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1. 서부로의 진출
1845년 미국이 멕시코의 땅 텍사스를 강제합병 하면서 등장한 논리가 매니페스트 데스티니(manifestdestiny),
이 말은 백인들이 북미대륙에 널리 진출하여 무지한 원주민에게문명의 혜택을 베푸는 것이야 말로 신(神)이 미국 국민에게 부여한 도의적 사명이며 피할 수 없는 "명백한 운명"이라는 것이다.
1845년 8월 -미국잡지와 민주평론(United States Magazine and DemocraticReview)-이라는 월간지에 존 오슬리번(John L, O'Sullivan)이라는 기자가 처음으로 이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위 미국판 화이관(華夷觀)이 이때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고 오슬리번 이전, 이를태면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진출이나 청교도들의 매사추세츠 식민 건설 초기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 1845년 다시 유행처럼 번지게 된 것에 불과하다.
잘 알려진 것 처럼 17세기 초 영국계 이주민들이북미대륙의 동부해안지대에 정착하면서 식민지 아메리카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비좁은 섬나라 영국에서 광활한 신대륙에 정착한 이들에게 더 넓은 토지는 그 자체가 희망이고 기회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새로운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이로부터 미국사의 한 획을 긋는 서부개척의 시작과 함께 매니페스트 데스티니는 그들 나름의 논리가 되었다.
미국의 독립전쟁 역시 이런 영토확장과 무관하지 않고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과 존 퀸시 애덤스의 영역주의나 먼로선언 또한 이런 맥락에서 풀어보면 이해가 훨씬 쉬워진다.
실제로 1814년 12월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벨기에의 겐트에서 체결된 겐트조약(Treaty of Ghent)의 내용에서 전쟁의 원인이었던 서부로의 진출과 인디언 문제는 어떤 언급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포장마차(布帳馬車- covered wagon)는 뻔질나게 루이지애나를 향해 마음놓고 달려가고 있었다.
1816년 이로쿼이 인디언의 한 갈래인 카유가(Cayuga)족의 이야기에 따르면 18개월 동안 1만 5천대의 이주자의 마차가 그들의 마을을 통과하였고 어떤 여행자의 기록에는 1818년 필라델피아와 볼티모어를 떠난 1만 2천 여대의 마차가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Pittsburgh)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물론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도 아니고 흘러 다니는 이야기를 얻어들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1820년대가 되면 북서부지역의 인구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1803년에 연방에 편입한 오하이오의 인구가 1820년대가 되면 581,400 여명이나 되었고 1816년에 편입된 인디애나가 47,100 여명, 18년에 편입된 일리노이가 52,000 여명이나 되었다.
37년 미시건8,800, 48년 위스콘신 등이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연방에 합류했다. 그러나 아직도 서부에는 헬 수 없을 정도의 프런티어(frontier)가 이주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런 땅에 마을이 생기거나 분쟁이 발생하면 영역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지도(地圖)위에 삼각자와 분도기(分度器)를 들어대고 옷감을 마름하거나 칼로 두부를 자르듯 때로는 인근지역과 때로는 경도(經度)와 위도(緯度)에 따라 서슴없이 경계선을 만들었다.
미국의 지도를 보면 주 경계선이 거의 직선으로 되어있고 캐나다와의 국경선도 직선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이민초기 뉴잉글랜드에서 타운십(township)이라는 행정단위가 만들어졌을 때 가로 세로 6마일의 정사각형(약93㎢)을 경계로 자치구역을 설정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자연발생적인 마을이거나 산천을 경계로 했던 다른 지역의 경계선과는 큰 차이가 있고 이런 것이아는 듯 모르는 듯 그들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느닷없이 등장한 것이 삼팔선이라는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당시의 미국방성의 대령 한 두사람이 한반도의 지도를 놓고 중간지점에 선을 그어 남북을 갈랐다.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그 이유였고 이유야 어쨌든 이후 한민족은 미국의 그늘에서 번영을 구가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고통에서 허덕이는 원한의 삼팔선이 되어 지금까지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미국의 영토확장은 1845년 텍사스의 강제 병합과 이로 인해야기 된 멕시코전쟁(1845 ~ 48)의 결과로 캘리포니아를 획득하고 영국과는 오리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오늘날과 같은 대체적인 윤곽이 이루어졌다.
