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3

구름위 2013. 2. 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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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군의 전차전 운용과 도입에 대한 논쟁의 무용성


조선군의 전차전 운용은, 중국의 거기영 운용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전차운용의 목적은 주로 청기병을 그 대상으로 하여, 어왜전법 위주였던 척계광의 절강병법에서 척계광이 계주총병으로 이전하여 북방의 몽골기병에 대치하게 됨으로서 "기효신서"의 법에 추가, 보완하게된(조선의 기효신서의 경우, 연병실기의 내용이 포함된 판본이 존재한다.) "연병실기"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전차전 운용에 대한 중국에서의 실례는 명에성는 이미 1447년에 실시되었는데, 통병관 주면이 화차비전방안(火車備傳方案)을 통해 전차전에 대해 논의한 기록이 있고,  가정 43년(1564년)에는 중앙군인 경영(京營)에 차영(車營)을 건립하여 각각 신창 2기, 협파창 2기를 보유한 전차 4000량을 보유했는데, 각각 5명의 보병이 탑승하였다. 1569년 계주총병 척계광이 계주에 7개 전차영을 설치했는데, 각 전차영은 포를 장착한 중차 156량 또는 창을 장착한 경차 256량으로 구성되며 1개 차영에는 보병 4000, 기병 3000이 배치되는데, 그 운용방식은 방진을 구축하고 가장 외부에 전차들이 배치되며 전차전면에 거마창을 설치하고 화포사격을 가하다 보병이 저지하고 패퇴하는 적을 기병이 추격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천계연간(1620~1627)에는 수종의 전차가 제작되었는데, 화창, 화총이 설치된 독륜소차, 화포를 장착한 쌍륜차가포, 창과 검을 부착한 독륜차재창을 비롯하여 륜차, 중차등이 제작되었다. 25)

척계광은 계주총병제직시에 이러한 전차부대를 실제 몽고기병의 대규모 공세에 활용할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이미 언급한 1619년 살리허 전투에서 명군은 참호를 파고 전차를 배치하였으나 하마한 청군이 참호 및 전차돌파에 보병으로 투입되고 이어서 여기에 기병을 투입함으로서 승리했다. (병력비 명 2000 : 청 1000) 마림 휘하의 명군도 전차를 이용한 엄중한 방어진을 구축하였으나, 청군은 고지를 장악함으로서 마림이 진지를 이탈하도록 강요했고 결국 고지에서의 격전끝에 명군이 패배했다. 11)

명군의 전차운용은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조선후기 군사체제의 기틀로 삼던 조선에서 하나의 화두가 되는데, 선조 26년(1593년) 1월 8일 실록에 따르면 남병 지휘관(선조 31년 4월 24일자 기록에 따르면)인 유격 척금(戚金)의 전차 100량이 수송되어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3일후인 선조 26년 1월 11일 중국각영병에 대한 실록에 의거하면 척금은 보병 1천을 거느렸다고 한다. 척계광의 연병실기상에서 1개의 전차에 10명의 보병이 탑승하는데, 지휘관인 차정 1명, 수레의 운전수인 타공이 1명, 화전수가 2명, 불랑기를 쏘는 랑기수가 6명이다. 26)


1개 전차에 편제된 전차병과 이를 보조하는 살수대를 개편한 보병편제

수레의 수가 과장되었다고 할지라도, 척금의 보병전력이 전차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던 전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듯 하다. 이미 선조 26년에 명의 위원랑 유황상이 조선조정에 전차전을 배울 것을 언급한 것을 비변사가 알린 기록이 실록에 있으며, 선조 37년에 훈련도감은 기효신서외에 연병실기에 대해 보고한 실록내용에 따르면 연병실기의 거기보 통합운용 및 전차의 화기활용, 그리고 이러한 전차전이 북방기병에 적합함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는 초본 기효신서의 법대로, 강원, 황해, 평안, 함경도는 연병실기의 법대로 가르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전차운용에 대한 구체적인 체계를 제시한 경우는 3가지인데, 먼저 선조대에 연병실기를 비롯한 병서편찬을 담당한 부사용 한교는 광해군 3년(1611년) 3월 29일에 서북지역의 조련에 대한 논의를 지시받고 다녀온 후,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척계광이 남부에서 왜구를 상대할 때는 기효신서의 포살법을, 북쪽에서 오랑캐를 상대할 때는 연병실기의 거기보의 법을 썼으니, 기존의 기효신서의 보병운용은 서북의 철기병을 상대할 수 없으나 연병실기의 거기보의 법은 왜구에도 통용될 수 있을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는 연병실기의 방법을 도입하자는 제안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연병실기의 거기영은 중차 156량 또는 창을 장착한 경차 256량으로 구성되며 1개 차영에는 보병 4000, 기병 3000이 배속된다. 전차에 탑승하는 인원은 총 10명이며, 2대의 불랑기가 전차위에서 운용되는데, 양륜차이다. 불랑기는 2척에서 4척 5촌의 길이에 정철로 거치될 수 있는 구조이며, 거치될 중차의 무게는 600근이다. 26)




