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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구름위 2013. 2. 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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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조선의 삼수병 운용은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토대로 하여, 이를 조선의 상황에 적합하게 개선-보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체제에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왜군에 대응하기 적합하다는 평가와, 화기의 중요성 강화로 인하여 절강에서 왜구를 상대로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던 척계광의 절강병 운용과 왜란과정에서의 남병운용에 대한 적극적 도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척계광의 절강지역에서의 대 왜구 전투의 노하우를 담은 '기효신서'를 발췌한 조선의 '병학지남'은 조선 후기 군사제도의 기틀이 되었으며, 이를 제도화, 표준화하기 위한 '병학통', 알기 쉽게 풀이한 '병학지남연의'를 비롯한 병서가 편찬되었다. 그러나 이후 호란을 거치면서 어왜전법이라는 논지하에, 북방의 위협 및 북벌가능성과 관련한 비판이 시작되었으며 이를 통해 척계광이 북부 몽고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편찬된 '연병실기'의 거기영도를 도입하고, "병학통"에도 조선 전기 오위진법의 기병중심의 개념을 도입한 영조시대의 '속병장도설'을 활용하였다.

연려실기술 26권에서의 각 장수에 대한 사적에서 등장하는 광교산 전투 및 탑골전투, 그리고 사르허 전투의 전례에서 부분적으로 삼수병의 실제 운용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 이후의 조선 후기의 다양한 군사적 노력의 결과는 청과 일본에서 안정적인 헤게모니가 구축됨으로서, 실제 실용적으로 사용되지 않음으로서 전투사례로서 그 운용의 효과성을 측정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14세기 초에서 16세기 중후반에 이르는 기간의 다양한 전투사례와 군사적 변화과정을 조선의 삼수병 운용과 비교하는 경우, 그 효과성을 측정할 수 있는, 그리고 유사한 전술 및 병기운용에 대한 기록을 관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화거와 유사한 수레를 이용한 화기운용을 비롯하여, "연병실기"의 거기영이나 "융원필비"의 화거방진도와 유사한 "Wagenburg"의 운용이나 플랑드르,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지에서 일어난 굉장히 다양한 전투사례를 통해서 삼수병 운용이 적합한지, 그리고 조선 후기의 다양한 노력이 청이나 일본을 가상적으로 설정할 경우 효과적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 논의하기에 유용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 삼수병 운용에 대한 이해


삼수병 운용이 기초하고 있는 "기효신서"에서는 보병전력 위주로 병력을 편성하여 이를 2개 대로 분류하는데, 편제형태상 상호지원하는 2개 부대는 소단위병력으로 구성되며 단병접전에 투입되는 살수대와 조총부대로 편성되는데, 살수대는 "기효신서"에 따르면, 대장 1명, 취사병인 화병 1명, 등패 2명, 낭선 2명, 당파 2명, 장창 4명등 12명으로 구성된다. 조총부대는 대장 1명외에 조총수 10명과 화병 1명으로 마찬가지로 12명으로 구성된다. 1)

"병학지남"의 장단상제편에 따르면, 살수대의 원앙진은 등패병 한명씩을 낭선(대나무 가지를 자르지 않은 죽장창) 한명씩이 지원하고 장창 2명이 낭성과 등패 한명씩을 담당하여 백병전을 지원한다고 한다. 낭선으로 등패를, 장창으로 낭선을, 그리고 최후미의 당파(삼지창) 2명이 장창을 지원하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이 장창의 수가 2명으로 줄고 2명이 대봉으로 대체된다.

"병학지남"의 주간훈련과정에 포함된 전투형태에서 조총부대는 적이 접근하는 경우 일제사격 또는 윤방(5발의 교대사격)으로 사격을 가하고 후퇴한다.(이때 사수대와 화전(로켓무기)을 단 당파수도 사격하게 된다) 이후 후방의 살수대가 초월 전방으로 전진하여 교전을 벌이고, 후퇴하며, 이후 다시 조총과 활을 쏘는데 이때는 일제사격으로 한다. 이후 전방에서 대기하던 살수대가 교전을 벌이며 적을 후방 살수대지역으로 유인, 함께 공격을 가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이상적인 조련과정대로 교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이러한 "병학지남"상의 교련과정을 통해서 삼수병 운용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삼수병 운용과 절강병법은 백병전을 살수대의 상호지원하는 소규모 분대규모 병력을 통해 방어하며, 병기를 밀집대형으로 집단운용하지 않는다. 병력규모가 커지더라도 기본 전투단위는 소단위체제로 유지된다. 원앙진 외에도 삼재진, 매화진과 같이 대열의 변화를 주기는 하지만 최소단위인 살수대, 조총대는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살수대는 북방의 경우 백총이 이끄는 국단위로 1개 국에 3기(9개 대)가 배치되며, 남방의 경우 이를 초관이 이끄는 1초(3기, 9개대)로 배치된다. 북방의 경우 3국이 1사, 남방의 경우 5초가 1사를 이루는데, 병학지남 원근겸수편에 따르면, 살수 4초, 조총 1초로 1사가 구성된다고 한다.(물론 실제로는 조총비율이 항상 더 많았다.)

