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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독립- 독립전쟁(3)

구름위 2013. 1. 1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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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의 성립과 그 영향

 

(1)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Washington, George / 1732 ~ 1799)

 


미국의 독립은 단순한 독립이 아니라 근대 데모크라시를 이룩한 혁명이라 한다.

 

그렇다면 18세기 말엽,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을 전후한 세계사는 어떤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가? 상식 수준에서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에서는 1776년 3월 영조(英祖)가 83세의 고령으로 승하하고 25세의 청년 정조(正祖)가 즉위, 남인(南人)들이 정계에 복귀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한 이른 바 실학(實學)이 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청의 고종 건륭제(高宗乾隆帝)가 치세 40년을 넘기면서 윈난(雲南) 정복을 시작으로 그들이 남해(南海)라고 부르는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 중국 사상 최대의 지배영역을 가지게 되었고 희대의 역작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편찬되었다.

 

일본은 에도막부(江戶幕府)가 성립된 후 그들이 말하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융성하고 평화로운 겐로쿠시대(元祿時代 / 1688~1704)를 지나 10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 / 1760 ~ 86)가 조선과 청 그리고 네덜란드를 통하여 폭 넓은 문물을 수용하고 도시 상인들이 중심이 된 조닌문화(町人文化)가 난숙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겐로쿠(元祿)란 일본황실의 113대 히가시야마(東山) 천황의 연호를 말하며 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무라이 중심의 무단주의(武斷主義)가 후퇴함과 동시에 성리학에 따르는 유교적인 문치주의가 전개되고 일본특유의 봉건제도인 막번체제(幕藩體制)가 완성, 인형극과 가부키(歌舞伎)로 대표되는 일본 대중문화의 기틀이 형성되었다.

 

소위 일본역사에서 가장 융성하고 평화로웠다는 겐로쿠 시대는 또한 개들의 세상이었다. 개(犬)들이 사람보다 훨씬 높은 대접을 받았던 것은 일본사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었는데 1646년 병술(丙戌)년 개띠해에 태어난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는 개를 끔찍히도 생각하여 웃지 못할 소동이 일본전역을 누볐고 후세 그를 가르켜 이누고보(犬公方)라 불렀다. 개판이 된 이 시기에 일본문화가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것은 이해가 쉽지는 않지만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이름뿐이 무굴제국이 대영제국의 영화에 가려 빛을 잃고 있었으며, 서아시아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전날의 영광을 멀리하고 러시아에게 크림반도를 잃는 등 쇠락의 길로 치닷고 있었다.

 

유럽의 강자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래 거듭된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고 민생이 피폐하여 프랑스혁명의 전주(前奏)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계몽군주를 자처했던 독일의 두 맹주,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계몽이 한계에 부닥쳤거나 군주독재권을 오히려 강화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야심만만한 여걸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 1729 ~ 1796) 역시 1773년에 일어난 푸가초프반란 이후 현실주의로 돌아서 농노제가 더욱 확장되었다.

 

이런 시기에 아메리카 합중국이 탄생했다면 권력의 구심점인 대통령은 군왕(君王)의 길을 답습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왕위에 오를 것을 권고하는 추종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Washington, George / 1732 ~ 1799)은 카이사르(Caesar, G J)나 크롬웰(Cromwell, O)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건강과 미국의 장래를 생각해서 1796년 9월, 감동적인 고별사(Farewell Address)를 남기고 조용히 은퇴했다.

 

최고의 권력자라 할지라도 법에 따라 임기를 마치고 은퇴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상할 것도 없고 충격을 받을 만한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백 여년 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고 미국 아닌 다른 곳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소위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세계최초로 실현한 조지 워싱턴의 생애가 초기 미국사(美國史)의 단면이라 할 수 있고, 그를 이해하는 것이 독립 당시의 미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워싱턴의 가계(家系)는 청교도혁명으로 재산을 잃고 영국의 노샘프턴셔 주에서 가족을 이끌고 1657년 미국의 버지니아 식민지로 이주한 존 워싱턴을 시작으로 한다.

 

존의 손자 오거스틴은 버지니아에 많은 땅을 얻고 공장을 짓는 한편 철광 개발에도 관심을 보이는 등 큰 재산을 모았으며, 전처에서 네명 후처에서 여섯 명 도합 열명의 자녀를 슬하에 두었는데 조지 워싱턴은 오거스틴의 후처였던 메어리 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743년 4월 오거스틴은 슬하에 10 남매를 남기고 타계, 11살에 아버지를 잃은 조지 워싱턴은 이복형 로렌스 워싱턴의 집에서 얹혀 살았으나 아버지가 남긴 풍족한 유산과 이복형(異腹兄) 로렌스와 형수 앤(낸시) 페어팩스의 따뜻한 배려 속에 그의 성장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이루진 듯 하다.

