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조선의 견벽청야전략에 따른 성곽체계 및 유격전
지금까지 논한 주제는 조선후기의 삼수병 체제를 야전군 위주의 관점에서 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조선은 대규모 정규전에서 야전에서 적의 주력전력과 정면대응하기보다는 성곽에 의존하여 청야를 실시함으로서 교통이 여의치 않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적이 자멸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추구하였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군사체계를 논하는데 있어서, 성곽체계와 청야전술을 제외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때문에 야전군체제로서의 삼수병을 논하는데에 부가적으로 조선후기의 성곽체계와 유격전 체제, 그리고 견벽청야전략에 대해 유럽의 사례와 비교함으로서 그 유효성과 대안을 논해보고자 한다.
조선의 성곽체계의 발전은 산성이라는 전통적인 성곽체제에 대한 강조에서 읍성으로의 전환, 양자의 공존, 그리고 위기상황 및 전쟁시의 산성체제에 대한 강화와 비판론에 의한 읍성체제로의 전환과정을 거치게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특히 군사적인 의미로서의 산성위주에서 정치, 경제적 중심지와 군사적 기능의 결합이라는 읍성체제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을 거친다고 평가될 수 있다.
건국 초기 조선의 성곽체제는 고려말의 전통을 이어갔다고 평가될 수 있다. 원의 영향력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배당했던 시점의 고려에서는 이렇다할 축성이 시도되지 않았으나,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연해지역과 침임이 있었거나 우려가 있는 내륙지역에 대한 축성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우왕 통치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자 각도의 요충지에 방호(防護)를 설치하고 연해주군에 산성을 수축도록 하였다. (고려사 133권 열전 46, 신우1, 3년 2월 기록을 인용) 우왕 3년 7월에는 각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산성을 수축하게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존재하며, 이러한 산성이 예전에는 북방의 위협에 대응한 것에서 왜구의 위협에 대한 방어시설로 전환되게 되었다. 35)
삼국시대 이후부터 전통적으로 중시되던 산성에 대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강구되었으며 조선개국초에는 개국이후의 국가정비로 인해 도성축조외에 이렇다할 대규모 축성이 시도되지 않았다. 고려말, 조선 개국초기의 성곽체제의 특징은 가급적 산성위주로 축성하며, 치소와 성곽이 분리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치소와 성곽이 결합되는 통합기능적 읍성에 대한 축성노력이 기울여지지 않았는데, 이는 전통적인 산성중시론의 결과였다. 우왕 3년에 개성부에서 올린 문서에도 평지읍성의 축조에 반대하며 "唐鑑에서도 말한 것처럼 고구려의 산성을 이용한 방책이 상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말에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읍성이 수축되기는 하나 대체로 토성이 주를 이루며 응급적인 경우가 많아 조악한 구조를 이루었다.35)
태조 2년의 평양성, 갑주, 공주읍성과 이듬해의 안주성수축외에 이렇다할 읍성수축이 없었던데 비하여 여전히 산성위주의 성곽체제가 유지되는데 이는 거주지와 성곽을 일치시켜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는게 적절하다고 보고 이후 읍성이 강화되기 시작한 이후와는 구분되는데, 이는 고려말과는 달리 조선대에는 왜구에 대한 방어책이 산성입보보다는 강력한 수군이 일차적으로 왜구를 차단하고 이후 육군을 동원하여 이를 타격하는 공세적인 전략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35)
태종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읍성축조가 강화되어 가는데, 태종초기에는 명에서 건문제와 연왕간의 내전으로 인해서 조선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서 서북 및 동북지방의 축성이 강화되었으며, 당시 여진에 대한 영락제 7년의 115개의 위소건립과 같은 위협적 태도와 오이라트등에 대한 대규모 원정으로 인해 위기의식이 고양되어 부분적인 축성이 시도되었고, 태종 13년 7월 16일자 실록에 의하면 하륜을 비롯한 조정중신들은 영락제의 북정이 조선을 위협할 가능성에 대해 크게 우려하면서 산성을 축성하자고 주장하였으나 태종은 오히려 "난국(難局)이 온다면 장차 거병(擧兵)하여 바로 쳐들어갈 것이지, 어찌 마땅히 성을 지키고 기다릴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즉 이 당시에는 개국 초기의 조선이 보다 공세적이고 자국의 군사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젊은 국가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대에 와서 이러한 성곽체계에 대한 입장이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기존의 속성축성된 읍성을 적절한 위치로 대량 이전하고 축조하며, 영락제 사망이후 명이 보다 안정적인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동시에 양국간의 외교관계의 안정성이 강화되면서 조선의 주된 안보위협이 대규모 정규전에서 왜구를 비롯한 남방에 집중되기 시작하여 경상도, 전라도의 읍성수축이 뚜렷이 증대하였다. 35) 그러나 아직까지는 방어시설로서 읍성보다 산성이 주를 이루었다.
