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임진왜란,420년 전 이 땅을 피로 얼룩지게 했던 슬픈 역사

구름위 2013. 1. 25.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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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420년 전 이 땅을 피로 물들인 역사

 

                        되 뇌이고싶지 않은 치욕의 역사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日 외상>

   수일 전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日 외상이 독도와 관련,"할 말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지요. 그는 1월24일 오후 중의원 본회퓻【� 행한 올해 외교방침 연설에서 한국과의 외교 관계와 관련,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 국가인 만큼 미래지향적으로 대국적 견지에서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운을 뗐습니다. 이어서 그는 작심한 듯 독도 영유권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국에 전하겠다"면서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닌만큼 끈기있게 대응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日 외상의 도전적인 이번 발언은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효적 지배와 실효적 지배 강화를 위한 각종 조치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니,이를테면 임진년에 보내온 일본의 망언 1호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420년 전에 우리 조상들이 당했던 수모를 다시 한번 돌아 보고, 향후 다시는 이 땅에 그와 같이 불행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한.중.일의 오늘과 한반도 통일의 중요성,평화로운 우리의 미래를 바라는 뜻에서 가급적 소상히 역사의 뒤안길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6년간 이어진 전쟁을 말합니다. 통상적으로 왜란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국가 간의 전쟁’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옳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일본은 개전 초반에 한성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개전 1년여만에 창원 이남으로 패퇴하였으며, 결국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지원,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조선수군의 대 활약상 등에 의해 완패하여 완전히 철수하였던 조.일 전쟁이었으며,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왜군을 물리친 3국간의 전쟁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분했습니다.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부르고 있으며,중국에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또는 만력동정(萬曆東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한편 북한의 학자들은 임진왜란을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으로 칭한다 합니다. 여하튼 임진왜란은 조선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엄청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면 왜군의 침략배경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지요.15세기 후반부터 유럽 상인들이 일본에 들어와 신흥 상업도시가 발전되어감에 따라 종래의 봉건적 지배권을 강화하던 시기,국내 통일에 성공한 일본은 센고쿠 시대(사회적,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이 무렵 난립한 다이묘(지방의 영토를 소유,권력을 누렸던 영주)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안정을 도모하고,신흥 상업세력의 억제를 위하여 대륙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1590년 센고쿠 시대를 종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간파쿠(關白 : 일본 천황을 대신 정무를 총괄하는 당시 최고의 관직) 자리를 그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었던 것은,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자는 신분이 미천하여 쇼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태합(太閤)이라 칭하고,야욕을 동아시아 정복으로 확장하려 했다는 설도 있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1585년이며,쓰시마 도주에게 조선정벌 준비를 명한 때는 이미 1587년의 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에 출병했던 다이묘들은 대부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왜란 이후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되었을 때 조선에 출병하지 않았던 대표적 다이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쉽게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여하튼 도요토미는 1591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통해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사신으로 파견,가도입명(假道入明 : 명나라를 정복하려 하니 조선이 길을 내 달라.)이라는 침략명분으로 삼았지요.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와 오랜 동맹을 적으로 돌릴 수 없었고,일본이 명나라를 정복할 때 조선의 길만 빌릴 리가 만무하여 왜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할 수밖에 없엇습니다.

 

   이에 도요토미는 재차 대마도주를 통해 교섭을 청하였고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침략할 뜻을 내비치며 조선을 위협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는 1590년(선조 23년)에 교섭에 대한 답변과 더불어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로,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허성(許筬)을 서장관(書狀官 : 기록 담당)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1591년 음력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도요토미의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란 문자가 있었기에 그 침략의도가 분명하였으나 조선의 사신으로 파견된 관리들의 견해는 당파로 인해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당시 서인을 대표했던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주장했으나 동인을 대표한 김성일은 ‘그러한 정황이 없다‘며 황윤길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조정은 물론 민심을 동요하게 하는 등 당파싸움이 망국의 길로 치닫게 했습니다. 이에 당시 집권세력로서 백성들의 동요를 원하지 않았던 동인의 조선조정은 침략기미가 없다는 김성일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지요. 조선조정이 국론을 통일하지 못한 채 갑론을박하는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무르익어 갔던 것이나,무능한 조선조정에도 왜의 침략을 예견한 유성룡 등이 이순신과 원균을 천거하여 수군을 정비,전란에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정치상황

   이쯤해서 조선의 정치상황 등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는 개국 후 100여년 동안 창업을 주도했던 개국공신,이후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집단,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훈구파의 장기집권으로 부패가 심해졌고,변화를 추구하던 사림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사회질서의 재정립을 강조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신진 사림세력과 기존의 훈구세력의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이러한 마찰은 성종대에 이르러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삼사의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표면화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 동안에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士禍 : 조선 시대, 당파 싸움으로 사림 출신의 조정 관리 및 선비들이 반대파인 훈구파에게 몰려 탄압을 받은 사건)가 일어나 사림파 신진 세력들은 큰 타격을 받는 가운데 정국이 부침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국불안의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제도와 군역제도가 무너지면서 권문세도가에 의한 농장의 확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제도까지 문란해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무렵 조선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乙巳士禍 : 1545년 문정왕후의 아들 환이 명종에 즉위) 가 발생하였으며 사림세력 역시 내부분쟁으로 인해 상호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지요. 그 후 명종이 모후의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왕권을 행사하게 되자 외척 세력이 정치의 중심에서 제외되었고, 명종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신진 사림세력이 국정 운영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림세력은 선조대에 이르러 다시 동인,서인 양대세력으로 분열되어 정국불안이 거듭되던 시기였습니다.

 

   한편 조선외교는 일본과 교린(交隣)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대원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 말부터 왜구는 한반도 해안지대를 빈번하게 침범.약탈하였기 때문에,조선조정에서는 수군의 군사력강화를 위해 대포와 전함 등을 대량 생산하여 왜구를 소탕해 왔으나, 그래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방비하기 위해 1419년(세종 1년),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항복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약탈이 어려워진 일본이 평화적인 무역관계를 요청해 오자,부산,울산 등 일부 항구 등을 개방하여 교류하는 한편,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던 중이었습니다.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조선과 명나라 관계를 도약할 수 없는 일,양국관계는 ‘책봉-조공체제’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기본적으로 책봉-조공 체제하에 조선이 명나라를 섬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외형상으로는 군신·상하관계였으므로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예절과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 관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명나라 황제에 의한 조선 국왕 책봉의 수용, 명나라 연호(年號 : 군주 국가에서 임금이 즉위하는 해에 붙이던 연대적인 칭호)의 사용, 정례적인 조공 등 제후로서의 의무 등이 부과되었지요. 하지만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사소한 내정간섭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사학계의 주된 견해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의 조선국왕 인정문제와 여진족문제,조공문제 등으로 양국간 크고 작은 분쟁이 잦았으며,특히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면서 명나라와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15세기까지는 명나라와의 조공관계하에서도 사안에 따라서는 대결을 시도할 정도로 주체적인 경향을 보였으나, 16세기에는 사대주의를 옹호하는 세력이 많아졌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명에 대한 사대주의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양국관계가 평화롭게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은 명나라에 연간 3회 이상의 조공을 주장하면서까지 자주 접촉아여 그들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조.명 양국간 통상은 15세기 말부터 조선의 농업발달로 중국산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명나라로부터 대량의 비단과 원사가 유입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양국간 무역이 활발했던 것은 조선의 은광개발과 일본으로부터의 은 유입을 가속화했으며,이러한 은이 매개체가 되어 조·명·일 삼국 사이의 무역구조가 정착되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16세기까지의 양국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이었으나,명나라가 자주성을 침해할 정도로 압력을 행사할 시엔 저항도 불사하였으며, 명이 강국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안위를 위한 사대.자주외교 기조를 유지하려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의 국방력에 대하여

   그렇다면 조선의 국방력은 어느정도였을까요.? 기본적인 병역제도는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正男 : 장정)이면 누구에게나 병역의무가 부과되었습니다. 이 경우 정남은 정병(正兵 : 현역 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保人 : 보충역)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는 두 가지로 구분되었으며,이와 같은 원칙을 전제로 크게 중앙군인 경군(京軍)과 지방군인 향군(鄕軍)으로 편성되었다 했습니다. 중앙군은 태조3년(1394)부터 세조 초기까지 약 60년간의 개혁을 거쳐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무과시험으로 선발하였다는 것입니다.

