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 이야기/요트 세계일주

요트 이삭호의 항로 따라가 보기 4

구름위 2013. 4. 23. 11:40
728x90

대만에서의 생활
지난번 소식 전 한대로 1월 11일 오후 3시경 대만 동북 단의 '키룽'(지룽, 기룽 등 해도마다 지명 표시가 다름.  Keelung이 정확한 표시임)에 예인되어, 해안순방서(海岸巡防署)의 안내로 항의 최안쪽 안벽에 배를 계류 시켰습니다(좌표 25-07-50 N, 121-44-32 E).  





바로 옆에 아주 큰 대형 예인선 5척이 정박하며 작업을 다니는데, 얼마전에 미국 요트가 이곳에서 예인선에 받혀 마스트가 부러지는 등 큰 피해가 입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많은 걱정이 됐으며, 주위에 전기, 수도 시설 등 편의시설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청소비를 포함한 1일 계류비가 약 14,000원 정도 지불해야 합니다.  좋은 점은 시내 중심가와 붙어 있어서 교통비는 전혀 안 듭니다(일본 체류 시에는 교통비가 만만치 않게 지출되었음).  


이곳도 수심이 최저 1.6미터 정도로 휜-킬 정은 조심해야 할거 같습니다.  아마 미국 배의 사고도 수심 때문에 너무 예인선 쪽에 가까이 붙었다가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대만이 섬으로 우리와 달리 항구 건설에 좋은 입지가 없어,  일반 어항의 경우 해안에 방파제를 길게 쌓아(높이가 15미터 이상 되며, 방파제 앞의 테트라포트 크기가 우리 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큼) 폭이 약 50-70미터, 길이가 약 100-150미터 정도의 항을 건설하고 파도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항내에 2-3곳의 칸막이를 해놔(그곳의 열린 간격은 5-6미터 정도임), 항내가 매우 협소하고 복잡하였음.  



특히 좁은 항내에서 어선들이 러더의 효율을 잃치 않으려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빠른 속도로 운항을 함(서로 좀 부딪치는 건 예사로 레져보트의 경우 많은 조심이 필요함).  


또 일본과 달리 특이한 점은 검역절차와 세관검사가 없고(일본에서는 제일 먼저 검역, 다음 출입국, 그리고 세관 검사의 명확한 구분이 있었음) 츨입국 직원의 선원 임시 상륙허가만으로 모든게 끝난다는 겁니다.(이삭호의 경우 1달 비자가 있었지만 무시되고 1주일 기간의 임시 상륙허가만 해 줌)   

 

전반적으로 느낀 점은 대만의 기득권을 가진 고위층이 외부 세계와의 개방을 좋아하지 않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예전 내가 젊었을 때(박 정권 시절) 우리나라 관리들이 대만을 모델로 연수를 많이 갔던 기억이 있어 모든게 우리보다 많이 앞서 있을 걸로 생각했는데, 실제 와서 관청에 출입해 보니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예전에는 대만보다 못했지만 이제는 역전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가 IMF를 맞았고 대만은 맞지 않았지만 앞으로 머지않아 대만도 큰 시련을 격게 될거로 생각됐습니다.  

 

많은 비효율과 무질서가 걱정됩니다.(물론 작은 섬에 2천만의 인구로 거대한 중국을 상대해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겠지요)

무질서 속의 질서라 할까 하여간 일본과는 또 다른 흥미있는 세상입니다.  중국인의 먹거리문화는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에 음식점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와 보니 정말 먹는 곳과 먹는 것이  너무 많아요.  

특히 저녁에 야시장에 가면 우리나라 포장마차 같은 수많은 장사들이 별에 별 다양한 음식들을 팔고 있더라구요.  가격은 우리나라 수준과 거의 같다고 생각되나, 시설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좀 더 비싸다는 느낌이 듭니다.   

닭 만 해도 닭 혓바닥, 닭 대가리, 닭 목, 닭 발, 닭 내장 등 정말 하나도 버리는 게 없이 모두 먹는데, 이런 부산물 값까지 포함하면 닭 한 마리 값이 우리보다 훨씬 비싸게 칩니다.  하여간 요즘 먹거리에 대한 새로운 경험에 푹 빠져 있어요.  

또 중국인 집에 초대되어 가면 우선 담소하면서 중국차를 마시게 되는데, 우리 같으면 커피나 기타 차 한잔 내놓으면 끝이지만 중국인들은 계속 끝없이 차를 딸아 주더라구요.  그것도 큰 컵에 5 - 6잔 먹고 나서 식사를 하게 되는데 하 이게 정말 신기하더라구요.  정말 중국인들의 먹는데 대한 실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어요.  정말 대단해요.