"병학지남"상에서는 병력을 전층, 후층으로 나누어 교련하는데, 한사가 두층, 또는 한층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살수대는 전층과 후층으로 구분하여 언급하는 반면, 조총부대는 전층의 전면에서 작전하는 것으로 언급하는데, 1사가 1개 층을 형성하는 경우에 각 사의 조총부대가 통합운용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이론적으로는 살수의 수가 더 많고, 전투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살수가 되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 이렇게 하기 어려웠다고 보아야 현실적일 것이다. 각 살수대의 최소단위인 대의 원앙진간 거리는 1장으로 명시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병력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최소단위가 밀집대형을 취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전술체계가 방어적인 전술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는 장창수를 비롯하여 살수대 대장도 활로 무장한다. 이를 보면 정확히 삼수병 체제라기 보다는 살수가 활로 무장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연병실기 상에서는 장창병을 조총수 2명과 구형 화기인 곤방(타격무기면서 동시에 짧은 총신이 달린 무기)으로 무장한 2명으로 교체했다. 척계광은 북방의 유목민을 대상으로 하면서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이런 형태를 취하는데, 장창이 일반적으로 대기병용으로 활용된 여타 동시대 사례와는 판이하다. 소규모 단위부대에서 장창이 대보병 백병전 지원용으로는 활용되었지만, 밀집대형을 취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대기병용 백병용으로 활용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병학지남"은 기본적으로 "기효신서"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 병자호란 이후 북방의 기병대가 주된 위협으로 상정되면서 많은 비판이 가해지게 된다. "기효신서"를 지은 척계광은 1568년 봄에 북방의 계주총병으로 전보되어 몽고기마부대를 상대하게 된다. 이후 그는 1571년 "연병실기"를 간행하였는데, 이 내용상에서는 기존의 절강병법과는 달리, 기병과 보병의 상호연계 및 전차전을 도입함으로서 대응하게 되었다.

정조는 "병학지남"을 새로 간행하면서 "연병실기"상에 수록된 "거기영진"을 수록하였는데, 이전의 1684년 간행된 판본에서는 전차와 마병과 관련된 4개 진도를 조선의 지형에 맞지않다하여 삭제하였으나, 병학지남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면서 북방기병에도 대응하기 위한 "거기영진"을 수록한 것이다.

"병학지남"상에서 또한 유의해야 할 것은 2가지 사항이 더 있다. 병학지남 야간훈련내용의 안영편에는 진지를 구축함에 있어서 거마창(날카로운 창을 여러개 묶어서 세워놓은 것)을 세우고, 질려(4개의 뾰족한 날이 있어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뿌리는 장애물)를 뿌린다. 그리고 성을 방어하는 훈련내용상의 일면조 편에 "불랑기"의 사격이 등장한다.

이론적인 훈련내용상에서 알 수 있고, 지금의 글에서 중시할 3가지 사항이 이것이다. 조선군은 야전시 조총위주의 병력이 기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보고 임진왜란 당시부터 거마목을 제작한 기록이 있다. 질려는 조선 개국초기부터 사용되었다. 1808년에 어영청에 3만여개의 철질려가 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량비축되었다.

불랑기의 경우 야전에서의 전투상황에서 불랑기를 비롯한 대형총통의 사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수성전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주력 화포였던 불랑기가 야전에서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아마도 기동성의 문제가 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종 4년에야 신헌이 제작한 불랑기동거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그것 역시 근대식 포거와 괴리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융원필비"에 소개된 동거는 야전에서의 기동성을 갖출만한 형태는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크다.(실제로, 호란당시의 연려실기술상에서 야전시 화포의 운용에 대한 언급은 조선군측이 아니라 청군의 호준포다.) 조선 후기 연병실기상의 전차전을 구현하기 위하여 불랑기 2문을 장착한 전거를 제작, 유지하려 했는데, 1808년 편찬된 만기요람에 어영청에 51량의 전거가 비축되었다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12)??이것이 불랑기가 야전에서 운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증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삼수병 운용과 관련하여, 조선군의 야전운용에서 이 3가지, 즉 병력 및 전술단위와 운용, 야전에서의 진지축성 및 장애물설치, 야전에서의 대형화기 운용이 중요한 것은, 이 3가지 사항이 14세기부터 16세기간의 보병전술 및 화기운용에 있어서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요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실제 전례를 통해서 조선 삼수병 운용에 대해서 확인해 볼 것이다.




