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 이야기/요트이야기

레이디 알리야호의 100일 항해기3

구름위 2013. 4. 17.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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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리스본 Alcantara마리나 출항 | 3.포르투갈 Lis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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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대서양 한 가운데를 향하여 출발 할 예정이다.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들, 이를테면 식기 세척기, 팩스, 등 전기로 작동되는 부품들의 문제 나 주돛을 지탱하는 배턴(batten)이 하나 파손된 것, 엔진 오일의 교환 등등의 일들이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해결을 하였고 이십 일 이상 항해가 계속될 수 있도록 식품(대원의 숫자가 여덟 명 이어서 먹거리의 요구 양도 상상을 초월한다)도 그런대로 구입을 하였다. 대서양으로 나설 때 이 전무님은 업무상의 문제로 하선하여 우리들과 작별을 할 예정이라서 이제는 일곱 명이 될 것이다.

 

바다로 다시 나서기 전에 차례대로 샤워를 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아야 할 숙제다.

 

햇살이 매우 따가운 나라다.
낮 동안은 우리나라의 6월말이나 7월초에 해당되는 그런 더운 분위기라 자질구레한 작업을 할 때는 그늘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저녁 부터는 완전히 늦가을의 기온을 보이기 때문에 겉옷을 걸치고 열려있는 문은 모두 닫아야 할 정도로 추워져서 문득 11월 이라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된다.

리스본의 햇살은 11월에도 따갑다.

 

리스본 이라는 항구는 우리가 들어왔던 명성에 걸맞지 않게 항구 시설이 매우 제한적이다. 개발을 할 여지가 없는 입지 조건을 가진 항구다. 원래가 항아리 처럼 좁은 입구를 거쳐서 들어가야 하는데다 안쪽 해안선에는 이미 도시가 점령을 하고 있어서 꼭히 개발을 하여 항구를 확장한다면 외양과 접하는 바깥 쪽이 되어야 하는데 바깥 쪽은 항구의 입지 조건에서 완전히 벗어나있기 때문에 쉽지가 않은 것이다.


마리나 시설은 턱 없이 부족하다. 포르투갈도 원체 이름있는 해양국가가 아니었던가
.
컨테이너 선박과 여객선이 같은 부두에 접안을 하고 있고 마리나는 그 안쪽의 땅을 파내어서 만들어진 것 같다. 여러 개의 마리나가 있었는데 모양이 전부 그렇다.

 

 

우리가 입항한 Alcantara는 컨테이너 접안 시설의 바로 안쪽이다.
입항을 하자면 그 부두를 지나서 안쪽으로 빙 돌아 들어와야만 한다.

들어오는 수로의 폭은 겨우 20-30여 미터나 될까? 마리나에 들어서기 직전에는 나즈막한 철교가 놓여있어서 매 30분 마다 5분간 다리 자체가 빙그르르 돌아서 수로르 따라 들어가고 나가는 문을 열어주게 되어있다.

좁은 수로를 따라 들어올 때는 요트들이 줄을 서야만 한다.

자칫 잘 못 하다가는 충돌의 위험성이 매우 높은 어려운 진입로다.

어렵사리 들어는 왔지만 마땅하게 배를 계류할 선석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타고있는 배의 형태 또한 쌍둥이 선체여서 그 폭이 넓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헤메기를 30여분, 이리 돌고 저리 돌아보고 겨우 조그만 선석 공간을 찾아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일단은 계류.얼마나 지났을까, 관리 사무소를 찾아가서 입항 신고를 하자 배를 옮겨서 더 안쪽 선석으로 들어 오랜다. 이후 안전하게 선체를 계류하고는 수도를 연결하여 염분에 찌든 선체를 씻어내고 전기선을 연결하는 등 한참 부산하게 움직인다.

 

 

육지는 모든 점에서 편리하다. 물이며 전기며 식품 등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대원들 모두 며칠 만에 샤워를 하고는 오랜만에 푸짐한 저녁을 준비하여 와인, 맥주를 곁들여서 입항을 자축한다.

 

 

베르날도와 그의 한국인 부인을 만난 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큰 축복이었다.

 

 

좁은 수로를 따라 들어올 때 우리 배에 달린 태극기를 보고는 옆을 스쳐 지나는 요트에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보았을 때 첫 눈에 백인 남자와
젊은 한국인 여자를 볼 수가 있었다.

밤 아홉 시가 조금 지났을 때쯤 그들이 우리 배를 찾아왔다.

결혼 한지 일 년 정도 된 삼십 대 초반의 부부다.
미시즈 정은 부산이 고향이라 토박이 경상도 억양으로 남편되는 베르날도를 소개한다.
베르날도는 참 잘 생긴 청년이다.

