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2

구름위 2013. 2. 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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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 - 2



2) 조선군의 대형화기의 야전운용


왜란 이후의 조선의 주력 화포는 불랑기라고 할 수 있다. 만기요람 군정편에 의하면 북한산성의 3영, 승창의 병기고에 유(놋쇠)불랑기가 도합 415문, 철불랑기가 60문으로 소화기인 목모포나 단가포류에 비해서도 많은 수를 점유하고 있다. 어영청과 총융청, 훈련도감 자체 병기고에도 금위영이 위원포가 79문으로 다수인 것을 제외하고는 훈련도감에 불랑기 65문, 어영청에 60문으로 주종을 이룬다. 예외적으로 어영청에 동포 116자루, 훈련도감에 동포 119문이 있는데, 이는 이전의 지자, 현자, 황자총통으로 추측되는데, 금위영에서 승자동포라고 지칭되는 2문의 포가 있고 이러한 총통류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동포 역시, 어영청의 기록에 의하면 116문중 장동포가 8문, 중동포가 3문, 단동포가 78문으로 단동포가 주종을 이루는데, 승자총통이 단동포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14)

조선후기 대원군 이전까지 가장 강력한 화포라고 할 수 있는 홍이포의 경우 영조 7년(1731년) 9월 21일 실록에 훈련도감에서 최초로 2문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훈련도감에 2문의 홍이포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추가로 다수의 홍이포를 제작한 것 같지는 않다. 현종수정실록 5년(1664년) 6월 24일의 강화도어사 민유중의 보고에 의하면 강화도에는 대포 1백 79좌, 남만 대포(南蠻大砲) 12좌, 불랑기(佛狼機) 2백 44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자체제작하기 이전에도 홍이포류의 서양화포가 수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에서도 여전히 불랑기가 가장 주력이라 할 수 있다.

불랑기의 사거리는 해군충무공 유물발굴단, 해군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에서 총통실물유물을 참조하여 복제품을 제작하여 실험한 결과, 철환을 사용할 경우 1300m에서 1400m의 사거리가 나왔다. 15) 구경은 불랑기 4호가 경복궁이나 육군이 보유한 것이 33mm에서 40mm고 주로 40mm로 구성되어 있으며, 길이는 86.5cm에서 104cm에 이른다. 무게는 32.5kg에서 74kg이다. 화포식언해, 화기도감의궤에 따르면 불랑기 4호는 3척 1촌 7분(90cm 이상), 무게 90근(54kg)인데, 화약은 3냥(112g)을 사용한다. 16)

불랑기 5호의 경우 실물유물은 2개 유물이 남아있는데, 구경은 83.5cm와 69.7cm, 구경은 23mm와 25mm, 무게는 17.8kg과 29kg이다. 화포식언해와 화기도감의궤에 의하면 불랑기 5호의 길이는 2척 6촌 5푼(80cm수준), 무게는 60근(18kg수준), 화약은 2냥(75g)을 사용한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4호와 5호를 구분한 어영청의 경우, 4호가 10문, 5호가 50문이며 훈련도감의 경우, 4호가 15문, 5호가 50문이었다. 5호가 상대적으로 더 주종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불랑기의 적정한 유효사거리는 어느정도일까? 병학지남 성조정식 일면조편에서 불랑기의 사격거리는 백보로 조총과 동일하다. 주력화기인 불랑기 5호의 구경은 25mm이며 무게는 최대 29kg수준이다. 사람이 들 수 있는 정도의 무게라고 볼 수 있다. 사용하는 화약은 2냥, 112g인데, 이러한 기술이 전래된 시점의 1639년 영국의 화포표준에 의거해서 유사한 화포를 찾으면 Base뿐이다. 이 화포는 구경 1.25인치(31.75mm), 무게 200파운드(90kg), 발사체는 3분의 1파운드(453g), Corned powder를 사용시 화약량은 0.25파운드(113g), 사거리는 직사거리가 100pace(75m), 최대사거리가 560pace(420m)다. 17)

