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초반
전투는 날이 밝는 대로 시작되었다. 17일 아침에 리의 군은 2만 5천에 134문의 대포를 갖고 있었다. 하퍼스페리에서 오는 증원군이 모두 도착해도 4만이 좀 넘는 정도였다. 북군은 프랭클린의 6군단을 제외하고는 전부 전장에 있었으며, 7만 5천에 240문의 대포를 갖고 있었다. 최초의 공격은 오전 5시 반에 시작되었으며, 후커의 1군단이 선봉으로, 해거스타운 거리를 통해 북쪽에서 시작되었다. 목표는 남군 좌익의 중심인 던카드 교회였다. 후커의 병력은 3개 사단 12,500명에 40문의 대포였고, 잭슨의 병력은 2개 사단 5천 5백명에 16문의 대포가 있었다. 더블데이 사단이 후커의 우측, 리켓츠 사단이 좌측에 포진한채 동쪽 숲으로 공격하고, 미드의 사단은 예비대였다.
잭슨의 2개 사단은 로튼과 존스 사단으로 서쪽 숲에서 옥수수밭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얼리여단을 포함하여 4개 여단을 예비대로 하였다. 로튼 사단은 이웰이 지휘하는 사단이었고, 존스 사단은 잭슨이 지휘하던 사단이었다. 로튼이 오른쪽, 존스가 왼쪽이며, 스튜어트의 기병대가 가장 왼쪽에 있었다.
북군이 옥수수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남군 최좌익에 배치된 스튜어트의 4문의 기병 포대 (팰함 대위가 지휘)와 스테판 리가 지휘하는 4개 포병대대 (대포 50문) 가 던카드 교회의 거점에서 북군을 포격하였다. 연방군의 포대는 북쪽 숲의 9개 포병대대와 3킬로 떨어진 안티탐 천 동쪽의 4개 포병대대의 20파운드 패럿포였다. 스테판 리가 ‘지옥같은 포격전’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양측의 사상자는 엄청났다.
남군이 포진한 지형은 상당히 좋은 지형이었다. 북군을 공격할 수 있는 양호한 시야를 제공했으며, 적절한 포격지원이 가능하도록 군데군데 언덕이 있었다. 북군의 공격대오에 발사된 최초의 포격은 16명을 살상했다. 당시 옥수수밭은 사람키보다 높았는 데, 남군이 총검을 찬 채 숨어있었다. 후커는 먼저 포격으로 옥수수밭을 뒤흔든 다음에, 보병을 진격시켰다. 양측의 사격으로 옥수수가 수확하듯이 썰렸다.
미드의 세이무어 1여단은 동쪽 숲으로 진격하여 남군 워커 장군의 앨리버마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 혼성 여단과 교전하였다. 포대의 도움으로 워커여단이 북군 세이무어 여단을 밀어내자, 리켓츠 사단이 옥수수밭으로 들어갔고, 역시 포격을 받았다. 북군 두레이 여단이 직접 남군 더글라스 여단을 사격하였다. 300미터 거리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증원병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북군 두레이 여단은 후퇴하였다.
북군 두레이의 증원병력은 하트서프와 크리스티안의 여단으로, 전장에 나타나는 데 애를 먹었다. 하트서프는 포격에 부상을 입고, 크리스티안은 전장공포증으로 인해 말에서 내려 후방으로 도주하였다. 병력을 재집결시켜 옥수수밭으로 진격하자, 앞서 전진한 부대와 동일한 포격을 받게 되었다. 숫적으로 우세한 북군이 옥수수밭으로 들어가자, 남군 헤이의 루이지애나 호랑이 여단이 옥수수밭으로 들어가 북군을 동쪽 숲으로 밀어내었다. 12매사추세츠 연대는 67프로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날 투입한 연대 중 최대의 사상율이었다. 이 연대의 쿠크 대위는 루이지애나 타이거의 공격이 “전쟁기간 중 가장 격렬한 공격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루이지애나 타이거들은 북군이 3인치 포대를 끌고 남군을 직접 사격해 오자 후퇴했으며, 500명 부대원 중에 323명의 사상자를 냈다.
