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잡상

나이롱 시계 對 고무줄 시계

구름위 2013. 2. 2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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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남아공 케이프 타운의 변두리에서 현지 처녀총각이 결혼을 한다. 점심 12시에 시작하기로 한 결혼식에 12:30분이 되어서 첫 손님 내외가 등장한다. 두 번째 손님은 12:50분, 1시가 넘자 하객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1시 30분이 되어서야 결혼식은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1시간 남짓의 결혼예식이 끝나고 점심을 겸한 피로연이 이어졌다. 점심부터 시작된 피로연은 밤 늦은 시간까지 계속됐다. 하객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주인은 더 태평이다.

콜롬비아 보고타의 한국 주재원 박씨는 새로 채용한 현지직원 로베르토의 근무태만으로 속을 썩는다. 말이 떨어지면 바로 일을 처리해야 만 하는 박씨에 비해 로베르토는 ‘기한’의 개념이 희박하다.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에서부터 거래선과의 약속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룬다. 드디어 화가 난 박씨는 다른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로베르토를 큰 소리로 힐책했다. “한번 만 더 그러면 잘라 버릴 거야!” 이 날 이후 말수가 급격히 줄어진 로베르토는 일주일 뒤 권총을 소지하고 직장엘 출근했다.

인도네시아 현지회사와의 합작사업을 위해 한국의 중소기업 사장단이 현지로 비즈니스 출장을 갔다. 예정된 순서대로 업무를 잘 마친 한국의 방문단은 이제 현지 파트너들과 내일 있을 골프회동만 하면 공식적인 일정을 마치는 셈이 된다. 이튿날 아침 11시 티오프(tee- off)하기로 되어 있어 그들은 서둘러 10분 전에 골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30분, 한 시간이 되도 현지인들은 도착하질 않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한국인들은 사업자체도 믿을 수 없다면서 현지 인솔자를 닦아 세웠다. 돌아 갈 채비를 차리는데 그제서야 현지인들의 대표부터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늦게 왔으니 골프를 시작할 수 있겠느냐고 따지는 한국인들에게 그들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듯이 “띠딱 아빠 아빠(Tidak Apa-Apa; no problem)”만을 되풀이하며 골프클럽으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미안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협상할 때 미국사람들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시간은 돈”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의 전 가벼운 잡담(small talk)은 할 수 있다고는 보지만 그 이상은 비합리적 또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잡담이 인내심의 한계인 15분을 넘으면 그들은 보통 딴 생각을 하거나 팔짱을 끼거나 종종 하품을 한다.

 

그들은 또한 대화 시 빙빙 돌려서 하는 이야기를 가장 싫어하며(don’t beat around the bush), 긴 이야기를 짧게 축약하는 것(make a long story short)을 좋아한다. 협상이 끝나고 잘 가라고 하는 인사 또한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야멸차기 그지없다. “Bye, now!” 그들의 대화는 사실 확인과 시간엄수의 두 바퀴로 굴러간다.

기업의 현장에서 시간은 금(金)보다 귀하다. ‘Plan-Do-Check’의 3단계에서 작업시간을 줄이는 게 기업 효율의 일 순위다. 일 잘하는 직원과 일 못하는 직원을 가르는 기준에 ‘시간관념’은 단단히 한 몫 한다. 시간관념이 투철한 직원은 ‘기한’ 내에 임무를 완성하고 그렇지 못한 직원은 기한을 넘겨 문책되거나 심지어 쫓겨난다.


특히 분초를 다투는 국제간 매출 경쟁에는 즉각적인 판단과 실행만이 기업의 기회이익을 최대화한다. 이렇게 시대적인 민첩성을 요구하는 21세기에 한국 기업들의 ‘빨리빨리’ 문화는 단숨에 바다에 다리를 놓기도 하고, 단숨에 사막에 마천루를 세우기도 하고, 단숨에 해저에 터널을 뚫기도 한다. 시한과 기한에 민감한 한국기업들의 이와 같은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인 고유의 성실함과 끈기와 맞물려 한국을 세계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투철한 시간관념으로 성공을 맛 본 한국의 기업들이 이제는 ‘세계의 한국화’를 위해 속도를 내고자 할 때 의외의 문화적 복병을 만나 지연되곤 하는 데 그 속에 현지인들과의 시간관념의 차이가 숨어있다.

