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전기 4대사화

구름위 2013. 1. 26.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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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士禍)는 조선 전기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다. ‘선비들의 피화(被禍)’라는 의미의 그 사건은 발생한 해의 간지를 따라 무오(1498, 연산군 4년)·갑자(1504, 연산군 10년)·기묘(1519, 중종 14년)·을사사화(1545, 명종 즉위년)로 불린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사화는 그 규모와 원인·과정·결과 등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앞으로 이 글에서는 각 사화의 여러 측면을 객관적으로 살펴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간략한 내용 때문에 일일이 밝히지는 못했지만, 이 글의 많은 부분은 여러 선행 연구의 도움을 받아 이뤄졌다.

 

 

조선 왕정의 특징


전근대의 보편적 정치체제는 왕정이었다. 그 까닭은 그 시대의 기본 원리가 신분제도였다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인 신분(身分)은 말 그대로 ‘몸의 구분’을 기준으로 사회를 구획하고 운영한 제도였다. 물리적으로 바뀌지 않는 몸을 기준으로 삼은 그 구분은 그러므로 지배신분과 피지배신분이 본원적이며 영구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엄중한 선언을 담은 것이었다.

 

신분제도에서 이런 유일한 외형의 ‘차이’는 현실의 수많은 ‘차별’로 이어졌다. 신분은 그 밖의 거의 모든 가치를 포괄적으로 귀속시켰다. 즉 ‘고귀한’ 신분 집단의 구성원들은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 사회적 지위, 문화적 향유 같은 탐스러운 세속적 가치를 배타적으로 독점한 것이었다.

 

왕정은 신분제도의 세습성과 배타성과 일원성을 최고 수준에서 집약한 체제였다. 왕정에서 지배자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오직 국왕뿐이었다. 국왕의 혈통적 세습성과 가치의 독점력은 지배신분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었다.

 

조선에서도 국왕과 신하의 상하관계는 엄정하고 확고했지만, 왕권의 실질적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는 중요한 특징을 가졌다. 그런 현상에는 형식적으로는 중국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라는 사실을 포함한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왕권이라는 기본적 성격은 다양한 부수적 현상을 수반했다. 거기서 가장 주목된 것은 삼사(三司)였다. 삼사는 조선시대 정치사를 이해하는 관건의 하나로 평가된다.

 

 

삼사의 기능과 제도적 확립


널리 알듯이 삼사는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이다. 이 세 관서는 관원에 대한 감찰과 국왕에 대한 간언, 그리고 여러 사안에 대한 자문을 각각 주요한 임무로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서로의 임무를 넘나들면서 활동했고, 그 결과 ‘삼사’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동질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어떤 변화의 실질적 효과를 가늠하는데 핵심적 사항은 제도의 성립이다. 현실의 변화와 필요가 오랫동안 축적되면 어떤 제도의 성립으로 귀결된다. 즉 제도는 다양하고 가변적인 현실적 요구를 집약한 균일하고 고정된 조문(條文- 규정이나 법령)인 것이다. 제도로 성립되지 않을 때 현실적 변화와 요구는 오래지 않아 사그러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의 제도가 확립된 중요한 계기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하 대전)]의 최종적 완성(1485, 성종 16년)이었다. [대전]의 첫머리인 ‘이전(吏典)’은 주요 관서들의 기능과 그 밖의 사항을 규정한 조문(條文)으로 시작된다. 그 내용은 간략하고 때로는 다소 모호하지만, 각 관서의 고유한 임무와 권한을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대전]의 완성으로 삼사를 포함한 주요 관서의 본원적 기능은 국법에 보장된 불가침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었다.

 

국왕과 신하(주로 대신)를 비판하고 제어하는 삼사의 기능이 제도로 확립된 것은 조선 정치의 중요한 특징을 형성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왕권을 더욱 제약했고, 대신과 삼사의 긴장과 대립을 일상화했다. 그러나 동시에 활발한 토론을 촉진하고, 권력의 절대화를 방지했다.

 

이상적으로 운영될 경우 이런 체제는 국왕이 상위에 군림하면서 대신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수준 높은 유교정치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단 이런 변화는 조선 중앙정치의 중요한 특징이자 긍정적인 발전으로 생각된다.

 

 

중앙관직의 운영 원리 1 ― 임무의 규정성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또다른 측면은 중앙관직의 운영 원리다. 그것은 관원 개인의 정치적·사상적 성향보다는 해당 관서의 기본적인 임무가 그 관원의 활동을 일차적으로 규정했고, 신하들의 관직은 늘 순환한다는 두 가지 사실이다.

 

앞서 말한 대로 각 관서의 임무는 상징적이든 구체적이든 [대전]에 규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관원은 자신의 임무를 선택할 수 있던 것이 아니라 국법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었다.

 

중앙 정치의 핵심은 국왕과 신하였다. 신하는 대신(주로 2품 이상)과 삼사가 그 중심을 구성했다. 대표적인 대신인 의정부(의정~참찬)와 육조(판서)의 임무는 정부의 상위에서 국정을 포괄적으로 심의하고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런 기능에 충실하려면 지나치게 원칙적인 태도를 고수하기보다는 현실의 다양한 조건에 대응하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그런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여러 관서를 거치면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원숙한 나이의 관원이었다. 그들이 대체로 현실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나타낸 데는, 개인의 독자적인 여러 성향보다는 이런 객관적 조건들이 좀 더 우선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삼사의 조건은 사뭇 달랐다. 그들의 기본 임무는 간쟁과 탄핵이었다. 이런 비판적 임무는 현실의 여러 변수를 너그러이 고려하기보다는 원칙과 논리에 입각한 엄격하고 견결한 태도를 요구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적은 그들의 나이와 품계도 그런 태도를 형성하는데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앙관직의 운영 원리 2 ― 긴밀한 인적 연속성


그러나 중요하게 기억해야할 측면은 대신과 삼사가 긴밀한 인적(人的) 연속성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유망한 관원들은 대체로 비슷한 경로를 거쳐 고위직으로 승진했다. 그 핵심적 경로는, 청요직(淸要職)이라는 이름이 알려주듯이, 삼사였다.

