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구름위 2013. 1. 2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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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의 배경

     

   577년 북주에서 양견이라는 인물이 나와 북중국을 중심으로 581년 수왕조를 개창하였다. 수는 이 여세를 몰아 10년도 안된 589년에는 남조의 진(陳)마저 병합하여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수는 외형적인 천하통일을 달성시킨 후 그 이름에 걸맞는 내면적이고도 실제적인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수 문제는 이를 위하여 노력한 인물로 후대에 이를 평하여 '개황의 치'라 부르고 있다. 당시 북방에서 돌궐의 힘이 강해지자 수는 이간책을 써서 돌궐을 분리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서돌궐은 서역지역으로 물러나고 동돌궐은 수나라의 보호하에 수의 척후역할을 하고 있었다. 중국 통일왕조의 출현으로 고구려의 관심은 한반도의 한강 유역에서 만주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고구려는 581년부터 4년동안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였고, 585년에는 남조의 진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수의 등장에 따른 정보수집 및 국제관계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이듬해인 586년에는 수도를 환도에서 장안성(長安城 : 평양)으로 옮겼다. 589년 수가 진을 멸망시키자 수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정비하고 곡물을 비축하였다. 그리고 중국인 무기제조 기술자를 비밀리에 매수하여 병기를 수리하고, 수문제가 파견한 사신을 가두어 정보누설을 막았다. 또한 자주 국경지대에 기병을 파견하여 중국 변방인을 살해하며 불안의식을 높였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였다.

 

   고구려와 수와의 쟁패는 '요동확보'의 문제였다. 요동은 철 생산지로서 무기와 생산력 증강을 위한 전략적 위치였으며, 북과 서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제압하는데 용이한 군사적 이점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598년 영양왕은 강이식 장군을 고구려 병마도원수로 삼아 정병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임유관(산해관)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말갈병 1만으로 요서를 침공해 들어갔다가, 수의 영주 총관 위충의 반격을 받고 일단 후퇴하였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을 받고 크게 노한 수 문제는 동년 2월에 그의 넷째 아들인 한왕 양량을 원수로 임명하여 수륙 30만명으로 고구려를 정벌토록 하였다. 6월에 출발한 수나라 육군은 임유관을 나와 고구려로 진군하던 도중 요수에서 때마침 장마와 홍수를 만나게 되었다. 수나라 해군은 주라후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산동반도의 동래로부터 평양으로 쳐들어가는 것같이 보이게 하였지만 실은 군량보급선을 이끌고 요수에 이르러 임유관으로 나오는 육군에게 군량을 보급하기 위한 수송작전이었다.

  

  이와 같은 수의 계략을 미리 간파한 강이식 장군은 수군을 이끌고 해상으로 진출하여 수의 군량보급선을 급습, 이를 격파함으로써 수의 병참선을 절단시키고, 휘하 전군에게 군령을 내려 성벽을 굳게 지키고 수나라 군에게 대응치 않도록 하였다. 수나라 군은 군량이 다 떨어지고 때마침 장마를 맞아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군사가 속출하자 9월에는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수군을 수륙에서 추격하여 수군을 무찌르고 많은 군사장비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때 죽은 군사가 10중 8, 9 였다고 한다.

  

  수의 고구려 원정의 기본전략은 전통적인 방법의 답습이었다. 첫째, 적을 압도할 수 있는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최종목표를 완전 포위공격한다. 강력한 군세에 압도된 적은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항복하게 될 것이며, 불응하면 강공하여 이를 점령하고 나아가 전원 포로로 하여 중국 내지에 사민시킨다. 둘째, 수륙합동작전을 최우선의 작전으로 한다. 고구려의 원정로는 3천여 리 이상이었으므로 군량의 보급이 큰 애로였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고구려의 성을 함락시켜 비축미를 노획하거나 후방에서 육로나 해로를 통해서 지원하는 것이었다. 해군의 활동은 군량미의 수송작전에 이용하였다. 또한 상대국이 전선에 병력을 투입함으로써 수도의 방비력이 소홀해진 틈에 최종목표를 공격하는데 있었다. 셋째, 속전속결을 원칙으로 한다. 양국의 주 전투지역은 요동지방으로 음력 6, 7월 사이가 우기이고, 또 8, 9월부터 다음해 2, 3월 까지는 동계시기였다. 장마와 대설이 작전과 수송 모두에 큰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작전은 동계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기 이전의 2, 3개월의 짧은 시간에만 가능하였다.