 

   중앙군은 정예부대와 왕족,공신 및 고급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기간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으며,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구분,국방상 요지인 영(營),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도성을 수비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군제였습니다. 이같은 방위 체제는 일본과 여진족 등 야만족들이 소규모의 노략질을 자행하던 시기에 방어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잇점을 지니고 있었기에 큰 전란을 겪지 않았던 조선조정으로서는 국방력에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은 건국 2백여년간 이렇다 할 전란이 없었기에 상비군제에서 병농일치의 예비군체제였습니다. 여진족과 다툼이 빈번한 북부지방과 남부의 수군은 상비군이 유지되었지만, 기타 지방에서는 문서상으로만 병력이 존재하고 실제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았고,사람을 사서 대신 군대에 보내거나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放軍收布)나 대역납포(代役納布)가 성행함으로써 요즈음 말로 병역비리가 성행했다는 것이죠. 특히 기병의 경우에는 상비군으로서 비교적 많은 경험을 쌓았으나,임진왜란시 주력군이었던 보병의 경우에는 병역제도가 문란했기 때문에 전투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조짐이 있다고 생각한 조선정부는 나름대로 군비를 강화하는 한편,여러 무장을 발굴하고 성곽을 보수하는 등 임전태세를 갖추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방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오랜 기간 평화를 누렸기 때문에,특히 경상도를 비롯한 남부지방에서는 그 이전 전란의 참혹함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많은 저항이 뒤따랐다는 것이지요.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의 경우,이들이 선조의 명을 받고 성곽을 수리하고 병장기를 정비하는 등 전쟁준비를 서둘렀으나 지방에서는 부역이 너무 가혹하다는 상소가 빗발쳤기 때문에 탄핵으로까지 몰아가는 세력이 있었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제1부 끝)

 

임진왜란 직전 왜(倭)의 군사력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1558년부터 강력한 정치,경제개혁을 시작하였거니와 그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분야는 검지(檢地:토지측량)라는 토지개혁과 가타나가리(刀狩<도수: 칼사냥>:백성 신분의 대도권<帯刀権>-칼을 차고 다니던 권리를 박탈하는 병농 분리정책)라는 무기 몰수정책이었습니다. 도요토미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검지장과 구니에즈(지도)를 제출케 하여 토지를 측량하였고,수확고를 조사하여 전국의 생산력을 쌀로 환산하는 ‘고쿠다카(石高)제’를 실시하였으며,다이묘들에게는 고쿠다카에 상응하는 군역을,농민들에게는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고쿠다카에 상당하는 조세를 납부케 하였습니다.

                                                 <그림 : 이나바 산을 오르는 히데요시>

 

   이러한 개혁정책에 반대 입장을 취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세력에게는 황무지를 경작토록 하였던 바,이것이 계기가 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임진왜란에 불참하게 되었고,도요도미 사후 정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전화위복이 되었으니,아이러니한 역사의 단면이라 하겠지요. 이와 같은 가타나가리는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수하고 농민의 신분을 명확히하기 위해 시행되었으며,1591년에는 ‘히토바라이(人掃)령’을 내려 신분상의 이동을 금지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을 확정함으로써 병농분리라는 개혁정책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세기 중엽의 센고쿠시대(戦国時代:중앙정부의 무능으로 군웅이 할거,서로 다투던 시대)에 이르러,전투양상이 대규모의 집단 보병전술로 전환됨에 따라 전투주체도 소수의 특정한 영웅이 아닌 보병중심의 밀집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아시가루(足經<족경>:평상시에는 잡역을 담당하다 전시에는 아시가루조(組)에 속하여 보병이 되는 최하층 병졸)라는 경장비 보병이 출현하여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지요. 이들은 16세기 중엽에 조총(철포)과 화약이 전래되면서부터 철포부대인 철포조와 궁사 부대인 궁조로 편성되어 공격의 주역을 맡았다 했습니다.

 

   당시의 전국 다이묘 세력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전술변화를 이용,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람이 다름아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습니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다케다(武田)군과의 나가시노(長篠)전투에서 조총을 보유한 보병을 주력으로 다케다군의 기병을 격파함으로써 전술면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후 1582에 이르러 도요토미는 전투 부대의 병종을 기병과 보병의 두 가지로 대별하였고,사무라이대장(侍大將)의 지휘하에 기병,총병,궁병,창검병 등의 단위대를 편성,각조의 지휘관으로 기사,보사 등을 두도록 군제를 개편하였다는 것이죠.

 

   이 때의 일본군은 부대를 3진 또는 4진으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기본적인 전법으로 채택하였으며,제1진의 기병이 2개부대로 전개,포위태세를 갖추면 제2진의 총병이 적의 정면에서 조총을 쏘며 돌격하는 전략.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이어서 제3진의 궁병이 진격하면 제4진의 창검병이 뒤따라 돌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병법이었습니다. 비(非)전투요원으로서는 소인(전령),하부(수송),의사,승려(부대특성에 따라 서양에서 파견된 신부가 담당하기도 했음:지휘관인 다이묘가 그리스도교 신도일 경우) 등이 전투부대의와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요토미는 이같이 진일보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1586년경부터 대규모의 선박건조계획을 추진하여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미 1천여척의 전함을 확보한데 이어,종전 무렵에 이르러서는 3천여척이라는 대규모의 선단을 보유할 수가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에는 사이카이도(西海道),난카이도(南海道),산요도(山陽道),산인도(山陰道) 등의 일부 지역에 33만명에 달하는 병력동원령을 내려 실전을 익히는 전술훈련을 하며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그럼에도,조선조정에서는 적정을 제대로 탐지할 정보능력이 없었다니 저들의 침략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명나라의 정치적 상황

   이쯤해서 당시 명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368년 개국한 명나라는 15세기 초인 영락제[永樂帝.태종(太宗),1403-1424)]에 이르러 강성대국의 면모를 갖추었으나,그가 죽은 후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1449년에는 정통제(正統帝.영종<英宗.>가 몽골의 오이라트를 친정하다 패전,포로가 되었던 ‘토목의 변’을 계기로 나라의 위세가 점차 약화됨으로써,집권층 내부 기강마저 무너지고 있었지요. 16세기에 이르러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더욱 혼미해짐에 따라 전국이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이 무렵부터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왜구가 명나라 해안지대를 수시로 침략하곤 했었지요.