세종대에는 축성이 산성을 읍성으로 전환하는 사례가 매우 많은데 이전에는 읍성을 축조하더라도 산성과 병존시키는 정책을 추구한 반면 산성을 폐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최윤덕이 성곽축조를 담당하여 하삼도의 읍성축조가 세종 전기에 두드러졌으며, 이후 후반기에는 북방에 행성(장성)을 축조하는 등 대규모 정규전 위주의 축성체제가 주로 해당 지역의 왜구 및 여진의 위협을 대응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성폐지의 주요 원인은 대규모 정규전의 가능성을 지닌 명의 위협이 거의 제거되어 가상적이 주로 비정규전 성격을 띠는 소규모 집단에 국한되어 갔고, 이러한 상황에서 치소나 거주지와 이격된 산성을 유지하는 것이 백성이 불편해 했기 때문에 황희는 세종 10년에 "대저 산성이란 위급한 사태가 있을 때만 쓰고 평상시에는 그다지 쓰지 않는 까닭에, 오르내리면서 출입하는 것을 백성들은 모두가 싫어하고 꺼리는 법이온데,"라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문종대 1449년에는 오이라트를 이끄는 에센이 명의 영종을 사로잡은 토목보의 변으로 인하여 조선내부에서 외부의 대규모 위협에 대한 우려가 심해지면서 기존의 행성과 읍성수축을 정지하고 기존 읍성의 강화를 비롯하여 평안도, 황해도, 함길도등 이북지역의 산성의 대대적 수리 및 수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특정한 위협상황에 한정되어 점차 임진왜란시기까지 산성은 퇴락하는 과정을 거친다.
산성의 퇴락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북방의 대규모 위협이 감소하면서 성곽축조의 목적이 왜구나 북방 여진족의 위협에 대응하는 목적으로 전환되고, 이에 대응하는 방법이 고려말의 산성입보에서 공세적인 기동병력의 운용과 수군의 강화로 지향되고, 또한 거주지에서 이격된 산성보다 읍성이 관리 유지가 용이하였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임진왜란시기부터 다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하삼도의 읍성이 일본군에게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함몰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산성중시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소수의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의 성벽높이가 낮은데다가, 이후 나타나는 포루나 치성, 옹성과 같은 유효한 부대시설이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 정규군과의 교전에서 방어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24년 7월 1일 호남과 영남에 성곽을 축성한 기록에 의하면 호남과 영남의 큰읍성들을 증축하고 수리하였으나 "크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고 평지를 취하여 쌓았는데 높이가 겨우 2∼3장에 불과했으며, 참호도 겨우 모양만 갖추었을 뿐, 백성들에게 노고만 끼쳐 원망이 일어나게 하였는데, 식자들은 결단코 방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언급한데서 확인할 수 있다.
