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제정 로마로부터 비잔틴 제국까지의 해군과 해전

구름위 2013. 2. 2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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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 전쟁을 계기로 하여 부흥한 로마 함대는 이후 로마의 동지중해로의 팽창 과정에서 헬레니즘 국가들을 격파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한 활동의 절정은 아마도 기원전 31년에 일어났던 악티움 해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토사구팽’이라는 옛 말이 있었던가요? 상대할 적이 없어진 군대는 존재 가치 또한 잃어버리게 되는 법입니다. 악티움 해전을 끝으로 지중해가 완전히 로마의 호수로 변해버리자 이제 로마 함대는 점차 군축과 소형화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던 것이죠.


[베네티 족 해적과 교전 중인 로마의 리부르니언. 전면전이 중심이었던 이전 시대와 달리 제정 시대의 로마 함대는 이처럼 치안유지에 가까운 작전이 주 임무였죠.]


1. 다단노선에서 리부르니언(Liburnian)으로

 악티움 해전 이후 지중해 내에서 로마에 대적할 만한 해양 세력은 사실상 완전히 소멸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은 연안 지방 등에 근거하는 해적들뿐이었고, 이제까지 적국과의 전면전을 상정하여 육성되었던 함대 또한 평화로운 시대에 발맞춰 일종의 연안경비대나 해양경찰에 가깝게 변모할 필요가 있었죠. 그리하여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해군에 대해 가장 먼저 실시했던 것은 군비감축이었습니다. 그는 상시 200척 정도를 유지해왔던 함대를 해체하고, 그 대신에 지중해의 치안유지를 위해 나폴리 만의 미세눔과 아드리아 해의 라벤나를 모항으로 하는 2개의 함대를 새로 창설했습니다. 또한 지중해의 요충지와 흑해 및 영불해협 등에도 소규모 함대들을 주둔시켰죠.


[도버 해협 주류 로마 함대. 치안 유지 임무가 된 로마 함대의 주력은 다단 노선으로부터 3단노선과 리부르니언으로 축소되었습니다.]

 한편 적대적인 해양세력의 소멸은 군선의 건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악티움 해전 이전까지만 해도 로마 함대의 주력은 5단선이었고 기함은 10단선으로 구성되기도 하는 등 사실상 다단 노선이 함대를 주름잡고 있었죠. 그러나 악티움 해전 종결 후 로마 함대가 상대해야 할 적은 더 이상 대양에서 전면전을 걸어오는 정규 해군이 아닌 연안의 복잡한 여울에 숨어서 암약하는 작은 해적선들이었습니다. 이런 해역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기존의 대형 군선은 그리 적합하지 못했죠.

 따라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새 함대는 기함 정도가 5~6단선을 유지했을 뿐, 나머지 주력들은 도로 3단 노선으로 돌아갔고 보다 작고 경쾌한 소형 노선들도 건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리부르니언(Liburnian)이라는 군선이었죠. 리부르니언은 본래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연안에 해당하는 일리리아 지방의 해적들이 즐겨 사용한 소형의 1단 노선으로써, 로마인들은 여기에 노열을 1단 더 추가하여 형태를 완성시켰던 것입니다. 이들 리부르니언은 5단 노선이나 3단 노선에 비해 기동성이 높았고 속도도 훨씬 빨랐습니다.


[제정 시대의 군선 리부르니언. 초기의 갤리선처럼 갑판 없이 노잡이들이 노출돼 있고 충각도 단순화된 것이 특징이죠.]


2. 비잔틴의 군선 드로몬(Dromon)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이래 3세기가 지나자 한때 지중해 세계의 본격적인 제국으로 군림하던 로마도 쇠퇴를 거듭한 끝에 서로마와 동로마라는 두 개의 국가로 분열되었습니다. 이중 동로마는 내부의 쇠퇴와 게르만족의 침공으로부터 살아남아 보다 그리스적인 성격을 띤 비잔틴 제국으로 변모되었죠. 그러나 또한 비잔틴 제국에는 고대기의 로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도 여전히 많았는데 해군과 군선들도 그중의 일부였습니다. 이 무렵의 지중해는 로마 패권의 쇠퇴와 아랍인 해적의 발흥으로 예전보다 훨씬 치안이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지중해의 중앙부에 위치하던 고대 로마와 달리 동지중해 구석에 몰려있던 비잔틴 제국은 로마 시대의 군선보다 보다 대형이면서 항양성도 뛰어난 배를 필요로 했죠. 그것이 바로 리부르니언을 개량한 드로몬(Dromon)이었습니다.


