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862년 9월 9일, 리의 주력은 프레데릭에 집결한 상태에서 향후 작전계획을 세웠다. 리는 세부사항을 조절한 뒤, 부대의 현재 위치를 기준으로 행군계획을 세우고 이를 문서화하였다. 이것이 특별명령 191호였다.
이 문서를 군단장인 잭슨과 롱스트리트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부대의 뒤쪽에 뒤쳐져있던 D.H.힐 장군에게도 문서를 전달하였다. 리의 사령부에서는 총 3부를 복사하여 보냈다.
하지만 힐 장군은 잭슨의 휘하였기 때문에, 잭슨도 직접 문서를 복사하여 힐에게 넘겼다. 즉 힐은 똑같은 문서를 2부 받게된 셈인데, 잭슨의 문서는 엄중하게 보관하면서 리의 문서는 어떤 참모의 실수로 인해 -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면지’로 버려졌다.
이 이면지를 어떤 남군이 담배쌈지로 이용하기 위해 시가 3개와 함께 포장하였다. 그리고 힐은 명령에 따라 부대를 프레데릭에서 이동하였는 데 이 과정에서 담배쌈지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 담배쌈지를 9월 13일에 프레데릭에 도착한 북군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즉각 리의 명령서는 맥클레란에게 전달되었고, 맥클레란은 남군의 위치와 행군로, 향후 작전계획을 완전히 알게되었다. 아무리 맥클레란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지를 알게 되었다.”라고 맥클레란은 프레데릭의 시민대표와의 만찬에서 공언을 하였다.
당시 시민대표 중에 남부동조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즉시 스튜어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스튜어트는 즉각 힐과 리에게 알렸다. 리의 사령부는 비상이 걸렸다.
당시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맥클레란의 북군은 8만 5천으로, 바로 앞의 프레데릭에 이미 6만 5천이 있었다. 당시 남군의 총원은 4만 5천 정도였는 데, 하퍼스페리를 공격하기 위해 2만 8천이 잭슨의 지휘하에 있었고, 맥클레란과 대치할 수 있는 병력은 롱스트리트와 D.H. 힐의 1만 7천명 뿐이었다. 그나마 워낙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당장 사우스마운틴에서 맥클레란과 대치할 수 있는 병력은 D.H. 힐의 5천명뿐이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배치상황이 낱낱이 북군에게 알려졌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맥클레란은 예의 늦장부리는 습관으로 인하여 최초의 보고를 받은 지 18시간이 지나서야 부대를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아마 13일 오후에 받았기 때문에 한숨자고 출발할 생각이었던 듯 하다. 그 동안 리장군은 잭슨에게는 하퍼스페리를 빨리 접수하라고 명하고, 해저스타운의 롱스트리트는 급히 퇴진하여 사우스마운틴에서 D.H. 힐과 합류하라고 명하고, 힐은 사우스마운틴의 3개 고갯길 - 터너스 갭, 크램튼 갭, 폭스 갭-을 사수하라고 명했다.
물론 워낙에 열세했기 때문에 북군의 격퇴는 생각하기 힘들었고, 단지 잭슨이 하퍼스페리를 접수하고 전병력이 집결할 때까지 시간을 벌라는 의미였다. 거기다가 하퍼스페리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에서 포위하고 있던 맥크로우 사단이 고립되기 전에, 함락시키거나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끌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고갯길은 위에서부터 터너스 갭, 폭스 갭, 크램튼 갭이 있었는 데, 먼저 터너스 갭과 픅스 갭은 D.H 힐의 병력 5천명이 배치되고, 남쪽의 크램튼 갭은 맥크로우 사단의 잔여병력과 기병대 일부가 배치되어 있었다. 롱스트리트의 병력은 14일 오후 3시 반에야 도착했다.
사우스 마운틴 전투의 재현극 -아마 터너스 갭에서의 전투인 듯
사우스마운틴을 공격한 북군은 남쪽은 프랭클린 군단, 북쪽은 번사이드 군단으로 총 2만 8천이 공격에 참가했다. 번사이드 군단의 공격 시간은 대략 14일 정오였으며, 공격은 D.H. 힐의 표현을 빌면, “착각과 망상에 가득찬” 것이었다. 분명 남군의 병력은 형편없이 열세했지만, 그 동안 전투로 인한 북군의 남군에 대한 불안감, 사우스마운틴의 지형, 워낙에 광범위하게 배치된 남군의 진형 등으로 인하여 정작 공격하는 북군은 산 곳곳에 남군이 도사리고 있는 줄 알고 머뭇거렸다.
예를 들어 프랭클린 군단의 1만 2천명이 진격한 크램튼 갭에는, 불과 500명의 남군이 1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프랭클린은 공격대형을 편성하는 데 무려 3시간을 허비했다. 한 남군은 “사자가 마치 겁먹은 쥐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라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터너스 갭과 폭스 갭 사이의 4킬로 남짓한 거리를 D.H 힐 사단이 지키고 있었는 데, 번사이드는 후커의 1군단을 터너스 갭으로 투입하였다. 후커의 3개 사단은 고갯길에서 남군 콜퀘트의 여단과 로저스 여단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오후에 롱스트리트가 존스 사단과 에반스 여단을 투입하여 남군 방어선이 완전히 뚤리는 것을 막았다. 지형의 어려움과 남군의 저항으로 인하여 결국 북군은 14일에 고갯길을 돌파하지 못했다.
