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인공 스튜어트 장군
해리슨랜딩까지 후퇴를 마친 뒤, 맥클레란은 증원을 요청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북군의 병력은 10만에 육박했지만 그는 증원이 없이는 진지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맥클레란이 움직이지 않는 동안, 리는 북버지니아군의 지휘체계를 정비할 기회를 가졌다. 7일전투에서 보여준 지휘 상의 미숙함을 없애기 위한 작업이었다.
우선 7일전투에 참가한 사단장 중에 지휘에 실패한 장군들, 매그루더나 홈즈, 후거 등은 좌천시키거나 다른 지역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롱스트리트와 D.H 힐, A.P 힐처럼 전투에서 능력을 보인 장군들을 그 빈자리에 배치하였다.
잭슨의 경우, 7일전투에서의 지휘만 놓고 본다면 그는 매우 부족한 장군이었다. 만약 잭슨이 롱스트리트나 힐같은 감투정신과 능력을 발휘했다면 7일전쟁은 다른 양상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7일전투 전에 보인 세넌도어 계곡 전투에서 그는 매우 탁월한 용병술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리는 잭슨을 믿어보기로 하였다. 현재의 실패보다는 과거의 성공에서 보인 능력을 신뢰하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작업은 각 사단장의 독립성을 제거하고, 휘하에 군단을 편성하여 군단장을 통해 작전을 수행하게 하였다. 리는 북버지니아군을 두개 군으로 편성하고, 각각 롱스트리트와 잭슨에게 맡겼다. 원래는 잭슨에게 7개 여단, 롱스트리트에게 28개 여단을 맡겼다. 이는 일단 잭슨을 신뢰하되, 그와는 별도로 7일전투에서의 책임을 물어 지휘하던 병력을 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비대칭적인 편성은 A.P 힐이 롱스트리트와 마찰을 빚고, 리가 잭슨의 지휘로 힐 사단을 전환함으로써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
해리슨랜딩에서 맥클레란이 증원군을 요청하는 동안, 리치먼드 북쪽에서 잭슨이 세넌도어 계곡에서 농락했던 3개 북군부대는 통합하여 ‘버지니아 군’을 편성하였다. 6만 3천 병력으로 전체 사령관은 서부에서 활동하던 존 포프 소장이었다.
포프는 미주리 지역에서 북군을 지휘했는 데, 뉴마드리드와 10번 섬에서 남군을 격파하고 테네시주 멤피스 지역까지 미시시피강의 수로를 장악하였다. 이 공로와 그가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라는 것을 고려하여 링컨은 포프를 ‘버지니아 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신임 북군 사령관 존 포프
그러나 이 인사는 매우 잘못된 선택으로, 우선 버지니아군 3개 군단장 중 한명인 프레몬트가 즉시 사임하였다. 포프 밑에서는 지휘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취임식에서 포프는 서부의 북군에 비해 동부의 북군은 형편없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시작조차 하기 전에 부하들에게 공개적으로 경멸을 보인 포프는 곧 부하 전체에게 경멸을 받게 되었다.
특히 포프는 작전 지역인 북부 버지니아 전 주민을 대상으로 하여 ‘징발’을 받았다. 특히 게릴라가 활동한다고 의심되는 지역이나 북부에 적대적인 지역에 대해서는 공개처형도 행했다. 포프의 방식은 리를 격분하게 만들었고, 포프를 반드시 격파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였다. 포프는 리가 상대한 모든 북군 사령관 중에서 공개적으로 리가 적개심을 보인 유일한 장군이다.
포프의 군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동안, 맥클레란의 포토맥군은 해리슨랜딩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맥클레란의 거듭된 증원요구에 지친 링컨 행정부는 맥클레란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기 보다는 차라리 군을 반도에서 철수시키기로 한 것이다. 북군은 이 때 철수한 지역을 3년 뒤에 10만의 병력을 상실하고서야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맥클레란 군이 철수하는 동안, 리는 잭슨의 2만 4천 병력을 북쪽으로 보냈고, 이어서 롱스트리트의 3만 병력을 보냈다. 만약 맥클레란의 9만 병력이 포프의 6만 병력과 합쳐지면 남군의 3배가 될 것이기 때문에, 리는 서둘러야 했다.
잭슨의 병력은 고든스빌에 도착하여 포프군을 정찰하였다. 워낙 북군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집결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잭슨은 북군의 반도 안되는 병력으로, 북군이 모두 집결하기 전에 기습을 하기로 결심했다. 8월 8일, 잭슨은 세다마운틴에서 뱅크스군과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계곡전투에서 쌓인 감정 때문인 듯, 뱅크스는 잭슨을 보자마자 공격을 시작했다.
세다 마운틴에서 뱅크스의 공격
잭슨군의 2개 사단은 큰 타격을 입었다. 뱅크스의 기세에 상당히 타격을 받았지만, 잭슨이 직접 스톤웰 여단을 인솔하고, A.P 힐 사단의 증원까지 받아서 뱅크스 군을 세다마운틴 너머까지 밀어붙였다. 이 전투에서 포프의 손실은 2천 4백, 잭슨의 손실은 1천 3백이었다.
