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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5

구름위 2013. 2. 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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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5


5) 아일랜드 사례로 본 조선군의 이상적 군사개혁과 그 현실성


16세기 중반에서부터 후반까지 이어진 아일랜드 토착세력과 영국사이에서 벌어진 아일랜드 내에서의 전쟁은 상대적으로 가장 전장환경이나 야전에서의 병력구조면에서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군에 비교할 만한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정치, 문명수준면에서는 중세의 부족사회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아일랜드의 정치적, 경제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의 자연환경과 아일랜드 토착 반란군(영국의 입장에서)의 특징은 조선군과 여러면에서 비교할 만 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는 조선과 같이 산지지형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삼림지대, 늪과 소택지, 낮지만 다수의 구릉지대가 분포하였으며, 도로가 발달하지 못했다. 1560년에 반란을 일으킨 Shane O Neill의 병력은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부대, 특히 Galloglass와 같은 주로 스코틀랜드인과 같은 외국인으로 구성된 도끼로 무장한 중장보병이나 Kern같은 아일랜드의 토착민으로 구성된 경장보병들과 같은 전통적인 도검병과 화승총을 결합하여 Glentaisie 전투에서 영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9) 아일랜드 반란당시의 영국군은 헨리8세 시대의 Bill과 장궁위주로 무장한 전통적인 영국군에서 Caliver(화승총의 영국측 표현)와 파이크로 무장을 대체하는 Trained Bands의 새로운 민병체제로 변환되었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서유럽의 파이크-화승총의 결합으로 구축된 전술운용이 전통적인 도검병에 대한 불리함을 증명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영국측의 기병과 파이크-화승총으로 무장한 보병은 야전에서 아일랜드 반란군을 완전히 압도했다. 대체로 초기에 전통적인 아일랜드 반란군은 평지에서 정규전을 벌이는 것을 극도로 회피하고 아일랜드의 삼림과 습지, 구릉지대를 통과하는 영국군을 매복지점으로 끌어들여 화승총사격을 가하고 대열이 흐트러질 때 일순간에 도검병이 돌격을 감행하는 수단을 활용했다. 최초의 돌격이 실패하면 아일랜드인들은 영국군이 공포에 질려 흐트러지지 않을 경우 공격을 포기하고 삼림지대로 도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 경우 영국군이 추격을 감행하더라도 지형상의 어려움과 아일랜드 경보병의 기동성때문에 대체로 실패하거나 또다른 매복의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32)

아일랜드군은 야전 및 공성전에서 대체로 대포를 활용하지 못했는데, 아일랜드군이 빠른속도로 화승총을 받아들이고 이를 민병에 가까운 Kern과 같은 경장보병이 활용하게 된 것과는 매우 판이하다. 아일랜드측의 Tyrconnell의 백작이었던 Hugh Oge O Donnell이 최초로 프랑스에서 도입한 포를 활용하였고 그의 아들 Manus가 1544년에 공성전에 포를 사용했다고 한다. Manus의 손자였던 Hugh Roe O Donnell이 스페인에게서 받은 1문의 포를 1599년에 Ballintober 공성전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대부분의 포는 영국군만이 사용했으며 영국군에서 다수의 포를 노획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군은 포를 활용하지 못했으며, 이는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다. 몇몇 학자들은 이를 도로의 부족과 지형의 문제로 보지만, 영국군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과 당시 아일랜드 반란군에 대한 기록을 남긴 영국의 여행가이자 작가인 pynes moryson은 그의 여행기에서 당시 아일랜드군이 대형 포를 다루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출신 포병이 아일랜드에는 극히 소수만 존재했다는 언급을 했다는 것을 통해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32)

조선군과 초기 아일랜드 반란군은 야전에서 주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 군사력에 대하여 평지에서 정면대응할 능력이 없었으며, 조선군이 청군 기병에 대해 취약했던 것과 같이, 아일랜드 반란군의 기병은 영국측 기병대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Kinsale 전투에서 영국측 기병은 전면전에서 아일랜드 반란군측 기병을 무너뜨림으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체로 아일랜드 기병은 유격전 위주로 운용되었고 경무장이었으며, 투창과 창으로 무장한 반면, 영국측은 상대적으로 갑주와 권총, 검과 창으로 무장하고 아일랜드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32) 청의 기병이 조선군 보병을 압도한 것과 비견할 만 하다.

