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미국의 독립 - 독립전쟁(1)

구름위 2013. 1. 1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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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전쟁의 본말(本末)

 

(1) 토마스 페인과 상식(常識 - Common Sense)

 

물과 숲과 건물이 어울러진 필라델피아영국계 이주민들이 세운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은 영국을 조국(祖國)으로보지 않고 적국(敵國)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조국이 적국으로 바뀐다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일도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많은문제들을 내포하고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 제 2회 필라델피아 대륙회의가 열렸을때까지만 해도 식민지 미국인들은 본국 처사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는 없었다.

 

이를 즈음 결코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인권을 내세우며 영국에 저항하는 것 보다는아예 독립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토마스 페인(Paine, Thomas / 1737 ~ 1809)은 상식(常識- Common Sense)이라는 소책자를 통해서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삽시간에50만부 이상팔려 나가면서 많은 미국인들의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고, 독립선언서에는 그가주장했던 많은 것이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페인은 벤자민 프랭클린 만큼이나 복잡한인물이다.

 

페인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다. 잉글랜드의 노퍽에서 퀘이커교도인 아버지와영국 국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교육은 겨우 읽고 쓰고 셈할 수 있는 정도에서 끝내야만했다.

 

13세 때 아버지와 함께 가업(家業)인 코르셋(corset)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으나실패하였고, 그 후 여러 직업을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두 번의 결혼도 역시 실패,.....하는 일 마다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주변의 눈치하나 살피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서슴없이 쓰는글솜씨 만은 대단해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충분했다.

 

그러나 사업, 직장, 결혼에 실패한 페인이 영국에서는 건달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비판적인 그의 글도 영국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페인이 런던에 머물고있던 벤자민 프랭클린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새로운 행운을 찾아 1774년 11월 30일 미국의 필라델피아로건너가 펜실베이니아 매거진(Pennsylvania Magazine)에서편집 일을 거들었다.

 

1776년 1월 10일 커먼센스를 발간하여 독립을 부추겼고, 독립전쟁이일어나자 페인은 자원입대하여어느 장군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그가 독립파들에게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1776~ 83년 사이에 펴낸 위기(The Crisis)라는 16편의 논설이다. 조지 워싱턴의부대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던 1776년 12월 19일, 미국의 위기 제1호(The American Crisis, Number 1)를 출판,"지금은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기다.....싸움이 격렬할수록 승리는 빛난다"라는 열렬한 표현으로 시작된이 논설을 워싱턴은 모든 군인들에게 읽으라고 명령할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고한다. 그리고 16편 모두에 커먼센스(상식)라는 서명을 붙였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 강력한 연방정부의 구성을 주장하더니, 1787년 4월에는 어느 강에 놓을 단일 아치교를 만들기위해 런던으로 건너갔다. 그가 런던에 머무는 동안 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그의관심은 다시 프랑스혁명에 집중되었다. 영국의 피트 내각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일으키려하자그는 익명으로 전쟁은 "세금을 증대시키려는 단 하나의 분명한 이유"라며 이를반대하는 글을 썼고, 아메리카 식민지의 과세에 반대했던 에드먼드 버크(Burke, Edmund/ 1729 ~ 1797)가 프랑스 혁명의 과격화를 경고하자 이에 반박하여 91년 인간의 권리(Rightsof Men) 1부를, 이듬해 2부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등 기존의 사회체제 전반에 대해서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것이 반란선동죄가 되어 기소되자 프랑스로피신,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직접 혁명에 가담했다. 국왕 루이 16세의 처형을반대했다가 감옥에 가게 되었고 옥중에서 다시 이신론적(理神論的) 입장에서 이성의시대(The Age of Reason) 1부를 집필, 출옥 후 2부를 집필하여 마무리 하였으나 무신론자라는비판을 받았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갔으나 미국에서도 지난날의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가아니라 추악한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는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홀대 받고 일생을 마감했다.