 

조선시대의 주요 인물 중 절대 다수는 삼사를 거쳐 대신이 되었다. 실제로 성종~중종대 의정부·육조의 대신 중 대부분(50~90%)는 삼사를 거친 인물들이었다. 이것은 새롭거나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조선의 많은 관원은 젊은 나이에는 삼사에 근무하면서 탄핵과 간쟁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그 뒤 나이를 먹고 품계가 올라 대신이 되면 그 관직에 합당한 현실론적 태도를 나타낼 가능성이 컸다. 이것은 순환론적 견해로 지적할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기도 하다. 곧 언급하겠지만, 이런 측면은 ‘훈구-사림’ 문제를 이해할 때도 숙고해야 할 사항이다.

 

 

중앙관직의 운영 원리 3 ― 빈번한 인사이동과 재임용


아울러 이 시기의 인사 행정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도 주의 깊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빈번한 인사이동과 재임용의 고착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전체를 조사해보지는 못했지만, 이 글의 주요 대상인 성종·연산군·중종대 의정부 의정~참찬의 임기는 각각 26.4개월-15.2개월-15.4개월로 변화했다. 같은 기간 육조 판서는 14.5개월-16.1개월-6.8개월이었고, 삼사 장관(대사헌·대사간·부제학)은 6.3개월-4.2개월-3.3개월이었다. 그러니까 삼사 장관의 임기는 이미 성종 때부터 반년 밖에 되지 않았으며, 중종 때 와서는 석 달마다 교체된 것이었다.

 

적지 않은 관원이 한번 파직되었다가 같은 관직에 다시 임명되는 순환적 인사가 점차 고착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주목할 만하다. 중종 때의 삼사 장관은 3분의 1 이상(37.4%)이 그렇게 임용되었다.

 

재직 기간의 단축과 재임용의 증가라는 독특한 현상의 발생과 고착은 특히 삼사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관서의 빈번한 인사이동이 거의 만성화에 가까울 정도로 일반적인 일이었고, 파직된 상당수의 사람들이 다시 그 관직에 임용되는 구조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

 

삼사는 기본적으로 파직의 위험성이 큰 관서였다. 그런데 그 관원은 과감한 탄핵과 간쟁을 제기한 것과는 거의 무관하게 그 관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 예상되었지만, 일단 파직된 뒤에도 다시 그 자리에 임명될 확률이 적지 않았다(또는 다른 관직으로 승진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관원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 삼사의 영향력이 크게 제고되었지만 중앙정치의 갈등도 고조되어 결국 사화의 발발로 귀결된 이 시기의 정치사는 이런 구조적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훈구-사림’ 문제의 이해


앞서 말했듯이 이런 측면은 이 시기의 정치사를 ‘훈구-사림’의 이분적 구도로 설명하는 통설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그 학설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서로 이질적인 두 세력의 갈등과 대립으로 이 시기의 역사상을 설명하면서, 후자가 여러 난관을 이겨내고 전자를 극복함으로써 역사의 발전을 이룩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그 뒤 커다란 지지와 학문적 영향력을 얻어온 이 이론은 지배세력의 교체와 역사의 발전을 정합시켜 설명함으로써 조선시대사의 전개과정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것은 일제시대 이후 번져간 식민사학(특히 당파성론(黨派性論)과 정체성론(停滯性論))을 학문적 차원에서 극복함으로써 발전적이고 체계적인 한국사상(韓國史像)을 수립하는데 중요하게 공헌했다.

 

이런 학문적 성과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지만, 일정한 논리적·실증적 허점도 있다고 판단된다. 그 학설은 대체로 대신을 ‘훈구’에 연결시키고 삼사를 ‘사림’과 동일시해 이 시기의 여러 양상을 해석해 왔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대신과 삼사는 그 임무가 본원적으로 달랐고, 그런 차이는 해당 관원의 개인적 성향이나 조건보다 일차적인 규정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관직은 매우 신속하고 복잡하게 변동했지만, 긴밀한 인적 연속성 위에서 운영되었다.

 

실제로 동일한 사람이 삼사일 때와 대신일 때 같은 사안에 상반된 의견을 개진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또한 출신 가문과 지역은 물론 사회경제적 배경도 비슷할 것으로 볼 수 있는 형제끼리도 서로 비판하고 의견의 충돌을 빚는 경우도 보인다. 그때 그들은 각각 대신과 삼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런 구체적 사례들은 ‘훈구’와 ‘사림’이라는 고정된 개념보다는 대신과 삼사라는 관직에 좀더 주의를 기울여 접근해야 할 필요를 알려준다. 요컨대 임무의 고정성과 관직의 가변성, 그리고 인적 연속성 등을 폭넓게 고려해야만 사화를 포함한 조선시대 정치사를 좀더 합리적이며 설득력 있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제도와 현실은 상호 영향의 관계다. 현실의 변화와 요구는 제도의 성립을 가져오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는 다시 현실을 바꾸어간다. [대전]의 완성이라는 중요한 제도적 완성부터 조선 최초의 사화(1498, 연산군 4년)까지는 1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제도의 완성과 정치적 파국이라는 상반된 현상이 인접한 이런 국면은 그 본질을 깊이 탐구해야 할 필요와 흥미를 던져준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삼사라는 중요한 제도가 현실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이었다. 그 지난한 실험을 통과하면서 조선의 정치제도는 독자적이고 원숙한 면모를 갖추어갔다.

 

 

참고문헌: 에드워드 와그너, 이훈상·손숙경 옮김, [정치사적 입장에서 본 조선시대 사화의 성격],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일조각, 2007;정두희, [조선시대의 대간연구], 일조각, 1994;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비평사, 2007.

 

 

 

김범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조선시대 정치사와 사회사를 전공하고 있다. 저서에 [사화와 반정의 시대](2007),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2010), 번역서에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후기](제임스 B. 팔레 지음, 2008)가 있다.