개전초기에 조선의 방비상의 헛점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면서 전통적인 산성중시론이 강조되기 시작하였으며, 야전에서의 전투를 가급적 회피하고 지구전과 기습, 보급로차단이 주된 전투양상이 되면서 아군의 식량, 무기, 병력보존이 가능한 안전한 거점으로서의 산성이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강화교섭의 전망이 부정적이고 유정의 군사가 선조 27년 후퇴하면서 재침위기론으로 인하여 적극적인 산성수축이 추진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산성수축이 조정에 의해 적극적으로 강조되었으며 선조 29년(1596년)에는 각도 감사로 하여금 산성으로 입거하고 각고을의 수령도 대체로 산성에 입거하라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산성유익론으로 인해 세종이후부터 강조되었던 읍성위주의 축성체계는 다시 산성위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이러한 세태를 다시 바꿔놓았다. 병자호란 이전의 1차침입과정인 정묘호란에서는, 청군은 용천군민이 입보한 용골산성을 비롯하여 안주성, 선천, 곽산, 정주군민이 입보한 능한산성등을 공략했다. 당시 동원병력이 3만내외였고 도중의 성곽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청군은 강화를 선택하게 되었다.
반면 병자호란 당시에는 이러한 청군의 전략이 전환되었다. 청군은 12만 8천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의주성에서 백마산성으로 입보한 임경업군에 공세를 가하다가 결전을 회피하고 의주, 용천, 곽산, 선천, 정주등에 소수병력만을 잔존시키고 바로 남하하였다. 정묘호란때 함락된 안주성도 청군은 바로 지나쳤으며, 서북지역의 산성에 입보한 조선군에 대해 소규모 병력을 잔존시켜 조선군을 견제하며 수도권을 향해 주력은 그대로 남하함으로서 청군의 선봉부대는 12월 8일에 압록강을 도하한 후 14일에 강화도와 한성간의 이동로를 차단함으로서 조선 조정의 강화도 이전을 도하 6일만에 차단하는 신속성을 보여주었다. 조선군의 방침은 산성에 입거한 병력이 청군의 이동을 저지하여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수도권 방어태세를 확립하고 근왕군을 집결시킬 시간적 여유를 얻는 것이었으나 산성에 입거한 전력을 청군이 무시하고, 읍성을 방기함으로서 보급물자가 청군에게 넘어가게 만들었다. 30)
때문에 이후부터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산성위주 성곽체계에 대한 비판이 강력하게 가해졌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우리 나라 여러 곳의 산성은 거의 읍내와 떨어져 먼 곳에 있는데 비상시에는 고을 백성을 데리고 산성(山城)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적의 침입이 그리 급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자기의 가신을 잊을 수 없고 또 험하고 먼길 가기를 꺼려서 성에 들어가 방위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적이 딱 다가오면 늙은이를 붙들고 어린이를 껴안고 산과 들로 도망을 치면서도 명령에 복종하기를 싫어하니 하물며 다른 고을 성에 들어가서 지키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 이라고 주장하였다. 36)
또한 그는 "산성을 고수하였다 하더라도 읍이나 부락은 물론 창고와 주민과 가축들을 전부 적에게 빼앗겨 버린다면 사수했다는 그까짓 산봉우리 하나가 결국 무엇을 줄 것인가? 이것이 반드시 망할 데로 가는 길인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성은 일본이나 여진 사람들처럼 전쟁만을 일삼고 항상 집이 없는 군인을 거느리고 활쏘기와 사냥을 직업으로 하며 가는 곳마다 산채를 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36)"라고 주장하여 군민의 입보를 상정하는 청야전략에서의 산성이 병자호란에서와 같이 유사시 군민의 입보뿐만 아니라, 청야를 위한 물자의 이동과 확보 역시 읍성이 효과적임을 주창하였다. 이처럼 산성위주의 기존 청야입보전략이 가진 문제점들의 지적으로 인해, 수원화성과 같은 당시 조선으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축성기술이 적용된 평지성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A. 성곽체계의 유효성 여부