2. 실제 전례를 통해서 본 삼수병 운용


호란 당시의 3개 전투는 왜란 이후의 조총병 및 삼수병 운용에 대한 드문 사례로 제공될 수 있다. 광교산 전투 및 탑골 전투, 쌍령 전투의 경우 조선군이 조총을 주력화기로 운용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나, 이것이 과연 삼수병 운용으로 보아야 할지는 의문스럽다. 이는 병학지남에서 보여지는 삼수병운용이 살수대 운용이 상당히 두드러지는 반면에, 실제 전투에서는 살수대 운용에 대한 내용 자체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평안병사 류림과 순찰사 홍명구가 이끈 탑골 전투에서, 홍명구는 금화현 산기슭의 비교적 평평한 지형에 진을 쳤으나, 류림은 병력을 합쳐야 하며(홍명구측의 주장에서는 류림이 병력을 합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고지에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고(홍명구측 주장에서는 류림이 먼저 험지에 진을 치고 구원치 않았다고 주장한다.) 제의했으나, 홍명구가 받아들이지 않아 병력이 이분되게 되었다. 홍명구의 우진은 먼저 청군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였는데, 상세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는다. 반면 류림은 험지에 진을 설치하고 잣나무 숲을 이용해 목책을 구축하였다고 “해동명장전”에 언급된다.

이 경우 삼림지역이었기 때문에 기병이 접근하기 용이하지 않았고, 근접거리에서 조총사격을 가함으로서 “탄환 한 개로 몇사람의 적을 거꾸러뜨릴 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군은 류림의 진지를 돌파하다가 다시 물러나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살수대가 운용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홍명구의 우진붕괴과정을 고려할 때, 살수대는 평원지형에서 기병에게 대적할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준룡의 광교산 전투에서도 고지에 병력을 배치한 김준룡은 방진형태로 진을 구축하고 방어에 임했다. 전투양상은 탑골전투와 유사하게 진행된다. 지속적으로 공격해오는 청군을 조총사격으로 격퇴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여기서 가시적인 기록은 청병이 호준포를 활용하였다는 점인데, 이는 무척 중요한 사항이다.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의 쌍령전투는 가장 충격적인 조선군의 패배사례인데, 약간은 탑골전투와 유사하다. 허완의 경우 영장 선약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지에 진을 쳤으며, 민영은 산등성이에 진을 쳤다. 연려실기술 상의 초기언급은 남산 상봉에서 33명이 목방패를 들고 접근했다고 하는데, 전투과정은 사격통제 및 탄약배분상의 문제로 어이없는 허완의 좌진의 붕괴, 그리고 탄약배분과정에서의 실수로 인한 민영의 우진의 붕괴로 인한 대패다.

이 3개 전투과정에서 승전의 주요 요인은 2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먼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탑골전투와 광교산전투에서 청군은 고지에 배치된 조선군에게 기병운용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으며, 조총사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반면, 탑골전투의 홍명구군, 그리고 쌍령전투에서는 조선군은 평지에 병력을 배치함으로서 기병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홍명구군의 경우 병력열세를 고려하면 어쩔수 없다 할지라도, 허완과 민영의 경우, 4만의 병력을 보유했다고 하는데 300여 기병에게 패배했다고 하는 것은, 수치의 오차가 있다할지라도 어이없는 패배라고 할 수 있다.

2번째 요인은 유효한 사격통제다. 세 전투중 탑골전투와 광교산 전투는 승리했지만, 결과적으로 양식과 탄환의 부족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이후에 논의하겠지만, 방어적인 전술을 추구하는 경우 고래로부터 지속적으로 직면해야하는 문제였다. 특히 적이 기병전력상에서 우위에 있을 경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판이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많은 전례들이 존재한다. 실지로 유효하게 사격을 통제한다 할지라도 고지에 고립된 병력은 비축한 식량과 발사체, 그리고 물의 부족에 시달리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전투과정에서 살수대의 공세적 운용에 대한 묘사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전투의 주력은 조총화력에 의거하며 수세적으로 운용되는데, 이 과정에서 병학지남의 교련과정에서 드러나는 제한적인 살수대의 공세적 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삼수병체계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권율의 이치전투나 행주산성전투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러나 실제로 유사한 상황에서 중요한 1가지 요인으로서 야전에서의 대형화기 운용이 있는데, 조선은 호란 이후로는 이렇다 할 외침에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할 전례는 조선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청군의 화기의 야전운용에서의 미숙함 때문에 호란과정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은 이와 관련한 고려가 삼수병체계를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 이러한 전례는 16세기 유럽의 전례를 통해서나 볼 수 있다. 때문에 조선은 군사체계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병학지남”의 훈련체계를 비롯하여 수원화성과 같은 성곽체계에 대한 관찰에서 볼 수 있다.