 

 

발행일  2012.01.19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조선의 역사에서 ‘사화’라는 이름이 붙은 첫 사건이다. 이것은 그 사건이 기존의 문제들보다 그만큼 독특하고 차별적으로 인식되고 평가되었다는 방증이다. [경국대전]의 완성(1485, 성종 16년)부터 최초의 사화까지는 1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제도의 정비와 정치적 갈등의 폭발이라는 상반된 현상이 인접했다는 객관적 사실은 그 제도의 어떤 부분(또는 전체)이 현실에 쉽게 적용되지 못하고 마찰을 빚었다는 측면을 암시한다.

 

물론 무오사화에는 연산군과 유자광(柳子光)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이 개입했다. 이런 측면은 현대의 이론적 도움을 받아 ‘훈구’와 ‘사림’의 충돌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그 통설은 일정한 실증적·논리적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연산군은 그때까지 아직 폭정을 본격화하지 않았고, 뒤에서 보듯이 무오사화의 피화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다. 이런 측면들은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재검토해야할 필요를 알려준다.

 

 

성종대의 정치적 유산


앞서 말했듯이 성종 때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경국대전]의 완성이었다. 그로써 삼사를 비롯한 주요 관서들의 기능은 국법에 보장된 불가침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런 제도적 규정은 치세 중반 이후 삼사를 육성해 기존의 대신을 제어하려는 성종의 정치적 포석과 맞물리면서 점차 현실에도 적용되었다. 국왕이 적절한 조정력을 행사하면서 대신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체제가 형성된 것은 조선 전기 정치의 중요한 변화이자 발전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판은 좀처럼 제어되지 않으며, 계속 격화되는 속성을 가진다. 삼사의 활동도 그랬다. 성종 후반 삼사의 위상은 지나친 수준까지 팽창했다. 붕어하기 직전 성종은 당시의 정국을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개탄했다(1494년(성종 25년) 5월 5일). 성종은 삼사의 활동을 제도로 보장하고 현실에서도 용인(과 후원)했지만, 현실적 갈등을 말끔하게 봉합하지 못한 채 치세를 마감한 것이었다.

 

삼사의 위상 제고는 유교 정치의 이상에 다가간 의미 있는 발전이었지만, 국왕과 대신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현상이 분명했다. 즉위 직후부터 왕권 강화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를 보이 연산군에게는 더욱 그랬다. 성종 후반부터 삼사의 강력한 탄핵에 계속 시달려온 대신들도 국왕의 생각에 동의했다.

 

국왕과 대신은 당시의 가장 커다란 폐단이 삼사라는데 합의했고, 그들의 행동을 ‘능상(凌上)’으로 규정했다. ‘윗 사람을 능멸한다’는 의미의 이 단어는 연산군대의 거의 모든 사안을 관통한 핵심적인 판단 기준이었다. 무오사화는 그 기준을 적용한 첫 번째 정치적 숙청이었다.

 

 

정치적 갈등의 고조


치세 초반부터 연산군·대신과 삼사는 수륙재(水陸齋)의 시행, 외척·내시의 임용과 포상, 폐모(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추숭 등 거의 모든 사안에서 충돌했다. 스스로 인정했듯이 삼사는 연산군이 즉위한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려왔고(1496년 3월 14일), 사안에 따라 그 기간은 57일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1497년 4월 25일).

 

삼사는 자신의 의견이 조금이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즉시 사직했다. 사직은 60~70번에서 1백 번까지 지속되기도 했다(1497년 6월 12일). 이것은 예전에 없던 현상이었다. 연산군도 이런 삼사의 행태에 큰 분노를 거듭 표명했지만, 그들은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대신과 삼사의 갈등도 증폭되었다. 특히 대신을 겨냥한 삼사의 탄핵이 매우 거칠어졌다는 사실은 유의할 만하다. 1497년(연산군 3년) 1월 16일 천둥과 번개가 치자 장령(정4품) 이수공(李守恭)은 삼정승과 찬성이 사람답지 않기〔不人〕 때문에 재변이 일어난 것이라고 탄핵했다. 한 달 뒤에도 사간(종3품) 최부(崔溥)는 삼정승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녹만 축내고 있다고 탄핵했다(2월 14일). 이런 삼사의 비판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대신들은 즉각 사직했다.

 

삼사에 대한 대신들의 대응도 격화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이었다. 그는 대간을 하옥하라는 왕명을 “위엄 있는 결단”이라고 칭송하면서 이런 대간의 습속은 현명한 군주가 뜻을 둔 뒤에라야 제거할 수 있다고 아뢰었다(1495년 7월 7·19일).

 

이런 노사신의 발언은 삼사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특히 정언 조순(趙舜)은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동원했다(1497년 7월 21일). 30세의 정언(정6품)이 70세의 전직 영의정에게 투사한 이 표현은 대신과 삼사의 관계가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었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이로써 연산군대 초반 국왕·대신·삼사의 상호관계는 명확해졌다. 국왕은 삼사의 강력한 언론활동을 가장 심각한 폐단인 능상으로 규정했고, 일부 대신들은 거기에 깊이 공감했다. 국왕은 삼사의 언론을 계속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강력히 경고했지만, 삼사는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삼사는 대신을 극단적인 표현으로 탄핵했고, 일부 대신들은 거기에 강력히 반발했다. 연산군대 최초의 커다란 정치적 파국인 무오사화는 국왕과 대신이 연합하고 삼사가 그 대척점에 자리잡은 상황적 맥락에서 발발한 것이었다.

 

 

사화의 시작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 7월 1일에 시작되었다.

파평부원군 윤필상(尹弼商), 선성부원군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韓致亨), 무령군 유자광이 비밀스러운 일을 아뢰기를 청하고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에게 출입을 관장케 하니 사관은 참여할 수 없었다. ……곧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이 경상도로 급파되었는데, 외부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이 기록이 보여주듯이 사화는 소수의 대신들이 어떤 일을 비밀리에 보고하고 국왕이 재가하면서 급작스럽게 발발했다. 이렇게 시작된 사화는 같은 달 27일 주요 연루자들의 처벌 내용을 확정해 전교(傳敎- 임금이 명령을 내림)함으로써 일단락 되기까지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추국이 시작된 시점부터 계산하면 20일도 되지 않았다. 즉 그것은 돌발적으로 일어나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전격적으로 마무리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사건의 이런 외형은 무오사화가 상당히 제한적이며 절제된 목표를 가진 정치적 숙청이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논거의 하나다.