일단 조선후기의 성곽체제의 유효성을 측정하는 모델로서 수원화성을 그 대상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조선후기로 갈 수록, 점차 성곽체제는 치소와 성곽이 결합되어 읍성을 구축하거나, 또는 가능한 경우에는 산성으로 치소를 이전하는(남한산성에 이후 광주의 치소가 이전됨) 성격을 띠며, 상정하는 청야전술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물자와 인력이 유사시 신속하게 입보가능한 읍성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수원화성이 조선에서 달성한 다양한 축성기술의 정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당시의 최첨단 기술의 정화로 평가되는 수원화성은 가상적국을 대상으로 할 때, "최첨단"의 성격을 띠는가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성벽의 방호성능은 중요한 문제였으나, 화기가 등장하면서 성벽의 방호성능은 높이에서 두께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유럽의 석조성벽이 화포의 등장, 그리고 Corned powder와 철제 포탄의 도입으로 인해 손쉽게 파괴될 수 있게 되면서, 이후의 성벽에 대한 관점은 가급적 낮고 두꺼운 형태를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은 병자호란당시 남한산성에 대한 홍이포사격을 경험했지만, 이러한 포격이 성벽을 파괴하여 함락시키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지 못하였으며, 당시 청군은 이후 강희제치세와 같이 대규모로 화포를 운용하고 제작하는 수준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초기 명이 도입하고 제작하기 시작한 홍이포를 카피생산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성의 직접적인 점령을 위해서는 병력투입위주로 달성되어야 했고, 그 결과 성의 방어를 위해서 화기를 활용하기 위한 치성이나 포루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실학자들 역시 성벽의 높이가 높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성의 높이가 반드시 여장(성벽 위의 총안이나 요철형의 구조물)을 제외하고 5장 이상이어야 한다고 했으며, 기효신서에서는 3장에서 4장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형태의 구조는, 전통적인 산성의 편축, 또는 내탁식 축조법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산성의 경우 지형을 잘 활용하는 경우, 일정 경사에 적합하게 외부에만 석축을 할 경우, 훌륭한 성벽을 보다 저렴하고 손쉽게 만들 수 있는데, 반면 평지나 성문을 축조할 경우, 내외부를 모두 석축으로 하는 협축식 방식으로 축조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로 성벽을 축조할 경우, 협축식으로 완전 석조형으로 축조하는 것보다 더 두꺼운 성벽을 손쉽게 축조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의도한 목적과는 달리, 협축식 성벽보다 더 높은 방호력을 가진다. 보다 두텁고 흙으로 내부가 채워지거나 지지된 성벽이기 때문에 포격을 받을 경우 부서지기 쉬운 석축성벽보다 유리한 것이다.
유럽측의 성벽은 위에서 보듯이, 가급적 성벽을 최대한 낮추고, 대신 성벽 앞에 폭이 넓은 해자를 파서 성벽과 유사한 효과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보다 두텁고, 낮은 성벽이 Trace italienne라는 16세기에 등장하여 기존의 중세식 성벽을 교체한 유럽 축성법의 모토였는데 비하여, 조선의 성벽은 여전히, 가급적 높게 쌓음으로서 방어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당시 청과 일본이 성벽을 파괴할 수 있는 화포를 보유했음을 고려할 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성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피탄범위가 커지기 때문에, 수원화성이 아무리 내탁식 축성으로 두터운 구조를 가졌다 할지라도 성벽과 성벽을 방어하는 병력은 공자의 화포를 이용한 공격에 노출되는 것이다. 즉, 당시의 축성에 대한 논의가 화포에 대해 조선측이 여전히 압도적 우위를 가진다는 전제하에 성립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는 병자호란에 이미 홍이포와 호준포를 활용한 공격에 노출되었으나, 그것이 성벽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각인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성벽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수원화성에서 성벽은 공격을 받는 전면에 위치하여 있다. 공자가 포격을 가하는 경우, 성벽은 거의 직각에 가깝게 포격을 가할 수 있도록 구조가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그림은 보방의 요새중 가장 유명한 요새로 손꼽히는 Lille요새의 지도인데, 이러한 구조로 성벽이 구축될 경우, 공자는 성벽에 직각이 되도록 사격을 가할 수가 없게 된다. 