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발전 - 루이지애나 매입
가. 루이지애나 매입
1. 내우외환(內憂外患)
(1) 외국인 규제법과 보안법(Alien and Sedition Acts)
선진국이라 해서 양보와 타협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사회통합이나 정권교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선진국일수록 획일적인 국론의 통일은 어려우며, 지식인들이 많이 모인 회의일수록 안건(案件) 처리는 하대세월(下待歲月)로서 지지부진(遲遲不進) 하게 마련이다.
모든 것에 반대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은 보스(boss)가 이끄는 패거리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건강한 사회일수록 목소리는 다양하다.
신생국가 미국의 정치가 일인(一人) 내지는 과두(寡頭)가 지배하는 독재가 아니고 다수의 의견과 법과 제도에 따라 운영되었다는 것은 힘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평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1796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뒤를 이어 존 애덤스Adams, John / 1735 ~ 1826)가 2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178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조지 워싱턴의 경쟁자로 애덤스는 출마했지만 전체 선거인단 138명 중 겨우 34표를 얻어 대통령자리는 69표를 얻은 조지 워싱턴에게 돌아갔다.
당시의 연방 헌법에 따라 차점자가 된 애덤스는 부통령이라는 서열은 높으나 실권이 없는 자리를 8년간 지켰다가 96년 선거에서는 미국의 2대 대통령으로 피선되었고 이때 차점자인 토마스 제퍼슨은 부통령이 되었다가 1800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 미국의 3대 대통령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순서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조지 워싱턴 못지않는 당시 미국의 거물이었다. 매사추세츠의 브레인트리에서 태어나 이곳에 있던 대농장을 상속으로 물려 받았고 1755년 하바드대학을 졸업, 58년 보스턴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고, 29세 때인 1764년 목사의 딸인 애비게일스미스와 결혼, 처가의 후광으로 그의 변호사 사무실은 늘 분주했으며 많은 돈도 벌었다.
그가 변론을 맡은 사건 중에는 소위 보스턴학살(1770)에서 살인 혐의로 기소된 영국군 장교들을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열심히 변호하여 대부분 무죄 방면케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자칫 잘못하면 매국노라는 비난을 덮어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왕당파도 친영파도 아니며 철저한 독립파인 동시에 연방주의자(Federalist)의 한 사람이었다. 식민지 시절, 영국정부가 강요한 인지세법과 타운센드 제법(諸法)에 대한 반대의견을 몇몇 보스턴의 신문에 논설형식으로 게재(揭載), 반영운동을 주도했으며 매사추세츠 주 대표로 대륙회의에 참석, 75년 6월에는 독립선언문의 기초위원(起草委員)이 되고 조지 워싱턴을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추천하여 승인을 받았다.
변호사로서 보스턴에서 주로 생활했던 존 애덤스가 버지니아의 플랜터 출신인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추천한 것은 버지니아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시키기 위한 방편일 뿐 워싱턴의 군사능력을 믿었거나 돕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때까지 워싱턴은 존 애덤스와는 견줄 수 없는 새끼 호랑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름뿐이라고 생각했던 독립군의 총사령관의 자리가 독립전쟁 과정에서 부상함에 따라 대통령 선거에서 워싱턴에게 고배를 마시고 부통령에 머물다가 워싱턴이 물러난 후 대통령에 당선, 워싱턴 정부의 각료의 대부분을 유임시키고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워싱턴과 애덤스는 닮은 점 보다는다른 점이 많았다. 성격에서부터 워싱턴은 겸손했지만 애덤스는 교만했다.
워싱턴이 해외여행이라고는 요양차 떠났던 그의 이복형을 따라 서인도제도의 휴양지 바베이도스 섬(Barbados I)에가본 것이 전부지만 존 애덤스는 공무(公務) 및 개인적인 용무, 혹은 취미삼아 여러차례 해외 나들이를 하여 국제적인 감각도 익혔고 이런 경험이 외교가로서의 역량도 키워1783년부터 88년까지 초대 주영공사(駐英公使)라는 어려운 임무도 무리없이 해냈다. 그가 국내든 해외든 나들이를 할 때는 습관처럼 장남 존 퀸시 애덤스(Adams, John Quincy / 1767 ~ 1848) 등 가족을 동반했다.
