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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4

구름위 2013. 2. 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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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4

4) 훈련도감 사례로 본 조선군의 병참상의 문제와 수레운용


이미 수레와 복마(짐말)이 가지는 조선군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기본적으로, 1인의 식사량에 대한 논의의 경우, "청장관전서"에는 성인남성이 한끼에 7홉의 쌀을 먹는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한끼당 식사량을 좀더 자세하게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大男은 7홉, 中男은 5홉, 小男은 3홉을 먹으며, 大女는 5홉, 中女는 4홉을 먹는다고 하였다. 28)

우인수 교수의 조선후기 서인계열의 이유태의 정훈을 토대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유태 집안의 노의 경우 6개월은 세끼, 6개월은 두끼를 먹는다고 하였다. 28) 이를 고려하면 대체로 상대적으로 건장한 체격일 가능성이 높은 훈련도감의 직업병의 경우 최소 한끼에 5홉, 하루 두끼로 1되의 최소식사량을 가정할 수 있다. 최대로 잡을 경우, 하루 세끼 2되까지 식사량이 증대한다. 현대의 쌀 한섬은 180리터로, 도정한 쌀인 경우 144kg이다. 즉 리터당 0.8kg의 무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1되의 리터기준은 현대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1되는 연구자들에 따라 최소 0.518리터에서, 최대 0.5967리터로 추정되어지고 있다.(현대 기준으로 1말은 18리터, 1되는 1.8리터) 29)

그렇다면, 조선후기 1일 성인남성의 최소식사량을 1되로 잡았을 때, 최소 414g에서, 최대 477g의 쌀을 소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를 훈련도감의 편제상 1개 대, 즉 10명의 1대에 1명의 복마군이 편제된 구조에 따라 적용될 경우에, 1필의 복마가 지게되는 60kg의 무게를 비교하면 편제상 어느정도의 병참이 가능한지 추정이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 복마가 소비하는 콩을 고려해야 한다. 콩의 경우, 대두로 추정되는데, 1리터당 0.75kg정도의 무게를 가진다. 현대 마필의 1일사료 섭취량은 9kg으로 이중 농후사료인 곡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50%로 그렇다면 4.5kg의 곡류를 1일에 섭취하나, 19세기의 영국 정치가 조오지 커즌이 1894년 조선을 방문한 "Problems of the Far East"나, 조랑말을 타고 금강산을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기록에 따르면 식사량이 그다지 많지 않으며 200파운드까지 짐을 진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훈련도감의 마필보유자에 대한 추가 봉급은 쌀이 1말, 콩이 9말이다. 이중 콩이 사료용인 걸로 추정할 경우, 최소한 대두기준으로 46kg에서 53kg을 1달동안 섭취하고 최소로 잡았을 때 1일 콩류의 섭취량은 1.53kg이다.

이것으로 계산할 경우, 1개 대(살수던 포수던)를 구성하는 10인과 복마군 1인의 11인의 식량인 약 4.5kg과 말사료용 콩 1.53kg을 합한 약 6kg정도가 1일 필요한 곡류라고 할 수 있다. 마필이 기준량 60kg을 실을 경우, 보급량은 10일을 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개개인이 추가로 상당량의 식량을 지참하지 않을 경우, 조선 최대 정예군인 훈련도감병력의 작전가능거리는 도보로 10일 이내여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복마던, 전마던 간에 조선시대에는 조정과 군을 비롯하여 지속적인 전마 및 복마의 유지문제에 시달려왔다는 점과 조선후기 제주마의 품질하락과 짐말사용과정에서의 폐사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하며, 상기한 소비량 기준이 항상 최소기준에 맞춰진 것임도 고려되어야 한다. 게다가, 훈련도감에는 국출신, 별기군을 비롯한 병력과 대량으로 곡류를 소모할 마병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만기요람 군정편에 따르면 훈련도감에는 전마가 별무사 25필, 마병에 좌마병 214필, 우마병 231필로 470필의 전마와 334필의 복마가 있었다. 병력은 별무사와 국출신, 마병과 살수, 포수, 제색표하군을 비롯하 5801명의 병력이 편제되어 있었다. 12)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수레가 9량 있었으나, 이것은 주로 도감의 24척의 직속 수송선이 실어오는 쌀과 물자를 이송하는 용도로 추정된다. 복마 334필은 규정상 20톤정도를 수송할 수 있다. 훈련도감 전체의 식량소비량을 추산하면 먼저 1일 소비되는 말사료용 대두가 1224kg, 일일 2끼, 중남기준으로 했을 때 2401kg이 소비된다. 총 소비되는 곡류는 1일 3625kg으로 이 경우 훈련도감이 행군을 개시한 6일째에 식량 및 마초가 모두 소모된다.

