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 이야기/요트이야기

강동석 요트 세계일주기

구름위 2013. 4. 17. 14:06
728x90

그래, 나는 바다에 미쳤다
 

 

  지은이: 강동석


    프롤로그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틈 짙은 안개  나는 지금 어디쯤 떠 있는 것일
까.
  캄캄한 바다. 안개에 박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익숙하다 못해 이제는 생
활의 일부분이 돼 버린 파도 소리만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 주는
새벽녘이다. 5톤급 소형 요트에 몸을 싣고 험한  파도를 헤쳐온 지 이제 3년 5개
월, 세계 일주의 종착점인 부산항을 향해 일본  오키나와현 도마리 항을 떠난 지
7일째.
  항시 태풍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동안 줄곧 긴장 상태로
지내야 했던  탓인지 자꾸만 눈이 감긴다.  하루에 겨우 한 시간이나  눈을 붙일
수 있었을까. 바다를 향해  온몸의 신경을 열어 놓은 채 간간이  조각 잠으로 피
로를 달래야했던 시간들.
  이번 항해의 마지막 걸림돌은  제주도 남쪽 해상에서부터 시작된 짙은 안개였
다. 시야가 막힌  상태에서는 언제 어떻게 암초나 상선들과 충돌할지  모르기 때
문에 안개는 항해 도중 언제나 부담스런, 죽음의 복병이었다.
  ‘비 오는 날 무모하게 출항을 서두르는게 아니었는데....’
  한국에서의 행사 일정을 맞추느라 기상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도마리 항을 떠
났던 일을 뒤늦게 후회해  봤자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 동안의  항해 경험을 통
해 자연의 뜻을 역행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나는 바다가 아직 제  길을 내주고 싶어하지 않을 때 출항을 결행하였
고, 그 결과 순탄치 못한 항해를 자초하고 말았던 것이다.
  항해자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 놓은 바다는 더없이 자애롭지만,  그 반대의
경우 바다는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바다는  결코 자만에 빠진 인간을 용서하
지 않는다. 감히 목숨을 건  무모한 도전만큼 바다를 성나게 하는 건 없다. 그것
이 곧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일 게다.
  지금 내  앞 길을 위협하고 있는  희뿌연 안개는, 무리한 약속인  줄 알면서도
1997년 6월 8일 정오까지 부산항에 도착하겠다고 장담했던 내 교만한 행동에 대
한 바다의 준엄한 경고였다.
  나와 동고동락해온 요트 ‘선구자 2호’는 소형인 데다 일반 상선이나 어선들
처럼 밝은 빛을 내는 조명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밤중에 항해하는 일
이 보통 위험한 개 아니다. 주변을 지나던  다른 배들이 이쪽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쳐 가지라도 하면 꼼짝없이 뒤집히게 됨은 물론 캄캄한 바다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짙은 안개라니!
  ‘항상 항구를 출발할 때와 닿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을 경계하라.’
  그 동안 세계 곳곳에서 만난 선배 요트인들의  경험담을 통해서나, 또 나 자신
의 생생한 경험을  토해 가슴 깊이 새겨 두었던  항해 수칙이 새삼 뇌리에 스쳤
다. 파도 소리에  묻혀 혹 지나가는 상선의  엔진 소리를 못 듣게 되는  건 아닐
까? 나는  온몸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  바다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무심한
파도 소리, 일찍부터  먹이를 찾아 헤매는 바닷새  소리, 그리고 또 무슨 소리가
있는가....
  안개는 지독하다  못해 차라리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앞을  가로막고 있고,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지구를 한  바퀴 반이나 돌아 마지막 기착지를 앞두고 있
는 나는 잔뜩 겁에 질린 모습으로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다.
  요트 세계 일주의 꿈.
  오직 그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그 동안  수없이 많은 난관들을 헤쳐 나왔
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연 앞에는 한 점  티끌만도 못한 약하고 무능한 존재라
는 걸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그 무시무시한  태풍과 악천후, 험난한 조류 굶주림
과 갈증, 그리고 고독, 게다가 그 고역스러웠던 배멀미의 기억들까지......
  문득 지나온 여정들이 빠른  속도로 돌리는 영화의 장면들처럼 스치고 지나갔
다.
과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이대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닐까. 그
순간, 생전에 아들이 배 타는 걸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더더욱 가슴
에 사무쳤다.
  “네가 기어이 그 위험한 일을  하겠다면 배에 구멍이라도 내서 못하게 할 테
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한
사코 만류하였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철부지 어린 나이에  불과한 스무
살짜리 외아들. 그 아들이 조그만 요트 한  조각에 몸을 의지해 망망대해로 나가
겠다는데 어찌 흔쾌히  찬성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또  나대로 아버지가
배에 구멍을 낸다면 헤엄을 쳐서라도 기어이 태평양을 건너고 마침내 세계 일주
항해의 꿈까지 이뤄 보겠노라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웠는데....
  그러나 그렇듯 고집불통인  자식이 기어코 L.A.를 떠나 무사히 태평양을  횡단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했던 사람도 바로 아버지였다.
  “장하다, 내 아들! 이렇게 보니 네가 참으로 자랑스럽구나!”
  눈물을 글썽이며 자식을 안아 주던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 안에서 나 또한 목
이 메었다.
  “아버지, 여태껏 그랬듯이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선실 바닥에 무릎을  끓고 아버지, 그 서러운  이름을 불러 본다. 힘든 고비가
닥칠 때마다 늘 내게 용기를 주며 마음속의 동반자로 항해를 함께 해 왔던 아버
지는 끝내 자식이 꿈을 이루는 모습을 보니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내 아들 석아! 꼭 돌아와야 한다!”
  두 번째 항해인 세계 일주를 위해 L.A.를 떠나던 날, 마치 당신의 운명을 예감
이라도 한 듯 마리나 델레이  부둣가에서 배를 타고 따라 나오며 목놓아 울부짖
던 아버지. 그 피맺힌 절규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건만....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리라. 살아서 세계 일주의 꿈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만이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 떳떳하게 서는 길이다. 내  청춘의 모든 열정을 바다에 쏟
아 부었다. 때로는 보기만 해도 징그러웠던  바다. 항해 도중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젠 그  바다가 내 목숨을 옥죄고  있다. 단파 라디오에서는 현재  부산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나는 자꾸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려잡고 정신을 바
짝 차렸다. 짙은 안개  속이지만 다행히 바람이 적당히 불어 준  덕분에 배는 조
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새벽 4시 10분. 저마치서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멀리 사
람 사는 마을의 불빛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해도를 보니 배는 어
느덧 남해안 30마일  전방까지 들어와 있었다.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
대고 선 마을, 사람냄새가 갑판까지 물씬 풍겨오는 것 같다.
  어느 틈엔가 새벽 출어길에 나선  어선들이 엔진 소리를 내며 하나 둘씩 바다
로 들어오고  있다. 마치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손을 흔들어  주는 어부들의
순박한 미소, 해풍에 그을리고 바닷물에 찌든 그들의  검게 탄 얼굴은 지구촌 어
디에서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정겨운 핏줄의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저 얼굴들! 나는 저 얼굴을 보기 위해 그토록 먼 길을 돌아왔던 것일까?’
  뜨거운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후  교신을 듣고 마중 나온 대한
민국 해군 여수함이  요트 주위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위험한 고비는
다 지나갔고 예인선이 인도하는 대로 부산항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이로써
직선 거리 5만  킬로미터, 항해 거리 7만  킬로미터, 항해 기간 3년 5개월이라는
길고도 고독한 나의 여행은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기록될 단독 요트 세계  일주. 몇몇 언론에서는 ‘자랑
스런 한국인의 쾌거’라고 다소 쑥스러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번 여행의 기
쁨을 나의 조국에 돌려주고자 부산항으로 향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 내게 그 소
감을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다고.
  맨 처음 태평양을 횡단할 때  스물 한 살이었던 나는 이제 스물 여덟 살이 되
었다. 20대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낸 것이다. 그토록 귀중한 청춘을 바쳐 가며
내가 진정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나  자신의 가능성이었다. 마음속으로만 간
직하고 있는 꿈,  입으로만 떠벌려지는 꿈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하나 준비하고 목숨을 바쳐 그것을 이루어 냈을 때 가질 수 있
는 가슴 벅찬 떨림. 나는 바로 그것을 느끼고 싶었다.
        제1부 왜 떠나는가
    1. 바다에 대한 첫번째 기억
  바다!
  바다에 대한 나의 첫번째 추억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돌이켜보면 무척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것은  수채화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 마음속에 남아 있었고, 어쩌면 그 추억  때문에 그토록 항해를 열망하게 되었
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던 1978년. 나는 여동생 애리선과 함께 부
산의 이모 댁으로 옮겨 갔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1년 전 일자리를 찾기 위해 미
국으로 떠났고, 어머니  또한 우리 남매를 이모한테 맡기고 뒤늣게  아버지가 있
는 미국으로 향했던 것이다.
  가난이 곧 생활이던  그 시절, 월남전 참전용사였던 아버지는 평생  군인의 길
을 가고자 했으나 육사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런저런 부당한 대우를 당하다
끝내 군복을 벗어야  했다는 아픔과, 퇴역 후 경험도 없는  사회생활에 뛰어들어
믿었던 사람의 배신과 사기로 전 재산을 몽땅 날린  데 대한 충격, 한 집안의 장
남으로서 부모 형제를  재대로 돌보지 못하는 죄책감, 그로 인한  가족간의 불화
등 여러 가지 심적  고통으로 이 땅에 진저리를 치며 미국으로  떠났다. 먼저 그
곳으로 이민간 친구 분의 주선으로 L.A.의 주유소에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뭐든  열심히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더군. 적어도  사기는 안
당하겠지...”
  서울 수색동 어디쯤  낡은 슬레이트집에 우리 남매와  어머니를 남겨 두고 옷
가방 하나만 달랑 든 채로  힘없이 대문을 나선 아버지는 그후 1년 만에 어머니
를 불러들였다.
  “아버지가 그 곳에서  자리를 잡으셨나 보다. 이제 엄마랑 같이  일하면 돈도
두 배는 벌게 될 것이고,  너희들도 금방 데려갈 수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응?”
수색 집을 정리하고 우리 남매를 부산으로 데려가던  날, 어머니는 그 큰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결혼 전까지는 고생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던 어머
니. 당시 동네에 하나밖에 없던 전화를 비롯해  냉장고며 텔레비전 등 전자 제품
들을 항상 그  일대에서 제일 먼저 구입했었다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과거의
훈장처럼 품고 살았던  어머니. 그런 분이 결혼해서 자식들 키우며  살림에 쪼들
리고, 이제는 일자리를  찾아 그 낯선 나라에까지 가야 할  형편이었으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였을까.
  그 때만 해도 아직 어린 우리 두 남매는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
보기만 할 뿐, 아무런 위안도 되드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런 자식들 보기가 더
욱 처연했던지 나와 여동생의 양볼을 번갈아  어루만지며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
가 우는 모습을 보고  애리선이 따라 울기 시작했다. 나도 그  때 눈물을 흘렸던
가. 어머니의 품에서 숨이 막힐 지경인데도 차마  뿌리치지 못했던 건 눈물 때문
이었던가.
  그로부터 며칠 후,  어머니는 떠났고 이제 남은 건 나와  여동생 애리선뿐이었
다. 한 살 터울인 우리 남매는 아주 어린  병아리 새끼들처럼 어디를 가나 꼭 붙
어 다녔다. 부모님이 데리러 올 때까지 여동생을  잘 돌봐야 한다는 어머니의 당
부가 아니었더라도 그 무렵 세상에는 우리 남매 단 둘뿐인 것 같았다.
  이모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작은 바닷가  마을이 있었다. 우리 남매는 학교에
서 돌아오면 종종 손잡고 바닷가로 향하곤  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애리
선은 백사장에서  조약돌을 줍거나 인형놀이를  하며 놀았고, 나는  대개 멍하니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바닷가에 살
면서 수영도 하 줄 모르는 ‘서울 촌뜨기’ 신세였다.
  바다!
  어린 소년의  눈에 그것은 분명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였다.  초가을의 청명한
오후, 백사장에 오도카니  앉아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바다의 빛깔은  한 마디로
형언하기가 어려웠다. 어느  때는 한없이 푸른 빛깔이다가도 또 어느  때는 검기
도 하고,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는 늘  흰색이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갈색,
혹은 노란 빛깔의 모래  색을 닮았고,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어느새 초록색이 되
었다가 수평선으로 노을이 지기라도 할  때면 온통 불이라도 난 것처럼 붉게 물
드는 바다.
  어린 소년은 그 바다가 스스로  제 몸 빛깔을 바꿔 가며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서울내기를 놀려먹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여, 가끔 그 바다를 향해 돌을 던지며
분풀이를 하기도 했던 나는 그것도 무료해지면 여동생이 애써 만들어 놓은 모래
성을 무너뜨리며  심술을 부렸다. 그러면  화사한 드레스 차림으로  모래성 안에
누워 있던 여동생의  아기 인형과 불쌍한 백설공주는  그 즉시 모래투성이가 돼
버렸고 애리선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너 자꾸 울면 다음부턴 안 데리고 다닐 테야!”
  매번 으름장을 놓아 동생을 달래던 나를 꾸짖기라도 하듯 큰 파도를 밀어보내
던 바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 지나 다시 이듬해  겨울쯤 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데리
러 나왔다. 그 동안  두 분이 열심히 일한 결과, 아버지는 미국 L.A.에  주유소를
직접 차리게 되었고 생활 형편도 어느 정도  안정된 뒤였다. 1년 반 동안 생활하
던 이모 집을 떠나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날, 나는 비로소  수영을 배우지 못
하고 떠나게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달리 아쉬울 건 아무것도 없
는데도 내가 끝내 바다와 친해지지  못했다는 사실만 마음속에 한 점 그늘로 남
았다.
    2. 죽음의 문턱에 서다
  사람은 과연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대학  1학년이 될 때까지 죽음에 대한
나의 인식은 거의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길어진
덕에 특별한 질병이 없는  한 인간은 70년 이상 수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인생 백  년이 제아무리 흐르는 물과 같다  해도 아직은 내 나이 창창한
20대. 죽음이라니, 그  무슨 고리타분한 개똥철학인가. 사실 고백하지면  그 때까
지도 나는 생에  대한 막연한 환상으로 청춘을 허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러던 내가 조금이나마 철들기 시작한 것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경험하고 난
뒤였다.
  전치 2개월의 치료를 요하는 교통사고는 고교 동창인 필립과 함께 캘리포니아
북쪽 시에라 네바다 사막으로 주말 캠핑을 가던  중에 일어난 사고였다. 끝간 데
없이 펼쳐진 광활한 사막,  지평선 너머 붉게 번지는 저녁 노을,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밥 딜런의 장난기 엄치는 목소리와 그의 독특한 하모니카 선율......
  ‘Don't thing twice, it's all right......'
  두 번 다시 생각하지 말아요. 괜찮아요. 그대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밥 딜런의 음악에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놓는 낙천적인 아름
다움이 있다. 음악에  도취된 상태로 차를 몰아가는 동안에 어느덧  나는 조금씩
긴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대학이라기보다는 교직원  포함 6만여 명의 각국 젊은
이들이 모인 큰 사회집단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한 UCLA  교정의 생경하기
만 한  분위기를 벗어났다는 해방감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맞는 친구와의 여행,
좋아하는 음악, 게다가  눈앞에 펼쳐진 장대한 자연의 모습에 그만  압도되어 넋
을 잃을  지경이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UCLA대학 입학  기념으로
아버지가 내주신 중형 니프는 사막을 여행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차
창 밖으로 거센 모래바람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이대로 영원히 달리고 싶었다.
거칠 것 없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가르며 어디 한  번 저 먼 지구의 끝자락까지
달려 보고 싶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도, 공간도 모두 내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려갔을까.  갑자기 거대한 바윗덩어리 하나가  시야를 가로막
았다. 너무 급작스러운 상황이라 핸들을 꺽거나  브레이크를 밟을 여유조차 없었
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내 몸이 어딘가로 사정없이 퉁겨져  나간다고 생각되던
찰나, 나는 정신을 잃었다.  가물가물 멀어지려는 의식 속으로 시커먼 어둠 자체
의 형상으로 다가온 죽음의 모습을  언뜻 보았던 것도 같았다. 아, 이런 게 죽는
건가 보다.  턱뼈가 부서지고 몸  여기저기가 찢겨나가는 중상을  입고 서른다섯
바늘이나 꿰매는 수술 끝에 겨우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필립은요?”
혼미한 기억을 더듬어 사고 당시를 떠올린 내가 어머니한테 처음으로 꺼낸 말이
었다.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병상을 지키고  섰던 어머니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걱정 마라. 필립은 무사하단다.”
  어머니는 다행히 필립이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기 때문에 나 처럼 중상은 아니
었다며 한숨을 내  쉬었다. 그 며칠 후  필립이 문병이랍시고 왔는데, 팔 다리는
꼬이고 입까지 돌아가  마치 중풍 환자 같은 모습이었다. 사고  당시의 충격으로
잠시 마비 증상이 온 듯했다.
  “마이 아후이(많이 아프냐)?”
  혀가 굳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도 필립의  표정은 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쨌거나 그의 안부를 확인하고 다소나마 마음이  놓였던 탓인
지 나는 다시금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난생 처음 당해 본 큰 사고였다. 당
시의 기억은 몇몇  단편적인 장면들로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유리 파편과
쇳조각들을 날려 올리며  차갑게 몰아치던 모래바람, 오렌지빛  황혼을 몰아내고
불길한 징조처럼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그리고 서서히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매서운 한기,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기괴하게 울려  퍼지던 사막의 황량한 바람
소리.... 사람의 목숨이란 게 이렇게 간단히 끝날 수도 있다니.
  그 때 내가 경험한  죽음은,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장렬하지고, 품의 있게 유
언을 남길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조용히 자신의 일생을  뒤돌아보며 유서를
쓰거나,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럴싸한  작별인사를 나눈다거나 하는 것
은 다만 인간이 바라는 죽음의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어느 한 순간, 숨이 끊
어지는지도 모르고 사그러져 버리는  게 인간의 목숨인 것을.... 비몽사몽간에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 나이에도  죽음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3. 스무 살의 꿈
  ‘만약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 단 하루뿐이라면,  당신은 무엇으로 그 시간을
채울 것인가?“
  평소에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DJ가 던진 이  단순한 질문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았다. 1989년 겨울 교통사고로  휴학 중이던 나는 L.A.의 한 병실에
서 이 방송을 들었다.  아마도 그 때가 나로서는 스무 해를  살아오는 동안 가장
한가롭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야 한가롭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천방지축 뛰놀기에  바빴고 중고등학교 시절은 대부분 명문 대학이라
는 관문을 꼭 통과해야만 한다고 믿었었다. 비록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
으로 건너갔지만 나 역시 한국의 관습과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은 토종 한국인이
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럭저럭 수재 소리도 들어가며  우쭐해하던 나는 버클리
대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기대는 내 뜻과 달랐다. 내가 L.A.에서  통학
이 불가능한 샌프란시스코의 버클리로  진학한다면 4년 간 집을 떠나 있어야 한
다는 사실 때문에 한사코  UCLA를 고집하시는 것이었다. UCLA도 버클리 못지
않은 서부의 명문  대학인데 굳이 부모 걱정시키며 객지  생활 할 게 뭐 있냐고
서운해하시던 부모님들은 내가 결국 마음을 바꿨다는 걸 알고는 뛸 듯이 기뻐하
셨다.
  “네가 잘 돼야 우리 집안이 일어서는 거다. 훗날 판검사나 변호사 같은, 남들
한테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틈만 나면 아들의 장래를 직업을 설계하고 그 뒷바라지에 모든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부모님들은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서만 사는 분들 같았다. 두  분의 사
랑이 자식에겐 너무나 짐이 돼  버렸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난 스무 살이 되면 ,
그렇다, 스무 살이 되면 뭔가 다른 인생을 살아 보고 싶었다. 내 인생에 대한 부
모님의 설계도는  대학 진학까지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다음은 마땅히  내 몫이
되어야 했다. 졸업 후의  진로라든가, 기타 장래 문제는 당연히 부모님들과의 의
논 단계는 거쳐야겠지만 그것이 그분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 이상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망의  스무 살이 된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인가.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나 마찬가지인 치열한 순위  다툼으로 교양서적 한 권 제대로 읽을 만
한 시간도 내지 못하는 데다가  장래 문제 같은 건 아예 계획해 볼 여유조차 없
는 현실 아닌가. 학교에서 1등만 한다고 해서 과연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누군가의 목표가 될 수는 있을 지언정 결코 인생 그 자체는 아니라
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삶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나는  내게 주어진 인생이 단 하루뿐이라는 가정  하에서 진지하
게 자문해 보았다.
  ‘그렇다면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었일까?’
  아쉽게도 너무나 오랜  세월 그것을 방치해 두고  나중으로 미뤄 오며 살았던
까닭에 당장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나는 인생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나 자신을 소외 시켜  왔던 건지도 모른다. 남자 나이 스무  살이 되도록 열정을
바쳐 이루고자 하는 꿈도 하나 없이 그저 타성에 젖은 채로 살아왔던 내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단 하루뿐인 인생을 산다 해도 마지막으로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밝
힐 수 없을 만큼  계획 없이 살아온 게 나였다니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
러한 자신을  다그치기라도 하듯 무작정  독서에 매달렸다. 덕분에  학교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받아 채운 온갖 잡다한 공식들도 삭막해져 버린 내 영혼에도 조
금씩 맑은 공기가 스며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손에 쥐게 된 <바다의 거울>(조셉  콘라드 경)이라는
책의 한 구절이 불현듯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대 정녕  지구의 나이를 알고  싶다면.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의 얼굴을
보라!’
  바다. 그렇다! 그  순간, 어떤 강렬한 전율  같은 게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열한 살 어린 소년의 가슴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던 부산 앞바다의 추억
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되 살아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이루지 못한 첫
사랑의 기억처럼 아릿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UCLA에서 도
서관을 드나들면서 항해에  관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하였다. 그  이야기에 빠져
들며 내 가슴 속에는 이미 무엇인가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바다에 도전한 수많은  사람들이 왜 거의 대부분 백인들인지 의문이  갔다. 아주
드물게 일본인이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백인들의  독무대인 바다에 뛰어들어 한국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들 끓었다.
  며칠을 심사숙고한 끝에 마침내 결심은 굳어졌다.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
하고 싶은 일, 그것을 혼자서 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이로 정했다.
그리고 그 첫단계로 잡은 목표가 바로 태평양을 건너 고국으로 간다는 계획이었
다. 태평양 횡단은, 이를테면 훗날  내가 요트 단독 세계 일주 모험을 떠나기 전
에 치러야 했던 전초전인 셈이었다. 물론 그  일에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 어떤  위험도 바다를 향한 내 지극한 갈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
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또한 그 날이 언제인가는 아무도 모른
다.
  이미 한  번의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나였다. 어쩌면 그  때 나는
죽을 수도 있었는데 운 좋게 살아 남았던  건지도 모른다. 나머지 인생을 보너스
로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두려울 것도 없었다.  사나이 한평생 죽을 때 죽더
라도 뭔가 한  가지쯤 뜻있는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열정이 나를 한없이 들뜨게
만들었다.
  가자, 바다로! 그리운 내 고향, 바다로!
  이렇게 내 청춘의 가장 찬란한 모험의 첫 장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제 2부 태평양 행단
    1. 바다, 그 찬란한 청춘의 출사표
  10년 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설레임! 어린 여동생과 둘이서  어머니를 기
다리며 꿈을 키우던  바다.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늘 반가운  소식처럼 갈
매기가 날던 곳, 그 무한한 가능성과 신비의 세계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있다. 어
쩌면 그것이 바다에 대한 나의 첫사랑이었을까. 나는  그 첫사랑을 10년 만에 만
난다는 설레임을 가지고 향해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일은 요트학교에 등록하는 일이었다.그  곳에서 수영과 수구로 몸
을 단련시키며 항해술을 배우는  틈틈이 아마추어 무선사(HAM) 자격증을 땄다.
또한 기상학 교양 과목도 수강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선배 요트인들을 찾아다니
며 조언을 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선배  요트인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배 요트인들의 한결같은 충고는  떠나기 전 체력 단련을 착
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그 동안 한푼두푼 모아 둔  용돈과 아버지의 주
유소에서 아르바이트로 번 돈이 모두 이 준비 과정에서 쓰여졌다.
  이제 남은 건 요트를 구입하는  일 수중에 남은 돈 1만 달러 가지고는 웬만한
중고 제품 한  척 사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그렇다고 해서 부모님께  도움을 요
청?? 수도 없었다.사실  그 때까지도 부모님은 내가 취미로 요트를  배우는 줄로
만 알았지 그것으로 태평양을 횡단할  꿈까지 꾸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 있
을 때였다. 나는 부모님의 반대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준비가 다 될 때까지는 말
씀드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결국 부모님께서 그  일을 알게 된 것은 내
가 몇 달  동안 수소문한 끝에 CAL사의  78년식 29피트(약8.9m)형 중고 요트를
구입하고 난 뒤  였다. 미화 1만 달러에  구입한 이 크루저급 요트는  당시 미국
경제가 불황을  겪고 있던 탓에 시가보다  엄청 싸게 내놓은 제품이었다.  그 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처음으로 내 힘으로 그렇게  큰 물건을
샀다는 자부심과 항해에 대한  설레임,장차 부모님을 설득해야 할 일 등,머리 속
이 온통 흥분과  걱정으로 가득 찼다. 중고 제품이나마 요트를  구입하긴 했지만
그에 필요한  장비부족도 큰 문제였다.  구명보트, GPS(인공이용 위치측정  시스
템), 통신장비 등등....
  어느덧 90년도 저물어가고  있었다.준비 때문에 항해를 계속  미뤘다가는 결국
내 꿈을  포기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일단 항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만
갖춘 상태에서 떠나기로  하고 부모님의 승낙을 받으려 했다. 예상했던  대로 완
강한 반대,부모님의 눈물 어린 설득이 몇 날 며칠이고 이어졌다. 아직 학생 신분
인 내가,그것도 혼자서 요트를 타고 1만  3000km나 되는 태평양 항해 길에 나선
다니 두 분이 펄쩍 뛰실만도 했다.
  “대체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 거렁뱅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려고 한단 말이
냐?”
  바다 낚시가 유일한 취미였던 아버지는 부두 근처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미국
‘요트거지’들 이야기를 하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에는 한국의
서울역 지하도에서처럼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허름한 요트 안에서 생활
하는 이른바‘요트 거지’들이 있는데, 아버지는 내가  그들처럼 될까 봐 걱정하
는 눈치였다.
  “걱정 마세요,아버지.전,거지가  되겠다고 하는게 아니라 제힘으로  뭔가를 해
보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요트로 태평양 건너는 일이냐, 응? 그게  죽으러 가는 거
지,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을 할수 있단 말이냐?”
  “아버지! 전 죽으러 가는 게 아니고 자립하기 위해 가는 겁니다.”
  어느 새 다 컸다고 끝내  고집을 꺽지 않는 자식을 힘없이 바라보던 아버지는
며칠 동안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제발 절 좀 이해해 주세요.아버지! 제가 얼마나 버클리를 원했는 줄 아시죠?
그런데도 전 부모님 뜻에 따라 UCLA를 선택했어요. 절 잠시라도 멀리 떠나보내
기 싫어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하지만 지
금은 달라요.이번에도 제가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부모님 뜻에만 의존한다면,전
아마 평생 어른이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아버지! 제발 집으로 돌아가
시고 절 좀 믿어 주세요.”
  떠나기 전날,나는 주유소로 아버지를 찾아가 간절히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 날
밤에도 아버지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길 거부하였다. 완강히  돌아앉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난  주유소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쉽사리 승낙을  받아내리라고는 물
론 생각하지  않았지만,당장 내일 출항을  앞두고 있는데 끝내  아버지의 격려를
받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에  발걸움이 무거웠다. 한순간  그냥 아버지
말씀에 따를까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포기
할 수는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했고 정말 간절히 원하는 꿈,누구
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하나하나  준비해 왔던 그 일을 시작도 못 해 보고 이대
로 끝낼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도 이해해 주실 것이다.  당신의 아들이 완전한 성인이
되어 돌아오는 날 흔쾌히 어깨를 두드려 주시리라.’
  그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며 출항 전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직  잠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내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난 어머니나  여동생이려니 싶어
눈도 뜨지않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대답을 듣고도 방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
다. 무슨 일인가 싶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내 앞에 조금은 겸연쩍은 표정으
로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밤새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아
버지의 손에는 구명조끼가 들려 있었다. 울컥 치솟는  눈물에 난 잠시 고개를 숙
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아버지는 내가 친구들과  상의해서 지은‘코리
아 빠삐용’이라는 다소 반항적인  요트 이름을 ‘선구자 호’로 바꾸면 어떻겠
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자식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영화 주인공 빠삐용보다는 어
떤 의미에서든 선구자가 되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마음...., 부모의 사랑이란 바로
그런 것일까.
    2. 태평양의 두 얼굴
  16세기 초의 탐험가이며 바다의 폭군으로 불리기도 했던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자신이 처음  발견한 육지나 항로에 많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중 걸작으로
꼽히는 것이 태평양(Pacific Ocean)인데, 맨 처음 해협으로  들어선 그가 마침 바
람이 잦아들어  파도가 잔잔한 바다를  보고 즉석에서 지어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한 달쯤  아니 적어도 일 주일 만이라도 항해를 한 후에 이름
을 지었다면 태평양은 지금의 이름으로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인도양, 대서양과  함께 세계 3대양으로 꼽히는 큰  바다임에는 틀림없으
나 태평양은 그  이름처럼 평화롭지만은 않다. 내가 경험한 태평양의  모습이 바
로 그러했다. 1990년 11월  7일, 난 마침내 태평양 횡단이라는 모험을 향해 돛을
올렸다. 출발 당시 설레임을 기록한 일기의 한 부분이다.
  90년 11월 7일.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던 것일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오전  9시 요트가 정박해 있는 샌 피드로  항으로 나갔다. 친지들
과 목사님, 기자들이 나와서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가 정말 태평
양을 횡단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10시가 되자  난 ‘선구자’호
에 올랐다. 요트 옆에  있던 미국인 선원들이 선구자 호를 바다  위로 힘껏 밀어
줬다. 드디어 1만 3,000km에 달하는  태평양 횡단이 시작된 것이다. 어쩌면 이것
이 부모님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L.A.
샌 피드로 항을 출발한 지 다섯 시간 만에 내가 느낀 태평양의 첫인상은 한마디
로 ‘미친 바다’였다.
  1년 동안 준비를 했다고 해야 고작 요트학교에서 몇 번 L.A.항구 연안  바다를
항해한 경험이 전부였던 나에게  바다는 처음부터 호락호락한 상대는 분명 아니
었다. 바다에 심상찮은 조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갑자기
불어닥치는 바람에 선구자  1호는 가랑잎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좁은  선실 안
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고 내 몸의 중심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요트
는 흔들렸다. 태풍철도 아닌데 난데없는 강풍을  만난 것이다. 망망대해. 배는 어
느덧 바다 한가운데까지 전진한  뒤였고, 온갖 불길한 생각들이 엄습해 왔다. 마
치 살아 있는 아들의 장례식이라도  치르러 나온 듯 침울해하던  부모님의 얼굴
이 떠올랐다. 정말  내가 죽게 되는 건 아닐까. 떠나기  전의 그 당찬 용기는 간
데 없고, 오직 두려움과 후회만이 나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근
방에 육지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GPS도 없이  천측에 의지해서만
항로를 이어 가던 그 당시, 모든게 절망적이었다. 위성 관측을 통해 거의 1초 간
격으로 배의 위치를  확인해 주는 GPS는 항해에  필수적인 첨단 장비였지만 그
비용이 없어 구입하지 못한 나는 태양과 천측(별의  위치로 항로를 측정하는 것)
에만 의지하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포기해버릴까. 정신없이 몰
아치는 강풍 속에서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선
실 안에서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로 쓴 물을  토해내는 일뿐이었다. 구토는 물 한
모금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내장의 음식물을  다 비워낸 후에도 계속되었다. 헛
구역질과 두통, 나중엔 옆구리며 팔, 다리, 목, 등까지 누군가에게 흠씬 얻어맞은
것처럼 쑤시고 아팠다.
  사실 내가 구입한  CAL사의 78년식 요트는, 일반적으로 대양항해에  부적합한
모델이라는 지적이 있었음에도 내게는  경제적 여건상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
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보다 강력한 엔진이나 장비 등으로 결점을  보완하는 방
법도 있었는데 나는 별다른 준비 없이 항해를 결행하고 말았던 것?甄?. 배야, 너
만 믿는다! 한동안 요동치는  배 안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나는 겨우  한가지 생
각을 해내고 HAM 라디오로 교신을 시도해 보았다.  선실 침대에서 라디오가 있
는 책상까지는 불과 두어  걸음밖에 안되는 거리였지만 나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L.A.항만 무선국에서는 교신을 통해 인근 카타리나 섬의 위치를 알
려 주며  어서 대피하라고 하였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수를  카타리나 섬
쪽으로 돌렸다.
  ‘이럴 때 엔진을 쓴다면 좀더 빨리 갈 수 있을텐데....’ 선구자 1호는 13마력
짜리 디젤 엔진을  갖추고 있긴 했지만 대양을  항해하기에는 동력이 약한 편이
고, 자칫하면 항해 도중  동력이 끊길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정말  다급할 때 이외
에는 사용하지 않는 게 보다 안전하다. 즉, 동력으로 움직이는 일반 상선이 아닌
항해용 요트에 있어서 엔진이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 경우에만 써야 하는 마
지막 비상식량과도 같은 것이어서 사용에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가
령 무풍지대에 갇혀  죽게 되었을 경우 등). 전에  그런 주의사항을 충분히 들어
두었으므로 나는 결국 엔진은 사용하지 않았다.  차라리 항로를 변경하여 강풍의
반대편으로 배를 몰아가기로  한 것이다. 어서 빨리 강풍이 멎어  주기만을 기다
리며 거의 표류하다시피 해서 물 한 모금 못 마신 채로 카타리나 섬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오전 10시에  샌 피드로 항을 출발하여 열두 시
간 가까이 항해하면서 바로 옆 동네로 옮겨  온 꼴이었다. 그러나 우선은 바다와
의 첫 면접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강풍을 뚫고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
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헤어진 지 하루도 되지 않은 가족들 얼굴
이 맨 먼저 떠올랐다.  비록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내가 처음부터 모험
의 대가를 얼마나 톡톡히 치렀는지 알게 된다면 부모님도 자랑스러워하실까? 하
지만 막상 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사
히 잘  있다는 말뿐이었다. “동석아,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와라,  응? 아버지도
널 기다리고 계셔.” “걱정마세요. 전, 잘 해낼 수 있어요.”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부터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다.  ‘어머니, 저도 두려워요. 좀전에 겪
었던 그 어마어마한 파도속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을 하면 자꾸만 용기가 없어져
요. 하지만 결코 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렇게 되면 전 평생 자기 자신과의 약속
하나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속에서 살게 될 거예요.  어머니! 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카타리나 섬에서 강풍이  멎기를 기다리는 이틀 동안 나는
속으로 수없이 많은 다짐을  했다. 괜찮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그 정도의 바
람은 예상했었잖아.  난 해낼 수 있어.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두려움 때문에
내 꿈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평양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이틀 뒤, 나는 행여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카타리나 섬을 떠났다. 그로부터 1주일 동안  바다는 마치 내게 화해 신청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잔잔하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 주었다. 요트 항해에  있어서 바람
은 미묘한 친구이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면  파도가 거세지기 때문에 배가 뒤집
힐 위험이 있고, 반면 바람이 조금도 불지  않으면 배는 대양 한복판에서 오도가
도 못하고 갇혀 있게 된다. 그래서 바람은  항해자에게 있어 생명과 죽음의 양면
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항해 첫날의 지독한  경험과는 달리 중간 기착지인 하와
이로 향하는 그 일 주일 동안 배는 시속 7~8km씩 비교적 순탄하게 움직였다. 잔
잔한 파도와 적당한  바람, 이대로 간다면 하와이까지 1개월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소 아쉬운건 카타리나  섬을 출발한지 5일 동안 하루도 해
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바람이나 햇빛이 아닌 나 자
신의 부주의로 빚어졌다.
  섬을 떠난 지 이틀째 되던 날, 밥을 짓기  위해 물을 틀었는데 냄새가 좀 이상
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선실 안에 비치되어  있는 간이 싱크대 개수통으로 곰
팡이 같은 게 떠다니고 있었다. 얼른 바깥에 있는 물탱크를 확인해 보았다. 탱크
안에서는 물이 썩어  악취가 진동하였다. 탱크 안에 저장해 놓은  물을 정화시키
기 위해서는 필히 클로락스를 넣어 두어야 한다는  걸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바닷물로 밥을 지었더니 소금 알갱이를 씹어먹는게 차라리 나을 정도였
다. 덕분에 하루를 꼬박 과일 통조림으로  때웠다. 뱃멀미가 다시 시작되었다. 바
다 한가운데서 식수가 떨어지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당장 마실
물이 없으니 갑자기 더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허탈해진 마음으로 하늘만 바라
보던 나는 비라도 내려 주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추축컨대 현재 내가 있
는 위치는 L.A.에서 450해리쯤 떨어진 태평양상이다. 하와이까지는 아직도  1,800
해리나 남았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흘 후에는  가스레인지마저 고장
나 버렸다. 이젠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식수난에 가스레인지
까지! 잠깐의 실수가 심각한 재난으로 돌변해 있었다.
  “오, 하느님!” 그동안 부모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가지 않던 내가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인간이 재난 앞에서는 신을  찾게 된다더니 내 경우가 꼭
그랬다. 가스레인지가  고장나 버린 그  날 저녁부터 기도  덕택이었는지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마실 물이라도 생겼다는게 천만다행이었다. 물탱크
를 말끔히 청소하고 대신  빗물을 받아 두었다. 배에 오른지 거의  일 주일 만에
처음으로 빗물에 샤워도  했다. 오염안 된 바다에서 시원한 빗물을  받아 마시고
나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그러한 자연의 혜택도 잠시뿐. 받아 놓은 빗물은 겨
우 이틀 만에 동이  나 버렸다. 무더위 속에서 갈증을 이기지  못해 음료수는 벌
써 바닥난 지 오래였고 옥수수나  과일 통조림 바닥에 조금 남은 수분을 핥아먹
으며 나는 목을  축여야 했다. 또 식사라고  해야 생라면이나 참치 통조림, 비스
켓, 꽁치 통조림 등으로 허기를 때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
니 눈을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오로지  먹을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어머니
가 만들어 주시던 구수한  된장찌개, 시원한 냉면....  하다못해 익은  쌀밥 한 공
기만 생각해도 군침이 넘어갔다.
  사소한 부주위가 인간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닫
게 되었다. 이제 겨우  항해 시작 일 주일밖에 안 되었는데도  나는 앞으로 있을
87일 간의 태평양  횡단은 물론 그후 3년 6개월  간의 세계 일주 여행에 필요한
항해수칙의 거의 대부분을  몸으로 체험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것을 배웠
다. 지식보다는  행동이, 말보다는 실천이 인간의  미래를 가능케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는 동안에 나는  어느덧 조금씩 마음의 키를 키워 가고 있
었던 건지도 모른다.
    3. 하와이를 향하여
  본격적인 항해가 시작되면서  피로가 쌓여 가기 시작했다. 2~3시간씩  조각 잠
을 자야 하기 때문에 우선은 잠이 모자랐고, 또  선실 안에서 혼자 음식을 해 먹
는 데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깡통  음식에 의존하여, 영양 섭취도 어려웠
다. 거기다 긴장이 계속 되었다. 행여 주변을 지나는 큰 상선들과 부딪치지 않을
까, 암초에 걸리지 않을까 등등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망망대해의 연속이었다. 날씨가  좋을 때면 돌고래가 잠시
친구가 되어 주기도  했으나 그렇게 한가한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어느  날은 배
의 위치를 알려 주기 위해 30피트 높이의 돛대에 달려 있는 레이더 반사경이 강
풍에 느슨해져 엄청난  소음을 냈다. 처음엔 다음 기착지까지 그럭저럭  참고 갈
생각이었으나 소음이 점점 커져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할 수 없
이 조심스럽게  돛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요트에서  돛대를 타고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 보통 위험한게 아니다. 그대로 바다에 빠질 수도 있고, 돛
대가 무게를 못이겨  쓰러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입에 칼을  물고 올라가는데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겨우 겨우 레이더 반사경을 고친  뒤 내려오자 온몸에 힘이 빠져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 지날 때마다 난 스스로에게 물었다. “편안
한 비행기를 두고  왜 이렇게 어렵게 요트로 고국에  가려 하는가?” 대답은 한
가지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또 이  일을 통해 한국인도 요트로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내가 이 모험에 성공함으
로써 나 같은 처지의 젊은이들?“? 자신들도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기도 하고 또 며칠씩 강풍이 몰아닥치기도 하는 등 태평양
은 내 기운을 모두 빼먹으려는 듯 속을 썩였다.  날씨가 나쁠 때면 잠시 눈을 붙
이는 것조차  어렵고 음식도 해먹을 수  없어, 나는 완전히 탈진  상태에 빠졌고
뱃멀미도 심해졌다. 며칠간  계속되던 강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선상에 가만히
앉아 바다  구경을 하다가 배에 싣고  온 낚시 도구가 생각났다.  이제까지 험한
바다를 뚫고 나오기 급급하여 낚시는 꿈도 꾸지 못했는데 지금 정도의 바다라면
한 번 해 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낚시줄을 드리우고 얼마쯤 지났을까. 묵직한
느낌이 손에 전해졌다. 가까스로 끌어당긴 낚시줄 끝에는 4kg은 넘을  듯한 황다
랑어가 매달려 있었다.  살아 펄떡거리는 그놈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좀 잔인하긴  했지만 망치로 머리를 내리쳤다.  물고기에게도 그렇게
많은 피가 있었나 할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배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놈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서툴지만 회를 떠서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맨날 깡통  음식에 의존하고 있다가  얼마만에 먹는 신선한  생선회인가. 험한
파도를 뚫고 나온 내게 바다가 주는 선물인 것  같았다. 생선이 너무 커서 한 번
에 다 먹을 수는 없고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크게 포를 떠서 말리기로 했다. 바
닷바람에 잘 마르면 당분간 저장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밥도 지어 참치회
와 함께 제대로 된 식사를  하였다. 상쾌한 햇살과 적당한 바람, 이 날씨가 며칠
만 계속된다면 하와이까지 항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 하다. 오랜 만에 포
식도 했고 날씨가  좋으니 다시 자신감이 생기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러나 내
일이면 날씨가 또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그런  아무도 모른다. 다행히 큰 어려움
없이 선구자 1호는 하와이 해안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멀리 하와이가 보이자
눈물이 왈칵 솟았다. 12월 8일, 하와이 앞바다가 있는 수많은 요트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호놀룰루에 입성했다. 일단 일차 관문은 넘어선 것이다.
    4. 기다리는 아버지
  토니 강(Tony Kang).
  미국 친구들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언제나 ‘강동석’
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나 또한 그 이름을  어디서나 자랑스럽게
소개하곤 한다. 17년 전 아버지를 따라  L.A.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래 우리 가족
은 집안에서  만큼은 항상 모국어를 쓰기로  약속했다. 먼저 이민 온  교포 가정
중에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의사소통 문제로 고충을 겪는 모습을 종종 접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민 생활을 오래 했어도 언어  습득 능력이 자식 세대에 비해
뒤질 수 밖에 없는 부모  세대들은 사실 사회 생활에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영
어 쓰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 하지 않는다. 그 만큼 모국어가 몸에 밴 까닭이다.
  반면, 한창 지적  감수성이 발달할 나이에 영어권에 들어온 자식  세대들은 새
로운 말을 배우는  속도도 훨씬 빠르고 적응 과정이 무척  자연스럽다. 학교에서
나 또래 집단들과의 어울림을 통해서도 영어를 자주 쓰기 때문에 차츰 모국어를
잊어 가는 대신에 하루가  다르게 혀가 돌아 가는 것이다. 낯선  타국 땅에서 그
렇잖아도 영어를 몰라 촌뜨기  취급을 받기 십상인 부모 세대들에게는 자식들의
그럴듯한 영어 발음만으로도 처음에는 마음이 놓이는 법이다.
  ‘내 자식만큼은 서양 사람들하고 똑같이 만들어야지!’
  말로는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으면서도 속으로는 엄연히 뿌리깊은 우월의식과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는 미국 땅에서 사람 대접이라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언어 문제가 절실했다. 우리 교포들에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바람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자연 영어가 서투른 부모 세대와  모국어를 잊
어 버린 자식 세대들 간에 언어 장벽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모가 자식을 타이르
