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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소로스의 환투기 공격사- 일본을 농락한 끝에 마침내 승리하다

구름위 2013. 2. 2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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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스, '키코'로 일본 농락하다

 


  요즘 국내 기업들 사이에 '키코(KIKO)' 때문에 곡소리가 나고 있다. 정부가 4조원의 신용보증 대책을 내놓을 정도로 파생상품 키코의 피해는 엄청나다. 기획재정부는 키코라는 상품이 있는지를 올해 들어 알았다고 토로할 정도로 파생상품에 무지했다. 하지만 '키노'는 이미 십수년전 일본을 초토화한 바 있는 파생상품이다. 문제의 키코를 만든 원조는 다름아닌 조지 소로스였다.

 

  1995년 일본을 뒤흔든 소로스

 

  1995년 일본은 소로스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1994년 6월 달러당 100엔 선을 돌파한 이래 95~100엔대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일본 엔-달러 환율이 1995년 2월 말부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급작스레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3월 8일 도쿄 외환 시장에서 ‘마의 90엔 선’마저 거침없이 깨고 오후 장중 한때 88.75엔까지 폭등하며 일본 경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며칠 뒤 <월스트리트 저널>,<이코노미스트>,<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등이 밝혀낸 주범은 바로 소로스였다.

 

  소로스는 앞서 1994년 10월3일자 주간 <비즈니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달러화는 구매력 기준으로 볼 때 엔화에 대해 지나치게 평가 절하돼 있다”며 1995년부터 달러화가 강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했고, 실제로 달러화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1994년 말 소로스의 예언은 100% 적중하는 듯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그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고인플레에 대한 중산층의 대반란으로 집권 민주당이 참패하자, 종전의 저금리 정책을 고금리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미연준은 그해 11월15일 재할인 금리를 0.75%포인트 대폭 인상했고, 이어 1995년 2월 1일 또 한 차례 0.5%포인트 인상했다. 불과 두 달 사이에 금리가 1.25%포인트나 오른 것이었다. 고금리가 되자, 달러화는 당연히 초강세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고금리 정책은 소로스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일으켰다. 멕시코의 금융공황 발발이었다. 1994년 12월20일 멕시코 통화당국은 변동 환율제를 도입했다. 미국의 고금리 정책에 따라 본국으로 대거 환류하기 시작한 미국계 단기 투자 자본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변동 환율제는 불에 기름을 붓는 정반대 결과를 초래했다. 페소화는 곤두박질쳤고, 멕시코는 국가도산 위기에 몰렸다. 멕시코 붕괴를 방관할 수 없었던 미국은 더 이상 고금리 정책을 추진할 수 없게 됐다.

 

  며칠 뒤 또 생각지 못한 상황이 이번엔 일본에서 발발했다. 1995년 1월 17일 일본 고베(神戶)에서 5천400여 명이 죽은 ‘제2의 관동 대지진’이 발생한 것. 재해 복구를 위해 '저팬머니'가 일본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여러 돌출 상황은 국제환율 판도를 통째로 뒤바꾸었다. 미국이 고금리 정책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달러화 약세를 방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저팬머니의 일본 환류도 마찬가지 의미다. 실제로 달러화는 폭락하고, 엔화와 마르크화는 폭등하기 시작했다. 소로스의 달러화 사재기를 알고 있던 세계 금융계에서는 “이번에 소로스 일파가 크게 당했을 것”이라고 내심 고소해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언론 등 “이번에는 소로스 일파가 당했다”고 예단 보도하기도 했다.

 

  벼랑끝 위기 몰린 소로스, '녹아웃 옵션'으로 떼돈 벌어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 180도 달랐다. 소로스가 또 떼돈을 번 것이다.

 

  의외였다. 소로스는 분명 달러화 강세를 예상해 1994년말~1995년초 달러화를 사재기하는 동시에, 만약에 대비한 모종의 파생상품을 일본 수출업자와 금융기관 등에 대거 팔았다.

 

  1995년 초 당시 국제 외환 시세는 몇 달째 달러당 95엔~100엔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달러 강세로 기본적으로 엔화가 달러당 100엔대 선으로 오를 것으로, 만약 떨어지는 사태가 생기더라도 달러당 95엔 선 전후에서 멈추지 더 이상 폭락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소로스는 예기치 못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파생상품을 개발했다. 옵션료를 일반 옵션상품보다 낮게 받는 대신, 엔고가 달러당 94엔 선까지 깰 정도로 급격히 진행되면 매입자의 권리가 소멸되면서 엄청난 환차익을 자신이 모두 챙기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녹아웃(Knock Out)’ 옵션이었다. '키코'의 원조가 된 초유의 상품이었다. 상품명 그대로 “어느 한쪽이든 버는 쪽은 왕창 벌고, 지는 쪽은 녹아웃될 정도로 깨지자”는 도박이었다. 그러나 엔고가 아무리 급격히 진행돼도 94엔 선을 돌파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확신했던 매입자들은 기꺼이 이 도박에 응했다.