물론, 개개인이 추가로 식량을 지참하는 경우에는 조건이 개선된다. 만기요람상의 포수기준으로 대략 2.7kg의 조총과 0.9kg의 환도, 연환 50개무게 1kg정도를 지참하는데 대략 4.6kg이다. 여기에 12냥 5돈의 화약을 합하면 5kg, 유삼이나 갑주를 지참하지 않는 경우 개인의 군용장비의 무게는 5kg수준이다. 여기에 15kg정도의 물자를 전체 병력이 지참하는 경우 작전가능일수는 30일로 늘어난다. 그러나 여기에 복마는 추가로 여분의 화약과 연환을 비롯하여 만약 화포를 지참한다면 더 힘들어지며, 개개인의 병력은 번갈아가며 거마창이나 녹각목을 지참할 의무가 있었다. 즉 조선군 최정예군인 훈련도감의 병력의 평시 작전가능일수는 10일 이하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지 군량문제에 집중되 있으나, 조선군의 병참능력상의 문제는 화약이나 탄환, 화살과 같은 소모품에서도 가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군의 병참사정은 호란과정에서도 드러난다. 1637년 홍명구, 류림이 이끄는 평안도 근왕병은 평안감사 홍명구가 2000명을 이끌고 자모산성에서 방어하다. 12월 14일 평안병사 류림과 합류, 도합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월 26일에 김화로 진입했다. 27일에 당시 일대에 배치되었던 청군 우익군 6000여명의 병력이 접근해왔고, 28일의 전투에서 홍명구군은 전멸, 류림은 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하루내내 격전을 벌였고 해가 지자 탄환 및 화살의 부족으로 야음을 틈타 적을 기만하고 후퇴했다. 30) 단 하루만의 교전으로 인해 화기위주의 조선군이 교전을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광교산 전투에서는 전라병사 김준용의 전라도 근왕병 선봉군 2000명은 1월 4일에 광교산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군량등 군수물자를 비축했다. 전투는 1월 5일부터 6일까지 청군의 지속적인 공세를 조선군이 격퇴해내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6일 밤 김준룡은 식량과 화살의 부족으로 인하여 후퇴해야 했다. 3일만에 2000명의 선봉군이 보유하고 비축했던 군량 및 물자가 소모되어 전투가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0)

이러한 문제는 실질적인 전술운용보다 대규모 정규전 상황에서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다. 정조대에 치열하게 일어났던 병학지남에 대한 유효성논쟁이나 전차전의 도입논의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이러한 취약성은 조정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이는 적대지역에서의 원거리 작전에서의 독자적인 병참체계유지보다는 대체로 국내에서의 작전이 대부분으로 군사적 분쟁상황과 점점 거리가 있게된 조선후기의 필연적인 결과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조선 자체 내에서 그러한 병참능력을 구축하기 위한 기간이 마련되어있지 않다는데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해상수운 위주로 유통로가 유지되고 육상도로가 미비했기 때문에, 수레를 위한 기본적인 기술발전과 도로가설을 위한 충분한 노력도 견지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실지로, 전차운용과는 별개로 수레의 도입과 운용에 대해서, 심지어 19세기 중반의 헌종때까지도 조정내에서는 험지에서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지상에서 배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오히려 수레를 사용함으로서 이에 익숙치 않은 말이 잘 죽는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조선의 수레의 문제점은 조선에서는 일반적인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는, 즉 산지가 많은 조선의 지형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숙종때에 논의된 전차역시 독륜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풍천유향"의 검거 역시 세로로 2개의 륜이 달린 독륜거형태를 취한다. 특히 독륜거는 우마가 끄는 것이 아니라 인력을 활용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숙종 36년 10월 10일자 실록에 의하면 민진후가 북경에 갔을 때의 독륜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수어청에서 양륜거를 제작하였는데, 이 역시 우마를 사용하기 위해서보다는 독륜거를 조선인이 익숙하게 사용치 못하여 양륜거를 제작해서 사람이 끌게 하였다고 언급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산지의 험함으로 인해서 인력을 통한 독륜거가 사용되야 하고 수레가 적합치 않다는 주장은 합리적인가? 이에 대해서는 정조대에 홍양호가 명백하게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정조 7년 7월 18일에 대사헌 홍양호는 사행과정에서 중국에서 본 수레의 활용에 대해서 논하면서, 섬서, 관중, 사천, 촉도의 험한 길과 강소, 절강, 광동의 먼길을 다수의 상인들이 수레를 활용해 드나드는데, 이것이 짐말을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펼리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수레 1량이 5, 6마리의 말이 끌어도 수십필이 적재하는 것과 맞먹게 적재가 가능한데 도로가 험악하고 우마가 희소해 이것이 불가능하다 주장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을 가한다. 중국의 촉도의 험준함과, 자신이 사행에서 실제 본 청석령과 마천령이 조선의 동선령보다 더했지만 수레의 사용이 일반적임을 들어 비판하였다.