3. 유럽 군사사를 통해서 본 삼수병 운용의 문제점



1) 삼수병의 야전운용과 스페인군의 야전운용 비교


유럽의 16세기 초는 개인화기인 화승총이 드디어 주력화기로서 전장에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를 만들게 된다. 이미 이전에도 화승총을 비롯한 개인화기는 부르고뉴군을 비롯하여, 15세기 초중반의 얀 지슈카의 후스파 군대에서도 활용되었으며,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다수의 도시내의 민병들은 도시방어전과정에서 화승총을 활용하였다는 것을 1470년의 공성전 묘사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80년 그려진 그림에서는 화승총이 오리사냥에 사용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이러한 개인화기가 기존의 활이 사용되던 평화시의 목적과 유사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그러나, 16세기 초까지 화승총을 비롯한 개인화기는 야전에서 주된 화력을 제공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석궁과 유사하다. 석궁의 경우, 장궁보다 우월한 관통력에도 불구하고 야전보다는 성곽을 방어하거나, 농민반란군(후스파를 포함하여)들이 마차를 활용한 방어선을 구축한 경우에 야전에서 효율적으로 운용되는데 그쳤다. 이는 발사율의 차이로 인한 것인데, 상대적으로 짧은 사정거리와 관통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장궁이 연사율의 이점을 활용하여 야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또한 영국의 군사적 발전의 근간이 됨으로서 장기적 관점으로 볼 때 화승총 운용에 대한 근간을 제공한 것과는 구분된다.

연사율의 문제는 이 시기의 유럽에서 여전히 기사로 대변되는 중장기병의 돌격에 효과적으로 발사무기가 대응하기 어려웠다는 문제에 기인한다. 화승총은 낮은 명중률에도 불구하고 근접거리에서의 우수한 관통력, 그리고 저렴한 비용(화승총이 활용되기 시작한 15세기에 유럽의 화약제조기술 발전으로 인하여 화약의 경제성이 증진되었으며, 석궁의 경우 활몸이 스프링강의 재질을 지녀야 했기 때문에 화승총에 비해 대량생산되기 어려웠다.)과 장궁과 같은 병력자원의 제한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신속하게 증가했으나, 석궁과 동일한 이유로 야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장궁의 경우는 활의 우수성이라기 보다는, 전술과의 조합과 혁신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장궁은 합성궁에 비견할 만한 위력을 가진 적이 없다.) 직접비교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이 시기의 어떤 투사무기도 집중운용한다고 해서 기병의 돌격에 대응하거나, 15세기를 풍미한 파이크병의 공세적 운용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의 전환기가 16세기 초, 이탈리아 전쟁이다. 1492년 드디어 그라나다에 대한 레콩퀴스타를 종료한 카스틸라 아라곤 통합왕국(스페인)은 과거 아라곤이 패권을 가지고 있었던 이탈리아에 프랑스가 침공하여 가시적인 군사적 성공을 거두자,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개입하였다. 스페인의 개입과 이미 진출해있던 프랑스와의 충돌과정이 이탈리아 전쟁을 장식하는 핵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의 초기 정복과정을 통해 화약무기 효율성의 극대화와 기존의 중세 도시국가로서는 왕권이 강화된 프랑스, 영국, 스페인등의 근대적 국가들에게 도저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다른 관점에서도 커다란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대형화기의 운용과 Trace Italienne에 대해서 추후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스페인군은 600명의 기병(그중 500명이 투창으로 무장한 경기병 Jinete), 대부분이 검과 방패로 무장한 Rondeleos(sword and buckler man)인 1500명의 보병을 그라나다 전쟁의 베테랑인 곤잘로 페르난데즈 데 코르도바, 일명 Great Captain의 지휘하에 이탈리아로 진입시켰다가 1495년 Seminara에서 대패한다. 여기서 스페인군의 경기병은 프랑스군의 중장기병인 Gendarmes에게, 스페인군의 민병인 Rondeleos는 프랑스군에 복무하는 스위스 파이크병에게 대적할 수 없다는 결과로 드러났다. 곤잘로는 전면전을 회피하고 그라나다에서 익숙한 산악게릴라전으로 전환했다.(산악 게릴라전 과정에서 Rondeleos는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6)

시간을 번 곤잘로는 독일의 란츠크네흐트 파이크병과 독일 화승총병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으로부터 지원받았다. 2000명 수준의 이 지원병력중 300여명이 화승총병이었는데, 이후 곤잘로 휘하의 스페인군은 14000수준으로 증강되었고 이중 6분의 1이 화승총병이었다. 2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6)

이 시점에서 드디어 화승총의 시대를 연 역사적인 전투 Cerignola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의 결과는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등장하는 시점까지 보병의 야전운용에 있어서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스페인군은 먼저 전투위치를 선점하고 참호를 구축하였다. 야전축성을 통해서 화승총병을 방호할 참호를 구축하였는데, 여기서 실제 스페인군의 화승총병 운용 및 야전축성을 지휘 감독한 것은 곤잘로 휘하의 장교이자 공병책임자였던 페드로 나바로였다.(그는 최초의 군사기술자로 손꼽히며, 이후 다시 중요하게 언급될 라벤나 전투의 스페인측 지휘관이기도 하다.)

최초 교전은 프랑스 중장기병돌격으로 시작되었으나 참호를 건너 육박할 수 없었던 중장기병은 지근거리에서 스페인 화승총의 사격에 직면해 와해되었다. 후속된 스위스 창병의 공세 역시 동일한 운명에 직면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후퇴했다.