[초기 형태의 드로몬들. 아직 고대 군선의 형태가 많이 남아 있죠.]

1) 드로몬의 구조와 고대 군선으로부터의 변경점
 드로몬이라는 명칭은 그리스어로 <질주자>라는 의미인데, 그 말처럼 빠른 속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드로몬은 길이가 40~60m, 폭이 7~10m였으며, 노는 뱃전 한쪽에 25개의 노들이 2단으로 늘어선 형태로 배치되었죠. 총 정원은 200명이었는데 이중 50명만이 1층의 노잡이로써 완전히 고정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승조원들은 노를 잡거나 전투 병력의 역할을 맡았고 때때로 양자를 겸하기도 했죠. 노잡이와 전투 병력이 완전히 분리됐던 그리스․로마의 군선들과 달리 중세 이래의 군선에서는 이처럼 필요할 경우 일부 노잡이들이 노를 버리고 무기를 잡아야 할 때도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르네상스 시대의 갤리선들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노잡이들이 완전히 갑판 아래에 밀폐되었던 고대의 군선과 달리 필요시 전투에 참가하기 쉽도록 노잡이들은 리부르니언 때와 마찬가지로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뱃전 좌우에는 방패를 걸 수 있는 공간이 있었죠. 드로몬이 근접전에 적합하게 건조됐다는 점은 선체 구조에서도 드러나는데, 뱃머리에는 전투 병력을 위해 갑판보다 한층 높은 구조물이 설치됐으며 대형 군선에는 배 중간에도 이러한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죠.


[(좌) 인도양 등지에서 사용되던 삼각돛은 아랍 상인을 통해 이 무렵 지중해로 전파되죠.
 (우) 10세기 무렵의 드로몬. 기본적으로 이 형태가 르네상스 시대의 군용 갤리선들에게 계승됩니다.]


2) 삼각돛의 도입과 드로몬의 파생형들
 돛의 경우 고대의 군선과 마찬가지로 1~2개의 마스트(돛대)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곳에 달리는 돛은 기존의 사각돛에서 점차 삼각돛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삼각돛은 2세기 이후 지중해에 널리 전파됐는데, 비록 사각돛보다 순풍 하에서의 추진력은 약했지만 역풍을 받게 되더라도 조정 여하에 따라서는 맞바람을 받으면서도 항해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죠. 드로몬과 같이 해안선이 복잡한 연안지역과 대양에서의 작전을 모두 소화해내야 했던 선박은 종종 바람의 잦은 변화를 겪었을테니 아마도 삼각돛이 작전에 좀 더 편리했을 것입니다. 또한 돛과 마스트가 점차 대형화됨에 따라 돛과 마스트는 필요에 따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고정된 구조물로 변모되었고, 이 시기의 군선들은 고대와 달리 돛과 마스트를 제거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죠.

 드로몬은 또한 다양한 파생형을 낳았습니다. 드로몬보다 작은 군선으로는 팜필로스(Pamphylos)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드로몬과 거의 같은 형태에 정원만 120~160명으로 약간 적은 형태를 띄고 있었죠. 가장 작은 파생형은 오우시아콘(Ousiakon)이라는 배였으며 이는 정찰용이나 보조함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비잔틴의 군선들은 대체로 중세 지중해의 도시국가들에서도 약간의 개조를 거친 뒤 거의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후대의 군용 갤리선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3. 비잔틴 시대 해군의 병기와 전술

 비잔틴 시대의 해전 양상은 고대의 그것과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양측 함대는 서로를 향해 접근하면서 배에 설치된 투석기나 노포를 이용하여 돌과 화살을 날렸고, 좀 더 가까워지면 석궁을 쏘거나 손에 들고 있던 투창을 던졌죠. 마지막으로 적함이 눈앞에 다가오면 충각돌격을 행했고 그 다음에는 적함의 갑판에 뛰어드는 백병전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대 이래로 거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이러한 정태적인 인상과는 달리 세부적인 요소의 비중에 있어서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충각의 쇠퇴였습니다. 고대 최후의 전면 해전이었던 악티움 해전에서는 양측의 군선 모두 충각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충각돌격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군선의 지나친 대형화는 더 이상 충각돌격을 가하기 어려울 정도로 배의 기동성을 떨어뜨린 측면이 있었으며, 또한 대형화 추세로 인해 충각돌격으로는 충분한 타격을 입히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튼튼하게 되기도 했던 것이죠. 이후 제정 시대의 리부르니언에서는 충각이 3단 노선 시대 이래의 복잡한 형상이 아닌 단순히 뭉툭한 돌출부 모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형태의 충각은 이전 시기의 것보다 파괴력은 떨어졌지만 충각이 활용되는 빈도가 감소해있었으므로 별 문제는 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그렇게 하는 쪽이 훨씬 비용이 저렴했죠.


