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는 미금융자본의 첨병"
“IMF가 한국사태에 적극 개입하게 된 원인은 IMF의 최대주주인 미국의 강력한 희망 때문이며, 미국의 의도는 지난 1994년 페소화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인 투자가들의 이익 보호를 위해서라는 것이 국제사회의 통설이다. 따라서 워싱턴과 뉴욕의 전문가들은 IMF의 개입으로 인한 한국시장의 개방이라는 부대효과를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즉 IMF의 주도 아래 세계에서 가장 폐쇄된 시장 가운데 하나인 한국시장이 마침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외환.금융위기가 폭발한지 얼마 뒤인 1997년 12월13일 독일의 DPA통신이 워싱턴에서 타전한 'IMF의 아시아 개입은 월스트리트의 승리'라는 기사의 한 토막이다.
국가부도라는 극한적인 위기로 워낙 경황이 없던 터라 우리는 잘 몰랐고 또 알아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IMF는 1997년말 이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물론 그 무렵 국내 일각에서도 IMF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전철환 당시 충남대 경상대학장(한국은행 전 총재)이 대표적인 예로, 그는 1998년 1월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한은 소식>에 기고한 글에서 IMF를 ‘구세주’가 아닌 ‘국제금융자본의 첨병’으로 규정했다.
“IMF는 우리의 희망도, 비전의 상징도 아니다. 1989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 갑자기 커진 국제금융자본의 첨병이며, 개방과 자율화로 통합된 새 세계질서를 지배하는 국제경제 권력의 대명사일 뿐이다. 훗날 역사에는 ‘IMF 시대가 경제예속의 수치시대였다’라기보다 ‘대도약의 계기였다’고 기록될지 몰라도, 지금은 경제적인 주권과 자존심을 내팽개친 채 사활을 걸고 금융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소수의견에 불과했고, 국익(?)을 위해 크게 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일종의 ‘반국가적 발언’이었다.
98년 아시아 지역에서 IMF 관리체제가 본격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IMF는 한층 또렷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예로 아시아 전역에서 IMF의 초긴축 정책노선, 고금리 정책과 내정간섭 문제를 둘러싼 불만이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왔다. “고금리와 재정긴축을 양대축으로 하는 IMF의 월권적 내정개입이 결과적으로 빈곤층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성장의 싹을 잘라버리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의 충돌
지난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확신한 미국 등 서방진영이 미국의 브레튼우즈에 모여 전후 세계경제질서 재편 방향을 정한 브레튼우즈 협정에 따라 전쟁 직후인 1945년 고정환율체제 유지를 위해 IMF가 만들어질 때만 해도 IMF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는 이렇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IMF는 자매기구인 IBRD와 함께 전후 세계경제질서 재건의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1971년 미국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하면서 IMF의 구실은 모호해졌고, 이때부터 IMF가 국제 금융위기의 ‘소방관’을 자처하고 각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최초의 불만은 1980년대 들어 IMF의 초긴축 정책으로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을 경험하게된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 개도국들에서 터져 나왔다.
1980년대 초반부터 중남미와 아프리카는 IMF의 처방에 대해 “거시경제지표의 개선에만 집착할 뿐 사회적인 배려를 결여하고 있다”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 “서방의 대형 금융기관의 하수인격인 IMF는 개도국의 장기발전이 아니라 이들 국가에 서방국가들이 꾸어준 돈을 상환받는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질타했다. 이른바 ‘IMF 성악설’이다.
1989년 봄 UN 무대에서 ‘IMF 성선설’과 ‘IMF 성악설’이 정면 격돌했다.
IMF와 IBRD는 아프리카 개혁과 관련한 공동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의 요지는 “아프리카의 경우 IMF와 IBRD가 권고한 개혁을 따라 행한 나라의 경제성장률이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높았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자화자찬성 보고서였다.
그러자 같은 UN 산하기국인 아프리카경제위원회는 즉각 상반된 보고서를 제출했다. “IMF의 권고에 따라 개혁한 나라가 성장했다고 보이는 것은 통계수치일 뿐, 시간이 흘러보면 정반대 결과가 나타난다. IMF와 IBRD는 경제개발 추진기관에서 자기 선전기관으로 전락했다.” 같은 UN 산하 단체의 신랄한 비판으로 모처럼 빛을 내보려던 IMF의 위신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미국의 경제학자 J. 위니스키도 아프리카경제위원회의 입장을 지지, 그해 3월 20일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IMF의 처방을 ‘독약’에 비유하면서 비판했다.
“나는 1980년대 초반 미중앙정보국(CIA)에 대해 우수한 대학졸업자를 고용해 IMF의 여행계획을 감시하라고 제안한 바 있다. 어느 나라가 IMF 융자조건에 합의한 순간, 그때부터 CIA는 그 나라에서 발생할 정치적 혼란의 조짐을 예의주시해야하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IMF 통제를 받게 되면 6개월 이내 반드시 ‘폭동’이 일어나곤 했다.
