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부분이 북군의 주둔지. 붉은 선이 스튜어트의 행군로
안티탐 전투는 남북전쟁에 있어서 진정한 분기점이었다. 당시 연방정부는 최초의 대회전인 불런전투 이후 1년 만에 수세에 몰려있었다. 남부 수도에 대한 공격계획은 모두 좌절되었고 남군이 북부의 심장부로 진격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남부의 상승세를 차단하고 남군이 버지니아로 후퇴하게 만듬으로써 북부는 한숨 돌리게 되었다. 전쟁 초기 남부의 기습적인 상승세는 이로써 좌절되고 양군의 잠재력이 서서히 발휘되고 있었다.
보다 결정적인 것은, 안티탐 전투 종료 후 5일만인 1862년 9월 22일에 발표된 노예해방선언이었다. ‘1863년 1월 1일부터 남부연맹에 소속된 모든 노예를 해방한다.’는 이 선언은 실질적으로는 단 한명의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았다. 연방에 소속된 주, 심지어 북군의 점령지에서 조차 노예해방이 유보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연방에 적대하는 남부연맹에 있는 노예들만이 해방되었는 데, 이 조치를 취할 실제적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노예해방선언은 사실상 주의 권리문제와 관세문제로 인해 발생한 이 내전을 노예해방의 성전으로 바꿔버렸다. 미국독립전쟁 당시, 대륙군이 세계최강이던 영국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럽열강의 지원때문이었다. 남부연맹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열강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노예해방선언은 유럽열강의 지원을 정치적으로 차단해버렸다. 이미 노예를 해방시킨 유럽의 국가들이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에 뛰어들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 절묘한 정치적 노림수를 위해서 링컨은 발표의 시기를 재고 있었다. 하지만 연방군이 연거푸 패할 당시에는 이 선언을 발표하다가는 ‘궁지에 몰린 절박한 비명’으로 보일 수 있었다. 안티탐 전투는 북부에게 선언을 할 기회를 부여하였고, 유럽의 개입을 차단해버렸다. 그리고 북부의 무서운 잠재력이 발휘될 기회를 주었다.
안티탐 전투 후 포토맥 강을 건넌 리의 군대는 강 맞은편에서 숙영하고 있었다. 전역 초기에 발생했던 탈주병들과 낙오병들을 수습하면서 군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맥클레란의 북군은 메릴랜드주에서 광범위하게 숙영하면서 리를 추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전투의 피로를 달래듯, 양군은 포토맥 강 너머에서 여유롭게 숙영하고 있었다.
사령부에 귀환하는 스튜어트
10월 6일, 리는 스튜어트 장군을 사령부로 불렀다. 현재의 소강상태에서, 리는 전면적인 공격은 어렵지만 기병정찰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당시 북군의 보급로는 2개의 철로였는 데, 북쪽의 컴버랜드 철도와 남쪽의 볼티모어 오하이오 철도였다. 리가 스튜어트에게 지정한 목표는 컴버랜드 철도의 챔버스버그 철교였다. 이 철교를 파괴하고, 가능한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보급물자를 노획할 것을 지시했다.
10월 10일, 스튜어트는 1800명의 정예를 뽑아서 정찰을 시작했다. 작전의 목적은 스튜어트만이 알고 있었다. 새벽 5시 반에, 남군 기병대는 포토맥강을 도하했다. 강 맞은편에 북군 정찰대가 있었지만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짙은 안개가 끼었기 때문에, 북군은 남군의 병력을 2500명이라 보고했다. 워싱턴의 전신수들이 손에 불이 나도록 전신을 보냈다.
강을 도하한 다음에, 스튜어트는 작전의 목표를 설명하였다. “우리는 지금 적진에 있다. 오직 승리만을 생각하며 공격과 방어 준비를 하라.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자는 지금 당장 버지니아로 돌아가라.” 기병대는 환호로 연설에 답했다.
행군 중에 수많은 북부 민간인들을 만났다. 스튜어트 기병대는 농부들의 말을 징발하였다. 마을마다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들을 갖고 오면서 남부연맹 화폐를 주고 왔다. 불행히도 북부인들에게는 쓸 일이 없었다. 한번은 마을 노인이 기병대에게 술을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좋은 브랜디를 연방군을 위해 빚었소” 노인은 설마 남군이 이렇게 북부 깊숙이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기병들이 웃으면서, “우리는 남군인데요.” 라고 하자 노인은 들고 있던 병을 떨어뜨리면서 손을 머리위로 들었다.
