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결론 - 조선후기, 16-17세기 유럽 군사체계간의 차이의 원인
지금까지의 조선후기 군사체계를 야전에서의 삼수병을 중점으로 하여, 야전운용과 실전사례, 야포, 전차전 도입, 병참, 축성과 전략에 대하여 16-17세기 유럽의 군사체계와 비교함으로서 그 효용성과 이상적 발전방향의 가능성에 대하여 논해 보았다. 여러 요소를 종합하여 봤을 때, 조선후기의 군사체계는 18세기 들어서의 상대적으로 확연한 우위에 서기 시작한 유럽군사체계가 아닌 16-17세기의 유럽 군사체계에 비교해도 확연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등, 당시 군사혁신을 주도했던 국가들과는 달리, 조선군의 군사체계는 오히려 폴란드나 러시아등 본격적인 서유럽 군사체계를 도입하기 이전의 과도기적인 수준의 군사체계에 가까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16세기 이후의 유럽의 전략, 전술적 체계를 하나의 정론으로 보고 이에 조선후기 군사체제를 대입하는 선입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화포의 도입과 활용이 유럽에 비해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유사한 과도기적 축성체계를 가진다거나, 보헤미아 후스파의 wagenburg와 같이 화기의 야전운용을 위한 과도기적인 전술을 지속적인 벤치마킹 대상으로 고려한다거나, 개개인의 무예와 소집단 단병접전을 발전시키는 조선후기의 군사체계는 이미 유럽 근대 전쟁사에서 점차 소멸되어가는 과정을 거친 과도기적 전례와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병참문제와 같이 조선의 경제, 사회적 문화와 인프라와 연결된 요인을 제외한 군사적 요소들이 이러한 면모를 보이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합리적인 답안은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의 주된 가상적국은 어디까지나 북방의 여진족과, 남부의 왜구로서 정규군을 가상적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하삼도의 읍성이 임진왜란 당시 그렇게 쉽게 함락되고 성벽의 높이가 취약했던 원인은 소규모 왜구를 가상적으로 설정한 조선 전기 군사체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 전기의 여진 및 왜구에 대한 정규군의 작전은 대체로 전면전보다는 정벌전의 성격을 띠었고 명이 오이라트와의 교전에서 토목보의 변을 당했던 반면 건주, 해서, 야인여진등은 후금이 강성하기 전까지 어디까지나 비정규전의 성격으로 조선이 대규모 병력으로 공세작전을 감행할 경우 이에 전면대응할 능력이 없었고, 고려말, 조선 개국초 주된 문제였던 왜구는 대마도 토벌 이후 침구사례는 극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평화가 군사적 긴장을 푼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 조선은 개국이후 대규모 정규군으로 교전을 벌이는 경험을 거의 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중에 하나일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태조, 태종대의 명과의 긴장관계, 그리고 문종즉위 직전의 토목보의 변으로 인한 일시적 긴장상태를 제외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동북아에 중국에서는 명이, 한반도는 조선이 안정적 헤게모니를 유지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북벌에 대한 논의가 수그러든 이후 청과 일본에 각각 안정화되고 삼국간 관계가 긍정적으로 유지됨으로서 조선이 상정할 수 있는 최신의 전투사례라는 것은 왜란과 호란 양자에 불과하였으며, 그 대상또한 일본과 청이라는 양자로 국한되었다.
반면 유럽의 경우 16세기-17세기는 안정적인 헤게모니가 구축되지 않고 종교적 문제와 왕권의 강화로 인하여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국가간의 이탈리아 전쟁이 공성포의 혁신과 축성기술의 발전, 소화기의 야전운용과 야전축성, 파이크와 화승총의 결합을 불러왔으며,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스페인 플랑드르군이라는 대규모 상비군으로 군의 대규모화를 촉진시키고 축성체계와 스페인의 전략형성에 기여하였으며, 독일의 종교 및 황제위와 관련된 전쟁과 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제한하기 위한 프랑스의 시도와 위그노와 개톨릭간의 내전, 스웨덴과 러시아, 폴란드간의 전쟁과 30년전쟁등 무수한 정규전이 극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국가간에 이루어졌고 각각의 전쟁에 복무한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독일, 스위스용병이 각국을 이동하여 이러한 사례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폐기되는 과정을 거쳤다.