철환의 경우, 백보로 사정거리를 설정한 것은 산탄사격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단일철환을 발사한다 할지라도, 동시대 서양과 유사한 사거리일 가능성이 높다. 단일체로 야전에서 사격을 할 경우 동시대 유럽처럼 도탄사격(ricochet fire)를 가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도 유효사정은 Base포와 같이 75m 내외수준의 직사사격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지표면에 대한 입사각이 클 경우 도탄되지 않고 지면에 박혀버리기 때문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경이 Base가 불랑기 5호보다 크다는 점에서 단일철환을 사용시 불랑기 5호의 사정거리가 더 길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화약량을 고려하면 이 정도는 줄어들 것이다. 또한 화약의 구성비율에 따라 사정거리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원거리 사격용으로 대장군전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으나, 병학지남 성조정식 우마장준비에 의하면, "우마장 내에서 유병(遊兵)은 총안(銃眼)으로 바깥을 내다보아 적세가 적으면 총을 쏘고 적세가 많으면 대장군전[大將軍]을 쏜다."고 되어 있다. 우마장은 해자와 성벽사이에 설치되는 구조물로서, 양마장이라고도 한다. 만기요람 관방총론에 유성룡의 축성론에서 언급되는데, 양마장을 성밖 참호안에 높이 한길(2.4m, 그러나 사람 키높이로 볼 수도 있다.)로 담을 쌓고 밑에 구멍을 뚫어 대포를 쏘며 중간에 구멍을 뚫어 조총을 쏘는 "기효신서"에 언급된 방어구조물로서 2004년 경남 하동의 하동읍성에서 발견되었다. 12) 이로 미루어 볼 때, 대장군전은 직사거리내에서 조총의 사격거리와 유사한 권역에 적의 밀집대형을 대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불랑기는 야전에서 활용할 만한 기동성을 갖추었을까? 이문제는 상당히 밝혀내기 어렵다. 불랑기는 4, 5호가 각각 각각 최대 74, 29kg이 실물유물을 기준할 때의 무게이다. 이 무게는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스웨덴군에 도입한 경야포 Regimental gun, 즉 연대포보다 훨씬 가볍다. 이 포의 무게는 겨우 138kg에 불과했으며, 3파운더 포였다. 18) 이포는 구경이 유사한 1639년 영국기준의 Minion포가 498kg인데 비해 현격하게 가볍다. Regimental Gun은 포신을 짧게함으로서 무게를 최소화했고 기동성을 강화함으로서 기동력이 강화된 스웨덴 보병과 같이 이동하면서 전면에서 화력을 지원할 수 있었다.

즉 중량면에서 불랑기는 충분히 야전에서 운용되기 적절하다. 정확히 말하면, 16세기에 활용된 주된 효과적인 대구경 야포는 12파운더 급으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데미컬버린은, 1639년 영국기준으로는 3000파운드, 즉 1.3톤에 달한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Lech강 도하 전투에서 오로지 포병만으로 틸리를 패배시켰는데, 이당시 18문의 24파운드 포가 사용되었다. 24파운드 포는 1639년의 영국기준의 경우 19파운더 포인 컬버린을 상회한다.(컬버린이란 명칭은 국가간 기준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애매한데, 스페인의 경우 24파운더 급을 컬버린이라 하지만 탄체무게는 20파운드에서 50파운드까지 존재한다. 20) ) 이 포의 무게는 4500파운드, 즉 2톤급으로 홍이포수준이 된다.(홍이포는 무게는 컬버린급이지만 구경은 100밀리로 데미컬버린 수준이다.)

즉 야전에서의 공세상황에서 직접화력지원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홍이포도 야전에 투입될 수 있다. 게다가 조선군의 야전에서의 삼수병체제는 화력위주의 방어적 병력운용을 지향하기 때문에 사전에 포병진지를 구축할 수 있다면 홍이포도 충분히 투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에서는 실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포가와 병참체제의 문제 때문이다.

