내각은 연립정권이었기 때문에, 수상을
지지하는 파는 러시아에 동정적이었지만, 클라렌든 외무상과 팔머스톤 내무상은 프랑스와 연합해 러시아와 대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에 영국정부의 외교방침은 정해지지 못했다.
원래 영국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프랑스가 지원)이라는 관계국을 중재하는 대국이었지만, 각료들의 이러한 논쟁으로 인하여
통일된 외교정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리고 선거법을 둘러싸고 정권내부에서 분열상태를 보였기 때문에 분쟁 당사국의 중재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양측이 영국의 지원에 제멋대로의 기대를 안은 채, 분쟁은 확대되었다.
1853년 2월말에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특사를 파견했는데, 선발된 자는 경험이 풍부했던 외교관인 미하일 올로프가 아니라,
오스만 제국을 싫어했던 군인이던 알렉산드르 멘시코프였기에 불안해 한 네셀로데는 방침은 어디까지나 부전(不戦)이라고 못을
박았다.
3월에 이스탄불에 들어 선 멘시코프는 먼저 오스만 제국 최대의 채권국이던 프랑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여, 협상상대가
프랑스측의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라면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측은 몇 번이나 협상역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난항이 예상되었지만, 4월에 오스만 제국이 영내의 정교회 신자, 즉 슬라브 민족의 생명과 재산을 보증하며, 러시아는
국제적인 위기에서 안전을 보장한다는 합의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 합의 속에는 슬라브계 상인에 대한 특권의 부여 등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능멸당한 프랑스가 맹렬히 항의하여 여러가지 방해공작을 펼쳤다.
예루살렘을 둘러 싼 성지관리권 문제는 그 일환으로 여겨진다. 또, 이 시기에 러시아가 세바스토플에서 흑해함대에 전투준비를
내리고 오뎃사에서 육군의 대부대를 편성하여 해군의 코르닐로프 대좌가 갑자기 그리스로 파견된다는 정보가 들어왔기에
주이스탄불 영국대사인 스트랫포드 캐닝은 프랑스와 연계해 술탄인 압둘메지트 1세에게 여러가지 압력을 행사하여 결국 군함을
내세워 포격하는 등 강력한 수단으로 나왔기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제안을 거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4개월에 걸친 협상은 실패로 끝나, 6월에 멘시코프가 귀국함과 동시에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국교를 단절했다. 그 사이,
오스트리아 외무상인 부올을 중심으로 한 빈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도 의정서 작성에 최종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넉달 후인 10월에
양국은 전쟁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1853년 7월에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하에서 자치를 인정받았던 몰다비아, 왈리키아(현재의 몰도바와 루마니아 일부)로
진군했다. 어디까지나 해방을 목적으로 했기에 러시아측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는데, 전투가 일어나는 것을 피한 오스만 제국측은
도나우 강 남쪽에 군을 전진시키고 재삼 후퇴권고만 행할 뿐이었다.
그러나 9월에 취후통첩도 무시하자 오스만 제국군은 10월에 선전포고 없이, 도나우 강을 도하하여 부카레스트 교외의 전초기지를
공격함으로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장비면에서 우수했던 러시아군은 포병부대를 도나우강 하구에 집중시켜 오스만 제국군의
하천함대를 격파하고 도나우강을 건너 남하했다.
그리고 그리스의 의용병이 북상하자, 수비가 허술했던 오스만 제국 영내의 마케도니아와 불가리아에서도 러시아의 원조를 받아
반오스만 제국조직이 반란을 책동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군은 발칸반도에서 협공당하는 형태에 내몰렸다. 이러한 상황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에 철수를 요구했지만 중앙정부의 권위가 없던 그리스에선 전선에 몸을 던진 의용병이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는 순양함을 파견하여 그리스 의용병에게 향하던 무기수송선을 데살로니카에서 격침시켰다. 영국도 아네테의 항만인
피레우스를 봉쇄하는 등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리스는 의용병의 원조를 끊을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반오스만 제국을 부르짖던
반란은 각지에서 진압되었는데, 특히 러시아가 공을 들였던 불가리아의 조직은 철저한 탄압으로 파멸되었다.