옥수수밭에 비해서 서쪽 숲에서 북군의 공격은 좀더 성공적이었다. 더블데이 사단의 기본 여단(강철의 여단)은 교차로를 넘어 존스의 부대를 공격하였다. 스타커 여단의 1150명의 돌격으로 인해 정지했으며, 10미터 거리에서 사격을 주고받았다. 스타커가 치명상을 입자, 남군은 후퇴하였다. 북군은 던카드 교회를 향해 계속 진격하였는 데, 남군의 방어선에 구멍이 생겼다.
오전 7시, 맥크로우와 리처드 앤더슨 사단이 도착하였다. 7시 15분, 리는 조지 앤더슨의 조지아 여단을 우익에서 차출해서 잭슨에게 보냈다.
7시에 후드의 2천 3백명의 사단이 서쪽 숲으로 진격하여 전진하는 북군을 다시 옥수수밭으로 밀어붙였다. 텍사스 사단은 격렬하게 밀어붙였는 데, 당일날 아침에 조리한 아침식사를 먹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식사가 북군의 공격으로 방해되자, 그들은 매우 분기탱천하였다. 후드 사단은 남동쪽에서 온 D.H 힐의 사단과 서쪽 숲 뒤편에 있던 1,100명의 얼리여단의 도움으로 북군을 밀어냈다. 후드 사단은 60프로의 사상율을 냈지만 1군단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참모장교가 부대의 위치를 묻자, 후드는 옥수수밭을 가리키면서 “저기 모두 누워있다.”라고 하였다.
후커군단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2시간동안 2천 5백의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하였다. 옥수수밭은 30에이커의 면적에 시체가 빼곡하여, 땅을 밟지 않은 채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옥수수밭에서 아침에 15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그 무렵, 맨스필드의 12군단 8천 5백명이 후커를 지원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맨스필드의 군단의 절반은 신병이었으며, 맨스필드 역시 경험이 부족하였다. (군단장이 된지 만 2일이 되었다.) 맨스필드는 자신의 부대가 총격전에서 이탈할까 불안하여, 부대를 극도로 밀집시켰다. 당시 선열대형은 2대오가 정상이었는데, 맨스필드는 무려 10대오를 편성하였다. 맨스필드 군단이 동쪽 숲으로 들어서자, 그 지역에 밀집된 남군 포대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맨스필드가 남군 저격수에게 저격당하였다. 윌리엄스가 12군단을 인수하였다. 신병들인 맨스필드의 1사단은 힐의 지원을 받은 후드의 방어선으로 더 전진하지 못했고, 그린의 2사단은 힐의 맥크래 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후드의 방어선을 압도하였다. 후드 사단은 전투의 시작지점인 서쪽 숲까지 밀려났다. 그린 사단은 던카드 교회까지 밀어붙이고, 스테판 리의 포대를 후퇴시켰다. 북군이 교차로 동쪽의 대부분의 지점을 장악하였다. (그린 장군은 훗날 게티즈버그에서 1개 여단으로 컬프스힐을 사수한다.)
동쪽 숲에서 전투하는 북군
후커가 1군단의 잔여병을 집결하여 공격하고자 시도했지만, 남군 저격수가 후커의 백마를 보고 장군을 저격하여 중상을 입었다. 1군단은 미드에게 인수되었는데, 리켓츠 사단장도 중상을 입었다. 후커가 사라지자 그 지역에서 1군단과 12군단을 모두 집결할 수 있는 장군도 사라졌다. 그린사단은 서쪽 숲의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던카드 교회에서 후퇴하였다.