이런 아버지를 둔 덕분에 퀸시는 일찍부터 유럽의 사정을 소상히 살필 수 있었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게 되어 뛰어난 외교가로서 명성을 높이다가 1824년에는 먼로의 뒤를 이어 미국의 6대 대통령에 당선, 부자(父子)가 대통령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그러나 부자 모두 연임에는 실패, 4년 임기를 겨우 마치고 물러 나야 했는데, 이것 역시 워싱턴이 온건 겸손한 인물로서 정적(政敵)이 거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애덤스는 지적이긴 하나 교만했다는 성격상의 약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를 브레인트리의 공작(公爵)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미국적인 토양에서 공작이라 불릴만큼 봉건적인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이런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실제로는 그 역시 뉴잉글랜드의 투박한 미국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애덤스 역시 대통령의 임기동안 내우외환에 시달려야 했다. 국내에는 앤티 - 페더럴리스트(反聯邦派)가 곳곳에 산재해 있었고, 같은 페더럴리스트(聯邦派)가 연방파(Federalists party)와 공화파(Republican Party)로 갈라져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졌다. 미국의 독립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분열과 혼란만 가중시키는 정당을 만들 생각은 누구를 막론하고 처음부터 없었다.하지만 사람들의 의견이 같을 수는 없고 이념을 떠나 이해관계가 대립되면 어차피 갈라 설 수밖에 없다. 이래서 출발한 것이 오늘날의 미국의 2대 정당 공화당과 민주당의 출발이다.
앞글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제이조약으로 영국과는 어느 정도의 관계 개선이 되었지만 프랑스와는 적대관계로 돌아서 해상에서는 공공연히 미국상선이 프랑스함대의 피습을 받기도 했고 언제 프랑스 혁명군이 미국에 들어닥칠지도 미지수다. 이런 차제에 제퍼슨을 중심으로 한 공화파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 해밀턴이 중심이 된 연방파는 반대, 라는 등식은 시종일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애덤스의 정부로서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해운업을 보호하고 프랑스와의 관계개선을 위해서 1797년 3명의 대표를 파견, 일단 3명의 프랑스 대표와 교섭을 시작, 98년 4월, 프랑스 대표들은 타협의 전제조건으로 미화 25만 달러를 프랑스 외상 탈레랑에게 뇌물로 제공할 것과 미화 1000만 달러의 차관(借款)을요구했다.
즉각 이런 사실이 미국에 알려지자 미국에서는 이를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 다시 프랑스와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어 해상에서는 양국간 무력충돌이계속 되었다. 이것이 이른 바 XYZ 사건(XYZ Affair)이라는 것이다. 이런 염치 없는 조건을 붙인 3명의 프랑스 대표는 외교문서에 이름 대신 X, Y, Z라고만 썼기 때문에그렇게 불렀다.
이에 미국의회는 친프랑스적인 프랑스와 아일랜드 이민을 대상으로 외국인 법(AlienAct)을 만들고, 국내 언론의 분별없는 표현을 막기 위해 보안법(Sedition Act)을 만들었다. 외인법은 외국인이 시민권을 획득하는데 준비기간을 5년으로 했던 것을 14년으로 늘리는 동시에 적국의 국민을 억류할 수 있고,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외국인을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한 것이다.
보안법은 정부에 반대하는 허위 또는 악의적인 저술의 출판과 의회의 법령 또는 대통령령에 대한 저항의 선동을 금지하는 것으로서 이미 관습법(common law)으로 각 주(州)에서 시행하고 있던 것을 위법에 대한 소추절차(訴追節次)를 간소화 하는데 불과했고 전시보안법 치고는 매우 온건한 것이었기에 외인법과 보안법 모두 폭넓은 국민적인 공감대를 얻고 제정된 법이다.