성벽은 가급적 낮게, 그리고 두텁게 구축하고 경사진 구조를 지향함으로서 피탄범위와 피탄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화기가 도입된 상황에서 적용되어야할 축성체계로 본다면, 수원화성은 단지 국내에서 과거의 전례를 통해 가정할 수 있는 학자들의 가정속에서만 구축된 성채의 형태를 띤다. 이러한 수원화성과 유사한 구조물은 근대 초기 피터 대제의 개혁 이전의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러시아의 경우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를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하고, 특히 수원화성의 포루나 치성, 공심돈과 같이 다수의 포탑을 통해 방어력을 증강시키는 형태를 취했다.9) 러시아 요새들은 성벽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인데(피터 폴 요새와 같은 근대적 요새를 제외하고) 이러한 중세식 요새는 화포와 개인화기에서 초기의 주된 가상 적인 타타르족을 압도했기 때문에 생성된 과도기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수원화성은 조선 후기의 추가적인 전투사례의 부족과 제한된 외부문화 및 기술과의 교류부족으로 인하여 과도기적인 수준 이상으로 이전의 축성체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두가지 문제중 전자, 즉 성벽의 방어력에 대해서 논했지만, 방어력 자체만으로 성곽의 유효성을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효과적이지 못하더라도 화기의 적절한 운용을 통해서 방자가 공세를 감행하지 못하도록 강요한다면 효과적인 방어전이 가능한 것이다. 수원화성의 경우, 특히 포루나 치성, 옹성과 같이 근본적인 축성개념상 고대로부터 이어진 돌출된 구조물을 통해 사각을 줄인다는 사상과 함께, 화기운용을 위한 구조물구축을 통해서 성곽의 방어력을 극대화시키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기존의 성곽체계에 포루와 보루등을 확보하여 강화해야한다는 유성룡의 주장과 기효신서의 축성체계를 대거 받아들임으로서 수원화성은 이전에 비해 화포운용에 효과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포루는 수원화성에 5개가 있으며 이외에는 鋪樓(포루), 치와 같은 형태의 돌출구조물이 있는데 鋪樓(포루)는 치성, 즉 성벽이 돌출형태로 튀어나온 구조물 위에 포루와 같이 상부에 집을 지어 만든다. 포루의 경우에는 안이 비어있고 벽돌로 만들어져 3개층에서 화포를 운용할 수 있다. 鋪樓(포루)나 치성역시 돌출구조물로서 방어의 중핵이 된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돌출구조물은 성벽에 대한 사각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축되었다. 특히 정방형으로 구축된 성곽의 경우 한쪽 면에 공세가 가해질 경우 해당 면의 일부 전력만이 전투가 가능하며, 또한 투사무기사격이 성벽 하부에 공자가 접근할 경우 사각이 생기기 때문에 유효한 공세를 가하기 어렵다. 이러한 돌출구조물은 성벽에 대한 사각을 최소화하고 화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다. 또한 포루는 성벽에 접근한 적에게 화력을 대량활용할 수 있도록 양측면에 포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수원화성은 높게 평가받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국내에서 만이 아니라, 그리고 적어도 동북아시아의 청과 일본을 가상적으로 상정할 때, “최첨단”에 가까운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위의 캉브레에 대한 공성전도를 보면 유럽의 요새에서 Bastion의 형태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에 등장한 Trace italienne는 성벽을 가급적 낮고 두텁게 구축하는데, 또한 Bastion, 즉 능보라는 돌출구조물이 이전의 성벽이 제공한 방어형태를 대체하게 되는데, 이는 수원화성의 포루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능보체계의 중요성은 이러한 구조가 치성과 같이 화력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하며 성벽과 같은 화력의 방호벽 역할을 수행하며, 동시에 이러한 기하학적 구조를 통해 기존의 사각지대이자 취약지점이자 화력이 최소화되는 돌출구조물 사이의 간격이 가장 화력이 집중되는 살상지역이 된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살상지역을 통해 능보에 대한 포화의 적절한 위치를 최소화하는 이점을 가지게 된다.
