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임진왜란 당시, 위기에 처한 상관을 목숨걸고 구해낸 항왜 사백구

구름위 2013. 1. 21. 15:58
728x90

1597년, 황석 산성(黃石山城) 전투에서 조선군은 크게 패했다. 이 때, 사백구(沙白)라는 항왜는 산성을 지키고 있다 패전한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를 구하기 위해 조총을 쏘아 일본군 4명을 사살했으며, 백사림이 비만한 체구로 인해 잘 뛰지를 못하자 그를 바위굴에 숨겨놓고 황석(黃石)으로 가리고 초목으로 덮어 일본군으로 하여금 그가 있는 줄을 모르게 하였다.

 

  그런데 날이 새어 성 안으로 들어간 일본군이 사방 성문을 지켜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사백구는 꾀를 내어 백사림을 결박하고 자신은 원래의 일본군 차림으로 꾸며 백사림을 여러 일본군들 가운데로 끌어내어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너희들이 성문을 어떻게 지켰기에 조선인이 성 안에 들어와 있는 줄도 모르고 체포하지 못했느냐? 너희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고 거짓 연극을 하며 그들을 꾸짖었다.

 

  이에 성문을 지키던 일본군 병사들은 잔뜩 겁을 먹고 “우리들이 멀리서 오느라 노곤하여 깊이 잠든 사이에 조선인이 함부로 성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죄가 크다. 상관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결코 용서해 주지 않을 터이니, 우리들의 실수한 바를 보고하지 말고 목숨을 구제해 달라.”며 성문을 열어 사백구와 백사림을 보내 주었다.

 

  사백구는 백사림을 성 밖으로 인도해 나와 산 속에 숨겨둔 뒤에 한참 동안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백사림은 ‘이 자가 도로 일본군에게 투항하여 사실대로 말하고는 무리들을 이끌고 나를 죽이려 오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겁을 먹었다.

 

  하지만 사백구는 백사림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식량과 물을 구하기 위해 산을 뒤지고 다닌 것이었다. 3경(三更) 무렵에 사백구가 산에서 내려오면서 커다란 바가지에 쌀밥과 간장, 무를 담고 냉수가 든 호로병과 쌀 한 말까지 가지고 오는 모습을 본 백사림은 기뻐하면서 일의 자초지정을 물었다.

 

  사백구는 “상관께서 너무도 배고프고 목말라 하시기 때문에 내가 도로 일본인의 모습으로 꾸며 일본군의 진지로 들어가 ‘나는 바로 안음(安陰)에 진을 치고 있는 장수의 부하인데, 양식이 벌써 떨어지고 날씨마저 추워 장차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대들이 성을 함락시킬 때에 노획한 물건을 내게 조금만 주어 쇠잔한 목숨하나 구제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하고 구걸을 하여 쌀과 간장과 옷을 얻어가지고 온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사백구의 정성에 감복한 백사림은 그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이 같은 사실을 적어 올린 장계에서 “지금 우리나라의 사람들도 가장이나 처자식을 잘 구제하지 않는데, 오랑캐로서 이렇게 지성스러운 마음을 가졌으니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백구에게 특별히 중한 상을 내려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아울러 항복한 왜인들에게 조선식의 성과 이름을 내려 조선 사람과 같이 대우해 주소서.”라고 말했다. (1597년 9월 8일 <선조실록> 참조)

 

  조선인도 아닌 투항한 일본군이 자신의 상관을 구하기 위해 두 번이나 목숨을 걸면서 분투한 일은 참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