그러나 제퍼슨이 이끄는 공화파는 버지니아와 켄터키 주의회의 결의안을 통해 이 법을 강력하게반대했으며, 다른 주의회에서도 체제 파괴적인 것으로 무시하거나 또는 비난했다.연방정부(Fedelar Goverment)의 권한 비대는 지방정부(State Goverment)의 권한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형편이 이렇다면 대통령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대프랑스정책은 강경에서 유화쪽으로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대통령 애덤스는 자신이 이 법을 만들지도 않았고, 이 법을 적용하여 처벌한 적도 거의 없다. 하지만 법을 제정하는데 서명했고, 대통령으로서 공포한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대프랑스 정책이 강경에서 유화쪽으로 돌아서자 이번에는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파가 발끈하고 나섰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애덤스는 재선에 실패하고 말았다. 애덤스 자신은 어느파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미국의 북부 매사추세츠가 정치기반인 그는 덜 보수적이긴 했지만 분명히 연방파에 속하고 있었다.
(2) 연방파와 공화파
180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파가 연방파를 누르고 승리, 제퍼슨(Jefferson, Thomas/ 1743 ~1826.7.4)이 미국의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버지니아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제퍼슨은 보기드문 수재(秀才)로서 모든 것에 박학다식했고 1767년 변호사가 되었으나 정치에 뜻을 두고 69년 버지니아 식민지의회 하원의원이 되면서 그의 정치 생활은 시작되었다.
미국의 독립과정에서 그의 역할과 행적은 간략하지만 앞글 여러 곳에서 수시로 밝힌 것과 같다. 미국의 남부 버지니아가 정치기반인 제퍼슨의 독립 후의 행적은 연방정부의 권력확대를 반대하고 프랑스혁명을 옹호하는 이른 바 공화파를 리드 하면서 그의정치기반을 굳혀 갔다.
제퍼슨은 독립후 1784년 벤자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프랑스 공사가 되어 4년간 파리에 머물렀다. 그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유럽의 과학자나 지식인들과 자유롭게 사귀면서 지식의 폭을 넓혔고, 독립선언문과 버지니아 주의 종교자유법을 기초한 경력은 라파예트 후작 같은 온건한 프랑스 정치지도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그해 가을 제퍼슨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그가 프랑스 혁명을 직접 목격한 것은 초기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혁명전야의 프랑스의 제반사정과 절대왕정의 폐해를 누누히 보았고 이런 것이 그를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혐오하고 혁명을 지지하게 된 계기를 만드는 여러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워싱턴 행정부의 국무장관직을 수락했다. 이때의 부통령은 존 애덤스, 재무장관은 알랙산더 해밀턴(Hamilton, Alexander / 1755 ~ 1804), 이들은 소위 연방파로서 제퍼슨과는 정적의 관계에 있었다. 93년 유럽에서는 프랑스혁명전쟁이 일어났고, 프랑스의 지원문제를 두고 워싱턴 행정부는 친불파와 친영파로 격렬하게 대립,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대통령 워싱턴이 내린 단안은 중립의 선언이었다.
친불파를 리드한 것은 제퍼슨이다. 그가 이끄는 일단의 무리들을 공화파(Republican Party)라 불렀고 이것이 미국의 남부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의 전신이 되었다. 반면 친영파의 거물은 해밀턴이었고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연방파(Federalists party)가 되어 북부를 기반으로 하는미국 공화당의 기초가되었다.
조지 워싱턴 호라는 같은 배는 탔지만 결국 제퍼슨은 93년에 해밀턴은 95년에 두 사람 모두 현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미국의 정가에서 두 사람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96년 선거에서 해밀턴이 후원한 존애덤스가 대통령이 되었고 차점자가 된 제퍼슨은 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존 애덤스가 어떻게든 프랑스와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코자 교섭을 시작했을 때 엉뚱하게도 소위 XYZ 사건(XYZ Affair)이 불거졌고, 미국을 보호하고 과격한 국내여론을막기 위해서 문제의 외인법과 보안법을 미국의 연방의회가 제정했다. 하지만 비난의 화살은 대통령 존 애덤스와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파에게 쏟아졌고, 공격의 선봉에는 현직부통령인 제퍼슨이 지휘를 맡고 있었다.