아일랜드 반란군은 이러한 문제를 두가지 방법으로 완화시킬 수 있었다. 먼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아일랜드 반란군은 자신들이 익숙한 아일랜드의 지형, 구릉과 늪지, 삼림지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1597년 Turnhort전투에서 스페인 플랑드르군의 파이크대열이 기습당한 상황에서 네덜란드 기병에게 학살당했듯이, 아일랜드군이 매복한 지역을 지나가던 영국군 대열은 화승총 사격과 기습에 큰 피해를 입곤 했다. 영국군도 대체로 현지에서 징병한 보병전력을 활용했기 때문에 파이크대형은 이런 피해에 결연히 대열을 고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1593년 Erne ford 전투에서, 에른강 주면의 ford(여울)에 야전축성을 하고 영국군과 영국편에선 티론 백작(이후 아일랜드 반란군 개혁의 중심이 되는 인물)의 아일랜드 군에 대적하였다. 32) 이아전투에서 아일랜드 반란군은 패배했지만, 아일랜드 군은 행군종대의 측후방을 화승총과 도검병으로 기습하거나, 여울이나 습지, 삼림지대에 야전축성진지를 구축하고 매복하고 있다가 사격을 가하는 형태로 영국군을 패배시키곤 했다. 이러한 양상의 전투가 번복되면서, 유격전에서 활용가능한 검과 버클러로 무장한 병력이 화승총과 조합되었다고 제레미 블랙은 자신의 저서 "European warfare, 1494-1660 "에서 언급하고 있다. 9) 실제로 1597년 Blackwater전투에서 영국의 Thomas Burgh경은 아일랜드 반란군이 구축한 축성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직속 수행원인 gentlemen volunteer(요맨, 젠틀맨계층에서 상속재산이 없는 전쟁에 자원한 상류계층 자제들로서 당시 영국, 스페인에서 다수가 존재했으며 병사와 동일하게 전열에 참여하거나, 장교로 임관하곤 했다.)들과 뛰어 들었다. 당시 영국 장교계급은 주로 Sword and Buckler로 무장했는데, 이들이 그렇게 활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번째의 방안은 바로 아일랜드 반란군에 대한 서유럽 군사체계의 도입이었다. 티론의 백작이었던 Hugh O Neill이 그러한 혁신의 주도자였다. 그는 1585년 티론 백작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임을 받았고 1593년엔 아일랜드측으로부터 "그의 이름과 지역의 족장"으로서 인정받았다. 그가 1595년 반란군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그의 군대는 그의 동족들에 대적해 영국편에서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영국의 무기, 전술, 훈련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아일랜드의 용병인 갤로우글래스 중장보병과 스코틀랜드 용병인 "Redshanks(하이랜더를 뜻하는 속칭)"들을 현대화하고 파이크로 무장시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물론, 그는 1603년 항복할 때까지 이전의 전통적인 도검병을 완전히 퇴출시키지는 못했으나 그의 노력으로 1595년에는 그의 군대의 20%는 파이크병으로 구성될 수 있었다. 그 결과 평지에서 유지되던 영국군의 절대적 우위가 점차 약화되어 1596년에 영국의 정치가이자 재무차관이었던 Henry Wallop경은 아일랜드군이 영국군과 필요할 경우에는 야전에서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티론 백작은 필립2세와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받았고 200여명의 스페인 장교들을 파이크병을 교육시키는데 투입할 수 있었다. 32)

이 결과 티론백작은 1598년 Yellow Ford전투에서 영국군을 패배시키는데 성공했다. 아일랜드 반란군은 전통적인 야전축성과 함께 Arquebuses a croc(주로 양륜형 마차에 대형 화승총(소형화포에 가까운)을 설치한 일종의 전차)를 배치했고 목책을 설치했으나 영국군은 야포사격으로 이 장애물을 파괴하고 병력을 전진시켰으나, 티론백작 자신이 이끄는 기병 40기와 아일랜드 파이크병력이 영국군을 휩쓸어버렸다. 32) 이후 Kinsale전투에서 티론백작은 영국군에 의해 패배했다. 그러나, 짧은 시간동안 티론백작은 아일랜드 반란군을 재조직하고 전통적인 장점과 새로운 전술을 조합함으로서 아일랜드 반란군이 한 때 영국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조선군의 경우, 티론백작의 아일랜드 반란군에 비교할 때, 야전에서 일본이나 청의 군사력과 정면에서 교전이 가능한 야전군을 육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보병에 다수의 창병을 집중운용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적으로 우월한 조총의 화력을 활용할 여지는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Yellow Ford전투에서 보듯이, 여전히, 조선군의 포병전력이 충분히 구축되지 않는다면, 상대적으로 우월한 포병전력을 가진 청이나 가질 가능성이 있는 일본의 군사전력에게 취약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적절한 포가를 제작하고 보유할 능력과 이를 위한 병참체계구축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창병의 도입은, 대체로 보병이 조총과 환도 위주로 무장한 것을 고려할 때, 관점에 따라, 오히려 퇴보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독립전쟁간의 16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동안 화승총병과 파이크병의 비율에서 화승총병의 비율이 증대하는 원인은 화력증대를 위한 필요성이 증가되어서라기 보다는 전신갑주로 무장한 중장기병, Men-at-arms가 치륜식 권총으로 무장한 reiter와 같은 기병대에 의해 축출되면서 상대적으로 중장기병에 의한 위협이 감소되고 파이크병에 대한 Reiter의 위협이 증대된 것이 주요원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9)