게다가 조선은 짧은 기간동안 왜란과 호란이라는 대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의지한 벤치마킹 대상은 여전히 중화, "명"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제한된 전투사례마저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였다. 왜란과정에서 척계광의 절강병법을 받아들인 조선군은(물론 왜란에서 조총을 경험한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조총의 적극적 도입이 과연 일본의 영향으로 봐야하는지 기효신서의 병제의 영향으로 봐야하는지 의문이 든다.) 삼수병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후 호란과정에서 삼수병제의 문제점을 인식한 이후에는 마찬가지로, 척계광이 계주총병으로 재직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연병실기"의 체제를 활용하고자 시도한다. 물론 "연병실기"의 거기영제도는 실제 실현되지 못했고 오히려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과 기병의 강화를 추구하긴 했지만, 군사체계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척계광이 조선후기 군사체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척계광의 기효신서, 연병실기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극히 제한된 상황의 전투사례에 기인한 것이다. 기효신서는 절강에서 왜구집단을 대상으로 교전을 벌인 것인데, 그 형태는 우월한 화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이를 근접시 방호하는 수단으로 소집단 무예를 활용하는 것이며, 연병실기는 북방의 유목민족을 대상으로 하여 전차를 활용하여 화기를 기병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절강의 왜구나 계주의 몽고기병 모두 당시 척계광이 대규모 정규군을 그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임진왜란에서도 남병이 야전에서 왜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경우 경주 안강현에서 낙상지등 남병이 패배한 사례가 없는것도 아니다. 기효신서와 연병실기는 어디까지나, 가상적이 화기로 무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월한 화력을 제한된 적에게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추구한다. 전자는 척계광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기병에게 취약하며 27) 대규모 정규군에게 통용된다고 하기 어렵고 후자는 유럽에서 시현된 바와 같이 야포를 지닌 적에게 취약하다. 9)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척계광의 양 전술체계 역시 제한된 전투사례와 가상적으로 인하여 단지 상대는 화기를 가지지 않은 것을 상정한 과도기적 제도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의 축성체계 역시 공성포로 인한 위협에 심각하게 직면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후기 실학자들조차도 성벽의 높이가 높아야 함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장기간 안정적 평화적 국제관계가 일시적 전쟁상태를 제외하고 유지되고, 가상적이 극히 제한되었으며, 그렇게 제한된 전례와 가상적에도 불구하고 전술체계의 관찰과 도입을 "명"의 척계광의 군제와 조선전기의 오위진법에 국한하여 일본군이나 청의 군제에 대한 관찰과 논의를 소홀히 한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초 일본 미토번의 군사훈련도에서는 근대식 포가를 갖춘 야전포가 전통 일본군의 진막에 배치되어 있으며 강희제대에 청은 경량 야전포를 비롯해서 중형, 대형포를 대규모로 주조, 실전에 배치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실학자들이 영향을 미쳤던 정조대에서조차 기존의 기효신서의 법제를 체계화하는데 주력하고 공성포의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수원화성을 축조했다.
제한된 전례와 가상적, 그리고 전례와 가상적의 군사체계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의 제한된 취사선택, 그리고 가상적의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관찰과 고려를 조선후기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정약용이 우려와 민보체계에 대한 관심은 군정의 문란이 없었다 할지라도 유효한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반드시 조선만의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는 3개국 모두 각 지역의 안정적인 패권과 폐쇄성으로 인해 장기간 평화를 누렸고, 히라도나 나가사키와 같은 무역항을 보유, 유지한 일본이나 마카오와 같은 통로와 이후 유럽의 대표단이 방문했던 청에 비해 외부문물이나 정보를 청에 의존하는 조선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전례들과 일본군을 비롯, 청에 유입된 서양문물과 일본의 서양인등을 비롯, 국내에 천주교도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각국의 군사체계에 대한 관심과 고려에 조선이 충분한 고려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실학자들조차 서구의 군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조선후기 군사체계를 평가하고 분석하며 그 효용성을 측정하는데 있어, 그 자체만을 가지고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동시기의 근접한 가상적국이라 할 수 있는 청과 일본이 보유한 군사체계와 기술적 수준, 보유무기를 고려하며, 또한 유사한 단계로 군사체계면에서 발전했던 시점의 유럽의 사례를 비교연구함으로서 보다 일보 전진한 평가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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