조선에 근대적인 개념의 포가가 존재했는지 여부는 매우 불명확하다. 사극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차와 같은 수준의 포가는 이미 존재했지만, 조선 후기에 근대적 포가의 존재에 대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포는 아마도 주로 성곽위주로 배치된 것으로 보이며, 동차외에도 고정을 위한 구조물에 포를 배치하기 위해서 정철, 또는 족철이라 지칭하는 구조물을 포이(포를 고정시키기 위해 양측으로 튀어나온 돌기)에 연결시켰다. 현종 6년(1665년) 5월 8일, 통제사 정부현에게 강화도로 불랑기등 무기를 보내게 한 기록에 따르면 불랑기 50문을 보내는데, 1문마다 족철 1개씩을 만들어 보낼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족철은 15세기 폴란드 포병교범 "Dell' Aqua Praxis"에 등장하는 1파운더 포의 Smeriglio(포가륜)과 Sleigh(포가 활동부위)에 대한 묘사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점, 즉 15세기 초반에는 이미 유럽에서는 근대적인 포가가 등장한 상황이었다. 부르고뉴군은 1430년대에 이미 Serpentine포를 사용했는데, 50에서 150mm수준의 구경과 7피트(213cm)정도의 포신길이에 양륜을 가진 근대식 포가에 설치되었다. 21) 1430년대에 그려진 현재 루브르에 소장된 후스파 군대의 전투도에는 양륜의 근대식 포가에 설치된 화포가 그려져 있는데, 1426년 Usti에서 후스파 군대는 Houfnice라는 단포신 대구경화포를 사용해 성과를 거두었다. 22)

이러한 15세기 초의 포가의 등장을 통해서 유럽은 대구경 화포에 기동성을 부여할 수 있었고, 공성전에서 확연한 위력을 드러내는 16세기 초 이전에 이미 야전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대구경화기의 야전투입이 가능해졌다. 즉 화포가 운용되는 매우 초기시점에만 조선에서 일반적인 족철의 활용이 소구경야포에서나 보여질 뿐, 기동성과 반동을 흡수하는데 용이한 근대식 포가가 신속하게 도입되어진 것이다.

조선의 경우, 근대식 포가는 독립기념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는 1869년에 운현궁에서 제작된 대포, 중포, 소포의 포가다. 훈국신조기계도설에는 신헌이 고종 5년 1868년에 제작한 불랑기 동거가 수록되어 있는데 아래쪽에는 4개의 통나무바퀴가 달린 직사각형의 나무판이 그 위에 구름모양의 활차가 실려 있어 불랑기는 이 활차의 좌우에 있는 구멍에 포이를 걸어 적재하여 활차는 좌우회전이, 불랑기는 포이를 상하조정할 수 있어, 이전의 동차보다 조준에 효과적이었고 활차좌우에 각각 2개식의 자포를 실어서 운반했다. 이외에도 이와 비슷한 마반포거, 쌍포양륜거가 제작되었는데, 여전히 이후 제작된 소포, 중포, 대포와 같은 근대식 포가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실패작이라 할 수 있다. 1)

고종대에 와서야, 이러한 포가가 개발되고 근대식 포가가 전래될 수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이전까지는 야전에서 필수적인 포가의 도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때로 국내에서는 조선후기의 화포의 야전운용가능성을 실록자료를 통해 제시하기도 한다. 영조 7년(1731년) 9월 21일의 훈련도감이 홍이포에 대해서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동포가 50문, 홍이포가 2문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를 싣는 수레가 52대임을 언급하고 있다.(별도로 동포의 탄환도달거리가 2천보(2480m), 홍이포의 사정거리가 10리(3.92km)라고 이것을 실제 그대로 보아 서양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는데, 홍이포의 모델로 추정되는 12파운더 데미캘버린(스페인 16세기 기준)의 최대사정은 5000야드로 4.57km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이 추정하는 실제 최대사정은 1600야드, 유효사정은 500야드 수준이다.)