이런 여론몰이에서 연방파가 공화파를 누르고 대통령선거에서 이길 승산은 매우 희박(稀薄)하다. 이에 연방파의 거두 해밀턴은 재바르게 변신, 공화파가 내 새운 제퍼슨과 화해하고, 그에게 그의 출신지인 뉴욕주의 표를 몰아주기 위해 에이런 버(Burr,Aaron / 1756 ~ 1836)를 제퍼슨의 런링 메이트로 삼고 대통령 선거에 임했다.
당시의 제도는 차점자가 부통령이 되기 때문에 뉴욕출신의 에이런 버가 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대통령에 출마해야 된다. 그런데 선거 결과 예상과는 달리 제퍼슨과 버는 똑 같은 73표씩을 얻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최종의 결과는 하원에서 투표로서 결정된다.
버(Burr,Aaron)라고 해서 대통령의 욕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당시의 판세 역시 그에게 매우 유리했다. 내친김에 은근히 대통령 자리를 바랐지만 미국 3대 대통령의 자리는 제퍼슨에게 돌아갔고 버는 부통령에 머물러야 했다.해밀턴의 영향력이 깊숙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워싱턴 정부에서는 재무장관을 지냈고, 애덤스 정부를 마치 섭정(攝政)처럼 뒤에서 조종했으며, 제퍼슨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해밀턴은 어떤인물인가?
(3) 연방파의 거두 해밀턴
알랙산더 해밀턴(Hamilton, Alexander / 1755 ~ 1804)의 가계는 스코틀랜드 에어셔의 캠버스케이스를 본거지로하고, 해밀턴이 태어난 곳은 서인도 제도, 활동한 곳은 미국의 뉴욕이다.
그의 조부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죽은 지주였고, 아버지 제임스 해밀턴은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떠돌이 무역상이다. 1755년 1월 해밀턴은 서인도제도의 덴마크 령(領) 세인트크로이 섬에서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레이첼 포싯 라빈은 프랑스인이었으나 의사인 그의 아버지가 위그노교도라는이유로 프랑스에서 박해를 받게 되자 이를 피해 독일로 건너갔고, 그의 딸 포싯은 독일 상인 요한 미카엘 라빈에게 출가했다.
그녀는 독일인 남편을 따라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크로이 섬으로 이주, 이곳에서 알랙산더 해밀턴의 아버지 제임스 해밀턴을 만나 동거에들어갔다.
이들이 동거하게 된 과정과 배경은 알길이 없다. 전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두 사람의 눈이 맞아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1752년부터 동거를 시작했고 58년까지 전남편과 이혼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이때 해밀턴이 태어났다.그가 태어난 해가 1755년이라고 하지만 이것 또한 정확하지 않고 5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역마살이 몸에 벤 그의 아버지 제임스 해밀턴은 1765년 가족을 버리고 섬을 떠나 버렸고, 68년에는 그의 어머니 마저 죽었다. 어머니의 친척이 해밀턴의 후견인이 되었으나 그의 유년시절은 글자 그대로 파란만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환경이 그를 강하게 만들어 72년에는 뉴욕의 상인들이 현지에 설립한 회계사무소의 지배인이 되었고 이것이 뉴욕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친구들의 도움으로 뉴저지의 엘리자베스타운에 있는 대학 예비학교에 들어갔고,1773년에는 컬럼비아대학의 전신인 뉴욕의 킹스 칼리지에 입학, 천성적으로 총명하고 근면했던 그의 성적은 뛰어났다. 그러나 반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해밀턴은 학업을 중단하고 반영 투쟁에 참가하여 미국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독립전쟁기간 중 1776년에는 포병 대위로 임관되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가 부와 명예와 명성을 얻게 된 첫 번째 행운은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군의 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와의 작전 수행을 위해서 해밀턴에게 중령 계급장을 달아주고 부관으로 삼았다.
이후 4년간 프랑스의 육군 및 해군과의 연락장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고, 이때 뉴욕의 최대 명문가인 동시에 독립전쟁의 주요 지휘관이었던 필립 스카일러(Philip John Schuyler / 1733 ~ 1804) 장군의 눈에 들어 그의 딸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마지하여 두 번째 행운을 잡았다.