  

  고구려는 견고하게 축성된 성을 거점으로 유사시에는 식량과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를 성안으로 가져가 수비하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전술을 수행하였다. 요하,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의 하천과 횡격실의 고지군은 방어에 유리한 점을 고구려에 제공해 주었으며 이 천연적인 방어벽과 인공적인 산성을 상호 연결하여 방어선을 설정하고 있었다.

 

400여년 만에 중국에 나타난 통일 왕조. 이것은 그동안 고구려를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질서에 새로운 위협을 의미했다. 새롭게 세력을 키우려 하는 수나라와 전통의 강국 고구려. 두 나라 간에 긴장감이 높아갈 무렵, 수나라로부터 한 장의 국서가 날아들었다.


"넓은 하늘 밑은 다 짐의 신하가 되는 것이니, 이제 고구려왕을 내쫓고 관리를 보내 다스리고자 한다. 그러나 왕이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행실을 바꾼다면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달리 관리를 두랴. 짐이 왕의 허물을 문책하려 한다면 장군 하나만 보내도 족하지만, 그래도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려하니 왕은 반드시 짐의 뜻을 알고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 <수서>


     수나라의 황제인 문제가 고구려왕을 신하로 칭하며, 수나라에 굴복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고구려가 마치 자신들의 속국인양 거만한 태도를 취한 이 국서는, 사실상 수나라의 선전포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이 같은 수나라의 행동에 대해, <조선상고사>에는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전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기원전 597년은 고구려 영양왕 8년이요, 수의 문제가 진을 병합하여 중국을 통일한지 17년 되는 해이다. 수는 이즈음에 고구려와 자웅을 다투고자 고구려를 지극히 업신여기는 내용의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을 보내왔다.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에 크게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의 글을 보낼 것을 의논하니, 강이식이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 하고 곧 개전하기를 주장하였다."

      수 문제의 국서가 온 이듬해인 598년. 고구려의 군대는 요하를 건너 수나라로 진격한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16년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2. 전쟁 원인

(1) 조양지역의 중요성

 

     수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한 고구려 군대는, 요서로 향한다. 목표가 된 지역은 영주. 지금의 조양이었다. 고대에 조양은 여러 나라가 쟁탈전을 벌인 요지였다. 조양이 중요했던 첫 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이권 때문이었다. 6세기 무렵, 조양에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조양을 차지하게 되면, 이처럼 거대한 시장권과 교역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동북아시아를 분할하고 있던 각 나라간의 세력 다툼에서도 중요했다. 특히 고구려와 수나라에 있어서, 영주(지금의 조양)를 중심으로 하는 요서 지역은 완충 지대인 동시에 끊임없는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요서를 장악하는 것이 곧, 세력의 확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조양은 진출 내지는 반드시 장악해야만 하는 곳으로 그렇지 못하면 다음단계에 본토나 내륙이 침범 내지는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전략적인 공간이다. 차지를 안 하면 반드시 그보다 몇 배의 댓가를 치를 수밖에 없고 거기를 잃는다는 것은 곧바로 경계선이 안으로 후퇴하게 되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진출과 방어라고 하는 의미에서 조양은 대단히 의미가 중요한 곳이었다. - 이성제 교수(전쟁기념관 선임연구원)


      그런데 수나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요서는 고구려의 세력권 아래 있었다. 597년 수 문제가 보낸 국서에도, 이 같은 정황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당시 요서가 고구려의 영토는 아니었지만, 고구려는 이곳을 차지하고 있던 말갈과 거란에 대해 지배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요서지방이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고구려성의 존재다. 중국의 사서인 <자치통감>에는, 요수 서쪽에 고구려 성 무려라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고구려가 이 성에서, 요수를 건너는 자들을 감시했다는 것이다.