당시 유럽의 경우, 중세의 기병위주의 군사체계가 보병중심적으로 전환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변천과정은 보병, 기병, 야포를 비롯하여 Trace italiane와 같은 축성체계의 변화, 야전축성의 출현등 복합적인 요인들의 통합적 결과였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 기간동안, 이렇다할 군사적 기술의 성장은 그다지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최근 전쟁사학자들이 보는 시각이다. 유일하게 기술발전으로 인한 군사적 혁명은 머스켓의 도입보다는(머스켓의 도입은 현재에는 단지 이후 기존의 화승총과 같은 활강총의 명칭으로 이어지는 것 이상은 아니라는 평가가 가해지고 있다. 6) )치륜식 권총의 등장에 있었다. 중장기병의 위협의 감소와 반대로 점차 경무장하고 권총으로 무장한 reiter이나 lancer과 같은 경기병의 등장, 프랑스의 위그노 기병대와 같은 기병전술의 변화가 보병의 파이크:화기 비율의 변화를 요구했던 것이다.

George Gush교수의 영국군의 1개 중대병력비중의 변화를 보면, 1558년대에 파이크병이 300명, 화승총병이 100명으로 3:1의 비율을, 1596년에는 파이크병이 50명, 머스켓이 12명, 화승총이 36명으로 1:1으로 변화한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군사적 발전이 낙후한 동부유럽의 경우 오히려 화승총비율이 더 높다. 폴란드군의 경우 1577년 키에프성의 여타 유럽국가의 중대급 보병제대인 rota의 편성표에는 111명의 화승총병과 34명의 파이크병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폴란드군의 100명에서 200명의 Haiduks라는 보병편제는 오스만군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경우는 전원이 화승총병으로 구성된다. 33)

그렇다면, 폴란드군의 보병편제가 가장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편제는 폴란드군이 보병을 기병을 화력으로 지원하는 보조적인 병과로 편제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적어도 17세기 후반, 18세기에 들어가서야 보병이 모두 화력위주로 편성되었고, 그것은 보병에 대한 훈련수준과 통제력이 강화되어 총검만으로도 스퀘어대형을 구축하고 기병의 공세에 대해 대열을 흐트리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화력의 강화로 파이크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보병화력의 강화로 인해 파이크를 줄이고 보병화력을 강화해야할 필요성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종합적인 요인들을 볼 때, 조선군이 야전에서 청의 기병이나 일본의 장창밀집대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창병의 도입은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여기에 경량화된 야포를 도입할 필요성도 존재한다.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보다 적극적으로 야전군에 필요한 마차위주의 병참부대도 필요하다. 이는 개별 병사의 무예훈련이나 인력을 활용한 전차의 운용보다 효과적으로 기병 및 보병의 백병전에 대응할 수 있으며, 공세적으로 운용이 가능하고, 소화기많이 아니라 대형화기에서도 화력면에서 가상적국을 압도할 수 있고, 장기간 작전이 가능하여 기존의 조선군의 작전적 한계를 타파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체계는 엄청난 비용을 소모한다. 단지 기존의 직업병인 훈련도감병 위주로 이런 편제를 도입하여 기존 중앙군제에만 이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나, 번상병, 지방군영에 이런 체제를 도입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창병과 조총병을 연계하는 대형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직업군인과 같이 지속적인 훈련이 요구된다. 영국의 Trained Bands는 유일하게 영국의 민병체계에 이를 도입하였으나, 이는 중앙정권이 무장과 훈련을 위한 재원을 지방의 도시와 지역커뮤니티에 부담지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당시 런던을 비롯한 영국 도시들의 경제적 성장으로 인해 가능했던 일이었다. 34) 상대적으로 Bill의 비중이 여전히 유지된 것은 Bill과 같은 폴암류의 유효성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런던의 Trained Bands에는 Bill이 한자루도 없었고, 상대적으로 빈한한 카운티에 Bill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이나, Bill과 같은 병기는 별도보관이 아닌 개인보관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34)