 

  앞서 말한 멕시코 금융공황, 고베 지진 등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로 2월 말부터 소로스나 투자가들의 예상과 반대로 엔고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엔고가 94엔대를 깰 정도로 초강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달러 사재기를 해온 소로스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할 판이었다.

 

  소로스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였다. 그는 생각과 정반대로 달러화가 약세 국면에 접어들자, 종전의 전술을 180도 바꾸어 달러화 매각에 따른 단기 손실을 무릅쓰고 달러화를 무더기로 되팔고 그 대신 엔화를 무더기로 사들임으로써 달러화 폭락을 부채질했다. 사재기한 달러로 입은 손실을 파생상품 '녹아웃'을 통해 보전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소로스의 파워는 엄청났다. 일본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적극 개입했음에도 엔화는 하루에 2,3엔씩 폭등했고, 며칠 뒤인 3월 8일에는 90엔까지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소로스는 이 과정에서 엄청난 거금을 쥘 수 있었고, 반대로 후지쓰(富士通), 파이오니아 등 일본 수출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엄청난 파생상품 환차손을 입어야 했다. 요즘 국내 기업들이 '키코'로 엄청난 환차손을 입고 파산위기에 몰린 것과 다를 바 없는 참담한 모양새였다.

 

  "녹아웃 등장으로 금융권 카지노화 더 심화"

 

  소로스는 이 계약을 거래소를 통하지 않고 직접 장외에서 1대 1로 거래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는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로스의 뒤를 좇아 같은 녹아웃 옵션을 팔았던 다른 헤지 펀드들이 벌어들인 돈을 보면, 그가 이 게임에서 얼마나 큰 돈을 벌었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의 1995년 3월10일자 보도에 따르면, 엔고가 살인적으로 진행된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불과 열흘 동안 존 헨리는 13억 달러를 동원해 1억3천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또한 줄리안 로버트슨과 폴 튜더 존스는 각각 1억 5천만달러와 5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등 월가의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수십억달러를 긁어들였다. 신문은 "이들이 지난 1992, 1993년 유렵 통화 위기 때 소로스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해서 거액을 벌었던 전력을 고려하면, 소로스가 이번에 벌어들인 돈은 천문학적 규모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일본은행은 가파른 엔고를 막기 위해 손해보는 줄 뻔히 알면서도 1995년 3월 한달 동안에만 140억 달러어치의 달러화를 사들였고 20억달러 이상의 환차손을 보았다. 이들 중 상당액이 소로스의 금고로 흘러들어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밖에 '녹아웃 옵셥'을 산 은행과 기업들의 손실은 더 컸고, 이 역시 소로스 일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녹아웃 옵션 출현에 최대 피해자인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등에서도 “녹아웃의 등장으로 금융권의 카지노화는 한층 심화됐다”는 비난여론이 비등했다. 비난여론에 따라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는 녹아웃 옵션의 위법성 여부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소로스측은 “위법 요소는 전혀 없다”며 느긋한 표정을 지었고, 실제로 그 후 상황은 유야무야 끝나 버렸다. SEC 등 미국정부도 헤지펀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미국 금융당국이 헤지펀드를 감싼 결과, 십수년후 우리 중소기업들이 떼도산 위기에 몰리게 된 셈이다

 

  소로스의 '제2차 도쿄 대공습'

 

  조지 소로스는 1995년 '녹아웃 옵션'으로 일본 기업과 금융기관들을 녹아웃시킨 뒤 이번엔 일본 중앙은행을 상대로 총공세를 펼쳤다.

 

  1995년 4월 초순 하루에 엔화가 2,3엔씩이나 폭락해 불과 일주일 사이에 달러화가 80엔까지 곤두박질칠 정세로 도쿄 외환시장은 대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소로스는 다시 도쿄 외환시장을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요리하기 시작했다.

 

  4월10일 소로스의 '도쿄 대공습'

 

  특히, 4월 10일 도쿄 외환시장을 주무대로 전개된 소로스의 총공세는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월요일인 이날 엔-달러 환율은 83.35엔으로 거래를 시작했다. 이것은 전주말 뉴욕 외환시장의 폐장가 83.61엔보다 약간 오른 값이었다. 이렇게 엔화가 상승세로 출발한 것은 도쿄 시장보다 세 시간 앞서 개장한 호주 시드니 외환시장의 영향 탓이었다.

