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시장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1997년이 연상된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역외 환투기세력의 공세도 읽히고 있다. 월가 위기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헤지펀드나 투자은행 등은 여전히 시장에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상대방이 조금만 허점을 보여도 무섭게 치고들어온다. 1997년 우리는 한번 세게 당했다. 처음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두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바보다.
헤지펀드나 투자은행, 모두가 신처럼 여기는 존재가 있다. 조지 소로스(78)다. 유대계 자본의 대스타이기도 하다. 그는 1969년 퀀텀 펀드라는 헤지펀드 회사를 설립한 이래 40년간 금융 일선에서 뛰고 있다. 그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때 아시아 국가들을 초토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나, 이에 앞서 1990년대초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 중앙은행들을 초토화시킨 화려한 전력의 소유자다.
몇 회에 걸쳐 소로스가 어떻게 선진국 중앙은행들을 침몰시켰나를 알아보도록 한다. 첫번째, 소로스의 1992년 영란은행 공격부터 알아본다.
제 1화: 조지 소로스의 1992년 '영란은행' 공격기
1981년 영국의 투자 권위지 <국제투자가>는 소로스를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펀드매니저'로 선정했다. 일반인들은 그를 "황금의 손"이라 예찬했다. 그러나 10여년 뒤인 1992년, 영국인들은 소로스에 치를 떨었다.
1992년 9월, '검은 9월'로 불리는 최악의 유럽 통화위기가 발발했다. 자국 파운드화를 지키려 고군분투하던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유럽통화제도(EMS) 중심기구인 '환율조절메커니즘(ERM)'에서 전격 탈퇴한다고 선언,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더이상 ERM에 잔류했다가는 소로스가 주도하는 국제 환투기세력의 공세에 영란은행 금고가 텅텅 비어 국가파산할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유럽에 환란을 몰고올 독일 통일
영란은행과 소로스가 격돌한 1992년 환투기 전쟁의 발단은 EMS였다. 1999년까지 단일 통화권을 구축하려 한 유럽연합의 EMS 참가국들은 이를 위한 과도기적 조치로 회원국간 기본환율을 설정한, 일종의 준(準)고정환율제인 '환율조절 메커니즘' 즉 ERM을 운영하고 있었다. 예컨대 독일 마르크화와 영국 파운드화는 상하 6%라는 변동폭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이 변동폭을 벗어날 정도로 환율이 요동치면 회원국 중앙은행들은 시장에 개입해 인위적으로 변동폭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1992년 9월초, 인위적 환율관리 시스템인 ERM의 결정적 한계가 드러났다. 진앙지는 독일이었다. 1990년 통일을 달성한 독일은 낙후한 동독 경제를 단기간에 일구기 위해 휴지조각이던 동독 화폐와 서독 화폐를 1대 1로 맞교환하고, 동독에 대대적 투자를 단행했다. 돈이 동독으로 천문학적으로 풀리자,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는 인플레를 막기 위해 통독후 2년동안 10차례나 연거푸 금리를 인상하는 초고금리 정책을 취했다. 분데스방크의 초고금리정책은 독일내에서는 효과를 거둬, 이 기간중 독일의 소비자물가는 연간 2.5%밖에 안올랐다.
그러나 유럽 다른 나라들에게는 재앙이었다. 높은 금리를 주는 나라로 쏠리는 게 돈의 속성이다. 돈이 독일로 쏠리면서 마르크화가 고평가되자, 다른 유럽국가들도 ERM 규정을 지키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했다. 그러나 가뜩이나 경기가 맥을 못추던 판에 금리를 올리자 독일보다 체력이 약한 다른 나라들은 경기가 급랭하며 실업률이 두 자리로 급등하는 등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됐다. 하지만 헬무트 슐레징거 분데스방크 총재는 "독일 국내사정이 최우선이다. 못 견디겠다면 ERM에서 탈퇴하라"며 마이웨이를 계속했다.