서부로의 진출과정에서 산발적인 인디언과의 마찰도 있었고 멕시코와는 전쟁도치렀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내부적으로 정치적 쟁점이 되어 바람몰이에 성공하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고 그 부작용도 심각하여 미국최대의 내전(內戰) 남북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2) 텍사스(Texas)의 병합
루이지애나 서쪽 텍사스는 1528년부터 스페인 탐험대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스페인으로서는 약탈할 만한 원주민도 금은 등의 귀금속도 없었기에 이곳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이런 곳에 1685년 프랑스가 진출하자 스페인은 선교사를 파견하여 포교(布敎)를서둘렀고 잇따라 스페인 정착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1718년에는 샌안토니오(San Antonio)가 건설되어 가장 중요한 스페인 정착지가 되었다.
19세기가 되면 미국에서는 담배를 대신해서 면화가 새로운 상품작물로 각광을받았다. 면화재배에 아주 적합한 텍사스의 토양과 기후는 당연히 앵글로 아메리카인들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820년 버지니아 태생의 모지스 오스틴이란 사람이 스페인으로부터 텍사스 주 식민지 개척을 허가받아 앵글로 아메리카인들을 모았으나 1821년에 사망했고 멕시코 역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모지스의 아들 스티븐 오스틴(Stephen Fuller Austin/ 1793 ~ 1836)이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기 위해 텍사스로 건너가 새로이 독립한 멕시코 정부로부터 식민허가를 받아 영미계 백인들을 다시 모았다.
당시의 텍사스는 담배재배 이외에도 영미계 백인들이 멕시코 사람들과 물물교환 형식으로 은과 모피 등을 헐값에 살 수 있는 미개지였기 때문에 불과 10년 사이에 식민자의 수가 2만명을 넘었다.
이렇게 숫자가 늘어나자 이에 당황한 멕시코 정부에서는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더 이상의 이주민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텍사스의 식민지 허가도 취소해 버렸다. 이를 즈음 미국의 잭슨 정부는 미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1832년 샘 휴스턴(Sam Houston,본명 Samuel Houston./ 1793 ~ 1863)을 텍사스로 파견했다.
휴스턴은 잭슨 대통령의 정치적인 고향 테네시의 내슈빌에서 변호사를 하면서 정치기반을 굳혀 주 연방 하원 의원과 지사까지 역임했던 인물이다. 어려서는 체로키인디언들 부락에서 자랐고 인디언의 언어와 풍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내와 이혼 후 고뇌를 잊기 위해 인디언 부락에 머물고 있을 때 잭슨 대통령의 권유로 텍사스로 건너갔다.
텍사스로 건너간 휴스턴은 백인들의 지도자가 되어 1836년 멕시코 정부의 조치에 반대, 자신이 텍사스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합중국에 연합하기로 결의했다. 이런 휴스턴의 일방적인 조치에 멕시코가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1836년 3월 멕시코 정부는 병력 6천명을 보내어 산 안토니오의 앨러모(알라모) 요새를 3차에 걸쳐 공격, 요새를 지키고 있던 백인 183명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멕시코 역시 1천 5백여명의 병력을 잃었다.
앨러모란 스페인어로 '미루나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주위에 미루나무가 많았거나 또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만 스페인이 건설할 당시에는 선교를 위한 포교원이었던 것이 1794년 종교적 임무에서 벗어나 군대의 주둔지가 되었다.
앨러모전투가 병력 손실면에서는 멕시코가 열배에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곳의 수비대장 윌리엄 B. 트래비스와 제임스 보이(James Bowie)라는 두 대령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윤색가필하여 소설과 영화로 널리 선전하면서 "앨러모의 정신"이란 미국적인 애국심을 부추겼고 그 영향으로 앨러모 정신은 지금도 텍사스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있다.