거기영은 이러한 중차의 사이에 8량의 대장군차를 배치하여 대구경 화포를 운용하는데, 여기 운용되는 무적대장군포는 양륜의 수레에 거치된다. 중량은 1050근으로 중차에 거치되는 불랑기와 형태는 거의 동일하나 중차에 배치되는 불랑기는 소구경 화포로 보인다.



거기영은 외곽에 중차로 벽을 쌓고 중차는 1개 살수대와 같이 편성되는데, 여기서 살수대는 "기효신서"의 살수대와는 달리 장창수 4명이 전원 조총수로 전환되었다. 실제로 당파수는 화창의 일종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등패수 2명을 제외한 전투병력 전원이 화기로 무장하여 적의 백병전을 고려한 전력이 아닌 화력지원부대임을 알 수 있다. 이 외곽방어선 내부에 기병이 배치되는데, 기병은 전차방어선의 화력으로 적이 패퇴할 경우에 추격전의 임무를 맡았다.


두번째는 1778년(정조 2)에 정헌대부 행동지중추부사 송규빈이 국방 ·진형 ·병기등 군사문제 전반에 관하여 그 개선책과 저자의 견해를 밝힌 "풍천유향"의 상승진인데, 송규빈은 거기영의 전거와 유사한 검거의 운용에 대해 논하고 있다. 송규빈은 척계광이 기효신서에 대해서 논한 언급을 인용하여 당시 조선의 군사운용이 기효신서의 법을 맹종함을 비판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효신서의 진제는 왜적을 막기위한 제도이다. 만일 이 진제를 다른 지역의 방어에 사용한다면 적절히 변통하는 방법을 모를 염려가 있으므로 내 감히 이것을 자랑하여 동지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 북방은 지역이 평탄하고 광활하여 오랑캐의 말들이 폭풍우처럼 달려오니 어찌 이 방법을 쓸 수 있겠는가?" 27)



송규빈의 상승진은 모두 128량의 검거를 운용하는데, 1대의 검거는 독륜으로 평지에서는 4명이, 험지에서는 6명이 미는 인력거이다. 검거의 형태에 대한 그림에서는 독륜이 아닌데 독륜이라고 하는 것은 양쪽이 아닌 검거의 앞뒤로 달려있는 형태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중간의 좌우에 보조바퀴가 달려있어 세울 수 있도록 되어있다. 검거 1대에는 2개대가 배치되어 총 25명이 배속되는데, 2개대는 개량된 원앙진으로 화병 2명과 대장 2명이 화포를 담당하고 나머지 병력은 조총/살수가 혼성된 편제로 이전의 기효신서의 살수대 / 조총대운용과 구별된다. 27)

검거는 앞에 칼날을 꽂는다고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8개의 창이 전방으로 부착되고 수레위에 세겹의 방패가 설치되어 대포가 배치된다. 4명에서 6명이 끄는 것으로 보아,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소구경화포일 가능성이 높다. 검거 전면에는 쇠창과 거마창을 배치하고 방진을 구축하는데, 외곽방어선에 56대의 검거가, 그 다음 40대, 그 다음 24대, 그리고 예비로 중앙에 8대가 배치된다. 별도로 장군차 8대에 호준포, 불랑기포를 탑재하여 방진의 네귀퉁이에 배치한다. 이것이 1개 검거영을 구축하는데, 진안쪽에 포수가 300, 기병이 600명 배치되어 거기영과 유사하게 운용된다. 3000여 병력의 검차영은 3개 검차영으로 구축, 서로 상호지원하도록 운영되며, 국경밖에서 운용될 경우에는 소가끄는 300대의 치중차를 만들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27)


세번째는 1813년(순조 13) 박종경이 편찬하여 간행된 각종 무기를 도해(圖解)하고 그 규격과 용법(用法) 등의 설명을 붙인 융원필비에 등장하는 화거방진도인데, 이는 100대의 화거와 20대의 목화수거로 구축되는데, 화거는 양륜이며 50개의 조총을 10개씩 묶어 5개 층으로 만들어진다. 목화수거는 호랑이모습의 나무조각으로 만들어지는 사격통제기의 역할을 하는데, 15개의 조총을 3층으로 나누어 수레 아래쪽에 탑재하여 적이 멀리서 접근하면 각각 면마다 30량이 배치된 방진에서 해당 면의 목화수거가 1층의 조총을 일제히 쏘아서 응하고, 가까이 온경우 2층을 일제히 쏜다. 적이 백보 내에 들어오면 목화수차 3층을 일제히 쏘며 이 경우 신호포와 천아성을 통해 해당면의 화차가 일제사격을 가한다. 1)