챔버스버그는 포토맥강에서 약 50킬로정도 떨어져 있었다. 어두워질 무렵, 스튜어트는 챔버스버그의 빛을 보았다. 부대장인 햄튼이 백기를 들고 시장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챔버스버그에는 팬실배니아의 주지사인 앤드류 커튼이 있었기 때문에, 남군과의 교섭은 주지사가 하였다.
주지사는 워싱턴의 국방상인 스탠튼에게 긴급전보를 보낸 뒤 남군에 항복했다. 남군은 시의 은행에 들이닥쳤지만 이미 돈을 안전하게 빼돌린 뒤였다. 남군은 모든 연방의 군시설을 파괴하였다. 무기상과 보급상을 불태웠으며, 6000정의 소총과 탄약들을 파괴했다. 이 때 파괴한 물자의 가치는 100만 달러에 달했다.
스튜어트는 존스의 기병대에게 철교를 파괴하도록 지시했지만 철제다리였기 때문에 횃불이나 도끼로는 방법이 없었다. 한참 남군이 애썼지만 파괴할 방법이 없었다.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에 기병대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심한 폭우로 인해 스튜어트는 걱정이 생겼다. 포토맥강이 범람하면 돌아갈 길이 막히기 때문이었다. 아침까지 뜬 눈으로 밤을 세운 스튜어트는 결심을 굳히고 공병장교인 블랙포드에게 말했다. “블랙포드, 혹시 내가 살아 돌아가지 못하면, 내가 왜 이길을 선택했는 지 사람들에게 말해주게.”
“적군은 내가 건너왔던 포토맥강 서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 길이 가장 빠르거든. 북군은 모든 도하점을 차단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걸세. 북군은 우리가 3배나 먼길을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거야. 이것이 내가 동쪽길을 선택한 이유일세”
블랙포드가 회고하기를, 이 말을 전하면서 스튜어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고 한다. 폭우로 인한 기습적인 복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스튜어트는 귀환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은 것이다. 스튜어트는 혹시 부대가 전멸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만용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선택임을 알아주기를 원한 것이다.
10월 11일 아침, 스튜어트는 동쪽 캐쉬타운으로 떠났다. 케티즈버그에서 불과 10킬로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캐쉬타운에서 서남쪽인 해저스타운으로 행군하여 추격병을 속인 뒤, 남쪽으로 곧장 내려가 에미츠버그로 향했다.
이 무렵 워싱턴은 발칵 뒤집혔다. 북군 총사령관인 핸리 할렉은 맥클레란에게 “단 한명도 버지니아로 살려 보내지 말 것”을 요구했다. 맥클레란은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임을 보고했다. “휘하의 모든 기병대를 투입했고, 적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포토맥강 서쪽에 6개 연대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포토맥강 동쪽에 8개 연대와 포병대를 배치했기 때문에, 스튜어트가 빠져나갈 길은 없어 보였다.
에미츠버그와 게티즈버그 사이의 길에는 북군 필라델피아 창병대가 정찰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시기에는 드물게 창병대가 존재했다.) 오후 4시에 일부 정찰병들이 남군의 후미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정찰대가 남군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당시 남군은 2,3필의 말을 갖고 다니면서 말이 지치면 바뀌타면서 행군했다.
에미츠버그에서 10킬로 떨어진 우드스보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졌다. 어둠 속을 행군하는 중에 남군 기병대는 어느 북군 장교를 만났다. 북군 장교가 지나가는 행렬을 보고 말하기를 “비켜! 비켜! 나는 79펜실베니아 보충대의 장교다. 급한 일이다!”
남군은 그 장교를 에워쌌다. “너네 장교 누구야!” “전데요?” “빨리 이놈들 비키라고 해! 급한 일이라니까!” “알겠습니다.” 스튜어트가 대답한 뒤, 부하들에게 몸수색을 지시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데요”
“너 누구야!”
“아무도 아닌데요.”
“저 장교는 누구야!”
“스튜어트 장군”
“..뭐?”