이제 일본과 대만 겨우 두 나라를 봤지만 많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어요.  일본은 완전히 선진 서구화되어 모든 체제와 질서가 확립되었다고 생각되며,

 

대만은 정치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국민성에서 좀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다 똑같이 될 수 없고 꼭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일본에서 느낀 일본인들의  남에 대한 철저한 배려같은 좋은 장점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신문에 나는 바람에 한인 교회에 일요 예배를 참석하게 됐어요.  예전에는 이곳 '키룽'에 한인이 제일 많이 거주하였으나(일제 징용으로 대만에 와 해방시 이곳에서 배를 타고 귀국해야 했는데, 일부 귀국하고 또 사정에 의해 주저앉은 교민이 많았다 함)  

 

이제는 모두 흩어지고 한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상사 직원 가족들이 일부 살고 있었음.   일요일날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점심들을 같이 먹으며 동포애를 서로 나누는 모습에 보기 좋았습니다.   

특히 연세가 90이 되신 할머니께서 "야 그배 타고 내레 이북 고향에 같이 가면 안되간"하시는데 는 눈물이 절로 나오더라구요.  아무 죄없이 뭐가 뭔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일제에 끌려와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신 , 그리고 지금쯤 고향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겠지만 아직도 고향이 그리우신 할머니.  그리고 "예 할머니 가십시다"라고 못하는 나.  슬픈 얘기예요.  

 

너무 가슴 아파 그날 저녁에 혼자 많이 울었어요.  그 당시 우리의 지도급 권력 계층은 지금 모두 잘 살고 있겠지요.  아무 책임지는 놈 하나 없이 모두들 양반의 자손들이라 자랑하며 지내겠지요.  할머니의 건강하심을 비는 방법밖에 없더군요.

또 어제 저녁에 시내 길가 쪽에서 왼 사람이 한참을 보고 있다가 가까이 접근해 오는 겁니다.  그래 처음에는 조금 경계했지요.  이 분은 呂 貴仁씨로 나이가 1943년 생인데 현재 해운관계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자기도 예전부터 요트타고 여행하는게 꿈이 었다고 소개를 하는 겁니다.  그래 배로 들어오게 해서 같이 소주 한잔 먹으며 얘기 했는데 꼭 10년전 내 모습을 보는거 같았어요.  

그 당시 어떻게하면 배를 하나 가질수 있을까 하고 밤 기차타고 수영만에 내려와 기웃 기웃거리다 누구한테 말도 못 붙여 보고 올라가곤 했던 바로 그대로예요.  나이가 이미 60이 됐건만 이분의 요트에 대한 열정은 너무 좋았어요.  

현재 대만에서는 요트 갖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며 우리를 너무나 부러워 하는 겁니다.  자기 현실을 너무 애통해 하길래, 우리 한국도 얼마 전에는 너무 힘들었었는데 빠른 속도로 개선이 되고 있는걸 보면 앞으로 대만도 곧 좋아지지 않겠냐고 위로하기 바빴습니다.   이 분이 간 후 옛날에 배를 갖고 싶어하던 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다시 부르는 거예요.   

나가보니 한 십만원어치도 더 되는 육포, 쥬스, 과자 등을 사다 주는 겁니다.  뒤 돌아 가며 우리 배를 다시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힘없이 돌아 가는 모습이 너무 안됐더라구요. 어디를 가나 막말로 하면 이런 골치 아픈 꼴통 같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인 모양입니다. 呂 貴仁씨가 요트를 마련하는대로 한국에 오길 권했고, 본인도 꼭 해보겠다고 다짐하고 헤어 졌습니다.   이 또한 멋있는 추억이 될거 같아요.


 

이곳에서 1주일 체류 연장을 받을까 합니다(타이페이 등 관광 시간이 좀 필요).   

 

대략 1월 22일 전후해서 '키룽'을 출발해 대만 남쪽에 있는 '타이 동'이라는 곳을 거쳐





필리핀 "산 훼르난도'에 입항하였다가(오바다 코스 임) 마닐라를 거쳐 '노보루'상이 있는 '니그로스'의 '본보논'에는 2월 중순경 도착하길 희망합니다.  

 

'오바다'상은 1월 24경 말레시아로 출발한다는 소식은 잘 받았습니다.  오바다상의 항해기가 아마 내년쯤의 내 항해에 또 많이 도움이 되겠지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제너랄 리 생각도 많이 납니다).
                            대만 '키룽'항에서   1 월 16 일    이  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