[충각 형태의 변천사. 점차 형상이 단순화되다가 후기의 드로몬에서는 아예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등 운용방법도 다소 달라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비잔틴 시대의 충각 전술과 충각의 변모
 드로몬 또한 충각을 갖추고 있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백병전을 벌이기 쉽도록 보조하거나 이미 치명상을 입은 적함에 마무리를 가하는 용도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비잔틴 해군에서는 고대와 같이 충각돌격으로 적함을 들이받으면서 전투를 시작하는 식의 전술도 잘 사용되지 않았죠. 그 대신 전투 중 2척의 드로몬이 합동작전을 통해 충각을 활용하곤 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드로몬 1척이 쇠갈고리 등을 걸어 적함을 붙잡습니다. 그러면 적함의 병사들은 백병전에 대비하여 공격받은 쪽의 뱃전으로 몰리게 되고, 그로 인해 적함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죠. 이때 나머지 1척의 드로몬이 적함의 반대편으로 접근하여 충각돌격을 가하면 적함은 더욱 더 심하게 기울어지게 됩니다. 이후 첫 번째 드로몬이 쇠갈고리를 풀고 물러서면, 두 번째 드로몬은 적함의 경사가 원래대로 돌아오기 전에 재차 충각돌격을 가하여 수면 아랫부분의 선체에 치명타를 가함으로써 마무리 하는 것이죠.

 10세기 이후에 이르면 충각은 이제 고대의 군선처럼 용골의 연장으로써 선체 하부에 설치되기 보다는 점차 갑판의 일부로써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충각은 고대의 해전에서처럼 적함의 수면 하부를 뚫기 보다는 수면 위의 뱃전이나 노 등을 부러뜨리기 위한 용도로 변모되었죠.

2) 비잔틴의 구세주 : 그리스의 불(Greek fire)
 그러나 비잔틴 시대의 해전을 고대 및 다른 시대와 진정으로 구별지은 것은 바로 유명한 <그리스의 불(Greek Fire)>이라는 병기였습니다. 물론 불 자체는 오래 전부터 해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육상에서 그러했듯이 궁수들은 종종 불화살을 쏘곤 했고, 노포나 투석기 또한 둥글게 뭉친 송진과 역청 등에 불을 붙여 적함에 날려 보내기도 했던 것이죠. 또한 어떤 국가에서는 군선의 뱃머리에 불이 붙은 단지가 달려있는 장대를 매달아 돌격시에 적함을 불태우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던 불의 사용에 보다 혁신이 일어난 것은 673년 무렵 칼리니코스라는 그리스인 기술자가 <그리스의 불>이라는 물질을 비잔틴 제국에 가져오면서부터였습니다. <그리스의 불>은 유황, 초석, 생석회, 수지, 나프타 등이 뒤섞인 반액체 상태의 혼합물로써 일단 불이 붙으면 격렬한 연소 작용을 일으켰고 심지어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배가 오로지 목재로만 되어 있었던 시대에 이러한 병기는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고, 비잔틴 인들은 몇 차례에 걸친 아랍인들과의 해전 때마다 이를 사용하여 제국을 위기로부터 구해냈죠.


[그리스의 불 운용에 사용되는 단지와 화염방사장치, 그리고 그 운용방식.]

3) <그리스의 불>의 다양한 사용 방식
 해전이 벌어졌을 때 <그리스의 불>은 화살촉 끝이나 투석기의 탄환에 적셔지는 형태로 이용되었습니다. 또는 토기에 담겨진 후 불을 붙여서 근접한 적함에 수류탄처럼 던지는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하죠. 하지만 본격적인 해전 병기로서의 활용방식은 오늘날의 화염방사기와 유사한 형태를 띈 것이었습니다. 우선 뱃머리 부근에 <그리스의 불>과 공기펌프가 담긴 용기를 설치하고 그 용기에 청동으로 안을 댄 목제 관, 혹은 사이펀을 연결합니다. 그런 다음 용기를 화롯불 등으로 가열하는 동시에 내부에 설치된 공기펌프를 가동시켜서 용기 내의 압력을 높여주게 되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그리스의 불>은 스프레이처럼 관을 통해 분출되는데, 이때 관 끝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분출해 나오는 기체에 횃불을 가져다 대면 이는 곧 맹렬한 화염으로 변해서 적함을 완전히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보다 대형의 군선에는 뱃머리 외에 중간과 끝부분에도 관이 설치됐는데, 이처럼 화염방사장치는 비잔틴 해군의 결전병기라 할 만한 것이었고 비잔틴의 적들에게는 관이 겨눠진다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을 느끼게 하곤 했다고 합니다. 다음 일화는 비잔틴의 공주이자 역사가인 안나 콤네나(Anna Comnena)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써 1103년 경에 벌어진 비잔틴 함대와 이탈리아 해양도시 피사와의 교전에서 <그리스의 불>이 어떻게 사용됐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함에게 접근하여 그리스의 불을 퍼붓는 드로몬. 깃발로 보아 성 요한 기사단의 군선으로 보임.]