그도 한 때 우리나라에서 영어 선생으로 일년 넘어 살았다고  하는데 그들이 만난 것은

한국에서가 아니고 여기 리스본이란다.


사연인즉 외국어대에서 포르투갈어를 전공한 그녀는 이미 약 10여 년전에 이 곳 포르투갈에 와서
선박에 관계된 회사에서 근무를 하다 한국에 대한 남다른 호감을 가진 베르날도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란다.

베르날도는 약 30여년 된 40피트 크기의 오래된 요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주말에는 보통 부부가 그 요트로 와서 1 2일의 여정을 즐긴다고 한다.

 

그의 요트는 오래된 것이어서 최근에 건조되는 것들 보다는 좁고 긴 편이며 공간 또한 좁은 편이고 선내의 전기 사용시설도 많이 낙후된 것이지만 베르날도의 관점은 그런 것들 보다는 선체의 내구성과 항해 성능 자체에 쏠려있어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고취된 해양 본능을 가진 것 같다.

저녁 식사를 같이 즐기면서 우리의 항해 계획을 설명하자 미리 작정을 하고 있었던 사람같이 무조건 같이 항해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회사의 상사와 의논을 하여 휴가를 얻어 보겠다는 것이다.

 



 

리스본 항구를 벗어나서 우리가 바다로 진입했을 때

하늘은 잔뜩 지푸린 얼굴을 하고 강한 바람을 끝도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초속 15에서 20m에 이르는 강풍. 주돛을 올리는데도 30여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목표 항로는 220-240도의 남서쪽으로 500해리 떨어진 마데이라 섬.

 

 

원래의 계획으로는 카나리 제도로 가서 무역풍을 타고 갈 예정이었지만 항해 안전 비품의 공급이 차질을 빚어 어쩔 수 없이 3일이라는 아까운 시간을 리스본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늦어진 일정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서 보다 고위도의 마데이라를 경유하여 카리브해로 나아가기로 수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또 다른 한 가지의 이유는 마데이라 섬에서 베르날도를 승선시키기 위함이다.

 

 

우리의 접근을 막으려는 궂은 날씨 속에서 시속 10-12노트의 속도로 달린다.

4-5m 높이에 이르는 파도의 고개를 넘을 때 마다 선수 부분이 많이 잠기면서 끝없이 물보라를 날리고 일분에 대 여섯 번 정도는 파도의 계단에서 배가 미끌어 떨어져 내리면서 쿵하고 둔탁한 파열음을 낸다. 그럴 때 마다 마음 한 구석이 조금씩 짓눌려져 온다. 큰 파도가 덮칠 때는 파도에 온통 배를 뒤덮히고 선상 근무를 하는 대원들은 흠뻑 젖기가 일수.

날씨 처럼 우울한 분위기에서 하는 저녁 식사. 빵 몇 조각이며 만들어 놓았던 잣죽으로 끝을 낸다.

 

 

이틀 전, 현지 시간으로  일요일 저녁 만찬이 그리워진다.

베르날도-정 부부의 정성스런 안내와 도움으로 많은 덕을 보게 된 레이디 알리아 일동은
그들 부부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함과 동시에 현재 부산 수영만에서 머물고 있는 벨기에 요트의 미스터 기가 보내온 메일에서 그가 추천했던 유명한 해물요리를 즐기기 위해 전부
시내 중심가의 해물 레스토랑으로 갔다.

원체가 통이 큰 이 선장님은 가격도 물어보지도 않고 가재며 굴이며 왕게며 기타 조개류를 마구잡이로 주문하였고 즐거운 대화와 웃음 속에서 성찬을 즐길 수 있었다. 문제는 마지막 장면이었는데 막상 계산을 하고자 했을 때 살이 터져 나갈 정도로 튼실했던 바다가재 한 마리의 가격이 약 300유로로 우리가 먹고 즐겼던 두 마리에 600유로였고 나머지를 합쳐서 300유로 정도로 합쳐서 900유로. 우리 돈으로 120여 만원에 달하는 거금이 나가야 할 형국이 되어 모두 화들짝 놀라기도 했지만 어떡해 이미 다 먹은 것을열 한명의 사람들이 즐겼으니 일 인당 약 11만원 정도로 지출이 된 해물 성찬.

 

 

오후 다섯 시가 조금 지나자 어두워짐.

날씨가 흐린 탓이다.

어두운 바다에서 조우할 수 있는 배들에 대한 경계와 시시각각 변화되는 바람의 변화에 따른 항로나 돛의 조절을 위해 야간의 견시는 필수적인 것. 야간 견시 당직은 대원 일인 당 두 시간 씩, 한 시간 마다 한 명이 교체되는 2 1조 시스템으로 편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