남군의 좌익을 우회하고 맨스필드의 공격을 지원할 목적으로, 섬너의 2군단이 2개사단을 이끌고 7시 20분에 나타났다. 세지윅의 5천 4백명의 사단은 원래 남쪽의 번사이드의 공격을 지원할 예정이었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그들은 2군단의 프렌치 사단과 분리되어 오전 9시, 적절한 지원이 없는 채 서쪽 숲으로 진입하였다. 마침 맥크로우와 워커 사단이 전장에 도착하였고, 리는 즉각 이들을 잭슨의 부대로 보냈다. 워커 사단은 후드의 텍사스인들과 임무를 교대하여, 맥크로우 사단과 얼리 여단과 함께 세지윅을 세 방향에서 공격하였다. 세지윅의 사단은 2천의 손실을 내고 무너졌다. 잭슨은 던카드 교회에서 포격받는 세지윅 사단을 보며 “신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시다.”라고 말했다.
오전 10시, 12군단의 2개연대가 남군 우익에서 워커사단과 맞부딪쳤다. 옥수수밭과 서쪽 숲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북군 15개 포대가 북쪽 숲에서 서쪽 숲의 남군에게 포격을 퍼부었다. 그린 사단의 2개 여단에 의해 워커 사단은 밀려나고 북군이 서쪽 숲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너무나 지쳐있어서 더 이상 공격하기가 곤란했다.
이 무렵, 잭슨은 서쪽 숲 근처에서 복숭아를 먹으면서 전장을 바라보았다. 주치의인 맥과이어 박사가 상황을 보고하면서 북군의 공격에 돌파될 것을 우려하였다. 동쪽 숲과 옥수수밭을 지나는 푸른 군복의 행렬을 바라보면서 잭슨은 이렇게 말했다. “맥과이어 박사, 북군은 최악의 행동을 했네”
전투가 한창일 때, 던카드 교회의 잭슨 장군
여기서 아침 전투가 끝났다. 양측의 사상자는 무려 13,000이었으며, 북군 2명의 군단장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북군 2개 군단이 거의 전투불능 상태가 되었으며, 남군 잭슨 군단도 1000명 남짓한 병력이 간신히 전선을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잭슨의 진지에 투입된 북군의 병력은 무려 3만이 넘었으며, 100문의 대포가 동원되었다. 이에 맞선 남군은 리가 중앙과 우익의 부대와 하퍼스페리에서 도착한 증원군을 모두 합쳐도 2만이 안 되었으며, 대포가 40문이었다. 또한 죽거나 다친 장군이 남북군 합쳐서 15명이었다.
전투 중반
북군의 아일랜드 여단. 아일랜드인들은 남군과 북군에서 공히 전투잘하기로 유명했다.
정오에, 전투는 남군 중앙으로 이동하였다. 섬너는 세지윅 사단으로 아침 공격을 하였고, 프렌치 사단은 섬너와 연결이 끊어진채 남쪽으로 향했다. 섬너의 참모가 프렌치에게 서쪽 숲의 처참한 전투를 설명하고, 남군의 관심을 중앙으로 유도하라고 지시한다. 프렌치는 남군 중앙의 침하된 도로에서 힐 사단과 부딪치게 되는 데, 힐 사단은 3개 여단 2천 5백명이으로, 오전 전투로 인해 난타당했다. 프렌치 사단은 5천이 넘었다.
침하된 통로는 롱스트리트의 전선 중앙으로 돌파될 경우 매우 위험하였다. 하지만 힐의 부대는 침하된 도로의 특성을 활용하여 강력한 방어진을 편성하였다.
프렌치는 여단 단위의 공격을 연속으로 하였는 데 시작은 9시 반이었다. 첫 번째 여단은 웨버장군의 신병들로, 엄청난 사격에 와해되었다. (양측 모두 아직 포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두 번째 공격에서 보다 신병들인 모리스 여단이 공격했지만, 로저스 여단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세 번째 공격은 킴볼의 여단으로 3개 연대의 정예들이었지만, 역시 침하된 통로를 넘지 못했다. 프렌치는 5천 7백의 부하 중에 1750명을 한시간만에 상실하였다.
롱스트리트 장군과 포대
10시 반이 되자, 양쪽에서 증원군이 왔다. 리장군은 마지막 예비대인 리처드 앤더슨의 사단 3천4백명을 보내서 힐의 전선을 보강하고 오른쪽의 측면 공격을 방어하였다. 동시에 북군 리차드슨의 4천명이 프렌치의 좌익에 도착하였다. 섬너의 마지막 사단인 리차드슨은 맥클레란이 예비대로 지정해논 사단이었다.