전쟁이 사실상 종결된 1781년 11월 군대를 떠나 그의 처가인 올버니로 돌아가 법률 공부를 시작, 1782년 7월 뉴욕의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고 같은 달 뉴욕의 재정담당관이 되었다. 그러나 뉴욕 의회가 그를 대륙회의 대표로 선출하자 그 자리를 사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강력한 연방정부의 구성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 미국인의 이목을 끌기시작했다.
앞의 글에서 밝힌 것과 같이 1787년에는 뉴욕의 하원의원이 되었고, 연방헌법의 비준을 유도하기 위해서 메디슨, 제이 등과 85편의 연작 논설 페더럴리스트(The Federalists)를 발표했다. 이 논설은 퍼블리어스(Publius)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지만 그 중 2/3는 해밀턴의 작품이라는 것이 후세에 밝혀졌다.
1789년 연방정부가 출범하자 그는 재무장관이 되어 국채액면상환(國債額面償還), 주채(州債)의연방정부 인수, 국립은행의 창설, 보호관세의 설립 등 건국초기의 어려운 재정문제를 처리했다.
상공업의 발달을 중시한 일련의그의 재무정책은 그가 주장한 현명한 소수자에 의한 정치라는 정치철학과 함께 현실적인 해결방법이었으나 제퍼슨 등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정치 및 경제사상은 미국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도 사실이다.
1797년 애덤스 행정부가 프랑스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대표단을 파견할 때, 프랑스와의 우호적인 것은 반대했지만 관계개선에는 동의했다. 그 후 프랑스와의 일전을 각오하고 군대를 편성하면서 그는 사령관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소장의 계급장을 달고 군의 제 2인자인 감찰관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존 애덤스와 틈이 벌어졌고, 애덤스가 해밀턴의 앞잡이 정도로 생각했던 인물들을 대거 퇴진시키자 그에게 등을 돌리고 유리한 승세를 타고 있던 제퍼슨과 손을 잡았다.
서인도제도에서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태어나 미국혁명이라는 소용돌이에서 마음껏 그의 기량을 펼쳤고 출세도 했지만 과격한 논조와 시세에 민감한그의 행동은 동시에 많은 적을 만들었고 연방파를 분열시키는 오점도 남겼다. 그가운데 하나 1800년 선거과정에서 에이런 버(Burr,Aaron)와의 관계는 동지에서 적으로 변하는 정치풍토를 여실히 반영한 것으로서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비방하다가 1804년 버가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
해밀턴은 결투를 싫어 했지만 형편이 거절할 수도 없었다. 7월 11일 아침 뉴저지 주 위호컨 힐에서 버(Burr,Aaron)의 총알은 해밀턴을 쓰려뜨렸다. 결국 그는 아내와 7명의 자식을 빚더미에 남겨두고 죽었는데, 빚은 친구들이 청산해주었다고 하지만 부자(父子)가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애덤스는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를 도와 대통령이 되게 했던 해밀턴은 부자(父子) 공히 총탄으로 그것도 결투라는 이름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3년 전에도 위호컨 언덕에서는 같은 일이 벌어졌고, 희생된 주인공은 당시 19세인 해밀턴의 장남 필립이다. 해밀턴이 버(Burr,Aaron)를 멀리한 것은 뉴욕의 지사와 연방의원 자리를 두고 해밀턴의 장인 필립 스카일러와 맞섰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해밀턴의 가슴에 총탄을 명중시킨 에이런 버는 살인죄를 몸을 숨겼다가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연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 난 후 변호사로서 만년을 보냈다.
2. 제퍼슨 시대(1801 ~ 1809)
(1) 장신의 완고한 농부
“미국독립선언서의 기초자, 버지니아 신교 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라는 묘비명(墓碑銘)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는 제퍼슨의 일화는 너무나 많다.
자신이 직접 설계했다는 버지니아의 몬티첼로에는 면적이 12㎢나 되는 농장을가지고 있었고 150명의 노예도 부리고 있었지만 노예제도는 반대했고, 연방정부의 구성에는 찬성했지만 연방정부의 권력확대에는반대했다.
독립선언문을 썼고 독립전쟁에 적극적이었지만 그 자신은 한번도 총을 잡고 싸운적은 없었고 대통령이된 후 무관 보다는 문관을 우대했다.....