려 해도 말이 통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설득하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
이다. 그리하여 간혹  부모 자식간에 의견 충돌이라도 생기면 양측이  서로 다른
언어로 속마음을 표현하느라 곤욕을 치르는 광경을  보아야만 했던 아버지는, 어
린 나이에 미국 생활을 시작한 우리 남매에게 집안에서 만큼은 반드시 한국말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덕분에 다른 교포  친구들보다 영어를 익히는 속도는 좀 떨어졌지만,  훗날 생
각해 보니 아버지의 그 깊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조국을 등
지고 떠나온 아버지였지만, 자식들만은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기를 바랐을 그
마음.... 가슴속에 조국을  향한 애증과 그리움의 흉터를  간직한 채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모진 아픔과 설움의 세월.
  시작부터 순조롭지 못했던 태평양  항해의 중간 기착지인 하와이에서 내가 만
난 수많은  한국인들은 바로 내  아버지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한국의 젊은이가
요트를 타고 태평양 횡단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백여 명의 교민들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던 이민 생활의 외로움, 고국에 대한 진한 향수.... 구한말,
몇 해째 계속되는 흉년으로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던 우리 선조들이 오로지 살
기 위해 이민선을  타고 떠나왔던 만리타국, 우리 나라 역사의  뼈아픈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하와이 이민사의 잔재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곳곳에 배어 있는
듯한 그 땅에서 아버지는 우리 교민들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남아 강동석! 하와이 입성을 환영합니다.’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순간, 교민들이 나를  위해 준비해 준 낯익은 글
자들이 왠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물론 L.A.에서도 한글 간판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한국인들도 많이 살고  있어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이
날 만큼은 한글 현수막을 들고  교민들과 함께 서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눈물겹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들의 항해를 끝까지 못마땅해 하셨으면서도 하와이까지 날아와 까치발로 자
식을 기다리고 서 있는 아버지. 한국 사람들은 돈밖에 모르고, 젊은 애들도 학교
에서 1등만 하려고 할 뿐 용기도 없고 모험심도 없는 겁쟁이들 뿐이라고 헐뜯는
서양인에게 우리도 뭔가 보여  주자며 주먹을 불끈 쥐던 또 다른 아버지들.... 어
느덧 내 아버지 또한 그들과 한편이 되어 있었다.
  “석아! 이왕 하기로 한 일, 모쪼록 잘 해내거라!”
  L.A.를 떠난 지  한 달 만에 만난 아버지는 분명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고단한
이민 사회에서 소수 민족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었던 편견과 차별, 10년 넘게
미국에 살면서도 결코 그들과  섞이지 못했던 나름대로의 응어리진 한이 아버지
로 하여금 고국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싫어서  떠난 조
국이라 한들 남의 나라에서 겪는 설움만이야  하겠는가. 가끔은 자신이 한국인이
라는 사실마저도 부정하고 싶어했던 아버지였지만 하와이에서 우리 교민들이 나
에게 베풀어  준 온정을 확인하고는  끝내 눈물을 떨구었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자식 네 자식 가리지 않고 무사귀환을 빌어 주던 그 수많은 얼굴
들. 항해자에게는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구명보트며 일체의 장비를  마련해 주기
위해 모금운동까지 벌인  그분들의 뜨거운 격려에 나  또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곳에서 항해를 떠나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동포애를 느끼며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잠시도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 식사 때마다,
혹은 잠자리 걱정까지 해 주느라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교민들, 창피스러워 거절
하는데도 ‘아들 같은데 뭐 어떠냐’며 속옷 빨래까지 챙겨 가곤 하던 아주머니
들. 용기를 넘어선 소명감 같은 것이 내게 또 다른 힘을 주었다. 이제 나의 모험
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남의 땅에  붙박여 살고 있는 우리  모든 교민들의
한을 풀어 주는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가 다시금 나를 일어서게 하였다.
    5. 육지의 유혹
  태풍 철을 피해  하와이에 머물던 4개월 동안,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하루는 배에서 자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요트 선착장 부근  자동차 주차장
에서 무위도식하는 하와이 원주민이었다. 그는 낡은  독일제 밴을 주거지로 삼아
걸식도 하고, 잘 곳이  없는 여자들을 재워 주면서 용돈을 벌어  쓰기도 하는 40
세 가량의 남자였다.
  “헤이, 토니! 이  아가씨 잠잘 데가 없어서 데려왔는데  하룻밤만 재워 줄 수
있지?”
  전에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그 남자가 웬 흑인 여자를 데려와 부탁을
했다.
  “내 차에는 또 다?? 손님이 있어서 말이야.”
  나는 마음 착한 그 하와이  원주민이 갈 곳 없는 아가씨에게 친절을 베푸느라
그러는 줄 알고 할 수 없이 선실 안에  있는 여분의 침대를 내주었다. 나이가 25
세쯤 되어 보이는 그 흑인 여자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망설일 것도 없이 껑충
껑충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잘 해 보라구!”
  원주민 남자가 짖궂은 미소를 흘리며 돌아간 뒤에도 난 그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몰랐다. 선실로  들어간 나는 솔직히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침대가 두
개이긴 하지만 두 평 남짓한 비좁은 선실 안에서 남녀가 같이 밤을 보낼 생각을
하니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얼떨결에  부탁을 받아들인 뒤
였고, 또 그녀가  잘 곳이 없다는 데야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건 말건 쭈삣거리며  침대에 누워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
녀가 내 몸을 더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돈은 받지 않을게요.”
  이게 무슨 소린가.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는 얼른 그녀를 몸에서  떼어내며 벌
떡 일어나 앉았다. 대개 모든 휴양지가  그렇듯이 하와이에도 길거리에서 매춘을
일삼는 외국 여성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간혹 숙박비를 아끼느라 혼자 지내
는 남자들의  차 앞이나 요트를  기웃거리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나로
말하자면 아직 스물한  살밖에 안 된 점잖은 집안(?)의 토종  한국인인데 벌써부
터 그런 여자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흑인 여자는
밤새 치근덕거리며  내 침상을 넘보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를  쫓아낸 다음에야
가까스로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그 다음날은  더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다.
L.A.에서 부모님이 다니던 담임 교회  목사님이 나를 찾아왔다. 부모님의 부탁으
로 내가 하와이를 떠나기 전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격려차 방문한 길이었다.
  저녁 늦게 도착한 목사님과 음식점을 찾아가기 위해 와이키키 해변을 걷고 있
는데 웬 젊은 여자들이 다가와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시간은 벌써 자정쯤 되어
있었다. 그 여자들은 다 늦은 시간에 해변에  나타난 말끔한 양복 차림의 목사님
을 일본쯤에서 온 돈 많은 사업가인 줄  알고 유혹하려는 매춘부들이었다. 몇 마
디 대화를 통해 그녀들의 신분을  눈치챈 목사님이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쳤
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느냐? 사탄아, 물러가라!”
  그 말에 혼비백산한 여자들이 같이  있던 나에게 저 사람이 대체 누구냐고 묻
기에 사실대로 말해 주었더니 5,6명의 매춘부들이 동시에 외쳤다.
  “목사가 왜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거야?”
  매춘부들이 도리어 목사님을  나무라듯 하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90년도 저물
어 가고 있었다. 나는 요트를 손보는 틈틈이  선착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알라
모나나 쇼핑센터 서적 코너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주로 해양 관련 서
적이나 내가  좋아하는 윌리엄 버클리의  <에어본(Airbourne)>, 노도프 &  홀의
<바운티오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 등의  해양 소설을 읽으며 하루빨리
태풍 철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이상하게도 바다에  혼자 있는 것보다 육지에
서 여러 사람들과 섞여 지내는 동안에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한낮이 되면 와이
키키 해변에 몰려드는  수많은 연인들. 어디를 가나 다정하게 팔짱을  끼거나 사
랑이 가득한 눈길로 서로를 응시하는 연인들을 볼 수 있었지만 나는 혼자였다.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고독. 물론 가족처럼 나를 대해 주는  교민들의 따뜻한
마음씨가 그나마 외로움을  덜어 주고는 있었지만 항상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비어 있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  때는 무섭고 끔찍하기만 했던 바다.
그 바다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진정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토록 편안한
육지가 아니라 저 험난한 바다 한가운데라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초조하게 만들
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태풍 철에 바다로  떠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
었다. 나는 틈나는  대로 기상청에 문의하여 언제쯤 떠날 수  있는가를 체크하며
하루빨리 바다로  나가게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바다는 아무래도  내 가장
좋은 친구였던 모양이었다.  때론 아옹다옹하면서도 잠시만 떨어져  있으면 못내
안부가 궁금해지는 악동들처럼....
    6. 밤 바다를 지나 고향으로
  “학생, 바다에 나가지 마! 가면 죽게 돼.”
  교포 할머니의 불길한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걸까.  하와이를 떠나 부산으로 가
기 위해 세  번째 출항 시도를 하면서  왠지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내가
죽는 모습을 봤다며 일부러 찾아와 출항을 만류하던 교포 할머니의 스산한 표정
이 불현듯 떠올랐다. 두  번의 출항 시도가 실패로 끝나 버린  일과 그 할머니의
꿈이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걸까 찜찜한 기분도 들었다. 왜 하필  잘 알지도 못
하는 교포 할머니의  꿈에 내가 나타남 걸까.  그것도 죽은 모습으로. 교민 환영
행사장에서 한 번 인사를 나눴을 뿐인 그 할머니는 내가 고국에 두고 온 자신의
외손자를 닮았다며 몇  번이고 얼굴을 쓰다듬어 보곤 하였다. 그런  남다른 관심
때문이었는지 나에 대한 꿈까지 꾸었다는 할머니를 다시 만난 건 공교롭게도 때
아닌 태풍으로 출발 직후 기수를 원점으로 돌려야 했던 1991년 3월 초였다.
  “할머니!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전 꿈 같은 건 안 믿어요.”
  설마 할머니의 꿈이 맞는다 해도 출발을 미룰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될 운명이
라면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얄궂은 운명 같은
건 육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기분 좋게 흘려 보내고  떠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나를 친자식처럼  염려해 주는 할머니의 노파심 때문이려니 생
각하고 출발한  지 채 10분도 못  돼 하늘이 새까맣게 흐려졌다.  예보에도 없던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면서  태풍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호놀룰
루 해양기상청에 연락을  취해 봤더니 하와이 근해가  곧 태풍권에 들게 됐으니
돌아오라는 교신이 왔다. 결국  뱃머리를 항구 쪽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날 회항 이후 다시 얼마간의  준비를 하여 시도한 두 번째 출발 역시 실패로 돌
아갔다.
  2주전의 일이었다.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고 바다가 잠잠해졌다 싶어  다시 출
항을 시도한 3월 중순경 항구에서 불과 6km쯤 나아가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배
의 움직임이  둔탁하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확인해 보니
로프가 물에 잠겨  디젤엔진을 칭칭 휘감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배가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나는  서둘러 VHF 교신을 통해 해양경비대 측에 구
조 요청을 했다.  다행히 항구 근처에서 사고가 발견되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바
다 한가운데서 그런 일이 생겼더라면 영락없이 물귀신 신세가 될 뻔했다고 생각
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머지않아 익사하고  만다. 나가서는 안 되는
날에 바다로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조금 덜
익사한다.’ 대양 항해의 대선배 격인 존 M. 싱의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
지 않은 명언이다.  이후 나는 가급적 출발만큼은 최대한 안전한  시점을 택한다
는 대원칙 아래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4월. 더 이
상 지체하다간 곧 태풍 철이 시작될 때였다.  사실 하와이에 머무는 기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교민사회에도 말이 많았다. 강동석이 용기를 잃었다, 항해를 포기
해 버렸다, 등등. 나를  둘러싼 무성한 추측들이 4만 여 교민사회에 실망감을 안
겨 주고 있다는 것쯤 모를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쳐 놓고도 번번이 되돌아와야만 했던 내 마음도 조급하긴 마찬가지였다.
  1991년 4월 11일 자정.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왔다. 그 동안 정들었던 교민들
이 베풀어 준 조촐한 환송 파티를 마치고 배에  몸을 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할
머니의 꿈 이야기가 또다시  생각난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하게 되는 건 아닐까.
기상청에서는 조만간 태풍 월트의  상륙을 예보하고 있었지만 당장은 출발에 무
리가 없다는 설명이었기에 그다지 심각한 위험은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
는 일반 상선이나 어선들의 활동이 뜸한 밤 시간을 택해 출항하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져 먹었다. 겁낼 것  없다. 이미 나에게는 27일 간의 항해 경험이 있지
않은가. 미국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단독 세계 일주를 두 번씩이나  한 경험이
있는 헤리 피전이라는 사람은, 누구나 단 하루만  요트를 타본 ?戀窩? 있으면 세
계 일주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오늘 하루 항해를 한 사람이 내일 또 배를 탄다면 이틀 동안의 경험이 쌓이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해서 한  달, 혹은 1년 이상의 오랜 항해 경험을 쌓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경험의 시작은 첫날 한  시간부터라는 뜻인데, 요트학교에 다니며
고작 50시간의 근해  경험이 전부였던 내가 선뜻  대양 횡단의 모험에 뛰어들게
된 용기도 그 첫날 한 시간의 모험을 통해서 얻어졌다. 이제 나는 L.A에서 하와
이까지, 그 27일  간의 항해 경험을 바탕으로 장장 5,300해리(9,540km)나  떨어진
부산항까지 모험을 이어  가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갈수록 더  크고 총총
한 별들! 카시오페아, 오리온, 전갈자리, 저 멀리 보이는 북극성....
  도시에 살면서  잊고 있었던 별자리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본다.  달빛을 받아
나의 작은 돛단배는 하얀 몸체를 더욱 뽐내듯 파도를 타고 바람이 밀어 주는 대
로 며칠 간 순항을 계속하였다. 밤 항해의 묘미, 그것은 대자연이 주는 고요함에
있다. 물소리, 바람소리, 떼지어 노는 물고기 소리, 투명하고 커다란 보석처럼 빛
나는 별들의  속삭임. 밤 바다에는 분명  많은 소리가 있지만 그  소리들은 다만
자연의 장대함을 일깨워 주는 고요  속의 하모니로 나그네의 갈 길을 인도해 주
는 항해등 구실을 한다. 어느 때는 그  고요함이 너무도 낯설어 당황스러웠던 적
도 있었다. 대양 한복판에 철저히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 그럴 때의 고독은 차
라리 두려움이라고 해야 옳았다. 배는 하염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가도가
도 똑같은 망망대해뿐. 때로는 하루를 사람의 그림자도  구경해 보지 못한 채 항
해를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마약에 취하듯 단파  라디오로 주파수가 잡히는 대로 세계 여러 나
라의 방송을 청취하거나 아무데나  교신을 청해 보기도 하면서 가까스로 졸음을
참아야만 했다. 항해자에게 있어 졸음은 최대의 적이다. 어느 한 순간 깜빡 조는
동안에 배가 뒤집힐 위험이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행여
지나가는 배들을  발견하지 못해 충돌이라도  하지 않을까, 주변에  암초나 상어
떼 같은 게 출몰하지는  않나, 혹은 갑자기 높은 파도가 덮쳐  오지는 않나 해서
거의 24시간을 뜬눈으로  세워야 했던 나로서는 잠도  편안한 선실이 아닌 갑판
위에서 자야 마음이 놓였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나 스
스로 모든 감각의 안테나를 열어  놓고 밤을 낮 삼아 항해하기를 벌써 23일째였
다. 단파 라디오를  통해 ‘미국의 소리(VOA)’를 수신하니 인도양에서  발생한
갑작스런 태풍으로 방글라데시에서 12만 5,000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근접해
있는 괌  기상청에 날씨 상태를 문의해  보았다. 태풍 월트 호가  인접해 있다는
좋지 않은 소식이 겹쳐졌다. 불운은 항상 또 다른 불운을 동반한다. 태풍 직전의
무더위로 디젤엔진까지 고장난  산태에서 배는 겨우 시속  1.2km나 갈까말까 한
무풍지대에 갇혀 하루  종일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태풍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데 바람 한 점 불어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주저앉아 태풍이 나를 피해 가기만을  기다릴 것인
가. 아니면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조금씩이라도 태풍을 앞서가야  할 것인
가. 결국 나는 정면돌파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마치 한증막에라도 갇힌 듯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무풍지대를 필사적으로 탈출하기 위하여 북서쪽으로 배를 몰아
가기를 꼬박 이틀  동안이나 했다. 가까스로 태풍 중심권을 벗어나는  동안에 시
속 54km의 강풍과 함께 쏟아 붓는 거대한 장대비 속에 휘말려 버렸다.
  ‘학생, 바다에 나가지 마!’
  새벽 1시부터 2시간 동안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으
며 갑판을 지키고 있자니 문득문득 하와이 교포 할머니의 목소리가 마치 이명처
럼 귓전에 울려 퍼졌다. 온몸이 비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주인의 무력
한 몸뚱어리를 싣고  내 가엾은 돛단배는 사정없이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시커먼 하늘, 사방이 어두워  금방이라도 발을 헛딛고 배 밑으
로 추락해 버릴 것만 같은 바다.... 이 넓은 바다에 과연 나 혼자뿐이란 말인가.
  “나는 죽지 않는다! 반드시 살아서 부산까지 가고 말 테다!”
  마음속의 두려움을 떨쳐내려  미친 듯이 소리도 질러 보았다. 그  간절한 외침
조차 삽시간에 삼켜 버리고 이내 죽음의 검은  이빨을 드러내며 비웃는 바다. 그
것은 더 이상  뭇별들의 전설을 속삭여 주던 낭만적인 친구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 바다는 어린아이에게  쉴새없이 싸움을 걸어 오며  힘 자랑이나 하는 못된
녀석처럼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 녀석말고도 ‘용기’라는  이름의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를 악
물고 폭우  속을 뚫고 나갔다.  강풍이 다소나마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돛을
모두 내리고 바람을 뒤로 한 채로 배를 파도타기하듯 몰아가는 방법으로 진군을
계속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힘겨운 사투 끝에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
니 바다는 어느덧  거짓말처럼 잠잠해진 뒤였다. 날짜를  보니 1991년 5월 25일.
스물한 번째 맞이하는  내 생일이었다. 이제 열흘 남짓한 항해를  계속하면 부산
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위치는 부산에서 불과 500해리(900km)  떨어진
일본 열도 근해였다.
  “고맙다, 배야!”
  나는 바다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생일을 자축하며 캔 맥주를 마셨다.  그 동안
힘든 항해에도 불평 한 마디 없이 견뎌 준 나의 사랑스런 돛단배 선구자 호에게
도 한 잔, 그리고 썩 사이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내 쪽에선 한사코 마음이 끌
리는 성질 고약한 친구  바다에게도 한 잔.... 그렇게 혼자서 생일 파티를 즐기며
L.A.에 있는 HAM 동호회 친구를 통해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는 순간 문득 목이
메었다. 이제 며칠 후면 부산에 당도하실 부모님의  그리운 얼굴이 밤 바다를 훤
히 비추는 저 달 속에 있었다.
    7. 그 곳에 가기 위하여
  태평양 횡단 80일째.
  제주도를 바로 눈앞에  두고 대한해협으로 접어들면서 맨  처음 나를 반겨 준
것은 ‘올카’라는 식인  고래였다. 일단 행동을 개시했다 하면 웬만한  어선 하
나쯤 침몰시킬 수도 있는  위력을 가졌다는 힘세고 덩치 큰 식인  고래. 내가 그
녀석을 발견한 것은 선체 밑  부분을 점검하기 위해 로프를 허리에 감고 바닷물
에 잠수해 들어갔을  때였다. 물안경을 쓰고 엔진 근처에 달라붙은  해초며 조개
껍질 등을 대충 떼어내고 있는데  물살을 통해 이상한 조짐이 다가오는 게 느껴
졌다. 무심결에 슬로우 모션으로 고개를 돌려 본 순간, 하마터면 나는 바다 속이
라는 것도 잊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올카가  천천히 헤엄을
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먹이감을  찾고 있는 것일까. 나는 최대한
움직임을 적게 하여  뱃전으로 기어 올라왔다. 올카에게 내 모습을  들켜 버린다
면 끝장이었다.
  상어나 고래 등 위험한 어류가 출몰하는 지역에서는 가급적 물에 들어가는 일
을 삼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방심한 상태에서 그 지역을 안전지대로 착
각했던 게 내 잘못이었다. 바다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든 안전지대가 있을 수 없
는데도 말이다.  가까스로 녀석을 피해  뱃전에 올라서긴 했어도  재난의 위험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채였다. 어느 순간 녀석이  그 거대한 몸뚱이로 배를 들이받
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속도를 빨리  해 도망치자니 오히려  녀석의 신경을
자극할까 두렵고, 가만히 있자니 그것도 못할 노릇이었다.  결국 궁리 끝에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채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
  ‘바다에는 나보다 더 맛있는 물고기들이  많으니 제발 너는 네 갈 길이나 가
라, 응?’
  조마조마한 상태로 서서히 배를 몰아가기를 10여  분, 동정을 살펴보니 녀석은
다행히 다른  길로 비켜 가고 있었다.  비로소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뿐이었다.
육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데 바람은  한 점도 불지 않고 비상시에 대비한 디
젤 엔진의 연료도  거의 바닥난 상태여서 난감하기만 했다. 계속되는  무풍과 역
풍의 연속으로 초조해진 나는 육지가 가까워졌다는 표시로 바닷물이 초록색으로
변하는 걸 보고 주위 선박들에게 교신으로  도움을 청하려 했다. 하와이에서부터
50일이 넘도록 하루도 쉬지 않고  항해하다 보니 연료는 물론 식수도 점점 고갈
돼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직 생소하기만  한 요트를
타고 팔자 좋게  여행이나 하고 다니는 것 같은 거부감  때문이었을까. 안타깝게
도 주변을 지나는 선박들 가운데 내가 의지할 수 있겠다 싶어서 도움을 청해 본
우리 나라 선박들은 슬금슬금 피해  가기만 할 뿐 좀처럼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우린 밤낮없이  바다에 나가 고기라도  잡아오지. 넌 대체  뭐하는 놈이기에
젊은 놈이 하릴없이 요트나 타고 돌아다니며 민폐를 끼치는 것이냐?’
  간혹 먼발치로 지나가는 고기잡이 어선의 내 또래 젊은이들조차 그런 곱지 않
은 눈으로 내 배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외국 상선들과
교신을 시도해  보았다. 이번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항해 시작 후 처음으로
인간적인 섭섭함을 느껴야 했던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들 눈에는 내가 그
저 팔자 좋은 여행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걸까.  소금기와 해풍에 찌들 대로 찌
들어 버린 몰골, 헝클어진 머릿결, 덥수룩이  자란 수염, 새카맣게 그을린 피부....
겉모습으로 치자면야  그들이나 나나 다를 게  없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않은
채 진로 방해나 하고 다니는  내 모습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꼴사납
게 보일 수도  있을 터였다.더욱이 요트라는 게 일반 사람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엄청난 사치품 정도로만 인식돼  온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선입견을 가질 수
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고국이라고 그 먼 길을 달려 여기까지 왔는데.......’
  마음 한 켠에서는 고국 땅  근해에서 첫번째로 받게 되는 그런 오해가 섭섭하
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그 정도의 오해나 편견은 있을
수 있는 법! 나는  되도록 마음을 여유 있게 가지려 애쓰며 계속해서  주위 선박
들에게 교신을 시도해  보았다. 얼마 후, 길이  100m쯤 돼 보이는 소련 선박  한
척이 신호를  보내왔다. 뜻밖에도 나를  도와 주겠다고 하는  선박이 공산국가인
소련 선박이라는 걸 안 순간,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뭐라 꼬집어
말하긴 어려워도 일종의 두려움 같은 게 섞여 있는 생경함이라 해도 좋을 것 같
다. 아무튼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경유가 필요하다는 것과
식수를 요청하는 교신을  했는데, 그들도 처음에는 다소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었다.
  “이 배는 승객 100여 명을 태우고 베트남을 출발하여 지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중인데 남한테 도움을 줄 형편이 못된다.”
  영어로 대충 전해 온 그쪽의 교신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다
른 배를 찾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교신이 왔다. 소련 사람들도 마
음이 약했던지  부탁한 대로 경유를  나눠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안전 거리를  유지하며 다가온 그들이 내  배에 경유와 식수는 물론  빵과
커피를 비롯한 음식물들을 보내주었을 때, 나는  감격한 나머지 고향의 친지들에
게 주려고 가져온 미국산 최고급 육포 한  꾸러미를 선물로 내주었다. 육포를 받
고 고마워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한 오십 세쯤 되었을까. 인심 좋
게 생긴 선장이 육포  맛이 일품이라는 뜻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경유와 식수를 공급받고 기운을 되찾은 나는 부지런히 배를 몰아 제주
도 근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침 인근을 지나던  해군 함정이 나를 발견한 것
은 5월 31일 새벽녘이었다. 이제 해군  함정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부산으로 항진
하려니 새삼 힘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선구자 1호가 87일  간의 태평양 횡단을
무사히 마치고 고국에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아마추어 무선 교
신사들의 격려가  빗발쳤다. 그 중 몇몇  고국의 HAM 동호인들은  국내 상황이
좋지 않다며 도착  일정을 하루 이틀 늦추는 게 현명하리라는  충고를 보내왔다.
내용인즉, 당시 국무총리인  모 인사가 외국어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계란 세례를
당한 일로 나라 안이 온통 들끓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공연히 이럴 때 들어왔다가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초라하게 묻혀 버릴
수도 있으니 사태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화려하게 부산항에 입성하는 게 낫
지 않겠어?”
  교신으로 연락을 취해  온 친구들도 같은 내용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말하
자면 내가 한  일을 세상에 부각시키기 위해  일종의 쇼맨십을 취하라는 충고였
다. 나로서는 한국  최초의 요트 단독 태평양 항해라는 신기록이  국내의 어수선
한 상황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하게 되는 걸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영웅이 되기 위해 고국에 온 건 아니었다.
내 영혼의 탯줄이 묻혀 있는 땅, 한국.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이 곳은 엄연한 내
조국이었다. 11년만의 귀향. 그토록  오랜 세월과 그리움의 강을 건너 마침내 87
일 간의 피나는  노력으로 고향 땅을 밟게  되었는데 단 1초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1991년 6월  3일, 나는 부산 수영만으로 들어와 부모님과 몇몇
친지들이 기다리고 있는 요트 정박장에 닻을 내렸다.
  물씬한 고향 냄새! 나보다 더 오랜 세월 고국을  잊고 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
의 얼굴에는 사뭇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싶었다.  더 이상 무슨 영광이 필요하겠는
가. 사랑하는 고국 땅에 부모님을 모시고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내가 한 일에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토록 오랜 세월 고국
땅을 등지고 살아야만  했던 부모님들을 이 곳에 오게 한  일이야!’ 돌이켜보건
대 내가 고국 땅에 첫발을  딛게 된 순간의 감동은 어쩌면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는 부모님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제3부 아버지 그 고단한 삶의 무풍지대
    1. 잠시 동안의 정착, 그러나 육지 멀미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해낸 일이라고는 해도 워낙  고생을 많이 했던 탓인지
태평양 횡단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한동안 바다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 10년 만
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분에  넘치는 환대도 받았고 여러 고마운 분들의 격려
에 힘입어 재미교포 교환학생으로 남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도 계속할 수 있었
다. 태평양 횡단을 마친 뒤 온갖 고난을  함께 한 동반자 선구자호를 해군사관학
교에 기증하는  것을 끝으로 나는  다시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왔다. 당분간은
배도, 바다도 모두 잊은 채 학교 생활에만 열중하고 싶었다. 나를 장학생으로 받
아 준 연세대학교 산악부에 가입하여 동아리 친구들과 등산도 함께 다니고 여학
생들과 미팅도 하면서 그럭저럭 한 6개월은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가끔씩 선구자  호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바다에서 고생시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주인이란 작자가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녀석도 화가 단
단히 났으리라. 하지만  자기가 지금 얼마나 대단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안다면
녀석도 끝까지 주인만 탓하지는 않을 터였다.  해군사관학교 안에 있는 해사박물
관에 도전과 모험의 상징으로 생도들은 물론 박물관을 찾는 일반 관람객들의 사
랑을 듬뿍 받고  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의 분신처럼  소중했던 선구자
호였기에 항해가  끝났다고 방치해 두거나  함부로 팔아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고민 끝에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하기로  한 것은 녀석의 품위와 자존심을 최대한
지켜 주기 위한 나름의 선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정말 잘 한 일 같
다. 녀석에게도 이젠 좀  휴식이 필요할 터이므로. 그렇게 한동안은 바다 생각조
차 하기 싫어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나에게 다시금 역마살이 낀 것처럼 ‘바다
병’이 도지기 시작한 것은 서울에서 6개월여를 보낸 1992년 봄부터였다.
  육지 멀미,  그랬다. 그건 분명 육지  생활에서 오는 멀미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숨가쁘게 돌아가는  도시 생활의 복잡다단함이 점점 낯설게 느껴
지면서 자꾸만 바다가 그리워졌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하여 저렇듯 바삐 움직이
는 것일까.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 조금만 방심해도 앞뒤 사람에 밀려 넘어지
기 일쑤인 도심의  수많은 인파, 아무 목적도 없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거리를
오가는 그 많은 사람들  얼굴에서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럴 때면 왜
그리도 숨이 막혀 왔던지.... 무작정 열차를 타고 인천 앞 바다로 향하곤 하던 게
어느새 일상이 되다시피 한 그 때, 아마도  나는 마음의 열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다 앞에 서서 그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짜고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맡아야 가
슴 한 켠 이  툭 터지는 것 같은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바다를 향해 자꾸만
달려가는 내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바다가 날 부르고 있었다. 어서 내 품으
로 돌아와 아직 남아 있는 꿈, 세계 일주를 하라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라고 헤살거리는 바다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2. L.A. 폭동의 여파
  L.A. 흑인폭동으로 한인사회가 온통 폐허가 돼 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바
로 그 해  4월 29일이었다. 무심코 텔레비전 화면을 들여다보던  중 불길한 예감
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나는 곧바로 L.A.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여긴 괜찮다. 식구들 걱정일랑 말고 하던 공부나 열심히 하거라.”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아버지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
다.
  “정말이세요, 아버지? 다들 무사하신 거죠?”
  몇 번을  되물어 봐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당장 미국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학교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당시로서는 ‘별 일없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믿
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 저녁으로 조마조마하게 귀 기울여 본  뉴스 화면에서는
여전히 절망적인 소식뿐이고 가족들은 한사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괜찮다’
는 말만 전해 오는 답답한 상화 속에서  곧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여름방학의 시
작과 함께 난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L.A.는 도저히 사람이 살았던 도시
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황량한 폐허였다. 1년 만에 돌아가 본  L.A.는 한 마디로
죽음의 도시 그 자체였다. 잿더미가 돼 버린  도시 곳곳에서는 파괴와 약탈의 피
냄새가 배어 있었고, 아직도 어디선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보랏빛 환상에 처참
히 유린당한 교민들의 피맺힌 절규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왜 진작 연락하지 않으셨어요?”
  15년 간  아버지의 피와 땀이 밴  주유소도 완전히 철거되어 버린  뒤였다. 그
곳에 언제 우리  가족의 꿈과 희망이 있었느냐는 듯  폐허가 된 극 삭막한 광경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고작 그것뿐이었다.
  “넌 아직 학생이다. 아무 걱정 말거라... 아버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온 가족의 생계 수단이던 주유소마저 잃고,  허리띠를 졸라매가며 겨우 장만한
몇 에이커의 땅마저 흑인 밀집  지역에 있다는 이유로 가격이 무서운 속도로 폭
락해 버리자 아버지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묵묵히
재기 꿈꾸었다. 맨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처럼 남의 주유소에 취직
을 하고, 살던 집을 팔아 월세 아파트로 옮기는 등, 흑인 폭동의 여파로 떠 안게
된 은행 빚을 청산하느라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
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끝난 뒤 서울로 나왔다가 이듬해인 1994년 초, 나는 다시
L.A.로 돌아갔다. 어쨌거나 학교는  마쳐야 한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UCLA에
복학을 하고, 다소나마  학비에 보태려고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나 좀처
럼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과연 이것뿐인가.
  실의에 빠진 가족들, 흡사 전쟁의 참상을 방불케 하는 L.A.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또 다른 나의  형제들. 수십 년 간 피땀 흘려 일궈 온  생활의 터전을 빼앗
기고도 미국 내 터주대감을  자처하는 흑인 사회에서나 소수 이민자 사회에서는
남의 일자리나 빼앗고 돈 벌기에 급급한 ‘어글리 코리안’으로 낙인 찍혀 버린
우리 교민들. 죄가 있다면 다만 가난한 나라세서  태어난 한번 잘 살아 보겠다고
낯선 타국 땅까지 건너와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다. 누가 감히 우리들
의 꿈을 탓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걸 빼앗겨 버렸고, 이제
남은 건 좌절과 실의뿐이다.  내 안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절규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그들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걸 보여 주자!
  온갖 수모와 질시  속에서도 우리는 끝내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자!
다 빼앗기고 우리에게  남은 건 희망뿐이라는 사실을, 그 희망이  얼마나 가치있
고 소중한 자산인가를  우리 스스로에게도 확인시켜 주자! 마침내 나는  다시 바
다로 나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작게는 아직 다 이루지 못한 내 꿈을 위해, 그
리고 더 크게는  이 일이 살아갈 용기조차  잃어버린 우리 교민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비록 생사를  예측할 수 없
는 험한 여정일지라도 내 한  몸 살아 돌아오는 것으로 우리 교민들에게 하루치
의 희망, 하루치의 의욕이나마 심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리
라.
  서양에서는 미국인이 최초로  100년 전에 해낸 일,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일본
인이 요트  단독 세계 일주 기록을  세웠던 그 바다에, 나는  한국인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도전해  볼 결심이었다. 부디  그것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열어
주는 뱃길이 되기를 갈망하면서.
    3. 그래도 희망은 있다.
  1994년 1월 14일, L.A. 마리나 델레이 선착장의 분위기는 3년전 내가 태평양을
건너 부산으로 향할 때보다도 훨씬 더 침울한 분위기였다.
  “석아, 빨리 돌아와야 한다, 응?”
  전날 밤까지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만 건
선구자 2호가 막 선착장을 출발하려던 찰나였다.
  “울지 마세요, 아버지! 전 꼭 돌아옵니다.”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살던 집마저 팔아 버리고 이제는 월세 신세로 전락해
버린 집안의 장남이 요트 세계  일주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를 질책하던 주
위 사람들과는 달리 이번만큼은  아들의 선택을 말리지 않았던 아버지의 눈물이
떠나는 발길을 더욱 무겁게 했다.
  “몸조심하고!”
  아버지는 배가 항구를 떠나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설 때까지도 작은 보트를 타
고 뒤쫓아오며 깃발처럼 팔을 흔들었다.
  “제발 들어가세요, 아버지!”
  자식을 망망대해로 내보내는 부모의 심정도 헤아리지 못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약해진 모습이 부담스럽기만  해서 버럭 짜증을 내고 말았다. 이번  항해는 나로
서도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실의에 빠져  있는 가족들을
곁에서 돌봐 주지 못하고 과연  이렇게 떠나도 되는가 하는 죄책감이 가장 나를
괴롭히는 부분이었다.  매일매일을 눈물로 보내다시피 하는 어머니, 좌절감을 이
기지 못해 허전한  마음을 술로 달래곤 하는 아버지, 다니던  학교마저 휴학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하나뿐인 여동생 애리선. 유교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는 한
국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분명 장남으로서의 의무를 팽개쳐 버린 현실도피
자요, 이기주의자였다.
  내가 꼭 이 길을 가야 하는가?
  마음속의 갈등으로 괴로울 때마다 몇번이고 되풀이해 본 물음이었다.
  “식구들이 정 반대하신다면 저도 더 이상 고집 피우진 않겠어요.”
  비록 나름대로는 원대한 뜻을  안고 계획한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가족들 가
슴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읽어 냈던지 처
음에는 왜 그토록 위험한 일을  또 하려고 하냐며 만류하던 부모님도 끝내는 자
식의 무사귀환만을 빌어 주었다.
  “네가 집에 있다고 해서 집안  사정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굳이 반대
는 않겠다만... 석아, 너 정말 잘 해낼 수 있지?”
  그 동안 눈가에 깊어진  잔주름만큼이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 부모님들은 다만
내가 먼 길을 떠나는 데  아무런 경제적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안타깝
게 여기는 눈치였다.  사실 이번 항해는 거의 무일푼으로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
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과 친구 필립의 통장에 들어  있던 적지 않
은 액수의 용돈을 반강제로 빌려  선구자 1호와 같은 CAL사의 74년식 30피트형
요트를 구입한 것 말고는 별다른 준비도 없었다.  그나마 이 요트는 배 주인이 2
년 전부터 팔려고 내놓았던 물건으로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던 중 시세의 반
값 정도로 내게 돌아온  것이었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긴  항해 길에 나서며
내가 믿는 거라고는 신용카드 한 장뿐.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나로서는
어렵게 결심한 이번 항해에  부모님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많은 힘이
되었다. 어쨌거나 모든  걸 하늘의 뜻에 맡기고  떠나기로 한 길 아닌가. 그런데
아버지는 이제 와서 왜 자꾸 울기만 하는  걸까. 시야를 흐리며 점점이 멀어지는
아버지의 슬픈 손짓을 뒤로 한 채 어느덧 내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토니, 기운을 내! 너희 부모님도 널 아주 자랑스러워 하실 거야.”
  하와이까지 동행하기로 한  필립이 어깨를 툭 치며 빙그레 웃어  주었다. 그는
한 달 간 친구들과 캠핑을 떠난다고 부모님을  속이고 이번 항해에 동참했다. 그
때문에 선착장에 나올 때도 필립은 운동화에 배낭을 맨 영락없는 캠핑족 차림이
었다.
  “우리 부모님도 내 걱정 많이 하시지만 한 달 후쯤에는 아마 태도가 확 바뀔
걸! 저 꼬마 필립에게 언제 그런 용기가 있었나 하고 말이야.”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내에서 잘 나가는  기업의 신입사원으로 발탁되기까지
했던 필립은 이번 항해를 위해 취직도 6개월간  미룬 채 나를 따라 나섰다. 전에
내가 태평양을 횡단하면서 겪은 모험담을 듣고는 항해의 매력에 반한 탓도 있었
지만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떠나는 날 위
해 하와이까지 동반자로  나섰다는 것쯤 모를 내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그는 직
선거리 5만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요트 세계 일주 단독 항해에 나서는 친구가 무
사히 뜻을 이루고 돌아올 수 있도록 격려차 동행해 주는 일종의‘기쁨조’ 역할
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필립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바다라는 괴물이
인간의 단순한 감상이나 기대감을 얼마나 무참히 짓밟아 버릴 수 있는지를.
    4. 최악의 폭풍
  1994년 1월 27일. 바람이 밤새도록 불었고 하늘은 전체적으로 흐렸다. 한 시간
전, 약 35노트로 바람이 불었는데  너무 돛 크기가 컸다. 그렇기 때문에 배는 미
친 듯이 7노트로 움직였다. 너무 빨라서 중심을 잃을 것 같았다. 돛의 크기를 줄
이기 위해 선상 위로 올라갔다.  돛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강한 바람 때문
에 30분 정도 걸려서야 겨우 돛을 내릴 수 있었다.
  “배 안에 들어가 있어.”
  내가 잘 하고 있는지 보려고  머리를 바깥에 내밀고 있는 필립에게 고함을 질
렀다. 필립은 기가 죽어 있었다. 난 돛을  완전히 다 내리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
리고 문을 꼭 닫았다. 물이 들어오면 안되니까. 필립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 앞에서 그런 용기 없는 모습 보이지 마, 필립. 제발 울지마.”
  "난 괜찮아. 그저...... 그저 부모님 생각이 나서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질 거야."
  내 말이  얼마간 위안을 주었는지  필립은 계속하던 딸꾹질을  멈췄다. 하지만
정말 괜찮아질지 속으로는 나도 궁금했다. 바람은  계속 높아졌고 파도는 거세어
졌다. 필립과 나는 함께 기도를 했다.
  "하느님. 우리는 죄를 많이 지었고 당신을 수도 없이 실망시켰습니다.  쉬운 길
을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용기
를 주십시오. 우리의 영혼과 육지에 계시는 모든 분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아멘."
  기도 후 필립은 눈을 감고 누웠다. 그렇게  시작된 폭풍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
이지 않았다.  집채만큼 몰아닥치는 파도, 금방이라도  요트를 뒤엎을 듯 흔들어
대는 바람. 계속 강해지는  바람 걱정 때문에 지난 3일 동안 잠을  편하게 잘 수
없었다. 필립은 발작하기 일보직전인 것 같았다. 필립에게는 내가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필립. 열흘만 더 가면 돼."
  필립을 위로하려 했지만 사실 나도 필립만큼 겁이  났다. 앞으로 열흘 후 우리
둘이 무사하리라는 것을 어느 누가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선장으
로서 필립 앞에서  겁먹은 표정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렵고 피곤하
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울고  싶었다. 해는 보이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들어오
는 물 때문에  옷도 축축하게 젖어 추웠다.  필립은 계속 뱃멀미를 했다. 우리는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필립, 뭐 좀 먹어야 해.”
  난 오렌지를 까서 필립에게  주었다. 그러나 필립은 곧바로 토해 내었다. 당시
내 일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역력히 드러나  있다. 필립은 계속 누워서 신음
만 한다. 바람은 45노트.  완전 폭풍이다. 밖에는 비가 쏟아진다. 바람이 점점 강
해져 지금은 50노트. 바다, 파도, 하늘, 비....  모두 하나가 된 것 같다. 파도는 계
속 배를 덮치고 있다. 이 산  같은 파도가 금방 배를 삼켜 버릴 것 같다. 선구자
2호는 마치 구명보트 같다. 더 이상 돛단배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생명보트다. 필
립은 계속 신음만  하고 나도 죽을 지경이었다.  해도 안 보인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해를 못 볼 수도  있다. 이불도 축축해져 우리는 춥다. 난 필립을 껴안아
온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도 다행히  배는 잘 견뎌 주고 있다. 아직 배가 멀
쩡하니 어쩌면 우린 괜찮아질  지도 모른다. 바람은 더욱 강해졌다. 파도가 배를
옆으로 덮치면서 배가 부서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창문을 통해 밖을 보니  하늘의 반 정도가 밝다. 그래도
아직 바람은 약해질  조짐을 안 보인다. 책, 음식,  옷, 모두 뒤죽박죽 섞여 버렸
다.
  “언제 이게 끝나?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상상해 본적도 없는 폭풍의 위력 앞에서 속수무책인 필립은 짜증날 정도로 똑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기상예보에도 안 나온  폭풍. 아니 태풍의 위력을 가진
폭풍. 난 육지에 있는 기상정보 전문가와 교신을 했다.
  “그 지역에는 지금 20노트 정도로 바람이 부는 걸로 되어 있는데?”
  그의 대답이 더 기운을 빠지게 했다.
  “여긴 지금 60노트예요.”
  소리를 지르고는 교신을 끊어 버렸다.
  “토니, 우리 한 일 주일 전까지만 해도 참 좋았었는데, 그지?”
  두려움을 잊으려는 듯  필립은 자꾸만 내게 말을  걸어 왔다. 그랬다. 일 주일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둘 다 낭만적인  항해의 묘미를 만끽하고 있었다. 30~40마
리씩 떼지어 나타나 배 뒤를 졸졸 따라오곤 하던 돌고래 떼를 보며 필립은 얼마
나 신기해 했던가. 깜깜한 바다 한 가운데서  고 녀석들이 재롱을 피우듯 불러주
는 노랫소리에 취해 항해를 하노라면 마치 천지가 우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
마음이 포근해지곤 했었는데.... 밤이  깊어 가는데도 폭풍은 좀처럼 잦아들 기미
가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목
숨을 배에 의지하는 수밖에. 가족들 생각,  괜히 떠나왔다는 후회,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보장받을 길 없는 목숨의 위협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나와 필립은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했다.
  다음날도 상황이 나아지지를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누워서 20시간 동안이
나 계속된 폭풍우를 견디어  냈다. 그리고 바람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돛
을 올렸다. 배가  4~5노트로 잘 움직였다. 그러나 우리는  많이 기뻐하지 못했다.
그럴 힘이 없었다. 3일만에  처음 먹는 음식은 라면이었다. 다른 음식을 할 기운
도 없고 또 뱃멀미에 시달린 필립이 갑자기 많은 음식을 먹을 수도 없기 때문이
었다. 내일은 밥을  하고 카레를 만들어 먹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
운이 솟는 것 같았다. 뜨거운 물을 끓여 이틀만에 커피를 마셨다.
    5. 세상은 혼자 헤쳐 나가는 거친 파도와 같다.  
  항해 시작  25일째인 1994년 2월  8일 오전 9시.  현재 위치는  하와이 북동쪽
288km 해상, 북위 21도 45분, 서경 154도 42분. 이제 내일 오후쯤이면 마우이 섬
을 거쳐 와이키키 해변에 도착하게 된다. 무선을  통해 그 동안 빠짐없이 교신해
온 미국의 DX 아마추어 무선클럽 회원인 김용철 씨에게 도착 일정을 알려 주고
나니 비로소 그간의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필립, 그 동안 고생 많았지? 이젠 거의 다 왔어.”
  이상하게도 더 이상  항해라면 진저리를 칠 줄  알았던 필립의 표정에 조금은
아쉬운 기색이 남아  있는 듯 했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에 그도  어느 정도
바다에 익숙해진  탓일까. 어느 때는  제법 구름의 모양으로  날씨를 점쳐보기도
해 가며 그것이 맞아 떨어질 땐 우쭐해 하던 그였다.
  친구의 참모습을 보고  싶다면 같이 여행을 떠나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번
항해를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성숙한 모습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걸 느꼈
다.
  "고맙다, 토니! 여태껏 그 누구도 이렇게 멋진 모험에 날 데려가 준 적은 없었
어.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비록 그는  대만 출신으로 나와는  국적이 다른 외국인이었지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온 세월이 벌써 10년 가까이 흐른, 형제 같은 친구였다. 항해 도중에
는 언제나 신경이 곤두서 있게  마련인 나 때문에 속으로는 섭섭했던 일도 많았
을 텐데 그는 벌써 다 잊어버린 듯 내게  고맙다고만 했다. 우정이란 그런 게 아
닐까. 미운 정 고운  정으로 티격태격하면서도 단 하나. 마음의 중심만은 변하지
않는 것. 우리는 육지에 닿기 전의 마지막  행사로 함께 샤워도 하고 더부룩하게
자라난 수염도 서로 손질해 주며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바
다 한가운데서 물고기 떼들이 놀라 달아날 정도로 볼륨을 최대한 높여 모차르트
오페라 곡 <돈 지오반니>를 듣다 말고 필립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너무 방탕한 생활을 하면 정말 지옥으로 갈까?”
  “그걸 말이라고 하니?”
  “오 하느님! 그 많은 걸 프렌드 다 정리하고 나면  이 몸은 무슨 재미로 사나
요?”
  유럽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후안의 일생을 바탕으로 꾸며진 오페라의 비극
적인 결말을 의식한 듯 필립이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엄살을 떨었다.
  “걱정 마, 필립! 지옥은 네가 아니라  널 차 버린 그 여자 애들이 가게 될걸?

