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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발전 -잭스니언 데모크라시(Jacksonian Democracy)

구름위 2013. 1. 1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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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스니언 데모크라시(Jacksonian Democracy)

 

1.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Adams, John Quincy / 1767 ~ 1848)

 

노스캐롤라이나주(州)와 테네시주의 경계를 이루는 부분.1945년 해방이후 반세기 동안 주로 미국을 통해서 서구문물이 직수입 되면서 우리들을 혼란케 만든 용어 가운데 가장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 데모크라시(Democracy)와 서비스(service) 인 것 같다.

 

약방에 감초처럼 따라 다니는 이 두가지 낱말을 우리들은 통상 서비스는 봉사(奉仕), 데모크라시는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교과서적인 용어로 번역해서 사용하는데는이설(異說)이 없다.

 

그러나 봉사란 어떤 것이고 민주주의란 무엇을 어떻게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내용에 직면하면 해석은 제각금 달라 진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반세기가 지난 1825년 먼로의 뒤를 이어 존 퀸시 애덤스(Adams, John Quincy / 1767 ~ 1848)가 미합중국 6대 대통령이 되었다. 애덤스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버지니아가 아니라 매사추세츠의 보스턴 동남쪽에 있는 브레인트리라고 한다.

 

쉽게 이야기 하면 남부출신들(반연방파, 공화파)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북부(연방파)출신인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애덤스 자신은 연방파도 반연방파도 아닌 전형적인 미국인이라고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연방파로 분류하고 있었다.

 

존 퀸시 애덤스의 경력은 매우 다채롭다. 아버지 존 애덤스는 미국의 2대 대통령을 지냈고 어머니 애비게일은 브레인트리의 명문(名門) 퀸시家 출신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가 당대에 내노라 하는 명문거족의 가문에서 귀공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아버지를따라 유럽 곳곳을 여행 하는 한편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공부했고 유창한 프랑스어를구사한 덕에 불과 열네 살의 나이로 러시아 공사의 프랑스어 통역관으로 임용되어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트르부르크에 머물기도 했었다.

 

아버지가 주영대사를 역임했던 1787년 하버드대학을 졸업,1790년 보스턴의 변호사 자격 획득, 94년 네덜란드 주재공사, 97년 프로이센 주재공사,1802년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 03년 연방상원의원, 06년 하버드대학교수, 09년 러시아주재 공사, 15년 영국주재공사, 17년 국무장관, 25년 대통령, 31년 하원의원, 스미스소니언협회 설립에 공헌, 등이 그이 주요 이력인데....

 

또 하나의 그의 공적이라면 열두 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일기를 남겼다는 거이다. 이것이 비록 자신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것이지만 당시의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높은 지성과 유럽적인 교양을 미국에서는 따를 자가 없다고 자만했으며 자신은 늘 지성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행동파인 동시에 애국자라 생각했었다. 아는 것이 많은 만큼 남을 얕잡아 보는 약점도 있었다.

 

따라서 그가 대통령이된 것도 개인적인 인기보다는 어부지리를 얻은 행운이었다. 1824년 먼로대통령의 중요 브레인들, 이를태면 국무장관 애덤스, 국방장관 존C.컬훈, 재무장관 윌리엄 H. 크로퍼드,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1812년 전쟁의 영웅 앤드루 잭슨등이 모두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아 가운데 컬훈은 부통령으로 지명되어 제외되고 네명이 출마하여 4파전으로 치룬 선거에서 잭슨99표, 애덤스 84표, 크로퍼드 41표, 클레이 37표로 집계 되었다. 이렇게 되면 어느 누구도 과반수 이상의 다수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은 하원으로 넘어갔고 하원은 득표 순서대로 잭슨, 애덤스, 크로퍼드 세 사람을 후보자로 정하고 결선투표에 들어갔다.