1801년 3월, 뉴욕이 아닌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에서 취임식을 가진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후 이곳이 미국의 수도가 되어 워싱턴(Washington D.C.)이라 부른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때에 그의 나이 58세,185센티의 장신(長身)과 홍안(紅顔), 벽안(碧眼)과 금발(金髮),.....
1803년에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수, 미국의 영토를 2배로 늘렸고, 1804년에 재선되고, 1807년에는 수출입금지법(輸出入禁止法- Embargo Act)을 만들어 영국과 프랑스의 횡포에 맞섰으며, 1808년에는 이를 더욱 강화하여 빈축을 사기고 했으나 임기를 불과 이틀 앞두고 통상금지법(Non-Intercourse Act)에 서명,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의 무역은 전면 허용, 이런 것들이 그의 재임 8년간에 일어났던 중요한 일들이다.
그가대통령에 재임했던 19세기 초반은 미국의 산업이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버지니아의 흙먼지 속에서 자란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도 토지에 대한 애착과 열정은 대단했다. "어떤 직업도 농업만큼 좋지는 못하고,어떤 개발도 농장 개발과 비교할 수는 없다.....정책의 핵은 농업을 장려하는 것이어야 하고, 상공업은 농업의 시녀(侍女)에 만족해야 한다...."
이런 그의 생각은 유럽의 중농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농본주의를 지상목표로 설정했던 조선왕조의 양반사대부들이 백성들에게 요구했던 생각과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당시의 외국인들은 제퍼슨을 "장신의 완강한 농부"라는 별명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농업만으로고도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는 없고 따라서 개인이든 국가든 가난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이런 점에서 제퍼슨의 데모크라시는 한계가 있었고 토지와는 인연이 먼 도시의 자본가나 노동자에 대해서는 냉담한 편이었다. 국민의 기본생활이 위협받는 경제상황에서 진정한 데모크라시는 성장을 멈추고 다음 시대를 기다려야 한다.
미국의 상공업은 하루가 다르게 이미 발전하고 있었고 이런 시대적인 추세를 외면할 수 없었던 제퍼슨은 농업중심의 정책을 그의 재임기간 중 수시로 수정(修訂)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대륙에서의 나폴레옹 전쟁은 미국에도 영향을 주어 미국상선이 화물을 싣고 프랑스로 가면 영국해군이 방해했고 반대로 영국으로 가면 프랑스함대가 방해를 하였다. 전쟁중인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이 말하는 적성국가(敵性國家), 즉 전쟁 당사국에는 어떤 물자도 수송할 수 없다는 조치를 내리고 이를 위반하는 외국 선박은 나포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억울하지만 이들 두 나라를 상대로 싸울 힘이 당시로서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기에 이에 항의하는 수단으로 미국의 모든 항구를 폐쇄시켜 버렸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우리끼리 살태니까 너희들(영국과 프랑스) 마음대로 어디 한번 해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수출입금지법(輸出入禁止法- Embargo Act)이란 것이다.
제퍼슨의 이런 배포 이면에는 미국산 곡물(穀物)과 원면(原綿)의 수출을 금지시키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일체의 공산품을 수입하지 않는다면 이들 두 나라는 심한 타격을 받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인데, 결국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1808년 이를 더욱 강화하자 우선 미국 내에서 농업뿐만 아니라 뉴잉글랜드와 뉴욕의 상업과 해운업이 큰 타격을 받았고, 반대로 영국과 프랑스는 그런대로 버티고 있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우방(友邦) 미국과 그 미국의 대통령 제퍼슨이 만든 법을 돕는다는 이유로 미국 상선의 억류를 정당화시켰다. 일이 이렇게 꼬이자 연방파의 지도자들조차도 나폴레옹 자신이 출항금지를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강력하고 확고한 반대에부딪치게 되었고, 결국 제퍼슨은 대통령 임기를 이틀 남긴 1809년 3월 1일,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국가들과의 무역을 인정하는 통상금지법(Non-Intercourse Act)에 서명하고 자신이 설계한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 근처에 있는고향집 몬티첼로에 은퇴했다.