  우리는 갑판이 떠나갈 듯 한바탕 웃어 댔다.  육지에 가까이 왔다는 안도감 반
아쉬움 반으로 우리는 그  날 저녁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립의 장래 희
망은 세계적인 컴퓨터  공학도가 되는 것이었다. 나처럼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
에 받고 있는 처지라 미래에 대한 부담도 그만큼 컸던 모양이었다.
  “토니, 정말 고맙다! 이번  여행에서 난 많은 걸 배웠어. 이를테면  세상은 철
저히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할 거친 바다와 같다는 걸.”
  이튿날 오후  2시경. 하와이 알라와이  요트선착장 입구로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제법 의젓한  소리를 하던 필립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햄버거 가게를 향해
말 그대로 총알같이 뛰어가고 있었다.
  “토니, 또 먹고 싶은 것 없어? 내가 뭐든 다 사 줄게. 여기서 제일 맛있고 비
싼 게 뭐지?”
  핫소스와 겨자를 듬뿍 친 버거와  콜라를 단숨에 먹어 치운 뒤에도 필립은 여
전히 걸신들린 녀석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웬일이냐? 너답지 않게?”
  평소 구두쇠로 소문난  필립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던 내게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부모님이나 주변 친지들한테 받은 용돈을  한푼도 헛
되이 쓰지 않고 꼬박꼬박 은행에  저축한 덕에 학생치고는 꽤나 부자인 축에 속
했다. 그러면서도 식사는  늘 햄버거 아니면 스파게티 같은 싸구려  음식으로 때
우는 구두쇠  중의 구두쇠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돈을 물  쓰듯 하려고
했으니 나로서는  놀랄 수 밖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어깨를
툭 치며 필립은 이렇게 말했다.
  “야, 내가 바다에서 빠져  죽었다면 그 동안 애써 모은 돈이  다 무슨 소용이
겠니? 이젠 나도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돈도 쓸 때 써 가며 살거야.”
    6. 아버지의 죽음.
  1994년 4월 4일. 남태평양 사모아 제도 근해.
  “이쪽 식구들은 모두 잘 있으니 강 군은 아무 걱정 말고 건강에나 신경 쓰시
랍니다.”
  LA의 HAM 동호인  김용철 씨와의 교신 내용은  여전히 가족들이 잘 있다는
내용 뿐이었다. 새로 개업하신 어머니의 옷가게도  그럭저럭 잘 꾸려지고 있으며
아버지와 여동생도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에 우선은 마음이 놓이지만 어쩐지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만 했다.궂은 날씨 때문인가. 며칠 동안 하늘은 잔뜩 흐리고
기분까지 우울한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하와이에서 몇 번 전화를  통해서 부모
님의 안부를 확인하기는  했지만 두 분 고생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해서 좀처럼
마음이 편치 못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배 수리하는 동안에라도 한 번 LA에 들었다 올 걸 그랬나?’
  내가 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아무래도 후회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모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뭡니까?”
  내가 현재  세계 일주 항해의 제2기착지인  아메리칸 사모아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LA의 또 다른 HAM 동호인 친구가 교신으로 물어 왔다.
  “제일 먼저 가족들과 통화하고 싶습니다.”
  순간 라디오 저쪽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보세요?”
  교신이 끊겼나 해서 불러 봤더니 한동안 말이 없던 저쪽에서 응답이 왔다.
  “...... 아무튼 사모아까지 순조로운 항해가 되길 빕니다.”
  기껏 할 말이 많은 것처럼 교신을 받아 놓고는 쫓기듯 물러 가는 상대방을 속
으로는 참 싱거운 사람도 다 있다 여기며  갑판으로 나가 보았다. 호놀룰루 항을
떠 난지 벌써  보름째. 그 동안 바다는  무던히도 속을 썩였다. 무더위와 강풍이
번갈아 덮쳐 오는 항로에 나는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하루빨리 육지에 닿아 시
원한 물에 샤워나 좀 해 봤으면 하는 게  그 때의 내 유일한 소원이었다. 오랫동
안 빨래를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파도가 심하면 선실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옷가지는 소금기에 절었고  도 군데군데 푸른색 곰팡이가 피어 짜증나는
불쾌감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예정보다 일주일 가량 늦게
사모아에 도착하게 되었으니 기분이 우울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바다. 기분 나쁜 먹구름! 마침내 29일간의 고달픈 항해 끝에
아메리칸 사모아 도착한 4월 16일. 선착장에  배를 정박시키고 육지에 올라설 때
의 컨디션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일단은 제대로 된 음식이나 실컷  먹고 한잠
푹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부둣가 인
근의 상점으로 향했다. 먼저 시원한 콜라로 목을  축인 다음 생선회를 곁들인 맥
주로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마중 나온 사모아 교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기분 기분 좋게 음식을 다
먹어 치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내가 너무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었나?’
  조금은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쭈뼛거리고 섰는데 교민 가운데 한 분이 LA의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안  그래도 부두에 오르면 제
일 먼저 집으로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잠시 먹는 데 정신이 팔려 가족의
안부도 확인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수화기를  집어든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몸은 어떤가? 건강하지?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목사님은 한 동안 본론을 접어 두신 채 다른 이야기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눈
치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별일이
없다면 부모님이 아닌 목사님께서 직접  내게 전활 걸어 사소한 안부나 묻진 않
을 터였다.
  “목사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집에...... 무슨 일 있지요?”
  “.... 강 군! 놀라지 말게!”
  다음 순간,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벌써
장례식이 끝난  지 보름이나 지났다는  아버지의 부음. 하나뿐인  아들이 임종도
지켜 드리디 못한 채  쓸쓸히 공동 묘지에 묻히셔야 했던 아버지.  그 동안 식구
들이 날 얼마나  원망했을 것인가. 그것도 모르고 난 육지에  닿자마자 음식이나
탐하고 있었으니.... 사모아 도착  한 시간 만에 내 가슴은 이미 산산조각으로 무
너져 내리고 있었다.
    7. 자책, 회한.... 그리고 두려움.
  LA 흑인 폭동 이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하루하루를 빚 독촉과 생활고에 시
달려야 했던 출구없는 삶 속에서 아버지는 결국 권총 자살이라는 참담한 선택으
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그 바다보다
더 험하고 모진 세파에 시달리고 죽음보다 더한 현실을 홀로 감당했을 아버지.
  ‘나는 부모님이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곁에서 돌봐 드리지 못한 불효 자식
이다. 내  꿈을 꼭 이루고 시름에  잠긴 우리 교민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겠노라
호언 장담하며 떠난  세계일주 항해는 결국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위선자고, 헛된 영웅심이나 명예욕에 눈먼 아집투성이였을 뿐이다. 자기 가
족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겠다고? 철저한 이기주의
자!’
  아버지 혼자서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도 벅찬 현실.... 이민 생활 15년 동안 모
진 고통을 인내하며  일궈온 생활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 놓은 LA 폭동과 그
누구에게도 당신의 아픔을 호소할 수 없었던 뼈저린 고독이 끝내는 아버지의 머
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던 것이다.그  날 밤.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였던 것일까. 결국......  죽음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 얼마나 지
독한 마음 고생을 겪어야 했기에 죽을 결심까지  했단 말인가. 내가 집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닥쳐도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 못 했던
아버지. 내가 곁에 있었다면, 말벗이라도 돼 드릴 수 있었다면 이렇듯 참담한 결
과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LA 근교에 있는 로즈힐 메모리얼 파크 공동묘지에서 이제는 한 줌 흙으로 누
워 계신 아버지의 영정을  대하며 나는 차마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이미 나는
부모 앞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었다.  아버지가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
드리지 못한  아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차라리 내가 죽어  아버지를 살릴
수 있다면.... 그러나  지금와서 이따위 넋두리가 또 무슨  소용이랴. 마음 한편으
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없지 않았다. 왜 그러셨어요, 아버지.... 아버지야말로
우리 가족의 기둥이었는데, 왜 그렇게  저희들 가슴에 못을 박으셨어요.... 평생을
사무치는 죄책감과 회한으로 얼룩진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할 자식의 슬픔을 아
는지 모르는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 고단한 세
월, 당신께서는 간단없이  버릴 수도 있었던 이승이건만 남은 사람들은  이제 죽
음조차 구원이 되지 못하는  삶을 살아 내야만 한다. 집안 형편은  이제 더 이상
악화될 수도 없을  만큼 어려워진 상태였다. 아버지 생전에는 비록  월세 주택이
나마 넓은 집에 모여 살던 가족들은 허름한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공간
을 많이 차지하는  가재도구들은 모조리 처분한 뒤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어머
니는 의외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벌써 열 번
은 더 울음을 터뜨렸을 만큼 심약한 어머니는 그 날 우리 세 식구 중 가장 꿋꿋
한 모습이었다.
  “이제 집안 일은 웬만큼 정리됐으니 석이 넌 어서 사모아로 가거라.”
  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어머니와  동생을 돌봐 준답시고 LA에 머문 지도 어
언 한 달 반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들을 불러 앉혀  놓고 진지하게 당부하는
어머니의 얼굴 어디에서도 예전의 약한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여기 LA에서 네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식구들 얼어 죽지 않을 만큼 멀
쩡한 집 있고, 엄마가 아직 일할 수 있으니 밥 굶을 염려도 없다. 그러니 아버지
가 살아 계실 때하고 지금이 다를 것도 없잖니?”
  “그래도 어머니, 제가 어떻게......”
  “네 마음이 어떤지 다  안다. 하지만 남자가 작은 일에 얽매이게  되면 큰 일
을 못하는 법이야! 아버지도 네가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걸 안타까워 하
실게다.”
  “어머니....”
  “처음에는 반대도 좀 하셨지만 네가  기어이 큰일을 해내고 있는 걸 보고 아
버지께서 얼마나 흐뭇해 하셨는지 아니? 불효는 딴 게 아니고 바로 지금처럼 네
가 아무 목적도, 희망도 없는  사람처럼 주저앉아 있는 게 불효야! 내일 당장 짐
을 꾸려라. 아버지께서 항상 널 지켜보고 계셔.”
  "그렇게 해, 오빠! 엄마  말씀이 모두 옳아! 난 오빠가 훗날 후회하지  않는 삶
을 살길 바래.“
  어느 새 어른이 다  된 애리선도 간곡하게 나를 설득하였다. 그  때 비로소 나
는 알았다. 한 달  반 동안 함께 지냄으로 해서 정작 위안을 받고  있었던 건 어
머니나 애리선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사실은 어머니, 전 두려워요.
이제 또  바다에 나가면 어머니까지 잃게  될까 봐.... 두렵고 겁나요.  나는 차마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전에 없이 단호한  눈길로 나를 꿰
뚫어 보시는 어머니의, 거역할 수 없는 그 표정 때문이었다.
    8. 다시 바다로
  “네가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세계일주를 무사히 끝내고 돌아오는 것이 불쌍
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는 길이다.”
  어머니의 간절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차  용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자식
이 세계 일주 아니라 우주를 한 바퀴 돌아온다 해도 이미 땅속에 묻힌 아버지는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생전에  그토록 고생만 했던 아버지, 발 한 번 씻겨
드리지 못하고 어깨 한 번  주물러 드리지 못한 자식이 이제 와서 무슨 수로 위
로해 드린단 말인가. 평소 말수가 적고 과묵한  성격의 아버지가 어렵기만 한 나
머지 따뜻한 말 한 마디 위안을 드리지 못했던 게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
다. ‘왜 저한테 아무런  기회도 안 주시고 그렇게 빨리 가셨어요,  아버지!’ 걷
잡을 수 없는 비통함으로 그 전에는 잘 마실 줄도 몰랐던 술을 가까이하기 시작
하면서 내 몸과  마음은 점차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도저히  또다시 요트
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L.A.강동석후원회’
를 결성해 준 신남철 씨가 나를 찾아왔다.
  “자네가 우리 한국 사람 누구도  해내지 못한 장한 일을 한다고 해서 모두들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돌아가신 아버지와도 가까운 사이였던 그분은 다짜고짜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
다.
  “바다에 나가 있는 자네 소식이 올 때마다 자네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셨는
지 아나? 돈 때문에 그토록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분한테는 자네가 큰 희망
이었어.”
  순간 나도 모르게  설움의 눈물이 복받쳐 올라 가슴이 메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쯤 많은  그분은 나를 친동생 대하듯 어깨를 다독거리며 진
지하게 덧붙였다.
  “일단 사모아로 가게. 가서  배도 손질하고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해. 그것만이
자네가 할 일이야.”
 그러면서 그분은 교민들이 나를 위해  조금씩 모은 돈이라며 1만 달러가 든 흰
봉투를 건네주었다.
  “적은 돈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강동석이라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우리 한인들이 성심과  성의를 다해 모은 돈이야. 어려움에 처한  동포 청년에게
용기를 주자는 뜻에서 100명이나 되는 한인들이 한 마음이 돼서 모은 돈이란 말
일세.”
  100명의 교민들이 정성으로  모아 1만 달러의 가치. 그것은 이미  돈의 액수를
초월한 큰 뜻으로 내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하루빨리 내가 좌절을 딛고 일어서
기를 바라는 우리 교민들의 정성, 아울러  그것은 못나고 불효자식이나마 돌아가
신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을 풀어 드리기를 원하는 그들의 소박한 인정이기도 했
다. 그 며칠 뒤  비로소 고인 물처럼 썩어 가던 영혼의  방황을 끝내고 사모아로
떠나던 날 아침이었다.  “그게 뭐예요?” 밤늦게 일터에서 돌아와  잠도 제대로
못 잤을 어머니가 새벽부터 싱크대 앞에 선 채로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이거 가다가 비행기 안에서 먹어라.”
  삶은 계란과 김밥, 그리고 따뜻한 보리차가 담긴 보온병... 어머니는 담담한 얼
굴로 그것들을 내 배낭  안에 챙겨 넣어 주고는 조용히 목욕탕  문을 열었다. 잠
시 후 요란한 수돗물 소리에  섞여 나오는 것은 분명 어머니의 숨죽인 흐느낌이
었으리라.
    9. 바다로 나갈 용기를 재충전해 준 아름다운 섬, 피지
  1994년 7월 7일. 선구자 2호는 아메리칸 사모아  파고 항을 떠난 지 열흘 만에
피지 섬 동쪽 연안에  위치한 수바 항구에 닻을 내렸다. 배는  이 곳에서 엔진과
기관들을 재정비하고 다음  기착지인 호주 브리즈번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피지
섬은 남태평양의 멜라네시아 지역에 위치한 영연방 독립국가로 인도인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약 42%가 원주민, 나머지는 유럽인과 그 혼혈족 등으로 이루어
져 있다. 약 100만명에 달하는 인구이  절반을 구성하고 있는 인도인들은 대부분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신에 공화국 내의 토지는 단 한 뼘도 소유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피지섬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영국인들과 함께 들어온
인도인들은 장사 수완이  뛰어나며 계산속도 무척 빠르다. 반면 지상  최대의 낙
원으로 불릴 만큼 경치가  아름답고 사탕수수와 코코넛을 비롯하여 풍부한 농산
물과 금, 구리, 망간 등 지하자원이나 해산물 등 남부럽지 않은 자연자원의 혜택
속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살아온 피지 사람들은 천성이 낙천적이어서 세상에
급한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발빠른 인도 상인들이 행동  반경을 야금야금 넓혀 가고 있는 동안 나
라 경제는 물론 정치적인  영향력에도 그들의 입김이 원주민들의 권리를 넘어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인도인들과 원주민들의 갈등과  반목은 19세기 말인 1874년
피지섬이 영국의 보호권 안에 들어간  이래 지금껏 계속돼 온 사회 문제로 지난
1970년 독립국가로  출범한 이후에도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나라 사정이야 어떻든 내가 경험한 피지 섬은 지상 최대의 낙원이라는 말 그
대로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내게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바다로 나아갈
용기를 갖게 해 준 것도 이 피지 섬이다.  사실 주위 사람들의 격려에 마음이 움
직여 사모아로부터 출항을 결행하긴 했지만  그 때만 해도 내가 과연 세계 일주
항해라는 큰일을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바다는 한사코  나를 밀어내는
것만 같았고, 육지에  닿아서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죽
음이라는 엄청난 충격으로부터 스스로 헤어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거
기까지가 당신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내 탓은 아니라고  아무리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발버둥쳐도  소용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가장 힘들어할  때 위
로조차 해 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다 보니 어느덧 배도 바다도 진저리가 났다.
  사모아를 떠나 피지 섬에 기항한 뒤 1개월은 그렇듯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아무 대책도 없이  흘러가 버렸다. 도착 첫날은 수바 항에  배를 정박시켜 놓
고 다음날 아침까지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채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꿈속
까지 따라와 잠을 헤집는 악몽에 시달리다 문득 깨어 보니 아침 나절이었다.
  “강 군,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밤새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침낭  속에서 눈만 멀거니 뜨고 누워 있는데 누
군가 해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분은 냉동  참치 공장 이외에도 ‘서든 크
로스’라는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전정묵 사장님으로 사모아 한인회장님으로부
터 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일부러 배에까지 찾아 준 것이다.
  “여기 있는 동안 내가  다른 건 도와 줄게 없고, 숙식  문제만큼은 최대한 강
군을 편하게 해 주고 싶으니, 당장 우리 호텔로 짐을 옮기게.”
  그분은 과분할 정도로  호화로운 호텔 특실을 통째로  내주며 그 곳에서 다음
기착지로 떠날 때까지  지내도록 모든 배려를 해 주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따라갔으나, 푹신한 침대와 쾌적한 객실  안에서 매일매일 최상급의 요리로
식사까지 공짜로 제공하는  호텔 측의 호의에는 그만  나도 넋을 잃을 지경이었
다. 피지 섬에  정착해 사는 150여 명의 교민들은 한결같이  내게 친절한 사람들
뿐이었고, 어딜 가나 그분들의  따뜻한 호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든 크
로스’호텔 외에도  내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오는 교민들은
수없이 많았다. 비어  있는 콘도나 빌라, 아파트를  내주겠다는 교민들, 식사만큼
은 꼭 자신들의 집에서 대접하고  싶다며 그 나라에서 여간해선 구하기 힘든 보
신탕까지 만들어 내놓는 교민들... 분에 넘치는  그분들의 호의 속에서 나는 점차
마음의 상처를 다스려 나갔다. 처음엔 그저 나  혼자의 꿈으로 시작한 단독 요트
세계 일주. 그러나 기착지에서  만난 수 많은 해외 교민들의 관심  속에 이 일은
더 이상 나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격려해 주는 세계 일주의 꿈을 위해 이대로 주저앉
을 수는  없었다. 일어나야 한다.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다짐했지만 쉽게 바다로 나갈 결심이  서지를 않았다. 솔직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이 곳에 그냥 눌러 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
다. 교민들이 워낙 잘 해주니까 내가 왜 그 곳에 있는지, 내게 남은 일이 무엇인
지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늘 저녁 식사는 특별히 사장님께서 강 군의 건강을 염려하시는 뜻에서 배
려한 주방장 특선 요리입니다.”
  호텔 특실로 배달된 최고급 스테이크 요리에 근사한 와인까지 곁들여 저녁 식
사를 한 다음 침대에 누웠는데 그 날 따라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여
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이상하게도 그 동안 편안했던 잠자리가 영 거북하게
만 느껴졌다. 마치 남의 집 안방을 차지하고  누운 것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갑자
기 방 안의 모든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길로 수바 항으로 달려가 사
랑하는 배 선구자 2호의 몸체를 쓰다듬어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려 왔
다. ‘미안하다, 배야!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구나.’ 선체 밑바닥에 균열이 생겨
형편없이 망가져 가고  있는 나의 애선은, 주인의 무심함을 탓하기라도  하듯 말
없이 몸을 뒤채고 있었다.  나 혼자만 잘 자는 동안에 배는  마치 버려진 고아처
럼 처량한 몰골로 발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겨우 이 꼴을  만들어 놓으려고 내
가 그렇듯 속을 썩여  가며 집을 떠나왔던가. 고된 항해 길에  나서는 한국의 젊
은이를 위해 교민들이 베풀어 준 격려와 호의를  망각하고 어느 새 맛있는 음식,
편안한 생활에 길들여진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어쩌다 나는
바다에서보다 욱지에서 더 못난 겁쟁이가 돼  있었던 것인가. 아무래도 하루빨리
교민들의 품안에서 벗어나는  길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분들이 내게  베풀어준 친절이야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나 자신이 게으르고 무책임해졌다면 그 또한 그분들의 성의를 배신하는 게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우선 요트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라토카로 떠나자!’
  다음 날 당장 수바 항을  떠나기로 하고 그 날 밤은 잠도 호텔이 아닌 선구자
2호의 선실에서  잤다. 한 달 만에  돌아온 비좁고 허름한  침상이었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잠자리였다는 사실이  비로소 피부에 와  닿았다. 마침내
나는 수십 년 만에  집에 돌아온 떠돌이처럼 평온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
제 더 이상의 악몽은 찾아오지 않았다.
    10. 라토카, 세계 각국 요트인들의 집합소
  라토카는 전체 3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피지 공화국의 서쪽 연안에 위치
한 항구  도시로 각국에서 모여든  요트인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다. 요트인들은
대개 배에서 생활하며 낮에는 수영이나 낚시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나절
이면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백사장으로 모여들었다. 더위가 한 풀  꺾인 그 시
간에 요트인들끼리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친분을 쌓는 것이다. 무척 신
기하고 낭만적인 광경이었지만 그  동안 교민들하고만 섞여 지내느라 그런 분위
기를 접해 볼 기회가 없었던 나로서는 처음에는 쑥스러움 때문에 쉽사리 그들과
어울리지를 못했다. 게다가 도착 당일부터 며칠 간은  배를 손봐야 하는 일로 몸
과 마음이 몹시 분주한 상황이었다.
  그 동안 무심했던 주인을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배는 툭하면 병에 걸려 툴
툴거렸다. 손질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기관에 이상이 생기는가  하면 무엇보다
도 선체  밑바닥에 생긴 균열이 큰  골칫거리였다. 교민들이 한푼 두푼  모아 준
후원금도 수리비로 거의 써 버렸는데 배는 자꾸만 고장을 일으키니 난감할 뿐이
었다. 잠은 요트  안에서 자면 되고, 식사는  주로 햄버거나 라면으로 때워 개인
경비를 최저 단위로  낮추었지만, 배에 이상이 생기면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었
다. 결국 신용카드  빚만 엄청나게 늘어가고 있는데 앞으로 또  얼마간의 수리비
를 들여야  할지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도  못할 노릇이었고, 더군다나  교민들의 신세를 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는 싫었다. 도움을 준다 해도 이젠
너무 미안해서  거절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직까지 우리 교민들에게  특별히 해
준 일도 없이 무작정 신세만  지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
도 못한  채 배만 쳐다보며 한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어느 날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그 동안 꾸준한 격려로 나의 항해를 성원해 주었던 한국일보 측에서 스폰서를
물색해 놓았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세계 일주 항해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 지
원!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꿈 같은 상황이었다. 나의 세계 일주 항해에 스폰서를
나서 준 데이콤사는 자사의 마크와  로고가 부착된 스티커 하나만 배에 달고 항
해한다면 이후의 모든  경비를 지원해 준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니까 내  배는 스
폰서를 맡아  준 기업의 광고 모델로  전세계 바다를 누비게 되는  것이다. 이젠
고국에서도 날 지켜보고 있구나! 순간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새로운 의욕이 솟구
치는 걸 느꼈다. 서울에서 나를 위해 매니저를  자청하고 나선 권동균 씨는 다음
기착지인 호주에서 발대식을  해야 하니 하루 빨리  피지 섬을 떠나라는 연락을
해왔다. 이 때부터는 신바람이  나서 배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선은 비
용을 줄이기 위해 혼자 힘으로 배를 고쳐 보려고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웬 미
국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가 도와 줄까?”
  부둣가에서 오며 가며 몇 번 눈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40대 중반의 요트맨 웨
인이었다. 그는 나랑 비슷한 시기에 하와이를 출발, 현재 부인과 함께 세계 일주
를 하기  위해 라토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몇  마디 대화를
통해 내가 UCLA에 다니고 있는 사실을 안 그는  자신의 둘째 딸도 UCLA 학생
이라며 반가워했다. 그런 인연 덕분에 그의 도움으로  최저 경비로 배 수리를 모
두 마칠 수 있었고, 다른  요트인들과도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들은 요트인들 사이에서도 소문난 잉꼬부부로 특히 나에게는 양부모처럼 자상한
이웃이었다. 건강미가 철철 넘치는 케티가 그 우람한  몸집으로 날 꼭 안고 키스
를 할 때면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기분은 아주 좋았다.
  “My Korean son Tony!”
  저녁에 요트인들이 백사장으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할 무렵이면 언제나 나
를 부르는 웨인과 케티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들은 나를 백사장으로 데려가 다
른 요트인들에게 일일이 소개시켜 주었다. 웨인과  케티는 손재주가 뛰어나고 성
격이 쾌활한 편이어서 모든 요트인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이들 부부는 3년 전
에도 내 배보다 작은 요트를  타고 태평양을 항해한 경험이 있는 요트광으로 항
해중에 돈이 떨어지면 부부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경비를 충당한다고 했다. 미국
에서 자동차 판매를 하는 웨인은 기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고, 봉제 솜씨가 좋
은 케티는 주로 요트 안에서  쓰는 여러 가지 장신구들을 만들어 시중가보다 싼
값에 파는 것이다. 웨인과 케티 덕분에 나는  진짜 요트인으로서 갖춰야 할 마음
가짐이라든가 생활수칙에 대해서 많은 걸 배웠다.
  “요트인들은 항상 배에서 자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하네. 배를 혼자 내
버려두고 다른 곳에서 잠을 자는 사람은 진정한 요트인이 아니지.”
  웨인은 내가 지난 한 달 간 호텔에서 지냈다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는 표정
이었다. 주인이 저를 무시하는데 배라고 그런  작자와 동고동락할 마음이 생기겠
냐는 거였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논리였다.
  “웨인 말이 맞아요, 토니! 배가 얼마나 속이 좁은데?”
  케티가 그  말을 해서 우리 모두는  한바탕 기분 좋게 웃었다.  몸집이 거구인
그들이야말로 속 좁은 배 안에서  먹고 자느라 여간 고생이 아닐 터였기 때문이
다. 배도 고쳤고,  어느덧 남반구의 태풍철이 시작될 11월  초순이었다. 요트인들
이 하나 둘씩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선구자 2호의 출발 일정도 정해졌다. 1994
년 11월 3일 저녁 우리는 백사장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그 날의 인기 메뉴
는 ‘강동석식 요트 비빔밥’.  ‘강동석식 요트 비빔밥’이란 양파, 마늘, 감자,
스팸을 얇게 썰어 볶은  다음 밥에다 얹고 고추장,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는 것
으로,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고  맛있어 자주 해 먹는 나만의 특별 요리다. 파티
를 열 때면 대개 각국 요트인들이 저마다 한 가지씩 자기네 나라 음식을 만들어
와서 세계요리대회를 연상할  정도였는데, 서로 비슷비슷한 서양  요리 가운데서
비빔밥은 단연 눈길을  끌었다. 매콤한 고추장 맛과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절묘
하게 어우러진 비빔밥의 비결을 묻는 그들에게 난 잘난 척하고 딱 한 가지만 알
려 주었다.
  “비밀은 바로 이 손맛에 있지요!”
  그 말에 갑자기 무슨 요술지팡이라도 구경하듯 내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들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손맛? 그게 뭔데?”
  수바의 한국 교민들이 푸근한 인심으로 나에게 다시 바다로 나아갈 용기를 줬
다면 라토카에서 만난  요트인들, 특히 웨인과 케티 부부는 나로  하여금 진정한
항해자로서 요트 세계 일주에  발을 내딛게 한 동료요, 조언자들이었다. 피지 섬
은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은혜와 축복의 섬이자 아름다운 추억이 깃
들인 곳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제4부 인도양에서 만난 사람들
    1. 호주에서의 불쾌했던 몇 가지 기억
  1994년 11월 20일, 호주  브리즈번항. 바쁜 일정과 태풍 ‘바니아’에 쫓겨 그
동안 정들었던 피지 사람들과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떠나온 탓인지 내 마
음은 다소 우울했다. 그런 상태로  호주 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맨 처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불법 이민자를 적발해 내는 이민국 관리들의 따가운 시선이
었다. 그들은 신분증을 확인한 후에도 배 안에  있는 짐들을 일일이 헤집어 가며
꼬투리가 될 만한 것이  없나 찾아보는 눈치였다. 총기류는 소지하지 않았나, 마
약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나, 호주에는 무엇 하러 왔나 등등.
  “이건 반입이 금지되어 있는 물품이니 압수하겠소.”
  무뚝뚝한 표정의 이민국 관리가 배 안에서  꺼내온 물건은 미국산 스팸이었다.
호주 국민의 건강을 위해 외국산 육류는 어떤 형태로든 들여올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덕분에 나는  한 달치 영양식으로 준비했던 비싼 스팸을  모조리 압수
당하고도 한 마디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이십 년을 이 자리에 있었지만 한국 사람이 요트 타고 들어오는 건 처
음 보는걸?”
  통관 수속을 마친 뒤 그 곳 이민국 직원이 신기하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여전히 호의적인 느낌을  주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러한 눈빛은 곧 요트
클럽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으리으리하게 꾸며  놓은 클
럽하우스 안에 삼삼오오 떼지어 앉아 있던 백인들의 곱지 않은 눈초리가 일제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도대체 너 같은 유색  인종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
왔지?’ 피부색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지는 그들의 눈빛부터가 내 마음을 얼어붙
게 만들었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과 섞여 있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주
저 없이 그  곳을 떠나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차이나타운으로 가서 식사를
한 다음 요트로 돌아와 잠을 자려는데 기분이 여간 심란한 게 아니었다.
 도착 첫날의 고약한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불현듯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편을 찾아 아프리카에 첫발을 들여놓은  메릴 스트립
이 그 곳 백인  남성 전용 사교클럽에서 당하던 수모. 영화에서는  결국 그 콧대
센 백인 남자들이 메릴 스트립의 용기와 덕망에 감동한 나머지 기립박수까지 보
내 가며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차가운 현
실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설치고 난 다음 날, 이번에는 지하철 안에
서 또 한 번  언짢은 일이 벌어졌다. 초저녁인데도 지하철 안은  승객이 별로 없
고 무척 한산한 편이었다.  ‘땅 덩어리가 넓으니 어딜 가나 붐비지  않는 건 마
음에 드는군.’ 혼자서 제법 여유 있는 생각을  해 보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다음 전철역에서 누군가 내 발 밑에 침을 탁 뱉는 것이었다.
  “노랭이!”
  “깜둥이!”
  “쪽발이!”
  곧 이어 빈정거리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열 대여섯 명쯤 돼 보이는 10대
아이들이 양옆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 다 어디서 나타났지?’녀석들
은 술에 잔뜩 취한 채 열차에 올라  탄 불량배들이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
에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이유 없이 괴롭히려는 못된 녀석들
이 활개치고 다니는 걸 보니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지만 우선은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다음 역까지만 참고 가기로  하고 그들
을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일단  시비를 걸기로 마음먹은 이상  내 쪽에서 참기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녀석들은  어떻게 해서든 나를  자극해서 싸움을
일으켜 볼 작정으로 별 치사한  방법들을 다 썼다. 일부러 발을 밟는 녀석, 어깨
를 툭툭 건드리는 녀석, 저질스럽게 침이나 찍찍 뱉는 녀석. 생각 같아서는 한두
놈 골라 흠씬 패주고도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열댓 명이나 되는 녀석들
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이소룡이나 성룡 정도는 돼야 할 텐데 나로서는 놈들을
한 방에 해치울 묘안이 없으니 분해도 참는 수밖에.  그 때는 지하철 역 한 구간
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던지. 이윽고 다음  정차할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
러나왔을 때, 나는  녀석들을 힘주어 쏘아보는 것으로 겨우 자존심을  달래고 보
무도 당당하게 지하철에서  내렸다. 하지만 더 기막힌 일은 역  사무소에서 벌어
졌다.
  “지하철 안에서 방금 불량배들을 만났습니다.”
  “그래?”
  “10대들이었는데요.”
  “그래서?”
  “열다섯 명쯤 됐어요.”
  “그런데?”
  “그래서 지금 신고하는 거잖습니까?”
  “알았어. 그만 가봐.”
  이것이 그 곳  사무실에서 나의 신고를 접수받은  역장과 나눈 대화의 전부였
다. ‘우라 귀여운 아이들이  너 같은 동양인 한 명쯤 혼내  줬다고해서 눈 하나
깜짝 할 줄 아느냐?’ 표정이  그렇게 쓰여 있는 사람을 붙잡고 이래도 되는 거
냐고 따져 봤자  나만 더 우습게 될  터였다. ‘내가 빨리 이 곳을  뜨는 수밖에
없지!’ 세계 일주 계획이 차츰  늦어져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조급하던 때였다.
안 그래도 발대식만 끝나면 서둘러  떠날 예정이었는데 이 도시는 한사코 내 등
을 떠밀고 있었다.
    2. 브리즈번에서의 출항
  유색 인종 대하기를 마치 하등동물 취급하듯 하는 일부 호주인들의 지독한 편
견 때문에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지
극히 개인적인 체험에 불과하다. 인종에 대한 편견은  호주 외에 세계 여러 나라
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서글픈 현실이었고, 또 그런 나라라고  해서 모든 사
람들이 다 그렇게 편협한  건 아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에게 들어
본 바로는 대다수의  호주 사람들은 선량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결국  내가 겪은
불쾌한 기억은 운이 나빴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1995년 6월 26일.
선구자 2호는 멀리 시드니에서부터  세계 일주 항해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찾
아온 60여 명의 교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대식을 갖고 브리즈번 항구를 떠났
다.
  “꼭 성공해서 돌아오세요!”
  “고맙습니다.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뜨거운 박수와 함께 선구자 2호의 무사 귀환을 빌어 주는 교민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으며 길을  떠나려니 저절로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스폰
서의 도움으로 경제적 부담감 없이  항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런  한편으로는 반드시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하는  것으로 고마
운 분들의 성원에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더욱 강해졌다. 95년  5월 21일 호
주 시간은 현재  아침 8시 10분. 어제 낮  12시에 브리즈번을 떠났다. 비가 많이
내리고 바람의 방향은 계속 바뀐다. 어제 떠나자마자  배멀미 때문에 토한 후 아
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은 좀  괜찮은 것 같다. 상선들이 많이 보인다.
신경을 바짝 쓰고 있어야겠다. 나중에 속이  괜찮으면 ‘강동석식 요트 비빔밥’
을 먹어야지. 저녁. 비빔밥을 다 토해냈다.  이렇게까지 오래 배멀미를 한 기억은
없다. 그런데도 배가  고프지는 않다. 강한 바람 때문에 긴장하여  그런 것 같다.
현재 바람은 25노트로  비교적 강하게 분다. 해가 구름에 가려져  태양열 충전기
로 배터리 충전을 못 하고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HAM 라디오 교신을 못 했다.
브리즈번 항구를 떠나자마자 시작된 강한 바람으로  심한 뱃멀미가 시작됐다. 이
젠 익숙해질만도 한데 뱃멀미는 매번 온몸의 기운을  다 빼가는 것 같다. 바다에
나설 때마다 두려움이 앞서듯이.
    3. 바다새, 버거와의 추억
  선상 위에 올라 돛을 줄이려 하다 보니 요트  위에 새 한 마리가 쉬고 있었다.
지나가던 바다새가 요트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경우가 가끔 있어 그저 또 그렇
게 잠시 지나가는 새려니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둘기만한
그 새가 선실 안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선실 안에 새가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가까이 가도 새는 도망가지 않았다. 노란 부리에 검은 깃털을 가진 바다새.
난 그 새에게 버거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혹시 배가 고픈  것은 아닐까 싶어
쌀과 마른 멸치를 버거 앞에 놓아 봤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시 마실 물을
주었는데도 역시  반응이 없었다. 버거는 그저  선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노란
배설물만을 여기저기 떨어뜨려  놓았다. 새의 배설물들은 그때그때  닦지 않으면
나중에 잘 닦여지지 않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내 빈  공간에 들어와 준