“남부연맹의 기병대 소장, 젭 스튜어트 장군”
그제서야 그 눈치없는 북군 장교는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0월 11일의 야간행군은 매우 고되고 힘든 상황이었다. 2일 동안 철야로 행군하는 동안, 남군은 너무나 지친 상태였고 말에서 잠을 잤다. 코고는 소리가 대열에서 요란하게 들렸다. 남군은 행군 중에 볼티모어 오하이오 철도를 만나자 전신줄을 자르고 철로에 장애물을 올려놨다. 이제 강까지는 24킬로미터 남았고, 북군 기병대가 턱 밑에까지 쫓아왔다.
10월 12일 아침이 되자, 남군은 헤이츠타운에 도달했다. 이제 강까지는 20킬로. 남군 기병대는 속도를 유지하면서 마을을 지나갔다. 스튜어트는 북군 기병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플레스톤의 기병대와 스톤맨의 기병대가 서쪽과 동쪽에서 추격한다는 것을 알았다. 남군은 이들 사이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아침 8시, 북군 추격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플레스톤의 기병대가 24시간 동안 철야로 추격하여 남군을 포착한 것이다. 플레스톤은 번번히 남군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지만, 풀레스빌에서 마침내 남군을 발견했다.
당시 남군은 챔버스버그에서 노획한 북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 데, 스튜어트는 플레스톤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돌격을 명령했다. 그 기세에 눌렸는 지 북군은 몇발 쏘기 전에 도주해버렸다. 남군의 손실은 다친 말 한필이었다. 서쪽으로 약 2킬로 정도 추적한 남군은 마침내 포토맥강을 보게 된다.
남군 기병의 선봉은 로버트 리 장군의 아들 루니 리 준장이었는 데, 너무 기쁜 나머지 본대로 돌아와 말 위에서 공중제비를 했다. 포토맥 강의 도하점은 화이트 여울목이었는 데 여울목을 내려다모는 채석장에서 연방군이 참호를 파고 있었다. 스튜어트가 조심스럽게 정찰한 결과, 현 상황에서는 도하가 불가능했다.
스튜어트는 루니 리에게 현 상황을 타개할 것을 지시했다. 주력부대가 추격대의 위협에 대처하는 동안, 리는 대포를 끌고 와서 북군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시간은 단 15분으로, 15분 후에는 지체없이 공격할 생각이었다.
15분 뒤, 북군이 항복하지 않자, 리는 2문의 대포를 채석장을 향해 발포하면서 기병을 진격시켰다. 남군이 공격하는 그 순간, 북군은 흰기를 내걸고 채석장에서 도주했다. 전투없이 여울목이 남군의 손에 들어왔다.
신속하게 기병대의 도하가 이루어졌다. 리와 스튜어트는 여울목에서 후위를 맡은 버틀러 대령이 오기를 기다렸다. 부대가 거의 도하가 끝나고, 북군이 오고 있는 데 아직 버틀러는 오지 않았다. 스튜어트는 후위가 전멸했다고 생각했지만, 블랙포드 대위는 자신이 직접 가보겠다고 했다. 스튜어트는 블랙포드 역시 살아돌아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블랙포드 대위는 버틀러의 부대를 발견했다. 버틀러는 북군 선두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스튜어트 장군께서 즉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지금 대포가 진흙에 빠졌는 데 버릴 수 없다.” “대포를 버리고 따라오십시오.” “잠깐 기다려봐.”
버틀러의 부하들은 말을 죽어라고 채찍질 해서 간신히 포를 빼는 데 성공했다. 연방군의 엄청난 사격 속에서, 버틀러의 부대는 강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환호 속에 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했다. 스튜어트는 다시 한번 북군 전체를 선회하고 남군에 복귀했다.
스튜어트가 원정 중에 노획한 말은 1200필로, 기병 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양이었다. 30명의 시장, 군수, 읍장들을 사로잡았고, 남군 장군과의 포로교환에 이용했다. 3일 동안 200킬로가 넘는 거리를 주파했으며, 그중 130킬로를 하루에 주파했다.
스튜어트는 7일전투에 이어 두 번째로 북군 전체를 선회하였다. 비록 주요목표였던 챔버스버그의 철교를 파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양군의 교착상태에서 행한 이 대담한 작전은 남부의 사기를 한층 더 고취시켰다.
링컨이 이 보고를 받았을 때, 누군가가 물었다. “맥클레란을 어떻게 하실겁니까?”
이에 대해 링컨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말이지, 3번 돌면 술래가 나가는 게임이 있었네. 스튜어트는 맥클레란을 2번 돌았어. 1번만 더 돌면, 맥클레란은 아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