 

미국이민 4세대(世代)가 되는 조지 워싱턴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교육은 불규칙하게 초등학교정도를 다닌 듯 하고 책에서 얻는 것 보다는 주변생활에서 담배재배와 가축사육 등 많은 것을 배웠다. 이런 과정에서 스스로 익힌 측량 기술 덕분에 버지니아의 측량기사가 되어 버지니아 동부의 저지대는 물론 서쪽의 미개척지를 널리 여행하기도 했으며, 부모 보다는 이복형과 형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복형 로렌스 워싱턴은 영국에 유학했고 영국 해군에도 복무하여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유망한 청년으로서 지역 유지인 윌리엄 페어팩스 대령의 딸 앤(낸시) 페어팩스를 아내로 맞았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교양 있는 여성이었고 로렌스가 부친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10.12㎢의 땅에 마운트버넌(Mount Vernon)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 C에서 남쪽으로 26 km, 포토맥강 서안에 위치한 마운트버넌은 행정상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에 속하며 로렌스 워싱턴이 세운 마운트버넌에 조지 워싱턴이 15살부터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로렌스가 왜 이복동생이며 이렇다 할 교육도 받지 못한 조지(George)를 마운트버넌의 자기 농장에 불러들여 같이 생활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 다만 어린 나이지만 영리하다기 보다는 매우 정직하고 성실했으며 예절바른 이복동생인 조지가 로렌스에게는 동생 겸 자식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귀엽게 여겼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1751년 로렌스는 결핵을 요양하기 위해서 조지를 데리고 마운트버넌을 떠나 서인도 제도의 휴양지 바베이도스 섬(Barbados I)으로 건너 갔고, 이것이 조지 워싱턴으로서는 미국을 떠나 외지로 나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752년 7월 간절한 기원과 극진한 간호도 아랑곳 없이 조지에게는 아버지나 다름 없던 로렌스가 끝내 결핵으로 쓰러졌다.

 

하늘 처럼 의지했던 형을 잃은 슬픔도 잠깐, 조지 워싱턴에게는 위기가 정말 기회로 바뀌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로렌스는 죽으면서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 새라가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 유산을 조지에게 준다는 유언을 남겼고, 일차 유산의 상속자인 새라 역시 2개월 후 죽었기 때문에 로렌스의 유산은 조지의 몫이 되었다. 이래서 조지 워싱턴은 20세의 젊은 나이에 버지니아에서 가장 훌륭한 농장의 주인이 되었다.

 

일개 측량기사에서 농장주가 된 조지 워싱턴은 그해(1752) 11월, 버지니아 총독으로부터 버지니아 남부 지구 민병대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군인으로서의 첫발들 들여 놓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뉴프랑스 군과의 전투, 프렌치 - 인디언 전쟁 그리고 독립전쟁에서 그의 탁월한 지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었는데,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로서는 위대한 전략가도 남다른 용기와 지혜의 소유자도 아닌 평범한 지휘관에 불과했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지장(智將)이나 용장(勇將)이었다기 보다는 덕장(德將)이라는게 옳은 평가라는 것이다. 어떤 작전도 혼자서 결정하지는 않았고 부하 장졸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에 따랐으며, 부모가 자식을 대하 듯 부하들에 대한 배려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이런 연장선에서 초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렌치 - 인디언 전쟁이 끝날 무렵인 1759년,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 식민지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진출하였고 명예 준장의 계급으로 전역, 곧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27세, 신부는 그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마사 댄드리지라는 남매가 딸린 미망인,....

 

마사 댄드리지의 전 남편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는 수많은 노예와 윌리엄스버그 근처에 60.7㎢나 되는 거대한 땅을 유산으로 남기고 죽었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은 마사 댄드리지와의 결혼으로 마운트버넌의 6배나 되는 새로운 토지가 그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들의 결혼이 정략인지 아니면 사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조화를 이루었고 결혼 생활은 대단히 행복했다고 한다.

 

이들의 결혼 당시 신부(新婦) 마사에게는 존 파크(재키) 커스티스라는 여섯 살 난 아들과 마사 파크(패치) 커스티스라는 네 살난 딸을 두고 있었고, 막상 조지 워싱턴과 마사 대드리지 사이에는 원만한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의 자녀도 갖지 못했다.

 

친자식이 없는 조지 워싱턴은 이 두 의붓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했다고 하는데, 이는 계부(繼父)로서의 정(情)인지 아니면 거대한 유산에 따르는 복잡한 상속문제가 그렇게 만들었지는 모르지만 의붓아들 존 파크는 독립전쟁에 참전했다가 4명의 자녀를 두고 전사하고 말았다.