새가 고맙기만  했다. 그러나 계속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니 혹시 병이  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버거, 이것 좀 먹어 봐. 물을 마시든지. 어디 아프니?"
  "바람이 좀더 세게 불어 주면 좋을  텐데.... 버거, 넌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
히 하니?"
  난 버거에게 많은 얘기를  했는데 버거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가
끔씩 날 쳐다보면서  눈을 맞춰 줄 뿐이다. 며칠 동안이나  더 있으려는지...... 이
대로 같이 세계 여행을 하는 건 어떨까.... 항해를 하며 안 것이지만 바다새는 사
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는 새들이니 사람이  얼마나 자
신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들도 사람
의 손이 가까이  접근하면 본능적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버거는  내가 가까
이 가도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물론  내가 버거를 가까이 두려고  한다면 버거
발에 끈을 묶어 날 수 없도록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러는 순간 버거는 자유를 잃
을 것이고, 아마 죽을지도  모른다. 너무 정이 들기 전에, 보내기 쉬울  때 난 버
거를 보내야 한다. 그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다. 버거를 손에 올려놓고 선상 위에
올라와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러나 버거는  하늘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날아와
배 위에 앉았다. 마치 날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왜 내 휴식을 방해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눈에 거슬려?"
  절대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바다새는 바다에 있어야 한다. 난 다시 버거를
하늘로 밀어 보냈다. 이번에는 힘이 딸려서 그런지  배에 다시 날아오는 데 시간
이 좀더 걸렸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슬퍼 보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버거. 분
명 버거는 다른 새와 달랐다.  이렇게 사람을 잘 따르는 새는 처음 보았다. 외로
워서 그러는 것일까.  3일이나 내 옆에 머물던 버거를  난 끝내 떠나 보냈다. 그
때의 섭섭한 마음을 적은 일기의 한 부분이다. 버거를 한 번 더 하늘로  보냈다.
버거는 한참 날개를 열심히 움직이더니 힘이 빠진  듯 따라오지 못했다. 바다 위
에 착륙해 지나가는  파도를 타며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그리고  내 시선에서
점점 멀어졌다. 난  은근히 버거가 다시 돌아왔으면  했다. 내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니었나.... 이번에 버거가  다시 돌아온다면 정말로 다시  바다로 안 보낼 것이
다. 하지만 버거는  점점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고  난 다시 혼자 남았다. 버거와
함께 했던 3일 간의 추억, 무엇인가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는
것, 또  일어나면 날 쳐다보는 생명이  있었다는 것들을 가슴에 묻고  내 외로운
항해는 계속되었다.
    4.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한국 사람
  나는 부지런히 배를  몰아 다음 목적지인 코코스 킬링(Cocos Keeling)으로  향
했다. 그렇게 다부진  각오로 떠난 길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바다 한가운
데서 벌어졌다. 교신으로 내  위치와 현재 상태를 알려야 할 HAM  라디오의 안
테나가 망가져 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기수를 호주 북부 다윈 항으로 돌렸다.
이후로는 4일 동안이나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채 항해를 해야만 했다. 다윈은
사막에 세워진 인구 6만  명의 행정 도시로 주변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어선
들의 불법 어획을 감시하고 아시아 지역 불법 이민자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일이
그 곳 관리들의 주요  업무라 할 수 있다. 그 외  열대우림으로 둘러싸인 카카두
국립공원, 테리토리 야생동물공원, 다윈 크로커다일 팜 등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
로도 널리 알려진  이 곳은 <종의 기원>의  저자인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1911년에 방문했던  것을 계기로 현재의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같은 대륙의
시드니나 멜버른보다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이나 싱가포르  쪽에 가까운 탓인지
다윈은 전체적으로 동양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한가로운 느낌의 도시였다.
  요트클럽 분위기도  브리즈번보다는 한결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호의적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해안에 식인상어나 독 해파리 같은 것들이 많아서
수영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지만 그런 대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볼거리들은 쉽
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안테나를 수리하는 틈틈이  시내에 나가
영화를 관람하거나 요트클럽에서 독서를 하는 등 비교적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
냈다. 같은 호주  땅이어서 이번에도 전처럼 곤혹스러운 일을 겪게  되지나 않을
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다윈은 세계 일주 항해에  기분 좋은 추억을 하나 더
보태주었다. 1995년 7월 19일.  다윈 항구를 떠나 코코스 킬링을 향해 닻을 올린
배는 이제 인도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인도양의 길고 높은 파도와  적당한 바
람이 항로를 제법  순탄하게 밀어 주는 가운데  밤낮없이 항해를 이어가 코코스
킬링에 도착하기 일 주일 전의 일이었다. 자정 무렵, 수평선 남쪽에 커다란 항해
등 불빛이 나타났다. 캄캄한 바다에서 덩치 큰  배를 만난다는 것은 암초에 부딪
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그 배가  다른 방향으로
지나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가까이 접근해 오는  불빛을 보
니 분명 이쪽으로 항해중인 상선이 아닌가.
15분 후, 불빛은 훨씬 더 가까워졌다.
  "수평선에 보이는 배, 응답 바랍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쓰는 VHF 라디오로  계속 교신을 시도해 보았으나 상대방에
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차츰 차츰 다가오는 거대한 상선. 그 앞에서는 종이
배 같기 만한 내 요트. 상선는  불과 200m 거리까지 근접해 오고 있는데 교신이
되지를 않는다.  큰일이다. 나는 다급해진 마음으로  계속 교신을 시도하는 한편
서치라이트를 상선 족으로 비췄다. '불빛이  너무 약해서 보지 못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다!' 제발 그  쪽에서 내 배를 발견해 주기를 기도하며  불을 비추고 있는
데 이윽고 반응이  왔다. 상선에서도 내 배를 향해 서치라이트를  비추기 시작했
다. '살았다!' 안도의 순간도 잠시뿐, 상선은 나를 발견하고도 무슨 까닭에서인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눈에는 밤중에 손바닥만한 배를  타고 바다
를 휘젓고 다니는  게 꼴사나워 겁이라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상선은 위협적
으로 다가와 선구자 2호를 겨우 10m 남짓 앞질러 가고 있었다.
  "앞에 있는 상선 응답바람!"
  바짝 약이 올라  재차 교신을 시도해 보았더니  한참 만에야 상선에서 응답이
왔다. 기분이 언짢았던가 나는 대뜸 시비조로 물었다.
  "대체 어느 나라 국적의 뭐 하는 배요?"
  상대방도 만만치 않은 어조로 나왔다.
  "파나마 국적 상선이다, 왜?"
  "당신은 그럼 파나마 사람입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 나 한국 사람이다. 왜?"
  여기까지는 서로가 영어로 대화를  했으나 그가 하국 사람이라는 얘길 듣고는
나도 모르게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세요? 정말 반갑네요. 인도양 한가운데서 같은 한국인을 만나리라고는 생
각도 못 했어요. 더구나 이런 한밤중에."
  내 말에 상대방도 크게 놀랐던지 잠시 말문이 막히는 눈치였다.
  "어? 한국분이시네....?"
  "네, 저 한국 사람이에요!"
  좀 전에 나한테 짓궂은 장난을  했던 게 미안했던지 상대는 우물쭈물 말을 잇
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반가운 마음뿐이었다.
  "서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우선 제 인사부터 받으십시요. 저는 강동석이라고
합니다."
  "아, 예.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뒤에 그는 솔직하게 한 가지 충고를 해 주었다.
  "밤중에 이렇게 넓은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사실 주변을 잘 살피지 않게  됩니
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상선들도  이런 시간에는 전방을  살피는데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고, 또 큰 상선끼리는  충분히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저 작은 배들은 24시간 내내 긴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쪼록
조심해서 가십시요."
  세상이 아무리 넓다지만 인도양  한가운데서 한국 사람을 만나 조심하라는 충
고까지 듣고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말로만  듣던 상선과
의 충돌 위험이 방금 전에 내게도 현실이 될  뻔했던 게 아닌가. 순간 온몸에 소
름이 오싹 끼쳐왔다. 앞으로는 밤  항해시 더욱 바짝 신경을 써야지! 두 눈 부릅
뜨고 사방을 주시해 가며 항해를 계속하는 것만이 밤 항해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4.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한국 사람
  나는 부지런히 배를  몰아 다음 목적지인 코코스 킬링(Cocos Keeling)으로  향
했다. 그렇게 다부진  각오로 떠난 길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바다 한가운
데서 벌어졌다. 교신으로 내  위치와 현재 상태를 알려야 할 HAM  라디오의 안
테나가 망가져 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기수를 호주 북부 다윈 항으로 돌렸다.
이후로는 4일 동안이나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채 항해를 해야만 했다. 다윈은
사막에 세워진 인구 6만  명의 행정 도시로 주변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어선
들의 불법 어획을 감시하고 아시아 지역 불법 이민자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일이
그 곳 관리들의 주요  업무라 할 수 있다. 그 외  열대우림으로 둘러싸인 카카두
국립공원, 테리토리 야생동물공원, 다윈 크로커다일 팜 등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
로도 널리 알려진  이 곳은 <종의 기원>의  저자인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1911년에 방문했던  것을 계기로 현재의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같은 대륙의
시드니나 멜버른보다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이나 싱가포르  쪽에 가까운 탓인지
다윈은 전체적으로 동양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한가로운 느낌의 도시였다.
  요트클럽 분위기도  브리즈번보다는 한결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호의적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해안에 식인상어나 독 해파리 같은 것들이 많아서
수영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지만 그런 대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볼거리들은 쉽
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안테나를 수리하는 틈틈이  시내에 나가
영화를 관람하거나 요트클럽에서 독서를 하는 등 비교적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
냈다. 같은 호주  땅이어서 이번에도 전처럼 곤혹스러운 일을 겪게  되지나 않을
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다윈은 세계 일주 항해에  기분 좋은 추억을 하나 더
보태주었다. 1995년 7월 19일.  다윈 항구를 떠나 코코스 킬링을 향해 닻을 올린
배는 이제 인도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인도양의 길고 높은 파도와  적당한 바
람이 항로를 제법  순탄하게 밀어 주는 가운데  밤낮없이 항해를 이어가 코코스
킬링에 도착하기 일 주일 전의 일이었다. 자정 무렵, 수평선 남쪽에 커다란 항해
등 불빛이 나타났다. 캄캄한 바다에서 덩치 큰  배를 만난다는 것은 암초에 부딪
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그 배가  다른 방향으로
지나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가까이 접근해 오는  불빛을 보
니 분명 이쪽으로 항해중인 상선이 아닌가.
15분 후, 불빛은 훨씬 더 가까워졌다.
  "수평선에 보이는 배, 응답 바랍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쓰는 VHF 라디오로  계속 교신을 시도해 보았으나 상대방에
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차츰 차츰 다가오는 거대한 상선. 그 앞에서는 종이
배 같기 만한 내 요트. 상선는  불과 200m 거리까지 근접해 오고 있는데 교신이
되지를 않는다.  큰일이다. 나는 다급해진 마음으로  계속 교신을 시도하는 한편
서치라이트를 상선 족으로 비췄다. '불빛이  너무 약해서 보지 못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다!' 제발 그  쪽에서 내 배를 발견해 주기를 기도하며  불을 비추고 있는
데 이윽고 반응이  왔다. 상선에서도 내 배를 향해 서치라이트를  비추기 시작했
다. '살았다!' 안도의 순간도 잠시뿐, 상선은 나를 발견하고도 무슨 까닭에서인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눈에는 밤중에 손바닥만한 배를  타고 바다
를 휘젓고 다니는  게 꼴사나워 겁이라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상선은 위협적
으로 다가와 선구자 2호를 겨우 10m 남짓 앞질러 가고 있었다.
  "앞에 있는 상선 응답바람!"
  바짝 약이 올라  재차 교신을 시도해 보았더니  한참 만에야 상선에서 응답이
왔다. 기분이 언짢았던가 나는 대뜸 시비조로 물었다.
  "대체 어느 나라 국적의 뭐 하는 배요?"
  상대방도 만만치 않은 어조로 나왔다.
  "파나마 국적 상선이다, 왜?"
  "당신은 그럼 파나마 사람입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 나 한국 사람이다. 왜?"
  여기까지는 서로가 영어로 대화를  했으나 그가 하국 사람이라는 얘길 듣고는
나도 모르게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세요? 정말 반갑네요. 인도양 한가운데서 같은 한국인을 만나리라고는 생
각도 못 했어요. 더구나 이런 한밤중에."
  내 말에 상대방도 크게 놀랐던지 잠시 말문이 막히는 눈치였다.
  "어? 한국분이시네....?"
  "네, 저 한국 사람이에요!"
  좀 전에 나한테 짓궂은 장난을  했던 게 미안했던지 상대는 우물쭈물 말을 잇
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반가운 마음뿐이었다.
  "서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우선 제 인사부터 받으십시요. 저는 강동석이라고
합니다."
  "아, 예.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뒤에 그는 솔직하게 한 가지 충고를 해 주었다.
  "밤중에 이렇게 넓은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사실 주변을 잘 살피지 않게  됩니
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상선들도  이런 시간에는 전방을  살피는데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고, 또 큰 상선끼리는  충분히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저 작은 배들은 24시간 내내 긴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쪼록
조심해서 가십시요."
  세상이 아무리 넓다지만 인도양  한가운데서 한국 사람을 만나 조심하라는 충
고까지 듣고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말로만  듣던 상선과
의 충돌 위험이 방금 전에 내게도 현실이 될  뻔했던 게 아닌가. 순간 온몸에 소
름이 오싹 끼쳐왔다. 앞으로는 밤  항해시 더욱 바짝 신경을 써야지! 두 눈 부릅
뜨고 사방을 주시해 가며 항해를 계속하는 것만이 밤 항해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5. 코코스 섬의 순박한 원주민들
  자물쇠가 필요 없는 섬. 소음이 뭔지, 공해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땅 코코
스 킬링.
호주 영토인 이 곳은 1609년  헤어(Hare)라는 백인이 처음 발견하였다. 아프리카
에서 여자 50명과 노예들을 데리고 섬에 상륙한 헤어 선장은 이 곳을 개인 왕국
으로 만들려고 했던 쾌락주의자였다. 불쌍한 노예들은  헤어 선장이 시키는 데로
그를 위한 왕궁을  지었고, 곧 18개의 산호섬으로 이루어진 이  아름다운 지상낙
원은 쾌락과 탐욕에 눈먼 서양인의  개인 영토로 전락해 버렸다. 몇 년 후, 이번
에는 클루니스  로스(Clunies Ross)라는  서양인이 말레이시아 노예들을  이끌고
섬에 나타났다. 그는 비도덕적이고 방탕한 사생활을  이유로 헤어 선장을 추방시
켜 버렸다. 클루니스는  말레이시아에서 데려온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그
곳 특산물인 야자를 거둬들여 세계 각지에 수출하였고,  그로 인해 난생 처음 문
명의 혜택이란 걸 마소게 된  코코스 킬링의 원주민들은 그를 마치 신처럼 떠받
들었다. 이후 클루니스  가문은 대대로 원주민들의 추앙을 받으며 백  년 가까이
정신적 통치자 역활을 해왔으나  975년 시대적 분위기에 밀려 호주 정부에 보상
금을 받고 섬을 넘겨 주었다.
  클루니스 가족이 살았던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아직도 원주
민들 사이에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8개의
섬 가운데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웨스트 섬과 홈 섬등 두 곳뿐이며 인구는 말
레이시아인 500명과 호주 관리 200여명 정도이다.  섬의 원주민 격인 말레이시아
인들은 대부분  홈 섬에 밀집되어 있고,  주로 행정 업무를 위해  상주하고 있는
호주 관리들은 웨스트  섬에 모여 산다. 원주민들은 대개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주 정부로부터  무직 수당을 받아 생활하고 있는데 그 때
문에 호주인들이  그들을 거머리 대하듯 하는걸  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인종
편견이 심하기로 소문난 그들에게는  하는 일도 없이 세금이나 축내는 원주민들
이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다.
  가만히 놔두었더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삶의 터전을 침범해 놓
고 오히려 주인 행세를 하는 서양인들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원주민들을
보면 한편으론  안타까운 심정이 되기도 한다.  욕심 없이 산다는 게  바로 저런
것일까. 섬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한 번만이라도 바깥 세상을  구경해 보
고 싶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
에 대부분 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생을 마친다는  것이다. 이 조금한 섬이 세
상의 전부인 줄로만 알고 살아온 그들이었기에 그들은 그 곳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인지 알지 못한다. 간혹 외지인들이  찾아와 이 곳이야말로 ?恥車タ?
이라고 말해 줘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저 빤히 쳐다보는 섬 사람들의
눈빛은 해  맑기만 하다. 그들은  외지인들을 보면 무척  부끄러워하고 이쪽에서
말을 걸어도 대답도  잘 할 줄 모른다.  마치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종이 같은 사람들이다.  섬 사람들은 아직도 빗물을 받아 마시며  그날그날 일용
할 양식도 자연에서  얻는다. 도처에 널린 해산물과 코코넛 열매가  그들의 주식
인 것이다. 호주  정부에서 매달 지급해 주는 연금으로 그럭저럭  생활은 유지되
고 의료 혜택도 충분히 받을 수 있으므로 앞날에 대한 걱정 없이 그렇게 살아가
면 된다.
    6. 다양한 직업의 요트인들
  선구자 2호는 코코스 제도의 크고 작은 열 여섯 군데의 무인도 가운데 하나인
디렉션 섬에 닻을 내렸다. 내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여 척의 각국 요
트들이 정박되어 있었다. 디렉션 섬은 요트인들의 집합소 구실을 하는 곳이었다.
도착 당일인 8월  9일은 여동생 애리선의 스물네 번째 생일이었다.  생일 축하라
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는데 무인도에 정박하게 됐으니 사실 불가능
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디렉션  섬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잠시 내 눈을 의심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인도에 공중전화가 다 있다니!  이렇게 놀라울 수가!' 분명 헛것을 본  것은
아니었다. 달려가 카드를 넣었더니 발신음이 들려 왔다. 덕분에 여동생한테 축하
전화도 해 주고 어머니 안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요트인
들을 위한 호주 정부의  작은 배려가 그 때만큼 고맙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해
안가에는 먼저 도착한  호주 선적의 요트가 두 척, 스페인  배 두척, 미국 배 세
척, 캐나다 배 한척,  글고 핀란드 국기를 단 요트가 한 척  정박되어 있었다. 조
그만 섬에  요트인들끼리 모여 있으니  디렉션 섬은 곧  항해자들의 천국이었다.
섬에는 공중전화 외에도  빗물을 저장해 놓은 석수 탱크도 마련되어  있었다. 요
트인들은 저녁마다 섬 한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어 놓고 장기 자랑을 하면서 그간
망망대해에서 처절하게 느꼈던  외로움을 풀었다. 첫날 저녁 선구자  2호의 환영
식을 겸한 신고식 자리에서 나는 주특기인  하모니카 연주로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들려주는 것으로 그들에게 후한 점수를 받았다.
  각자 자기를 소개하면서 알게 된 요트인들의  직업은 가지가지였다. 스페인 출
신 데이빗과  아델라 부부는 남편인  데이빗이 상선의 선장이었고,  호주인 믹은
목수, 미국 청년  스티브는 연주가, 브라이언은 무직,  그밖에도 비이와 다이앤은
호주 출신의  연인사이로 그중 비이의 직업은  목사였다. 그 외 항해  중에 만난
요트인들의 면면을 보면 의사, 변호사,  교사, 공무원, 학생, 운전수, 실업자, 심지
어 감옥에서 복역하고 나온 전과자  까지 전직들이 무척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디렉션 섬에서  만난 요트인들 가운데 가장 나를 황당하게  만든 사람은
전직이 목사였다는 비이였다. 비이와 다이앤은 좀처럼  다른 요트인들과 잘 어울
리지 않는 편이었는데  하루는 내 배에 붙어있는  물고기 문양을 보더니 비이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 기독교인이오?”
  “그런데요?”
  말수가 별로 없어 보이는 비이는  내 대답을 듣고 호감을 표시하면서 같이 성
경 공부를  하자고 제의해 왔다. 나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이튿날 낮에
비이와 다이앤의 요트를 방문하였다. 내가 선뜻  그들의 요트를 방문하겠다고 한
데에는 사실 비이의  여자친구 다이앤에 대한 호감도 한몫 하였다.  다이앤은 브
룩실즈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에 어딘가 신비감마저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을 지
진 30대 여성이었다.
  “어서 와, 토니!”
  셋이 마주 앉아 성경 공부를  하는 것으로만 알고 왔던 나를 어린아이 대하듯
하며 비이가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브와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 아니었어.  그들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몇
백만 년 전에 지구에 생명을 퍼뜨린 사람들은 우란티아라는 성에서 온 외계인들
이야. 그들이 바로 우리들의 조상이라구.”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그 정통 기독
교인이 아닌 신흥종교의 신봉자라는  걸 깨닫고 좀 어리둥절한 느낌이었지만 워
낙 그 태도가 강경하여 별다른 반론도 제기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반론을 제기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어차피 상대가 그것을 믿기로  한 이상 목청 돋궈 가면
비난해 봤자 별  의미가 있는 일도 아닐 터였다. 믿는  것도 자유, 안 믿는 것도
자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그들을 이단이라고  배척할 수만은 없다는 생
각이 들었다.
  “아주 흥미롭군요. 난 그런 말 처음 들어 봐요.”
  적당히 그쯤에서 자리를 일어나기로 하고  한 마디 했더니 그들도 더 이상 나
를 잡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참 별난 사람들도 다 있구나 생각하며  내 배로 돌
아오는데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비이는 우란티아교라는 외계인  숭배교의
교주나 선교사쯤 되는 눈치였고, 다이앤은 말하자면 그의 단 하나뿐인 신도였다.
그런데 왜 하필 비이는 나를 새로운 전도 대상으로 점찍었던 것일까? 다른 요트
인들 중에도 기독교인은 많았는데 말이다. 그만큼 내가  바보 같아 보였나? 내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며칠 뜸을 들이며 포섭해 볼 생각도 안 해 보고 처음
부터 본론을  꺼내는 실수를 했던 것일까?  자꾸만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평소
교회에도 잘 가지 않던 내가 미인에 현혹되어 그런 엉터리 설교나 듣고 다닌 걸
알면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7. 브라이언과의 우정
  세계 인주 최연소 항해  기록에 도전하며 하와이에서 디렉션섬까지 왔다는 브
라이언은 19세의  미국 청년이다. 그는 이미  다섯 살 때부터 부모와  함께 배를
타고 6년  간 남태평양을 항해한 경험이  있는 골수 요트  가문의 외아들이었다.
브라이언과의 만남은 내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나보다 여섯살이나  어린 그였지
만 항해 경력이나 자신감만큼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 당찬 모습에 고개가 저
절로 숙여질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건 그의 부모님이었다. 아직까지 배에서 생
활하고 있다는 그의 부모님들은  아들이 무사히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오면 다
시 남태평양으로 나가 여생을 마감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고 한다. 그런
데 그렇게 바다를 사랑하셨던 그분들도 자식이 바다에 나간다고 했을 때는 한사
코 반대를 했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들은 바다에  뼈를 묻을 각오로 영원히 돌아
오지 않을 항해를 준비하고 있지만 자식만큼은 안전한 육지에 남아 있길 바라는
것은 어느  부모나 똑같은가 보았다.  그런 부모님들을 끝까지  설득하고 바다로
나온 브라이언의 고집에서 나는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부모님의 반
대를 무릅쓰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틈틈히 모은 용돈으로 선구자 2호보
다 작은 8미터  길이의 20년 된 3톤급 요트‘마이미티 호’를  구입했다고 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저 조그만 배를 타고 감히 단독으로 세게일주를
꿈꾸다니...!’
  처음에 브라이언의 등장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그는  주로 깡통 음식으로 끼니
를 때워 가며 하와이에서 그  곳까지 왔다고 하는데 한창 팔팔한 나이라 그런지
겉보기에는 무척 건강해 보였다. 내가 바다에서  질리도록 먹었던 깻잎과 짜장밥
을 주었더니 어찌나 신기해하면서  먹어치우던지 나조차 저 음식이 저렇게 맛있
는 것이었던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던 녀석이었다. 우리는 둘  다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외아들이고, 또 세계 일주  항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브라이언과 나는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그는 혼자서  외롭게 항해
하던 중 비슷한 처지의 나를 만난게 무척  반가웠던 듯 친동생처럼 나를 따랐다.
우리는 이후 남은 일정을 가급적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서로의 일정을 조정하였
다. 나로서는 그를  만나게 여러 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은 항해가 외롭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자칫하면 게을러지기 쉬운 생활 속에서 브라이언을
통해 일종의 경쟁의식 같은게 싹텄다. 그는 세계  일주 최연소 항해 기록을 달성
하기 위해 만 20세가 되기 전인 1996년 6월 이전에 하와이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남은 일정이 그다지  여유롭지 못한 편이었다. 자연 한 곳에서  오래 머물기보다
는 한 발짝이라도 더 바다로 나가는게 자신을 위해 이롭다는 판단으로 항해에만
전념하고 있는 그를 보면 나 또한 조급한 마음이 들곤 하였다.
  나이도 어린 브라이언이 저렇게  열심히 항해를 하는 동안에는 이런저런 이유
를 들어 자칫 일정을  게을리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기후  조건이 좋지 않아
서, 또는 몸이 아파서 등등의 핑계를 대며 항해를  몇 달 미루고 경치 좋은 곳에
서 속 편하게 쉬었다 간들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그 때 나는 브라이언
이라는  선의의  경쟁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여간해서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
코코스 킬링의  아름다운 풍광에 흠뻑  매료되어 있었다. 단단한  겉껍질을 칼로
쪼개면 시원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코코넛의 풍부한  과즙과 그 씹히는 맛이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고,  해변가에 지천으로 널린 게 사냥, 싱싱한 횟
감을 언제든 잡아 올릴 수 있는 바다낚시의 묘미까지 디렉션 섬에서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매일 산해진미를 즐길 수 있는  천혜의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텔레
비젼이나 전자오락실, 햄버거 가게 없이도 하루 종일 놀거리, 먹을거리가 떨어지
지 않는 섬에서  평생 자연의 일부분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
면서도 L.A.에서 고생하고  있을 어머니와 에리선을 떠올리게 되면 어느덧  마음
이 무거워졌다. 나  혼자만 이 좋은 곳에서 호강하고 있다는  죄책감때문에 괴로
울 때도 많았다.
  하루는 그런 우울한 기분에 젖어 백사장에 누워 있는데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뒤로 한 채 낯익은 배 한  척이 섬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카나니 1호! 바로 피지
섬에서 만난 웨인과  케티 부부의 배였다. 브리즈번으로 급히 떠나는  바람에 제
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 그들을 뜻밖에도 다시 만나게 되다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토니, 너냐?”
  내가 어린아이처럼  껑충껑충 뛰며 다가갔더니 선실안에  있던 부부가 동시에
갑판으로 튀어나와 그들 특유 의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웨인!”
  “토니!”
  우리는 서로 혈육 상봉이라도  하듯 얼싸안고 해안가가 떠나가라 감격적인 재
해의 기쁨을 나누었다.
  “뉴질랜드까지만 항해하려고 했는데 우리 코리안 아들을 보고 싶어서 여기까
지 따라왔지?”
  디레션 섬에는 웬일이냐고 묻자 웨인이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항
로을 바꿨다고 말해 주었다.
  “그럼 앞으로 나랑 같이 다닐 거예요?”
  “물론이지.”
  그들 또한 나와 같은 항로로  배를 몰아가기로 했다는 말에 나는 더욱더 흥분
을 금할수 없었다. 브라이언  같은 친구에, 게다가 날 마치 친아들처럼 대해주는
웨인 케티 부부까지 만났으니 나로서는 더이상 바랄 게 없었다.
  “역시 이 섬은 행운의 섬이야!”
  내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자 인정 많은 케티 아줌마가 한마디 한다.
  “토니, 너 밥은 먹었니?”
    8. 웨인의 생일 파티
  웨인과 케티의  등장으로 디렉션 섬은 더욱  활기를 띠어 갔다. 그  동안 배도
사람도 많이 늘었다. 섬에 정박해 있는 20여  척의 요트에 승선한 인구만도 대략
30~40명 정도. 그  중에는 나처럼 혼자 항해하는 ‘나 홀로  배’들도 더러 있었
지만 가족 단위나 부부, 친구와  함께 항해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작은 섬에 모
여 있다고 해서 다들  사이 좋게 지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개중에는 서로 까
닭 없이 멀리하려는  이들도 생겼고, 사소한 일로 사이가 틀어져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부류들도 있었다. 아무리 손바닥만한 섬에서, 고작 몇십 명이 모여
산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아니, 서로 인종이 다르며, 연령층
이 다른 남녀가 한 곳에서  생활한다는 점에선 지구촌의 축소판이라 할 수도 있
었다. 가족 간에도 서로 의견이 맞서면 불편해질  수 있는데 하물며 그 상황에서
모두가 마음에 맞는 상대일 수는 없을 터였다.  자연 서로 기질이 통하는 몇몇이
서 패거리를 만들어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웨인과 케티 부부를 중심으로 해서  미국 친구 칼과 브라이언, 스페
인 친구인 칼로스  등 젊은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고, 프러페셔널  기타 연주자로
일하는 데이빗과 수 부부도 우리와 함께 했다.  우리는 낮에는 바다낚시나 게 사
냥 등으로 먹을  것을 장만하고, 밤에는 모래사장에 모닥불을 피어  놓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여행담을 주고 받았다. 하루는 웨인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우
리 모드 술 파티를  열었다. 명색이 웨인의 생일 축하 파티였지만  그는 술을 좋
아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젊은 친구들만 생일 축하를 핑계로 신나게 마셔대
는 꼴이었다. 각자 술과 음식을 가지고 나와  데이빗의 기타 연주에 맞춰 흥겹게
춤도추고 목이 터져라  팝송도 부르며 정말 신나게 놀았다. 술도  엄청나게 마셨
다. 활활 타는 모닥불과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술은 달기
만 하고 기분은  마냥 날아오를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마셔 댔을까. 자정쯤
되어 파티의 주인공은 이미 돌아가 버린 뒤였고 다른 사람들로 대부분 잠자리로
들어가 모래사장에는 나와 데이빗, 칼로스 세 사람만 남았다.
  “우리 배에 술이 또 있으니 가서 마시자!”
  우리 셋 중 제일 연장자인 데이빗이 마지막 남은 빈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아
쉬운 표정을 지었다. 데이빗은 그 날 자신의  특기인 기타와 바이올린 연주로 파
티 분위기를 최상급으로 만들어 준 공로자였다.  마흔이 넘는 나이에도 데이빗의
연주 솜씨와 음악에 대한 열정은 20대 청년  못지 않았다. 데이빗은 클래식에 남
다른 재주가 있었는데 특히 <로망스>는 세고비아  뺨칠 정도 였다. 적당히 예술
적이고 적당히 귀족적이며 나름대로 인새의 멋이  무엇인지도 아는 남자 데이빗.
우리는 기꺼이 그와  한 잔 더하기를 원하며  ‘페이션스 호’를 방문하기로 했
다. 페이션스  호는 데이빗과 그의 아내  수의 애선으로 그 시각에는  수 혼자서
곤한 잠에 빠져 있을 터였다.
  “자, 여기 고무 보트가 두 척 있으니 이걸 타고 가자구!”
  우리 셋 다 몹시  취한 상태였다. 데이빗이 먼저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고
무 보트를 타고 페이션스 호로 가는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토니, 데이빗 좀 봐! 완전히 맛이 갔군, 안 그래?”
  “우리도 맛이 갔어, 이 친구야!”
  칼로스는 어둠 속에서 마치  곡예를 하듯 툴툴거리며 나아가는 데이빗의 고물
보트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보트가 고물이긴 우리가 타는 것도 마찬가지 였고,
칼로스와 내가 자꾸만  노를 놓치는 바람에 남이보면  더 가관이라고 했을 터였
다. 술에  잔뜩 취한 칼로스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대며
되는 대로 노를 휘젓고 나  또한 정신없이 해롱거리며 고무 보트를 몰아가고 있
을 때였다. 갑자기 칼로스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그만 균형을 잃고 보트가 뒤
집혀 버렸다.
  “사람 살려! 하느님 저 여기 있어요!”
  “데이빗! 우리 물에 빠졌어요!”
  둘이서 정신을 못 차리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허우적 거리고 있는데 데
이빗이 용케 노를 저어 왔다. 나와 칼로스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 보트를 몰
고 오는게 불안했던지 데이빗은  앞서가면서도 내내 신경을 우리 쪽에 집중시켰
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취했어도 역시 연장자는 다르다는 걸 그 때 느꼈다. 젊은
혈기만 믿고 데이빗을 뒤에서 놀렸던  우리가 그 날 밤 반성하는 뜻에서 페이션
스 호가 아닌 선구자 호에서 2차를 즐겼다.
  “죽었다 살아난 몸이니 축하하는 뜻에서 한 잔 더!”
  “생명의 은인이신 데이빗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한 잔 더!”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광란의 밤이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얼마나 마
셨던지 다음날 눈떠 보니 선구자 호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갑판이며 선실이며
할 것 없이 온통 맥주 깡통과 빈 술병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게다가 토사물까
지! 그 와중에도 데이빗은 칼로스와 각자 자신의 배에  돌아가 잠을 잤던지 배에
는 나 혼자뿐이었다.
  “술을 그렇게 마시고 언제 여기까지 와서 주무셨어요?”
  한낮이 되어 대충 정신을 차린 다음 안부를 묻기 위해 페이션스호를 찾아갔더
니 데이빗이 게슴추레한 몰골로 나와 이상하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토니, 너 여기서 안 잤어?”
  양쪽 다 필름이 끊겼으니 서로 어리둥절할 수밖에. 
    9. 바다의 야타족
  남반구의 태풍 철이 잦아들기 시작하면서 디렉션 섬을 떠나는 배들도 하나 둘
늘어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스무 척 남짓했던 배가 어느덧  절반 이상 줄어
들었고 그토록 활기차던 섬은 이제 무인도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적막한 기운이
가득했다. 이 곳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배들은 다시금 대양  한가운데를 향해
힘차게 나아 가고 있을 터였다. 분위가가 썰렁해진  곳은 디렉션 섬뿐 만이 아니
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요트?括? 섬 여기저기에  뿌려 놓은 바깥 바람이 코
코스 킬링 사람들의  평화롭던 인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언제든 기회
만 주어진다면 섬을 떠나고 싶어하는  그 곳 사람들에게 배를 타고 전세계를 여
행하는 요트 인들은 막막한 일상의 비상구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요트인들
사이에서 히피족으로 통하는 믹은  45세의 자유분방한 호주 출신 단독 항해자였
다.  남의  배를 얻어 타고서라도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현지인들에게
는 믹처럼 혼자서 항해하는 ‘나 홀로 요트  족’들이 가장 만만한 상대였다. 그
런 그에게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상대는  코코스 킬링 섬의 세관에 근무하는
30대 호주 여성. 그녀는 믹에게 떠날 때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러 왔다는
것인데 믹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대환영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당돌하고도 순진
한 노처녀는 다음 날 믹과 함께 떠나기도 하고 짐 보따리까지 챙겨 왔는데 문제
는 그 다음이었다.
  “살려 주세요! 나 집에 갈래요!”
  믹과 그녀가 떠난 진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디렉션 섬에 정박해 있
던 모든 배들과, 주위를  지나는 배들의 VHF 라디오에서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
가 흘러나왔다.   울음 섞인 그녀의 구조 요청은 코코스  섬의 무선기지국에까지
전해졌고, 곧 섬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설마 믹이....?”
  요트 인들은 서로 당혹스러운 눈길을 교환하며 온갖 불길한 상상의 나래를 펴
기에 여념이  없었다.  워낙 세계  각국의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집단이다
보니 혹 그가 무슨 영화의 주인공처럼 끔찍한 일이라도 벌이지 않았을까 염려하
는 이들도 있었다.
  “믹, 이봐 무슨 일이야? 응? 응답해봐!”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아가씨는 무사한 거야?”
  VHF 라디오를 듣고 술렁대던 디렉션 섬의 요트  인들이 저마다 믹의 배에 교
신을 보낸다.  뒤쫓아가 본다 해서 한바탕  왁자지껄 소란이 일어난 뒤에야 배가
다시 섬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왜 그래? 그 아가씨는 어디 갔어?”
  “믹, 자네 괜찮아?”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가 수선을 피우는 동안에 배에서 내려선 믹은 머리를 긁
적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후 그의 설명을  통해 들어본 사건의 전말은 한
마디로 걸작이었다.
  “어차피 남녀가 한 배를 타게  됐으니 우린 한 몸 아니야? 그래서 내가 그랬
지. 공연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우리 둘이서 풀어야 할 과제를 풀고 떠나자.  난
그 아가씨가 차마 그 정도로 숙맥인 줄은 몰랐지.”
  평소 믹의 기질로 보아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그는 항해 도
중 정조 관념과는  거리가 먼 여성들을 수도 없이  배에 태우고 다녔을 테고 그
호주 여성  또한 그런 시각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가 엉뚱한
궤변을 늘어놓으며 ‘둘만의 과제를 풀려고 한 순간 상대는 기겁을 해서 놀랐을
테고 그 뒷 얘기는  안틀어 봐도 뻔한 것이었다. 성미 급한  믹이 순진한 처녀를
히피족쯤으로 오해한 나머지 곤욕을  치러야 했다면 탐과 자니라는 캐나다 친구
들의 경우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둘은 어릴  적부터 친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였
다 탐은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서도 알아주는 컴퓨터 공학도였는데 단짝 친구인
자니와 함께 아프리카까지 여행하기  위해 회사에 1년 간 휴가까지 신청한 의리
의 사나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항해 중에 만난