 

 

사화의 전개 1- 김일손의 사초


무오사화는 크게 세 단계로 전개되었다. 그 사건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와 관련된 불충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혐의로 시작되어, 그와 교유한 젊은 관원·선비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문제로 확대되었다가,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되면서 사제관계를 매개로 붕당을 결성해 역사와 현실에 역심(逆心)을 품은 사건으로 규정되는 과정을 거쳤다.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김일손(金馹孫)은 의금부 관원들이 파송된 지 열흘만에 도성으로 압송되었고, 즉시 추국과 신문이 진행되었다(7월 11일). 김일손의 사초에서 집중적으로 문제된 부분은 세조와 관련된 서술이었다. 그것은 단종·사육신·소릉(昭陵- 단종의 모후인 현덕〔顯德〕왕후 권씨의 능) 같은 중대한 정치적 사안부터 홀로된 며느리를 취하려는 패륜에 가까운 세조의 개인적 행동까지 대단히 민감한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부분에서는 김종직이 과거를 보기 전에 꿈을 꾸고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忠憤- 충의 때문에 일어나는 분한 마음)을 부쳤다고 쓴 뒤 전문(全文)을 인용했다(7월 13일).

 

연산군은 이런 불충한 사초를 쓴 까닭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이것은 반심(反心)을 품은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너는 세조의 후손이 다스리고 있는 조정에서 벼슬했는가?”

  

김일손은 반역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문제된 내용은 이런저런 사람들에게서 들었거나 자신의 소박한 판단에 따라 작성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정보를 제공했다고 김일손이 지목한 인물들은 그런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자신들의 말을 김일손이 기록하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켰다고 반박했다(7월 12·13일). 사실은 쉽게 확인되지 않았고, 책임의 소재는 혼미해졌다.

 

그동안 거의 모든 논란의 핵심에 서 왔던 삼사가 등장한 시점은 이때였다. 이번에도 그들의 논점은 국왕의 판단과 상당히 어긋났다. 홍문관과 예문관은 사초의 내용보다는 국왕이 실록을 열람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좀더 중시한 것이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사화의 본질과 관련해 상당히 중요한 발언인데, “반드시 어떤 사정(事情)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즉시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그동안의 행동대로 대간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만류는 그 직무상 당연한 일이라고 변호했지만, 국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7월 13일).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과 관련해 문제될 소지가 객관적으로 농후한 상황에서도 원칙을 고수하면서 국왕의 행동을 저지한 삼사의 자세는 달리 생각하면 피의자들을 감싸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일단은 “어떤 사정”이라고 모호하게 표현했지만, 연산군은 그런 측면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런 국왕의 생각은 그 뒤 좀더 분명하게 실체를 드러내면서 이 사화의 본질을 구성했다.


조선의 9대 국왕인 성종의 치세를 기록한 실록이다. 1495년(연산군 1년) 영의정 노사신 등의 건의로 편찬에 착수해, 1499년 3월에 인쇄가 완료되어 사고에 봉안되었다. 편찬 중인 1494년에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와 거기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무오사화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사화의 전개 2-붕당의 단초

사화는 김일손의 사초에 담긴 불온한 내용의 출처를 규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확대되었다(이하의 내용은 7월 14일). 국왕과 주요 대신들은 사초에 연루된 인물들의 집을 수색해 증거를 수집했다. 거기서 이목(李穆)과 임희재(任熙載. 임사홍의 넷째 아들)가 주고받은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현실 정치와 국왕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현재의 통설에 따르면 대표적인 ‘훈구세력’으로 분류될 임사홍의 아들인 임희재가 무오사화에 깊이 연루되었다는 이런 사실도 그 통설에 일정한 실증적 허점이 있다는 측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 증거를 본 연산군은 “이제 군소배(群小輩)가 붕당을 만들어 재상과 국사(國事)를 비판하니 통렬히 징계해 그 풍습을 개혁하라”고 명령했다. 국왕은 이 사건이 김일손이라는 개인의 사초에서 발원한 고립적 문제가 아니라 그와 교유한 일군의 집단이 붕당을 결성해 국사와 재상을 비판한 조직적 범죄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그런 연관의 혐의를 그동안 자신의 가장 큰 정치적 걸림돌이었던 삼사까지 확장했다. “실록을 열람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붕당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사화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삼사가 붕당에 관련되었다는 의심도 점차 짙어지고 있다는 이런 측면은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윤필상 등 사화를 주도한 대신들도 국왕의 판단에 동조했다. 이로써 김일손이 압송된 지 사흘 만에 사화의 범위는 상당히 확대되었고 그 초점도 변화했다. 국왕과 대신은 이 사건을 일군의 집단이 붕당을 결성해 국사와 재상을 비난한 범죄로 파악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되는데, 거기가 삼사가 관련되어 있다는 판단도 조금씩 구체화되어 갔다. 이제 조선 최초의 사화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그 계기는 유명한 [조의제문]의 발견과 해석이었다.

 

 

사화의 전개 3- [조의제문]의 발견과 해석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글 중의 하나일 [조의제문]은 김일손이 압송된 지 나흘만에 사건의 전면에 등장했다(7월 15일). 그것은 무오사화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 존재는 이미 이틀 전 김일손의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함)에서 알려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틀 동안 그 문서는 그 진의가 분석된 뒤 사건의 결정적 증거로 제출된 것이었다.

 

그 임무를 수행한 사람은 유자광이었다. 그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발견한 뒤 구절마다 풀이해 이런 부도(不道)한 말을 한 사람을 법에 따라 처벌하고, 그 문집과 판본을 소각하며 간행한 사람까지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김종직의 영정. 그는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회왕을 추모하는 ‘조의제문’을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였으며, 생전에 작성한 이 글로 인해 김일손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대거 사화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김종직의 시문집 [점필재집]. ‘점필재(佔畢齋)’는 김종직의 호다. 무오사화를 겪으며 김종직의 글 대부분이 불타버린 가운데 남은 글들을 수습하여 간행한 것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신하는 유자광이었다(물론 최종적이며 최대의 결정권을 행사한 사람은, 왕정의 원리와 맞물려, 국왕인 연산군이었다). 일찍이 성종 때 유자광은 김종직과 묵은 원한이 있었는데, 이극돈(李克墩)이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된 문제를 상의하자 그 사건의 함의를 누구보다도 민첩하게 감지해 사건의 확대를 주도했다(7월 29일).