이런 저런 사정과 앨러모 전투에 자극받은 텍사스의 백인들은 휴스턴을 중심으로 일치단결, 1836년 4월 21일 800명도 안되는 휴스턴의 군대가 산하신토(지금의 샌저신토)에서1,600명의 멕시코군을 기습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하였고, 휴스턴은 텍사스 공화국의 대통령(1836~38, 1841~44)에 선출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휴스턴의 노력에 힘입어 텍사스는 1845년 미국의 28번째 주(州)로 편입되었으며이때까지 이곳에 살고 있던 3백만의 멕시코인들도 미국에 포함되었다. 이들 멕시코인들은 미국인들과 똑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전제조건을 달았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멕시코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변함이 없다.
텍사스의 주도(州都) 오스틴은 텍사스 개척의 선구자 스티븐 오스틴의 이름을 딴 것이며, 미국 항공우주국(NASA)를 교외에 둔 휴스턴은 샘 휴스턴의 이름에 따른것이다.
(3) 캘리포니아(Califonia)의 병합
일반적으로 변경(邊境)을 뜻하는 프런티어(frontier)란 공식적으로는 1평방 마일(1.6평방킬로미터)당 이주자의 인구가 2인 이상의 지역과 그 이하의 지역을 구분하는경계선을 말한다.
이것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미개지역을 뜻하게 되었고. 이런 미개지역에 문명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문명인으로서의 "명백한 운명"(매니페스트데스티니)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인디언에게 문명의 혜택을 주기 위해 멀고도 험난한 서부로 진출하였다는 것인데 그것은 명분에 불과하고 실제의 동기는 농업과 목축에 필요한 토지를 얻거나 원주민과의 모피거래를 하거나 선교활동 등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것이 1840년대가 되면 이주자가 늘어나면서 매우 다양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면서 이른 바 오리건 통로(Oregon Trail)가모습을 들어냈다.
미주리 주의 인디펜던스에서 오리건 주의 컬럼비아 강 지역까지 장장 3,200㎞에 뻗어 있는이 길은 사막과 인디언 영토를 포함한 바위투성이의 지형을 건너야 한다.
처음에는 모피 상인들과 선교사들이 이 길을 이용하다가 1840년대에 갑자기 오리건으로가는 이주민 마차 행렬로 길을 메우기 시작하더니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이 발견되고 골드러시(goldrush)가 이루어 지면서 오리건 통로가 온통 사람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로키산맥의 북서쪽 오리건은 스페인과 영국 그리고 미국에 이어 러시아까지 끼여들어 복잡한 오리건 문제(Oregon Question)를 야기시켰다.
서로 자기네들이 먼저 탐험했거나 정착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스페인은 1790년 영국과는 눗카 만 회의에서 1819년 미국과는 대륙회의에서 가장 먼저 손을 떼고 물러섰고, 미국과 영국은 1818년의 회의에서 북위 42˚에서54˚40′까지의 로키 산맥 서쪽을 오리건 경계로 최종 확정지은 뒤 이 지역에 대한 양국 공동의 소유권을 확립했다. 러시아는 미국과·영국을 상대로 별도의 조약을 맺고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다(1824~25)
문제의 오리건은 결국 미국과 영국의 공동관리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오리건에 미국인들이 대거 밀려들면서 미국이 단독으로 찾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1844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주의자인 동시에 민주당 후보였던 제임스 녹스 포크(Polk, James Knox / 1795 ~ 1849)는 "54˚ 40′이 아니면 투쟁"(Fiftyfour Forty or Fight)이라는 구호를 내 걸고 바람을 일으켜 휘그당의 헨리 클레이(Clay,Henry / 1777 ~ 1852)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포크는 이듬해인 1845년 미국 제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포크 역시 잭슨대통령이나 텍사스 공화국을 세운 휴스턴과 마찬 가지로 테네시의 내슈빌에서 변호사로 성공한 인물이다. 하지만 산전 수전 다 겪은 클레이의 상대는 아예 되지 못했는데 쟁점을 부각시키는 이런 선거전략이 적중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버지니아 출신의 매파로서 협상의 명수라는 칭호를 얻었던 클레이는 24년 선거에서는 애덤스에게 28년과 32년 선거에서는 잭슨에게, 44년 선거에서는 당선이 확실시 되었으나 포크의 여론몰이 바람을 잠재우지 못하여 또 다시 패배, 결국 대통령의 꿈을 접고 말았다.