유태인 히피 여자들 때문이었다. 이름이 하다스와  제다인이라는 두 명의 유태인
여자가 탐의 배 ‘일라일라  호’에 접근해온 것은 호주의 어느 항구에서였다고
한다. 이 여자들은 그 전에도 남자들의 배를 얻어  타고 이 바다 저 바다를 떠돌
아다니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던  중 탐과  자니를 만난 것이다.   순진한 캐
나다 청년들은 어딘가 청교도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유태인 처녀들을 아무 거
리낌없이 배에 태웠던  것인데, 막상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보니  여자들의 태도
가 180도로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일라일라 호는 내 배 선구자  2호보다도 작은
소형요트인데 그 비좁은 선실 안에서 여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추파를 던지며
두 남자를 유혹했다나 어쨌대나.
  “와 좋았겠다! 근데 왜 그런 행운이 나한텐 찾아오지 않는 걸까”
  그건 차라리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며  울분을 토하는 자니를 부러운 듯이 바
라보던 누군가가 투덜거려 한바탕 배를 잡고 웃어들  댔다. 그런데 이 두 여자들
이 동승한 이후 탐과 자니의 돈독한 우정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을 두
고 디렉션 섬의 요트인들  사이에서는 말이 많았다. 그 첫째가 두  여자 모두 탐
에게만 호감을  나타냈기 때문에 자니가  삐쳤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뚱뚱하고
평범하게 생긴 제다인보다는 빼어난 미인에 속하는 하다스라는 여자에게 자니가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정작 그녀는 탐의 파트너가  되길 원했기 때문에 불화가
생겼다는 추측 등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확신을 할 수 없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 세 번째  추측이었다. 즉 고향
마을에 약혼녀까지 두고 온 탐은  약간 바람기가 있는 편이었고 아직 총각인 자
니는 그 방면에 전혀 소질이  없는 데다가 약간의 결벽증까지 있는 성격으로 배
안에서의 문란한 생활에  거부감을 느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추측을 증명이라
도 하듯 나중에  모리셔스 섬으로 탐의 약혼녀가  찾아왔을 때 자니는 자신들의
잘못을 그녀에게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고 우겼다. 탐은  물론 그 말을 듣고 펄쩍
뛰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여자 둘을 데리고 디렉션  섬까지 들어온 탐과 자니는 차츰 서로에 대
한 불만으로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듯싶더니 급기야는 훗날 아프리카에서 자니
혼자 캐나다로 돌아가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친구간의 우정을  돈독히 하
기 위해  떠난 여행이 차라리 안가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 유태인 여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자니가 불만을 갖거나 말거나 일단
배 주인이 탐의 허락 하에  여자들을 태우고 딜러일라 호가 디렉션 섬을 빠져나
간 얼마 후 또 다른  섬에서 하다스와 제다인은 마크와 피트라는 미국 친구들의
배로 접근해 동행을  요청했으나 곧 거절당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세계
일주 항해에 나선 마크와 피트는 월간 <베가본드 소식>이라는 리플렛을 만들어
연간 100달러씩  받고 독자들에게 우송해 주며  그 수익금으로 항해하는 가난한
요트 족이었는데 글 솜씨가 좋아 정규 독자만 100여명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가 비좁다는 이유로  여자들의 동행 요청을 거절했던 것인데 그렇다
고 해서 물러설 여자들이 아니였다.  하다스와  제다인은 디렉션 섬에 남아 있는
요트인들 가운데 적당한 상대를  물색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고 나 또한 그녀들
의 타깃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즉석에서 그들의  제안을 물리쳐
버렸다. 그 얼마  후 선구자 2호는 섬을 떠났고 하다스와  제다인을 다시 만나게
된 건 모리셔스  섬에 정박해 있는 칼로스의 배 ‘페네로피  호’에서였다. 칼로
스는 길게 늘어뜨린 금발이 아주 매력적인 보기 드문 미남의 단독 항해자였으므
로 여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흐흐, 나한테도 이런 기회가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분명 디렉션 섬에서는 혼자 떠났던 그가 모리셔스 섬에 갔을 때는 두 명의 젊
은 여자와 생활하고 있는 걸 보고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
거나 말거나  당사자인 칼로스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칼로스  혼자서 저
극성맞은 두  여자들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물론  천주교 신자인 칼로스는 신께
맹세코 자기는 결백하다고 주장하지만.
    10. 보이지 않는 사랑
  선구자 2호가 디렉션 섬을 떠나게  된 것은 그 곳에 정박해 있던 배들이 하나
둘씩 바다로 나가기  시작한 9월 중순경이였다. 바야흐로 육지에서의  집시 생활
을 끝내고 바다에 정착해야할 시점이 온 것이다.  머물러 있으되 육지는 결코 항
해자의 정착지는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바다 한가운데가  정착지일 뿐이
다. 흘러 다니면서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는 이상한  유랑자들.... 그 동안 출항 일
지가 잡히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라디오의 기상정보에 귀를 기울이던 브라이언
은 사랑에 빠졌다.  부모와 함께 항해중이던 동갑내기 핀란드 소녀가  그의 가슴
에 큐피트의 화살을 명중시킨 사랑의 요정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하루만 더 있다 가자, 응?”
  “이 친구야, 바다에 일요일이 어디 있나?”
  아직 핀란드 배가  떠나지 않은 걸 알고는  이래저래 출발을 늦추자고 떼쓰는
브라이언을 설득하느라고  깨 애를 먹었다.  그가 굳이 따로  떠나고 싶어한다면
모를까, 우리가 동반자로서  항해를 할 거라면 그  날이 적격이었다. 한 치 앞의
기상 상태를 확신할 수  없는 바다에서는 그나마 무선항만국의 일기예보가 가장
좋은 상황에서 떠나는 게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가서 엘리 얼굴이나 한 번 더 보고 와.”
  엘리는 그가 사랑에 빠진 핀란드 소녀의 이름이었다.   바다를 집 삼아 떠도는
요트 인들에게는  사랑도 미래가 없다. 오늘은  이 항구로 내일은 또  저 바다로
끊임없이 유랑하는 처지에 사랑은 다만 달콤한 상처쯤 으로 가슴에 새겨지는 것
이다. 브라이언은 결국 그 달콤한 상처를 뒤로  한 채 닻을 올렸다. 오후 4시, 석
양에 물드는 디렉션 섬의 코코넛 나무 숲길 사이로 엘리의 핑크 빛 손수건이 나
풀거리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그 손수건이 가물가물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갑
판에 나와 선 채로 양팔을 천천히 흔들었다.  이별이란 저렇듯 어렵고 무거운 것
이다. 지금쯤 웨인과 케티  부부는 어디까지 갔을까. 우리보다 이틀쯤 먼저 떠난
그들 부부와 헤어질  때도 내 마음은 지금  브라이언처럼 무거웠지만 얼마 후면
모리셔스 섬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곧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있
었다. 브라이언과 엘리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엘리는 혼자
서 항해하는 게 아니고 그녀의 아버지가 모든 일정을 결정하기 때문에 브라이언
과의 재회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작은 연인들의 안타까움은  그래서 더욱 커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브라이언, 괜찮니?”
  동쪽 수평선 너머 코코스  섬이 천천히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면서 브라이언의
‘마이미티 호’도 내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무선 라디오로 그에게  연락을 취
해 봤더니 괜찮다는 응답이 왔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디렉션 섬으로 다시 돌아갈까?”
  아무래도 내가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아서 은근히 속을 떠보았더니 브라이언이
장난스럽게 되받았다.
  “됐네, 이 사람아!”
  나는 기분 전환을 시켜 준다는  핑게로 그에게 우리나라 대중가요 한 곡을 불
러 주었다.  제목은  신승훈의<보이지 않는 사랑>. 바다 한가운데서 노래라기보
다는 거의 괴성에 가깝게 고래고래  외쳐 부르는 그 절절한 한국어 가사를 알아
들을 리 없는 브라이언은 처음에는 원더풀을 연발하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못 참
겠다며 아예 교신을 꺼버렸다.
  “그렇게 괴로운걸 연애는 왜 했니?”
  이미 상대방이 교신을  꺼 버린 무전기에 대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마디
해 준 다음 나 혼자서 2절까지 내처 불렀다.
        제5부 가자, 희망 봉으로
    1.도도 새의 천국이었던 모리셔스 섬
  항해 시작 열흘재인 9월  20일. 바다는 제 정신이 아니다. 바람은 30~35노트로
강하게 불고 4~5미터나  되는 파도가 앞뒤로 덮쳐와  배를 완전히 삼켜 버릴 것
같다. 선실 안까지  침범해 들어온 바닷물에 책과 옷들이 모두  젖었지만 다행히
전기 제품들은 아직  얌전하다. 그런데도 일기예보는 현재 이 곳이  풍속 15노트
의 평화로운  해상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배를 290도  방향으로 틀어
바람을 등진 채 항해하고 있지만 신경이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니다. 커피를 진하
게 타서 마셔도 자꾸만 졸음이 온다.   벌써 여섯 잔 째 커피를 마셨다. 이 와중
에 가스레인지의 고무 호스가 너무 낡아서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그걸 고치는
데만도 30분이나 걸렸는데 큰 파도가 또다시 덮쳐와 온몸이 땀과 바닷물로 흠뻑
젖어 버렸다. 내몲 전체가 완전히 소금에 절여질 판이다. ‘다른 친구들은 다 무
사할까?’ 걱정이 돼서 브라이언과  교신을 해 봤더니 자기도 배가 뒤집혀 죽는
줄  알았다고  응답이 왔다.  배를  24시간  자동으로 조절해  주는  윈드  베인
(windvane)을 점검해 보고 돛대를 지탱해  주는 8개의 줄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그 정도 뿐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고 자꾸만 커피를  마신다. 무조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강
박관념 때문에  이 상황에서 커피를  쓰디쓴 생명수처럼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잠 한숨 못 자고 갑판을 지키고 있기를 꼬박 하루 반나절 만에야 바람은 잦아들
었고 파도도 어지간히  잠잠해졌다. 험한 파도에도 끄떡없이 견뎌준  선구자 2호
의 끈기에 보답하는  뜻에서 바닷물로 깨끗이 목욕을 시켜 주었다.  이후로는 별
어려움 없이 순항, 선구자 2호는 코코스 킬링을  떠난 지 19일 만에 모리셔스 섬
에 안착하였다. 날지 못하는  새, 도도 새의 천국이었던 모리셔스 섬은 남아프리
카 마다가스카르 항구  동쪽에 위치한 무인도였다. 400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이 곳은 제국주의 열강의 표적이  되어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1968년에야 독립국가로 인정 받았다. 사람
들이 자연의 보고인 이 섬에  들어와 저지른 최악의 재앙은 바로 세계적으로 희
귀종인 도도 새를  멸종시켜 버린 일이었다. 식민지 시절 사탕수수  생산을 위해
인도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의 후예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곳은 아프리
카 흑인, 중국인, 그리고 소수의 백인 지배 층으로 이루어진 다수 민족 국이다.
  “토니, 어서 와 고생 많았지?”
  선구자 2호보다 먼저 모리셔스  섬에 도착한 ‘마이미티 호’화 ‘카나니 1호
’등이 정박되어 있는  요트 계류장 앞에는 브라이언과 웨인 케티  부부, 칼로스
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코코스  섬을 떠
난 일행 중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한 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가장 격
정되는 것은 단파 라디오나 장거리 무선 통신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네
리드 호’와 ‘SEA ME NOW 호'
  “네리드 호는 혹 모리셔스가  아닌 다른 곳으로 항로를 바꿨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SEA ME NOW 호'의 데이빗 할아버지야.”
  ‘SEA ME NOW 호'의 데이빗 할아버지는  75세의 고령으로 단독 세계 일주
를 꿈꾸고 미국을  떠나 인도양까지 씩씩하게 달려온 노익장 요트  인이다. 웨인
은 네리드 호에  승선한 다섯 명 가운데  한명에게서 얼핏들은 이야기가 생각나
그들이 어쩌면 태평양으로 다시 돌아갔으리라고 추측하며 데이빗 할아버지 걱정
을 더 많이 했다. 젊은 사람들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남극의 삼각파도와 강풍을
과연 노인 혼자서 뚫고 나올 수 있을까. 우리로서도 몹시 불안한 상황이었다. 안
좋은 소식이 들려  온건 내가 모리셔스 섬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이었다. 인도양
한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사투를 벌이던 ‘SEA  ME NOW 호'는 결국 침몰하였
고, 다행히도 데이빗  할아버지는 지나가던 상선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
었다는 소식이었다. 젊은 사람들도 하기 힘든  일을 해내겠다고 투지를 불태우던
데이빗 할아버지의  꿈이 무산돼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우리는 모두
할아버지의 생명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모리셔스에 머물
며 난 세계 일주를 시작할 당시에 품었던 꿈,  또 그 때의 굳건한 의지를 완전히
되찾았다. 이제는 내가 왜 바다로 나가야 하는지 주저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
때의 각오를 친구 앤디에게 편지로 썼다.
  요즘 난 테네손의 시<율리시스>를  자주 읽는다. 너도 한 번 읽어 봐라. 그럼
너도 바다로 가고 싶은 충동이 생길 것이다.
  “같이 새로운 수평선으로 가자. 새로운 섬들을  발견하고 우리만의 세계를 만
들자.
 사회의 제압 앞에서 무릎 꿇지 말자.”
  어떤 면에서 보면  난 불효자에다 실패한 사회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지
금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위험한 일을 수행할 자유가 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우리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라는 걸 아마  깨달으실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사
회 뜻대로 사셨지만, 55세가 되신 후 그런 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아셨다. 내
일이 아니고 어느 먼 장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지금, 바로 지금, 난 내가 원하는
것을 한다. 요트 세계  일주, 너도 아니고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내가
할 것이다.
  모리셔스 섬에서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일은 한국 교민이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은 그 곳에서 우연히 외사촌 매형의 친구 되는  분을 만난 일이다. 내가 그 곳
에 갔을 때는 한국 대사관도 3년 전에 철수 된 뒤였기 때문에 거기서 한국 사람
을 만나??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 전화번호부를
일일이 뒤져 가며 한국 사람 비슷한 이름이라도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막상 전화
를 걸어 보면 대부분 중국 사람들 뿐이었다.
 그렇게 많은 인종들이  모여 사는 곳에 우리  교민은 한 사람도 없다니 어쩐지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별 목적도 없이 거리를 걷고 있
는데, 꼭 한국 사람일 것만 같은 중년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저 혹시 한국에서 오셨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영어로 묻자 그 쪽에서 반가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너무
나 반가워 악수를 나누고 서로  통성명을 하는데 이번엔 더욱 놀라운 사실이 드
러났다. 내가 고향이  경남이라는 것과 부모님 이야기를 했더니 한  동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리저리 기억을  더듬어 보던 그분이 갑자기  다시 내 팔을 잡고
세게 흔드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남남은 아니군.”
  알고 보니 그분은  내 외사촌 누님의 남편과 친구 사이였다.  우연치고는 굉장
한 우연이었다.  한국  사람의 얼굴도 보기 힘든 그 곳에서  외사촌 매형의 친구
를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  충남대 해양학과
교수 신분으로 한 달 간  그 곳 모리셔스 정부의 초청을 받아 머물던 유일한 한
국인 박철 교수가 바로 그 신기한 만남의  장본인이었다. 또 한가지 기억에 남는
일은 그 곳 현지인 무하마드라는 전직  선원과의 만남이었다. 무하마드는 싸구려
맥주 두 병만 사주면 하루 가이드 역할을 충실히 해 주는 가난한 회교도 집안의
노총각 룸 펜이었다.  그는 전에 상선을 타던  선원으로 세계 어느 나라든 안 가
본 곳이 없다고 하는데 한국의 포항에서도 몇 달 간 머물러 있으며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여자들  참 예쁘고 상냥해서 좋아.  그 여자도 나한테 참  잘해 주었는
데....”
    2. 무사히 더반에 도착하다.
  11월, 북반구에서는  한창 겨울이 시작될  때 이진만 남반구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기상청을 통해  알아본 정보로는 지금이 항해
에는 최적의 시기라고  했다. 수십만 톤 급의 대현 유조선이나  상선들도 순식간
에 뒤집어 버릴 만큼  위력이 대단하다는 아갈라스 해류와 2~3일 간격으로 닥치
는 한랭 전선의 위험이  공존하고 있는 모리셔스에서 더반까지의 항로는 떠나기
전부터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무 걱정 말고 항해에만 전념하거라! 엄마도 남아프리카로 갈거다.”
  더반으로 떠나기 전 L.A.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니는 기대에 들뜬 음성으로 반
가운 소식 하나를  전해 주었다. SBS에서 신년특집 프로그램으로 희망  봉이 있
는 더반 항까지  나를 취재하러 오는 길에 어머니도 동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방송국 측에서는 그 동안 1년 가까이 서로 만나지 못한 우리 모자를 남아프리카
희망 봉이라는 곳에서 만나게  해 줌으로써 새해를 맞이하는 국민들의 마음속에
뭔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그  낯선 곳에서 어
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잇다는 것은 내겐  행운이요 축복이었다. 어머니라는 그 이
름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새로운 용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난 할 수 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마음속의  주술 때문
이었을까. 브라이언과 칼 등 같이 모리셔스를  출발한 8명의 요트인들 가운데 별
고생 없이 18일 간의 항해를 끝내고 더반 항까지 도착한 사람은 유일하게 나 혼
자 뿐이었다. 물론 나도 모리셔스 섬을 출발한 후  이틀 동안 바람 한점 불지 않
아 엔진으로 배를 움직여야 했고, 병풍처럼 둘러  처진 아갈라스 해류의 높은 파
도와 한랭전선에 포위당해 배가 완전히 잠수함처럼 물에 가라앉을 뻔한 적도 있
었지만 그 정도야 얼마간 예상했던 터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 보다 덜  고생하고 그 난 코스를 지날 수 있었던 것은 남
아프리카 기상청의 HAM 자원봉사원인 알리스테어가 무선으로 그때그때 조언을
해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들은 때맞춰 한랭전선 도착  일정과 기상 상태 등을 무
선으로 알려와 내가 더반까지 안전 항해를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근 2
주일 간의 항해 끝에 선구자 2호가 더반  항으로 접근해 갈 무렵, 가급적 서두르
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해준 알리스테어의 말대로 오전 10시쯤 항구에 들어갔더
니 내가 도착한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다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나이트  클럽의 현란한 조명등을 연상시키는  마른번개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요란한 천둥 소리, 작은 요트 하나쯤  삽시간에 산산조각내 버릴 듯 무섭게
몰아 닥치는 강풍!
  “하느님 감사합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사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하느님은 이 못난 아들에게 조금
이나마 효도할 수 잇는 기회를  허락하기 위해 그 험하기로 이름난 뱃길을 무사
히 통과시켜 주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며칠  후면 어머
니를 만날 수 있다!’  열 이틀 동안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온몸의  신경이 일
시에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더반 항에  배를 정박시키기 무섭게 선실 안에
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3. 어머니가 들려 주시는 동화
  아프리카 최대 무역항 중 하나인  더반은 우리 교민 15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
는 항구 도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중동부 나탈  주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그
곳에서 한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민박업을 하는 교민의 초대를 받아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나도 한국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토니처럼  근사한 아파트에서 잘 수
도 있고, 매일 음식 걱정도 안 할 텐데....”
  요트 인들은 더반에 도착한지 하루 만에 교민들이 찾아와 거의 납치하듯이 나
를 데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정말 그들의 부러
움을 살 만큼 가는  곳마다 호강하는 행운아였다. 모든 게 다  우리 교민들의 따
뜻한 마음씨 덕분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입국  수속이 까다롭지 않고 비자 없
이도 장기간 체류가 가능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우리 한국인들이 생활 기반을
잡기가 비교적 수월한  나라였다. 그 곳 교민들은 내게 한국  상선이나 교민들을
상대로 기념품 점을  운영하거나 민박 등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게 숙
소를 제공해준 임  사장님이란 분도 그 곳에서 민박업을 하는  교민이었다. 아파
트 1,2층을 살림집 겸  객실로 운영하고 있는 그 댁에서 머무르는  동안 다른 교
민들이 번갈아 식사 초대를 하여 나로서는 정말  몸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어머
니가 더반에 도착하신  것은 케이프 타운으로의 항해를 2,3일 앞둔  1994년 연말
경이였다.
  “이건 무슨 상처냐?”
  취재진에 둘러싸여 항구로 들어온 어머니의  첫 번째 물음은 내 얼굴에 난 작
은 상처에 관한 것이었다.
 “ 좀 다쳤어요.”
  “조심하지 않고.....”
  상처는 별것 아니었다. 입항할 때 돛을 내리다  줄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 어머
니의 눈에는 그게 가장  거슬렸던 모양이다. 나는 괜스레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예전과는 달리 너무나 달라진  어머니의 의연하신 모습이 오히려 내게는 아픔이
되어 다가오는 것이다. 아무리 담담한 척하셔도  어머니의 가슴속엔 평생을 쏟아
내도 부족한 눈물의 강이 흐른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마 눈에 보
이지도 않는 어머니의 눈물이 자식의 마음을 더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이다.
  “항해 중에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방송국에서 온 취재진들이 바다  이야기를 물을 때마다 자식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던 어머니의 야윈 두 뺨을 나 또한 바로 바라보지 못하엿다.  L.A.
에서 혼자 가게를 꾸려 나가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마주 잡은 손 마디가
나무 등걸이 만큼이나 딱딱하게 느껴졌다.
  “에리선이 곧 결혼하게 될 것 같구나.”
  한밤중이 되어 숙소에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어느새 에리선이 시집을 간다니, 그  기분을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섭섭
하다고 해야 할지....
  “결혼식이 언제인데요,  어머니? 신랑 될  사람은요? 어머니도 그 사람  만나
보셨어요?”
  한꺼번에 너무 궁금한 게 많아 이것저것 캐묻는 나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어머
니가 문득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
까.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린 둘 다 같은 생각을 했을 터였다. 어느덧 방안
분위기가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살며시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버지....... 보구 싶으시죠?”
  어머니는 말없이 방바닥의  먼지를 손?막? 쓸고 있었다.  어머니  혼자서 얼마
나 많은 눈물을 삼켜야만 했을까......
  “귀찮더라도 밥은 꼭 챙겨  먹어라. 라면 같은 것 너무 자주  먹지 말고.... 몸
이 건강해야 큰일을 할 수 있는 거다.”
 “어머니....”
  “남자가 한번 마음을 크게 먹었으면 끝까지 해보는  거다. 난 그저 네가 주위
사람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할 일 다하고 집으로 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죄송해요, 어머니.... 이 다음에 꼭 효도할 게요.”
  “넌 지금도 잘못하는 것 하나도 없다.... 에미라고 있어 봤자 자식한테 제대로
해 주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도밖에 없으니....”
  기어이 어머니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어머니 살아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제겐 큰 힘이 되는 걸요....”
  차마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자식의 손을 꼬옥 쥐어 주며 어머니는 사뭇
절연한 어조로 당부했다.
  “아버지는 항상 네  마음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계신다, 그저 어딜  가든 아
버지 생각을 해서라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돼, 알았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니는 어느 틈엔가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날 밤 우리  모자는 밤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  우리  이 미국으로 이민 와서  한때 잘 살았던 이야기, 나와
에리선의 어릴  때 이야기 등 끝이  없었다. 과거 우리 가족이  살아온 이야기는
어머니가 틈만 나면 꺼내곤  하는 주요 레퍼토리였다. 사실, 전에는 어머니가 자
꾸만 지난 이야기 하는 게 듣기 민망하고  싫은 구석도 있었다. 돌이켜본들 이미
지나가 버린  옛 시절, 이제와 그  옛날의 화려했던 추억담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때론 어머니가 지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짜증이 나기도 했고,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딱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 날 밤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
았다. 누군가는 과거에  얽매어 사는 사람을 어리석은 인간이라 했지만  내 어머
니는 오히려 그 화려했던 과거의 기억 때문에  현재의 고통을 잊고 사는 분이다.
남편도 없이 험한 세파를 견뎌내느라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어머니가 불현듯
아버지와의 행복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다시금 예전의 환한 웃음을 되찾는 모
습을 그 날 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날이  밝도록 이어지는 어머니
의 옛날 이야기가  그 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화처럼 나를 포근한
꿈나라로 이끌어 주고 있었다.
    4.더반에서 케이프 타운까지
  “위험을 극복하는 건 용감한 일이지만, 가급적 그  위험을 피해 가는 것이 지
혜로운 것이다.”
  선배 요트인들의 조언에 따라  더반에서 약 2개월 간 체류하다 케이프 타운을
향해 출발한 것은 1995년 1월 21일  오전 10시경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기상
청의 일기예보에 따르면 그 날은 한랭전선이 다소 주춤한 날씨라고 하니 항해하
기에는 최적의 상황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성미 급한 브라이언은 벌써  이틀 전
에 더반  항을 출발하였다. 하지만 인도양의  기상 상태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예보나 자료를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닻을 올린 지 불과 서너
시간 만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다. ‘안 되겠어! 다시 더반으로 돌아가 버릴
까?’ 호기 있게  나섰던 마음과는 달리 파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덜컥 겁이 났
다. 하지만  이 길이 그렇게 만만한  길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  숱한 사람들이
죽거나 영영 바다의  미아가 되었을 것인가. 누구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빠
져나갈 수 없는 바다. 남아프리카 최남단,‘죽음의 곶’으로 불리는 아굴라스 곶
을 돌아 희망봉을 발견하기까지  기록된 것만으로도 수백 명의 선원들과 탐험가
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바로 이 미친 바다의 저승사자 격인  아갈라스 해류와
싸우다 목숨을 잃고 만 희생자들이다.
  과연 내가 이 지옥의 바다를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을까. 소금기와 해풍에 절
은 몸으로 망망대해를 뚫고 나오는 동안  어언 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밤낮
으로 이어지는 고달픈 항해 속에서 매순간 죽음과 맞서 왔지만 목적지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 닥쳐온 죽음의 위기를 극복할  때마다 나
는 새로 태어나는 것 같고, 마치 여분의  목숨으로 살아가는 것만 같은 경이로움
에 스스로 신께 감사드리기도 했지만.... 과연 이 잔혹한 바다에 희망은 존재하는
것일까. 순간, 두렵고 진저리나는 마음 한편으로 알 수 없는 오기가 솟구쳐 올랐
다. ‘어쨌거나 언젠가  한번은 부딪쳐야 할 상대라면  이스트 런던까지만이라도
뚫고 나가자!’  기상청에서 말한 최적의  상황이란 적어도 이보다 나은  상황을
기대하기 어렵단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돌아가자는  마음속의 속삭임
을 뿌리치고 오히려 더욱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더 이상 미뤄  봤자 일정만 자
꾸 늦어지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더반에서 이스트 런던까지는 250마일 거리.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를 해류의 도움으로 30시간 만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중이
었다. 그 곳에서  5일 간 전선이 물러가길 기다리다 포트  엘리자벳을 거쳐 다음
항구인 마셜베이에 닻을 내리던 중 낯익은 배  한 척이 눈에 띄었다. 선구자 2호
보다 이틀 앞서 떠난 브라이언의 마이미티 호였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 알았지.”
  역시 2,3일 간격으로 밀어닥치는 한랭전선을 피해  마셜베이에 정박해 있던 브
라이언은 이스트 런던에서  엄청나게 큰 태풍을 만나  죽을 뻔했다며 치를 떨었
다. 우리는 그 곳에서 며칠 묵으며 바다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다. 희망봉까지
가는 길은  정말 멀고도 험했다.  브라이언과 나는 마셜베이  항구에서 희망봉에
도전하기 위해 세 번씩이나  항해를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한랭전선에 부딪혀
포기하고 말았다.
  “설마 이번에도 실패하는 건 아니겠지?”
  몇 번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늘 활기를 잃지  않는 브라이언의 설레는 표정과
함께 네  번째로 출항을 시도하던 날.  출항 후 두 시간  만에 브라이언으로부터
교신이 왔다. 갑자기 엔진이 고장을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난 다시 돌아가야겠어.”
  브라이언은 내가 같이 가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 배에는 아무 이
상도 없는데 이 상황에서 무작정 그를 따라갈  수만은 없었다. 어차피 우리가 같
이 항해를 한다고 해도  서로 얼굴을 보면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안전을
위해 요트끼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같은 바다
에서도 서로 HAM 라디오를  통해 안부나 주고 받는 게 고작인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하와이까지 일정을 1년 가까이 남겨 두고 있는 처지에서 어린아이들처럼
몰려다닐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한시바삐 저 ‘지옥의 곶’을
정복해 보고 싶은  도전 의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나는 엔진
고장으로 다시 마셜베이를 향해  기수를 돌린 브라이언과 헤어져 그토록 마음졸
였던 아굴라스  곶을 향해 출발하였다.  철저한 준비 때문이었을까  하늘의 도움
때문이었을까 그다지  큰 문제 없이 아굴라스  곶을 지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해도 상으로  분명 아굴라스 곶을 돌아 케이프 타운으로  향하던 새
벽 1시쯤 배가 서서히 속력을 늦추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꼼짝도 하지 않
았다.
  마음을 놓고 있는  동안에 무풍지대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그나마 믿고  의지할 엔진마저 고장이 나 버린 것이었다.  캄캄한 오밤중에
무풍지대에 갇혀 엔진까지 고장났으니  배는 날이 밝을 때까지 꼼짝없이 표류하
는 신세였다. 낮에  태양열을 듬뿍 받아 축전시킨 라이트를 최대한  밝게 비추고
혼자서 엔진을 고쳐  보려고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다  헛수고였다. 엎
친 데 덮친 격으로 기상청 일기예보는 한랭전선이 바로 코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더 이상 항해는 불가능하고 일단은  가까운 항구로 피신이라도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해도를 확인해 보니 현재 위치에서 불과 10km 전방에 간
스레이라는 작은 어촌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벽녘부터 바다에 짙게 깔린
안개 때문에 혼자  힘으로 그 곳까지 항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
국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해양경비대 측에 무선으로 예인 요
청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혹시 내가 동양인이라고 거절하는 건  아닐까?’ 예
인을 기다리는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그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
리정책)를 떠올리며 불길한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곧 그 상상은 여지없이 빗나
가 버렸다.
  “물론 당신이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이 곳에 왔다면 지금 같은 대접을 받지
는 못했을 겁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여기도 이제 사람  살 만한 곳이
예요.”
  친절하게 다가와 배를 안전한 항구까지 이끌어주던 예인선의 경비대원이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 보듯 말을 걸어왔다. 간스레이  항구에 닻을 내리면서 나는 그
들에게 남아프리카산  맥주 3박스를 선물로  주었다. 맥주 3박스라고  해야 우리
돈으로 1만원도 안 되는 싼 값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횡재나 한듯이 좋아
하였다.
    5.희망봉은 절망봉
  1488년 포르투칼인 디이스가 포트 엘리자벳으로 돌아 나오며 ‘폭풍의 곶’으
로 이름지었던 죽음의 봉우리 희망봉!.  간스레이 항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밤새 달려 새벽녘에  바라본 희망봉은 생각처럼 거대하지도,  무시무시하지도 않
은 그저  평범한 바다 위의 봉우리에  불과했다. 저 작은 봉우리  하나를 보려고
포르투칼 왕은 69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바다로
내보냈던 것일까. 그로부터 10년  후, 바스코다가마가 이 곳을 지나 동방으로 통
하는 항로를 개척하기까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이 희생되어야 했을까.... 새벽
안개에 가려  어슴푸레하게 모습을 드러낸  희망봉의 실체를 발견한  순간,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아득한 옛날, 이 곳에 오기 위하여  목숨을 잃어야 했던
수많은 항해자들이었다. 오죽하면 희망봉의 원래 이름이 ‘절망봉’,‘죽음의 봉
’,‘슬픔의 봉’,‘탄식의 봉’등 죽음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고 한다. 그 슬픔
과 탄식의 봉우리 이름을 희망봉이라는 정반대의 의미로 바꿔 부르도록 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과연 나처럼 바다에서 희망봉을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속으로 우쭐
해 하기도 하며 케이프타운 항으로 들어서는 순간,  먼저 와 있던 요트인들이 축
하 파티를  열어 준다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내가 무슨  영웅이나 되는
듯 착각했던 사실이 우습게 느껴졌다. 케이프타운 항  요트 클럽에 미리 와 있던
요트인들만 해도 20여 명. 그들이 모두 나처럼  바다에서 희망봉을 보고 온 장본
인들 아닌가! 불현듯 탐험가들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R. F. 스코트 경의 죽음에
얽힌 일화가 생각났다. 스코트 경은 10년 동안  남극 탐험에 열정을 바쳐온 영국
의 탐험가로 아문젠보다 35일 늦은 1912년 1월 18일에  남극점에 도달했으나 돌
아오는 길에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고 말았다.  악천후와 얼음 계곡을 뚫고 혼신
의 힘을 다해 목적지에 도달했지만 이미 다른  사람의 발자취로 뒤덮여 버린 땅.
후세 사람들은 그가 1등이  되지 못한 한을 안고 목숨을 잃었다고 비아냥거리기
도 하지만 끝까지  신념을 잃지 않고 남극점을  찾아낸 그의 의지만은 아문젠의
업적만큼이나 위대한  것이리라. 길이 보이지  않아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가짐이야말로 탐험가의 본분이라 할 것이다.  그들에게 1등이라는 자리는 중
요한 목적이 될 수 없다. 다만 신념이 이끄는  대로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것만
이 인간의 참된 모험심이 아닐까.
  한국 최초이기는 해도 내가 가는 이 길 또한 많은 서양 사람들이 거쳐간 길이
다. 하지만 그 길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기에 나에겐
가장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케이프타운에서도  교민들의 환대는 여전히 다
른 요트인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내겐 과분한 것이었다. 이 곳에는  약 50여 명
의 교민들이 살고    있는데 때마침 한인회 주최로 체육대회가  열리는 날, 내가
초대받았다. 이  먼 이국 땅에서 연날리기,  제기차기, 줄다리기 등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를 보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하던 터였다.
  케이프타운 시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교가 있어서 한국에서 온 목사님들
도 많았다.  나는 그 곳 한인교회에  나아가 어린 학생들에게 바다  체험을 들려
주기도 하고  성경 공부도 틈틈이 하면서  한 달 가량 머물렀다.  잠은 교민들의
집에서 가끔  신세를 지기도 하였지만  주로 요트에서 생활하려  하였다. 하루는
요트 계류장 옆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 곳 여종업원이 말
을 붙여 왔다. 이름이 ‘차우다’라는 그 백인  여성은 자신의 평생 꿈이 하와이
까지 항해하는 것이라며 내게 항해술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여자 혼자서는 힘들 텐데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영어가 공용어로  쓰이기 때문에 의사 소통에 별 어
려움이 없는 관계로 차오다와 나는 쉽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녀는 백인이었지
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케이프타운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털
어놓았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2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서른은
훨씬 넘어 보이는 얼굴의 아가씨였다. 이튿날 아침. 오전 9시도 채 되지 않아 누
군가 해치를 두드리는 바람에 아침 잠에서 깨어났다. 차우다였다.
  “나한테 항해술 배울 수 있는 책을 보여 준다고 했죠?”
  그 시간에 문을 연 커피숍도  없고,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집(?)을 찾아온 손님인데 책만 빌려주고  가라고 하면 그녀가 너무 서운
해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그녀를 선실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커피를 대접
했다.
  “저, 커피 더 드실래요?”
  잔을 다  비우고도 머뭇거리며 돌아가지 않는  그녀에게 인사치레로 물었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 더 드려요?”
  두 번째 잔도 바닥을 드러냈건만  이 눈치 없는 숙녀는 웬일인지 돌아갈 생각
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벌써 세 시간째, 애꿎은 커피만 축내고 있는
그녀의 속사정이야 둘째치고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눈뜨자마자 손님이
찾아온 데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인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소변이 급했던
것이다.
  “한 잔만 더 하실래요?”
  가급적 말에 힘을 주어 물어 보았는데도  차오다는 여전히 고개만 까딱거렸다.
요트 안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긴  해도 점잖은 체면에 숙녀 앞에서 듣기 민망한
소음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갈라스  해류를 만났을 때보다 더 팽팽