중국남북조시대 때 고구려는 요동을 거의 다 장악했었고 요서는 고구려 영토는 아니었지만 소수민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수민족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영주를 중심으로 한 요서지방이 고구려의 영토는 아니지만 그 세력권 아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왕소부 교수(북경대 사학과)


      중국의 역사서 신당서는 조양의 옛 지명인 유성에 고구려 시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 유성에서 고구려는 북방민족에게 농산물이나 철을 수출하고 말과 가죽류를 수입했다. 중국과는 말, 황금, 화살 등을 수출하고 비단 장신구등을 수입했다. 중개 무역권도 고구려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6세기 후반, 수나라가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던 요서지방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수나라의 거점이 된 곳은,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높은 조양이었다. 583년, 수나라는 조양의 소수민족 세력을 토벌한 뒤 영주 총관부를 세운다. 이후에 문제는 넷째아들 양을 병주 총관으로 임명한 뒤 52주를 다스리게 하고, 여기에 영주를 포함시켰다. 수나라 4대 총관의 하나였던 병주의 군사력이 영주총관을 직접 지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주의 군사력을 키운 것이다. 당시 이미 개전논의가 한창인데 수나라가 갑자기 확장 증강하는 것을 보고 고구려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598년, 고구려의 영주 공격은 수나라가 요서의 지배권을 넘보도록 묵과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2)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한 고분 벽화는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13군 태수들이 유주 자사에게 인사드리는 모습. 연군태수, 범양태수, 어양태수, 상곡태수, 광령태수, 대군태수, 북평태수, 요서태수, 창려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 낙랑 태수, 대방태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3군이 유주에 속하며 거느리는 현은 75개이고, 유주의 소재지는 광계이며 지금의 소재지는 연국인데, 덕양으로부터 2, 3백리 떨어져 있다. 이 벽화를 통하여, 당시 광개토대왕 때 일시적이나마 고구려가 중국 화북 지방까지 점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 최무장, 임연철 편저, <고구려벽화고분>, 신선원, 1990, p306~p309

2) 이형구,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 까치, 1991, p198



     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의 진이란 사람이다. 그가 유주지역의 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13명의 부하태수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데 그 태수들의 지역이 벽화 속에 정확히 기록 되어 있다. 벽화에 기록된 열세 지역은 모두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이것은 5세기 초 고구려가 중국의 북경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성했다는 증거였다. 이때 고구려가 이렇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이 대단히 혼란한 5호 16국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틈타 고구려가 중국에 진출하였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 제 19대왕인 광개토대왕비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왕을 가리켜, 왕중의 왕인 호태왕이라고 불렀다. 또 이 비석에는 끊임없는 정복 활동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한 광개토왕의 업적이 화려하게 기록돼 있는데, 그런 광개토왕을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太王 恩澤 皇天 威武 四海"

태왕의 업적은 황천에 달하고 위력은 사해에 떨쳤다.


     함경남도의 한 절터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금동판에는 당시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삼가 이 탑을 만들었으니, 5층으로 새기고 상륜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원하건대 왕의 신령이 도솔천으로 올라가 미륵을 뵙고 천손과 함께 만나 모든 생명이 경사스러움을 입게 하소서.....?화 3년 세차 병인 2월 26일 ?술 초하루에 기록한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천손'이라는 용어이다. 발해 문왕이 일본에 국서를 보내면서 스스로 '천손'이라고 일컫었는데, 중국이나 일본 학자들은 당시 당나라의 천자나 일본의 천황을 보고 발해가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금동판이 증거가 되었고, 고구려 시대 때 만들어진 후 발해 시대에도 사용된 것이다. 발해 시대에는 최고 통치자를 '천손'이라고 불렀다는 점과, 발해 왕실이 고구려 왕실의 용어를 그대로 계승해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송기호<발해를 찾아서>,솔,1993,p.272-p.275