 ‘(비잔틴의) 함대는 로도스와 파타라 섬 사이에서 피사인들을 따라잡았으나 너무나 열성적으로 적을 추격했기 때문에 하나의 단위로 일체화돼서 공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적에게 가장 먼저 도달한 것은 란돌푸스 제독이었는데, 그는 공격을 지나치게 서두르는 바람에 아무 것도 맞히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가까이 접근했던 엘리몬 백작은 피사 군선의 후미에 충각돌격을 가했고, 적함의 조타용 노를 망가뜨리는 한편 자기 배의 뱃머리를 적함 깊숙이 박아 넣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그의 배는 뱃머리의 관을 통해 불길을 뿜어냈고 적함은 곧 불길에 휩싸였다. 엘리몬의 배는 뱃머리를 빼낸 뒤 다른 3척의 적함에도 화염을 방사했는데 이들도 모두 불이 붙고 말았으며, 피사인들은 이내 혼란 상태에 빠져 퇴각하기 시작했다.’

4) <그리스의 불>의 한계
 이와 같이 근접전에서 <그리스의 불>은 목조 선박에 대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지만, 로도스의 성 요한 기사단이나 일부 아랍인들에 의해 잠시 사용됐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국 보편적인 해전 병기로 자리 잡지는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우선 <그리스의 불>은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화염방사 도중에 이를 방사하는 자함에까지 불이 옮겨붙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그리스의 불>은 해협 등 공간이 협소한 해역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넓은 대양에서는 상대적으로 효력이 감소하는 단점이 있었죠.

 이에 더해 비잔틴인들 스스로가 원료의 배합비율 등 제조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던 것도 <그리스의 불>의 확산을 방해했으며, 중근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주요 원료인 나프타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것도 이에 일조했습니다. 이보다 좀 더 후대에 등장하는 화포가 진화를 거듭하며 해상전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과는 달리, <그리스의 불>은 자체의 특성이나 외부적 요인 등으로 인해 결국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병기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던 것입니다.


4. 비잔틴 해군과 사라센 해군의 격돌

 비잔틴 제국이 서로마의 멸망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발칸반도와 이탈리아 남동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을 무렵이던 622년, 제국의 동방인 아라비아 지방에서 이슬람교가 성립되었습니다. 비잔틴 인들이 ‘사라센(Saracen)'이라고 부른 이 신생 종교의 추종자들은 이내 강력한 군사집단을 형성하여 아라비아, 아프리카, 유럽을 넘나드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으며, 지리적 위치상 당연히 비잔틴 제국의 영유권에도 손길을 뻗쳤죠.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의 팽창 경로가 육상에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랍인이라고 하면 <사막과 낙타>라는 이미지 때문에 자칫 이들이 바다와는 무관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당시의 아랍인들은 홍해나 인도양 무역 등을 통해 상당한 해양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삼각돛 또한 본래 인도양 동쪽 유역에서 사용되던 것이 아랍 상인을 통해 지중해로 전래된 것이라고 하죠. 그러니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에서 출항하여 지중해를 휘젓고 돌아다니는 사라센 군의 함대는 비잔틴 제국으로서는 크나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라센 군의 서방으로의 진출은 투르&푸아티에 전투를 통해 일단 좌절됐지만 비잔틴 제국에 대한 침공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죠. 우측은 그 개요.]