실제로 이 전투과정은 공성전과 크게 다를바 없다. 기병이나 보병이 접근하기 어려운 성벽대신 참호를 파고 거기에 효과적으로 배치된 화승총이 지근거리에서 밀집운용됨으로서 부족한 명중률 대신 관통력이 극대화되었다. 이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활용한 말뚝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장궁이 승리의 최후결정요인이 아니었던(1298년 Falkirk에서의 승리이후 잊혀졌다가 에드워드 3세때 1333년 Dupplin Moor전투와 Halidon Hill전투를 통해 정립된 영국 장궁-보병 통합전술, 기록에 의하면 장궁의 관통력은 원거리에서 매우 취약했으며, 기본적인 방호구로 방어가 가능했다. 근거리에서 관통력은 상승하는데 근거리에서는 별도의 화살로 관통력을 극대화하고자 했으나, 전투과정을 통해서 실제 장궁자체의 살상력으로 승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것과는 달리, 프랑스군 사상자의 핵심요인은 화승총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후 대부분의 야전에서 스페인군은 이러한 보병중심의 방어적 전술을 지속했다. 실지로, 테르시오로 대변되는 파이크-화승총의 통합운용은 야전에서 실제 관측할 만한 전례를 찾기가 매우 쉽지 않다. 이후 네덜란드 독립전쟁이나 30년 전쟁에서나 찾아볼만 하다. 그 시대 이전까지 16세기를 풍미한 스페인군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야전축성을 통해 적의 유효한 접근을 막고 화승총을 활용하는 전술을 견지한다. 이탈리아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중,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만 스페인군은 야전축성의 보호없이 승리했다.(이후 Ceresole전투에서는 패배한다.) 파비아 전투에서는 그러나 파이크병과 화승총병의 효과적인 조합의 결과로서 승리했다기 보다는, 새벽녂의 짖은 안개와 지형상의 문제로 인해 소수 병력으로 분산시킨 화승총병의 유격전의 승리였다고 평해진다.

이러한 이탈리아 전쟁에서의 스페인군의 야전운용과 조선군의 삼수병의 야전에서의 운용은 "병학지남"과 같은 이론적인 운용상황에서는 불일치하나, 호란과정에서의 광교산, 탑골, 쌍령전투의 실질 조선군의 조총부대 운용과는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1610년 간행된 "무예제보번역속집"의 "협도곤제"에는 "오랑캐 방비에서 철갑을 입고 말을 탄 군사가 일제히 돌격할 즈음에 장창을 쓰면 부러지므로 오로지 대봉과 협도곤을 사용해야" 승리한다고 적혀있는데 6), 이를 고려할 때 당시 청 기병대가 갑주로 무장한 중장기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진기병과의 조선 북방군의 교전에서 화기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조선 초기부터 교역을 통해 갑주로 무장한 여진기병과의 교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스페인군의 주로 상대해야 했던 프랑스군의 Gendarmes, Men at arms는 조선군이 상대해야 했던 청기병과 유사하다. 프랑스군에서 복무한 스위스 파이크병은 왜란당시 장창 나게야리로 무장한 일본군의 장창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물론 당시 스위스 파이크병은 훈련도, 사기, 편제등 모든 측면에서 비견할 만한 병종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프랑스의 피카르디 창병도 스위스 방식으로 훈련하였지만 "동일하게 훈련받았지만 동일한 정신은 없다"라고 평가받았다. 창병의 공세적 운용, 특히 15세기와 같이 이미 다수의 화기를 비롯한 발사무기가 운용되던 상황에서 현대 군사사가들은 스위스군은 "파이크"의 본질적 방어운용과 무기의 특성보다는 그 훈련과 정신, 기율과 사회적 응집성으로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6) 9) )

척계광의 절강병법은 화력측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상태에서 편제상 정규군에 가깝지 않은 왜구를 대상으로 시현되었으며, 절강지방에서는 호준포를 운용한 원인처럼 기병운용이 쉬운 지방은 아니었고 왜구가 대량의 기병을 운용했으리라 보여지지는 않는다. 원앙진과 최소단위의 살수대운용에서 보듯이, "기효신서"는 개개인의 무예의 필요성, 그리고 보다 소규모의 보병 단병접전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다. 실제로 왜구에 대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특히 대형 도검(야태도나 나기나타?)의 무서움을 언급하고, 그로 인해 조총부대에게 양수도를 무장케 한 것처럼, 척계광은 기병과의 교전가능성이나 밀집 장창대와의 교전가능성을 상정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후 계주총병으로 옮기면서(실제 대규모 몽골기병과의 교전은 없었다고 한다.) 연병실기를 편찬, 전차, 기병을 혼용하는 거기영진을 만드는데, 여기서 살수대의 장창을 폐지하고 화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개선하게 되는데, 이를 볼 때도, 살수대로서는 기병과의 교전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앙진은 기본적으로 개개인간의 단병접전시 다른 무기를 보유한 살수대 인원이 상호 지원함으로서 백병전에서 조총대를 방어하고, 전층과 후층이 상호지원하면서 화력을 활용하는 형태를 취한다. 만약, 장창밀집대형같이 별도의 개인교전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원앙진과 같은 살수대는 효과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호란당시의 조선군의 야전운용은 지휘관이 어느정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리를 거둔 류림, 김준룡이나 쌍령전투에서의 영장 선약해등은 지리적인 이점을 가진 위치에 방어대형을 구축해야함을 인지하고 있었고, 특히 고지를 거점으로 하고 목책을 설치한 류림의 전투지휘는 Cerignola에서의 스페인군의 야전축성과 비견할만 하다.