     고구려 유물에 나타난 기록, 태왕, 사해, 천손과 같은 말들은 바로 고구려가 천하를 지배하는 중심 국가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고구려에 비해 수나라는, 비록 중국을 통일했다고는 하나 나라를 세운지 겨우 17년에 불과했다. 그런 수나라가 고구려를 신하의 나라로 칭한 것을 고구려는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구려가 수나라 공격에 동원한 병력은 1만. 그것도 고구려의 정예 부대가 아닌 말갈군이었다.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작정을 하고 공격을 했다기보다는, 무력행동에 대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수나라의 움직임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영주 지방을 선제공격한지 석달 만에, 수나라는 30만 대군을 조직해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그야말로 신속하기 이를 데 없는 대응이었다.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조직하고 각종 물자를 조달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612년, 제 2차 전쟁 때 수나라의 양제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하고도 1년이 지나서야 실질적인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문제가 30만이라는 대군을 일으키는데 불과 석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수나라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수나라의 문제는 왜, 고구려와의 전쟁을 원했던 것일까?



(3) 수 문제의 왕조의 정통성 확보

     분열돼있던 중국을 400년 만에 통일하는 업적을 이뤘지만, 문제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원래 북주의 왕 정제의 외할아버지였던 그는, 어린 나이의 정제를 대신해 실권을 휘두르다가 581년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때문에 집권 초기에는, 수많은 비판과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자치통감>에는 문제의 등극과정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황제는 본래 공덕이 없는 사람으로, 천하를 사취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문제는 신하들에게조차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 대부분이 북주 왕조에서 문제와 같은 서열에 있었기 때문에, 반감이 더욱 컸던 것이다. 당시 수나라의 명문 귀족 양소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천자로 칭했다고 전한다. 당시의 귀족들 간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때문에 문제는,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통일왕조의 위엄을 과시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장안에 새로운 성을 건설한 것도, 이 같은 노력의 하나였다. 581년 수나라를 세우고 장안에 도읍한 문제는 이듬해부터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지금은 장안성이라 불리는 대흥성이다. 수 문제는 북주에서 수를 세운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새 수도를 지었다. 또 전국을 통일하고 국가가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옛 직함 대흥공을 따서 대흥성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또 문제는 594년, 서른 권에 이르는 <황수영감지>를 편찬하게 한다. <황수영감지>는 민간가요와 불경 등에서 신왕조의 정통화 논리를 추려 모으고 수나라의 정치적 이상을 집약해놓은 책이었다. 왕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문제가 택한 또 하나의 방법은 대외 원정이었다. 수나라를 세운 이후, 문제는 돌궐, 거란 등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전쟁을 통해 왕조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신망을 얻고, 신하들을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대외 원정 사업의 마지막에, 고구려가 있었다. 수나라의 중국 통일 전까지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으로 군림해온 나라 고구려를 정복한다면 수나라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할 수 있을 터였다.


당시에 고구려는 막강한 나라였다. 아직까지는 직접적인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돌궐이 이미 수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던 셈이다.

- 왕소부 교수(북경대 사학과)


     이 같은 분위기에서, 수나라와 고구려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598년 6월, 고구려가 영주를 공격한지 석 달 만에 수 문제는 넷째아들 양량과 개국공신 고경 등을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한다. 병력의 수는 무려 30만! 국력을 총동원한 대공세였다.