 

그는 김종직의 문집에서 [조의제문]을 지적해 추관(推官- 형조의 관리)들에게 두루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지목한 것이니,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 이룬 것”이라고 말하고는 즉시 주석을 달고 구절마다 해석해 국왕에게 쉽게 알도록 했다(7월 29일).

 

즉 그는 김종직과 김일손의 연결고리를 발견함으로써 사초에 나타난 불온한 생각의 연원을 찾아냈고, 피의자들을 김종직의 제자라는 하나의 그물 안에 포획한 것이었다. 국왕은 [조의제문]에 대한 유자광의 해석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세조께서 일찍이 김종직을 불초(不肖)하다고 하셨는데, 김종직은 그것을 원망해 이렇게 글을 지어 기롱하고 논평한 것이다(7월 16일).”

 

이로써 그동안 다소 혼미했던 사건의 진상은 분명해졌다. 이 사건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교육받은 일군의 집단이 스승의 불온한 생각을 이어받아 그들 내부에서 교류하고 확대함으로써 역사와 현실을 부정한 범죄로 규정된 것이었다. 이제 필요한 일은 그 교유의 범위, 즉 붕당의 구성원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심문과 진술


사건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국왕은 “사악한 잡초(邪穢)를 깨끗이 없앨 작정”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고 대신들은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다”면서 전적으로 호응했다(7월 17일).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사악한 잡초’로 표현된 관련자들의 범위를 논리적 수사와 강압적 자백에 의거해 확정하는 것이었다. 그 대체적인 얼개는 김종직의 제자들과 임희재가 ‘선인(善人)’이라고 표현한 사람들이었다.

 

김일손은 신종호(申從濩)·조위(曺偉) 등 김종직의 제자 25명의 명단을 밝혔다(7월 17일). 이극돈의 진술(7월 19일)과 [조의제문]에 관련된 진술도 이뤄졌다. 연루자들을 확정해 형량을 선고하는 최종적 결론은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도출되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사안에서 중요한 발언권을 행사한 삼사가 다시 등장한 것은 이 시점이었다.

 

 

삼사의 연루


앞서도 삼사는 실록을 열람하려는 국왕의 행동을 저지했고, 국왕은 그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혐의를 둔 바 있었다. 국왕의 그런 의심은 곧 확실한 증거를 얻었고, 즉각적이며 실제적인 처벌로 이어졌다. 그 계기는 김종직에게 적용할 사후(死後)의 형벌을 결정하는 문제였다. [조의제문]이 발견되어 그 함의가 해석된 뒤 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균(李克均) 등 거의 모든 신하들은 김종직이 지극히 부도하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거기에 제동을 건 집단은 대간이었다. 집의 이유청(李惟淸)과 사간 민수복(閔壽福) 등은 [조의제문]이 매우 부도하므로 김종직은 참시해도 부족하다고 전제했지만, 이미 죽었으므로 작호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시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아뢴 것이다. 앞서와 비슷하게, 대간의 기본적인 입장은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법률에 충실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런 대간의 태도를 앞서 의심했던 ‘어떤 사정’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는 대간의 상소에 표시를 달아 대신들에게 보이면서 “김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렇게 논의하니 비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대노했고, 즉시 체포해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삼사가 모두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나장(羅將- 의금부에 소속된 사령) 10여 명이 철쇄(鐵鎖)를 가지고 한꺼번에 들려드니 모두 놀라 일어났다(7월 17일).”

 

이것은 이 사화에서 삼사가 직접 처벌된 최초의 사례라는 측면에서 매우 주목할만하다. 나흘 전 실록의 열람에 반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대간은 이미 사망한 사람이므로 극한적인 추죄(追罪)는 불필요하다는 원칙론적 입장을 제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바로 그런 태도를 삼사가 김종직 일파와 붕당으로 연결되어 비호하려는 확증으로 파악했다. 국왕은 대간에게 형장을 때리고 신문하라고 지시했다(7월 21일).

 

이 사건을 계기로 사화의 주요한 처벌 대상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부류로 좁혀졌다.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서로 붕당을 맺어 그릇된 발언과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 계기를 이용해 그동안 불만스러웠던 대간의 행태를 일소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제 대간을 뽑을 때는 대체를 아는 자를 선발해야 하며, 이전의 대간처럼 불초하거나 연소한 자들은 절대 임명하지 말라(7월 24일).”

 

나아가 국왕은 국무에 관련된 발언과 기록 전체를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연산군은 승정원에서 출납하는 공사(公事)를 누설해서는 안된다고 승지들에게 하교했으며, 기록을 맡은 주서청(注書廳)에는 조정 관원들이 번잡하게 출입해 모든 공사를 알게 되니 앞으로는 출입을 금지시키라고 지시했다. 사관은 이 조처가 나랏일을 비판한 김일손의 행태를 연산군이 대단히 싫어했고, 외부인들이 김일손에 관련된 일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7월 26일).

 

요컨대 김일손과 김종직의 불온한 문서에서 촉발된 사화에는 삼사도 적지 않게 연루된 것이었다. 전자의 죄목은 사제 관계를 매개로 현실과 역사에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고, 후자는 그런 그들과 붕당을 맺어 비호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붕당과 능상이었다. 국왕은 이 사화를 계기로 삼사의 행동을 교정하고 새로운 선발 지침을 하교함으로써 그동안 가장 불만스러웠던 집단을 자신의 의도와 부합되게 바꾸려고 시도했다. 이런 측면은 사화의 마지막 단계인 연루자들의 처벌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연루자들의 처벌


처벌은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우선 김종직의 문집과 그 판본을 전국에서 수거해 소각했다(7월 17일). 특히 중앙에서는 조정 관원들이 갖고 있던 김종직의 문집을 모두 압수해 궁궐의 뜰에 죄수들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의식’이 거행됐다(7월 22·23일).