침하된 도로에 대한 네 번째 공격은 매거 준장의 아이리시 여단이었다. 특유의 녹색깃발을 들고, 군종신부인 코비 신부가 기도문을 암송하는 가운데, 여단은 로마 카톨릭을 위해 죽을 결의를 하였다. 아일랜드 인의 대부분은 먼저 공격했던 부대와 같은 운명을 맞았는 데, 540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리처드슨 장군이 직접 칼드윌 여단을 정오 무렵에 투입하면서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앤더슨 사단은 사단장이 중상을 입은 뒤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힐 사단의 핵심 지휘관인 조지 앤더슨 장군과 앨라배마 6연대의 고든 대령도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고든은 4번의 총상을 입고, 5번째 탄알이 얼굴을 관통하자 쓰러졌다. 모자에 파묻혀 피로 질식할 뻔했는 데, 총알이 모자를 관통해서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지휘관들의 손실로 인해 남군의 대오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칼드윌의 여단이 남군의 우익을 선회할 때, 바로우 대령의 350명의 뉴욕연대는 남군 전선의 약점을 포착하고 침하된 도로를 내려다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 언덕에서 남군대열에 종사를 퍼부을 수 있었다. 61뉴욕연대의 한 하사는, “우리는 우리에 있는 양떼를 사냥하듯 사격했다. 총알이 빗나가도 튕겨서 누군가가 맞았다.” 전선을 회전시켜 이 위협에 대처하고자, 로저스 장군이 지시했지만 라이트풋 대령( 고든의 부대를 인수한 지휘관) 에 의해 잘못 이해되서, 부대를 전선에서 후퇴시켰다. 남군은 샤프스버그로 퇴각하고 침하된 도로는 북군에게 넘어갔다.
리차드슨 부대는 추격을 시도했지만 롱스트리트가 집결시킨 포대에 막혀 정지하였다. 힐 장군이 긁어모은 200명의 남군이 침하된 도로 주변의 북군 좌익을 선회하였다. 비록 뉴햄프셔 5연대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리처드슨은 자기 사단을 침하된 도로 맞은 편의 능선 너머로 퇴각해야 했다. 리처드슨 사단의 손실은 1000명이었다. 발로우 대령은 중상을 입고, 리차드슨 본인은 치명상을 입었다. 핸콕이 리처드슨 사단을 인수하였고, 아직 미숙했던 핸콕은 사단의 공격기세를 감소시켰다.
침하된 도로에서의 전투는 9시 반에서 오후 1시까지 벌어졌으며, 이 도로는 나중에 ‘피의 통로’라고 불리게 된다. 700미터 남짓의 길에서 5,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북군 3000, 남군 2600) 현재 북군이 남군 진지의 중앙에 거점을 만들었기 때문에, 만약 1만의 보병과 3천5백의 기병을 보유한 포터의 5군단을 투입한다면, 리의 부대는 둘로 갈라지고 붕괴될 것이다. 프랭클린의 6군단도 12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막 도착했기 때문에 도합 2만 5천의 북군은 리의 군대를 여기서 궤멸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선임군단장인 섬너가 진격을 하지 말 것을 명했다. 프랭클린은 맥클레란에게 직접 간청했지만, 섬너의 결정을 지지하고, 프랭클린과 핸콕의 군단은 현 위치를 사수하도록 하였다.
늦은 오후에, 포터 군단장이 사이커 장군의 간청을 받아들여, 사이커의 2사단으로 중앙에 공격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하지만 맥클레란이 포터에게 “장군, 공화국 최후의 군의 마지막 예비대를 명령할 사람이 나라는 것을 기억하시오”라는 말과 함께 중지시켰다. 결국 또다른 기회가 날라갔다.