 

604년 수 양제가 즉위하자 고구려 정벌론이 다시 대두하게 되었다. 양제에게 고구려 원정의 명분을 제공해 준 것은 백제와 신라가 수에게 고구려 출병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즈음 한반도 안에서는 한강 유역의 지배권 쟁탈을 둘러싸고 삼국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 무왕(武王)이 607년에 사신을 수에 보내 고구려 출병을 요청하였다. 다음해인 608년 신라의 진평왕도 수에 고구려 원정을 제의하였다. 이에 수 양제는 고구려 정벌에 대한 명분을 가지게 되어 고구려 정벌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에 앞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대공사를 벌인다. 그리고 대대적인 신무기 개발을 명령하였다. 당시 개발된 공성무기에는 소차, 전호피차, 발석차, 운제, 당차, 팔륜누차 등이 있었다. 소차는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이면서 성안의 동태를 살피는 정찰용 차량이다. 전호피차는 성벽 가까이에 접근해서 땅을 팔 수 있도록 만든 장갑무기이다. 터널을 만들어서 성안으로 몰래 진입하려 한 것이다. 발석차는 수백가닥의 줄을 한꺼번에 잡아당겨서 거대한 돌을 날려 보내는 무기이다. 운제는 높은 성벽을 오르기 위해 40미터의 사다리를 펼칠 수 있도록 고안한 무기다. 당차라는 강력한 무기도 개발됐다. 당차는 거대한 쇠망치를 앞뒤로 흔들어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한다. 또 수십 명의 군사가 함께 싸울 수 있는 팔륜누차도 개발했다.

     그리고 610년 1월에 대운하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동도의 낙양을 중심으로 북쪽은 탁군, 남쪽은 여항에 이르는 전장 2천Km의 남북을 연결하는 대공사로, 이를 통하여 전국 각지에서 소집된 군사들과 전쟁물자들이 탁군으로 소집되었다. 이러한 4년여의 준비 끝에 612년 정월 113만 3천 8백 명의 대군이 탁군을 출발했다. 군량을 수송하는 인원은 그 2배에 달하였다고 한다.

 

수양제의 정벌군은 3월 14일 요하에 도착하였다. 요하를 건넌 수양제가 요동성을 포위하자 고구려 군은 성문을 닫고 굳세게 수비하는 농성작전에 들어갔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항복을 가장하여 수군의 공세를 일단 완화시킨 다음 전투력을 재정비하여 다시 수군에 대항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의 장수들은 양제로부터 독단행위를 금한다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므로 상황에 따른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재량권이 부족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두세 차례 되풀이하면서 고구려 군은 거의 2개월 동안을 버티어냈다.


요동성 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수의 해군은 총사령관 내호아의 지휘 아래 황해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612년 6월 고구려 군과 접전하게 되었다. 고구려 수군사령관 건무(建武 : 영양왕의 아우로 영류왕)는 수적으로 우세한 수의 해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유인작전으로 격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해전을 피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온 수군을 평양성 60리 밖에서 저지하다가 평양성으로 후퇴하면서 외성 안의 빈 절에 500여 명의 결사대를 매복시켜 지상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초의 승리에 도취한 수의 해군은 정예병 4만 명을 선발하여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해군만의 단독공격을 감행하였다. 고구려군은 별도로 1개 부대를 출동시켜 내호아의 공격군과 접전하면서 고의로 패주하였고, 이에 내호아 군은 패주하는 고구려 군을 추격하여 평양성 외성 안에 들어가 흩어져서 약탈을 자행하고 전리품 탈취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매복 중이던 고구려 군이 수군을 급습하였고 약탈에 정신이 팔린 수군은 기습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참패를 당한 수군은 철수하여 다시는 상륙작전을 감행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수의 육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수 양제는 요동 전선의 교착과 수군의 결정적 패배로 고구려에 대한 수륙협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 수도 함락을 생각하게 되었다.