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끼며 배를 움켜쥔 채로  최대한 버텨 보려고 애썼다. 하지
만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  급기야는 안색이 노래져서 거의  용을 쓰다시피
한 끝에 그녀에게 외쳤다.
  “저 좀 나가 주실래요?”
  그랬더니 이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네, 제가 급한 약속이 있거든요.”
  “그래요?”
  차오다는 그제야 다소 자존심 상한 얼굴로 갑판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 날 아
침 나는 어머니가 L.A에서부터 손수 사다주신  최신식 힙합 바지를 겨우겨우 구
제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가 조금만 더 늦게 나갔더라면 바지에  실례를 할 뻔
했다! 그랬더라면 숙녀 앞에서 망신당하고 희망봉 정복의  감격이 절망으로 변해
버렸을 것이다.
    6.아프리카의 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흑인 지도자 만델라의 건강 상태에 따라 화폐 가치가 오
르락내리락 할 만큼 아직 백인들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국가
라는 게 내 느낌이었지만 여러 가지 환경 면에서 살기 좋은 나라인 것만은 분명
한 것 같았다. 그 곳  흑인들은 지금까지도 백인이나 황인종에게 ‘Sir’라는 존
칭을 붙이던 버릇이 남아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곤 한다. 정치
적 억압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노예 시절  그들이 뼈속 깊이 자리잡은 강박
관념을 비웃는다는 건 박해 받은 자들의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호사스런 감
정일까. 하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 어딘가에는  영화 <파워 오브  원>에서 느낄
수 있었던 아프리카 정신, 그 광활한  대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들만의 진수가
남아 있으리라. 그것이  다만 영화 속의 현실만은 아니라는 걸  남아공 사람들과
만델라 대통령은 몸으로 보여 주지 않았던가.  스텐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서 교사로 일하다 세계 일주 항해에 나선 스티브는 몹시 심란한 듯 출발을 서둘
렀다.
  “설마, 아니겠지. 일단 병원부터 가 보자구!”
  “아니야, 난 분명 말라리아에 걸려 죽고 말 거야.”
  브라이언은 의사의 진단도  받기 전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울상을  지었다. 결
국 고통을 견디다 못해 병원에  찾아간 그에게 내려진 병명은 몸 속에 박테리아
가 우글거리고 있다는 기상천외의 진단이었다.
  “웬 박테리아가 사람을 이 꼴로 만들었담?”
  일단 말라리아가  아닌 것만을 감사해야 할  판국이었지만 브라이언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며 몇 날 며칠을 끙끙 앓고 있었다.
  “죽을 병은 아니라니까 우선 이 곳을 떠나자, 응?”
  의기소침해 있는 그를 겨우 달래서 케이프타운을 떠날 때쯤에는 이미 다른 요
트인들도 대부분 그 곳을 빠져나간 후였다.
        제6부 절망에서 건져 올린 희망
    1. 나폴레옹의 유배지 세인트헬레나
  “특별한 기상 변동은  없고 해상도 별 이상 없음. 앞으로  3~4일 간은 항해하
기에 좋은 날씨임!”
  기상청의 예보를 믿는 게 잘못이었다. 떠나기 전에  몇 차례나 문의를 해 봤더
니 한결같이 이상 없다는 말에 마음을 푹 놓고 닻을 올렸건만 그것이 완전 오보
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1995년 3월  9일 대서양 초입에 닿기도  전에 배는
바다 위에서 미친 듯이  날 뛰고 있었다. 난 또다시 죽은의  공포와 마주서야 했
다. 아무도 없는 이 좁은 배안에는 마주치는 죽음의 모습은 아주 고약하다. 지금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갖 회한들이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무엇하러
바다에 나왔던가. 분명 그냥 남들처럼 편안하게 살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바다에
나온 것은....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곧잘 잊어버리곤  하는 나의 꿈, 세계일주 단
독 항해라는 그 꿈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버지,어머니, 애리선,이웃들 그리고 기
착지마다 성원해 주신 많은  교민들.... 그분들이 생각하며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동안 수십 번 겪었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공포 속에서 나는 의연해지려, 스
스로에서 당당해지려 애를 섰다.  그 순간 내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살아야  한
다. 이 험한  바다를 뚫고 살아 남아야한다.’ 생존을 위한  가장 본능적인 목표,
오직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극히 단순하고  기본적인 문제에 내 온몸의 힘
을 바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기상청 직원들을 향해 욕을  퍼부어 보기
도 했다.
  “나쁜 놈! 죽일 놈!”
  그 사람인들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인간의 잣대로 자연을 저울질한다는  게 애
초부터 무리임을 수없이  경험해 온 터에.... 광란의  강풍에 마구 휘둘리는 동안
나는 내가 태평양을  건너고, 인도양의 그 험난한 바다를 뚫고  나왔다는 사실마
저 까맣게 잊은 채였다. 바다는 매번 새로운 공포 속에 항해자를 위협한다. 차라
리 눈을 감고 모든걸  운명에 맡기고 싶었다. 어차피 삶도 죽음도  내 소관이 아
니라면 이 상황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린들 무슨 소용이라 싶었던  것이다. 죽음
이 기어이 나를 쓰러뜨릴 작정이라면  더 이상 마음 고생이나 편안하게 눈을 감
고 싶었다. 자연과  , 혹은 죽음과의 맞대결이란  어차피 불가능한 일 아니 겠는
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릴 뿐 어찌 자연에, 또 죽음을 맞
설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좀 편안해 졌다. 간신이 몸과  마음을 추슬러
윈드 베인을  점검해보니 배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바람은
게세게 불어 닥쳤으나 바로  몇 시간 전처럼 그악스럽지는 않았다. 또  한 번 죽
음의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바다는 언제 그렇게 포악을 떨었냐는  듯 이튼날부
터 내내 평온함을 유지하였다. 단파 라디오를 켜보니  영국의 BBC방송이 흘러나
왔다. 마침내 영국 영토권 안에 인접해 들어온 것이다. 18일간의 항해 끝에 나폴
레옹의 유배지로 널리 알려진  세인트헬레나 제임스타운 항구에 닻을 내린 것은
1995년 3월27일. 오는 동안에 신기하게도 병이  말끔이 나은 브라이언도 나와 거
의 동시에 도착하였다.
  영국령인 이  곳은 인구 5,000여 명의  화산 섬으로 주민의 대부분이  한 달에
한두 번씩 영국 선박에  실어다 주는 생필품에 의존에 살고 있다.  섬이 워낙 작
다 보니 보니 특별한 수입원은 없고,  나폴레옹의 유배지인 롱우드하우스와 그의
묘역을 보러 관광객들이  찾아올 때마다 겨우 활기를 띠게 된다.  나폴레옹이 죽
을 때까지 살았던 롱우드하우스는  현재 박물관겸 불란서 영사관으로 꾸며져 그
를 추모하는 각국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이다. 현재는  시신을 불란서
로 옮겨 가 흔적만 남아 있는 그의 묘역  터도 관광지 구실을 톡톡이 하고 있다.
일세를 풍미하던 영웅의 묘역치고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 곳은 나폴레옹의 시
신이 떠난 뒤에도 관광객이라면 으레 들러보는,  불란서 사람들에게는 공허한 성
역과도 같은 곳이다.
  주민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는  제임스 타운은 삭막한 화산 절벽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모래 사장도 없는 계곡을 따라 집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몇 년에 한번
씩 영국 사법부에서 파견한 판사가  와서 그 동안 밀린 주민들의 송사를 해결해
주는 세인트헬레나 법정이 열리는  날이면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경찰대원들이
10여 명씩 줄지어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이 작은  섬에도 위성TV가 송신되어 섬  주민들도 CNN뉴스를 들을 수  있다는
것과 특히 마이클조던이나 이소령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TV탓인
지 세인트헬레나 젊은이들 사이에도 농구열풍은 대단한 것이어서 섬에 하나뿐인 
농구대 앞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들은 동양  사람만 보면 맨 먼저 이소
룡을 떠올린다며 나더러  ‘브루스 리’를 아냐고 뭍 기도 했다.  이소룡은 세계
각지 어디를 가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동양인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
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이 특징  가운데 하나로 기억에 남는 것은 유럽인, 아프리카인,
인도인 할 것없이 워낙 대대로  피가 많이 섞이다 보니 한 부모 밑에서 나온 형
제들조차도 피부색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 정부에서 지
원해주는 생필품 외에도 현지인  전체가 공무원으로 일하며 월 20`30만 원의  임
금으로 살아가는 그들 가운데 서른 다섯살 먹은 노총각과 친하게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섬에서  가장 값싼 술에 속하는 코코넛와인을 늘  입에 달고 다니
는 알콜 중독자였는데 정부에서 임대해 주는 작은 아파트에서 일곱 식구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의  초대로 집에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형제들이  서로 피부색
이 다른것 이었다. 부모는 거의 인디안 쪽에 가까운 피부색이고, 형제중 몇은 아
프리카 흑인에 가까운 피부색을  가졌으며, 그중 하나는 백인 같았다. 피부가 검
은 이 노총각은 시내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지만 하루 종일 빗자루만 들고 서
있을뿐  좀처럼 일하는 모습을 볼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월급이 나오는데 뭐
하러 힘들게 일하냐는 거였다. 그  대신에 그는 할 일이 없다고 늘 술을 마셨다.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는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순박한 사
람이었다. 섬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선량한 사람들 이었다.
  비록 작은 섬이라고 해도 이 섬에는 없는게 없다는 점이 또 한가지 특이한 사
실이었다. 음식을 사 먹을 수있는 식당이 세군데, 나이트클럽까지 갖춰진 호텔도
한군데 있다. 이  곳 사람들은 참치가 주식이므로 가는 곳마다  참치 요리뿐인데
요리법이 다양하여 제법 휼륭한 맛을 냈다.  싸구려 식당에서 닭고기 스테이크로
만 알고 먹었던 요리가 나중에  알고보니 참치 요리였을 만큼 그곳 사람들은 한
가지 재료로 전혀 색다른 맛을 창조해 내는  재주가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참치요리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참치회는 절대로  먹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뭐니 뭐니 해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 거리는 미완으
로 끝나 버린  나의 러브스토리였다. 그곳 농구대 앞에서 현지인  청년들과 어울
리던 중 만난 줄리라는 17세  소녀는 브라이언과 내가 동시에 반할 만큼 예쁘고
상냥한 아가씨였다. 나는  브라이언이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걸 눈치채고
는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할만큼 줄리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꼈다(브라이언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내가 테이트 신청을 할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
녀가 알고보니 딸이  있는 미혼모라는 것이다. 아기 아빠는 그  곳 슈퍼마켓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는 남자였는데 그녀와  결혼할 의사도 없는 데다가 이미 뱃속에
는 그의  두번째 아이까지 잉태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나는 현지인
들로부터 그 애기를  듣고 나서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가엾은  줄리는 잭
임 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 나쁜 녀석을 위해 관광객 들한테 담배
를 구걸해다 바치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며칠후, 마을 축제인 ‘이스타’의  날. 섬사람들은 생업도 젖어둔 채 하루 종
일 부둣가에 모여 술 마시고 춤을 추었다.  식당이며 상점들은 한 군데도 영업하
는 곳이 없이 모두 문을 닫아 걸었다. 원래  이곳 상인들은 일 주일에 나흘만 일
하고 나머지 사흘은 아예 문을 닫아 버린다.  그만큼 인구가 적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었보다도  주민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영국 정부의 폐쇄적인  
정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게 있어 세인트헬레나 사람들은  영원한 속
국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춤추고 놀기  좋아하는 섬 젊은이들은  이스타 축제
같은 날 부둣가에서 한바탕 신나게  노는 것으로 별다른 장래가 없는 현실에 갑
갑함을 풀었다.
  그 날 밤 부둣가에 모인 천여 명의 세인트헬레나 젊은이들 가슴속에는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속국인 으로서의  한과 아픔 같은 것들이 응어리져 있었
던 건지도 모른다. 그들은 거의 광적으로 술과 음악, 그리고 춤에 빠져드는 모습
이었다. 처음에는 구경꾼에 불과하던 나와 브라이언이  어느새 그들과 한 덩어리
가 될수 있었던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아픔과 소외감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살아온  황경이 달랐지만 젊다는 이
유만으로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내가 빈속에 그들이 권
하는 대로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서부터였다.  하필 그때 가엾은 미혼모 아가씨
줄리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줄리! 이리와 나랑 춤을춰요!”
  비몽사몽 간에 그녀와  신나게 춤을 췄던것 같기도  하고 껴안고 엉엉 울었던
것 같기도 한데 이튼날이 되어 도무지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게 하나도 없
었다. 브라이언도 필림이 끊기긴 마찬가지였다.
  “에이,토니! 이제 정신 좀 드니?“
  “술 너무 많이 마시지마!”
  낮에 거리에서 만나는 현지인들  마다 나를 짓궂게 쳐다보며 한마디씩 놀려댈
때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 이었다. 그많큼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
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곳에서  그런 실수를 했다가는 무슨 망신을 당했을는지
알 수 없었다. 쎄인트헬레나 섬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그 곳에 단 하나뿐인 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에서의 일이었다.  하루는 브라이언이 클럽에 가  보자고 졸라서
저녁 9시쯤 호텔  나이트클럽으로 향했다. 일반적으로 그 시각이면  한창 클럽이
붐비고도 남을  때였다. 그런데 손님들이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클럽 바깥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술을 사다 마시고 있었다. 안쪽에서 음악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오늘 폐업 인가? 왜 안들어가지?”
  우리 둘이서 영문을 모른체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중 한사람이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클럽이  밤 11시나 돼야 문을  연다는데 이 사람들은 혹  자리가 없을까
봐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밤 11시에 문을 연다구?”
  “그럼 올나이트겠네?”
  브라이언과 내가 동시에 묻자 그 청년 하는 말이 클럽은 밤 11시에 문을 열었
다가 자정이면  영업을 마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겨우 한  시간 춤을  추겠다고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구...?”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매주 토요일 밤에만  영업이 허용된다
는 반짝 나이트 클럽은 관광객들을 위한 클럽 이었지만 대부분 현지인이 이용했
다. 워낙 외지고 작은  섬인 탓에 관광객의 발길이 뜸했기 때문이었다. 어째거나
영업시간이 짧은 반짝 나이트 클럽에 들어가 춤을 추던 중 또 한번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흥겨운 댄스  음악이 끝나고 어느덧 슬로우 템포의 불루스  곡이 흘러
나올 무렵쯤 해서  파트너도 없이 간 나와 브라이언은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까무잡잡하게  생긴 현지인 아가씨 두  명이 다가와 우리 둘을
무대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부탁 이예요. 제발 날 좀 여기서 탈출 시켜주세요!”
  불루스를 추자며 내목을 끌어안은 그녀가 귓전에 대고 속삭인 말은 섬을 떠날
때 같이 배를 태워  달라는 내용이었다. 섬을 떠 날수만 있다면  뭐든 시키는 대
로 다 하겠다는  말과 함께. 씁쓸한 말이지만 세인트헬레나 섬은  19세기 초까지
만 해도 폐쇄적인 지리조건과 관광지라는 특성 때문에  근접국이나 현지인 출신
의 매춘부들이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 했던 곳이다. 그런 이유로  이곳을 지나
는 선원들 사이에는  세인트헬레나 섬을 일컬어 공공연이‘대서양의 사창가’라
고 했었다고 한다.
    2. 바다의 하루
  바다가 극성을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요트 안에서의  생활은 무척 단조롭다. 단
해안을 출발해서 첫 150km를 향해하는  동안만큼은 바짝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바다를 오가는  수많은 상선과 유조선,  그외 암초나 갑작스러운  장애물과 충돌
위험 때문이다.  이럴 때는 24시간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커피를  연달아 마시며
사방을 주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이 작은 요트가  거기에 있었느냐는
듯이 바다는 모든 걸 송두리째 삼켜 버릴지  모른다. 항해자와 바다는 동지인 것
같으면서도 냉혹한 적수로서 묘한 동반자 관계라고나  할까. 별다른 돌발 상황이
없을때 해안에서 150km를 벗어난 후의 요트 생활은 육지에서와 크게 다를봐 없
는 일상의 반복이다. 단지 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일정
한 수면  시간이 따로 없다는것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바다에서는 주변 상황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 될  때에만 잠깐씩 눈을 붙일
수 있으므로 늘 피곤하기 마련이다. 물론 너무  힘들 때에는 항해도중 주변 무인
도에 배를 정박시켜 놓고 하루 정도 푹 자두기도  하지만, 항상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적막 강산이나 다름없는 대양을 항해하다가  보면 며칠이 지나도록 주변
에 무인도는커녕 지나가는 배 한척 구경 못할  때도 많다. 보이는 거라고는 구름
과 바다, 해와 별, 달뿐인  바다를 몇 날 며칠이고 떠다니다 보면 육지에서 사소
하게 지나쳐 버렸던 모든 것들이 사뭇 눈물  겹고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
번은 그렇듯 지독한 외로움으로  몸살을 앓으며 바다를 건너고 잇는데 난데없이
파리 한마리가 선실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평소에는 불결하다고 질색을 했던
파리가 그 때는 왜 그렇게 반갑던지.... 파리는  마치 육지의 일부 같았다. 어디서
부터 길을 잃었는지 육지에 살아야 할 미물이 바다에 까지 흘러 들어온 것도 신
기했지만, 저도  사람 냄새가 그리웠던 모양으로  5일 동안이나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그 파리가 당시 내가 바다에서 만 날수 있는 유일한 육지 생명체였다.
  나는 녀석이 가급적 오래 머물러 주기를 원하며 밥풀 찌거기며 음식물들을 일
부러 선실 구석구석에  떨어뜨려 놓고는 온갓 친절이 아닌 친절을  베풀었다. 또
나 혼자 책을 잃다가 녀석이 행여 심심할까  큰소리로 읽어 주기도 하고, 음악도
틀어 주고.... 그렇다고 한들 날개 달린 생명체를 무슨 수로 내 곁에 붙들어 놓을
것인가. 녀석은 내가 깜박 잠든  사이에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 버렸다! 자다 깨
어 어느 순간 그 녀석이 없음을 알고 느꼈던 감정을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내
가 고 조그만 녀석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구경거리 노릇이나 하다가 뒷발로 채인
것만큼이나 허탈한 심정이었다.
  바닷물로 세수와 양치질을 하는 것으로 내 하루는  시작된다. 그런 뒤 지난 밤
동안 이상이 없는지 배 앞  부분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점검한 다음 선실에 내려
가도 해도와 나침판, 위성이용  위치파악기(GPS) 등을 보면서 현재 위치를 정확
히 해도에 표시해 두는게 주요 일과이다. 곧이어 저녁 식사 준비. 주로 된장찌게
나 김치찌게에 밥이면  정식 요리에 해당하고,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깻잎 절임
이나 마른반찬, 김  등을 밑반찬으로 내놓을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러나 가장
흔하게 먹는 음식은 라면  종류로 그때그때 입맛에 따라 짜장면, 비빔면, 우동면
등으로 골라 먹는다. 간혹 깡통 요리로 된 꼬리곰탕, 육개장 등을 특식으로 먹기
도 하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에는 생라면으로 때워야 할 경우도  많다. 식사 후
에는 졸음을 쫓기 위한  진한 커피가 필수. 뜨거운 물에 냉동  건조 커피를 듬뿍
넣고 설탕과 크림을 타서 두  잔 정도 마시고 나면 어느덧 오전 시간이 후딱 지
나가 버린다. 여기서 잠시 짬을 내어 갑판에  올라가 사방을 훑어본 다음 장비들
을 재 점검하고 별  이상이 없다 싶으면 선실에 내려와 책을  잃기 시작한다. 딱
딱하고 재미없는 이론 서적이나  철학책 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소설류를 기착지
에 내릴때마다 몇권씩 구해서 읽었다.
  그 외 하루 한 시간 정도는 부족한 한자 실력을 보충할 겸 천자문을 익히려고
했으나, 너무 어렵고  복잡해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았다. 독서나 한자
공부가 지루해지면 집에서 가져온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竪? 했다. 이때에는
주로 고전 음악이나  서양팝, 한국에서 가져온 대중 음악도 곧잘  듣는편 이었는
데,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이문세의<밤이  머무는 곳에> 등 연세대 재학
시절 즐겨 듣던  음악이 대부분이었다. 하루에 한번  L.A.와 한국의HAM 동호인
들과 교신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라 할수 있다. 교신을 통해 L.A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고  나의 현재 위치와 건강  상태 등을 알려 주는가  하면, 중요한
기상 점보도 얻는다. 이때에 주변을 항해하는  동료 요트인들과 무선으로 연락해
서로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배터리 용량  때문에 하루에
30분 이상은 사용 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대충  하루 일과를 보내지만 시간이  남는 날에는 단파 라디오를
들었다. 단파 라디오는 그때그때 지나 가는  인접국으로부터 송신되는 방송이 가
장 잘 잡히는데, 태평양에서는  미국의 VOA, 영국의 BBC나 한국의 KBS국제방
송이 비교적 또렸하게 들려왔다.
  인도양에서는 한국 방송이 잘 잡히지 않고 대신 평양국제방송 뉴스가 간혹 수
신 되었다. 주파수를  맞추려고 할 때에 일단  ‘위대한’’경애하는’등등의 단
어가 많이 나오면 무조건 북한 방송이라 는걸 알 수 있었다.
    3. 무풍지대에 갇히다
  1996년 4월 26일. 지난 5일 동안 북서풍이 불어 아무 데도 못 가고 있다. 남동
풍이 불어  배를 밀어 줘야 하는데  웬 난데없는 북서풍인지. 아예  돛을 내리고
바람을 기다렸다.  불과 50마일 북쪽에  위치해 있는 브라이언도  똑같이 감옥에
갇힌 듯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매일 5번씩  HAM 라디오를 통해 서로의 외로움
과 괴로움을 달랬다. 자료를  찾아 보면 이 지역에서 이 시기에  북서풍이 분 것
은 0~1%밖에 안 된다.  그런데 어제부터 북서풍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지
역의 기상정보도 믿을 수가  없다. 항해하는 배들이 없어서인지, 큰 태풍이 없는
지역이라 그런지 기상정보  수집이 불가능하다. 바다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석양
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마치 커다랗고 얇은  실크 스카프에 색
색의 물감이 번지는 느낌....  간혹 혼자서 그 아름다움에 취해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나 혼자라는 느낌이 때론 왜 그렇게 서럽게 만들던지.
적도를 지나 2년 만에  북반구로 진입하면서 10일 간이나 무풍지대에 갇혀 있었
을 때도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서 배는 전혀 움직일 줄 모르는 가운데 하
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마침내 나는 태풍보다 더 끔찍한  상황과 맞딱뜨리
게 된 것이다.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다. 이 넓은 바다에 철처히 나 혼자뿐이었
다. 지나가는 상선도 보이지  않고 주변에 배를 정박시킬 만한 섬  하나 없는 상
황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선실 안은 찜통보다 나을 게 없는  데다가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따가운 햇살 때문에 갑판 위에는  잠시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뜨겁게 달구어진 요트 안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
당시 내가 쓴 일기를 보면 온통 xx 따위의  욕 투성이였다. x새끼, 망할 놈의 날
씨. x같은 바람은 모두 어디 간  거야? 도대체 어디 있어? 아 미치겠다. 정말 돌
겠어. 만약 일기예보가, 그 x같은 일기예보가 바람이 북동풍으로 불 거라는 얘기
만 안  했어도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라디오에서는  왜 똑같은
노래만 반복하면서  틀어 주는 거야? 미치겠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지? 또라이. 며칠  동안 바람 한 점 없다.  난 하늘에 외쳤고 새들에게도 욕했
다. x새끼, x 같은 바람, x 같은 새...그러나 하느님에게는 욕을 할 수 없었다. 왜
냐하면 하느님은 나의 생명 줄을 쥐고 있으니까. 난 겁쟁이였다.
  일 주일이 지나면서  초조함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물을 아끼느라
가급적 조리하는 대신에  깡통 음식을 먹어 치워, 나름대로 충분히  저장했던 깡
통 음식이 완전히  거덜나 버렸다. 문지르면 소금 가루가 부서져  내리는 따가운
살갗에 바닷물을 적셔 가며 잠시나마  더위를 피해 보려 했지만 금새 목이 타들
어가듯 심해지는 갈증으로  차라리 죽은 듯이 누워 있기도 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당장은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라면도
남아 있다. 문제는 식수였다. 낚시로 잡아 올린 날치를 한 번 구워 먹은 뒤로 찾
아온 갈증은 거의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듯 철저히 고립될
수 있는지! 매일 항로를 위협하며 주변을 지나치던 그  흔한 상선조차 보이지 않
는 적도 한복판에서 나는 죽도록 외로웠다. 현재  위치를 측정해 주는 GPS가 한
바늘도 움직이지 않는 바다의 감옥 안에서 나는 이대로 굶어 죽게 될 것만 같았
다. 그렇게 꼬박  열흘이 지나면서 나는 거의  죽은 듯이 늘어져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내 안에 축적된 수분
과 영양이 오랫동안 유지되기 만을 바랄 뿐.  그렇게 누워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
었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으로 저 멀리  어두운 색깔의 구름 같은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구름? 구름인가?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죽으라는 운명은 아니었는지 서서
히 남쪽 하늘로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먹구름을 보고 내가 제일 먼
저 한 일은 갑판 위에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꺼내어 늘어놓는 일이었다.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거의  세 시간 만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빗물이 조금씩  그릇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물을 양손에 받아 천천히 음미해 보았다. 한  방울의 빗물이 목젖을 타고 내려갈
때의 그 시원함이란!  비로소 눈앞이 제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 귀한 빗물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찍어내어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목덜미를  적셔 주었다.
표류하는 동안 기운을 잃지 않으려 밤낮없이 누워 있었더니 더위와 땀으로 피부
가 짓물러 목 견디게 쓰라렸다. 비는 한나절을  꼬박 내리다 밤중이 되어서야 멎
었다. 식수도 웬만큼 찼고 더위가 한풀 꺾이니 이젠 살았구나 싶었다. 그러나 한
꺼번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온몸이 술에 취한 듯 나른해졌다.
  나는 선실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갑판 위에 큰  대자로 누워 버렸다.
그렇게 누워서 얼마쯤 지났을 때였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어느 한
순간 그토록 꿈쩍도  않던 배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밤에도 켜지 않던 라이트를  들고 윈드 베인
쪽으로 가  보았다. 과연 배가 움직이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무풍지대가 비로소
나를 놓아주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밤하늘은 맑게 개이고, GPS가 가리키는 현
재 위치는 북위  7도. 2년 전 하와이에서 사모아까지 항해에서  보았던 북두칠성
이 점점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어  북극성, 오리온, 카시오페아, 전갈좌 등
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었다. 2년 만에 북반구에 들어선 것이다. 겨우 정신
을 차리고 날짜를 확인  해 보니 그 날이 바로 애리선의  결혼식 날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오빠의 심정을 애리선은 알까....
신랑감은 같은 교포  청년이라는 데 어떤 사람일까. 모쪼록 둘이서  행복하게 살
아야 할 텐데. 한  쌍의 아름다운 출발을 축복해 주듯 하늘에는  은총 가득한 별
이 빛나고 나는 까닭 모를 설움으로 목이 메었다.  지금쯤 홀로 남아 잠 못 이루
실 어머니가 생각났다.
  5월 11일. 오늘은  내 동생 애리선의 결혼식 날이다.  하지만 난 참석을 못 했
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형제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 바다 한
가운데. 긴  파도들이 여기저기에서 몰려와 배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애리야
미안하다. 정말로 이 항해는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 같다. 아버님의 장례
식, 동생의 결혼식, 모두  참석하지 못했다. 가슴이 아프지만 내가 선택한 길. 어
차피 돌이킬 수 없다.  이 길을 걸어오면서 후회스럽고, 힘들고, 외롭고, 어떤 때
는 미칠 정도로 답답하고(지금처럼) 그럴 때도 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이다.
모두 말렸지만 내가 선택했기에 지금  같은 때 나 스스로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
다.
    4. 사람 냄새가 그립다.
  적도를 지나면서  그라나다로 통하는 카리브 해상은  브라질 해류의 영향으로
다소 소란스런 편이지만  선구자 2호는 운이 좋았다.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드센
바람이 오히려 배를 뒤쪽으로 밀어주는 역할을 해서 항로는 비교적 수월하게 유
지되었다. 출발 직후에는  하늘을 가득 메우고 뒤쫓아오는 먹구름 때문에  영 불
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돛을 최대한  줄이거나 아예 내
려놓는 게 상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돛을 내리자마자 진한 먹구름이 마른벼락
과 함께  번개를 몰고 오더니 곧  이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파도가
거세지기 전에 어서  이 해상을 벗어나려면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아직
해류는 항해에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선구자  2호는 바람을 등진 채로 조
금씩 조금씩 힘겨운 행군을 강행하였다. 비록  사정없이 몰아닥치는 폭우에 시달
려가며 애처롭게 항로를 이어 가고는 있었지만 나의 든든한 돛단배는 끈기 있게
잘 견뎌 주었다.
  덕분에 무사히 아마존 강  유역 100km 전방까지 항해하던 중 영화  <빠삐용>
의 실제 무대인 ‘데블스  아일랜드(악마의 섬)’ 근해를 지나치게 되었다. 자유
를 갈망하는 한 인간의 처철한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준 결정적 매개체인 브라
질 해류에 실려 나의 애선도 약속의 땅으로  향했다. 억울한 살인 누명을 덮어쓰
고 역사상 그 누구도 탈출하지 못했던 악마의 섬에 감금되었던 빠삐용이 브라질
해류가 육지로 밀려나가는  시점을 이용, 야자수 열매를 가득 담은  가마니를 타
고 섬을 탈출하는 마지막 장면이 통쾌하게 뇌리를  스쳤다. 자유를 향한 그 불굴
의 의지가 아니었더라면  빠삐용은 죽는 날까지 저 섬을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
그 옛날 종신형을 선고받고 평생 옥살이를 해야 했던 한 죄 없는 사내를 육지로
실어다 준 브라질 해류의 행운이 이제 단독 세계 일주 항해라는 약속의 땅을 차
근차근 밟아 온 선구자  2호의 뒤를 밀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46일 간이라는 긴 항해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달래
기 위한 자기  암시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해서  스스로를 위안
해 주지 않으면  차라리 미쳐 버릴 것남 같은  고독감이 때때로 엄습해 오곤 했
다. 사람이  그리웠다. 물론 라디오나 무선으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렇게 목소리만으로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과
대화하고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싶었다. 그럴 때면  나 혼자서 1인 2역을 하며 ‘
사람만나기’를 연기하는 것으로  무료한 시간을 때워 보기도 했다. L.A에  있을
때 즐겨보던 TV  프로그램으로 <다큐멘터리, 역사와의 대화>라는  시리즈가 있
었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흉내내어 사회도 보고 역사상의 인물을  선실로 초대
하여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모차르트 씨, 당신은 어떻게 그런 훌륭한 음악들을 작곡할 수 있었나요?”
  가령 사회자인 내가 이렇게 묻는다.
  “응, 나는 천재니까 그렇지!”
  오만한 모차르트의 몸짓을 흉내내어 대답하는 또 하나의 나.
  “그렇지만 당신은 말년에 비참하게 죽었잖아요.”
  “그야 뭐...빚도 많고...세상 사람들이 나의 천재성을 알아주지 않았으니까...”
  “당신이 죽을 때는 너무 가난해서 장례식에 따라간 사람도 없었다면서요? 그
러게 진작 저축 좀 하시지 그랬어요?”
  “예술가가 그런 걸 신경 쓰나? 하긴 뭐 내가 좀 심했지....”
  이런 식으로 나의  선실에는 많은 역사 속의 인물들이 초대되었다.  그것도 시
들해지면 비디오 카메라로  내 모습을 촬영하며 혼자 낄낄대기도 하고,  간혹 스
스로를 바다 특파원으로 임명하여 혼자만의 뉴스를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늘 가
슴 한 구석이 어디로 달아나 버린 것마냥 허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라나다를 향해 출발한 지 45일째 되던 1996년 5월 25일은 스물입곱 번째 맞
는 내 생일이었다. 그 날도 바다에서 나 혼자 뿐이었다. 망망대해에서 생일을 맞
이하는 쓸쓸한 아침에 태양은 왜 그리도 밝게  빛나던지. 거울이 없는 요트 안에
서 내 손으로 머리를 잘랐다. 두 달  가까이 자라난 머리칼이 목덜미까지 내려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모처럼 면도도 말끔히 하고 자축하는  의미에서 비디
오로 내 모습을 찍었다. 이럴 때 비디오  카메라는 내가 머리를 제대로 잘랐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거울이 돼 주기도 한다.  앞뒤로 모습을 비춰 가며 촬영을 끝
낸 뒤 테이프를 돌려  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앞머리는 대충 봐줄  수 있다 쳐도
손 닿는대로 듬성듬성 잘라낸  뒷머리는 흡사 아이들이 마구 뽑아낸 잔디밭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하는 수 없다. 치렁치렁  긴 머리보다는 나으니까. 그리고 아
침 식사. 혼자 미역국을  끓여 먹으려니 좀 처량한 것 같아  그만두고 대신 된장
찌개로 폼나게 식사를  해치웠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빠른  음악을 크
게 틀어놓고 갑판 위에서 춤을 춰 보다가,  목청껏 노래를 불러 보았지만 우울함
은 쉽게 날  놓아주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이 그립다. 육지의  녹색 풀이며 나무,
키 작은 꽃들, 흙 냄새 따위가 미치게 그리웠다. 어느덧 나는 울고 있었다.
  이제 45일  간의 머나먼 뱃길을 지나와  내일이면 육지에 닿을 수  있을 텐데,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이 영원한 바다의  표류자로 세상에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그쯤 되자 바다도 이 가련한 표류자를 잠시 육지에 풀어놓고 싶었던지 자애로운
어머니의 손길로 배를 서서히 흙 냄새 가까이  이끌어 주고 있었다. 이튿날 오후
인 1996년 5월 26일, 선구자 2호는 서인도  제도의 작은 섬나라 그라나다에 첫발
을 내딛게  되었다. 미리 그 곳에  도착한 브라이언이 부둣가에 나와  생일 축하
샴페인을 흔드는 모습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 저려 왔다. 내가 그
리워한 사람 냄새가 바로 저런 것이었을까....
    5. 20세기의 대역사 파나마 운하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해 있는 휴양지답게 물가가 무척 비싼 반면에 범죄가 거
의 없는 조용한 섬나라 그라나다를 뒤로 한 채 파나마로 출발한 것은 열흘 후인
1996년 6월 4일이었다.  카리브해는 대서양 끝부분에 위치한  해상으로 삼각파도
가 자주 등장하는 콜럼비아 북쪽 연안이 특히  위험한 코스로 알려져 있다. 항해
도중 나를 가장 긴장하게 만든  것은 사실 다른 요트인들이 모두 겁내는 삼각파
도보다는 콜럼비아 마약선이나  해적을 만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아마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었을 게다. 영화에서  보았던 마피아 조직의 잔혹한 살
상 장면,  혹은 일단 상대를 점찍었다  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난도질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해적들  이야기가 쉬지 않고 뇌리를 어지럽혔다. 그래서  나는 가
급적 그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해상을 피해 항해하면서도 항시 주의를 게을리하
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도 내가 그들의 위협권에  들어간 이상은 별 도리가 없었
겠지만 말이다.
  파나마 크리스토발 항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이번에는  어쩐지 무사
히 목적지까지  왔다 싶었는데 항구에  인접하는 순간, 어둑어둑한  새벽 하늘을
찢어 내릴  듯 몰아치는 번개가 보통  살벌한 게 아니었다. 번갯불  때문에 너무
눈이 부셔 새벽인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배를 몰아야  했다. 이제 대서양인 이 곳
에서 20세기의 대역사로  통하는 파나마 운하를 통과, 발보아 항으로  나가는 것
으로 선구자 2호는 처음에  항해를 시작했던 태평양으로 다시 들어서게 되는 것
이다. 어느덧 내가 지구를 한 바퀴나 돌았다니!
  크리스토발 항구에 닻을 내려놓고  부족한 잠을 보충해 보려고 했으나 좀처럼
눈이 감기지  않았다. 벌써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살아서
이 곳까지 왔다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먼길을 어떻게 지나왔던가.
문득문득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지난날의 힘든 여정이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지
친 내 가슴에 단비를 내려 주었다. 아직  자축하기에는 좀 이르다 싶었지만 우선
푹 자 두기 위해서  맥주를 한 깡통 마셨다. 적도를 통과하면서  워낙 고생한 탓
인지 체중이 10파운드나  줄었지만 현재 컨디션은 최상급이었다.  맥주를 마시고
적당히 나른해진 몸으로 잠을 청하는데 누군가 요트 안으로 들어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고맙게도 한국에서 손님이 오셨다는 전갈이었다. 파나마 운하 관리소 측
에서는 항해자의 안전을 위해 현지  안내인 포함 10인 이상의 승객을 태운 배들
만 운하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데 단독 항해자인 나를 위해 한국일
보사 장재구 명예회장님과  취재진들이 동행을 자청해 주신  것이었다. 감격스런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구자 2호가 세계  일주 항해의 마무리를 위해 파나
마에 기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황원탁 주 파나마 대사 부부를 비롯한 100여명의
주 파나마 지사, 상사 지원들 및 교민들이 환영 만찬까지 준비해 주었다.
  여태껏 수많은 요트인들과 같이 다녀 봤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했
던 우리 한국 사람들만의 따뜻한  동포애가 새삼 나 자신을 숙연하게 만들고 있
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었던 항해였다. 가는 곳마다 이어
진 우리 교민들의 뜨거운 성원이 없었다면 중도에 몇 번이나 포기했을지도 모른
다. 파나마 교민 환영만찬식 다음날인 6월 22일. 선구자 2호는 다른 요트와 함께
묶여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닻을 올렸다. 운하관리소 측에서  동력에 필
요한 물을 절약하기 위해 선구자  2호 같은 소형 요트는 다른 요트와 묶어 통과
하도록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온 분들의  도움으로 법
에 규정된 승선 인원을 무리 없이 채우고 파나마 운하를 통과한 뒤에 다시 돌아
와 이번에는  브라이언을 위해 또 한  번 운하를 건너야만 했다.  브라이언 배는
승선 인원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모든 배들은 설계 당시부터 파나마 운하의 넓이를 고려해 제
작해야 할 만큼  이 곳은 세계의 중요한 해상교역로였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
는 거대한 인공호수 갑문인 이 운하를 만들기 위해 3만명이나 되는 인부들이 말
라리아로 목숨을 잃어야 했고, 미국 정부가 개입한  뒤 공사 기간만도 10년이 걸
렸다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세계적으
로 수십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말라리아 치료약까지 개발되었다고 하니 희생자