 

3파전이라고 하지만 크로퍼드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선거전은 잭슨과 애덤스의 싸움이었다. 박빙의 경쟁에서 후보에서 탈락한 클레이의 향배는당락을 결정하는 열쇠가 되었는데, 클레이는 잭슨 보다는 애덤스를 선택했다. 그래서 클레이는 자신을 지지했던 표를 애덤스에게 몰아 주었고. 그 결과 1차 투표에서 애덤스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애덤스는 자신을 밀어준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하자 추잡한 정치 흥정이라는 비난이 뒤따랐고 이런 여론에 편승해서 잭슨파는 애덤스와 클레이를 싸잡아 공격, 이를 계기로 애덤스와 잭슨과의 오랜 친분은 깨어지고 불화로 돌아서게 됨에 따라 미국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입혔다.

 

결국 애덤스는 재임기간(1825 ~ 29) 4년동안 잭슨파의 맹렬한 반대에 부닺쳐 제대로 뜻을 펴지도 못했으며 연임에도 실패했다. 이후 애덤스의 추종자들은 국가공화파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것이 미국 휘그당으로 이어졌다.

 

연임에 실패한 존 퀸시 애덤스는 그의 고향 매사추세츠의 브레인트리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이미 공인으로 부상한 그에게 개인생활이란 없었다. 전직대통령이라는 체면에도 불구하고 1831년 그를 추종했던 사람들은 애덤스를 하원의원으로선출하였고 죽을 때 까지 의원직을 버리지 않았으며, 연임이나 중임의 제한이 없는 미국의 대통령선거법에서 그는 다시 대통령이 되고자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2.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

 

미국 북동부 애팔래치아산맥의 일부를 이루는 산맥. 그레이트스모키국립공원의 연봉이른 바 화합의 시대라 불렀던 1815 ~ 25년 사이의 10년 동안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불만의 시대이기도 했다.

 

새로이 개척된 서부의 농민들은 모든 경제적 정치적 조직이 동부의 실업가들이 장악하게 되는데 불만이 많았고 남부의 플랜터들은 보호관세로 생필품의 가격이 비싼데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렇다고 동부의 신흥 중소기업가나 노동자들이 혜택을 입은 것도 없었다.

 

산업은 몇몇의 대자본가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합중국 은행은 소수의 이익을 위한 사유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다수의 불만이 앤드루 잭슨(Jackson,Andrew / 1767 ~ 1845)이라는 야성적인 서부출신의사나이를 미국인들은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다시 말하면 제퍼슨을 대부로 삼아 성장하고 있던 기존의 세력에 식상했던 미국의 유권자들이 조금은 엉뚱한 새로운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잭슨으로서는 외교적인 경험이 전혀 없었고 행정가로서의 경험 또한 너무나 빈약했다.

 

막말로 한다면 모든 것이 완전 초보자나 다름 없었기에 대중운동가로서는 적합할지 모르나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기대와 우려가 반반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그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연임에도 성공하였으며 8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때의 인기는 더욱 높았고 지금도 백악관에는 그의 기마동상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잭스니언 데모크라시라는수식어가 만들어져 이후 미국대통령으로서의 자질에 기준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잭스니언 데모크라시라는 보따리에는 어떤것들이 담겨저 있었는가? 첫째는 남자 보통선거를 확대하여 유권자의 숫자를 획기적으로늘렸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관리의 임기를 줄이고 논공행상식의 자기 사람을 요직에 배치하지 않았으며, 셋째는 공립교회를 완전히 폐지하여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를보장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매우획기적인 것이었다.

 

우선 선거권만 하더라도 직업과 신분, 재산과 성별,인종과 종교 등 일체의 조건을 배제하고 국적을 소유한 모든 국민이 일정한 연령이되면 유권자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을 보통선거(Universal suffrage)라고한다. 남자 보통선거라는 것은 남자들에만 선거권이 주어젔을 뿐 여성에게는 선거권이없는 제한선거에 불과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같은 시기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이 같은 남자 보통선거 조차 이룩되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의회제도의 선진국 영국에서도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1832년에 선거법을 개정했다. 소위 제 1차 선거법 개정에서 그들이 바꾼 것은 로텐 바러(rotten borough - 부패선거구)라는 선거구를 없애거나 선출의원수를 줄이는데 그쳤을 뿐, 남자 보통선거는 1918년에, 여성에게는 그 보다 10년이늦은 1928년에 가서야 이룩되었고 그것도 여성은 31세 이상이란 단서가 붙어 있었다.영국에서 남녀보통선거가 이룩된 것은 1949년 이다.