좌·우 24개 군 가운데 후방 예비대 9개 군으로 평양을 직접 공격하는 별동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예비대는 전투로 인한 손실을 입지 않아 결정적 시기에 작전에 투입시키려는 최정예 부대였다. 별동대의 총사령관은 우문술이었고 총 병력은 30만 5천 명에 달하였다. 군량의 현지 조달이 불가능할 것을 예상하여 요서를 출발할 때 병사와 군마가 각자 1백일 동안 먹을 식량과 무기 및 천막 등을 한꺼번에 지급받는 바람에 1인당 3석에 해당하는 무게가 되었다. "식량을 버리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목을 벤다."고 엄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을 몰래 버리는 사례가 속출되어 압록강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군량이 거의 바닥난 실정이었다. 고구려에서는 적정을 살피기 위해서 을지문덕이 거짓으로 항복의사를 밝히고 적진에 들어갔다. 출정 당시 양제가 "만약에 고구려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즉시 사로잡아라."고 하였으므로 곧바로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위무사 유사룡이 굳이 이를 반대하므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우중문은 곧 후회하여 추격하자고 했으나 우문술은 군량이 거의 떨어진 상태이므로 철군할 생각이었는데 우중문이 노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능히 소적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대하시겠소!" 하고 질책하였다. 처음에 양제는 우중문의 지략이 뛰어나다 하여 전군의 지휘관에게 그의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지휘권만이 우문술에게 있었으며 실제적인 작전 지휘권은 우중문에게 줌으로써 일사불란한 지휘권을 운영하지 못하고 나아가 두 지휘관의 불화마저도 노출되고 있었다. 우문술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아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기 시작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들이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알고 수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기 위해 접전할 때마다 고의로 패주하는 후퇴작전을 전개하였다. 우문술군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번번이 승리하자 승리에 도취되어 계속 추격, 살수(撒水: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밖 30리 지점에서 산을 의지하여 영채를 설치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장 우중문을 조롱하는 시 한수를 지어 보냈다.


神策究天文 그대의 신기한 전략은 천문을 알았고,

妙算窮地理 기묘한 계책은 지리를 통달했네.

戰勝功旣高 싸움에 이겨 공은 이미 높았거든,

知足願云止 만족할 줄 알아 이제 그만 그치시오.


이에 우중문도 답서를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의 뜻을 전하였다. 고구려 군이 성벽에 항복의 깃발을 세워놓고 "5일 말미를 주면 국가의 문서를 정리해 가지고 나가서 따르겠다." 하기에 수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5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거듭 독촉했더니, 다시 10여 일이 지나 고구려군은 "내호아의 수군도 참패당하고 식량도 바닥이 났을 터인데 그대들은 무엇을 바라고 또 기다리는가?" 하더니 요해지를 점거하여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우문술군은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들었음을 깨닫고 철군을 단행하였다.


우문술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방진(方陣)대형으로 행군하였다. 수군은 싸우면서 퇴각하여 동년 7월 24일 살수에 도착하였다. 병력이 절반쯤 도강했을 무렵, 고구려군은 도하중인 수군의 후면을 급습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의 전군은 일시에 무너졌고 산산이 흩어져 도망하고 말았다. 결국 퇴각 끝에 요동에 귀환한 병력은 겨우 2,700명이었으며, 병기와 장비를 비롯하여 기타 군수품 일체를 모조리 ?어버렸다.


내호아의 수군은 8월 중순경에 우문술의 육군이 참패당했다는 소식과 귀국명령을 듣고서 함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퇴각하였으며, 8월 25일에는 크게 진노한 수 양제가 총사령과 우문술을 위시해서 패전한 장수 전원을 결박해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우문술은 그의 아들 우문사급이 양제의 딸 남양공주의 사위라는 인연으로 죽음만은 면해서 서인이 되었다. 장군 우중문은 패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옥중에서 분사하였다.

 

수 양제는 제 1차 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613년 정월 2일 조칙을 내려 천하의 군사를 모두 징발하여 탁군에 집결시키고 요동에 있는 옛 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1차전의 패전책임으로 폐서인이 된 우문술을 재등용하여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준다는 뜻에서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2차전의 작전계획은 기본적으로 1차전과 동일하여 육군과 해군이 공동으로 평양성을 협공하는 것이었지만 1차전의 작전과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었다.