먼저, 조선군의 "병학지남"의 장조정식, 즉 주간훈련과정을 통해 관측하면, 야전에서 적과 교전할 경우 조선군의 훈련과정에는 구체적으로 지리적 이점이 활용가능한 방어진지의 구축이나 지침이 제시되지 않는다. 즉 적의 출현시, 야전에서 조선군은 방진을 구축하고 살수대와 조총대를 활용하여 적과 교전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이 경우, 가상 적으로 설정가능한 청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야전에서 유효한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조총의 사격과 살수대의 운용을 통해 접근하는 청군과 일본군을 저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조총사격만으로는 척계광이 상대한 왜구라도 접근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1513년 노바라 전투에서 스위스군은 프랑스를 상대로 기습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야전축성을 미리 하지 않은 프랑스측 화승총병과 포대는 스위스군에게 포격을 가했으나 저지하지는 못했고 이를 보호하던 란츠크네흐트도 괴멸되었다. 6) 그 때문에 살수대가 필요한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과연 살수대가 청의 중장기병이나 일본측 장창부대를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군의 전례에서는 대부분 지휘관들은 유효한 방어진형을 구축하고 장애물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살리허 전투에서 패배한 강홍립의 조선군은 거마작(거마창으로 추정)을 청의 기병을 저지할 목적으로 지참하였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고 한다. 10)

"병학지남" 2권의 영진정구의 야영편에 보면, 적의 출몰가능성이 낮은 경우에는 거마창과 질려만을 설치하며, 높은 경우 목책을 설치하여 방비를 튼튼히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언급을 고려할 때, 실제로 야전상황에서 조선군이 방어를 수행할 때는 급히 진을 치고 거마창과 질려 및 목책을 설치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그러나, 살리허 전투에서 보듯이 평지지형에서는 거마창과 같은 장애물의 유효성도 떨어진다. 특히 장애물지대는 보병의 공격에 의해서는 제한되는데, 1522년 Bicocca 전투에서 스위스 파이크병은 종대대형에 심각한 포격을 받았으나 대열을 유지하고 참호벽에 도달, 4차례의 화승총 일제사격에도 불구하고 소수가 누벽에 기어올랐으나 마지막에 란츠크네흐트에 의해 격퇴되었다.

황제(독일)군은 Bicocca에서 유효한 방어위치를 채택하고 야전축성으로 강화하였고 이를 다시 란츠크네흐트 창병으로 보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창병은 이를 극복했다. 기병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군의 경우, 거마창, 질려, 목책의 활용 이외에 야전축성을 위한 공병의 활용이나 장비의 적극적 활용을 관측할 수 없다. 평지에서의 이러한 장애물활용은 청 기병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 물론 살수대도 이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사항을 고려한다면, 당시의 조선군은 조총부대 집중운용에 필수적인 장애물지대 구축이 충분하지 못했다. 물론 당시 유럽에 비해 다양한 전투사례가 부족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살수대나 거마창이 평지에서 기병을 저지하지 못한다는 구체적 전례에도 불구하고 조선측의 이에 대한 대응은 연병실기상의 거기영진을 활용하고자 하는 노력에 국한되었다. 문제는 다수의 수레를 유지, 보수하는 비용과 마필의 조달, 그리고 지형상의 문제점때문에 실용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어영청에 이를 위한 전거가 모두 51량이 있었는데 5륜이 5량, 양륜이 20량, 독륜이 26량이라고 한다. 12) 이는 연병실기상에서 말하는 2개의 불랑기로 무장한 수레일 가능성이 있는 전거가 겨우 5량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양륜과 독륜은 아마도 검거(검을 부착한 수레)나 화거(다수의 승자총통을 설치한 일종의 Organ gun), 목화수거로 보인다. 이것으로는 융원필비상의 화거방진도를 위한 100개의 화거와 20개의 목화수거도 충족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거기영진이 가능했다 할지라도, 실용성은 떨어진다. 다시 논하겠지만, 척계광의 연병실기는 몽고 유목민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 청이나 일본같은 수준의 국가를 상대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거기영진이나 화거방진이 불가능하다면, 조선군은 장애물지대를 구축하기 위한 별도의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실지로 살수대가 이런 목적으로 활용되어야만 하지만, 그렇지 못했고, 서구적인 장창대형을 활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오히려 장창은 폐지되었다. 이는 잘못된 선택은 아니다. 밀집대형을 취하지 않는다면, 장창은 그다지 효과적인 병기는 아니다.) 물론 구체적인 전례나, "병학지남"상에 구체적인 야전축성과 관련된 언급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조선군은 야전축성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부적절하겠지만, 야전축성과 관련된 조선군의 훈련체계 및 전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전례가 부족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봐야할 것인가? 1619년 살리허 전투과정에서 산해총병관 두송예하의 좌측 중로군의 2진인 2000여명의 전차 및 기병으로 이루어진 유격 공염수와 이희필의 병력은 참호를 파고 전차와 화기를 배치하였다. "연병실기"상에서 고려된 전차의 활용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야전축성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1천여 병력을 이끌고 500여 병력을 하마시켜 공병으로 운용, 전차방어선을 돌파하고 이곳에 기병을 투입하여 격파하였다. 좌측 북로군의 지휘관 마림도 3중의 참호를 구축했다고 한다. 11)