전투 후반
번사이드 다리를 사수하는 툼즈 여단의 남군
원래 계획에 따르면 번사이드의 9군단은 후커의 1군단을 지원하는 역할로, 남군의 주의를 끄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번사이드의 공격명령은 오전 10시까지 하달되지 않았다. 준비단계에서 번사이드는 이상하게 소극적이었다. 당초 1군단과 9군단을 모두 지휘할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9군단만을 지휘하게 되었는 데 이로 인해 멕클레란에게 불쾌한 감정이 있었다. 소극적인 저항으로, 번사이드는 레노(사우스 마운틴에서 전사)와 그 후임으로 콕스를 군단장으로 임명하고, 명령을 그를 통해 수령하도록 하였다.
번사이드의 9군단은 4개 사단 12,500명과 50문의 포를 갖고 있었다. 9군단의 전방의 남군은 대부분 리의 조치로 좌익으로 이동하였다. 아침에 데이비드 존스 사단과 워커 사단이 남측을 방어하고 있었는 데, 10시에 워커 사단 전체와 조지 앤더슨의 여단이 이동하였다. 존스 사단은 3000명의 병력과 12문의 포를 갖고 번사이드와 대치하였다. 얄팍한 4개 여단이 샤프스버그 인근의 능선에 배치되었고, 400명의 툼스장군 지휘하의 2개 연대만이 2개 포대와 함께 안티탐 천의 로스바하 다리를 3방향에서 사수하고 있었다. 이 다리는 나중에 번사이드 다리로 알려지게 된다. 다리는 돌파하기 어려웠다. 다리 서안에 30미터 높이의 둔덕이 있었고, 저격수에게 좋은 위치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번사이드는 충분한 조사를 하지 않았고, 공병대가 찾아논 남쪽의 도하점과 다리 이외에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안티탐 천을 도하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다리를 접수할 것을 명령했고, 남쪽에서 발견한 도하점에 부하들을 보냈다. 남쪽의 도하점은 둔덕이 너무 높아서 도하가 어려웠다.
코크의 오하이오 여단이 스터기스 사단의 지원하에 다리에 대한 돌파를 시도하는 동안 카나와 사단의 나머지 부대와 로즈맨 사단은 수풀을 헤치면서 안티탐 개울을 3킬로 내려간 스내블리 여울로 이동하였다.
크록의 다리 공격은 11코네티켓 연대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5분의 전투에서 139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연대의 3분의 1에 해당하며 지휘관인 킹스버리도 치명상을 입었다. 크록의 나머지 부대의 공격은 신통치 않았고, 로즈맨의 사단과 연결이 끊어지자 번사이드와 콕스는 직접 스터기스의 한 개 여단에게 공격을 지시했다. 메릴랜드 2연대와 뉴해프셔 6연대로 이루어진 이 부대의 공격은 남군 저격수와 포대에 의해 좌절되었다.
어느덧 정오가 되자 맥클레란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이 보였다. 연속적인 전령을 보내어 번사이드의 공격을 독촉했다. “그 친구한테 1만이 죽어도 좋으니 돌격하라고 해.” 맥클레란이 한 전령에게 한 말이었다.
다리를 장악하기 위한 3번째 시도는 12시 반에 스터기스의 나머지 여단인 페레로에 의해 행해졌다. 51뉴욕연대와 51팬실배니아 연대로 이루어진 이 여단은 적절한 포대 지원을 받았으며, 성공하면 여단장이 위스키를 쏘기로 한 약속에 고무되어, 다리를 돌파하여 능선을 점령하였다. 노획한 포대를 이용하여 20미터 남짓의 지근거리에서 남군과 포격전을 하였다.
"성공하면 위스키 준다!" 라는 말에 돌파를 성공한 뉴욕인들
오후 1시, 남군의 탄약이 거의 떨어졌고 로드맨의 사단이 스내블리 여울을 건너 측면에서 오고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툼스는 후퇴를 명했다. 툼스의 조지아 연대는 북군에게 500명의 손실을 가했고, 자신들의 손실은 160명이 안되었다. 무엇보다도 번사이드의 공격을 3시간을 저지했다.