첫째, 평양성 직접공격과 함께 이 공격로 선상에 있는 고구려의 각 성을 각개 격파하는 작전이었다. 이는 공격 시에는 안전한 병참선을 확보하고 후퇴 시에는 안전한 퇴각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둘째, 일선 지휘관들에게 상황에 따라 적절히 처리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하였다. 셋째, 고구려의 장점이 산성에 의존하는 청야입보 전술임을 간파하여 고구려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특수 장비와 특수 인원을 준비하였다. 특수인원은 건장한 인원 중에서 엄선된 자원병으로 특수부대를 편성, 특수 임무시 동원하였고, 특수 장비로는 비루당(飛樓糖), 운제(雲梯), 충제(衝梯), 지도(地道)와 같은 공성무기를 총동원하였다. 비루당은 성 안을 탐지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다락을 얹은 수레로 그 위에 높은 사다리를 걸어놓았으며, 운제는 성을 오르는 데 사용하는 사다리, 충제는 성안을 들여다보고 공격할 수 있는 15장(丈)이나 되는 장대이며, 지도는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는 장비였다. 넷째로 육군은 고구려 공격로를 2개로 선택하였다. 한 공격로는 부여도를 거쳐 신성(新城: 요녕성 무순)을 공격하며, 다른 공격로는 요동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해군은 단독행동을 금지하고 육군과 평양성 수륙공진을 위해 출동 대기상태로 준비시켰다.


수군은 3월 4일 동경인 낙양을 출발하여 4월에 요하를 건넜다. 우문술이 지휘하는 수군은 공성무기를 총동원하여 요동성을 효과적으로 공략하였으나 2개월이 지나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새로운 공성무기인 누거(樓車)를 만들어 진격하려고 할 찰나 중국 본토에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게 되었다. 이에 병부시랑(兵部侍郞:국방차관) 곡사정이 평소부터 양현감과 교분이 두터웠던 관계로 불안한 나머지 고구려로 망명하고 말았다. 반란보고를 받은 수양제는 5월 28일 군대를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구려군은 망명해 온 곡사정의 제보로 수군이 퇴각한 것을 알았지만 유인작전의 가능성으로 즉시 추격하지 못하다가 2일이 지난 후 비로소 수천 명으로 철수하는 수나라 군대의 후미부대를 공격하여 수천 명을 사살하였다

 

수 양제는 양현감의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두 차례에 걸친 대원정으로 인한 민생의 어려움과 반란군이 일부 잔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제는 두 차례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함으로써 크게 수치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고구려 원정에만 관심을 쏟아 양도와 강남에 각각 10만군의 반란군이 세력을 떨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14년 2월에 고구려 원정론을 내놓았다.


3차 전쟁의 작전계획 역시 수륙협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1·2차전과는 달리 요동성 점령에 중점을 두어 해군이 평양으로 직접 공격하지 않고 우선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육군 작전을 지원한 후 평양을 공격토록 하였다. 수의 육군은 동원정비에 시간을 허비하여 요하를 건너기도 전에 여름 장마철을 맞이하였다. 예상치 못한 장마로 인해 평양에 대한 협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양제는 회군을 결심하고 그 명분을 찾고 있었다. 사실 고구려 측에서도 해마다 수군을 맞이하여 전 국력을 기울여 싸우다 보니 지쳐있었다. 양제가 3차 원정에 나서자 고구려는 사자를 보내 국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망명해 있던 곡사정을 수나라로 되돌려 보냈다. 이에 양제가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의 화해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어 수나라 군대는 회군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수나라는 598년의 임유관 전투로부터 614년의 수 양제의 3차 전쟁에 이르기까지 17년 동안 네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막강한 국력을 기반으로 한 수의 군사력에 비해서 고구려의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열세하였다. 수나라군은 수적인 절대적 우세와 고구려 군에 못지않은 정예병을 동원시키고도, 수나라군의 장점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함으로써 전쟁에서 매번 패하고 말았다.


수의 패전 원인은 첫째, 작전지휘계통의 확립을 소홀하게 한 점이었다. 일선 지휘관에게 작전에 필요한 권한을 위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앙 통제식으로 작전을 지휘함으로써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또한 지휘권을 위임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양분시킴으로써 지휘의 통일을 기하지 못하고 전투력의 분산을 자초하고 말았다.