이외에도 1642년 이자성군과 명군과의 주선진 전투과정에서 이자성군은 56Km, 깊이 5M, 너비 5M의 대규모 참호선을 구축했다고 한다. 11) 그 목적은 보급선 차단에 있었으나 이와 같이, 명의 멸망을 전후하여, 참호를 이용한 전례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조선군이 야전축성을 행했을 가능성이나, 적어도, 조선이 야전에서의 삼수병운용에 있어서 야전축성을 도입할 근거는 충분히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호란당시의 목책활용이나 거마창보다는 보다 효과적인 목책의 활용법이 제시되었다. 유성룡은 설책지법에서 행군과정에서 영벽을 구축할 필요성을 제시하며 특히 흙을 사용하는 고래의 영벽과 왜란과정에서 일본군이 활용한 목책을 참작하여 안이 비도록 땅에 박은 목책을 나무로 연결하여 네모지게 엮어서 안에 찰흙을 짚과 섞고 물을 섞어 안애 채워놓고 마르면 다시 쌓아 꼭대기까지 올리는데 그 높이를 한길 반에서 두길(길을 8척에서 10척으로 볼 때, 최소 2.4미터에서 최대 6미터이나, 실제로는 사람키 정도로 가정한다면 1.6미터에서 3미터수준정도로 추정)로 쌓고 다시 안팎을 고운진흙으로 바르면 성이 되며, 네 모퉁이에 포구를 만들어 대형화포를, 중간에는 작은 구멍으로 소형총통을, 꼮대기엔 망루를 만들어 활용하자고 하였다. 12) 이는 16세기 유럽의 공성전에 등장하는 gabion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남북전쟁 당시의 요새에도 나타난다.)

또한, 신속성을 고려한 야전축성에 대한 고려도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숙종 3년 8월 4일 실록에 의하면, 이인척이 아버지 이완이 강구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약 20두(斗)(36리터)의 흙을 담을 수 있는 포대를 병사들에게 지게 하여 3자루씩 쌓아 1첩을 만드는데 이를 빙 둘러 쌓고 성앞에 흙을 판 자리가 해자가 되나 이 방법이 널리 퍼지지 못했다고 했는데, 당시 영의정 허적이 이완에게 이미 들은바이며 훈련도감에는 이미 포대가 있고, 총융청은 준비가 어렵고, 어영청에 준비시키면 좋겠다고 답한 것으로 보아 이런 노력이 강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병학지남에는 이러한 야전축성에 대해 영진정구 윤사편에서 호안[壕岸]이라고 언급한다. 여기서 적병이 소수가 다가오면 사격하지 말고 대기하다가 다수가 접근할 경우 지근거리까지 기다리다가 목성, 호안, 거마아래서 연속사격을 가한다고 언급하는데, 이를 상세히 풀이한 병학지남연의 영진정구 윤방편에서는 호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 호안은 참호를 의미하며, 성하, 즉 해자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넓이는 3장 5척(10미터 이상) 이상, 깊이는 1장 5척(4미터 이상) 이상으로 하고 물이 깊으면 좋고 얕고 진흙이 있는게 그 다음이며 여기에 찌르는 나무나 대못, 쇠칼날을 넣으면 좋다고 언급한다. 13)