 

페인은 영국인도 미국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국제인이라할 수 있고, 직업 또한 작가, 사상가, 정치가, 저널리스트, 관리, 회사원 등 매우화려하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고, 과격한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부담을 동시에 주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각양각색이다.

 

"독립혁명에는약간의 선행도 있었으나 많은 해악을 끼치면서 오래 살았다"라는 것이 그에대한 미국의 평가이고, 영국에서는 인간의 권리라는 그의 글은 영원히 금서목록으로지정해 버렸을 정도로 그를 혐오했으며, 프랑스에서는 무신론자라는 오명까지 덮어썼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인간을 평가하는 잣대는 달라진다. 그가 죽은지 128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1937년 1월 30일자 런던 타임즈(The Times)는그를 가리켜 영국의 볼테르라고 칭송했고, 1952년 미국의 뉴욕대학교영예의 전당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미국의 독립이 식민지에 대한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것은 기존의 제도가 근본적으로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인이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거나 사업에 성공하여 돈 많은 상공업자거나플랜터가 되었다면 그의 주장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개혁이란 손해를 감수하기 위해서가아니라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 내지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혁명이라 해서 이와다를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2) 독립파와 왕당파

 

독립의 선언, 말은 그를 듯 하지만 이 새로운 변혁에서 얻는 것이 있는가 하면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이런 이해득실을 두고 크게는 13개 주가 작게는 개인이저울질을 하는 것은 미국 사회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패트릭 헨리(Henry, Patrick / 1736 ~ 1799) 처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달라"고 외치는 적극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립자체를 아주 부정적으로보는 사람도 있었고, 그저 남의 집 불구경하듯 관심없는 사람도 많았다.

 

편의상 적극적으로 독립을 추진했던 애국자들을 독립파(獨立派 - Independents)라하고, 그반대 입장에 섰던 사람들, 이를테면 영국군을 지원했거나 무기를 들고 미국의 독립군과싸운 미국 사람들을 영국왕을 지지했다 해서 왕당파(王黨派 - Royalists)라 부른다.식민지가 독립을 하게 된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생각이같을 수는 없다.

 

상대적으로 식민의 역사가 긴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에서는 단연 독립파가 우세했고,노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에서는 영국과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왕당파가 우세했다.퀘이커교도(Quakers)와 독일계 신비주의자들이 많았던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전쟁자체를싫어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나머지 주에서는 사태를 예의(銳意) 주시하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뉴잉글랜드나 버지니아의 모든 주민이 독립파도 아니고 조지아의 주민이라해서 모두가 왕당파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누가 누구 편인지를 획일적으로 분간하기란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독립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는가?

 

독립전쟁이 시작된 1775년 당시의 13개주 총인구가 300만이라고 가정하면, 이가운데 약 40%인 약 120만명이 독립파라 할 수 있고, 그 독립파 120만 가운데 1/5에해당하는 24만명 정도가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 후세의 추론이다. 실제로총사령관인 워싱턴 휘하의 전투병력이 부상병을 포함해서 1만 6천명을 넘지 않았다고하며, 반대로 영국군에 봉사한 식민지인들은 4만을 넘었다고 한다.

 

따라서 전투는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정면으로 충돌하면 패배하기 일수였고기습공격하면 승리의 확률이 높았으나 게릴라전과 같은 기습만으로는 전쟁에 이긴다는보장도 없고 장기전에 대비한 준비도 부족했다. 이렇게 되면 민심은 냉정할 정도로돌아서 버린다. 독립선언이후에 갑자기 왕당파가 오히려 증가했다는 것도 이를 반증한것이다.

 

여기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세력을 왕당파라 하기 쉬우나 그렇지 만은 않았다.왕당파 가운데는 밀수로 돈을 번 사람도, 영국의 규제로 피해를 본 제조업자도, 청교도를비롯한 신교도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법률가나 저널리스트, 돈 많은 상인, 대지주들이여기서는 왕당파로 저기서는 독립파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도 흥미있는 사실이다.예컨대 뉴욕의 대지주들은 대개가 왕당파였고, 버지니아의 대지주들은 대부분이 독립파에속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형편에 따라서 이쪽 저쪽을 넘나들고있었다.