위의 지도의 능보와 화성의 포루, 치성, 鋪樓(포루)는 모두 동일하게 방어의 중핵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특히 포루는 능보와 같이 화력이 집약된 지점이다. 하지만 포루의 경우 정방형의 구조로 선형 성벽에서 기존 성과 거의 다를바 없이 아주 조금 돌출해 있을 뿐으로 기존의 치성에 화포의 운용을 위해 내부를 비워놨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능보체계는 삼각형의 능보가 양옆의 능보와 연결됨으로서 역으로 공자의 입장에서도 능보를 피해 접근할 경우, 또는 능보의 벽에 직각이 되도록 입사각을 가지려 할 경우 삼각형으로 점점 좁아지는 지대에서 공세를 감행하게 된다.
위의 캉브레 공방전에서 공자의 병행호접근로를 보면, 대부분이 능보의 꼭지점 끝으로 접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능보 사이의 간격으로 접근하여 돌파하고자 한다면 방자는 간격 양측의 능보에서 화력을 공자에게 집중할 수 있다. 이 간격지대에서 사격해야만 직사사격을 통해 화력을 효과적으로 능보의 벽에 가할 수 있으나 이 경우 십자포화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공자는 능보를 제압하지 않고서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사격위치를 강요받게 되어 상대적으로 취약한 선형성벽이나 또는 능보가 추가적으로 배치되기 이전의 중세형 성벽에 대한 공세를 가하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기하학적 구조를 통해 능보는 화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방어병력을 능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을 향유할 수 있다. 반면, 수원화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구조물들은 이런 역할을 하기 어렵다.
조선 읍성의 돌출구조물들은 과거의 궁시위주의 성곽방어의 치성구조물 이상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있다. 단지 포루와 같이 기존의 치성구조물에 화포를 운용하기 용이하도록 개조한 정도 이상은 아니며, 사각을 줄이는 것 역시, 기존의 치성과 크게 다를바 없다. 이러한 구조로 인하여 포루는 단지 화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구조물 그 이상은 아니며, 과거에 비해 이렇다할 발전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성곽에 가해지는 포격 및 보병의 공세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할 수 있는 성벽 자체에 집중될 수 있으며, 포격의 입사각도 직각에 가깝게 언제든 자유롭게 채택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선의 성곽체계가 기존의 성곽체계에서 화기운용에 적합한 구조로의 근본적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조선의 훈련교범인 병학지남에서는 수성전에서의 불랑기 사정거리를 조총과 동일하게 적이 백보내로 접근한 이후로 하고 있다. 이 외에 적이 장거리에서 화포사격을 가해왔을 경우를 상정한 계획은 부재하다. 실지로, 조선이 화포사격을 통한 성곽의 함락을 경험해 본적이 없으며, 그러한 전투양상은 극히 드물었다. 유럽의 축성체계가 능보체계를 도입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이탈리아 전쟁과정에서 보여준 프랑스군의 공성포가 이탈리아의 중세형 성곽을 무너뜨린 충격의 결과였다. 반면 근대 초기의 러시아나 조선의 경우, 강력한 화포로 무장한 적국의 공세에 직면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조선은 화포의 포격으로 인한 성곽의 붕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였고, 이에 대한 우려도 없었기 때문에 성벽을 낮게 유지한다던가, 또는 기하학적인 구조로 돌출부를 형성하는 등의 고려를 할 필요성을 인식할 수 없었다. 단지 화약무기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성곽방어를 위한 총통류의 활용에 대한 필요성은 강조되었고 그 결과가 여장의 총안구나 포루의 도입으로 드러난 것이다. 