들의 넋이나마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대서양  연안항인 크리스토발 항구를 출발
하여 발보아까지  총길이 50마일에  이르는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우선 폭
500피트의 홍수림 늪지대인  라몬 만수로를 6.5마일 정도 거쳐 3단  갑문으로 된
개턴 갑문을 차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 다시 85피트  정상의 케일라
드 횡단 수로를 23.5마일 항해하여, 깎아지른  절벽 컨츄렉터 힐을 통과하고, 1단
계에 31피트씩 내려가는 미구엘 갑문을 지나면 1평방마일에 달하는 작은 인공호
수에 닿게 된다. 다시 그 곳에서 미라  플로렌스 갑문으로 시작되는 수로를 한단
계씩 내려가 태평양 연안  발보아에 이르는 것으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넘어
오게 되는 것이다.
  뱃길로는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는 길을 단 8시간 만에 건너갈 수 있게 됐다는
점만으로도 파나마 운하는 세계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바다의 실크로드라 할 수
있다. 옛날 사람들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 엄청난 일을 위해 미국이 투
자한 금액만도  30억 달러. 그런 이유로  아직 미국의 관리하에 있는  이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선박의 규모에 따라 통과료를  지불해야 한다. 순전히 중력으
로 움직이는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
이다. 선구자 2호는 5톤급의  소형 요트로 한 번 통과하는 데  15만원 가량의 통
과료를 지불해야 했지만 일반 상선이나 어선들은 그보다 몇 배의 금액을 지불해
야 한다. 심지어 무게가 많이 나가는 범선의 경우  한 번 통과하는 데 우리 돈으
로 1억원씩이나 되는 통과료를 지불해야 되는데 관리소 측 설명에 의하면 그 돈
이 모두 운하 유지비로 쓰여진다는 것이다.
  당시 내가 본 이 나라는  악명 높은 독재자 노리에가가 축출된 후에도 정세가
안정되지 못한 듯했다.  한때 미국 정부로부터 징역 200년의  종신형을 언도받기
도 한 노리에가가 피신 다닐 때 그 곳 한국 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했다가 거절당
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파나마 시티는 범죄와  부패의 온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노리에가를 축출하기 위한 시민  혁명에 사용되었던 대부분의 무기가 아직 반납
되지 않은  채로 시중에 흘러 다니며  범죄의 도구로 쓰이는 가  하면, 관리들의
부패상도 여전해서 시내  어디를 가나 공공연하게 뇌물을  요구하였다. 오죽하면
내가 차를 운전하고 시내로 나갔을  때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고 단속 나온 경
찰관이 딱지를 끊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뇌물을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정
도였다. 나는 주위  사람들한테 미리 상세한 정보를 입수해 두었던  덕분에 거금
20달러를 요구하는 그 경찰관을  5달러만 주고 물리쳐 버렸지만 기분이 썩 상쾌
하지는 않았다. 5달러도 뇌물은 뇌물이었으니 나  또한 이 나라의 부패한 관리에
게 뇌물을 바친 셈 아닌가. 몇 가지  부정적인 측면을 제외한다면 파나마는 세계
의 무역 자유화 지역으로 지정되어  나름대로 그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국가
였다. 한국 기업의 진출도 꽤  할발한 편이었고, 덕분에 그 곳 교민들의 생활 환
경도 현지인들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6. 다시 하와이로
  1996년 8월 8일. 북위 4도 27분. 서경 79도 49분. 바람 남서풍 15노트. 밥과 감
자. 양파. 파인애플. 참치를 볶아서 먹고 있다. 앞으로 두 달 동안 필요한 음식과
식수는 파나마에서 충분히 준비했다. 식수 200리터, 하루에 2~3리터 정도 마셔도
약 90일 정도 버틸  수 있는 양이다. 그 외에도 음료수 30캔,  맥주 30캔이 있다.
또 감자  80개, 양파 80개,  마늘 10개,  오렌지 50개를 실었다.  그리고 쌀은 약
50kg 정도 준비했다. 여기에 2박스의 김치, 너구리 라면, 육포 20개, 감자과자 50
개, 팝콘 20개, 건포도,  마른 과일도 충분하다. 육류의 섭취는 보통 깡통 음식으
로 해결하는데  이번에는 약 150개 정도  실었다. 그리고 예전에  준비했던 깡통
음식으로 깻잎이  200개, 김치 50개, 번데기  10개, 참치 50개가 남아  있어 먹을
것과 마실 것 걱정은  당분간 안 해도 되겠다. 기착지에서 음식을  실을 때는 좀
많다 싶게  준비한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때문이다. 다음 기착지에 도착할
때까지 남으면 그 때 버리고 새것을 준비하더라도.
  2년 반  만에 다시 태평양을 건너는  내 심정은 홀가분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무사히 하와이까지 갈  수 있으면 실질적인 세계  일주 항해는 성공리에 마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2주 전에 먼저 파나마를  떠난 브라이언과는 서로 행운을 빌어
주며 하와이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다소 여유로운 마음으로  태평양 중
동부에 위치한 에쿠아도르 령 갈라파고스 제도에  들렀다 갈 심산이었다. 다윈이
‘진화론’의 이론적  근거를 발견한 곳으로  유명한 갈라파고스 섬.  다윈은 이
화산섬에 서식하고 있는 수많은 철새들을 관찰하던 중 서로 같은 종류의 새들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진화론이라는 혁명적인 이
론을 수립하였다.
  19세기 말, 유럽의  정신 세계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던 그의  진화론은 창조설
을 신봉하는 기독교인에게는 사탄의  속임수요, 당시의 자유주의적인 사상가들에
게는 진보적 이론으로 일대 논쟁거리가 되었다.  어느 시대건 고정관념을 깨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따지고 보면  진리란 것은 콜롬부스의  달걀만큼이나 단순한
것일 텐데. 아쉽게도 나보다 앞선 시대를 살다  간 위대한 선각자의 발자취를 더
듬어 보고자 갈라파고스 제도를 방문하려던 계획은 출발 당일부터 취소되어야만
했다.
  파나마 인근 해상에 들어서자 마자 맹렬한 기세로 퍼붓는 폭우로 바다가 요동
을 치기 시작하더니 해류가  항로의 반대편으로 몰려오는 바람에 직선거리 항진
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간신히 폭우가 멎었나 싶더니 이번에는 배가  좀처럼 앞
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태평양에는 항시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하는데  이건 또
왜 이런가 싶었다. 할  수 없이 서쪽으로 항해해야 할   항로를 포기하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해류를 든지고 나아가다  무역풍이 불어 주는  쪽에서 항로를
우회하자는 심산에서였다. 배는 계속해서 열흘 간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다. 비록
시간상의 손실이야 있다 쳐도 그 길만이 가장 안전하게 항해를 이어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혹시 지난번처럼  꼼짝없이 무풍지대에 갇혀 버리는 건  아닐까? 파
나마 교민들이 정성으로 식량과 식수는 넉넉히 준비해 왔지만 적도 부근에 닿는
순간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또 한번 그 때처럼 시달려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만 같았다. 나는 상상만으로도 목젖이  타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물을
최대한 아껴 마셨다. 또 비가 한 방울이라도  내릴 때는 어김없이 물통을 채워두
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항해할 때는 나만의 몇 가지 금기 사항이  있는데, 어떤 경우에도 성난 바다는
카메라에 담아  두지 않는다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항시 죽음과  맞대면한 채
항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만들어낸 절박한 자기 암시 같은  것이겠지만, 만약
태풍이 몰아칠 때 바다의 사진을 찍게 되면 반드시 불행한 일이 닥칠 것만 같았
다. 나는 여간해서는  미신을 믿지 않는 편이었지만 왠지 그  금기사항만큼은 깨
고 싶지 않아서 가급적 바다가  평화로울 때?? 비디오 촬영을 하는 버릇이 있었
다. 굳이  꺼림직한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만용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죽음 앞에 나약하기만 한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상관
없었다. 살고 싶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능일 터였다. 더군다나 태
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는  제 아무리 미신 운운하며  호기 있게 카메라를 들고
설친다 해도  상황이 너무 급박한  나머지 촬영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나로 말하자면 그  두 가지 명분을 다 내세워  성난 바다의 얼굴은 화면에 담지
않았다. 사람도 찡그리고 있을 때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데 바다 제 녀석은 뭐
가 좋아 그 사나운  몰골을 찍히고 싶어 할 것인가. 그래서  대부분 맑고 쾌청한
바다의 얼굴만 사진과  비디오카메라에 담았다. 긴 항해에 지쳐 있는  내게 하늘
이 주신 선물일까.
  하와이를 향해 길고 긴 항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난 태어나서 가장 아름다운
쌍무지개를 보았다. 먼 수평선  너머 떠오른 거대한 아치 형태의 쌍무지개. 한동
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문득 내가 느낀  것은 외로움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
경을 나 혼자 보아야  하다니.... 누군가 함께 저 무지개를 바라보고 기뻐할 사람
이 있다면 좋을텐데.... 그 무렵 난 조금  지쳐 있었던 것 같다. 비교적 순항을 계
속했던 파나마 - 하와이 간 해상에서  난 다른 때보다 사진과 비디오를 많이 찍
었다. 그렇게 비디오라도 찍어 가며 시간을 보내는  게 정신 건강상 이로운 상황
이기도 했다. 그 날도 무료함을 달랠 겸  열심히 비디오 카메라를 움직이고 있는
데 배 뒤쪽에서  따라오던 손님 하나가 화면에 잡혔다. 언제부터인가  녀석이 눈
에 들어오더니 뜻밖에도 벌써 반나절 동안이나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야, 고개 들어봐. 사진 찍어 줄게!”
  아무리 사정을 해도 녀석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녀석은
평생 납작 엎드린  채 헤엄쳐 다니는 가오리란 놈이었기 때문이다.  몸통 넓이만
도 2m나 되는 엄청나게 큰 녀석이었다.
  “임마, 너 고집 피우려면 따라오지마, 응?”
  협박을 해도 녀석은 막무가내로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배안으로 불러들이
자니 녀석을 낚시바늘에 꿰야  하고.... 그래도 제깐에는 내가 좋아서 따라다니는
모양인데, 에라 관두자! 녀석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금
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투명한 바닷물 속에 그 커다란 몸체를 담근 채 호위병처
럼 떠나지 않는  저 갈색 물고기가 외로운 항해길에  한 조각 위안이 돼 주었던
것이다. 문득 인류의 조상이 어류였다는 학설이 떠올랐다. 녀석에게도 과연 영혼
이란 게  있을까. 이래저래 가오리와  더불어 무역풍이 불어  주기만을 기다리던
중 배가 제  방향을 잡기 시작한 건  북위 1도를 막 넘어선  날이었다. 지루하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별 고생 없이 태평양을 건너고 있다는 안도감으로 여유를 되
찾게 되자 문득 브라이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예정대로라면 그는 나보다 훨씬
앞질러 갔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어디 있냐?”
  “물어 보지도 마. 나 이번에 방향을 잘못 택해서 온전히 헤맸다구!”
  “그게 무슨 말이야?”
  “적도 중간까지 왔다가  항로를 서쪽으로 변경했는데 뭐  이런 바다가 다 있
지? 바람은 한  점도 없지. 해류는 자꾸  거꾸로 밀려오지...어느 날은 배가 하루
종일 뒷걸음만 쳤다니까? 하루 1노트도 아니고 완전히 마이너스 3노트였다구!”
  HAM 라디오로 불러낸 브라이언은 덕분에 2주나 손해를 봤다며 약이 바짝 올
라 있었다. 알고 보니  그도 아직 내가 있는 해상 어딘가에서  항해하고 있는 중
이었다.
  “잘 됐네, 뭐! 그럼 우리 둘이 같이 들어가면 되겠군.”
  브라이언은 약이 오르는지  약간 맥이 빠진 음성이었다.  앞으로 하와이까지는
5일 남짓. 이번 세계 일주  중 가장 긴, 총 58일의 항해가 끝나는 마지막 바다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벌써부터 해풍에 실려 오는 육지 냄새가  코끝에 스치는 걸
느끼며 외로움을  달래 보았다. 이제  브라이언은 이틀 후면  화려하게 하와이에
입성해서 전세계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것이다. 세계  최연소 단독
세계 일주 항해 신기록 수립!
  그는 지금 내가  자신과 동시에 하와이에 입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난 그보다 3일  늦게 호놀룰루 항으로 들어설 예정이었다. 차마  나한테 직접 부
탁은 못 했지만 다른 요트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의중을 전해 온 브라이언 어머
니의 간곡한 모정 때문이었다.
  “내 아들의 세계 최연소 항해 기록이 좀더 성대하게 축하 받길 원해요.”
  골수 요트광인 브라이언 어머니는 아들의 쾌거를 세상에 보다 널리 알리고 싶
은 심정일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브라이언과  내가 동시에 하와이로 들어간다면
나 또한 한국 최초의 단독  세계 일주 항해라는 명목으로 취재 대상이 될 게 뻔
하고, 그렇게 되면  브라이언을 향한 매스컴의 관심이 분산될까 우려하는  그 어
머니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었다. 나는 가급적 게으름을 피워  가며 배를
몰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동안 형처럼 나를 따르던 브라이언에게  내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우정인 동시에 요트인으로서 그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최대한
의 예의라는 생각에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브라이언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
다. 1996년  10월 1일, 마침내 선구자  2호가 하와이 호놀룰루  항으로 들어섰다.
브라이언과 함께 마중 나온 그의 어머니는 내게 꽃다발을 건네주며 눈물을 글썽
였다.
  “토니, 정말 고마워....”
  “아주머니, 정말 장한 아드님을 두셨어요!”
 요트 가문의 여장부답게 건강한 그녀의 눈빛은 어느덧 평생의 꿈이라는 남태평
양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7. 마이크로네시아의 추억
  코스레이는 하와이에서 오키나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독립국 마이크로네시
아 섬 중 하나로 인구  7,000여 명의 축복받은 섬이다. 이 곳 현지인들은 한국의
공영토건에서 공항과 항만시설 등  주요 건축공사를 하게 된 인연으로 한국인에
대해 강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이 섬을 찾게 된 것은 1997년 2월 17일,
부산으로 가기 위해 일본 오키나와 현으로  항해하던 도중이었다. 요트를 정박시
키기 위해 해안가로 드어서는 데 웬 낯선  노인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섬사람들
의 족장 격인 테드 시그라라는 사람으로 마지막  남은 왕족이었다. 그가 내게 손
짓을 한 이유는  자기 섬에 찾아온 손님을  환영하는 뜻에서 숙소를 제공하려고
하는 거였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외지인들은 무조건 자기 집으로  초대해 음식
과 숙소를 제공하는 것으로써  나름대로 일개 섬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다한다
고 여기는 듯싶었다.  무엇보다도 그 친절하고 소박한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편
안하게 해 주는  노인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분의 초대에 응하여  시그라 일가와
함께 지냈다. 집안의 가장 웃어른인 테드  시그라씨는 슬하에 자녀만도 10남매에
모두 17명의 자손들을  두고 있었다. 코스레이의 마지막 왕족 가문인  시그라 집
안의 아들들은 신교육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도 적응을 못 해 다
시 섬으로 돌아올 만큼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때묻지 않은 청년
들이었다. 섬사람들 대부분이  마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시그라  노인을 찾
아와 해법을 구한다고 한다. 그만큼 지혜롭고 총명한 노인이다.
  이 곳에는 백 년  전에 보스턴에서 온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있는 데, 섬사
람들 대부분이 이 아담한 교회에 다닌다.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에 처음 10분만
영어를 쓰고 나머지 시간은  코스레이 현지인들의 언어을 쓰기 때문에 외지인들
은 무근 소리인 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교회와  아주 친밀하게 성
장하는 코스레이 사람들은 찬송가를  부를 때에도 일체의 반주 없이 육성으로만
화음을 맞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어느 거대한 사원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화음이 장중하고 아름답
다. 주변 핑길랏트 섬이나  모킬 섬으로 여행하려면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상선
을 이용하는데, 두 섬  모두 인구 150~500명 안팎의 작은 섬이다. 코스레이 섬에
서 상선을 타고 열다섯 시간 걸려 도착한 인근 핑길랏트 섬은 ‘인구가 500명에
파리는 5만마리’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파리들의 천국이다. 집집마다 화
장실이 따로 없기  때문에 섬 전체가 하나의 공중화장실인 셈이다.  핑길랏트 섬
출신으로 마이크로네시아 국회의원에당선됐다는 마이카라는 중년 남자로부터 한
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榴? 몇 년  전에 섬 대표로 한국  국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빳빳한
새 지폐로 10달러짜리를 열 장이나 선물 받았고 워커힐에서 융숭한 대접까지 받
았다는 사실을 몹시 자랑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네 섬사람들은
모두 한국인들을 좋게 생각하고 호감을  갖는 데 비해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그
들을 경계하고 이용해먹을 궁리만 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에서 그가 그렇듯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지게 되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한국인인 나로서는 기
분이 언짢을  수 밖에 없었다. 반면  한국인에 대해 잊지 못할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현지인들도 있었다.  코스레이 섬의 한 초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남자 교
사는 오래 전 그  섬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한국 여자에 대해  말해 주었다. 강
아지 두 마리를 안고 미국인  남푠과 함께 들어온 여자가 아이들에게 가르쳐 준
<아리랑>과 <학교 종> 노래가 아직껏  아이들 사에에서 불려지고 있다고 했다.
당시 그녀가 데리고 들어왔다는 강아지 두 마리는 테드 시그라 노인에게 맡겨져
이제는 그 종자가  세 마리로 불어나 있었다. 섬사람들은 매주  일요일이면 불도
못 피울 정도로 엄격하게 주일을 지키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빵과일’이라
는 희귀한 과일을 토요일 저녁에 잔뜩 쪄  놓았다가 일요일날 하루 종일 먹는다.
빵과일은 말 그대로  빵 맛이 나는 열대과일이다. 섬사람들은 주로  빵과일과 돼
지고기, 생선회 등을 먹고 특식으로는 거북이 고기를 즐겨 먹는다.
  집집마다 사육하는 돼지는 검은 돼지와  흰 돼지 두 종류가 있는데 검은 돼지
는 비교적 흔한 반면,  흰색 돼지는 값도 비싸고 품종도 귀해  특별한 날만 식용
으로 쓴다고 한다.  테드 시그라 가문의 맏아들 장과 망고로브  밀림으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뗏목을 타고 늪지로 들어갔더니  한국 상표를 단 컵라면 껍데
기가 둥둥 떠내려 왔다. 비록 누군가 양심  없이 버린 쓰레기에 불과했지만 교민
한 사람 살지 않는 그 곳에서 한국 상품을 보다니 한편으로는 반가운 생각도 들
었다.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장은  마이크로네시아의 수도인 파네페에 살고
있다는 한국인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는 20여년  전 어선을 타고 파네페에 들
어왔다가 현지인  처녀와 사랑에 빠져  정착, 지금은 수도의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알마 뒤 우연찮게  그를 만나 볼 기회가 있었다. “여기 사람들 다
선량하고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가끔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순진한  이 곳
아가씨들한테 헛된 꿈이나 심어 주고  철새처럼 떠나 버리는 걸 보면 가슴이 아
파요.” 그 한국인에게서 들은 얘기 또한 우울한 것이었다. 또 그는 몇 년 전 한
국 사람이 섬에 들어왔다가 해삼 씨를  말렸다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섬사람들이
워낙 현실에 무심하다  보니 간혹 외지인들이 들어와  미역이니 다시마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무조건 싹쓸이해  가 버린다는 것이다. 어딜 가든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다 있게 마련이지만 어쨌거나  말이 많은 걸 보니 이 작은 섬에도 한국 사
람들의 발길이 심심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8. 바다의 인심
  마사토 후지무라(38)는 세계 일주 항해를 떠난 지  7년 만에 고국 일본으로 돌
아가는 요트광이었다. 그가 겨우 7m 길이의 소형 목선을 타고 지구를 한 바퀴나
돌아왔다는 걸 알고는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전직이 수의사였다는 그
를 알게 된 건  코스레이 섬에서였다. 그는 20대 때부터 세계  일주 항해를 꿈꿔
오다가 서른  살이 넘어 기어이 그  꿈을 이룬 의지의 사나이였다.  더구나 그가
세계 일주 항해를  떠났던 7년 전에는 결혼까지 한 몸으로  부인과 함께였다. 한
창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어야 할 신부를 데리고  이 험한 바다로 나온 것이었
다. 어떻게 보면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생업을 때려치우고  세계 일주 항
해를 떠날 결심을  했던 후지무라 씨도 대단한 용기의 소유자였지만,  그런 남편
을 따라 동반자로 나서  준 부인이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용감한 부
부는 항해를  떠난 지 1년  만에 부인이 '파마이라'라는 태평양상의  무인도에서
임신을 하게 되어 본국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6년 동안은 후지무라 씨 혼자 항해
를 계속해 왔다. 항해 도중에 태어난 아기가  이제는 유치원생이 됐다며 가족 상
봉의 기쁨에 들떠 있던 후지무라  씨가 코스레이 섬을 떠날 무렵에는 아직 태풍
'이사'가 발생하기 전이었다. 상시 태풍의 위협을 안고 있는 아시아권 해상은 항
해자들에게 매우 까다로운  코스였다. 잠잠하던 바다가 언제  저기압의 영향으로
태풍권에 들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후지무라  씨가  코스레이 섬을
떠날 때도 상황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계속 지체하다간 애 얼굴도 잊어버리겠어."
  내가 가지고 있는 노트북 PC를 통해 받아 본  기상청 자료에는 현재 해상으로
저기압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후지무라 씨는 출발을  강행하였다. 태풍 '이사'는
그가 섬을 떠난 지 불과 이틀 만에  코스레이 주변 해상을 강타하였다. 파고 150
노트, 시속 280km의 상상을 초월하는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나뭇잎이나 다름
없는 외돛단배로 항해하는 후지무라  씨의 안전을 걱정하는 가운데 다행히 그가
무사히 괌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이 왔다. 다행히도 태풍 '이사'가 진로를 바꿔 괌
아래로 지나쳐 버린 것이다. 바다가 잠자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떠나기 위해 코스
레이 섬에 정박해 있던 선구자 2호도 더  이상 지체할 수만은 없었다. 지구를 반
이나 돌아왔지만 아직  선구자 2호의 소임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번 항해의 최
종 목적지인 부산항으로 가서 한국인 첫 단독 세계 일주 항해라는 나의 작은 성
과를 조국에 돌려  주는 것으로 비로소 항해는 끝나는 것이다.  컴퓨터상의 기상
자료에는 여전히 크고 작은 저기압  기류가 해상을 맴돌고 있었다. 100%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임에는 분명했지만 나는 출발을 서둘러야 했다. 태풍 '이사'
를 곧바로 뒤쫓아 나타난 또 다른 태풍 '지미'가 바다를  한 번 뒤집고 난 후 선
구자 2호는 코스레이  섬을 떠났다. 섬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계속 뒤를
따라오던 저기압이 폭풍으로  변해 불안한 항해를 해야 했다. 실로  엄청난 스트
레스를 동반하는 항해였다.
  태풍 '지미'는 그래도 얌전한  편이었다. 또 다행히 그것은 선구자 2호의 항로
와 부딪치지 않았기 때문에 강한 바람 외에는  별다른 영향을 삐치지 않았다. 가
장 지독한 관문은  태풍 '켈리'의 발생이었다.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도록
항로를 바짝 추격해 오는 '켈리'란 놈의 저돌적인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길은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극심한 피로와  긴장이 몰려오는
가운데 나는 거의  도박하는 심정으로 잠시 잠깐씩  눈을 붙여 가며 오끼니와로
향했다. 그럭저럭 무사히 태풍은 넘겼지만 해상에 수도  없이 나와 있는 대형 어
선들도 항해를 위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가도 바다에서
조업중인 어선의  엔진 소리가 들리면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하루는
너무 지친 나머지 선실 안에서 잠을 자다가 일어나 보니 커다란 어선이 바로 옆
을 지나가고  있었다. 깜짝 놀라 갑판으로  나왔다. 아침 나절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한밤중이었다면 선구자 2호는 꼼짝없이 가루가  돼 버릴 판국이었다. 그 어
선은 내가 바깥에 나와 있는데도 못 본 척 외면하고는 요트 주위를 천천히 우회
하여 지나갔다. 그런 식으로 선구자 2호의  안전을 위협하는 어선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내 목숨도 내 것이 아닌 때가 많았다. 거의 22일 동
안을 시달리는 가운데  오키나와를 3일 앞두고 담배가 떨어졌다.  힘든 상황에서
그나마 긴장을 풀어  주던 담배까지 떨어지고 나니  신경이 더욱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마침 주변에서 조업중인  어선을 향해 도움을 청해 보았다. 대만 선적의
어선이었다.
  "Hey, Please give me cigarettes!"
  손을 흔들며 한  손으로는 담배를 피는 시늉을  하여 담배를 청했더니 갑판에
나와 있는 중국계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이어  그들이 선구자 2호
를 향해 담배 한 갑을 던져  주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대만 담배 이름이 '장
수'였다. 인간의 수면을 단축하는 주범으로 알려져 있는 담배 이름이 장수라니!
  "또 뭐 줄까?"
  잠시 후 영어를 할 줄 아는 필리핀계 선원이  인심 좋게 물어 왔다. 그들은 내
가 괜찮다고 사양을 했는데도 과자며 음식물 따위를  자꾸 던져 주었다. 그 어선
과 선구자 2호의  거리가 멀어 비교적 부피가  약한 과자 봉지들은 오는 도중에
바다로 떨어져 버리기도 했다.
  "이리 와 같이 밥 먹자!"
  난 데 없는 제의는  바로 그 배의 선장인 대만인의 지시였다.  난 잠시 망설였
다. 생각해 보니 못 갈  것도 없었다. 요트는 그대로 두고 헤엄쳐서 잠시 갔다오
면 될 터였다. 갑자기  내가 웃통을 벗고 바다에 뛰어들자 그  배의 선원들은 몹
시 놀란  표정이었다. 진짜로 내가 건너오리라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 선원들은
대부분 중국계와 필리핀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돼지고기 요리와  밥을 내주며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지?"
  "오키나와를 거쳐서 한국의 부산항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전엔 어디서 왔는데?"
  "L.A."
  거기까지만 듣고도 깜짝  놀라던 그들은 내가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 항해를
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그 중 선장인 대만  아저씨는 아
예 날 미친 사람 취급하는 가운데 필리핀 선원이 영어로 은근히 물었다.
  " 나 말이야,  얼마 안 있으면 이 배랑 계약이  끝나는데...... 한국에 일자리 좀
소개해 줄 수 있을까?"
  "글쎄요, 사실은 나도 일자리가 없는데요?"
  젊은 놈이 요트를 타고 다니는 걸 보고 내가 무슨 부잣집 아들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몹시 부러운 눈길을 보내던  선원들은 내 처지를 이해할 수 없는 모양
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어 준 그들의  넉넉한 마음씨에서
나는 바다의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서로 목적은 다르지만  바다라는 한
울타리가 사람들을 결속시켜 주는 고리가 되는 것이었다.
    9. 절망에서 건져 올린 희망
  대만 선장의 특별 선물로 장수  담배 한 보루를 얻어 배에 오르고 나니 더 이
상 바랄 게 없었다.  이후 선구자 2호는 3일 간 순항하며 1997년  5월 20일 일본
오키나와 현 도마리  항에 무사히 입성하였다. 도마리 항까지는 나보다  먼저 도
착한 후지무라 씨의 무선 조언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었다. 다만 아
쉬운 것은 그 곳 관리들이 영어를 몰라서 입국 수속에만도 세 시간이 넘게 걸렸
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오키나와에서 다시 만난  후지무라 씨를 통해서 일본은 1
등 제일주의 나라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는 7년 동안이나 모
진 고초를 이겨내며  세계 일주를 마치고 돌아왔건만  일본 사람들은 그 성과에
대해 사뭇 무심한  태도였다. 이미 25년 전에 누군가 이룩해낸  성과였기 때문에
2등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후지무라 씨의 고향인 고베에
서조차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아 후지무라 씨는 다소 우울해하는 눈치였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지, 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후지무라 씨의  표정은 몹시 쓸쓸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는 무척 어려운  상황에서 세계 일주를 마쳤다. 이미 일본인  케니치 호리헤가
1974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이룩해낸 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후지무라 씨의
세계 일주 항해는  스폰서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그나마  항해 도
중 일본 방송국 다큐멘터리 제작 팀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 방송 관계자들은 후
지무라 씨의 세계 일주  항해보다는 태평양상의 무인도 기행을 프로그램으로 만
들 요량으로 그를 취재  대상으로 삼았다. 세계 일주 항해는 커녕  그걸 타고 바
다에서 살아 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낡은 목선과 함
께 떠나는 무인도  기행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후지무라 씨는  어려운 상황에
서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못 되었다. 그는  결국 방송 관계자들의 제의를 받아들
여 항로를 무인도 중심으로 옮겨 다니면서 부족한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힘
든 일을 마치고 고국에서조차 외면당한 후지무라 씨와는 달리 일본에 도착한 뒤
에 내가 다시 한 번 느낀 조국애는 실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나를 위한 교민 차원의 환영회를  열어 주고자 애썼던 재일동포 가운데 한 분
은 하필 평일에 날짜가 잡히는 바람에 교민 동원이 수월치 않게 되자 어떻게 데
려왔는지 수십 명의 일본 사람들을 행사장에  대동하고 나타났다. 사정이야 어떻
든 한복 차림에 태극기까지  들고 나와 나를 환영해 주던 그  '가짜 한국인'들을
보는 순간 솔직히 기분이 묘했다. 물론 나를 위해  행사장에 나와 준 그 일본 사
람들을 자존심 운운하며 깍아 내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들이 자
국민인 후지무라 씨에게 환영식은  커녕 요트클럽 사용 문제까지도 까다롭게 굴
었다는 말을 듣고 보니 일종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마
리 항을 거쳐 후지무라 씨가  자신의 고향인 고베 항에 들어섰으나 외국 요트인
들에게는 관대한 고베 요트클럽에서 자국민인 후지무라 씨의 요트를 정박시키는
데 있어서 이것저것 조건을 붙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통에 그가 몹시 상심해
하고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한국인인 나는 '대한남아 강동석 만세'를 외치는
그 수많은 일본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였고,  얼마 후 도마리 항을 떠나
부산항으로 향했다.  마지막 항로인  오키나와에서 부산까지는 때마침  해상에서
발생한 흑조로 인해 무척 불안한 항해였다.
  세계 3대 조류(페루  해류, 아갈라스 해류, 흑조 해류) 중  하나인 흑조는 바닷
물이 검게 변하며 삼각파도를 일으키는 위험한  해류이다. 세 방향으로 몰아치며
진로를 방해하는 삼각파도를 뚫고  나가는 것도 문제려니와 자칫 바람이 요트를
향해 불기라도 한다면 항해는 전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는 내가
부산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전국에  생중계할 방송 일정까지 잡혔다고 하니 출발
을 지연시킬 수만도  없었다. 간혹 항해를 하다 보면 육지와의  약속이란게 얼마
나 부담스러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는데 이번이 그런  경우였다. 바다
의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육지 쪽에서  볼 때에 일본에서 한국까지는
거리는 지척에 불과하다.  어언 3년 5개월이란 세월을 바다에서 보낸  내가 부산
항까지 오기란 식은죽먹기라는 게 아마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분들의 짐
작일 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6월 8일까지는 꼭 돌아와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날짜를 맞춰 달라는  한국에서의 전화연락은 몹시 곤혹
스러운 것이었다.  운명을 자연에 맡기고  바다로 나가는 항해자로서  장담할 수
있는 건 나무것도 없는  게 아닌가.  과연 바다가 나를  순순히 보내주려 할까....
배 양옆으로 병풍처럼 몰아치는 검은 파도를 조심스럽게 헤쳐나가나면서도 마음
은 줄곧 편치 않았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람이  점차 뒤쪽에 불
어와 배를 밀어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선구자 2호의  운명은 오로지 바
람의 방향에 좌우되는  상황이었다. 나의 작은 돛단배는 도마리 항을  떠나 꼬박
하루가 지날 때까지 그렇듯 불안한 상태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휘영청 밝
은 달빛을 받으며 외롭게 떠나는 하얀 돛단배.  그 동안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용케 견뎌 준 선구자 2호는 어느덧 나와  한몸이 되었다. 주인이 외로울 때는 같
이 침울해 하고, 주인이 용기를 잃었을 때는  저도 힘에 겨워 삐걱거리긴 했지만
언제나 내게 기운을  북돋아 주는 건 쉬임없이  물살을 가르며 전진하는 녀석의
참을성 있는 모습이었다.
  선구자 2호. 갑판에 기대앉아  문득 배 이름을 지어 주신 아버지를 그려 본다.
살아가는 동안에  아버지와 나는 그다지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했다. 남들처럼
부자가 같이  여행을 다녀 본 적도  없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하였다. 간혹 술이라도 얼근하게 취했을 때  아버지는 평
소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석아, 너 하고 싶은 게 뭐냐? 말해 봐라. 아버지가 다 들어 줄게."
  비록 취중에 하는 말일지라도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진심이라는 걸 누구보다
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때의 압지는  더없이 가까운 친구처럼 여겨지곤 했다.
설사 다음날 술기운이 가시면 언제 그런 모습을 보였냐는 듯이 과묵하고 엄격한
모습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빡빡한 현실,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 당신 혼
자서 감당해낼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이 아버지에게는 힘겨운 짐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아버지라는 슬픈 이름....
  내겐 희망과 절망의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오곤 했던 아버지. 나는, 바다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아버지 때문에 이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었다. 돌아가신 아
버지 앞에 떳떳히 서기 위해서라도 다시 바다에 나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었더라도 아버지는 이번  항해의 가장 값진 의미로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나는 3년 5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을 아버지와 함께 항해를 해 온 건지
도 모른다. 당신의  마음자리를 내 가슴속으로 옮겨와 살아  있는 아버지.... 지금
내 안에서 바로 그 아버지의  고른 숨결이 빨리 고국으로 가라고 재촉하고 있었
다.
    10. 칼처럼 불처럼, 그런 영혼이어라
  저녁 바람이  쉴새없이 바닷물을 간질이는 모양을  내려다보며 하얀 조각달이
부드러운 빛으로 바다를 감싸고 있었다. 대양 한  가운데를 항해할 때는 종종 견
딜 수 없는 고독감으로 다가오던  저 달빛이 이토록 포근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내가 고국에 오긴 온 건가  보다.... 총 7만여 킬로미터의 뱃길을 달려온 나의 사
랑스런 돛단배 선구자 2호는  이제 마지막 기착지인 부산 앞바다를 30마일 앞두
고 있다. 이 작은 배와 더불어 내가 청춘을  바쳐 이루려고 했던 일은 과연 무엇
이었을까.
  세계 일주 단독 항해. 모두들 무모한 일이라고 했다. 내가 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어주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그래도 기어이 해내겠다며  고집 피웠던
일들이 새삼 까마득한 옛일 같다.  태평양을 건너고, 그리고 또 몇 년의 준비 끝
에 세계 일주를 하겠다며 바다에 나온 지 벌써  3년 5개월. 처음 떠나올 당시 난
스물네 살이었다. 어쩌면 도망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
는 현실로부터, 가난으로부터, 그 가난이 빚어낸 인간과 인간의 불화와 갈등으로
부터, 폭력과 불신으로 얼룩진 미국 내 소수 이민사회의 그늘로부터.
  폭력으로 짓밟힌 L.A. 한인 사회의 피폐한 현실을 단지 약소국 이민자들이 겪
어야  할 어쩔 수  없는 설움쯤으로 받아들여 한탄만 하고 있기엔 내 나이가 너
무 젊었다. 그렇다고  한들 그 젊음으로 무엇을  할 수 었었던가. 동족의 아픔은
둘째치고 우선은 내  이웃, 내 가족, 나아가서는  내 자신의 고통 앞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순간의 폭동으로 잿더미가  돼버린 우리들
의 생활터전을 되돌려  달라고 호소해 봤자 귀를  기울여줄 대상은 아무도 없었
다. 어차피  미국이라는 거대한  다민족국가에서 그것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분쟁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폭동을 일으킨 흑인들을 상대로  해서 복수
를 할 것인가. 그것 또한 부질없는 폭력을 낳을 뿐이었다.
  L.A. 흑인폭동은 어차피 한인들이나 흑인들 모두가 피해자였는지도 모른다. 그
렇다면 과연 무엇으로  이 대안 없는 현실을 극복할 것인가.  무력하고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내 젊은  혈기는 끓어 넘쳤지만 방법이 없었다. 우리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 일단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앞세워  떠나오기는 했지만
솔직히 3년 5개월 내내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왜 난 또다시 이  바다에 나온 것일까.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닥쳐  곧 배가 부
서질 것 같은 죽음의  위험 앞에서 그 질책은 더 강해졌다.  무엇을 위해 여기서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도망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자유로
운 바다 여행이나 하면서 청춘의 낭만을 즐기고 싶어 한 것은 아닐까.... 이제 와
고백하자면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항해 도중  어려울 때마다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싶은 유혹도 수없이 겪었다. 그런 내게  확실한 목적의식
을 심어 주고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도록 마음을 이끌어 준 건 실의에 빠져 있
던 우리 교민들이었고, 세계 각국의 기착지마다 만난 해외 동포들의 성원이었다.
'해내고 말겠다는 정신! 본받고 싶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꿈을 쫓는 모습! 아름
답습니다.' '그 용기가 부럽기만 합니다.' '끝까지 무사하시기를....'
  '칼처럼 불처럼, 그런  영혼이어라.' 항해 도중 기항지마다  찾아왔던 교민들의
격려와 기원으로 가득찬 선구자 2호의 방명록은 200여 명의 이름과 함께 어느덧
정겨운 손때가 묻어  있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이 방명록의  글귀들을 들여
다보며 얼마나 많은 힘을 얻었던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자식을 기다리느라
비를 맞으며 떨고 있는 어머니.... 울고 계신 것 같다.
  대한민국 해군 여수함의 호위를  받으며 밤새 부산 앞바다까지 달려와 수영만
요트계류장에 배를  정박시키기 전, 나는 눈물로  쓴 마지막 항해일지를 덮었다.
오랜 시간 항해를 끝내고  육지에 올라서려니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리고 때아닌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센 빗방울이 후려치는 가운데  꽃다발과 플래
카드를 들고 마중나와준 고국의 환영객들 앞에 선  순간, 감동으로 그만 목이 메
였다. 먼길을 왔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달 수도 있는 20대의 거의 대부
분을 바다에 바쳤지만 후회는  없다. 꿈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불가
능하다고 했던 꿈, 또 나 스스로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던 그 꿈을 이루기 위
해 차근차근 준비했고, 때론 목숨을 걸어가며 최선을 다했다.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꿈을 가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하나
하나 노력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이제 바다에
서 생활을 잠시 접고 육지로 돌아가야겠지만 두렵지는  않다. 그 험한 바다를 나
혼자 헤쳐 나왔지 않은가.