 

  당시 도쿄 외환시장은 금융당국의 과도한 규제 때문에 독자적으로 상황을 판단해 시세를 결정할 만한 판단력이 취약하기로 유명햇다. 평소에는 전날 뉴욕과 런던 외환시장의 시세가 곧바로 도쿄 외환시장에 반영됐다.

 

  그러나 뉴욕과 런던 외환시장이 주말에 쉰 까닭에 이날 도쿄의 시세를 결정하는 바로미터가 된 것이 바로 시드니 외환시장의 환율이었다. 그런데 일본 시간으로 새벽 여섯 시에 문을 여는 시드니 시장은 시간대상으로 일본은행의 개입이 어렵다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같은 맹점을 최대한 이용해 무더기로 엔화 매입 주문을 냄으로써 엔화를 강세로 출발시킨 주역이 다름아닌 소로스였다. “소로스가 시드니에 개입했다”는 사발통문은 개장 전부터 도쿄 외환시장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딜러들의 직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래가 시작된 지 20분쯤 지나서 엔화가 초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소로스를 필두로 한 미국계 헤지펀드들이 도쿄 외환시장에서 보유하고 있던 마르크화를 팔고, 대신 엔화를 대거 사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르크화가 지난주 분데스방크의 금리 인하로 달러당 환율이 안정된 반면, 엔화는 일본은행의 고집스런 금리 인하 반대로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점을 이용해 마르크화로 엔화를 키는 절묘한 투기 공세를 펼친 것이다. 마르크화와 엔화 사이의 균형이 깨지면서 마르크당 엔화 값이 오르자, 연쇄 작용으로 마르크화보다 취약한 달러화의 폭락이 시작됐다. 소로스의 노림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본은행도 백기항복

 

  소로스가 대대적으로 엔화 매입에 나서자, 보유하고 있던 달러화 자산 감소를 우려한 일본 금융기관들과 종합상사, 그리고 대만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정부계 금융기관들도 맹목적으로 소로스 뒤를 좇아 엔화 사재기 경쟁에 동참했다.

 

  거래 시작 90분이 지난 10시 30분께 도쿄 외환 시장에는 자그마치 30억 달러어치의 엔화 매입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고, 엔화는 83엔, 82엔, 81엔 선을 순식간에 깨며 무서운 기세로 80.15엔까지 폭등했다. 불과 90분 만에 엔화 값이 5%나 오른 것이다. 하루 동안의 엔고 상승률로서는 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80엔 선이 깨지면 외환시장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다. 가공스런 패닉의 시작이다.” 당시 일본전문가들의 공통된 전망이었다. 실제로 이 순간 도쿄 외환시장에는 ‘패닉’ 직전의 공포가 넘쳐흘렀다.

 

  기겁을 한 일본은행은 10억 달러대의 거금을 풀어 달러화를 사들이는 동시에, “마침내 일본은행이 그토록 반대해온 정부의 금리인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시장에 흘렸다. 1992년 9월 유럽 통화위기 때 영국 은행이 그러했듯이 일본 은행도 소로스가 이끄는 환투기세력에게 백기항복을 하고 만 것이다.

 

  일본은행에 백기가 게양된 것을 본 투기 자본들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즉각 태도를 바꾸어 대대적인 엔화 매각에 나섰고, 이날 도쿄 외환시장에 결국 달러화는 개장가보다 약간 떨어진 82엔대에 거래를 마감할 수 있었다.

 

  일본은행은 그후 4월 한 달 동안에 눈물을 머금고 시장 안정을 위해 추가로 121억 달러어치의 달러를 사들여야 했다. 이 와중에 엄청난 환손실을 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또 한 차례 소로스의 일방적 승리였다.

 

  '요카이 소로스'

 

  일본 언론들은 1995년 소로스로부터 일련의 대공습을 당한 후 그의 이름 앞에 ‘요카이(妖怪)’ 또는 ‘검은 유태 마피아’라는 증오감 어린 별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1992년 유럽 통화 위기때 소로스에게 크게 당한 뒤 그를 ‘갱’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아울러 일본 출판가에는 “소로스를 필두로 한 월스트리트의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마지막 강적인 일본을 침몰시키고 세계를 점령하려 한다”는 이른바 ‘유태 마피아의 음모’를 다룬 반(反)유태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일본도 영국 등 유럽들과 마찬가지로 비싼 수업료를 치루고서야 소로스 등 헤지펀드 일파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