                                                                  <15세기 영락제 재위시 명의 영토>

   이에 명나라 황실은 북쪽으로부터는 몽골족의 침입을,동남쪽 해안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느라 곤욕을 치뤄야 했으며,이와 같은 외세의 압력은 자연히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만력제[(萬曆帝).신종(神宗)1573-1620]가 등극했던 10여년간은 장거정(張居正<1525-1582 > : 전국적인 호구조사 및 토지조사를 시행하여 지주들의 횡포에서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는 개혁정책을 추진한 명나라 제일의 정치가)이라는 참신한 정치가의 등장으로 다시 중흥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장거정 사후 기득권층인 개혁 거부세력(지주와 부유층)이 거세게 준동하자,실의에 잠긴 만력제는 국사를 돌보지 않고 매사를 환관에 일임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명나라 정국은 또다시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업친데 덮친 격으로 닝샤(寧夏.영하)에서 일어난 몽골의 항장(降將) 보바이(知拜)의 반란을 위시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을 평정해야 했으며,후일 임진왜란으로 곤경에 처한 조선을 돕기 위해 원군을 파병,엄청난 전비를 국고에서 충당해야 했던 것도 명이 멸망해 가는데 촉진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명.조선.왜와의 관계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취한 명나라와 조선의 교역은 조공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던 바,이는 명나라의 황제가 주변 국가의 왕을 임명하는 책봉의 대가로 해당 국가들은 조공을 통해 황제에게 헌상물을 바치는 형식이었습니다. 조선으로부터 견직물과 고려인삼 등을 조공물로 받으면 명나라에서는 그 대가로 고급 견직물과 도자기,서적,약재 등을 답례품으로 하사했지요. 이러한 조공무역은 조선이 더 남는 장사를 했던 것으로,이는 조공 횟수를 둘러싼 두 나라의 주장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명나라가 조선에 3년에 1회의 조공무역을 주장한 반면,조선은 거꾸로 명나라에 1년에 3회의 조공무역을 주장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조공무역은 제후국에서 황제국에 일방적으로 진상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제후국에서 조공을 보내면 제국(帝國)에서는 그에 대해 하사품을 내리는 것이 관례화 되어 있었으나,하사품이 조공품보다 더 귀하고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조선 사절단의 체제비와 물품운반비 등을 황국인 명나라측에서 모두 부담하였었다니,이문이 남는 교역이었던 것이지요. 이는 황제국(皇帝國)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방도였지만 여하튼 조공무역은 제후국에게 더 이로운 제도였던 것만은 확실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조선과는 달리 명나라는 일본측의 조공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404년 명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10년에 한번씩 조공을 오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며,칼을 휴대하고 입국하면 도둑으로 간주하여 죄를 묻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을 뿐만아니라.무역거래 장소도 절강성의 닝보(寧波.영파)지역으로 한정했습니다. 명이 일본에 엄하게 제한했던 것은 유황,구리,칼 등 일본의 물품이 명나라에서 특별히 필요한 물품이 아니었던데다 일본 천황이 아닌 지방의 다이묘(영주)들이 주로 방문했기 때문이며,체류비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지요.

 

   그 후 16세기 초부터 일본의 규슈지방 상인들이 명나라 복건성 쪽 항구에서 은을 지불하고 옷감을 구매하는 무역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성,복건성 등지에서 상행위가 빈번해지자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축출하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몰아냈습니다. 1547년 이후부터는 일본의 조공선이 명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은 아오먼(澳門,마카오)을 근거지로 교역할 수밖에 없었으며,그 결과 일본상인 후원을 받는 왜구의 해적활동이 명나라와 조선을 대상으로 더욱 극심해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의 중개무역을 통해 명나라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번거롭게 되자 명과의 공식적인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이 가교역할을 해주길 바랐으나 조선으로서는 이러한 부탁을 외면하는 게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정권을 잡은 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명나라와 교역을 성사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고,교역이 성사되지 않은 것 또한 왜가 조선으로의 침략을 감행한 원인중 하나가 되었음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명나라 군제를 살펴보자면 개국초부터 징병제와 모병제의 장점을 절충한 위소제도(衛所制度 :중국 명대<明代:1368~1644>에 국방을 위해 전국 각지에 주둔시켰던 군대)라는 군제를 채용했습니다. 위소의 최소 단위는 백호소로 정원은 병사 100명과 지휘관인 총기 2명,소기 10명 등 총 112명이었으며,1위의 병력규모는 5,600명이었고, 여러개의 위를 합쳐 도지휘사사라는 군단을 형성하였습니다. 여러 도지휘사는 중앙의 오군도독부 소속이었으며,위소의 병사들은 평시엔 군사훈련에 임하다 전시에는 중앙군인 총병관의 지휘하에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16세기 전반기까지 명나라는 전국에 16곳의 도지휘사 등에 소속된 493개의 위,2,593개의 소가 있었으며,315개의 수어천호소가 있었고,그 병력은 총 329만여명의 대병력었다고 합니다. 이와는 별도로 황제의 친위군으로서 궁성 수호를 담당하는 금의군 15만여명이 황제를 보위하였습니다. 그러던 1449년의 앞서의 ‘토목의 변'을 계기로 위소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민병모집을 통한 병력을 보충하여 북방의 몽골족과 동남 해안지역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시키도록 했지요.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정치혼란과 군의 전투력이 약화된 시점에 조선 파병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2부 끝)

 

임진왜란의 주요 줄거리

                           왜군의 침략과 조선의 일방적 패퇴

  1592년 음력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섬 도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할 것과 명나라 정복을 위해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쓰시마 도주는 명나라 정복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말로 바꾸어 조선에 교섭을 해 왔으나 조선은 들어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한 것까지가 앞서 언급 내용입니다. 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음력 4월13일 약 20만명의 왜병으로 하여금 조선을 침략케 하였던 바,이 날 정발(鄭撥)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宋象賢)이 지키던 동래성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음력 4월24일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일본군에 패하고,10일만에 경상도 방어선이 무너졌으며,음력 4월28일엔 믿었던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왜군에게 패하여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이 때 왜군 주력인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갈래 길을 따라 북상하고,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한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렀고,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Υ度寥�)의 인솔하에 울산·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며 파죽지세로 진군하였습니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제3군이 김해와 추풍령을 넘어 북상해 오니,이에 놀란 조선 조정은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신하기에 바빴습니다. 음력 5월2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지 20일만에 충주·여주를 거쳐 한양을 본거지로 삼았으며,음력 5월17일엔 도원수 김명원을 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한 뒤,고니시 유키나가군은 평안도로,가토 기요마사군은 함경도를 경유,한반도 북부까지 넘보게 되었지요. 음력 6월13일,평양이 함락되자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잘 조련된 왜군에 비해 실전경험과 방어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조선군은 왜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도 전쟁 가능성을 열어두고 나름대로 대책을 수립한다 했으나 오랜 기간 평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던 중에 당한 날벼락,왜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만으로도 병영을 이탈할 정도였습니다. 대규모의 전쟁을 치러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도 전시계획은 있었으나 제대로 실전에 적용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구지역의 경우엔 전시계획대로 군대가 소집되어야 했으나,책임자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왜군이 진입하였다 했습니다. 이 때문에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축조한 대구읍성은 방어에 쓸모가 없었으며,이일은 자신이 지휘할 군병과 제대로 조우하지도 못한 채 패주하기에 바빴습니다.