 

연루자들의 형량은 곧 결정되었다(7월 26일). 대상은 모두 52명이었는데, 사형 6명(11.5%), 유배 31명(59.6%), 파직·좌천 등이 15명(28.8%)으로 분류되었다. 이런 실제의 형량은 조선 최초의 사화라는 거대한 상징성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가장 무거운 형벌인 사형이 6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사후에 처벌된 김종직을 제외하면 그 비율은 더욱 줄어든다)은 앞서 말한 대로, 이 사화가 상당히 제한적인 숙청을 통해 배후의 전체에게 상징적인 경고를 보내려는 심층적 의도를 가진 사건이었다는 판단의 중요한 논거가 될 것이다.

 

무오사화 피화인의 형량

무오사화 피화인의 구성

 

 

피화인(被禍人)들의 구성 또한 유의할만하다. 그들 중에서 김종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은 24명(46.2%)으로 절반에 약간 못 미쳤으며, 나머지는 언관(9명, 17.3%)이나 실록의 편찬에 관련된 부류(8명, 15.4%), 또는 대신과 종친들이었다(11명, 21.2%). 이 사화의 주요한 기화자로 평가되는 이극돈도 파직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무오사화의 피화인에서 김종직 일파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지만 절반을 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는 그들과 무관한 부류가 오히려 더욱 많았던 것이다. 이런 측면 또한 이 사화의 표면적 요인과 처벌 대상은 사초와 김종직 일파였지만, 그 내면적 의도는 다른 부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방증이 될 것이다.

 

 

사화의 분석

사화의 조짐은 그것이 일어나기 1년 전쯤부터 감지되었던 것 같다. 단편적인 사례지만, 1497년 8월 4일(계유) 시강관 이과(李顆)는 “요즘 주상께서는 대간의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처벌까지 하시니 앞으로 대간을 죽이는 일이 있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했다.

 

앞서 보았듯이 국왕과 주요 대신들은 당시 삼사의 행동에 매우 커다란 불만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려는 욕망과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와 명분을 노리고 있었다.

 

[연산군일기]에서는 그런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된 대상이 사화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뭉치게 하고 국왕을 항상 울분에 차 즐겁지 않게” 만들어왔다고 썼다. 김종직 일파는 문건이 발견된 이후 그런 집단과 합치되는 부류로 지목된 것이지, 그 이전에는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집단은 “명예를 노리고 윗사람을 업신여기며 국왕의 행동을 제어하는 문신(또는 문사)들”이었다.

 

그들의 실체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는 우선 신수근이 기화에 참여하게 된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유자광과 이극돈은 김종직·김일손에게 깊은 개인적 원한이 분명히 있었지만, 신수근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증오한 대상은 자신의 출세에 반대한 삼사였다. 즉 신수근은 사초 문제를 들으면서 원한스럽게 새겨두었던 삼사의 지난 행동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화의 확대에 유일하게 반대한 노사신의 발언도 중요하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는 사초 문제로 촉발된 사건이 유자광의 주도로 사초와 무관한 사람들까지 대거 투옥되는 사태로 번지자 그런 변질을 강력하게 저지했다. 그가 보호하려던 부류는 “조정에서 청론(淸論)하는 선비들”, 즉 언관이었다.

 

이 사화에 삼사가 중요하게 연루되었다는 정황은 연산군과 대신들의 발언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사화를 마무리한 직후 국왕은 그 사건의 궁극적 원인과 책임을 대간에게 돌렸다. “선비들이 결탁해 붕당을 만들어 악행을 저질렀지만, 대간이 용렬해 탄핵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초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8월 3일).”

 

그러면서 그는 그 결과 대간이 처벌되었다는 사실을 경고하듯이 상기시켰다. “요즘 대간이 망령되게 종묘 사직의 중대사를 의논하다가 그 죄를 받았다(8월 7일).” 즉 연산군은 그동안 거의 모든 국사에 개입해 온 삼사가 정작 김종직 일파의 역모적 사건처럼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적발하지 못했거나 그들을 옹호하려는 그릇된 붕당적 행태를 보였기 때문에 이런 옥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주요한 처벌 대상이 되었다고 밝힌 것이었다.

 

사건 직후 유배된 대간을 석방하는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문형·한치형·성준 등 대신들은 “언관들이 죄는 크지만 모두 조급해 잘못 생각한 것이니 용서하자”고 건의했다(11월 10일). 사건 1년 여 뒤 영의정 윤필상 등 삼정승도 “무오사화 때 대간이 잘못된 의견을 아뢴 죄로 처벌되었지만 다른 뜻은 없었으니 용서하자”고 아뢰었다(1499년 10월 7일). 대신들도 이 사화로 언관들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요컨대 무오사화는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집단을 동시에 처벌하고 경고한 복합적인 사건이었다. 치세 직후부터 삼사와 끊임없이 충돌해온 국왕과 주요 대신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권력 행사가 제한되는 불만스러운 상황을 타개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김일손의 사초가 발견된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기화세력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를 능상과 붕당이라는 공통된 죄목으로 연결시켰고, 그런 절묘한 논리를 현실적 숙청으로 반영시키는데 성공했다. 사화의 발발에 동의한 신수근의 행동과 처벌의 확대에 반대한 노사신의 판단은 그런 전개과정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처럼 치밀하고 정교한 정치적 고려와 행동을 구사한 기화세력은 이 사화를 전면적인 숙청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제한적이며 상징적인 경고로 마무리했다. 물론 그런 경고의 궁극적 대상은 이 사건의 심층적이며 본질적인 원인인 삼사였다. 삼사의 그릇되고 과도한 언론활동을 교정해야한다는 공통된 목표 아래 서로 제휴한 국왕과 대신들은 이로써 의미 있는 일차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왕과 신하라는 본질적인 차이상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삼사를 일단 제압한 연산군이 자신의 개인적 성향을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그 괴리는 더욱 커졌고, 정치세력의 상호관계와 정국의 전개양상도 크게 변화했다. 이런 과정의 최종적 결과는 갑자사화라는 더 큰 파국이었다.