그러나 이러한 해자는 병학지남상에서는 영진을 구축할 때 한다고 되어있는데, 야영상에서는 거마창이나 목책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이나, 규정된 해자의 규모로 볼 때, 과연 실제 이런 야전축성을 시행했을까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만약, 이러한 규모의 해자가 축성되고, 이완의 포대의 활용이 실제 시행됬다면 적어도 청기병이던, 일본 보병이던 지근거리에서 조선군의 화력에 일방적으로 학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진을 구축하는 경우이고, 야전에서의 실제 방어, 공격훈련간에 이러한 야전축성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야전축성과 장창대형의 도입은 조선에 성공적일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야전축성의 경우, 대부분이 농민이라는 점이나 그다지 독특한 기술적인 우수성이 필요하다거나 거마창과 같이 다수의 장애물을 지참할 필요성이 적다는 면에서 효율적이면서 효과적이다. 특히 야전축성을 통한 누벽과 해자와 같은 형태의 구조물은 프랑스 중장기병의 돌파를 거의 불가능하게 했다. 이런 면에서 평지에서도 탑골전투에서 류림이 위치했던 고지대의 잣나무와 같은 지리적 이점이 없더라도 고지와 같은 이점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실제로 많은 무예훈련과 조련이 필요한 살수대운용에 비하여, 장창 밀집대형은 상대적으로 개인의 무예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면에서 조총부대와 유사하다. 스위스 파이크병의 경우, 높은 수준의 훈련도가 필요했는데, 이는 스위스 파이크병이 공세적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화력위주의 조총부대를 주력으로 활용한다면, 장창을 방어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플랑드르 농민병들이 14세기에 증명했듯이 대단치 않은 훈련도로도 가능하다(Caessel에서 플랑드르군은 프랑스에게 패배한다. 그 원인은 기병이 장창대열을 뚫고 들어가서가 아니라 플랑드르군이 공세를 감행하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만약, 야전축성과 장창의 활용이 가능했다면, 보다 낮은 훈련수준의 농민병으로 방어적인 상황에서 청이나 일본의 공세는 조총부대의 화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며, 지리적인 취사선택의 범위를 상당부분 넓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러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조선군은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스페인군의 야전축성-파이크-화승총의 방어적 운용에서 가졌던 문제점이나, 플랑드르 농민병들이 가졌던 문제점과 유사하다. 방어적인 전술운용은 근본적으로 전장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이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자는 공세를 유예하여 방자의 보급선을 끊거나, 또는 원거리에서 효과적인 장거리 화력을 통해 방자에게 피해를 강요함으로서 방자가 자신의 이점을 포기하고 공세에 나서도록 함으로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1328년 Cassel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플랑드르 농민병들이 방어적인 대형을 유지하다가 1304년 Mons-en-Pevele에서 간신히 성공했던 공격행동을 감행하도록 공세를 연기했다. 공자는 단지 공세를 연기함으로서 방자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유럽에서는 화승총병운용이 야전축성과 결합됨으로서 당시 대부분의 군사지휘관들은 방어적인 병력운용을 선호했다. 누구나 유효한 지형을 선점하고 야전축성을 실시했으며 상대가 공격하길 기대했다. 1553년 Marciano에서는 프랑스-시에나군은 합스부르크군과 교전하기 위해 140M떨어진 거리에서 서로 참호를 파고 1주간 저격만을 교환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프랑스-시에네군의 보급이 떨어질때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여전히 기병이나 파이크병은 야전축성이나 파이크병으로 보호받지 않는 포병진지나 화승총병을 휩쓸어버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1513년 Novara전투에서 스위스군은 참호진지를 구축하기 전의 프랑스군을 기습했고 포병화력의 피해를 무시하고 방호하던 란츠크네흐트를 격퇴하고 800여명의 화승총병이 이 앞에서 괴멸되었다. 1512년 Ravenna전투에서 프랑스 중장기병은 스페인-교황군 기병을 전장에서 쫒아낸 후, 스페인 보병이 참호로 방어받지 않는 쪽에서 공격함으로서 승리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삼수병운용에 있어서, 야전축성과 장창밀집대형의 운용은 상당한 필수적 요소로 제시될 만 하다. 즉, 야전축성만으로는 살리허 전투나 유럽의 전투사례들에서 언급했듯이 조총부대에 충분한 방어력을 제공하기 어려우며, 기병과 보병이 궁극적으로 극복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극복하기 어려운 수준의 지리적 이점을 확보하고 야전축성과 장애물지대를 구축한다 할지라도 전장의 주도권을 양도함으로서 이러한 이점을 포기해야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총부대를 공세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개인의 무예수준보다 단순한 훈련이 가능하며, 기병 및 보병의 공세에 방어적으로 운용가능한 장창밀집대형은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척계광이 대안으로 제시한 거기영진또한 대안이 될 수 있으나, 호란이후의 일본 및 청의 군사기술의 수준과 유럽에서 유사하게 적용된 "Wagenburg"의 등장과 몰락을 고려할 때에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장창밀집대형의 경우에도 물론 유럽에서 증명됬듯이, 상당한 수준의 훈련체계와 개개 병사에 대한 통제와 기율이 필요하다.(스위스 파이크병은 동질적 사회계급과 지속적인 훈련, 군악을 통해 이를 달성했는데, 부분적으로 일본의 아시가루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유럽의 용병에 대한 선호는 어떤 지역에 대한 독특한 선호에 기인한 면이 큰데, 란츠크네흐트는 주로 스와비안 지역에서, 저지대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왈룬인들이 용병으로서 선호되었다. 동일한 사회계급이 창출하는 전우애와 상호간의 규율로 인해 신뢰받았으며, 마키아벨리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민병보다는 덜 폭력적이고 믿을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살수대 운용에 비해 개인의 무예에 대한 요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무장의 표준화에 용이하며, 갑주를 무장할 필요가 적고, "병학지남"상의 훈련체계나 군악운용의 수준은 당시 유럽의 창병운용보다 떨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면에서 파이크대형의 도입은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