                                              <명4대 황제(영락제) 재위시의 명,조선,왜>

                             조선 조정의 피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에 따라 조선 조정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믿었던 신립장군의 패배는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켰으며,선조는 마침내 조정대신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피난길을 떠나야 했고,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함경도와 강원도지역으로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토록 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으나,선조가 한양을 비운 것을 알게 된 노비들이 그들의 노비문적(文籍)이 보관된 장례원(掌隷院:노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과 형조에 불을 질렀고,이 때문에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군 선발대가 한양에 도착했을 때까지 궁궐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며칠 뒤 후발대가 도착했을 때 불타 없어졌다는 일본측의 기록으로 볼 때,노비들에 의해 궁궐이 전소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도성의 수비 책임을 맡겼으나,결국 1592년 5월3일 수도 한양은 손쉽게 적에게 함락되고 말았지요.

 

  당시 일본에서는 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할복자살하는 게 상례였고,성의 주민들도 항복함으로써 해당지역이 평정되는 것이 전쟁시 그네들의 기본 관례였으나 이와는 달리 조선의 경우엔 왕이 도성을 비운 채 피난을 떠났음에도 전국 각지의 의병(백성)들이 맹렬히 저항하자 왜군들은 민초들이 정복자에 저항한다는 사실에 대해 당혹감과 심대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백성이란 단순히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는 영지에 속한 부속물 혹은 농노나 전리품이란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었고,이러한 차이를 몰랐던 그들은 조선정복 후 현지에서 보급품과 급료 등의 비용을 충당하려했던 전쟁운용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왔지요. 예나 지금이나 평상시엔 무지랭이 같던 민초들이 유사시 들고 일어나면 그 위력이 과히 폭발적이었음을 역사는 가르쳐 주고 있지요.

 

  한양을 떠난 선조일행은 임진강을 건넌 후 왜군의 추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나루터를 불태우고 적군이 도강하지 못하도록 배들을 가라앉혔지만,왜군이 한강 이남까지 진격해 오자 다시 피난길을 떠나야 했으며,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 급기야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릅니다. 그후에도 왜군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고 개성함락한 후 황해도 방면으로 진격해 오자,위기를 느낀 선조일행은 또 다시 몽진길에 들어서야 했지요.그런 와중에도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를 꾸려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주도하에 각지를 순회하며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고,의병들을 국가의 정식군대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병농일치의 군사제도였기 때문에 당연한 절차였으며,의병장에게 관직을 수여함으로써 무과에 급제해야만 현감 이상의 관직을 가질 수 있었던 관리와 대등한 대우를 해 주었던 것이죠. 하지만 의병장에 대한 관직 우대는 기존 무과급제를 통해 정식으로 장수가 된 자들과 알력이 빈번하였는데,이러한 알력의 대표적인 사례가 김덕령 모함사건(임진왜란시 의병장이었으나 무고에 의해 29세(1596년)로 고문 끝에 옥사한 것으로 전해짐)이었습니다. 여하튼 광해군의 주도하에 각지의 사대부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근왕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함으로써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이에 명나라 장수들도 광해군의 업적을 극찬하였으며,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왜군의 무기와 식량 보급로,통신망 등을 차단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저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었고, 조선 관군이 재기하는데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육전에서의 연이은 패퇴와는 달리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앞세워 1592년 5월 사천전,6월의 당포해전,7월에는 한산도에서 왜군을 격파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지요. 이로써 왜군은 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지게 되었고,조선수군과 의병들의 전과가 더욱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기록에 의한 의병들의 주요 활약상을 대충 살펴보면,조헌(趙憲)은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궐기하여 청주에 주둔하던 왜군을 축출한 여세를 몰아 금산지역의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고,곽재우(郭再祐)는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녕(昌寧) 등에서 적을 물리친 바 있으며,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왜의 대병을 격퇴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호남지역의 고경명(高敬命)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성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전사했으며,김천일(金千鎰)도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지로 왜군과 싸우다 진주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던 기록이 돋보입니다.

 

   한편 함경도지방에서 활약하던 정문부(鄭文孚)는 경성(鏡城)·길주(吉州) 등을 회복하고 왜군이 주둔하고 있던 함경도를 수복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습니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休靜)은 격문(檄文)을 팔도의 승려에게 발송하였으며,그의 제자 유정(惟政)으로 하여금 2천여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 탈환에 공을 세워 도총섭(都摠攝)에 임명되도록 하였습니다. 그 제자 처영(處英) 역시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 일원의 권율(權慄)장군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아 뜻있는 사회 저변층 국민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섰음을 익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왜란중에도 전국최대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이 비교적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김시민의 제1차 진주성 전투,권율의 이치전투(梨峙戰鬪 : 전북 금산 근처에서 조선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왜군에게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왜군의 전체적인 전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왜군의 작전에 차질을 빚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순신 장군(차후 상술할 예정)이 육지로부터 왜군의 내습을 걱정하지 않고 해전에 전념하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명나라 지원군의 개입

   한편,의주로 몸을 피신한 선조가 명나라에 조선의 위급함을 알리며 원군을 요청하자,명나라 조정에서는 찬반여론이 비등하였으나,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조선을 침략한 왜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게 되었지요. 일설에 의하면 조선왕 선조가 의주까지 쫓겨왔다는 급보를 받은 명나라에서는 너무나 단시간에 조선반도가 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원군을 파견하기 앞서,예전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와 선조의 얼굴을 알고 있던 사람을 의주로 급파,진짜 조선왕 선조가 맞는지 확인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때 명나라는 왜병들의 조선침략 목표가 종국에는 명나라를 도모함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왜란발발 몇 해 전 조선의 역관이 한 중국인 여성을 홍등가로부터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공교롭게도 그 여성이 후일 병부상서인 석성의 부인이 되었고, 조선이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는 화급함을 들은 석성의 부인이 병부상서를 설득함으로써 단시간내에 지원군을 파견하는데 크게 힘을 실어 주었다는 후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후일 성호 이익이 그의 저서에서 임진왜란의 최고의 공신이 석성이고 그 다음이 이순신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니 그 일화는 사실인 듯합니다. 여하튼 명의 요동지역 부총병(療養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은 초기 5천여명의 원군을 이끌고 평양성까지 진격하였으나,연이어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게 되자 명나라에서는 심유경(沈惟敬: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이 비밀리에 파견한 인물)을 평양에 파견,왜장 고니시 유기나와에게 화의를 제안토록 했습니다. 여기서 명의 무장 심유경이란 자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1592년 8월17일 심유경은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명나라가 70만명을 파병준비중이라 거짓 보고했으며,왜군의 요시토시(宗義智) 등과 강화교섭을 시도했으나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공허한 외교술로 삼국(三國)을 크게 혼란스럽게 했던 위선적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듬해 명나라의 사신으로 왜국을 방문,도요토미와 면담한 적이 있었던 바 당시 도요토미는 다음 4개항을 명나라에 요청했다고 합니다.①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게 해줄 것 ② 감합인(戡合印 : 무역증인[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8도 중 4개도를 왜국에 할양할 것 ④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게 할 것.

 

  이 것이 이른 바 최초의 한반도 분할론일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남북으로 허리가 잘린 분단국 씨앗이 된 비극의 원초였던 것 같습니다. 심유경은 이러한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내용을 허위 보고했으나,거짓이 탄로나게 됨으로써 명으로부터 문책이 두려워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남쪽 방향으로 도주하다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황제를 기만한 죄'로 처형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도하에 4년에 걸쳐 진행된었던 강화협상은 물거품이 되었던 것입니다.