 

 

참고문헌: 에드워드 와그너, 이훈상·손숙경 옮김, [정치사적 입장에서 본 조선시대 사화의 성격],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일조각, 2007;권연웅, [연산조의 경연과 사화], [구곡 황종동교수 정년기념 사학논총], 1994;김범,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2010.

 

 

 

  1. 수륙재(水陸齋): 국왕의 구병(救病)이나 장수·명복 등을 비는 목적으로 드리는 불교식 제례.
  2.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사람의 관을 부수고 시체의 목을 베는 형벌.

 

 

 

김범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조선시대 정치사와 사회사를 전공하고 있다. 저서에 [사화와 반정의 시대](2007),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2010), 번역서에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후기](제임스 B. 팔레 지음, 2008)가 있다.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는 6년 전의 무오사화와 여러 측면에서 사뭇 다른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239명(사형·부관참시 122명, 51.1퍼센트)이라는 피화인의 규모가 보여주듯 전면적이고 가혹한 숙청이었다. 또한 무오사화가 국왕과 대신이 연합해 주도한 제한적 경고였던데 견주어 갑자사화는 폭정과 황음(荒淫)에 침윤되어가던 국왕이 신하 전체를 대상으로 자행한 거대한 폭력이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폭정에서 한 극점을 형성했다.

 

 

강화된 왕권

무오사화 이후 중앙 정치가 변화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가장 주요한 현상은 삼사의 위축이었다. 국왕이 대간을 날로 심하게 제압하자 모두 그 관서에 임명되기를 꺼려 결국 유순하고 나약한 성품을 가진 김영정(金永貞)이 대사헌에 발탁되었다는 기사는 그런 정황을 잘 보여준다(1498년 11월 10일). 연산군은 “오늘에야 대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면서 이런 변화를 흡족해했다(1498년 7월 15일).

 

이처럼 사화 이후 삼사가 상당히 온순해짐으로써 국왕(과 대신들)은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한결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국왕은 결정적인 오류를 저질렀다. 그는 강화된 왕권을 정치나 제도의 개혁 같은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 사치·사냥·연회·음행 같은 비본질적인 사안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연산군은 후자와 관련된 자신의 욕망을 제한 없이 실현하는 것이 바로 능상의 척결을 통한 전제적인 왕권의 행사라는 자신의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관건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뛰어난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본질적 사안과 지엽적 문제를 정확히 구분해 인력과 재원을 효과적으로 집중시키는 능력이다. 이런 중대한 판단 착오는 연산군을 폭군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핵심적인 논거가 될 것이다.

 

  

왕권의 일탈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은 사치·사냥·연회·음행의 탐닉, 금표(禁標) 설치와 민가 철거, 발언의 통제 같은 일탈적 행위를 자행했다. 이런 행위의 궁극적인 결과는 정무의 태만과 지나친 재정 지출에 따른 민생의 파탄이었다.

 

재정 지출은 무오사화 이듬해인 1499년부터 세출(20만 8522석 1두)이 세입(20만 5584석 14두)을 초과했다. 1501년(연산군 7년)에는 이른바 ‘신유공안(辛酉貢案)’을 제정해 기존의 공납을 크게 늘림으로써 민생의 부담과 재정의 유용은 급격히 늘어났다.

 

정무에 태만한 것은 당연했다. 국왕은 사냥·연회·음행 등을 더욱 거침 없이 즐겼다. 또한 그런 방종을 외부에서 알지 못하도록 궁궐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고 국왕에 관련된 발언을 철저히 통제했다. 이런 현상은 재위 8~9년부터 크게 증가했다.

 

갑자사화 이후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만, 신하들은 아직 간쟁의 임무를 방기할 수 없었다. 왕권의 일탈이 심각해질수록 간언도 강화되었다.


조선의 제 10대 국왕 연산군의 치세를 기록한 [연산군일기]의 표지다. 1506년(중종 1년) 11월에 편찬이 시작되어 1509년(중종 4년) 9월에 완성되었다. 폐위된 국왕의 기록이기 때문에 '실록'이 아닌 '일기'로 불렸다.

 

 

삼사와 대신의 간쟁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이 집중한 행위들은 객관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확연한 것이었다. 삼사는 다시 간쟁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무오사화로 위축되었던 삼사가 재기할 수 있었던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연산군이 제공한 것이었다.

 

좀더 주목되는 측면은 대신들의 태도 변화였다. 대신들도 국왕의 일탈을 자주 강력히 간쟁했고, 결과적으로 삼사와 비슷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본원적으로 긴장과 비판의 관계에 있던 대신과 삼사가 같은 의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폭정의 심각성을 반증한다.

  

두번의 사화를 주도한 연산군의 시대는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아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의 소재로 많이 쓰였다. 1935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박종화의 역사소설 [금삼의 피] 또한 갑자사화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대신들이 본격적으로 간언에 참여한 시점은 1499년(연산군 5년)이었다. 그 해 3월 27일 좌의정 한치형, 우의정 성준, 좌찬성 이극균, 우찬성 박건, 좌참찬 홍귀달, 우참찬 신준 등 주요 대신들은 10개 항에 걸친 긴 상소를 올렸다. 그 핵심은 국왕의 사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1502년(연산군 8년) 3월에 삼정승 한치형·성준·이극균이 올린 시폐(時弊) 10조도 주목된다. 그 제목대로 당시의 폐단을 집약한 그 상소의 주제 또한 재정 유용의 중지였다.

 

대신과 삼사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국왕은 점차 고립되었다. 그러나 국왕은 이런 변화의 원인을 성찰하지 않았고 그런 결과에 더욱 큰 분노만을 느꼈다. 그는 무오사화가 간접적 경고에만 그쳤기 때문에 능상의 폐단이 삼사뿐 아니라 대신들에게까지 만연된 것이라고 분석했고, 따라서 이제는 무차별적이고 직접적인 숙청이 필요하다고 결단하게 되었다.

