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함 거포 주의의 상징인 전함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2차 대전의 상징이 되어 버린 독일 해군의 전함입니다.
독일 해군에 히틀러가 괴링의 감언 이설에 속아 공군에 쏟은것의 1/4라도 투입 하였다면
초기의 영국 전투는 물자 공급의 차질을 빗은 영국의 참패로 끝났을 겁니다.
당신 해군 지휘부는 영국을 고립 시키기 위한 잠수함의 전반도 되지 안는 수로 작전에 입안 해야 하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의외로 분전하여 해군의 명성을 유지 하지만,
결국 해군은 다른 군에 비해 지명도도 전쟁 공여 도도 낮은 존재로 절락 합니다.
그러 와중에 개전전의 해군몫의 예산으로 만들어 놓은 전함중에 그 유명한 비스마르크가 있습니다.
39년 2월 진수식을 통해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결국 목표로 인식시키는 행사죠.
다가올 전쟁에 의해선 말이죠.
동년 12월의 사진으로 무장 장착 단계입니다.
완전히 개장된후 바다에서 운영 훈련중의 재보급 장면입니다.
비스마르크의 함장 린데만이 승무원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장면으로 첫 출발이 마지막이 되어 버린 다가온 전투의 서막을 알리는 최후의 출격입니다.
1941년 5월 19일 새벽... 드디어 비스마르크와 그의 오른팔 프린스 오이겐호는 닻을 올리고 코텐하펜 항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5월 22일... 비스마르크는 야음을 틈타 노르웨이를 빠져나와 항로를 북서로 잡고, 덴마크 해협을 향해 순항하합니다.
때맞춰 대서양의 기상은 점점 악화되어, 짙은 구름이 낮게 깔렸고, 덴마크 해협에 접어들면서, 자욱한 안개로 시계 거리는 더욱 좁아졌고,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호는 서로 놓치지 않기 위해, 점멸등으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항진을 계속합니다.
한편 비스마르크가 노르웨이를 벗어났다는 급보를 접한 영국의 토베이 제독은 전함 킹 조지 5세를 기함으로 삼고,
항모 빅토리어스(Victorious)를 대동하고, 순양함 리펄즈(Repulse)와 6척의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앞서 출발한 홀랜드 제독의 뒤를 따라 출진에 나섭니다.
비스마르크를 잡기 위해 총출동한 영국 함대
5월 23일.... 아이슬랜드와 그린랜드 사이 좁은 덴마크 해협엔 빙산이 떠다니고, 안개까지 짙게 내려앉은 북대서양의 바다한 가운데서
토베이 제독의 명에 의해 이곳을 순찰 중이던 영국의 두대의 순양함 노포크와 써포크는 빙산 뒤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괴물을 발견합니다.
사실 발견이라기 보다는 조심조심 바닷물을 헤지며, 바닥을 보며 나아가다가, 갑자기 거대한 발을 보고는,
고개를 들었더니, 무시무시한 괴물의 얼굴 바로 아래였다고 표현하는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영국의 순양함 둘은 기겁을 했고, 쉴새없이 무전을 날립니다.
"드디어 적 전함 한척, 순양함 한척 발견.... 거리 10 여 km....."
비스마르크의 38 cm 주포의 사정거리가 30 여 km에 이르는 것을 고려해 볼때,
덩치와 완력으로는 상대도 안되는 이 두 영국 순양함의 당시 똥줄타는 심정이 이해가 갈만도 합니다.
5월 24일 새벽 5시 37분... 드디어 독일의 두 거함과 영국의 거함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35 km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영국 전함 후드는 비스마르크에 비해 주포의 사정거리가 짧기 때문에, 사정거리내로 빨리 파고들어야만 했습니다.
홀랜드 제독은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전속력으로 적함쪽을 향해 나아가게 했고 선두에 선 전함을 비스마르크로 판단하고, 첫 포문을 엽니다.
바로 그때 홀랜드 제독은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선두에 선 적함을 비스마르크로 오인했는데, 그것은 프린츠 오이겐이었고, 비스마르크는 바로 뒤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였습니다.
곧바로 타겟을 다시 수정해 비스마르크를 향해 주포를 돌리고 난리 법석을 치뤄야만 했고
바로 얼마후, 독일 프린츠 오이겐의 주포가 후드의 선체 중앙을 정확히 명중하면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였고
연이어 터진 비스마르크의 38 cm 주포의 다섯번째 일제 사격이 후드의 중앙 선체를 정확히 가격합니다.
후드는 운이 없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명중탄이 곧바로 탄약고의 폭발로 이어졌고, 후드는 두 동강이가 나면서,
차가운 대서양 바닷속으로 격침됩니다.선체 전부가 수면위에서 사라지는데 단 3분이 채안걸렸고
홀랜드 제독을 비롯한 1418명에 달하는 전승무원이 폭발과 연이은 격침으로 일시에 전사합니다.
이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이는 단 3명이었다고 합니다.