 

   각설하고,1593년 1월에는 이여송(李如松) 등이 이끄는 4만여명의 명군이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였고,기세가 꺾인 왜군은 한양으로 퇴각해야 했습니다. 이같이 명군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 되기도 했습니다. 왜란발발 1년 후 조선은 정규군 17만5천을 운용하고 있었고,왜군은 도합 15만 중에서 7만명 이상이 전사한 상태였으며,전선도 경상도 남부로 고착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왜군은 전세가 불리할 때마다 명나라에 강화를 요청하였고,위험 부담없이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명군은 조선의 공세적 요구를 묵살하며 왜군과의 강화에 응했다는 것이죠.

 

                     왜군의 패퇴와 종전

  이후 전황이 불리해진 왜군이 화의를 서둘렀고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의 참패를 겪은 연후라 종전을 원했으므로 화의교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삼국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조선이 화의를 반대하자 교섭 대상국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특히 왜군이 앞서 언급한 4개항 등을 요구함으로써 3년에 걸친 화의교섭이 결렬되었으나 교섭과정에서 왜군에 납치되었던 조선의 두 왕자가 귀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협상이 결렬되자 남해안에 주둔해 있던 왜군이 1597년 다시 전쟁을 시작한 것이 이른 바 정유재란(丁酉再亂)입니다. 그러나 전장은 예전과 같이 그들이 의도한대로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선군 병정들도 전열을 재정비하였으며,명나라 원군 역시 신속히 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조.명 연합군이 직산 소사평에서 일본군을 대파함으로써 북상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모함에 의해 파직되었던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하며 명량해전에서 왜군을 대파하면서 세불리를 간파한 왜군은 다시 남해안 일대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1597년 12월말부터 1598년 1월초에 걸쳐 조.명연합군이 수차에 걸쳐 울산의 왜군성 등을 공격하니 본국의 보급로가 원활하지 못했음은 물론,그들의 우두머리인 도요도미의 급사로 인해 극비리에 철수를 시작함으로써 7년 동안 이 땅을 피로 물들게 했던 왜란이 종식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개략적인 임진왜란 스토리에서 우리 민족의 성웅(聖雄) 이순신장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이후 별도로 엮어나가기 위함이었습니다. [3부 끝]

 

420년 전 임진왜란의 역사 -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이순신 장군에 대해 논하기 전에 당시 ‘임진왜란‘ 전.후 조선을 통치했던 선조와 그의 주변세력에 대해 짚어보고자 합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순찰사 성영의 장계에 ’의졸을 통솔하고 군사를 모집하는 사람이 혹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군사를 데리고 있기도 하고 ,또는 서로 통섭되지 않고 상급자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큰 폐단입니다. 관원들이 물자를 낭비하며 사치를 누리고,양호(兩湖: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두 지역.충청도와 전라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의 여러 장수들이 공적인 일에 사리(私利)를 경영하며,그 종족과 친지들이 주군(州郡)에 가득합니다.” 이상은 ’선조실록‘의 일부...

 

   선조실록에 의하면,중앙은 물론 지방 관아에 부정비리가 만연했었다는 기록입니다. 어찌 보면 왜군의 침략을 초기에 막지 못한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왕의 통치철학을 엿볼 수 있겠지요. 어느 사가의 촌평에 의하면 “한석봉이 선조의 취향에 따라 그의 서체를 바꿔 갈 정도로 선조가 붓글씨의 대가”였다 했습니다. 특히 선조의 친필이라는 속리산 법주사 소장 병풍의 초서체는 한석봉을 능가한다는 설도 있고...여하튼 선조의 현란하고 비실용적인 글씨는 그 분야의 전문가라면 찬사를 받을 일이나,국가를 경영하는 왕이 붓글씨에 도취되어 있었으니,모든 사대부가 서도연마에 탐닉했었음은 불문가지입니다.

 

   그래서 선조가 재위했던 기간이 ’조선을 특히 어둡게 했던 시대‘라고 혹평하기도 합니�. 선조 뿐만 아니라 문을 우대하고 무(武)를 경시했던 시문(詩文)놀이 시대가 200여년간 계속되면서 임진.정유.정묘.병자호란 등을 당했을 때 무기력하게 대응함으로써 백성과 조정을 고난에 찌들게 하였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폐습은 정조대왕대에 와서야 실용적인 글씨체로 바뀔 수 있었고,군사분야의 이치탐구(理致探究)에 전념하였던 충무공 이순신과 달리 시문놀이와 붓글씨 쓰기에 빠져있던 문관들은 왜군이 이 땅을 침략했을 당시 육지와 바다를 불문,전쟁수행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문관들은 전형적인 무관의 자리였던 병조와 비변사(備邊司 : 조선시대,군국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까지 차지하고 전쟁을 지휘하였기에 당시를 문문백관시대라 했던 것입니다. 8도의 감사,부사,목사,현령,현감 등 거의 모든 관직을 문관들이 독차지한 가운데 작전을 수립,지휘하는 과정에서 무관들을 하인 부리듯 했기 때문에 1년 이내에 끝났어야 될 임진년의 왜란이 7년대란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경상감사나 동래부사만이라도 무관이 맡았었더라면 ‘전쟁 초기 왜군에게 그토록 처참하게 밀리진 않았을 것’이라며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시 왜병들이 사용하던 조총)

   이순신 장군이 위대하다는 것은 전쟁에 대비,거북선과 학익진법을 개발했으며,전쟁이 발발하자 주어진 권한의 범주에서라도 무너진 국가기강을 회복시켜 나갔고,그러한 과정을 ‘난중일기‘라는 위대한 기록으로 후대에 남겼기에 위대한 스승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며,모함과 박해의 온갖 역경 속에서도 일관된 우국지정과 고결한 인격이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고 있기에, 다시 한번 장군의 족적을 더듬어 보려는 것입니다.

 

                    장군의 출생과 가족관계

   이순신장군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 장군의 가문은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의 후손으로 조선에 들어와 7대손 변(邊)이 영중추부사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百祿)이 기묘사화의 참변을 겪게 된 뒤 장군의 부친은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내려 했음으로 가세가 빈곤하였던 것이지요. 장군은 1545년 음력 3월8일 당시 한성부 건천동(서울시 중구 인현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하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장군 전사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던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보성군수 진(震)의 딸)와의 사이에 회(薈)·열·면(葂) 등 아들 3형제와 딸을 두었고,서자로 훈(薰)·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는 현감,열은 정랑(正郞)이었으며 면은 난중에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훈과 신은 무과에 올랐던 것으오 전해지고 있으며,장군의 두 형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조카들을 친자식과 같이 돌보았다고 합니다. 22세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던 장군은, 28세 되던 1572년(선조 5년)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에서 낙마,다리에 부상을 당함으로써 등과에 실패했었으나,

 

   그뒤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조선시대 변경의 진보(鎭堡)에 두었던 종 9품의 수장(守將)]으로 부임했으며,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고, 이듬해 7월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조선조 외관직(外官職)으로 정4품 무관직)]가 되었습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 서익(徐益)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장군을 무고한 탓에 첫번째로 파직되었으나,그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봉사직에 재직하였습니다.

 

   1583년 7월 함경남도 병사(兵使)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0월 함경북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11월에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나 15일 장군 부친 별세로 휴직했다 합니다. 1586년 1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종6품직(從六品職)으로 종래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었다가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자 16일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造山堡兵馬萬戶)로 천거되었지요.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에 겸임중일 때 섬의 방비를 위하여 증병을 요청했으나,병사(兵使) 이일(李鎰)이 장군의 청을 외면한 상태에서 오랑케의 기습을 당했고,이때 패한 죄로 하옥된 적도 있었답니다.