제퍼슨은 1798년 소위 XYZ 사건이 일어나고 의견이 분분했을 때 그 자신이 보수강경론자들을 매파(hawks - 鷹派)라고 불렀다. 이런 매파가 그의 집권말기 다시 등장, 제퍼슨을 괴롭혔지만 집권초기 그의 꿈은 지는 해(서부) 저쪽에는 아직도 광활한 미개척지가 있고, 그 모두를 농업지대로 바꾼다는 것이 그의 원대한계획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로 시작한 것이 루이지애나의 매입(買入)이다.
(2) 루이지애나의 매입
지금은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루이지애나주(Louisiana)는 텍사스와 앨리배마 주 사이, 멕시코 만에 접한 작은 주에 속하지만 당시의 루이지애나는 매우 방대한 지역이다.
아칸소, 미주리, 아이오와, 미네소타, 노스타코마,사우스타코마, 네브래스카, 캔자스, 오클라호마, 콜로라도, 와이오밍, 몬태나 등이루이지애나에서 분리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이 지역이 얼마나 넓었던 가를 짐작할수 있고, 로키산맥과 미시시피강 사이의 땅이 전부 루이지애나였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지만 유럽인들로서 가장 먼저 차지한 것은 프랑스였고, 1763년 파리조약으로 에스파냐의 영토가 되었다가 1800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위협과 회유로 에스파냐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다시 찾았다.
미국의 독립 후 앨러게니 산맥을 넘는 이주자의 행렬이 꼬리를 잇게 되었고 이들이 개척한 땅에서 생산한 물품을 동부로 가져가서 팔아야되는데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는 것이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짜낸 묘안이 미시시피 강의 하구 뉴올리언스에서 뱃길로 미국의 동부로 가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훨씬 편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러나 이곳은 프랑스의 영토이기 때문에 미국정부가 이곳을 매입해 줄 것을 정식으로 건의했다.
이런 건의를 받은 제퍼슨은 뉴올리언스 일대의 미시시피강하구를 매입하기로 결심, 즉각 프랑스와의 교섭에 들어갔다. 이런 제의를 받은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결전을 앞두고 해군력을 비교한 결과 프랑스 해군이 영국의 해군을 당할수 없다는 것을 알고 미국이 사겠다면 루이지애나 전체를 사라는 색다른 제의를 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어차피 루이지애나는 영국에게 뺏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기 전에 이 땅을 팔아서 돈도 벌고, 미국의 환심도 사고, 영국이 차지 하여 우쭐대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속셈이야 어쨌든 제퍼슨으로서는 이런 제의를 받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그에게 그만한 권한이 없었고 나폴레옹의 속셈을 헤아리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 외로 여론은 루이지애나 전체매수를 원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어 1803년 제퍼슨은 결단을 내리고 루이지애나 전체를 사 들였다.
매매가격은 미화 1천 5백만 달러, 면적은 82만 8천평방마일, 에이커 당 가격은 미화 3센트,...거의 공짜가 다름 없는 값을 주고 산 루이지애나가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영토는 두 배로 늘었고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미국 팽창의 시작이 되었다.
(3) 최초의 대륙횡단(大陸橫斷)
루이지애나가 어떤 곳인지는 팔아먹은 나폴레옹도 사들인 제퍼슨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었다. 제퍼슨은 루이지애나를 매수한 후, 자신의 비서인 루이스와 군인 클라크에게 현지 답사를 명령, 두 사람은 일행 40 여명을 이끌고 곧 서부로 떠나게 되었다.
이래서 루이스와 클라크의 탐험(Lewis and Clark Expedition)은 시작되고 최초의 대륙횡단은 이루어졌는데, 기간은 1804년부터 06년까지 햇수로는 3년, 1만 1천 2백 킬로미터의 대장정, 인솔자는 제퍼슨 대통령의 개인비서 메리웨더 루이스 대위(Cpt, Meriwether Lewis/ 1774 ~ 1809)와 군인 윌리엄 클라크 중위(F Lt, William Clark/ 1770 ~ 1838),
출발에 앞서 엄격한 야외훈련과 식물학·기상학·동물학에서부터 천문항법(天文航法), 인디언 수화(手話), 목공일, 총기수리, 보트 취급법에 이르기까지 탐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익혔고, 식량은 돼지고기·밀가루·소금·비스킷 등, 도중에 야생동물과 물고기를 잡아 보충,....