이외에도 현종 5년(1664년) 6월 23일 강화도 어사 민유중의 서계에 따르면, 화기 가운데 불랑기를 넉넉하게 제조하고, 화기 가운데 무거워 운반하기 어려운 것이 많으니 몇사람이 싣고 끌수 있는 작은 수레를 별도로 만들자는 내용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 후기에 야전에서의 화포운용이 가능한 증거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하다. 만기요람 군정편에는 북한산성의 금위영창에 동차 32좌가 있는 것까지도 언급하고 있는데, 군기편에 각 병기고에는 이러한 수레를 찾아볼 수 없고, 이를 위한 별도의 복마군(복마(짐말)을 담당하는 병력)도 편성되있지 않다. 또한 당시의 조선의 수레는 매우 열악한 구조였고, 대부분 황소나 말이 끌기 보다는 사람이 미는 것을 기대하고 만들어진 병거가 대부분이다. 어영청이 보유한 전차 51량중 독륜거가 26량에 달하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불랑기가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점에서 들거나, 또는 말에 실어서 이동할 수도 있다. 불랑기 5호는 36kg상당으로 실질유물은 20에서 29kg정도로 더 가볍다. 4호의 경우도 60kg정도나 32.5kg짜리도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조선군의 병참수단으로 활용한 것이 수레가 아니라 마필이라는 점이다. 훈련도감은 도합 332필의 색복마를 보유했는데, 수레는 9량에 불과했다. 수레는 보급용이 아니라, 아마도 24척에 이르는 훈련도감 직속 수하선, 수상선이 지방에서 가져오는 조총색, 화약색의 유지물자를 이송하는데 사용되는 것으로 조총색 배속이 3량, 화약색 배속이 6량이었다. 14) 한필의 복마는 100근의 짐만을 이송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60kg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최소 20kg의 모포에, 자포 4개가 더해지고, 필요한 연환, 화약등을 고려하면 불랑기 5호 1문을 이동하는데 최소한 2마리의 시복마는 필요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병력이 이를 분담하는 대안의 경우, 보병은 이외에도 거마창과 같은 장애물을 번갈아가면서 들어야할 의무가 있었다. 13) 332필에 달하는 색복마는 보급품을 실어야 하는데, 짐말을 부릴 경우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불랑기를 포신만 가지고는 제대로 활용할 수 없고 최소한 기가나 포가, 아니면 동차라도 있어야 거치와 포격이 가능할텐데, 동차는 끌어서 이동한다 해도 복마나 개개 보병에 대한 부담이 커진다. 즉 근대식 포가나 수레가 없다면 야포의 야전활용은 심각한 문제에 부딫친다.

왜 화포의 야전활용이 중요한가라는 본연의 문제로 돌아가면, 2가지 전례를 통해 그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다.

1450년 4월 15일 프랑스 Formigny에서 영국군은 평야에서 프랑스군과 직면했다. 영국군은 아쟁쿠르와 동일한 방식으로 측면에는 장궁병, 중앙에는 하마한 기사와 보병이 위치했고 장궁병들은 날카로운 말뚝을 전면에 박아서 장애물지대를 구축했다. 프랑스군은 아쟁쿠르에서처럼 바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2문의 컬버린(야전운용이 가능한 중포로 추정되는)을 배치하여 측면에서 포격을 감행했다. 구형탄체로 가해진 포격으로 영국군은 큰 타격을 받았고, 결국 참호와 장애물지대를 떠나 포대에 공격을 감행해 점령했다. 이 대포를 아군 방어선쪽으로 끌고가는 도중에 프랑스군은 대열이 흐트러진 영국군을 양측방에서 전통적인 기병전술로 공격했다. 영국군은 용맹하게 싸웠지만, 전투가 끝나고 난후 3000명 이상의 영국군이 포로가 되었다. 지휘관 토마스 키리엘 경도 포로가 되었다. 6) 이 전투로 인해, 더 이상 영국군이 1333년 Dupplin Moor전투와 Halidon Hill전투를 통해 시작한 장궁-보병전술이 더이상 무적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프랑스군은 이 성공을 스페인군을 상대로 다시 이룩한다.