 

   장군은 1589년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휘하의 군관이 되었고, 또 순찰사의 주청으로 조방장(助防將)을, 이어 11월에는 선전관도 겸직하였으며 12월에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지요. 이듬해 만포진수군첨절제사(滿浦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임용이 취소되었다가, 임진왜란 발발 1년전인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전보되기 직전인 2월13일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 절도사직에 부임케함으로써 조선의 역사를 바꾼 인사를 단행했습니다.참으로 놀라운 것은 육군이 아닌 수군장수로,그것도 종6품에서 정3품 당상관으로 7단계를 도약하는 발탁인사였습니다.

 

   일찍이 서애 유성룡(柳成龍)은 율곡 이이(李珥)가 이조판서로 재직 당시 이순신 장군을 소개하려했으나, 이순신은 율곡이 자기와 성씨가 같은 문중이라 하여 그와 조우하는 것까지 사양할 만큼 청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순신 장군을,오직 말타고 창칼 쓰는 육군으로만 군경력을 쌓아온 장군을,수군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수군 요직에 기용할 착상을 했을까요.! 그야말로 누구도 발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인사였습니다. 만약 이순신을 통상의 방식대로 육군장수로 활약하게 했더라면 오늘의 충무공이 될 수 없었을 것이기에 인사가 왜 중요한 지와 유성룡의 혜안이 놀랍기만 합니다.

 

    장군이 땅에 태어난 후 53년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면서,어둡고 무능했던 ‘조선’이란 나라가 6년7개월 동안 明과 倭의 틈바구니에서 위난에 허덕이던 이 민족을 구하신 분이지요. 그 시대를 살다간 지식인 율곡 이이는 당시의 조선을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나라’라고 탄식했고,전란 중 5년간 영의정(전시수상)직에 봉직하는 동안 온 몸으로 조선의 분할을 막았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이 필시 하늘이 도와서 나라를 보존했노라’는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렸습니다. 그로부터 300년후 일제35년,그 후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한반도에 살고있는 우리들이 애처롭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가들은 유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이 조선으로서는 ‘숙명’이었고,모든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만남‘이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유성룡이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이순신을 생각지 않는 유성룡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만남은 조선으로서는 아주 큰 행운이었던 것이지요. 율곡의 표현대로 ’조선이 나라가 아닐만큼 무능‘했어도 인물이 있어 인물을 알아보았기에 사직(社稷)이 이민족(異民族)이 아닌 우리 한민족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순신을 발굴한 유성룡을 조선조 5백년을 대표하고도 남음이 있는 정치리더십을 갖춘 위인으로 평가하는 것이겠지요.

                                                   이순신 장군의 친필휘호(필사즉생 필생즉사)

 

                       소설속에 인용된 임진왜란,서민들의 삶

   ‘임진왜란,에 관한 자료들을 유심히 보노라면,저 자신 이땅에서 우리말 우리글을 쓰며 동족끼리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자랑스럽기에 앞서 부끄럽고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다음은 故 월탄 박종화님이 쓴 소설 ’자고가는 저 구름아‘에 나오는 구절의 일부로,임진왜란 초기 왜병의 한양 접수가 임박하게 되자 임금인 선조가 화급히 피난길을 떠난 직후 도성의 성난 민심을 묘사한 장면입니다. ’커다란 진동과 함께 태산더미 같던 근정전(勤政殿),인정전(仁政殿),사정전(思政殿) 등 우람한 궁궐의 전각들이 삽시간에 불길속으로 넘어박히고 있었다.‘

 

   대궐에 불을 지르기 시작한 사람들은 왜적이 아니라 이 나라 백성,지하천의 대우를 받던 종의 결찌(곁붙이)였다. 그들은 1백년 2백년 양반한테 받았던 박해와 설움과 원한을 오늘 새벽 임금이 없는 하루 아침에 쾌하게 씻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종들은 당대의 자기한 몸 뿐만아니라 대대로 종이 되어 내려와야만 했다. 아비도 종이요,할아비도 종이요,증조할아비도 고조할아비도 종이었다. 자기 자신도 종이지만 제몸에서 자식과 손자와 딸과 손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 종의 신세가 되는 비참한 운명을 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굴이 예뻐도 종년이요,학식이 있어도 종놈이요,인격이 높아도 종의 자식이었다.

 

   “종은 사람이 아니라 한 개의 물건이었다. 오히려 물건은 귀한 것도 있고 보배도 있지만 종은 짐승이나 매 일반이었다. 짐승이라도 개와 같았다. 개를 주거나 팔듯,사람이건만 돈을 주고 돈을 받고 팔았다. 돈을 갖고 매매를 하니 문서가 있게 되었고,장례원(掌隷院)이라는 곳을 두어 이 사람들(종)의 문서를 보관하고 이들의 행동을 관장하게 하였다. 장례원은 노예를 관장한다는 뜻이다. 천년의 원한을 품은 노예들은 임금이 대궐을 비우고 덜아나는가 하면 상전(上典)이 집을 버리고 달아나자 활개를 치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일어났다. 그들은 맨먼저 자기네들의 종문서를 보관해 둔 장례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장례원의 창고속에서는 종의 문서가 쏟아져 나왔다. 김가.이가.최가.홍가 누구의 문서를 말할 것도 없이 다 같은 운명에 놓여 있었던 학대와 박해를 대대로 받아온 몸서리쳐지는 종의 문서였다. 그들은 문서를 추리고 가려낼 필요가 없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횃불을 종의 문서가 쌓여 있는 창고속에 던졌다. 고조할아비,증조할아비,할아비,아비,자기 자신의 이름과 몸의 낙인(烙印)이 찍혀진 종문서에 훨훨 불이 붙기 시작하자 노예들은 손벽을 치며 고함을 지르고 환호성을 올렸다. 그들의 눈에는 제가끔 조상들의 해골들이 장례원 곳간속에서 비틀거리며 춤을추며 나오는 모습이 비쳐졌고,,,”

 

   “상전의 매질에 비명횡사했던 아비의 해골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나오는 것 같았다. 서방님한테 유혹을 당해서 몸과 마음을 고스란히 바쳤다가 아씨마님의 투기로 손가락 끝마다 유황(硫黃)을 칠하고 불을 질러서 염통의 피가 끓어서 죽었다는 예쁜 고모 아줌마의 얼굴이 방긋 미소를 풍기며 광속에서 나타나는 것 같았다. 산더미같이 쌓인 종의 문서는 삽시간에타오르기 시작했다. 장지로 책을 만들어 기록해 놓은 종의 장부인 것이다. 선반마다 가득가득 쌓아놓은 수백권의 책이 종들의 호적원본이었다. 기름에 절여진 노예장부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창고 천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당시 서민들의 서러운 삶이 너무나 애처롭습니다.

 

   왜란초기 한양을 비우고 임진강을 건너 가까스로 평양성에 머물고 있던 선조는 왜군이 대동강 인근까지 압박해 온다는 급보에 다시금 북쪽을 향해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선조와 조선 조정이 평양성을 사수하겠다던 백성들과의 약조를 어기고 야반도주한다는 소문에 몰려든 민중들이 선조 일행을 향해 울부짖는 장면을 월탄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놈들아 평양성을 내버릴테면 진작 버리고 달아날 것이지,백성들을 속여 사수하겠다고 맹세까지 해놓고 너희 놈들만 살짝 달아나면 우리들만 왜놈들의 밥이 되란 말이냐.? 옳다 우리들을 속여서 피난갔던 사람들까지 불러들여 놓고 너희들만 달아난단 말이냐.”...