폭스 갭에서는 힐 사단의 나머지 부대가 북군 레노 9군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전 9시, 북군 콕스 사단이 고갯길의 남쪽을 장악했지만, 부하들이 워낙 지쳤기 때문에 돌파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레노가 9군단의 나머지 병력을 투입하였지만, 때마침 도착한 롱스트리트 군단의 후드 사단에 의하여 역시 돌파는 실패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레노 군단장은 전사한다. 이 전투에서 북군의 사상자는 2천 3백, 남군의 사상자는 2천 8백이었다.
결국 14일에 북군이 점령한 고갯길은 남쪽의 크램튼 갭 뿐이었다. 이 고갯길의 상실은 하퍼스페리를 포위하는 맥클레란의 후방을 위협하기 때문에 기병장 스튜어트는 즉시 증원 병력을 보내어 북군이 진격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크램튼 갭을 접수한 것으로 그날의 성과로 만족하고 야영하기 시작하였다. 덕분에 맥크로우 사단은 북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퍼스페리를 공격할 수 있었다.
14일 자정 무렵에 남군은 사우스 마운틴의 모든 고갯길에서 철수하였다. 한편 잭슨은 14일에 하퍼스페리를 공격하기 위한 남군 대형을 배치하는 데 바빴다. 롱스트리트의 잔여병력과 힐의 부대는 샤프스버그로 이동하여 잭슨이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9월 15일, 아마 북버지니아군 역사상 가장 두렵고 불안했던 하루였을 것이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잭슨의 하퍼스페리 공략은 12일에 이루어져야 했지만, 이날까지 지연되었다. 사우스마운틴의 모든 거점은 북군에게 넘어갔고, 샤프스버그에는 힐과 롱스트리트의 병력 1만 7천 뿐이었다. 만약 하퍼스페리가 함락되지 않으면 이 병력으로 맥클레란의 8만명을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정오 무렵이 되자, 잭슨 부대로부터 전령이 도착하였다. “주님의 은총으로, 하퍼스페리와 그 요새가 함락됬습니다.” 잭슨은 하퍼스페리를 에워싸는 3방향의 고지에 50문의 대포를 배치하고 북군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수비대장 마일즈 대령이 이를 거부하자, 포격을 명령하였고, 1시간 뒤에 북군은 항복을 선언하였다. 사격을 멈추는 데 시간이 잠깐 지체되었는 데, 이 때 마일스 대령이 전사하였다.
하퍼스페리 주변 고지에 있는 잭슨장군
잭슨은 하퍼스페리에 진격하여 1만 1천의 북군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워낙에 상황이 시급했기 때문에 한가롭게 포로를 정렬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두 번다시 남부에 적대하지 않겠다는 선서만 하고 포로를 풀어주었다. 그 외 1만 3천정의 소총과 대포 73문의 대포와 200마차분의 보급품을 노획하였다. 전쟁 기간 연방군 단일 전투에서 항복한 숫자로는 최대 규모였으며, 2차대전 때까지 기록이 깨지지 않았다. 잭슨은 A.P 힐 사단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즉각 샤프스버그로 출발하였다.
하퍼스페리를 점령한 잭슨 장군
리 장군은 잭슨이 하퍼스페리를 함락시키자 전투를 결심하였다. 리는 인간으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조용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지만, 군인으로서는 투지가 넘치는 과감한 장군이었으며, 아무리 강력한 적을 만나도 항상 공격을 생각하며 열망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15일에 북군이 배치되기 시작했지만, 리는 퇴각할 생각은 커녕 북군을 역습하여 패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15일 오후가 되자, 북군의 대부분의 부대는 샤프스버그에 도착하여 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이 순간까지도 맥클레란은 2만도 안되는 남군을 쓸어낼 수 있었지만, 오후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다음날로 미루었다.
다음날인 9월 16일, 정오무렵에 잭슨의 부대가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얼리 사단을 필두로 오후에는 워커 사단이 도착하였다. 아직 맥크로우와 앤더슨, 존스 사단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서둘러서 샤프스버그로 행군하고 있었다. 너무나 힘든 행군이었기 때문에 잭슨 조차도 “매우 숨가팠다.”라고 인정하였다.
이날 중에라도 북군이 공격했으면 남군은 그나마 없는 병력에서 2,3개 사단이 빠진 상태에서 전투를 치렀을 테지만, 이번에는 맥클레란이 작전계획을 짜기에 바빴다. 9월 16일 하루를 그는 남군에 대한 작전계획을 짜면서 보냈다.
그리고 1862년 9월 17일, 미국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하루가 시작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