즉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러시아와 유사하게 화포의 활용이 용이한 포탑을 성곽체계에 도입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수원화성으로 대표되는 조선후기의 축성기술은 국내에서는 “최첨단”기술의 적용이지만, 이미 홍이포와 같은 유럽제 화포를 활용하고 있는 청국이나 수입이 용이했던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할 경우, 유럽을 비교대상으로 하지 않더라고 해도, 충분히 발전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조선 성곽체계는 공성전시 포격에 대응하는 고려가 전혀 되어 있지 못했고, 단지 기존 축성체계에 화기운용을 위한 고려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큰 발전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한계는 당연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화약무기의 위협이 화포의 기존 성곽체계에 대한 위협으로 가시화되고, 그 다음 야전에서의 소형화기의 운용이 가시화된 유럽에 비하여, 가상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기운용이 발달하고 화포에 의한 성곽에 대한 위협을 크게 경험해보지 못한 조선으로서는 화포의 위협을 가정한 성곽체계의 발전을 추구할 필요성도 고려할 만한 전례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B. 유격전의 필요성
성곽체계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 바와 같으며, 이미 읍성의 필요성이 조선의 청야전략에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반계수록의 내용을 통해 언급한바 있다. 그렇다면, 우수한 성곽체계의 발전과 읍성의 축성으로 조선의 청야입보전략이 효과적으로 달성가능한가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성이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12월 8일에 압록강을 도하한 후 14일에 강화도와 한성간의 이동로를 차단함으로서 6일만에 도성까지 이르러 청야입보를 위한 최소한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읍성을 방기하고 산성으로 입보하는 전략의 문제점이라는 점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안주성과 같은 읍성에 대한 청군의 태도를 고려해야 한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청 나라 임금이 큰 낙타를 타고 가다가 성 위에 한 폭의 깃발도 없고 한 사람의 인기척도 없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대군(大軍)이 성에 다달았는데 이와 같이 고요하니 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가 반드시 지략이 있는 것이다.” 하고, 성 밖에 풀을 쌓고 바람을 따라 불을 피워 연기 밖으로 군사를 이끌고 지나갔으니, 이는 대개 우리 군사의 추격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반면 인조 15년 4월 11일자 실록에서는 사헌부에서 “유림(柳琳)은 안주(安州)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적의 선봉을 편안히 보내주고 성문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와 대항하지 않아서 저들로 하여금 쏜살같이 서울로 직향하게 하였으니, 군부를 저버린 그의 죄가 여러 장수에 비하여 더욱 큽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이처럼 읍성이라 할지라도 소수의 병력을 남기고 도성을 향해 남하하는 청군의 경우, 또는 일본군의 경우를 상정하는 경우, 청야입보를 통하여 도성에 대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한다는 전략은 근본적으로 달성될 수 없게 된다. 성을 사수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목표하고 있는 전략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거나 또는 침공군이 기동로상의 산성 또는 읍성을 공략하도록 강요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국경과 도성간의 지방군의 문제점은 먼저 입보를 실시한 이후, 적이 접근하는 경우 수성전을 감행한다는 점이다. 청북방어사 임경업이 의주성을 포기하고 백마산성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최초도하한 청군은 무혈입성할 수 있었고 이후 안주성도 무혈통과했으며 평양성도 점령하지 않고 통과하였다.
즉 단순히 읍성의 강화책만으로는 청야입보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적어도 단기간에 도성까지 접근할 수 없도록 기동을 저지할 수 있는 작전행동이 가해지지 않는 경우에는 침공군은 성을 공략하거나 지나친다는 전략적인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효과적인 대안은 보다 적극적인 유격전의 도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규모 전면전 보다는 소규모 전력을 위주로 유격전을 감행함으로서 청야입보전략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유격전에 대한 적극적 고려를 하지 않았다.