 

   “요놈의 새끼들 너희들 먼저 죽어보아라. 백성들이 식칼과 몽둥이를 들고 앞을 막으니 백관과 선조의 얼굴은 백지장이 되었고,성난 백성들의 눈은 벌겋게 뒤집힌 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마다 악에 받혀서 머리털이 빳빳이 곤두섰다. 그러자 금관자(金貫子:상투틀때 상투를 보호하기 위해 당줄에 꿰는 작은 구슬)를 붙인 대관 한사람이 충성스런 마음에서 ‘이놈들,무엄하고 무식한 놈들아,종묘의 신주시다,어디다 감히 발을 대고 짓밟느냐’ 백성들을 꾸짖으면서 말을 채쳐 들어가며 아직도 영문을 모른 채 양반행세를 하며 곤두가래침을 뱉던 옛버릇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에 백성들은 몸씨 흥분하기 시작했다.”...

 

   “요놈의 새끼 봐라,금관자를 단 도둑놈의 새끼들아, 장하다! 금관자를 달고서도 왜놈 한명 막아내지 못한 주제에 누구를 보고 호통치는 거냐. 기껏 한다는 짓들이 임금에게 백성을 버려둔 채 도망치자는 게냐.? 몽둥이를 든 백성 하나가 금관자를 단 대감의 말 정강이를 힘껏 후려쳤다. ‘여우보다도 못한 쥐새끼같은 놈아 네깐놈이 호령을 해,맛좀 보아라,요놈의 새끼’ 그러자 수많은 난민들이 와~ 소리를 치면서 몰려들어 대감을 짓밟으니 갓 양태와 망건이 떨어져 나갔다. 금관자의 대감은 졸지에 얻어맞고 짓밟혀 대가리가 터진 채 맨상투 바람으로 구사일생 행궁안으로 쫓겨들어 갔다.”...

 

   “그러니 임금의 어가도 더 나가지 못하고 급히 행궁안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임금 일행이 행궁 안으로 쫓겨들어가는 것을 본 군중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행궁을 에워싸기 시작했고,관복을 입은 대관들만 보면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놈들아 어디로 달아나는 게냐. 왜놈들의 손에 다 같이 죽자.!’며 울부짖는 백성들의 아우성 소리가 행궁 문앞에서 통곡으로 이어졌다.‘백성들이 피난갔다 다시 돌아온 것은 상감께서 이 땅을 사수하자고 맹세했기 때문,우리들은 어린 자식,노부모 모시고 다시 평양성중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지금 상감께서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정녕 왜놈들한테 몰살될 것입니다.”...

 

   “갈테거든 우리 모두를 죽이고 가든지,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을 데리고 가시오.한 노인의 외침이 들리자 젊은이 어린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다시 백성들의 한패는 잠겨진 행궁문을 들부수기 시작했고,이에 와지끈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행궁문안 조당에 있던 대신들의 얼굴빛이 샛노랗게 변한 채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약 난민들이 행궁 대문을 부수고 조수 밀듯 들어온다면 큰일, 왜적한테 죽기전에 난민들한테 뭇매를 맞아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였으나 속수무책,임금 이하 조정의 대신들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선조임금 신상의 위험이었다. 그때 위험을 무릅쓰고 행문밖으로 뛰쳐나간 유성룡대감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상감께서는 결코 평양성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 것’이라며 가까스로 성난 군중을 진정시켰다. 그렇지만 이튿날 새벽 임금선조는 평양 백성들을 두 번째 속이고 의주를 향해 은밀히 말을 달렸다.”했습니다. 후일 의주에 도착 후에도 선조임금이 한양으로의 환궁을 미루며 아예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에 영원히 내부(內附:조국을 버리고 명에 귀화)하려했던 것도, 송도와 평양 등의 피난길에서 백성들로부터 호되게 당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4부 끝)

 

한국인의 성웅, 이순신장군의 발자취

 

                 이순신장군을 알아야 -  이 땅의 슬픈 역사 反芻하지 않기 위해

   다시 우리의 성웅 이순신장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1591년 2월13일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 절도사직에 부임 후 이후부터의 얘기로 이어집니다. 장군께서는 무능한 조정과 왜구의 내침을 예측하였기에 영내 각 진지마다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후일 철갑선의 세계적 선구(先驅)로 평가될 거북선[龜船]의 건조에 착수하는 등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라좌수사 취임 이듬해인 1592년 3월경에는 이미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사정거리 500m 이상 장거리포) 등의 사격틔쳄� 거듭하며 닥쳐올 왜란에 대비했습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병력이 도합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왜선 90여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와 닿았다"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통첩과 "왜선 350여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와 있다"는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공문을 받은 즉시 장계를 올리고,4월15일 순찰사와 병사,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신속히 공문을 발송했지요.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반성을 위한 전쟁기록)에 의하면,경상우도 수군은 왜병의 부산상륙을 알면서도 싸우려하지 않았고,놀란 원균은 함대와 화포, 군기 등을 바다에 침몰,유기시켰다는 것입니다.

   그후 원균은 전라좌도 수군의 구원을 청했으나,이순신 장군은 맡은 바 경계가 있음을 이유로 영역을 넘어 출동하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렇지만 사태가 위급하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녹도만호 정운(鄭運) 등 휘하 장령들과 충분한 찬반논의를 거친 끝에 출전의 결단을 내렸던 것이지요. 4월27일에 올린 구원에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赴援慶尙道狀.부원경상도장)에서 ‘출전 명령’을 시달해 줄 것을 주청한 후 전라좌도의 수군, 즉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경상도 해역에 출동을 감행하였고,왜군과의 해전사에서 연승하는 기록을 이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1차 출전으로 5월4일 새벽 전선(戰船:판옥선) 24척과 협선(挾船) 15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 5월7일 옥포(玉浦)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명예직으로 현직과는 상관없이 국가에서 그만큼 예우해 준다는 의미)에 승서되었고, 제2차 출전인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그대로 독전(督戰), 6월 5일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및 6월 7일의 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모두 72척의 적선을 무찔러 자헌대부(資憲大夫:명예직 정2품[下階]으로 예우)에 추서되었습니다.

   제3차 출전인 7월 8일의 한산해전에서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일본함대를 견내량(見乃梁:지금의 거제군 시등면)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鶴翼陣)의 함대 기동전법으로 급선회하여 일제히 포위 공격함으로써 적선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웠던 바 이 전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명예직 정2품 상계(上階)에 올랐습니다. 이어 7월10일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서는 적선 42척을 분파했습니다(한산도대첩). 이 때부터 왜 수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바다에서는 싸우려 하지 않고 도주하거나 은둔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장군은, 9월1일 부산포(釜山浦) 해전에서 적선 100여척을 격파함으로서 왜군에게 치명상을 입혔고,1593년 7월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고,8월 15일부터 삼도수군통제사에 겸직되었습니다. 전시 민생문제 해결에도 남다른 관심을 표명한 장군은 피난민들을 돌산도(突山島:여수시 돌산읍에 속한 섬)에 거주하게 하였으며,장기전에 대비, 둔전(屯田:군량미 확보를 위한 토지)을 경작하도록 했습니다. 1594년 3월4일 두번째 당항포해전에서 적선 8척을 분파하였고,9월 29일의 장문포해전(長門浦海戰)에 이어 10월 1일에는 곽재우(郭再祐) 등과 연합,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피난길에 올랐던 선조의 어가 행렬(출처:위키백과)

   1595년 2월 27일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사이의 불화를 감지,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켰으나,이듬해 원균의 중상과 모함이 조정 내의 분당적(分黨的) 시론에 심상치 않게 파급되어 우유부단한 선조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인 즉 11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막하 간첩 요시라(要時羅)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를 통하여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그날 조선수군이 이를 잡도록 하라고 권유했다는 것이고, 이 요시라의 간계가 조정에 보고되자,귀가 얇은 선조와 간신들은 장군이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했다는 것이지요.

