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영국
1차대전 당시의 막대한 전비 지출로 세계 최대의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락한 상태였습니다. 독일의 통상파괴 작전으로 인해 전체 해운의 40%가 파괴되었고, 전쟁 중 군함 건조에 집중된 조선업 때문에 전후 민간 수요의 충족을 위해서 미국, 일본,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다른 나라에 의존해야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정부 예산의 40%가 전쟁 비용 확보를 위해 발행한 국채의 이자로 나가는 파행적인 경제 상황하에서 건함계획은 커녕 기존의 함대 유지마저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또한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군비 증강에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일본
1차대전 특수가 끝나면서 실업, 인플레 등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애시당초 경제 규모가 미,영에 비해서 작은지라 건함 경쟁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은 더욱 커서 1921년 미국은 국가 예산의 12%를 군비에 지출한데 반해 일본 해군은 35%이상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88 함대 건설에 필요한 10억엔에 달하는 건함 비용은 국고에 막대한 부담이 되었기에 균형 예산을 위해 어떻게건 군비 축소를 실시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미국
1차대전을 통해 영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대건함계획은 미국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어서 정부 재정의 확대와 이를 위한 높은 세율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반전사상이 확산되고 전통적인 고립주의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군비 감축 여론 역시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20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하딩이 '평화와 안정'을 강조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결과 선거 공약 준수를 위해 국제적 긴장 완화와 군비 경쟁 중지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기존의 영일동맹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1차대전 종전 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대두는 영국과 미국을 자극했습니다. 당초 일본측의 영일동맹 목적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였고, 노일전쟁으로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이후에는 태평양에서의 독일 세력 저지가 그 목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차대전으로 독일의 위협도 제거된 상황에서 영일동맹은 그 존재의의가 의문시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일본의 급격한 군사적, 경제적 팽창은 태평양의 패권을 노리는 미국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이었고, 영일동맹이 존속하는 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은 홀로 영국과 일본 해군력에 맞서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습니다. 영국도 영일동맹에는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 태평양에서 영국의 이익을 위협하던 러시아와 독일은 사라졌지만, 이젠 일본이 영국의 이익을 위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16년 체결된 러일밀약과 중국과의 21개조를 통한 대륙 침투는 영일동맹을 근본적으로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일본과 미국간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영국은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요 해군국들의 상황이 맞아떨어져 미국의 제안에 의해 1921년-22년 겨울에 워싱턴에서 해군군축회담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각국의 협상 전략
미국
해군군축회담을 제안한 미국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영국과 동등한 세력의 확보, 그리고 일본 해군 세력의 최소화였습니다. 이에 따라 최초의 목표는 미,영,일,불,이의 해군력 비율을 10:10:5:5:5로 맞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구상은 곧 벽에 부딪히는데, 현재 보유한 세력 비율을 기준으로 군비를 제한해야 하는가, 장차 건조될 함정을 포함하여 제한해야 하는가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921년 기준으로 영국은 미국보다 40% 이상, 미국은 일본보다 68% 이상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각국의 보유량은 7:5:3)따라서 이에 따르자면 일본은 어떻게건 최대한의 허용범위 내에 들어가 있다고 보더라도 영국의 우위를 인정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한편 1916년 건함 계획이 완료되는 1928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미국과 영국은 동등한 세력의 함대를 보유하게 되지만, 일본이 미국의 85%에 달하는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는데(5:5:4)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미국은 계획된 16척을 전부(콜로라도급 4척, 사우스다코타급 6척, 렉싱턴급 6척. 이 중 콜로라도급 1척은 이미 완성), 영국도 계획 중인 4척을 전부(G3급 4척) 건조하고 일본은 계획중인 15척 중 7척을(나가토급 1척, 아마기급 4척, 토사급 2척) 건조,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아직 건함 계획이 없지만 일본과 동등한 수준을 인정한다는 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1928년 영국과 미국은 약 100만톤의 주력함을 보유해서 동등한 규모에 이르고 일본은 미국의 56%를 보유한다는 '이상적인' 비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안은 일방적으로 미국에게만 유리한 안이었기에 그대로 폐기처분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미국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Stop Now'계획이었습니다. 이는 5개국 모두가 즉각 모든 건조, 계획을 중지한다는 안으로, 영국, 일본 양국 모두에게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이에따라 1921년 11월 12일, 개회식 연설에서 미국 국무장관 휴즈(Hughes)는 향후 10년간 주력함(Capital ship)의 건조를 중지하는 해군 휴일(Naval holiday)의 설정과 모든 주력함에 대한 즉각적인 건조 중지, 그리고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의 함정 보유 비율을 5-3-1.75로 제한하고, 비율을 초과한 함정에 대한 즉각 폐기를 제안했습니다.