1503년 Cerignola에서 화승총과 참호를 통해 대승을 거둔 스페인군으로 인해, 방어적으로 개인화기로 무장한 병력을 야전축성을 통해 활용하는 스페인군의 전술이 정립된 후 얼마 안되서 이것이 무적이 아님을 증명하는 전투가 1512년 3월 11일 라벤나에서 벌어졌다.

스페인-교황동맹군은 공성중이던 프랑스군에게서 라벤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접근했다. Cerignola에서 스페인군의 화기 및 축성을 담당했던 페드로 나바로가 지휘를 맡은 동맹군은 이를 재현하기 위해 라벤나 남쪽에 야전축성을 실시하고 공격을 기다렸다. 프랑스군은 보급물자가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페인-교황군의 진지에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측 지휘관 Gaston de Foix는 Cerignola에서와는 달리, 신중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프랑스는 공성중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포애호가인 페라라대공이 프랑스측 동맹으로 포병지휘관으로 전투에 참여하였기에 포병화력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전투를 포병화력교환으로 시작했다. 스페인측의 포격은 프랑스군의 중앙보병에게 가해졌고, 프랑스군은 스페인측의 측익 기병대에 강력한 포격을 가했고, 그 결과 양자는 포격으로 인해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프랑스군 중앙의 보병은 포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공격을 감행했으나, Cerignola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참호지대를 건너면서 지근거리에서 화승총사격에 피해를 입고, 대열이 흐트러진 프랑스측 보병은 스페인 보병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프랑스군 보병과 마찬가지로 포병화력에 노출된 스페인측 중장기병과 Jinte, 경기병은 프랑스측에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통일된 공세를 가하지 못했고 프랑스 중장기병은 이들을 무찔러 전장밖으로 몰아내었다. 중앙에서 스페인군은 거의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었으나, 결정적인 일격은 스페인기병을 추격하던 것을 멈추고 돌아온 프랑스 중장기병에 의해 가해졌다. 스페인 기병이 떠난 진지쪽은 중앙에 대한 참호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고, 이 지역으로 진입한 프랑스 중장기병이 스페인 보병의 후방을 공격했고 전선은 붕괴되었다.

Fomigny와 라벤나에서의 프랑스군의 승리는 방어적으로 축성진지를 구축하고 장거리화력을 활용하는 상황에서, 공자가 강력한 포병화력을 보유할 경우에는 Cerignola나 아쟁쿠르같은 결과가 도출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라벤나 전투는 야전축성으로 방호되지 않는 보병에게 기병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란 이후, 조선이 상정할 수 있는 가상적국은 역시 청과 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청의 경우, 명대에 영원성에서 홍이포가 성공을 거두자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제작시킨 홍이포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홍타이지(청 태종)는 1631년부터 이러한 대형화포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1642년에 명에 대한 대규모 공세준비의 일환으로 홍타이지는 홍이포를 주조했던 진저우에 대포주조공장을 건설하고 대포 구경 및 화약량, 발사체등에 대한 표준화가 시작되었으나, 이는 여전히 명이 영원전투 이후 시작한 포르투갈 대포를 모방했던 모델에 기반해 있었다. 23)

강희제대에 와서 청의 화포에 대한 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1673년 삼번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청의 화포는 다양한 타입으로 개량되었는데, 특히 경량화된 대포가 등장했다. 강희제 시대에 주조된 총 900문의 화포중 500대가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이시기에 포가에 설치된 경량화된 포가 제작되어 삼번을 진압하는데 활용되었다. 이시기의 대포는 예수회 선교사 베르비스트(한자명 남회인)이 제작을 주도하였다. 23)

이 시기의 청의 대표적인 화포는 3가지인데, 200kg정도의 무게에 2륜 포가, 그리고 200m에서 300m수준의 유효사정을 지녔으며, 900g의 포탄을 발사하는 경야포 "Shenwei"포(선위포?), 2톤에서 3.5톤정도의 무게, 10kg의 포탄을 발사하며 역시 바퀴가 달린 포가에 설치된 "wuchengyongyu"포, 그리고 3륜 포가에 설치된 500kg 정도의무게, 1.8kg의 포탄을 사용하는 "Shengong"포가 사용되었다. 23)