 

구태여 이를 구분한다면 독립파란 완전독립이란 변인(變因)을 매개로 새로운 기회를포착할 수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이주 역사가 짧아 확실한 기반을 갖지 못한새로운 이주자들, 영국과의 거래에서 직접관계가 없는 상업자본가나대지주를 위시해서 전문직의 종사자, 소상인, 프리홀더, 수공업자, 공장과 농장의노동자, 젊은 법률가와 저널리스트가 많았다는 것이고, 반대로 왕당파란 이미 기회를잡은 사람들, 즉 총독이나 관리 및 영국국교회 소속의 성직자들과 그 추종자들, 그리고영국의 자본이나 거래에 의지하고 있던 상인, 플랜터, 수공업자 등과 무질서를 두려워했던부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3) 독립군의 승리와 파리조약 체결

 

어려운 사정은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전쟁터가 대서양 건너 아득히 먼곳에 있었고,전선(戰線)이 1천 마일이나 펼쳐 있었기 때문에 천방 지축 뛰어다녀도 당시의 기동력으로서는전부를 감당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반면 미국의 군대는 해군도 없었고 장비와 인원, 조직에서 열세지만 언제 어디서나쉽게 군을 편제할 수 있는 기민성과 현지 지리에 밝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비록 독립을 반대하는세력도 만만찮았지만 새로운 조국의 건설이라는 명분과 용기도 있었다.

 

이런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미국의 독립전쟁은 1777년 뉴욕의 오지(奧地) 새러토가전투(Saratoga, Battles of)에서 승리하여서광이 보이기 시작했고, 1781년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전투(Yorktown, Battle of)에서승리함으로서 최종 마무리되었다.

 

당시 영국의 군대는 세 곳에 포진하고 있었는데, 북쪽에는 존 버고인(John Burgoyne/ 1722 ~ 1792) 장군이, 남쪽에는 리처드 하우(Howe, Richard / 1726 ~ 1799)장군이,서쪽에는 배리 세인트 레거라는 대령이 각각 맡고 있었다. 북쪽을 맡고 있던 버고인장군은 미국의 캐나다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자 여유가 생겼다. 더 이상 캐나다에많은 병력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버고인은 세 곳의 군대가 지금의 뉴욕의 주도(州都) 올버니(Albany)에 집결,여러 곳의 주민들로 구성된 뉴잉글랜드군을 분산 격리시켜 독립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겠다는작전을 세우고 1777년 자신의 부대를 센트로렌스 강 입구에서 남쪽으로 이동, 허드슨 강을 따라 포진하고있던 윌리엄 하우 경의 부대와 합세하여 병력이 약 8천명으로 불어났다.

 

존 버고인 장군의 영국군은 7월 6일 타이콘더로가 요새를 함락시키고, 7월 31일에는 허드슨 강 상류의 에드워드 요새를 장악했다. 천여명의병력을 타이콘더로가 요새에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한 후, 30일 분의 식량과 나머지 병력7천명을 이끌고 허드슨 강을 건너뉴욕의 새러토가 부근에 주둔, 호레이쇼 게이츠(Gates, Horatio - 1729 ~ 1806) 장군이거느리고 있는 1만 2,000명의 미국군과 대치했다. 약 6.5㎞의 거리를 두고 양측이맞서게 된 것이다.

 

하찮게 생각했던 미국군은 예상외로 강했고, 매일같이 증원군이 늘어나 숫자도불어났다. 겨우 30일분의 식량과 군수물자를 준비했던 버고인으로서는 초조하지 않을수 없었다. 정면 돌파를 시도한 버고인은 9월 19일 부대를 남쪽으로 이동, 프리맨스팜에서미국군과 전투를 개시했으나 게이츠가 만들어 놓은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했다. 이 전투를 프리맨스팜전투혹은 제 1차 새러토가 전투라고 한다.