영국
영국의 목표는 미국과 동등한 규모의 함대를 유지하면서도 가능한한 최대한의 군비 축소를 시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태평양에서 일본과 동일 수준의 해군력 보유를 위해 일본 해군력의 2배에 달하는 세력의 보유를 주장했습니다만, 미,일의 반대로 일본이 미,영의 60% 수준을 보유한다는 안에 동의했습니다. 또한 1차대전 당시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잠수함의 크기, 숫자에 대한 제한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해외 경비와 통상로 보호를 위해 순양함의 보유량은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져 워싱턴 조약의 중요한 맹점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일본
극동에서의 자국 이익 보호를 위해 영,미에 대해 70%의 주력함 보유를 요구했는데, 이는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상정한 이후의 해군력 건설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단호한 반대에 직면해 결국 태평양에서 영미일 3국이 해군기지를 건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60%안을 수락했습니다.
프랑스
프랑스의 해안의 방대함 - 지중해와 대서양에 동시에 접하고 있는 - 을 들어 이탈리아 이상의 규모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현재 보유 중인 7척의 노급 전함을 전부 보유하고, 3척의 전노급 전함의
보유도 인정하면서 현 7척의 전함 162000톤 이상인 175000톤을 보장하자 잠수함과 순양함, 그 밖의 보조함은 공격적 병기가 아니라 자국 해안을 지키는 방어적 병기라는 이유로 제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동의했습니다
이탈리아
양에 관계없이 프랑스와 동등한 비율이라면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워싱턴 조약의 결과
미국
델라웨어 급 이전에 건조된 구식 전함과 건조중이거나 예정이던 함정을 합해 846000톤을 폐기시키면서 주력함 18척, 500650톤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중 델라웨어와 노스 다코타 2척은 콜로라도와 웨스트 버지니아가 건조되면 퇴역해서 총 525850톤을 보유할 예정이었습니다.
미국은 사상 최대의 건함 계획을 포기하는 등 많은 양보를 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장 큰 수혜자였습니다. 영국과 동등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일본에 대해서는 우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데다 영일동맹을 폐지하고 일본의 대륙정책을 견제하는 등, 당초의 목표를 모두 달성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미국이 포기해야만 했던 함정은
완성되지 못한 몇척의 전함과 계획들 뿐이었고, 그나마도 렉싱턴급 순양전함 2척은 항모로 개조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킹조지5세 급 이전에 건조된 구식 전함과 건조 계획함을 포함해 583000톤을 폐기시키면서 주력함 22척, 580450톤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 중 킹조지5세급의 4척은 신형 전함 2척이 건조되면 퇴역해서 총 558950톤을 보유할 예정이었습니다.
세계 유일의 최강 해군의 지위는 포기했지만, 미국과의 균등 해군력의 허용은 대서양에서는 영국이 패권을 장악하되 태평양에서는 미국의 패권을 인정해서 일본 해군력의 신장을 공동으로 억제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후의 경제적 피폐에 따른 부득이한 선택으로, 미국과의 군비경쟁은 해소되었지만 전통적 해양전략인 2국표준주의(Two power standard)는 붕괴되었고 이는 수세기 동안 유지해온 해양력의 절대적 우위를 마감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일본
공고급 이전에 건조된 전노급의 구식 전함과 건조중이거나 예정이던 함을 포함해 299700톤을 폐기시키면서 주력함 10척, 301320톤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워싱턴 조약으로 일본은 자국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주력함에 대한 5:5:3의 비율은 불리했지만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의 두 해양을, 영국은 7대양 전역에 함대를 두어야 했기 때문에 태평양에 한해서는 그다지 큰 열세에 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태평양의 해군기지 건설 금지는 미국과의 전쟁시 미해군은 하와이에서 출격해야만 한다는 불리함을 의미했습니다.
이처럼 명목상으로는 세계 3위의 지위를 인정 받았지만, 영일동맹의 종료로 아시아에서 일본의 고립을 가져왔고 중국 진출을 확대한 미국과의 직접적인 갈등을 불가피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당초에는 성공적인 협상으로 간주되었던 워싱턴 조약은 이후 군국주의화가 진행되면서 해군의 목표였던 대미 70% 함정 보유 실패를 이유로 군부의 큰 불만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당초 보유하고 있던 노급, 전노급 전함을 거의 그대로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조약의 범위 내에서 1927년, 29년, 31년에 각각 1척씩의 대체함을 건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체함의 건조는 30년대 들어서야 시작되었습니다.
일단 워싱턴 조약의 체결에 의해 전함 분야에서의 건함 경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만, 질적 제한만이 가해졌을 뿐, 양적 제한이 없었던 보조함 분야에서는 곧바로 치열한 건함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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