기사회생한 오스만 제국군은 다시 러시아군을 도나우강 이북으로 몰아냈지만 양군 모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러시아의 요구에 불만과 불안을 가졌던 프랑스와 영국이었지만, 이들 나라는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세하진
않았다.
하지만 1853년 11월에 흑해 남부의 항구도시인 시높에서 정박중이던 오스만 제국함대가 소수의 러시아 흑해함대에게 기습당하여
함선 및 항만시설이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시높 해전이 일어나자 상황은 일변했다. 이것은 흑해함대의 정찰에 신경이 쓰인 것이 아니라,
이스탄불에 원군을 요청하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오스만 제국측의 명확한 실수였지만 일방적인 공격이었기 때문에
각국의 언론은 이를 <시높의 학살>로 보도했다.
이로 인해 영국에선 여론이 급속히 러시아에 대한 강경론으로 기울어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1854년 3월 28일에
러시아에 선전을 포고했다. 영국이 유럽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한 것은 나폴레옹 전쟁에서부터 제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100년간 이 단 한차례 뿐이었다.
원래 동맹군은 군대를 흑해 서부의 바르나(현재의 불가리아 동부)에 상륙시켜 오뎃사의 공략을 목표로 했는데, 갑자기 오스트리아가
국경선에 부대를 배치하여 동맹군의 발칸산맥 이북의 진군을 막았기 때문에 공격목표는 러시아 흑해함대의 기지가 있던 세바스토플로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력인 영국 및 프랑스군은 현지의 사정에 어두워서, 크리미아 반도에 부대를 이동시킨 직후부터 현지 민병과 코사크로부터
주야를 불문하고 기습을 받았는데, 프랑스군은 흑해 특유의 변화무쌍한 기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정박중이던 함대가 돌풍에
말려 떠내려 가는 등, 함대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러시아군은 지휘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기에, 알마 전투에선 지형의 잇점에도 불구하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프랑스 외인부대와
군견을 동원한 스코틀랜드 연대 앞에 패하여 세바스토플로 진군을 허락하고 말았다. 한편 동맹군은 정보의 중요성에 정신을 차려,
프랑스어가 능한 러시아 장교로 위장시킨 거짓 지휘관을 파견하여 혼란공작을 펼쳐 바라클라바 전투 및 잉카만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세바스토플을 목전에 두고 연합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러시아군은 영불함대가 직접 세바스토플을 포격하지 못하도록
만내에 흑해함대를 자침시키고 육상에서도 방어벽을 쌓아 도시 전체를 요새화했기 때문에 동맹군은 참호를 파고 포위전을 전개하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어 영국군은 화학병기(일설엔 아황산가스로 추정)까지 사용했지만 예상 외의 장기화로 인해 전사자보다도
병사자의 수가 더 상회하여 전쟁을 주도한 영국 국내에서도 혐전사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사르디니아 왕국이 피에몽테에 주둔중이던 정예병 15,000명을 파견하여 동맹군에 참가함으로서 세바스토플은 3일간의
총공격 끝에 나히모프와 코르닐로프가 전사하면서 1854년 9월 28일부터 시작된 세바스토플 전투는 1855년 9월 11일에 도시가 함락
됨으로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영국은 전쟁비용의 과도한 부담이 원인이 되어 재정이 파탄나 애버딘 내각은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 정권을
지탱하며 하원을 지도하던 존 러셀 경이 사임하면서 내각은 총사퇴하여, 외무상 시절 외교력을 발휘했던 팔머스톤 내무상이 그 뒤를
이었다.
세바스토플 함락 후에도 카프카즈의 요충지인 카르스 요새가 러시아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사실상 승전국은 없었다. 팔머스톤 수상은
이제 조금만 더 전쟁을 이어나가면 영국에 유리한 입장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여론에 굴복하여 더 이상
전쟁을 희망하지 않았다.
프랑스 육군을 의지하던 영국은 단독으로 러시아와 싸울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진영은 더 이상의 전투는 곤란하다고 판단했다.