 

독립당시 미국에서 남자 보통선거가 실시된 곳은 매사추세츠한 곳 뿐이었다. 이것이 1830년대에는 로드아알랜드, 뉴저지,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를 제외한 모든 주로 확대 실시되었다. 독립전쟁 당시에 해결하지 못했던 과제 하나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병행해서 1824년 대통령선거에서 일반 유권자가 35만 6천이던 것이 36년에는 1백 50만, 40년에는 2백 40만으로 늘어났다. 이로 인해서 후보자들은 특정 집단의 눈치를 살피는 일 없이 유권자를 상대로 정치유세(遊說)를하여 정견을 발표하는 대중정치의 틀이 마련되었으며 선거권의 확대는 소수의특정 집단이 아니라 다수의 유권자가 심판하고 선택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하고도합리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고 이런 정서가 외진 서부출신의 잭슨이 대통령이 될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다시 말하면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잭슨은 미국 최초로 주민들을 상대로선거 유세를 하였고 서민적인 그의 체취에 매료된 보통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표를던져 대통령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앤드루 잭슨은 어떤 인물인가?

 

1767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웩스호에서 태어난 잭슨은 변변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외진 벽촌에 교육시설이 있을리 없었고 학교라는 것도 1780년과 81년 서부캐롤라이나에 침입한 영국군에 의해서 중단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15세의 소년 잭슨은 영국군에 감금되어 영국장교의 군화 닦기를 거부했다가 기병도(騎兵刀)에얻어 맞아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그의 어머니와 두 형은 영국군의 침공이 직, 간접원인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잭슨에게 영국에 대한 인상이 좋을리가없다. 그가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세운 곳은 테네시(Tennessee)의 주도(州都) 내슈빌(Nashville)이고 일약 전국적인 영웅으로 만든 것은 1812년 영국과의 전쟁이다.

 

테네시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부지역으로서 원래는 인디언의 땅이었다. 이곳이 미국의 독립 후인 1787년 제퍼슨의 북서부 조례에 따라 테네시 준주(準州 -Territory)가 되었다가 1796년 미국의 16번째 주(州 - State)로 승격한 곳이다.

 

1783년 독립전쟁 후 노스캐롤라이나의 솔즈베리에 있었다는 어느 법률사무소에서 법률을 공부하게된 잭슨은 1787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어 북서부 조례에 따라 88년 노스캐롤라이나 서부지구 지방검사로 파견되면서그의 인생은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변경정착촌에 불과했던 내슈빌의 지방검사로 부임한 잭슨은 주로 채무 징수에 관한 소송업무를 담당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많은 토지소유자와 채권자들과의 접촉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얼굴을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들과의 두터운 친분과 접촉은 그를 유명한 변호사로 만들어 주었다.

 

테네시가 정식 주(州)로 승격되면서 주의회 의원, 테네시를 대표하는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 테네시주의 상급재판소 판사 등을 지냈으나 공직(公職)으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족들과의 떨어진 불편한 생활 등으로 임용과 사임을 되풀이하여 그가 공직에 머문기간은 일천하다. 그러나 1802년 테네시 주의 민병대 소장으로 선출되어 1812년 전쟁때까지이 직책을 맡은 것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기회를 제공할줄은 자신을 비롯해서 그어느 누구도 예견치 못했다.

 

미영 전쟁 혹은 제 2의 독립전쟁(1812 ~ 14)이라고 부르는 미국과 영국과의 싸움에서 1812년 6월 전쟁이 선포되자 그는 자신의 민병대를 이끌고 남부변경지역을 위협하던 크리크 인디언들을 격파하고 앨라배마의 토호페카 전투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크리크 인디언들이 다시는 변경지역에 출몰할 수 없게 되었으며 잭슨은 서부의 영웅으로 명성이 높아졌다.