1992년 9월 마침내 유럽 다른 나라들의 체력이 쇠잔했다. 9월8일 핀란드가 가장 먼저 마르크화와 자국화폐간 연동제를 폐기했다. 스웨덴은 자국화폐 가치 보전을 위해 단기금리를 자금마치 500%나 인상했다. 이탈리아 화폐와 스페인 화폐 역시 대폭락했고, 영국의 파운드화도 대폭락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럽통화 위기 발발이었다.
영국 수뇌부 "영란은행 금고는 넉넉" vs 소로스 "파운드화는 말라리아 걸려"
하지만 독일과 함께 유럽연합의 헤게모니를 다투고 있던 영국은 파운드화 폭락 방어를 선언하고 나섰다. 존 메이저 영국총리는 "파운드화 평가절하는 영국의 장래에 대한 배신행위"라고까지 호언했다. 영국 수뇌부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영란은행 금고는 넉넉하니 국민들이여 안심하라"였다.
하지만 첫 비즈니스를 런던시장에서 했기에 누구보다 영국정세에 밝은 소로스는 그의 표현을 빌면 "말라리아에 걸린 파운드화"의 허장성세를 간파했다.
그는 이때부터 이례적으로 각종 언론지상을 통해 '파운드화 대폭락'을 예언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기피하는 '미스테리맨'으로 유명했다. 그는 생리적으로 기자들을 싫어해, 자신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는 영국 <더 타임스>, 프랑스 <르 피가로> 등의 신문잡지에 직접 기고하는 형식을 취해왔다. 하지만 파운드화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례적으로 신문, 잡지, TV 등 모든 언론매체와의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른바 시장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가는 '아나운서 효과'를 겨냥한 고도의 바람잡이 공세였다.
소로스 필두로 세계 헤지펀드, 영란은행 융단폭격
소로스는 언론을 이용해 바람몰이를 하는 동시에, 가용가능한 자금을 총동원해 연일 파운드화 팔자 주문을 내며 무자비하게 파운드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영란은행을 공격하면서 그가 직접한 동원한 현찰만 100억달러에 달했다. 당시로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다른 헤지펀드들도 소로스의 뒤를 좇아 1천100억달러를 동원해 파운드화를 공격했다. 이들은 적은 돈으로 큰 거래를 하는 이른바 '레버리지 효과(지렛대 효과)'를 극대화, 영란은행이 받은 공세 압박은 1조달러대가 넘은 것으로 뒷날 추산됐다.
영란은행은 필사적으로 파운드화를 사수하려 했다. 외환보유고를 총동원해 파운드화를 사들이고, 단기금리를 10%에서 15%로 대폭 인상해 파운드화 가치를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소로스 일파의 노도같은 공세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연히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파운드화가 폭락하며 금융시장이 패닉 상태에 빠져들자 영국 국민들과 야당들은 메이저 총리를 맹비난하고 나섰다. 요구의 핵심은 "ERM에서 즉각 탈퇴하라"였다. 야당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영국에 ERM에 가입시켰던 범유럽주의자 메이저 총리는 결국 압력에 굴복, 굴욕적인 ERM 탈퇴 선언을 해야 했다.
비슷한 곤경에 처했던 이탈리아 리라화도 ERM에서 같이 탈퇴했다.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프불리카>는 이 소식을 "유럽, 산산조각 나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소로스 펀드 수익률 68.6%
소로스는 이 한달간의 총공세를 펼쳐 당시로선 천문학적 금액인 10억달러를 가볍게 벌어들인 것으로 후일 밝혀졌다. 그는 자신에게 돈을 맡긴 투자가들에게는 이보다 몇배 많은 거액을 돌려줬다. 소로스 펀드의 그해 운용수익률은 무려 68.6%였다. 소로스와 그에게 투자한 이들이 나눠가진 수익은 다름아닌 영란은행 금고에 쌓여있던 영국의 국부였다.
이 사건으로 소로스의 이름은 국제적으로 높아졌고, 중앙은행들이 자칫 외환정책을 잘못 운영할 경우 헤지펀드의 먹이가 될 수 있음을 국제사회는 뼈저리게 경험했다. < 한국 경제 연구회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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