1845년 대통령에 취임한 포크는 노예주의 확대를 꺼렸던 대서양 연안 각 주(州)의 반대를 무릅쓰고 텍사스를 합병하여 그해 9월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하였고 스스로 멕시코 전쟁(1846 ~ 48)을 유발하여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빼앗아 1850년에는 캘리포니아를 미국의 31번째 주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포크가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오리건 문제는 미국이 멕시코 전쟁(1846~47)에 몰두하고, 영국 또한 아일랜드 분쟁에 휘말리면서 1846년 오리건 조약이 자연스럽게 체결되었다. 이조약으로 영국은 컬럼비아 강의 운항권을 보장받기로 하고, 두 나라의 경계선은 북위 49˚선을 따라 그어졌다. 공동관리하던 오리건을 절반씩 갈라 공평하게 나눈 셈이다.
1846년 5월에 시작된 멕시코와의 전쟁은 두 나라의 국경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미국이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선이라고 고집한 반면 멕시코는 그 보다 훨씬 북쪽인 뉴에이서스 강이라고 주장, 결국 미국의 선전포고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으나 전쟁은 일방적인 미국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복잡한 국내문제가 얽혀있고 현지 군 지휘관들의 늑장으로 지지부진하다가 47년 9월에는 멕시코의 수도가 점령되고 48년 2월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체결, 전쟁을종결지웠다.
이 조약에서 미국은 멕시코에게 캘리포니아를 얻는 대신 1천 5백만 달러를주기로 하였고 멕시코 정부가 미국인들에게 진 부채는 미국정부가 대신 갚아주며 캘리포니아의 멕시코인 3백만은 미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멕시코와의 조약이 이룩되기 1주일 전인 1848년 1월24일 캘리포니아에서는 소위 노다지(金塊)가 발견되어 골드러시의 물결이 일어났다. 금이 발견된 장소는 현재 캘리포니아의 주도(州都)인 새크라멘토의 인근에 있는 하(下)새크라멘토계곡(LowerSacramento Valley). 발견자는 제임스 마샬(James Marshall)이라는 뉴저지 출신의 직공(職工), 이런 소문이 퍼지자 미국의 본토는 물론이고 멕시코와 중남미, 하와이와 중국에서까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49년 '포티 나이너'(fortyniner)라 해서 하던 일을 팽개치고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간 사람들이 줄 잡아 10만 명을 넘었고 이들의 통로는 대서양에서 파나마 지협을 건너 태평양에 이른 후 배를 타거나 육로를 걸어서 캘리포니아 해안에 다달았거나 머나 먼 남미대륙을 돌아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향했다.
어중이 떠중이가 다 모인 이런 판세에 한 몫 챙기려는 무법자(無法者)까지 등장, 서부영화에서 자주 보는 무법자가 생긴 것도 이 때 부터라고 한다.
여하튼 이후 10년간 이 지역에서 채굴한 금을 돈으로 환산하면 당시 금액으로 약 5억 5천만 달러,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1천5백만 달러를 주고 샀고 48년 멕시코와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캘리포니아를 양도 받는 대가로 준 돈 역시 1천 5백만 달러라면 5억 5천만 달러는 글자 그대로 거금이라 할수 있다.
이 덕에 캘리포니아는 인구가 급증, 변방의 쓸모없는영토가 미국의 영토로 편입된지 불과 2년만에 정식 주로 승격하였고 미국은 수백배 수천배의 남는 장사를 하게 되었으나 상대적으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잃은 멕시코는 오늘날까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대통령 포크는 매니페스트 데스테니의 실천자자로많은 영토를 편입시켜 거의 오늘날 수준의 미국의 영역을 확보했지만 그 부작용 또한만만치를 않았다. 최대의 쟁점이었던 노예문제를 두고 남북전쟁의 뇌관(雷管)은 이미초 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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