화승총이나 폴암류와 같은 병기는 상대적으로 평상시에 사용이 가능하거나 유효하고, 별다른 집단훈련이 필요하지 않은 반면, 파이크는 특히 집단훈련이 필요한 병기이며 다른 어떤 병기보다 훈련수준이 크게 영향을 미치는 편이라는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당연히 직업군인이나 지속적으로 훈련을 위한 재원이 보장된 민병만이 가능하다.

때문에, 아일랜드와 같이, 한반도의 산지 및 삼림지형에 적합한 유격전의 도입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조총병 위주로 편성하기 용이한 지방군영에 부담을 덜게하기 용이하고 비용효율적인 지방군사체계구축에 효과적이라고 보여진다. 실제로, 지속적으로 조선은 "견벽청야"의 전략을 추구했다. 산성에 의거하여 식량과 군민을 지키고 외부의 식량을 제거함으로서 도로사정이 좋지 않고 지형이 산지가 많은 환경을 활용하여 적이 물러가게 하는 전략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아일랜드 반란군이 활용한 소화기 위주의 매복, 유격전은 조선에서도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기존 삼수병에 대한 견해에 추가하여, 기병편제의 경우, 유럽에 비교한다면, 기존의 조선기병을 프랑스 위그노, 또는 스웨덴 기병과 같이 보다 경량화한 기병을 지향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상대적으로 중갑주로 무장한 여진기병보다 더 중장갑으로 무장했던 중장기병이 치륜식 권총으로 무장했던 Reiter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중장갑을 갖춘 청의 기병에 대적하기 위해서 치륜식 권총과 마상편곤으로 무장하고 갑주를 거의 제거한 경기병위주로 조선 기병을 편성한다면 더 효과적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마상전투의 경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18세기의 경우, 마상전투에서 경기병과 중기병간의 교전이 벌어지면, 상대적으로 경쾌한 작은 말에 탄 경기병이 우세했다고 한다. 16세기의 reiter과 같은 치륜식 권총으로 무장한 기병은 중장기병과의 교전시, 실제로는 Caracole과 같은 선회기동이 아니라 먼저 최초의 사격으로 중장기병을 노리고, 2번째 권총(3정의 권총 보유)으로 말을 겨눠서 사격을 가하고, 그 다음 중장기병 대열간의 간격으로 치고 들어가 칼로 벤 다음, 신속하게 이탈하여 재차 사격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6)

상기한 조선군의 야전군사체계의 개편은, 물론 먼 유럽에서의 전례들이라는 점에서 조선에 전파되어 군체제 개편에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장창의 도입, 야전포의 운용, 병참체제의 개선, 치륜식 권총으로 무장한 경기병과 같은 군사체계 변혁에 필요한 전례 및 경험, 기술적 수준은 이미 다 갖추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을 통해 장창밀집대형을 관측했을 것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임진왜란의 명군, 호란의 청군 모두 야전에서 이동가능한 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병참체제에 대해서 풍천유향을 비롯하여 수레의 도입을 논한 많은 언급들에 수레의 도입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개선한다거나, 또는 국경외에서는 소가 끄는 병참용 수레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치륜식 권총의 경우에도 이미 1612년 아륜철(부싯돌과 마찰하는 치륜)을 사용하는 지뢰 파진포를 국내에서 개발한 바 있고, 권총과 유사한 단총은 이미 기병이 활용하는 바였다.

그러나, 조선의 군사체계에 대한 개편안은 여전히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병학지남, 풍천유향을 비롯한 다수의 병서들이 중국의 척계광의 "기효신서", "연병실기"에 국한하여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사대주의인가, 아니면 창의성과 유연성의 부족으로 봐야할 것인가는 명확치 않다. 결론적으로 유럽의 동시대 전례와 군사체계의 관점에서 조선후기의 야전군의 이상적 모델은 실현 가능할 하드웨어적인 기반은 마련되어 있었으나 소프트웨어적 개선을 위한 여건은 마련되지 않았다고 평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