 

잭슨의 다음 목표는 스페인의 식민지 플로리다를 획득하는 것이다. 1814년 8월 펜서콜라에 있는 스페인 진지를 목표로 하고 부대를 남부 모빌로 이동, 그가 의도한 바는 당시 에스파냐 영토인 플로리다를 미국이 차지하기 위해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것이고 이러한 대담한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한 근거는 스페인과 영국이 유럽의 전쟁에서 동맹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영국이 적국이라면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스페인도 적이라는 억지 논리를 갖다 붙인것이다.

 

잭슨이 플로리다에서 영국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은 1815년 1월 8일, 승전 소식이 워싱턴에 전해졌을 당시에는 미국측의 사기가 가라앉아 있던 때였다. 며칠 후 미국과 영국 사이에 평화협정이 1814년 12월 24일 겐트에서 이미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워싱턴에 전해졌다.

 

그렇다면잭슨은 평화협정이 체결된 줄 모르고 영국과 싸워 승리한 모양새가 되었으나 이 2가지 소식은 미국민들에게 기쁨과 안도를 가져다 주었으며, 또한 잭슨을 서부에 국한되지 않은 사실상의 전국적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결국 스페인은 1819년 플로리다를 미국에 할양 하였으며 45년에는 미국의 27번째 주가 되었다. 이런 전승(戰勝)으로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였으나 정작 잭슨 자신은 대통령직에 관심이 없다는 여유를 보였으며, 워싱턴의 정계 지도자들도 그에 대한 지지 열기가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은 선거인단의 투표에서는 가장 많은 표를 얻었으나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결국 존 퀸시 애덤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잭슨의 참모들은 국민들의 의사가 음모에 의해 좌절당한 것이라고 입을모았으며 이에 따라 잭슨은 1828년 재출마함으로써 자신과 지지자들의 정당함을 입증하고자 결심, 선거인단 투표에서 178 대 83이라는 표차로 애덤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에도 성공하여 이른 바 잭스니언 데모크라시의 막을 열었다.

 

그러나 공적(功積)이 있으면과실(過失)도 있게 마련이다. 1828년의 선거는 미국 대통령선거 역사상 한 개인의 품성과 중상모략이 가장 크게 작용한 선거였다고한다. 유세과정에서 민주정치의 약점인 대중선동이 판을 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거의공신들을 요직에 배치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큰 성과였고 관직은 승리자의 몫이라는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재임기간 8년 동안 교체된 관리는 1/5에 지나지 않았다는것도 잭스니언 데모크라시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를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식의 행정 스타일은 국왕 앤드루 1세라는 풍자적인 별명을 얻었으며, 의회에서 통과된 합중국 은행법(Bank of the United States)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므로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는가 하면 1836년 7월에는 정화(正貨) 유통령을 발표하여 서부지역에서 은행들이 파산하기 시작, 그 여파가 동부지역으로 미쳤으며 그의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았던 1837년 봄에는 미국 전역이 금융공황에 허덕이게되었다.

 

그런가 하면 인디언들은 조상전래의 땅을 잃고 서쪽으로밀려나 미시시피 이동에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잭스니언데모크라시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어쨌거나 잭슨시대의 도래는 기존의 정치세력과는단절된 새로운 미국의 질서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변변찮은 환경에서 출생하여변경지역에서의 정치기반을 닦았다는 것과 일반 대중과 가까이 했다는 것 등은 미국정치를일보 전진시키기에 충분했다.

 

1825년부터 37년까지 격렬한 정치논쟁은 결과적으로 미국에서 양대 정당을 부활 시켰으며 잭슨 자신은 민주당이라는 유산을 후진에게 물려 주고 고향 허미티지로 돌아가 생애 마지막 8년간을 병으로 고생하였으나 국사에는 계속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