일본의 경우, 1847년의 "大筒?之?" 에 대포를 주조하는 그림이 남아있으며 1850년에 최초의 서양식 대포를 주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다산시문집 11권 군기논이편에서 "호준포, 백자총등은 오히려 소루한 무기에 속한다. 홍이포란 무기는 빠르고 강해 잔혹하기가 전에 비할 수 없는데, 중국 일본에서는 사용한지 오래다"라고 언급한바 있다. 2) 또한 1635년부터 1641년까지 히라도에서의 네덜란드 상관의 수출입품목록을 보면, 기병총을 비롯하여, 피스톨, 화승총, 그리고 박격포나 야포, 대포와 포가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본내에서 포가용 차바퀴가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24)

이를 고려하면, 조선의 가상적국이 될 수 있는 두 국가 모두, 적어도 16세기 수준의 유럽 화포, 그것도 근대식 포가를 갖추어 야전운용될 수 있는 화포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청과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한다면, 야전에서 조선군은 적어도 홍이포 수준의 사거리를 갖춘 대구경 화포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라벤나 전투나, Fomingny전투를 조선군에 대입한다면 이런 결과가 도출된다. 조선조정이 끊임없이 걱정한 백병교전을 걱정할 일 없이, 삼수병이 호란과 같이 고지, 또는 평야에서 철저하게 야전축성을 실시한다고 가정한다. 적어도 개인화기의 화력측면에서 청이나 일본은 조선에 대응하지 못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경우, 조선군은 조총사거리 이상에서 화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구경 화포를 야전에서 지참하고 운용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 경우 성곽에서 유효사정 백보(124m)의 불랑기를 사격한다고 가정할 경우, 유사한 구경의 영국제 Base포와 유사한 사정거리의 경우 최대사정은 420m, 그러나 단일탄체가 아닌 산탄을 사용할 경우, 200m내외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의 국내실험결과에 따른 1300m에서 1400m수준의 최대사정이 실제 가능했다고 본다해도 유효사정은 더 짧다.

청군의 "wuchengyongyu"포의 경우 유럽의 24파운더 급인데, 16세기 스페인의 해군용 동급화포의 최대사정은 6000야드, 직사거리가 1700야드 수준인데, 12파운더급 야포사정의 경우 1600야드 이상은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경우 유효사정이 500야드를 약간 상회하는데, 24파운더 포의 유효사정도 이를 크게 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라벤나 전투와 같이, 만약 조선군이 강력한 야전축성진지를 구축하고 복마에 실은 소구경 화포를 동원한 경우에는 청군이나 일본군 모두 급하지 않게 대구경 화포를 투입할 수 있다. 이 경우, 불랑기의 최대사정 밖에서 사격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전투에서 청군은 홍이포로 공격을 가하다 조선군의 불랑기사격에 피해를 입는데, 이는 고지인 산성으로 인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일본이나 청은 근접하여 불필요한 희생을 입지 않고, 원거리에서 대구경화포를 활용하여 타격을 가함으로서 조선군이 자발적으로 진지에서 공세를 감행하도록 유도한 후, 우월한 청기병이나 일본의 장창대가 조선군을 휩쓸게 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즉 기동성을 갖춘 장사정 화포를 보유하지 않는다면, 기동력을 갖춘 기병전력이나 공세적으로 운용가능한 보병대형을 갖추지 않는한, 기존의 방어적 대형은 라벤나 전투, Fomingny와 같은 패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때문에, 조선 후기 삼수병 운용은 충분한 야전축성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야전에서의 공세적 운용이 가능하지 않는한 가상적국인 청과 일본의 군대에 전술적으로 열위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2) 정해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 전통병서의 이해"
3) 누리한국한 DB시리즈, "병학지남"
4) 이긍익,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연려실기술 2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