 652년에는 아랍인들에게 점령된 이집트를 탈환하기 위해 출동했던 비잔틴 함대가 나일강 하구에서 격파되고 터키 남부 해안에서 벌어졌던 해전에서도 사라센 측이 승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기세를 탄 사라센 군은 이후 북아프리카 지역으로까지 팽창을 계속하는 한편, 673년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공략에 착수하여 3년 동안 도시를 포위하기도 했죠. 이 기간 동안에 앞서 언급한 칼리니코스에 의해 <그리스의 불> 기술이 개발되었으며, 비잔틴 함대는 콘스탄티노플 내부에 정박하면서 게릴라전 식으로 기습을 반복하다가 결국 677년에 벌어진 실라이움 해전에서 <그리스의 불>을 활용하여 사라센 함대를 완전히 격파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을 구해냈습니다.


[사라센 군의 함대에 대항해 응전에 나선 비잔틴 해군의 군선들.]

1) 사라센 군의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략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2차 공세는 717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공세에서 사라센 측은 지상군 병력 80,000명 외에 군선 400척을 포함한 1,800척의 함대를 동원했는데, 그중 함대는 시리아에서 출발하여 터키 남단을 돌아 다다넬즈 해협을 거쳐 콘스탄티노플 앞에 도달했죠. 그러나 사라센 함대는 비잔틴의 그것에 비해 규모는 컸지만 지형 상의 이점과 <그리스의 불> 때문에 좀처럼 우위를 얻지 못하고 소강상태로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라센 군의 군선을 불태우는 그리스의 불. 이는 실로 제국의 수호신이라고 할 만 했죠.]

 이듬해 봄이 되자 사라센 군은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로부터 각각 400척과 360척의 함대를 추가로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외견상의 증원과는 달리 실상은 좀 더 복잡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는 증원된 함대의 승조원 대부분이 최근에 사라센 군에 의해 정복된 지역의 기독교도들이었기 때문이었죠. 자연스레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센 함대 정박지에서는 탈주자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사람과 더불어 정보 또한 비잔틴 측으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이에 비잔틴 측은 사라센 함대의 정박지를 포위한 후 기습공격을 가했는데 여기서도 <그리스의 불>이 크게 활약하여 사라센 측은 800척에 달하던 함대의 대부분을 상실하거나 큰 피해를 입고 말았죠. 이후 지상전에서도 지리멸렬한 상황이 이어진데다가 발칸 반도 북방의 불가리아 인들까지 비잔틴 측에 가세하자, 사라센 군은 그야말로 오도 가도 못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사라센 측의 곤궁을 잘 보여주는 당시의 기록입니다.

 ‘아랍인들은 육지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수비군과 불가리아 인에 의해, 해상에서는 비잔틴 함대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식량을 찾기 위해 주변 지역을 돌아다녀야 했지만 자신들의 숙영지로부터 4km 이상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불가리아 인들이 아랍인들을 도륙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중략...) 겨울이 찾아 왔지만 아랍인들은 퇴각을 꺼려했다. 우선은 그들의 왕 때문이었고, 그 다음은 바다와 불가리아 인 때문이었다. 이내 죽음의 기미가 그들을 덮쳤으며, 아랍인들은 포위당한 비잔틴인들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굶주림이 너무나 극심했기 때문에 밀 6kg가 10데나리우스에 거래되었으며 아랍인들은 군선의 쓰레기를 뒤지거나 심지어 죽은 자의 시체를 먹기도 했다.’

 겨울이 지나자 사라센 측은 결국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포기하고 퇴각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고 비잔틴 함대의 추격과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으로 인해 사라센 함대는 대부분의 선박을 잃고 말았다고 합니다.


[1204년의 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기울어져 가던 제국의 운명에 쐐기를 박은 셈이었죠.]

2) 비잔틴 해군의 퇴조
 이후 비잔틴 제국은 재차 중흥기를 맞아 아랍인의 침공으로 상실했던 소아시아 등의 영토를 되찾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국력은 차츰 소모되어 갔고, 726년 이후부터는 교리상의 문제를 구실로 서유럽 측과도 갈등을 벌이게 되었죠. 이러한 상황 하에서 로마 멸망 후 지중해를 부분적으로나마 지배해왔던 비잔틴 함대 또한 점차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비잔틴의 해군을 대신하여 지중해를 둘러싼 투쟁의 장에 오르게 되는 것은 이탈리아의 해양도시들이었죠.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김주식, 『서구해전사』, 연경출판사, 1997
- 라이오넬 카슨, 김훈 옮김, 『고대의 배와 항해 이야기』, 가람기획, 2001
- 제임스 L. 죠지, 허홍범 옮김, 『군함의 역사』,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4
- 기우셉 피우라반조, 조덕현 옮김, 『세계사 속의 해전』, 신서원, 2006
- Robert Gardiner, The Age of the Galley, Conway Maritime Pres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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