이러한 전차전은 기본적으로 방진을 통해 전 방향에서 기병 및 보병의 백병전 공세를 전차가 일종의 기동력을 갖춘 성벽으로서 방어하고, 전차를 통해 화기의 기동성을 부여하여 화력을 강화함으로서 살수대보다 효율적으로 화기운용에 대한 방호력과 화력강화를 추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전차전이 효용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 전차전에 대해서 조선조정에서는 지속적으로 그 효용성을 강조하는 측과, 그 효용성을 부정하는 측과의 논쟁이 벌어졌다. 효용성을 강조하는 측은 기존의 삼수병 운용이 북방기병과의 교전에서 실용성이 부재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고래로부터 전차전의 효용성과 "연병실기"를 통해 북방기병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대응하는 것 역시 가능함을 주장하였고, 효용성을 부정하는 측은 국내의 지형이 험하고 산이 많기 때문에 전차전을 수행하기 적절치 못하다는 주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반대의 이유에는 전차전을 위한 수레제작의 비용문제에 대한 지적도 지속되었고, 숙종대에는 윤휴를 비롯한 북벌을 주창하는 남인계파에서 전차를 제작하고 운용할 것을, 서인계열에서는 이를 실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논쟁을 벌였고 윤휴는 전차의 도입과 운용을 자신의 진퇴에 결부시킬 정도로 당쟁과도 결합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를 단지 당쟁으로 보기도 어려운 것은 윤휴와 같은 계파인 권대운이나 유혁연도 이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노론계열의 민진후가 역설적으로 전차의 도입에 찬성했다는 점이다.

이미 선조 38년(1605년) 11월 7일 실록에 좌부승지 최염이 전차전이 조선의 험준한 지형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시작으로 하여, 전차전의 효용성에 대한 논쟁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윤휴는 조선의 지형에 맞게 전차를 독륜으로 제작해야 함을 언급하여 험지에서는 전차전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자체는 아쉽게도 "한국 전통병서의 이해"에서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정해은씨가 언급하듯이 "살아있는" 군사체계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전차가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은 조선에서 효용성이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 지는데, 현실적으로 검증되거나 실증된 내용이 아니며, 군사적으로도 이 부분이 중점이 되어야 한다고 보기도 어렵고, 실질적으로 전차전이 문제시 되어야 할 점은 다른 요인에 있기 때문이다.

15세기초 1420년대에 일어난 후스파의 반란은 화기운용이라는 측면에서 진정한 혁명을 불러일으킨 걸출한 지휘관을 탄생시켰다. 얀 지슈카는 튜턴기사단과 싸우던 폴란드에서 용병으로 복무하면서 군사경험을 얻었고 그곳에서 독일의 기사단이 가지는 취약함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강력한 공격보다는 효과적인 방어를 통해서 승리를 달성하는 방법은 후스파가 근거하는 도시민과 농민이라는 병력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Wagenburg, 즉 마차요새와 화기운용이라는 두 축을 활용하게 되었다. 농민들의 마차를 다루는 능력과 도시의 화기생산을 위한 산업능력이 결합되었고 농민들의 도리깨와 폴암이 결합되면서 Wagenburg 전술이 탄생되었다. 6)

후스파의 전차전 방식은 마차를 마차안에서 소구경 핸드건과 석궁을 사용하고 내부의 병력이 방호받을 수 있는 구조로 마차를 개량하였으며, 마차간 간격에 포가에 얹힌 대구경 화포를 운용함으로서 화력을 극대화 하였다. 1개 마차는 15명에서 20명의 병사가 엄폐가능하였고, 마차에는 6명 이상의 병사가 석궁을, 2명이 핸드건으로 무장했으며, 나머지는 도리깨나 나무클럽, 할버드로 무장했다. 마차사이에는 추가로 파비안방패(석궁병이 사용하는 대형방패)가 배치되고, 초기에는 양륜형 포가가 아닌 이동이 불가능한 나무포가에 얹힌 소구경 화포가 여기에 배치되었으나, 후반에는 보다 대구경 화포인 Houfnice가 양륜형 포가에 얹혀서 배치되었으며 상하각도조정이 가능한 구조였다. 6)