5월 25일 새벽....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비롯한 3대의 영국함이 레이더의 촉각을 세우고 비스마르크를 계속 쫓다가,
새벽 4시경.... 비스마르크의 갑작스런 항로변경에 영국의 레이더에서 비스마르크가 사라져 버립니다.
써포크는 토베이 제독에게 무전으로 " 비스마르크를 놓쳤다"는 급보를 전했고 토베이 제독은 안달이났지만,
비스마르크 역시 실수를 저지릅니다.
즉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영국의 감시망을 벗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본국에 전과를 보고하는 전문을 계속 날린것입니다.
그런데 토베이 제독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실수를 하게 되는데 비스마르크의 무전 발신지를 포착한 직후,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해도에 표시하면서, 전혀 엉뚱한 곳에 그려 넣은 것입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 대신 달려온 전함 로드니(Rodney)와 토베이 제독의 킹조지 5세가 아무리 그곳 일대를 뒤져도 비스마르크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던건 당연한 일이 됩니다.
5월 26일.... 초계중이던 카랄리나 수상기가 우연히 비스마르크를 발견합니다.
희소식을 접하기는 했지만 토베이 제독의 함대는 이미 비스마르크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제공권 영역안으로 들어가버리면, 이번 작전은 물거품이 되는 순간으로
토베이 제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스마르크의 속도를 죽여야만 했습니다.
당시 지중해에서 북쪽으로 급파되어 올라오는 H 함대가 비스마르크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토베이 제독은 H 함대 의 제임스 서머빌(James F. Somerville)제독으로 하여금, 공격케 합니다.
저녁 7시 15분 아크로열호에서 15대의 소드피쉬가 발진한 소드피쉬가 비스마르크를 발견한것은 밤 10시 47분으로
편대장 쿠드(Coode)의 지휘하에 일제히 어뢰를 투하하기 시작했고 비스마르크는 대공포화 전부를 열고 응사했지만,
어뢰 2발을 직격당하고 이중 한발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지만, 다른 한발은 극히 치명적으로
비스마르크의 후미를 강타하면서, 조타실이 파괴되었고, 방향타가 좌측으로 고정된 상태로 작동불능이 되어 버립니다.
비스마르크는 더 이상 방향 전환이 불가능한데다가, 계속 북서쪽으로 항진하게 되어, 회피는 고사하고
토베이 제독의 영국 주력함대를 향해 나아가게 된 것이다. 린데만은 본국에 타전 합니다.
" 현재 비스마르크 작동불능 상태임.... 마지막 탄 일발까지 응전 할 것임...."
5월 27일.... 영국 순양함 쉐필드와 작은 폴란드 구축함까지도 상처 입은 비스마르크 주위를 맴돌며,
일격을 노립니다.
사자를 보면 피하는 것이 하이에나들의 성향이지만, 만약 그 사자가 상처를 입고 있을 경우, 하이에나들은
개떼같이 몰려들어 백수의 왕 사자를 물어죽이는 것처럼 이제 상처입은 비스마르크는 한낱 구축함까지도
공명심에 불타오르게 만드는 희생제물에 불과한 좋은 먹이였습니다.
그리고 아침 8시 40분.....드디어 수평선 너머 23 km 지점에 영국 주력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니다.
토베이 제독의 기함 킹조지 5세, 전함 로드니, 그리고 첫 대면했던 순양함 노포크까지.....
첫 발을 날린 것은 로드니였고. 이어 킹 조지 5세도 포문을 열었고 절름발이 같이 느리게
그것도 고정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비스마르크는 숙련된 영국 포수들에겐 사격연습의 표적에 불과했다.
서로 포격전이 시작된지 약 20 -30 분 후인 9시 8분.... 선체 전면을 가격당한 비스마르크의 전방 주포 2문이 나가떨어졌고
다시 10 여분 후, 후방 주포 1문이 파괴되어 입을 다물고 맙니다.
또 그 얼마후 마지막 주포 역시 더 이상 응사 불능 상태가 되었고 이제 대적할 주포가 없는 비스마르크의 선내에서는
급기야 배를 포기하라는 마지막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이미 함장을 비롯한 갑판 상부 구조물에 위치한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상태였고 기관장이 대리 함장으로서 수병들의 하선을 지휘하게 됩니다.
뤼첸스 사령관, 린데만 함장을 비롯한 2400명에 이르는 비스마르크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으며,
생존자는 단 115명 정도였다고 또 일설에 의하면 승무원 중 400명은 실전 훈련을 위해 선승한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이었다고 하는데, 그나마 해군 전력이 약하던 독일로서는 막대한 인적 손실이라 아니할수 없었습니다.
1941년 5월 비스마르크의 침몰은 해전 사상 거함거포주의의 종지부를 찍었다 할수 있는 대사건으로.
구식 복엽기의 공격이 이 거함을 격침하는데 결정적인 공헌한 것과 이제 제공권이 받쳐주지 않는한
덩치 큰 전함이 더이상 설 자리가 없음을 증명합니다.
이후 독일의 해군은 더욱 소극적인 행동을 보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고,
이어 투입된 형제함 틸피츠 역시 그 형 비스마르크를 따라 비운의 최후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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