번사이드의 군은 다리를 확보했지만, 병사들과 포대, 보급마차의 이동으로 정체가 심하였다. 다시 공격대형을 펼치는 데 2시간이 걸렸다. 리는 그동안 남군의 우익을 강화하였다. 비록 좌익의 보병을 차출하지는 않았지만, 가능한 모든 포대를 동원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대처하기 위해 리는 잭슨에게 적의 우익을 선회하여 공격하도록 명했다. 북군의 주의를 끌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워낙에 지형이 협소했기 때문에, 스튜어트가 정찰했을 때 북군의 포격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스튜어트는 적의 우익 선회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북군은 힐 사단 2000명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번사이드의 계획은 남군의 우익에 쇄도하는 것으로 샤프스버그를 넘어 리의 퇴로인 보텔러 여울목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오후 3시, 번사이드는 스터기스 사단을 예비로 남기고 8000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대부분 팔팔한 상태였고 22문의 대포가 근접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북군의 공격은 존스의 얄파한 방어선을 압도했다. 샤프스버그에서 200미터 떨어진 무덤언덕까지 밀려났다. 공격의 선봉은 뉴욕 79연대의 ‘하이랜더’들이었고, 좌측에서 로즈맨의 사단이 공격해오고 있었다. 로즈맨 사단의 선봉은 페어차일드 대령이 지휘하는 뉴욕 9연대의 주아브들이었다. 샤프스버그 시내는 완전히 공황상태로, 존스 사단의 후퇴하는 남군으로 인해 미어터졌다. 유일하게 부대상태를 유지한 여단은 툼스 여단으로, 단지 700명 뿐이었다.
바로 그 때, 북군의 서쪽에서 푸른 군복을 한 부대가 나타났다. 리가 참모에게 부대의 소속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남부연맹기와 버지니아기가 보입니다!, A.P 힐입니다!”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구 순간에 A.P 힐 사단이 전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오후 3시 반에 A.P 힐 사단이 도착하였다. 힐의 3개 여단 2000명은 툼스의 우측으로 이동하여 역습을 준비하였다. 10분 뒤, 그레그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여단이 로즈맨의 좌익을 강타했다. 코네티켓 16연대는 신병으로, 이제 막 입대한 지 3주가 지났다. 185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선이 무너졌다. 로즈 아일랜드 4연대는 우측에서 나타났지만, 옥수수밭에 가려져서 남군의 위치와 숫자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힐 사단은 하퍼스페리에서 노획한 북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불시의 기습으로 로즈 아일랜드 연대도 무너졌고, 앞서가던 코네티켓 8연대는 고립되었다. 로즈맨 사단은 안티탐 천 옆의 고지까지 후퇴하였다. 카나와 사단 소속의 연대들이 반격을 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9군단은 20퍼센트의 손실을 입었지만, 아직 남군을 2배나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측면의 공격으로 자신감이 사라진 번사이드는 부대를 안티탐의 둔덕으로 후퇴하도록 하였고, 증원병력과 포대를 요청하였다. 맥클레란은 단지 1개 포대를 보냈다. “나는 보병이 없으니 더 보낼 수 없다.” 하지만 맥클레란은 2개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단지 리가 대규모 역습을 가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이들을 보내지 않았다. 번사이드의 군은 남은 시간 동안 그들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장악한 다리를 확보하는 것에 허비했다.
모든 전투가 오후 5시 반에 종료되었다. 북군의 사상자는 12,400명, 남군의 사상자는 10,300명 정도였다. 북군은 전투 부대의 4분의 1, 남군은 3분의 1에 해당하는 손실이었다. 1862년 9월 17일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하루였다. 2차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D-Day는 안티탐 전투 중 북군의 손실에도 미치지 못한다.
리는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북군의 공격을 한번 더 격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7일 저녁 때 리는 참호를 파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8일, 북군은 증원군을 받았는 데 전투를 치르지 않은 2개 군단과 증원군을 합치자 현재의 남군을 초과했다. 하지만 맥클레란은 여전히 남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북군이 공격해 오지 않는 다면 남군이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18일 저녁, 리는 보텔러 여울목을 통해 부대를 버지니아로 철수하도록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