남미의 대다수 국가는 ‘인플레이션 퇴치를 위한 증세와 수출증대를 위한 환율절하’라는 IMF 처방전에 따라 불안정해졌다. 이 처방전은 1950년대 케인스파에서 속하는 경제학자들이 내세운 것으로, 소량만을 투여했음에도 1960년대에는 ‘영국병’과 197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속의 고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IMF는 10년 이상이 독약을 라틴아메리카에 투여해왔던 것이다.”
1980년대 중남미의 ‘잃어버린 10년’은 다름 아닌 IMF의 그릇된 처방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제프리 삭스의 IMF비판
아시아의 금융위기에서 IMF는 과오를 범했다. 그 가운데서도 최대의 과오는 전통적인 기능에서 이탈, 아시아 국가들에게 구조개혁을 요구하는 기회로서 위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IMF는 인도네시아에 대해 보조금의 철폐를, 한국에 대해서는 고용관계법령의 개정을 요구하는 등 국가주권에 부당하게 개입했다.
그는 특히 한국의 위기를 ‘구조적 위기’가 아닌 ‘유동성 위기’로 규정하며, IMF가 서방자본의 이해만을 대변해 한국 경제를 붕괴위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의 상황은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4개국의 상황과 다르며, 더욱이 한국은 경제규모가 세계 11위인 까닭에 중요성이 더하다.
한국의 문제는 과도하게 고평가된 환율이나 과도한 경상적자 때문에 야기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1997년 중반 한국은 외환보유고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단기외채로 인해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한국의 총 외채는 GDP의 30%로, 개도국에서 가장 낮다. 따라서 이 위기는 분명히 구조적인 지불 불능상태라기 보다는 일시적인 유동성 문제였다. 더욱이 경상적자 규모는 매우 작고 또한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긴축, 세율 인상, 철저한 신용 등 전통적인 IMF 정책을 적용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에게 필요했던 처방은 단기부채의 만기를 연장해주고 일시적으로 크레디트(신용대출한도)를 늘려주는 도움이었다. IMF는 일시적인 브리지 론(bridge loan)을 제공하고, 은행들로 하여금 협상팀을 만들도록 도왔어야 했다.
그러나 IMF는 그렇게 하는 대신 공적 자금으로 5백70억 달러를 한국에 빌려주어 미국․일본․유럽 은행 등 개별 채무자의 빚을 갚게 했고, 한국에 대해서는 경제구조의 조정과 모순된 고세금, 재정긴축, 고이자를 요구했다. IMF는 또 이 과정에서 서방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국에 대해 일본 자동차의 수입을 허용하게 하고, 서방의 금융기준을 도입하며, 노동법을 바꾸어 해고를 쉽게 하도록 만들었다.
한국경제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갔던 IMF
펠트슈타인 교수의 우려대로 IMF 처방은 한국경제에 몸에 좋은 쓴 약이라기보다는 독약으로 작용했다.
IMF 고금리정책의 근거는 “이래야 재무구조가 나쁜 부실기업과 빚으로 과잉투자를 한 기업이 단기간에 싹쓸이되고 우량기업만 남아 경제구조가 건전해지면서 경제 재건에 성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과잉중복투자의 주역인 5대 대기업집단은 상대적으로 높은 신용도 때문에 은행과 채권시장에서 비록 고금리이기는 하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자금을 조달하며 구조조정 압박을 버틸 수 있었다. 반면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은 고금리 태풍을 맞고 무더기로 쓰러져 갔고,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길거리를 쏟아져 나왔다.
IMF는 크게 당황했고 자신의 처방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해갔다. 그리하여 1998년 하반기에 들어서서는 거의 아무런 처방전도 고집하지 못하는 처지로 반전되었다.
당시 IMF와 접촉이 잦았던 통화당국의 한 관계자는 “이제 캉드쉬 IMF 총재와 울펜슨 IBRD 총재의 운명은 한국 손에 달렸다”고 말했다. “1980년대 중남미에서 그러했듯 모범생 국가인 한국에서마저 IMF 처방이 독약이었던 것으로 증명될 경우 IMF나 IBRD는 해체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서는 IMF 등의 고자세가 크게 수그러들었다고 그는 전했다.
하지만 이미 실물경제는 크게 망가져버렸다. 과연 앞으로 회복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불행중 다행으로 1998년 8월 러시아 모라토리움(지불유예) 선언과 이에 따른 중남미 위기 재연으로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가 전세계적인 저금리정책으로 정책방향을 바꾸면서 IMF도 고금리 정책을 포기함으로써 한국경제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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