 

 

 

 

 

 

    에필로그
  고국에 돌아온 뒤 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청와대에 초청되기도 하고, 해군
에서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또 정부와 민간단체에서 베푸는 여러  행사와 방송
에 출연하여 항해 경험을 얘기하기도 하고, 신문  잡지 인터뷰 등으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기나긴 항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준 진짜 공로자인 선구자
2호는 바다의  상징인 부산시에 기증하기로  하였다. 선구자 2호는  앞으로 건립
예정인 해양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뜻깊은 것은  우리 나라
청소년들을 위한 여러 행사들이었다.
  그 첫번째로 부산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선구자 2호를 비롯하여  각종 통신장
비, 항해장비,  취사도구 및 의류와 사진  등을 일반인들에게 첫  공개한 것이다.
이후 용인 에버랜드  전시관에서도 전시회를 가졌고, 한강  선착장에서는 전시회
와 함께 선구자 2호를 직접 강에 띄워 청소년들에게 요트 항해를 겨험하게 하였
다. 이 작고  낡은 배 한 척을  타고 대한민국 젊은이가 세계의 바다를  한 바퀴
돌아왔다는 걸 알고  우리 청소년들이 꿈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보람된 일이었다.  나의 작은 성과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나마
꿈을 실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나도 이담에 크면 형처럼 배타고 세계 일주할 거예요!"
  여의도 선착장에서  선구자 2호에 올라탄 초등학생  꼬마 하나가 고사리 같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 아이는 맨처음 엄마 손에 이끌려  배에 오를 때까
지만 해도 무척 겁먹은 표정이었다.
  "그것 봐라, 하나도 안 무섭지?"
  내심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옆에 앉아 있던 아이의 어머니가 활짝 웃
는 모습을 보며 내마음도 흐뭇해졌다. 그 아이의  눈에 나타난 것은 바로 자기도
뭔가를 해냈다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에서 빛나는 용기와 모험심이야말로 나 스스로 이번 항해의 가장 아름다운 보람
으로 기록해야 할 항해일지의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해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처음으로 민간인이 결혼식을 올린다. 주인공은 한국인 최초로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 및 태평양 횡단에 성공한 ‘요트맨’ 강동석씨(36). 강씨는 19일 오후 경남 진해 해군사관학교 명예의 광장에서 김남희씨(31)와 화촉을 밝힌다.

민간인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는 것은 1946년 해사 개교 이후 처음이다.

예비신부 김씨는 부산 출신으로 부경대와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 디자인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등산복 전문업체인 노스페이스사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재원. 주례는 해사 교장 권영준 중장이 맡기로 했다.

해사에서의 결혼식은 강씨가 91년 태평양 횡단 당시 탄 요트 ‘선구자호’(길이 8m・무게 4t)를 해사에 기증하고 해군이 그의 바다 사랑과 도전정신을 높이 사 ‘명예해군 1호’로 선정한 것이 계기가 됐다.

결혼식은 해사 앞바다인 옥포만에서 크루저 요트를 탄 신랑・신부가 제트스키 등 4척의 호위를 받은 채 등장하면서 진행될 예정. 남녀 해사생도들은 신랑・신부가 ‘교차 칼’ 사이로 행진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다채로운 이벤트를 마련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80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간 강씨의 ‘바다 도전’은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91년 혼자 요트를 타고 7개월간 태평양을 횡단했고 94년부터 3년5개월 동안 미국 LA항을 출발, 부산항까지 지구 한바퀴 반이 넘는 7만여㎞를 단독 항해했다.

요트 항해 등으로 대학을 13년 만인 2001년 졸업한 강씨는 미국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 회계법인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11월 사표를 내고 산악인 박영석씨(42)가 이끄는 북극 탐험대에 참가하기도 했다.

강씨는 “해사에서 도전정신과 진취적인 기상이 넘치는 사관생도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하게 돼 정말 기쁘다”며 “앞으로도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이겨내며 열심히 살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결혼식 후 신혼부부는 9박10일간 뉴질랜드 및 호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진해|박영철기자 yc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