 

조지 워싱턴은 의붓아들이 남긴 4명의 자녀 중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다시 입양했다. 친자식이건 의붓자식이건 자식은 자식이고 그 자식이 낳은 아들은 손자가 되는 것이 우리들의 풍속이고 상식이지만, 네명의 자녀 중 두명만 입양했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들 두명이 손자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입양되었다면 더욱 헷갈릴수밖에 없다.

 

이것 역시 조지 워싱턴이 의붓아들에 대한 배려인지 아니면 상속문제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 나라의 풍속이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장자상속제도가 미국에서는 이 시기에 이르러 완전히 폐지되었다.

 

1763년 영국이 왕명으로 앨러게니 산맥 이서의 출입을 금지하자 여러 경로에서 이해관계에 있었던 조지 워싱턴은 조바심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64년 영국 의회가 인지세를 비롯한 식민지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게 되자 국왕에게 충성했던 충직한 식민지인의 한 사람 조지 워싱턴의 태도는 달라졌다. 패트릭 헨리가 제창한 인지세 거부운동에 서명, 반대 투쟁에 나섰고 이때부터 그의 행동은 매우 적극적이고 급진적이었다.

 

73년의 보스턴 차 사건에 이어, 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제 1차 대륙회의가 열렸을 때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 11월에 버지니아로 돌아와 의용군의 지휘자가 되었고, 75년 5월 제 2차 대륙희의에 역시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 6월에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사령관에 임명된 것은 그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이유라고 하겠지만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 사이에 정치적 흥정이기도 했다. 뉴잉글랜드가 버지니아의 보호를 받는 대신 총 사령관 자리는 뉴잉글랜드가 버지니아에 양보했기 때문이다.

 

독립전쟁과 독립전쟁 후 그의 행적은 앞의 글 여러 곳에서 밝힌 바와 같다. 1789년 4월에서 96년 9월까지 그는 최초의 미국 대통령으로서 신생국가 미국을 이끌었다. 조지 워싱턴 행정부의 특징은 신중함과 조직적인 정확성, 그리고 분별있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아직도 국내에는 연방에 반대하는 다수의 세력이 있었고, 같은 페드럴리스트(연방파)라 할지라도 그 생각은 각양각색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앙트와네트가 처형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고, 이때 프랑스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를 두고 국내의 여론은 다시 둘로 갈라졌다. 앤티 페드럴리스트는 혁명프랑스를 적대시 하는 군주국 동맹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기본원리를 위협하는 데스퍼티즘(despotism - 독재주의)의 연합이라 했고, 페드럴리스트는 프랑스 혁명을지지하는 자는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자코뱅 당원(jacobins)이라 했다......이런 가운데 1792년 조지 워싱턴은 임기 4년의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현실적으로 미국이 프랑스 혁명에 개입하기에는 재정에 따르는 비용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짜낸 묘안이 이른 바 중립의 선언, 어떤 나라와도 호혜평등의 원칙에서 무역은 하되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1793년 4월 미국은 중립을 선언하게 되었고 이것이 이후 미국의 고립주의(isolationism - 孤立主義) 외교의 전통이 되었다.

미국으로서는 프랑스와의 우호증진보다는 영국과의 관계개선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영국군은

 

아직도 서부에 거점을 확보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독립전쟁으로 잃은 재산에 대한 변상과 영국인 투자가들이 회수하지 못한 국채, 은행주, 사채 등의 상환을 요구하였으며, 영국 해군은 합중국의 상선을 약탈하는 등 해상활동을 공공연히 방해하고 있었다.

 

워싱턴 정부는 94년 11월 제이조약(Jay Treaty)의 체결로 영국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조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미국 영내의 영국군은 철수하고 아울러 해상에서 합중국 상선이 영국해군에 입은 피해를 영국 정부는 인정하고 이를 배상하며, 미국은 영국인 채권자에 대한 독립 전의 부채를 상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미국의 조야에서는 다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명분은 굴욕외교라고 몰아 부쳤지만 아무래도 영국인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은 들어내 놓고 워싱턴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인간적인 비난과 체력의 한계를 느낀 워싱턴은 96년 9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감동적인 고별사(Farewell Address)를 남기고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후, 1797년 3월 마운트버넌으로 은퇴, 생애의 마지막 2년 반을 가족과 농장 경영 및 노예 관리에 바치다가 1799년 12월 14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때에 그의 나이 67세,...

 

"무엇 때문에 이만한 잇점을 버려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내 나라의 유리한 입장을 버리고 외국에 따라 가려 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들의 운명을 유럽문명의 일부분에 결부시켜서, 우리들의 평화와 번영을 유럽인의 야망, 항쟁, 이해, 기분 또는 부질없는 노고 등에 의해 손상시키는가....우리들의 참된 정책은 세계 어느 나라와도 영원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아메리카 독립의 영향


근대 데모크라시의 요체가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면 이를 가장 먼저 실현한 나라가 미국이다.