 

프리맨스팜 전투에서 실패한 버고인은 올버니 방면으로 진격, 그러나 10월 7일 그는 1,500명의 병력을이끌고 정찰에 나섰다가 베네딕트 아널드(Benedict Arnold/ 1741 ~ 1801)연대의 미국군의 격렬한 반격을 받았다. 이 전투를 베미스 고지 전투혹은 제2차 프리맨스팜 전투 또는제2차 새러토가 전투라고 한다.

 

이 무렵 버고인의 부대는 실전병력이 약 5천 명으로 줄어들었고 보급품도 바닥나고 있었다. 10월 8일버고인은 퇴각을 시도했으나 이 당시 2만 명으로 병력이 늘어난 게이츠 부대는 새러토가에서 그를 포위한발도 움직일 수가 없게 만들었다. 이 무렵 영국군의 하우 장군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싸우고 있었고, 배리세인트 레거 대령은 뉴욕 오리스카니에서 패한 뒤 서쪽으로철수해 버렸기 때문에 버고인을 지원해줄 수 없었다

 

고립무원의 버고인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1777년 10월 17일 새러토가 스프링스의 북부에서버고인은 미군 사령관 게이츠와 새러토가 협정을 맺고 항복했다. 이 협정에 따라 그의 부대는 전쟁기간중 다시는 북아메리카에서 복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영국 귀환을허락받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서 심한 비난을 받았다.

 

베미스고지 전투의 영웅 미국의 베네딕트 아널드 장군은 이 전투에서 한쪽 다리를쓸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었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도 받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군사 기밀을 영국에 팔아 넘겨 미국에서는 그의 이름이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고, 영국으로 망명했으나영국에서는 부하를 궁지에 몰아넣고 혼자 도망쳐 나왔다고 해서 역시 사람 대접을받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은 이곳에 새러토가국립사적공원(Saratoga National Historical Park)을만들어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어쩠거나 새러토가 전투에서 미국군의 승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지금까지 관망자세로 있던 프랑스가 새러토가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공공연한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다가,78년에는 미국과 프랑스가 동맹을 체결하여 전쟁은 프랑스가 가담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으며80년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가 무장중립동맹을 결성, 영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함으로서영국은 고립되었고 미국은 독립을 성취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독립전쟁의 결정적인 마지막 전투는 1781년 9월,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서 막이올랐다. 당시의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Cornwallis, Charles / 1738 ~ 1805)는 남부지역에서잇단 전투로 전력이 크게 소모되자, 해안을 따라 1781년 5월 노스캐롤라이나의 윌밍턴에서 버지니아의 피터즈버그로 부대를이동했다.

 

그러나 피터즈버거 역시 안전지대는 될 수 없었다. 프랑스의 라파예트 장군 휘하 대규모 대륙군(미국과프랑스의 연합군)의위협에 못 이겨 처음에는 리치먼드로, 다음에는 윌리엄즈버그로 퇴각했다가, 7월말경에는 요크타운에 이르러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8천명의 라파예트군은 탈출 가능한 육로를 모두 차단하고 콘월리스를 고립시켰다.

 

콘월리스 예하의 7천 병력으로서는 이를 당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한가닥희망은 있었다. 영국 해군의 증원부대나 구조함대가 곧 오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해군이 없었던 전쟁초기와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영국 해군이 바다를 누비고 다닐 때, 해군이 없는 미국으로서는 속수 무책으로 보고만있었지만 프랑스가 전쟁에 참가하여 프랑스 해군이 출동, 해상의 방어능력이 강화되었으며빈약하지만 미국도 해군을 창설했다.

 

실제로 그라스 백작이 지휘하는 24척의 프랑스 함대가 서인도제도를 경유, 전략적으로 중요한 체서피크 만 해역을 장악했다.이러한 해군의 엄호 아래 조지 워싱턴 장군은 8월말에서 9월에 걸쳐 7천 명의 프랑스- 미국 연합군 추가 병력을 이끌고 요크타운 반도에 있는콘월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뉴욕에서 버지니아로 진군했다.

