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이인좌의 난

구름위 2013. 2. 4.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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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년,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갑자기 죽게 된다.

이때 경종의 왕비 동생인 심유현이 임종을 지켜본 뒤 왕이 독살되었다고 증언했다.

왕은 구혈에서 검붉은 피를 쏟았고 안색은 까맣게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증언은 일파만파의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이리하여 영조가 즉위하였으나 전국 곳곳에 경종의 독살에 대한 벽보가

나붙고 충청도와 평안도에서는 반군이 군사를 모집하는 사태가 일어 난다.

 

이에 크게 놀란 영조는 삼군문에 비상령을 내려 도성을 방어하는 한편,

증오의 표적이 된 노론을 내몰고 소론을 등용하는 정미환국(1727)으로 민심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해 3월, 소론과 남인의 연합군이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반란이 시작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청주를 점령한 반군의 주력부대는 ‘경종의 복수와 역적의 토멸’을 표방하며

군영 안에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전군이 아침 저녁으로 곡배한다.

또 전국각지에 격문을 띄워 영조를 폐하고 경종이 애초에 세자로 입양하기로 했던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을 옹립할 뜻을 천명하고 의병의 궐기를 호소한다.

 

이리하여 남쪽에서는 경상도 거창, 안음, 합천, 함양, 상주, 전라도 태인이 반군에 가담되고,

북쪽에서는 평안병사 이사성이 군사를 일으켰으며, 서울에서는 창덕궁 방어를 맡은 금군별장 남태징이 호응하였다.

반군은 북상하여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경기도 안성에서 병조판서가 지휘하는 관군과 부딪쳤다.

그러나 3월 24일, 하루 낮밤의 격전 끝에 반란군은 대패하였고, 주력부대를 궤멸시킨 관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거창의 반군을 소탕함으로써 진압을 마무리지었다.

 

반란은 평정되었으나 그 여파는 컸다. 반군이 전국각지에 뿌린 격문은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즉위를 둘러싼 불미스런 일들의 전말을 낱낱이 까발리는 것이었다.

또 거기에는 왜 숙종이 끝까지 장희빈이 낳은 왕세자를 보호하고 연잉군을 멀리하였는지도 적혀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모두가 80세로 죽을 때까지 영조를 평생 따라다닌 멍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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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영조를 꺼려한 것은 그의 어머니 최씨가 궁중 나인들의 빨래를 해주는 무수리였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이미 관계를 가진 뒤에야 알게 된 것으로, 최씨는 처녀가 아니라 남편이 갓 죽은 과부였던 것이다.

신분의 비천함은 제쳐 두더라도, 과부를 후궁으로 맞이함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인좌의 반군들은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 죽은 전남편의 씨라고까지 주장했다.

이는 물론 최씨가 궁중에 들어온 시기를 보아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영조는 이것으로 인해

평생토록 치유하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얻은 것이다.

 

아무튼 이인좌의 난이 진압됨으로써 노론은 확실한 재집권에 성공한다.

경종조에 노론의 왕권교체 음모를 저지했던 김일경은 유배되어 아들과 함께 사사되고 그때 죽은 노론의 4인방은 복권된다.

그후 20여 년간 노론은 스스로 영조를 즉위시킨 충신들로 자처하면서 득의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