이 세상의 누구나 24시로 표시된 손목시계를 차고 다닌다고 시간의 개념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서구에서 보편화된 ‘시간관념(time is money)’이 전혀 다르게 해석되는 나라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제시간(on-time)”이란 말이 문화에 따라서 ‘시간엄수(punctuality)’란 의미로 엄격하게 해석될 수도 있고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대강의 가이드라인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시간엄수’와 동전의 양면인 ‘늦음’의 개념 역시 문화마다 다르다.

서구에서는 비즈니스 시 5분~30분 정도를 “늦는다”고 말하지만 동남 아시아를 비롯 아랍 및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의 문화권에서는 30분 혹은 1시간 이상이 되었을 때 “늦는다”는 말을 적용한다. 영국에서는 가정으로부터 식사초대 받았을 때 5~15분 늦게 도착하는 것이 적절한 예의이지만- 일찍 도착하는 것은 주인의 식사 준비를 방해한다고 해서 예의가 아님- 이태리에서는 2시간 정도 늦게 도착해도 문제가 안되며 이디오피아나 자바에서는 그 이상 늦어도 오기만 하면 주인의 체면을 살려준 것으로 양해된다.

시간 엄수에 관한 한 독일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민족보다도 독일인들은 시간을 잘 지킨다. 산책시간이 하도 정확해 그를 보고 이웃들이 시간을 맞췄다는 철학자 칸트의 후예들이 아직도 독일에는 넘쳐난다. 독일에서 5분 늦게 도착해 거래선을 못 만났다는 한국 비즈니스맨들의 하소연은 전혀 낯설지 않다. 반면 ‘서구 사람들은 시계를 가지고 다니지만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다닌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남아공에서는 시간에 쫓기는 일 없이 사람이 주체가 되어 그 날의 형편에 따라 시간을 늘리고 줄이고 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인간에서 종속된 것으로 상황에 따라 완급(緩急)의 조절이 가능하다.

“서두르는 사람은 속이려는 것으로 오해 산다(people who rush are suspected of trying to cheat)” 는 속담이 남아공 사람들의 시간관념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서구사람들의 관점으론 남아공 사람들이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들로 비춰지지만 그들은 도리어 서구사람들의 나이롱 같이 신축성 없는 엄격한 시간관념을 도리어 허덕이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간주한다.

시간에 관한 한 아프리카 사람들과는 정 반대편에 있는 미국인들의 시간관념은 그들 생활 전반에서 관찰된다. 효율지향적인 미국인들은 점심시간 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맥도날드에서 15분 동안 햄버거를 먹고 남는 30분을 휘트니스 센터에서 조깅을 하고 회사에 들어오면서 스타벅스 커피를 한잔 빼어 든다. 퇴근 후 은행에서 돈을 찾기 위해 드라이브 쓰루(Drive through: 차를 은행창구에 붙여 은행업무를 보는 것)에 차를 갖다 붙이며, 고속도로에 들어설 때는 급행선(Fast 혹은 Hop Lane)에 타기 위해 동료를 차에 태운다. 퇴근 후 식사는 30분 내에 배달하는 게 사명인 피자 집에서 피자를 주문해 간단히 해결한다. 이 피자 집이 좋은 것은 배달시간이 30분이 넘을 경우 피자를 공짜로 먹게 된다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 내에서 최대의 시간절약을 통해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미국인답게 근무의 형태도 예전의 전일 출근 근무제에서 시간연동제와 자택 근무 등으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회사에서나 컴퓨터에 앉다가 이제는 인터넷과 PDA의 발달로 화장실에 앉아서도 이메일을 체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철저한 시간관념으로 더 자유로워져야 할 미국인들이 이제는 도리어 365일 어디서나 근무하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졌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에밀 더킴(Emile Durkhim)은 시간을 사회구성원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일종의 사회적 구조로 보았다. 시간을 나이롱 같이 순간순간의 고정된(fixed) 형태로 보느냐 아니면 고무줄같이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유동적인(fluid) 개념으로 보느냐가 그 문화 그 사회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관념의 차이는, 국경과 인종을 벽을 넘어 글로벌 사업을 전개해야 하는 세상의 기업들에게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선결과제다.

현지인들의 시간관념을 어느 선까지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인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중국의 만만디를 넘어 중동의 부크라(내일)와 스페인의 마냐나(내일) 그리고 검은 대륙 남아공의 고무줄 시계에 이르기까지 한국 기업의 국제 무대 진출에 경계를 없애려면 우선 한국식 시간관념 ‘빨리빨리’ 문화부터 현지화해 나가는 유연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