1804년 5월, 이들 일행은 세인트 루이스를 출발, 미시시피강의 지류 미주리강을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노스다코타에 있는 어느 인디언 부락에서그 해 겨울을 보냈다. 해가 바뀌고 날씨가 풀리자 다시 출발, 여기서 투생 샤보노라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모피상을 통역으로 채용했는데, 그의 아내 사카자웨아(Sacajawea, 또는Sacagawea 혹은 Bird Woman이라고도 함 / 1786 경 ~ 1812 ?)라는 어린아이를 등에업은 인디언 여인도 동행하게 되었다.
사카자웨아는 쇼쇼니((Shoshone) 족 인디언 추장의 누이동생이었다고 한다. 12세 때 다른 인디언 부족에게 잡혀 노예로 팔렸다가 다시 투생 샤르보노에게 팔려가 그의 아내(?)가 되었지만, 탐험대에 합류한 그녀는 잔심부름에서부터 탐험대원들의 헤어진 옷을 깁어 주기도 하고 인디언의 거주지와 풍속 등 정보를 제공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805년 봄, 일행은 미주리강을 좀더 거슬러 올라가 상류를 답사한 후 여름에는 로키산맥을 넘어 컬럼비아강 상류에 닿았다. 컬럼비아강지류 스네이크강(Snake R.)은 인디언들이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 할 정도로 계곡과 급류가 많았기 때문에 카누조차 띄울 수가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탐험은 더 이상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8월에는 몬태나의 암스테드 부근에서 사카자웨아의 오빠인 카메아화이트가 이끄는 쇼쇼니 인디언들과 마주쳤다. 오빠를 만난 사카자웨아는 그녀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탐험대에 남기를 희망했고, 이런 분위기에서 탐험대는 인디언들로부터 말(馬)과 길잡이를 구할 수 있었고 덕분에 험준한 계곡을 지나 태평양에 닿을 수 있었다.
도중에 다른 인디언 부족들을 여러 번 만났으나 등에 아이를 업고 있는 그녀가 있었기에 탐험대가 단 한명의 희생을 제외하고 무사히 목적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런 내용들이 사카자웨아의 신화를 만들어 곳곳에 그녀와 관련되는 조형물이 세워져 지금은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수가 없다.
스네크강을 지나 마침내 태평양에 도달한 탐험대는 그곳에서 두 번째 겨울을 보냈다. 일행은 새로운 지도를 만들고 태평양 연안의 인디언부락을 방문하는 등 분주하게 그 해 겨울을 보내고, 1806년 9월에 동부로 돌아왔다.
왕복 1만 1천 2백 킬로미터의 대 장정은 이로써 끝났고, 그들의 보고서로 로키산맥 서쪽의 사정을 처음으로 백인들은 알게 되었고, 이런 정보는 뒤에 서부개척에 큰도움이 되었으며, 미국으로서는 로키산맥 서쪽의 오리건(Oregon) 일대가 미국의 영토라는 새로운 주장을 할 수 있게 된 근거가 되었다.
1809년 3월 4일 두 번의 임기를 마친 제퍼슨은 3번의 연임도 가능했지만 조지 워싱턴의 전례에 따라 후임자인 제임스 매디슨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버지니아 주의 고향 집 몬티첼로에 돌아가 버지니아대학 건설에 매진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다가 미국의 독립선언 50년이 되는 1826년7월 4일 타계했다. 그가 숨을 거둔 몇시간 후 동지이자 정적이었던 존 애덤스(2대대통령)도 세상을 하직했다.
잡다한 인종과 광대한 영토를 가진 미국에서 자칫국가지상주의가 힘을 얻게 되면 독재정치가 나타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제퍼슨은 이를 우려하였고 한편으로는 강력한 미국을 바랬다. 이런 상반된 모순에서 건설 된 것이 미국이고 그 전통은 제퍼슨시대부터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매수한 서부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자 인디언과의 충돌은 피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한 영국과의 불편한 관계는 끝내 전쟁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소위 제 2의 독립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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