   1597년 1월21일 도원수 권율이 직접 한산도를 방문 요시라의 헌책대로 출동 대기하라는 명을 전했으나, 이순신은 그것이 왜군의 간계(奸計)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원수 권율이 육지로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웅천(熊川)에서 장군에게 알려오기를 "지난 정월 15일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장문포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측 기록에도 그가 정월 14일에 서생포(西生浦:울산 남쪽)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어 왜장 가토는 도원수 권율이 독전차 한산도에 내려온 것보다 6일전에 이미 상륙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연전연승하던 이순신 장군을 불러 고문했던 선조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식으로 모함함으로써 장군을 파직시켰고, 장군은 3월 4일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가혹한 문초 가하며 죽이자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어가고 있을 무렵,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구명 진정서)에 힘입어 도원수 권율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되기에 이릅니다. 4월1일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장군이 충남 아산에 이르렀을 때,어머니의 부음소식을 들었으나 죄인의 몸이었기에 잠시 성복(成服:상복을 입음)하고 바로 전장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한편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는 7월 16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수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참패했습니다. 그러자 함선을 버리고 육지로 피신한 원균은 왜병의 추격을 받아 살해되었거니와, 이번에도 김응서 및 권율을 경유한 요시라의 같은 계략이 적중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리한 전황은 정유재침의 다급한 사태에 엄청난 파탄이 초래되었으나, 조정은 속수무책이었고,자진해서 수군 수습에 나선 이순신 장군은 8월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칠천량에서 패하고 돌아온 전선들을 거두어 재정비,독려함으로써 출전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기록(명량대첩 장계초록)에 의하면 8월24일 어란(於蘭) 앞바다로 12척을 이끌고 나왔는데, 명량해전(鳴梁海戰) 당일에는 13척이 참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장군은 8월29일 명량(속칭 울돌목)의 문턱인 벽파진(碧波津)으로 진을 옮겨, 9월15일에 우수영 앞바다로 함대를 대기시킨 후에 각 전선의 장령들을 소집,"병법에 이르기를,‘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거니와,한 사람이 길목을 지킴에 넉넉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사기를 북돋아줌으로써 9월16일 이른 아침 명량해협으로 진입한 적선 200여 척과 사력을 다하여 싸울 수 있었습니다.

   왜군에 비해 조선수군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목숨을 걸고 싸운 결과 마침내 왜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조선수군이 왜수군의 서해 진출을 결정적으로 저지하여 7년 전쟁에 역사적 전기(轉機)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임진년의 '한산도대첩'과 정유년의 ‘명량대첩'은 그 전략적 의의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명량해전은 박해와 수난과 치욕스러움의 역경을 극복한 이순신 장군의 초인적 실존(實存)으로 치러진 것이기에 그 의의가 더 크다하겠습니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시 소수의 병력으로 조선육군을 물리친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라는 왜장은 명예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다 했습니다. 왜란 당시 왜장 중에서도 몇 안되는 명장에 속했는데, 그러한 명장이 예전에 들어보지도 못한 이순신 장군에게 한산도 해전에서 대패한 후 그 충격으로 1주일간 식음을 전폐한 채 고통스러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차례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매우 달랐다.”

   와카자카의 독백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스럽다”고 고뇌하였고,이후에도 여러 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가장 좋아하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가장 죽이고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군 장수마저 두려워하고 존경했던 명장인데 선조와 주변 신하들만은 달랐습니다.

   간신배들이 득실대던 조선조정에서는 전투중인 장군을 불러들여 1개월 내내 형언키 어려운 고문을 일삼았으며 그도 모자라 사형으로까지 몰고 갔다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장군이 범상한 사람이었다면 그 울분으로 인해 조정이나 백성을 생각할 턱이 없었겠으나 지친 상태에서도 이끌고 백의종군,12척의 배로 또다시 왜군을 대파했다니 참된 겨레의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1597년 10월14일 셋째 아들 면이 아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한 이후 장군의 심신이 매우 쇠약해졌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와중에도 1598년 2월18일 고금도를 본거지로 선정,삶이 힘든 백성들의 생업을 챙겼던 장군이었습니다.

 

   1598년 8월19일,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급사했다는 전갈에 당황한 왜군 지휘부는 일제히 철군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순천에 주둔중이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애걸했으나,장군은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결연한 태도로 이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조·명연합함대는 11월18일 밤 10시경부터 노량해역으로 진격, 다음날 새벽까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다치바나 도오도라(立花統虎)등이 이끄는 500여척의 적선과 치열한 야간전투를 계속하여 승리를 이끌었다니 장군의 초인적인 전투능력을 필설로 어찌 다 표기할 수 있으리오.

   1598년 11월19일 새벽,진두지휘하며 독전중이던 이순신 장군이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셨습니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지지만,장군의 의자살설(擬自殺說)에 의하면,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투구를 벗고 선봉에 나섰다'는 것이지요. 지난날 위태로운 전투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한번도 패함이 없었던 장군이 자기 몸을 보전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입니다.

 

              서애 유성룡 - ‘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

   이순신 장군의 영구는 마지막 진지였던 고금도를 떠나 12월11일경 아산에 도착,이듬해인 1599년 2월11일에 아산 금성산(錦城山)에 안장되었으나,전사 16년 후인 1614년(광해군6)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에 이장(移葬)했다고 전해집니다. 전사 후 우의정이 증직되었고, 1604년 10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1643년(인조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고,1706년(숙종32)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졌고,1793년(정조17) 7월1일 정조대왕의 하명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는 기록입니다.

   장군에 관한 얘기를 마치면서 그 분의 인품을 빼놓을 수 없는 일,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고 그의 인품과 용모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순신 장군의 진(陣)중에 머문 일이 있었던 고상안(高尙顔:당시 현감)이 그의 언행과 지혜로움에 탄복하면서도,“그의 용모에서 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非福將也)로 느꼈다.”고 술회했다 합니다. 또한 수개월간 진중 생활을 같이했던 명나라 수군 진린(陳璘,1543년~ 1607년) 제독도 이순신 장군을 다음과 같이 극찬한 바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李舜臣有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고 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공적을 자세히 보고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도독인(都督印)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명 황제 신종이 충무공 이순신에게 내린 8종류의 유물)을 내리기도 하였지요. 장군이 육필로 남긴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따르면 그는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심야까지 국사를 논했고,틈 나는대로 막료들과 활쏘기를 즐겼으며 바쁜 진중생활 속에서도 시가(詩歌)를 읊었고,특히 달이 밝은 밤이면 가야금을 즐겨 뜯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장군은 ‘난중일기’를 통해 거리낌없는 사실의 기록, 당일의 날씨, 꿈자리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생활,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 전란의 진중 일상사를 남겼지요. 그 기록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문학으로서도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난중일기’는 그 친필원본이 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필사원본 ‘임진장초(壬辰狀草:난중일기 부록)’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현재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으며,이 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문필은 여러 편의 시가와 서간문을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끝]

 

<지금까지의 글을 쓰는데는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송복 저),이순신과 임진왜란(이순신 연구회),위키백과,박혜일(朴惠一)님의 글 등 여러문헌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