 

당시의 세계가 전제군주 내지는 절대왕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미국의 독립은 이런 껍질을 과감하게 배제하고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예고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앵글로 아메리카에서 독립 13개 주의 성립은 전근대와 근대라는 신구(新舊)의 두 세계를 명확하게 구분짓는 분수령이 되었고 자유주의 운동의 출발이자 구시대에 대한 일종의 경종(警鐘)이었다.

 

당시의 유럽 여러나라가 절대주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앵글로 아메리카에서는 각가지 장애물을 제거하고 독립운동을 추진, 인간의 기본권리를 확보하고 성문헌법을 기초로 해서 연방공화국을 세웠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충격이었다.

 

군주국가에서 공화국을 세웠고 단일국가에서 연방국가를 세웠으며 명령과 관습이 지배하는 낡은 체제에서 성문헌법에 입각한 전국적 정부 및 지방 정부를 세웠고, 이론적으로만 통용되던 주권재민의 새로운 지배체제를 세우는 등 당시의 세계에서는 매우 대담하고 급진적인 과업을 달성한 것이다.

 

비록 미국은 독립 후 대내적인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런 자유주의 운동은 곧 다른 세계에도 파급, 인근 캐나다 및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정치적 봉기의 명분이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원인 제공과 유럽 자유주의 운동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국에서 분리된 미국이 그들의 모국 영국 재건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앞에서 여러번 밝혔듯이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표하여 고전경제학이 출범했고 뒤이어 벤덤의 공리주의가 발표되어 영국적인 손익계산이 분명해진 시기가 된다. 자유방임이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이것이 국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던 애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벤덤의 공리주의가 이들이 지어낸 가공이거나 우연이 아니고 이미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국은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할 시점에서 미국의 독립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먼저 노예제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노예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의 채찍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일하는 피동적인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들의 노동생산성은 매우 낮고 제품의 질 또한 조악(粗惡)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면 노예제도를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다. 노예가 인간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은 것이 불상해서가 아니라 이런 제도로는 산업혁명이라는 변화되는 새로운 질서에 도움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앵글로 아메리카 북부에서 행해진 일련의 노예해방운동에 힘입어 영국에서도 노예제도 폐지를 반대했던 인사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노예폐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1787년에는 노예무역폐지위원회가 성립되었고, 92년 영국 하원에서는 노예무역폐지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때 마침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다가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베를린칙령)을 발표했던 이듬해가 되는 1807년, 영국의회는 다시 노예무역을 위법으로 결의했고 34년에는 대영제국 내부의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영국은 노예무역에 선봉에 섰던 나라다. 아프리카의 혹인들을 신대륙에 짐승처럼 끌고 가서 노예시장에서 매매하여 돈을 벌었던 화려한(?) 전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영국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했던 미국에 앞서 노예무역과 노예제의 폐지가 이룩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것은 다만 자유방임이라는 변화되는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을뿐 그들의 자비심과는 별 관계가 없다.

 

미국의 독립으로 보다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캐나다라 할 수 있다. 1763년 이전까지 오늘날의 캐나다에는 뉴프랑스라고 불리는 땅에서 프랑스계 식민인들이 프랑스에서 파견된 총독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같은 북미대륙에 위치했다는 것만 빼고는 뉴잉글랜드나 버지니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구축되고 있었고, 프렌치 - 인디언 전쟁 후에도 이곳에는 명목상으로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었으나 퀘벡법에 따라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계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프랑스계 캐나다에 미국독립 전쟁 때 미국에서 쫓겨난 6만 여명의 왕당파(반독립파)가 대거 망명, 대서양 연안에서 나이아가라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함에 따라 영국문화가 이입되었고, 이들이 다시 서쪽으로 진출하여 프랑스계 주민들과 잦은 마찰도 있었지만 미국을 잃은 영국에서는 캐나다를 새로운 식민지로 건설했다.

 

영국에게 캐나다를 빼앗긴 프랑스가 그 보복으로 미국의 독립을 지원한 것이 프랑스의 재정파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프랑스 혁명을 유발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부르봉왕조가 신흥세력인 부르주아지에게 굴복하지 않는 한 프랑스 왕정이 혁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지 않았다고 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부인권이니 주권재민이니 하는 것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나 프랑스의 인권선언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18세기 유럽,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던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었고, 이런 사상이 신대륙 미국에서 먼저 접목되어 아메리카혁명으로 승화되었다가 본고장 프랑스로 역수출되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