세다마운틴 전투에서의 잭슨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스튜어트는 휘하 기병대를 각 개울목으로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피츠 리의 여단을 찾지 못했고, 참모인 노만 피츠 소령을 보내서 피츠 리에게 명령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이 명령서는 리 장군이 스튜어트에게 보낸 명령서로, 포프군을 공격할 계획을 자세하게 언급한 문서였다. 부관인 노만 대위를 보내고 스튜어트는 피츠 리와 합류할 수 있는 지점인 베디스빌 지역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이 때가 8월 17일이었다.
그런대 노만 피츠 대위가 명령서를 갖고 돌아다니다가 북군 기병대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베디스빌에서 자고 있는 스튜어트 일행에게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스튜어트는 포로가 되기 직전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당시 북군 지휘관은 상대방 남군이 스튜어트인 줄 모르고, 피츠 대위에게 “저 사람은 누구냐?”라고 물어봤다. 피츠 대위는 웃으면서 “정말 알고 싶소? 스튜어트 장군이오”라고 대답하자 북군 지휘관은 기겁을 하면서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이미 스튜어트는 숲속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원래 스튜어트는 뽐내기를 좋아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자신의 남군 군복을 스스로 ‘디자인’하였다. 붉은 안감의 회색 망토, 노란색 허리 장식띠, 공작 깃털을 단 모자, 옷깃에 단 붉은 꽃, 심지어 향수까지 뿌리고 다녔다. 이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깃털을 단 모자였는 데, 이번에 그만 그 모자를 뺐겨 버렸다. 스튜어트의 깃털 달린 모자는 북군에게 두고두고 비웃음 거리가 되었으며, 각 부대별로 돌아가면서 봤다.
스튜어트 모자 재현품
자신의 명예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스튜어트는 큰 굴욕을 느꼈지만, 상황은 스튜어트의 명예 실추보다 더 심각했다. 리 장군이 스튜어트에게 내릴 명령서가 북군에게 노획됬기 때문에, 포프는 자신의 위치의 취약성을 깨닫고 8월 18일자로 부대를 V자에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리 장군은 롱스트리트와 클락 마운틴에서 이 이동을 관측하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기회를 아쉬워했다. 8월 20일, 북군은 완전히 취약 지역에서 빠져나왔다.
리는 포프를 공격할 다른 계획을 세워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기병대의 정보가 필요했다. 스튜어트에게 명령을 하달하여, 우측으로 선회하여 라피단 강을 건너, 가능한한 북구느이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였다. 스튜어트는 절치부심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기병 정찰정도로는 만족하기 어려웠다. 해리스 라이츠 지역에서 뉴욕 출신의 북군 기병대를 격파한 뒤, 리 장군에게 포프의 후방으로 '원정‘을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7일전투에서 맥클레란의 군 후방을 돈 일이 있듯이, 이런 대담한 작전을 스튜어트는 종종 시도하였다. 8월 21일, 리는 스튜어트의 포프군 후방 침입을 승인하였다.
다음날, 스튜어트는 1500명의 기병과 2문의 대포를 가지고 포프의 군 배후의 카틀렛 역의 철교를 향해 진격하였다. 방해를 받지 않고 이 철교를 통해 라파핸녹 강을 도하한 뒤,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녁 쯤 되자, 포프의 사령부 근처에 도착하였다. 스튜어트는 로저 대위에게 몇 명을 붙여서 북군의 포로를 잡아오게 하였다. 북군의 포로를 통해 포프의 텐트의 위치를 파악한 뒤, 1500명의 기병에게 기습을 명령했다. 복수의 순간이 온 것이다.
‘반란군 함성’과 함께 포프의 사령부에 들이닥친 스튜어트는 3만 5천달러의 현금과 북군의 부대 위치가 표시된 지도, 명령서, 그리고 포프의 정복을 노획하는 데 성공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노획하고 불지르고 하는 동안, 북군 사령부는 쑥밭이 되었다. 스튜어트는 수백명의 북군포로와 함께 신속히 철수하였다.
포프의 사령부를 기습하는 스튜어트
스튜어트는 자신의 모자를 뺏긴 치욕을 포프의 정복을 노획함으로써 씻을 수 있었다. 포프의 정복은 리치먼드에 걸려서 길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물론 포프의 정복이 이번 작전의 목표는 아니었으며, 스튜어트는 북군의 작전지도와 명령서를 리장군에게 보냈다.
리장군은 북군의 위치와 함께, 맥클레란의 군이 반도를 떠나 포프와 합류하기 위해 증원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예상했던 바이지만, 구체적인 사실로 다가오자 리는 서둘러야 했다. 5만 5천의 남군으로 신속히 6만 3천의 포프군을 격파하지 못한 다면, 맥클레란의 9만명의 대군이 합류하게 될 것이다. 리는 다음 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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