 

갑자사화를 꼭 1년 앞둔 시점에서 연산군은 능상의 해악이 신하들 전체에 만연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대간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정승이 말하고, 정승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육조가 말한다. …… 요즘 위에서 하는 일이라면 기어이 이기려고 해서 쟁론이 끝이 없다. …… 대간이 사체를 헤아리지 않고 말하는데 대신도 따라서 말하니 결코 들어줄 수 없다”고 지적했다(1503년 3월 16일). 고립된 국왕의 분노는 끔찍한 숙청으로 이어졌다.

 

 

사화의 촉발

널리 알듯이 갑자사화의 발단은 국왕의 하사주를 이세좌(李世佐)가 엎지른 실수(1503년 9월 11일)와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홍귀달(洪貴達)이 즉시 따르지 않은 사건이었다(1504년 3월 11일). 연산군은 이런 대신의 행동을 능상의 표본으로 지목했다.

 

주목할 사항은 이번에도 국왕의 근본적 분노는 삼사를 향해 있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이런 무엄한 능상을 비판하지 않았다고 삼사를 질책했다.

 

능상에서 촉발된 사건은 곧 폐모 사건의 보복으로 번졌다. 3월 20일 연산군은 성종에게 참소해 폐모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판단한 후궁 정씨의 아들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을 창덕궁으로 압송해 폭행했다. 아울러 사건의 전말을 조사했는데, 공교롭게도 갑자사화의 발단을 제공한 두 인물인 이세좌와 홍귀달이 모두 연루되어 있었다(이세좌는 사사할 때 승지였고, 홍귀달은 폐비할 때 승지였다). 이런 결과를 보면서 아마도 연산군은 능상의 연원이 깊고 오래며 그 실체는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이라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신했을 것이다.

 

 

사화의 분석


갑자사화의 규모와 방식은 매우 거대하고 참혹했다. 피화 대상은 현직 대신과 삼사를 아우른 거의 모든 신하들을 넘어 이미 사망한 사람들까지 확대되었으며, 그 방식도 일반적인 처형 외에 부관참시, 쇄골표풍(碎骨飄風), 파가저택(破家瀦宅)처럼 극한적인 형벌이 적용되었다.

 

239명의 피화인 중에서 사형과 옥사(獄死)·부관참시의 극형을 받은 부류는 절반이 넘었다(122명, 51.1%). 이것은 무오사화보다 압도적인 수치다(그 피화인은 모두 52명이었고 그 중에서 사형은 6명이었다).

 

피화인을 관직에 따라 나누면 대신(20명. 17.9%)보다 삼사(92명. 82.1%)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질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대신의 피해가 더욱 치명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사화의 발단을 제공한 두 인물이 모두 대신이었고, 연산군이 ‘갑자육간(甲子六奸)’이라고 지목한 이극균(좌의정)·이세좌(예조판서)·윤필상·성준·한치형(이상 영의정)·어세겸(좌의정)은 모두 당대 최고의 대신들이었으며, 부관참시된 한명회·정창손·심회(이상 영의정)·이파(찬성) 등도 전대를 대표하는 훈신이었기 때문이다.

 

갑자사화와 관련해 흥미로운 양상 하나는 이런 직접적인 극형과 함께 재산 몰수라는 경제적 처벌도 병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궁극적 목적은 고갈된 재정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재산 몰수는 추쇄도감을 따로 설치할 만큼 철저히 진행되었고 대부분 국고로 귀속되었다.

 

 

폭정과 폐위


200명이 넘는 대규모의 인원을 참혹한 방법으로 처벌하는 거대한 폭력으로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연산군은 그 뒤 자신의 욕망을 전혀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현실화할 수 있었다.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꼭 2년 반 동안 연산군이 보여준 행태는 황음(荒淫-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갑자사화는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정치적 비극의 하나일 것이다. 그 사건은 조선의 중앙정치에서 항존했던 수많은 정치적 숙청들과 비교해 여러 측면에서 두드러진 차별성을 가졌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갑자사화에서 가해자는 국왕 한 사람이었으며 피해자는 대신과 삼사를 중심으로 한 거의 모든 신하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건은 ‘선비(사림)들의 피화’라는 의미의 ‘사화’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묶인 무오·기묘·을사사화와도 여러 측면에서 크게 달랐던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무오사화는 국왕과 일부 대신들이 김종직 일파를 명분으로 삼사에게 경고한 사건이었다. 뒤에서 살펴볼 기묘사화(1519)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림의 급진적 개혁정치를 정지시킨 국왕과 대신들의 전격적인 숙청이었으며, 을사사화(1545)는 주로 신하들끼리의 충돌이었다. 이런 측면은 각 사화를 개별적으로 세밀하게 검토해야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그 사건들을 매개로 한국사의 중요한 통설의 하나로 자리잡은 ‘훈구-사림론’을 재고해야할 필요성을 알려준다.

 

요컨대 갑자사화는 수많은 정치적 숙청 중에서도 대단히 처참하고 기이한 사건이었다. 무오사화의 원인과 본질이 상당히 복잡하고 심층적이었던데 견주어, 그것은 권력의 자의성(恣意性)과 자율성을 혼동하면서 전제왕권의 몽상과 황음에 침윤되어가던 국왕이 행사한 폭력의 극점이었다고 할만하다. 실제로 그렇게 됐지만, 그런 거대한 만행을 중지시킬 수 있는 수단은 강제적인 폐위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조선의 중앙 정치는 개국 이후 가장 심각한 파탄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을 거치면서 삼사의 위상은 더욱 견고해졌다. 뒤이은 기묘사화가 삼사의 영향력이 가장 증폭된 시점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런 측면을 뒷받침한다. 연속된 사화는 한 제도가 현실에 온전히 정착되는 과정의 지난함을 표본적으로 보여준다.

 

 

참고문헌: 에드워드 와그너, 이훈상·손숙경 옮김, [정치사적 입장에서 본 조선시대 사화의 성격],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일조각, 2007;송수환, [갑자사화의 새 해석], [사학연구] 57, 1999;김범,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2010.

 

 

 

  1. 쇄골표풍(碎骨飄風): 뼈를 부숴 바람에 날리는 형벌.
  2. 파가저택(破家瀦宅): 집을 파괴하고 그 터에 물을 대 연못으로 만드는 형벌.

 

 

 

김범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