때를 맟춰 러시아에서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자 새로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전권대사로 러시아군 총사령관이던
멘시코프를 해임했다.
이리하여 동맹측과 평화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확실한 전승국이 없던 상황에서 시작된 파리에서의 강회회담은 전쟁종결에
공헌했다는 것으로 발언권을 높인 사르디니아 왕국의 카밀로 카보우르의 로비활동에 의하여 합스부르크 비판으로 종시하여 결국은
전쟁 전의 국가간 입장을 재정리하는 것에 머물러 개전초기에 내 걸었던 폴란드의 해방과 발칸 각국의 안전보장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1856년 3월 30일에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입회 하에 파리조약이 성립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의 인식처럼 이 전쟁에서
산업혁명을 경험한 영국과 프랑스,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러시아의 국력차가 여실히 증명되었다. 조선기술, 무기탄약, 수송수단의
어느 것도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보다도 뒤쳐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크리미아에서 전쟁은 북유럽에도 전환점이 되었다. 스웨덴은 러시아로부터 핀란드 탈환의 의도를 기획하여 참전을 계획했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이후, 스웨덴의 무장중립주의를 뒤엎는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도 스웨덴의 정책을 지지하여 발트해에 함대를
파견했다. 1854년에 영불함대는 발트해로 침공하여 판란드 연안을 제압했다.
그러나 스웨덴 의회는 전쟁개입에 소극적이어서 처음에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 중립은 영국과 프랑스에겐 별로 유익한 것이
아니었는데, 스웨덴령인 고트란드의 항구를 군사기지로 이용하는 것만이 가능했을 뿐이었다. 영불함대는 판란드령이 될 올랜드 제도에
압박을 가해 섬들을 제압하겠다고 스웨덴에 타진했지만 스웨덴 국왕인 오스칼 1세는 러시아가 기뢰를 사용하는 것을 우려하여 신중한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올랜드 제도탈환의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1855년에 접어들면서 크리미아에서 러시아의 패색이 농후해지자 스웨덴은 직접 참전의 의사를 피력했다. 그러나 스웨덴의 참전은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세바스토플 함락으로 영불함대는 러시아와의 화평을 빨리 이끌어 내기위해 발트해에서 철수했다. 결국
스웨덴은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 채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한편 스웨덴인이 다수이던 올랜드 제도는 이후 비무장지대임으로 합의를 이루었지만 핀란드가 독립한 후에 귀속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1921년에 핀란드의 자치령이 되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 크리미아 전쟁은 바다 건너 태평양쪽의 러시아 극동에서도 파급되었다.
프랑스 해군과 영국 해군의 엽합은 1854년 8월에 카마차카 반도의 러시아 군항 및 요새인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캄차카 공략을 준비했다.
영불 연합군은 포격을 실시하며 9월에 상륙했지만 육상전에서 큰 희생을 내고 철수했다. 영불연합은 병력을 증원했지만 다시 공격시엔
러시아군이 철수한 후였다. 러시아의 수비대는 1855년 초에 눈 속에서 탈출했다. 이 싸움과 병행하여 예프피미 푸탸틴 해군중장이
일본과 개국협상에 나섰었다.
푸탸틴은 개전 직전에 러시아 본국을 출발하여 1853년 8월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외교협상에 착수했지만 협상이 길어지던 가운데
영불양국과 개전소식을 접하고 동 시베리아 총독인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와 협의해 일본과 협상을 수행했다. 영불함대와의 조우,
교전의 위험을 안았지만 1855년 1월에 러일화친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크리미아 전쟁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만이 이 시기에 페리 제독을 파견하여 일본에 대해 포함(砲艦)
외교를 전개한 것은 이 전쟁으로 인해 유럽열강의 관심이 일본을 포함해 동아시아 지역까지 파급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정부의 명령을 받고 파리 천문대 소장이던 루벨리에라는 학자가 폭풍우의 연구를 시작해 오늘날 기상예보라는
학문의 기원을 열게 하였다.
출처 : 야마카와 출판사 <세계의 전쟁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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