 

한편 토머스 그레이브스제독이 이끄는 소규모 영국 함대는 버지니아 곶 전투에서 우세한프랑스 해군에 밀려 뉴욕으로 되돌아갔으며, 뉴욕으로 돌아간 그레이브스는 영국군의 헨리 클린턴 장군과 전략을 숙의, 7천명의 영국군을 태우고 10월 17일 버지니아로 출항하여 요크타운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때는 늦었다.

 

요크타운에 고립된 콘월리스는프랑스 함대와 1만 6천 명의 연합군 지상군으로부터 포격을 받고 10월 19일 전병력을 이끌고 항복해버렸다. 이런 일련의 작전을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라고도 하고, 요크타운포위전(Siege of Yorktown)이라고도 한다.

 

전투건 포위전이건 요크타운에서의 승리는 아메리카독립전쟁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 결과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Paris, Treatiesof)이 체결되어 영국은 미국의 완전 독립을 승인하고 캐나다와 플로리다를 제외한미시시피강 이동(以東)의 땅을 미국에 할양하였다.

 

(4) 왕당파의 몰락

 

파리조약은 아메리카 독립이라는 선물을 주었지만그와 함께 또 다른 변수(變數)들이 다음 수순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의 독립이라는것도 자체적인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외세가 개입함으로써 최후의승자가 될 수 있었고 이런 영향을 받아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독립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영국은 미국의 독립은 한사코 막을려고 했지만 시장확대를 위해서 라틴아메리카의독립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프랑스가 미국을 지원한 것은 미국이 예뻐서가 아니라숙적 영국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그간 영국에게 당한 수모를 한꺼번에 갚아버리겠다는 심정으로 무리하게 전쟁에 뛰어 들었고, 소원대로 승리도 하였다. 그러나엄청나게 늘어난 부채에 비해서 얻는 것이라고는 프랑스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정도에그쳤고 실질적인이득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프랑스는 자존심 하나를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비용을소모한 셈이 되고 그 영향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센 물길 속으로 프랑스를밀어 넣었다.

 

1789년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1792년부터시작된 혁명전쟁(대프랑스 동맹전쟁)으로 다시 영국과는 전쟁 상태로 돌입하게 되었다.이 때 프랑스는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프랑스를 돕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의리인 동시에 보답이지만 영국과의 관계악화를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에는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따르게 마련이다.미국의 독립전쟁을 반대했거나 영국군에 가담한 이른 바 왕당파들은 설 자리를 잃고말았다. 독립파가 승리한 이상 그들 왕당파도 결코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방대한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미국이라는 특성이 여니 혁명처럼 체포, 투옥, 처형 보다는재산몰수나 자발적인 망명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났다.

 

전쟁이 일어나고 2년을 조금 넘긴 1777년 11월, 대륙회의에서는왕당파에 대한 재산몰수의 조치를 마련했고, 1782년에는 연방전체가 이 조치에 따랐다.그 사이 유력한 왕당파 5천 여명이 망명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들 왕당파 5천여명은 영국에 대해서 빼앗긴 재산 1천만 파운드를 배상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영국편에 섰다가 재산을 잃었으니 영국정부는 이를 책임지고 변상하라는 것이다.

 

왕당파가 많았던 중부지방을 전쟁기간 독립파는 아예적국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실제로 뉴욕에서는 3만 5천 내지 4만 명이 망명했고,펜실베이니아에서는 독립군의 숫자보다 망명자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래서망명자는 줄 잡아 8만 내지 10만 명, 당시의 인구가 250만 내외라고 간주한다면,뒤 이어 시작된 프랑스 혁명기간 2천 3백만의 인구 중 망명했거나 추방당한 숫자가12만 9천 명이라는 것과 단순 비교해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보따리를 쌓고 이들대부분은 캐나다로 몸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