1420년 Sudomer전투에서는 겨우 12량의 마차가 활용되었으나, 이후 최종적인 Wagenburg 전술의 마차는 총 180량, 대형화포는 35문에 달했다. 반드시 전차는 방진을 구축할 필요는 없었는데, 효과적으로 지형지물을 이용할 경우, 특히 강을 이용할 경우(Sudomer전투) 보다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1424년 6월 7일 Malesov전투에서 6미터마다 1문의 대형화포와 4에서 6정의 소형화기, 그리고 다수의 석궁이 배치될 수 있었다. 6)

이러한 후스파의 전차전에서 가장 중요한 화력은 Houfnice와 같은 대구경화포가 제공했다. 마차로 접근하는 밀집대형에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한 이러한 화기와 석궁이 주요한 화력이었다. 대구경화포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Kutna Hora에서 지슈카가 이끄는 병력은 가톨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고 전차전을 펼치기 어려운 위치에서 공세적으로 병력을 운용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후스파 군대는 화력지원하에 포위망을 돌파했고 Wagenburg 대형을 구축할 수 있었다. 6)

그러나, 이러한 Wagenburg대형은 무적이었을까? 물론, 그시대에 Wagenburg를 무력화시킨 적은 없었으며, 후스파와 국경을 맞댄 독일 도시들은 공포에 시달렸으며 황제 지기스문트가 병력을 징병하기 위한 1%세금에 동의했다. 그러나, 후스파 군대만큼 화기를 유효하게 활용하는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내분에 시달리고, 후스파의 Wagenburg를 받아들인 어떤 군대도 후스파에게서 승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15세기 이후로 이 전술은 사용되지 않거나, 사용되더라도 성공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후스파가 독일황제군과 적대하던 당시의 기사군과 정부군이 가지는 화기운용의 취약성 때문이다. Wagenburg는 대형화포의 공세에 매우 취약했고, 당시 기사군들은 대구경 공성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Wagenburg의 우수한 기동력과 당시 공성포의 취약한 기동성(행군대열 후미에서 끌려오다가 하루가 걸려야 배치가 가능한)으로 인하여 Wagenburg는 라벤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실시한 대구경 화포의 침착한 포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 시대에 아직 적절한 야전포를 운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얀 지슈카의 군대는 양륜형 포가에 거치된 대구경 야포를 운용함으로서 월등한 화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즉 전차전에서의 취약성은 지형의 용이성보다는 대형화기에 대한 취약성의 문제인 것이다. 후스파의 성공 이후에 반란군들이 이러한 Wagenburg를 활용하려 하나 실패한 원인에는 16세기에는 이미 대다수의 중앙집권화된 정부군들이 강력한 대형화포를 야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9) 마차를 활용하는 것은 14세기의 플랑드르의 반란군이 이미 방어대형의 측후방을 방호할 목적으로 자주 사용한 바 있었던 전통적인 농민병들의 전술이었다. 이는 조선과는 달리, 기술이나 문명수준에서 현격히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로라는 측면에서는 이전의 로마시대에 가설된 가도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이것이 마모된 이후에는 그 옆에 열악한 도로를 구축한 바 있었던 중세의 이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조정은 호란 이후 이렇다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평화기를 누렸기 때문에, 척계광의 병서와 왜란, 호란의 전투경험, 그리고 고대의 전례에 비추어 군사체계에 대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주변의 군사기술의 발전에 무감각한 편이었기 때문에, 북벌을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차전 논쟁에 있어서 진정 고려해야할 문제점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전차를 이용한 방어선은 야전축성에 비해 장사정 포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한 어떤 언급도 부재하며, 호란당시에 이미 청군이 홍이포와 호준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청과 일본군의 화기운용에 대한 우려도 부재하다는 점은 안이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미 당시에 청은 자체적으로 24파운더 급의 야포를 운용하고 있었고 명군과의 교전에서 전차전을 경험한 바 있었으며, 포가를 활용하고 있었다. 일본 역시 네덜란드에서 포가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포를 수입하던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청 기병과 왜군 보병의 백병전 가능성만을 고려해 전차전 운용을 주장하고 이를 단지 험지에서의 운용성 문제로 반대한 것은 당시 조선 조정의 군사적 발전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조선조정이 고민해야할 문제는 전차가 조선에서 운용가능하느냐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차 자체는 조선에서 충분히 운용가능했으나 그 목적은 달라야 했다. 대규모 병력의 동원 및 운용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인지, 조선군의 병참체제능력은 취약하기 이를데 없다고 봐야한다. 수레운용과 관련하여 다음에는 조선군의 병참체제를 훈련도감을 대상으로 논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