둘째, 병참보급의 지원이 원활하지 못했다. 대규모 병력에 필요한 군량을 장거리에 걸쳐 지원하는 수송 작전은 전쟁수행과 직결된 문제였다. 수나라는 사전에 대운하를 이용, 군량을 전진기지에 비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군량을 전선에 보급하는데 있어 함선과 같은 대량운송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수레와 같은 소규모 수단에 의존함으로써 단기작전 위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고구려군의 청야입보 전술은 수군에게 군량의 현지조달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군량부족은 수나라 패배의 큰 원인이었다.


이에 반해 고구려의 승리 요인 중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견고한 산성 축조술의 발달이다. 대체로 성을 단위로 한 고구려의 지방행정능력은 고도로 발달하여 평·전시를 막론하고 주민통제가 철저했다. 게다가 오랜 전쟁경험을 토대로 군사요충지에 견고한 성을 구축하고 전쟁에 대비해 식량과 군수물자를 항상 비축하고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백암성 성벽은 높이가 높은 성벽 4~10미터, 원래의 높이는 15미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릉지역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백암성은 가장 높은 곳에 총 지휘소인 장대를 설치했다. 성 내부는 반 구릉 지대로 한쪽 면은 태자하를 끼고 있고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백암성의 다른 한쪽은 200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고구려의 성은 이렇게 최대한 자연지형을 이용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성은 축성법도 독특했다. 성벽아래는 마치 계단처럼 차곡차곡 안으로 돌을 들여 쌓고 있었다. 성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성벽을 넘어오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 성은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치. 백암성은 60미터 간격으로 거대한 치가 설치돼 있는데, 치의 간격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것이다. 적군이 성벽을 오르면 고구려 군은 곧바로 공격에 나선다. 치가 설치된 성에서는 세 방향에서의 공격이 가능하다. 성문 진입이 어렵다는 점도 고구려성의 특징이다. 성문은 반원형 성벽으로 감싸여 있고, 그 안에 들어온 적군은 꼼짝없이 갇힌 채 화살공격을 받게 된다.


이 산성들을 중심으로 대중국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제 1방어선은 요하 유역과 요동반도 남단에서 동북으로 뻗은 천산산맥 방어선이었다. 요서 10성, 무려라성, 요동성, 신성, 안시성, 건안성 등이 대표적인 산성들이다.


제 2방어선은 압록강 선상의 산성들로 수도로 침입하는 적들을 막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하여 적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에 이용된 산성들이었다. 오골성, 박작성, 오녀산성, 위나암성, 백마산성, 국내성 등이 대표적인 산성들이었다.


제 3방어선은 수도방위를 위한 산성이었다. 평양의 대성산성은 내성, 외성, 나성의 3중으로 견고한 성곽을 축조하여 최후의 방어선으로 저항하였다.


둘째로는 우수한 군사전술을 들 수 있다. 고구려가 산성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이 청야수성전술이었다. 고구려는 수성전술뿐만 아니라 적의 본거지를 날랜 말로 달려 치는 원거리 기동습격전도 감행하였다. 또한 평상시 첩보전술을 통해 적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획득하여 전쟁에 대비하였고 위기의 상황에서는 임기응변적인 기만전술을 사용하여 위기를 극복하였다. 셋째, 고구려는 전쟁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고구려는 요동과 한강 유역의 2개의 전선을 회피하기 위해서 백제 및 신라와 적절한 동맹을 맺어 남방전선을 안심시켰다. 수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화·전 양면정책을 추진하여 전쟁을 위한 방비책을 준비하였다. 넷째로 군사 지휘관들의 탁월한 작전 지휘능력을 꼽을 수 있다. 각 성의 성주는 관할지역내의 작전에 독립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어서 전황의 추이에 시기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의 일반 민은 군과 다름없이 말타기, 활쏘기 등과 같은 기술에 숙달되어 있었다. 험준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인은 생활수단이 대부분 수렵활동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기술에 잘 숙달되어 있어 유사시 단결된 힘을 발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