의병이 효과적으로 청야입보전략과 연계될 수 있다는 임진왜란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면전을 회피하고 가급적 병력손실과 병참선의 교란을 위한 유격전 개념의 적용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조선 후기 군사체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정약용은 민보라는 지역 민방위개념의 적용에 대해서 백성의 반란을 우려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 우려할 사항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보살피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바 있는데 2) 이러한 요인이 전시에 효과적으로 활약한 의병체계를 적극적으로 비정규전 개념으로 군사체계에 접목하려는 노력으로 연결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보여진다.
정약용 당시의 민보론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군정의 문란과 사쓰마번의 경제적 성장과 막부의 통제력 상실에 대한 우려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40), 의병의 왜란에서의 활약을 고려할 때, 청야입보전략에 있어서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 민보란 정약용이 고려한 향토방위체제로서 자위가 가능한 민보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유사시에 식량과 군민이 입보하며, 전통적인 산성체계와 유사한 방어시설을 통해 민보가 성립되면, 이후 여기서 탈향촌적 의병이 운용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다. 민보에서 운용되는 민방위군의 병력은 최소 30에서 150명으로 하였으며 총기의 제작역시 배제하지 않았다. 민보는 상호방어를 포함하여 화공, 매복, 사격등을 포함 비정규전을 수행하도록 규정짓고 있다. 40)
이미 언급한 아일랜드의 16세기 말의 반란과정에서 보여준 화승총의 효과적인 비정규전에서의 활용은 조선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바 있다. 아일랜드 반란을 효과적으로 제압한 아일랜드의 영국군 사령관 마운트조이경은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지켜져야할 원칙으로서 5가지를 유지했다. 그 중 두가지는 유격전이 조선의 청야입보전략에 가지는 효과를 확인하게 해준다. 마운트조이경은 대규모 종대로 병력을 이동시켜 기동로를 노출함으로서 매복공격을 당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1000여명의 보병과 2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부대들을 끊임없이 이동시켜 자신의 기도를 은폐하였으며, 삼림지대, 늪지와 같이 기동하기 어려운 지점을 지날 때에는 매복에 당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32)
즉 조총으로 무장한 소규모 전력이 매복을 통해 기동하는 대규모 병력에 기습을 가혹 병참부대를 타격하는 경우에, 침공군은 필연적으로 기동속도의 저하를 감수해야 하고, 후방의 위협에 직면하여 소규모 유격대의 거점을 제거하기 위해 읍성이나 산성을 함락시켜야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격전의 적극적인 수행과, 읍성과 민보의 활용을 통해 보급물자와 군민의 철저한 입보전략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청야입보라는 전략을 추구할 시간적 여유를 상실하고 수도권까지 적의 신속한 기동을 선택할 전략적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도권을 오히려 침공군이 확보하게 되는 경우, 상황이 반전되어, 침공군은 신속하게 기동하여 청야입보를 위한 물자와 군민의 입보이전의 지역의 물자를 확보할 수 있는 기동성을 확보하며, 또한 입보한 전력이 중앙집권국가의 특성상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 기동하다가 야전에서의 교전을 강요당하여 병자호란당시의 근왕병처럼 패배하거나 물자의 부족을 방자가 오히려 겪게 되는 사태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다.
16세기 말의 아일랜드 반란군의 효과적인 비정규전사례는 야전에서 필적할 수 없는 전술적 열위를 비정규전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의병과 민보개념을 적극적으로 군사체계에 접목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선이 견지한 청야입보전략의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다. 조선군은 삼수병체계에서 단병을 위한 무예체계의 발전을 강구하기 보다는 보유한 유효자원과 전투사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의병운용과 청야입보전략에 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며, 소규모 조총수 운용을 이와 접목시켰다면 보다 효과적인 군사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성곽체계를 통해 하천선을 통한 종심방어체계에서도 적어도 기병을 활용하는 기동병력과의 결합이 없었다면 고구려가 효과적으로 수와 당에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성곽체계와 기동전력의 병참선 차단과 비정규전 수행에 대한 전쟁사상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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