홍양호는 국내에서도 영남의 안동, 의성, 해서의 장연과 신천, 관북의 함흥등 우차의 사용이 잦음을 언급하면서, 문제는 제작이 조잡하여 운행에 불편이 많음을 언급하였다. 이외에도 정의조는 함흥에서 수레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데 이를 수원부에 적용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조선후기에는 지형이 험한 함경도, 북관지역에서는 민간에도 소가 끄는 우차가 매우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 홍의영(洪儀泳:1750∼1815)이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 일대를 답사하고 그 연혁과 정황 및 자기의 개혁안을 엮어 조정에 올린 "북관기사"에는 소 1마리가 이끄는 대차가 2, 3마리의 말이 지는 짐을 끌 수 있고, 함흥에는 모두 수레를 이용하기에 등에 짐을 진 소가 없다고 언급한바 있다. 31)

지형이 평탄치 않은 함경도는 조정의 엄격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민간이 편의를 위하여 도로를 개척하는 일이 잦았고 개시와 후시를 통해서 상업경제가 융성해짐에 따라서 조정이 백성의 사치함으로 인해 검박했던 풍토가 바뀌고 있음을 걱정할 정도로 민간경제가 성장하였다. 민간경제의 성장과 외부문화의 높은 유입가능성등이 종합되어 함경도 일대에서 수레는 보다 일상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산지지형과 수레의 활용은 그다지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다른 문제는 이 시대의 전마, 복마용 마필의 청국에 대한 의존도 심화에 있다고 봐야한다. 청과 실질적인 교전관계가 야기되지도 않았고, 국내에서 마필에 의한 유통인프라의 의존도 역시 일부지역에 국한된 것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청마(청에서 수입된 말)에 대한 심각한 의존과 북마(조선 북부지역에서 생산되어 전마로 활용된 말)나 제주마의 품질저하는 청마가격의 저하와 유입증대로 인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청을 가상적으로 수립하고 조선군이 충분한 병참체계를 위한 수레의 활용을 상정할 경우에는 높은 청마에 대한 의존도는 문제가 될 만 하다.

특히 공식적인 개시 내에서의 마시는 청과 교역 초기에 군사적 필요성과 함께 만주지역의 농경화를 위한 농우의 필요성이 증대됨으로서 불리한 교역비로 청마를 농우와 북마로 교환하여 북마의 유출로 인해서 우수한 종마가 대거 유출됨으로서 북마의 생산능력이 저하되었고 목마장이 농경지로 전용되는 등의 관리소홀, 그리고 조선후기 가시화된 제주마의 품질저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숙종 36년 이후 청마와 소의 우마교역으로 전환되고 3영의 마병증가로 인해 전마의 수요는 증대되었고 북마의 품질저하(우수마의 유출)과 생산능력 저하와 개인의 말 수요 증가는 조정의 마필부족을 심화시켰다. 영조대에는 종마수입을 통한 마정쇄신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31) 게다가 강희제 이후 청이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전마의 수요가 줄고, 만주개발로 농우수요가 증대되며, 만주에서의 말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여 청마공급이 증대됨으로서 31), 청마의 유입이 국내의 목마장의 경제성을 더욱 하락시켰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여건상으로 순조대까지, 훈련도감과 같은 중앙정예군에도 기본적인 병참체계가 구축되지 못하고 복마위주의 병참체계가 유지되었다는 점은, 화기중심의 보병을 핵심으로한 조선군의 군사체계가 단순히 전술운용상의 문제를 넘어선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는 조선의 근본적인 경제적 인프라라는 배경을 제외하고 생각할 수는 없으나, 상대적으로 병참체계가 중요한 화기중심의 군사체계를 구축한 국가가 북벌이라는 국가의 중차대한 전략을 한때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본적인 고려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군사체계의 발전과 삼수병체계를 비롯한 전술운용의 논의가, 근본적인 전례의 부족과 잘못된 관점으로 인해 탁상공론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감히 내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