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미국 주변의 국가들(1) - 히스파니올라의 아이티 공화국

구름위 2013. 1. 19. 11:42
728x90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 아이티(Haiti)

 

영국의 산업혁명과 미국의 독립 그리고 프랑스혁명 등은 서구세계의 변혁은 물론 그 파장이 세계도처에 퍼져나갔다.

 

식민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1804년 아이티를 시작으로1811년 파라과이,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13년 콜럼비아, 16년 아르헨티나, 18년칠레, 21년 페루와 멕시코, 도미니카 공화국, 22년 브라질, 25년 볼리비아와 우루과이 등이 독립을 하게되고 쿠바는 1898년에 파나마는 1903년 콜럼비아에서 분리하여 각각독립을 하게 된다.

 

이들 나라들이 독립을 하게된 19세기 초 라틴아메리가의 전체인구는 약 1천 7백만, 지역별로는 멕시코가 6백만, 브라질이 3백 80만, 뉴그라나다(멕시코와페루 사이) 2백 50만, 페루 1백 50만, 아르헨티나 1백만, 칠레 80만 베네수엘라에 75만 정도가 살고 있었다.

이들을 다시 인종구성별로 나누면 원주민인 인디오가 7백 50만, 흑백혼혈인 물라토(mulatto)가 5백 30만, 백인 320만, 흑인 77만, 나머지는 메스티소(mestizo)라고 부르는 원주민과 백인과의 혼혈로 이룩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미루어 보면 메스티소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찾이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는 달리 당시까지는 원주민인 인디오와 물라토가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인구의 절대다수를 찾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인디오나 물라토가 본국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이해관계에 따라 독립을 왜치기에는 이를 이끌 만한 지도자나 조직도 없었고 지식의 축적과 경제력도 없었으며 독립을 감당할 만한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크리올(Creole)이라 불렀던 식민지 태생의 백인(白人)들에 의해서 추진되고 이룩되었다.

 

스페인이 개척한 아메리카 식민지에는 페닌슐러(Peninsular)라고 불렀던 30만 정도의 본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요직을 찾이했고 이보다 열배 정도나 더 많은 식민지에서 태어난 크리올(Creole)들은 공직(公職)에 나갈 수가 없었다. 이런 차별대우에 반발한 것이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의 독립운동이고 실제로 멕시코를 비롯한 여타 지역에서 독립을 주도했던 것도 이들 크리올이었다.

 

이런 독립운동이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그럴 때마다 본국에서 파견된 군대에 의해서 좌절되다가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 등에 영향을 받아 다시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어 19세기 초반이 되면 앞서 열거된 것과 같이 많은 나라가 독립을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1804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쟁취한 아이티(Haiti)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식민지도 아니었고 크리올(Creole)이주도한 것도 아닌 순수 흑인들 그것도 노예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현재의 지도를 읽어보면 카리브해에 위치한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쪽에는 도미니카공화국이 서쪽에는 아이티 공화국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너무나 가난한 주민들이 해마다 불어닥치는 허리케인과 싸우면서 모진 생명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들의 행복지수는 가난과는 반대로 매우 높다고한다.

 

1492년 콜럼버스 일행이 이 섬을 발견한 후 에스파놀랴(Espanola)라고불렀고 이것이 영어권에서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로 와전되었으며 스페인 식민지시대에는 수도 이름을 따 산토도밍고(샌도밍고)라고도 불렀다.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후 겨우 반세기 이전에 원주민인 아라와크족은 혹독한 식민정책의 채찍에 죽거나 혹은 병들어죽기도 했고 살아 남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산간지대로 도망가서 다시는 그 모습을나타내지 않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콜럼버스가 발견할 당시의 이곳인구는 약 20만, 이것이 20년이 지난 1510년 대에는 1만 4천을 넘지 못했고 30년이 지난 1520년대에는 200명에 불과했다. 스페인의 식민정책이 이곳 섬 사람들을 모조리 죽게만들거나 도망가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 섬의 식민자들은 아프리카로부터 흑인노예들을 비싼 값으로 사들여 노동력에 충당했고 이로 인해서 이 섬은 흑인들이 절대다수의 인구를 구성하게 되었으며 스페인 정착지는 섬 동쪽의 끝에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섬의 서쪽에는 아직 이렇다 할 유럽열강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고 이런 틈새를 비집고 프랑스의 해적들이 들어와 섬의 서쪽에서 농장(플랜테이션)을 세우고 1644년에는 북서쪽의 포르드페를 차지했다. 곧이어 프랑스의 서인도회사는 포르드페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1697년 프랑스는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부분을 생도미니크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식민활동을 시작했다.

 

이래서 생도미니크 즉 아이티는 서인도제도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1700년대(18세기)에는 목화 사탕수수 커피 인디고 등을 재배하여 상당한 경제적 번영을 누렸고 프랑스 식민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되었다.

 

18세기 후반, 미국의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이티의 인구는 53만 6천으로 불어났다. 이 가운데 48만이라는 절대다수가 흑인노예들이었고 나머지 소수의 백인과 물라토가 지배계급으로 있었다.

 

프랑스는 본국과는 별도로 식민지 아이티에서 7백명의 흑인 노예들을 이끌고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 1779년사베나 전투에서는 미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곤경에 빠졌을 때 이들 아이티출신의흑인노예들의 활약으로 겨우 영국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 흑인노예 병사들은 미국독립전쟁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들이 아이티로 돌아가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 1743?~ 1803)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흑인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정부 및 생도미니크의 백인지도자들로부터 해방을 얻었다.

 

1801년 투생의 혁명정권은 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에 해당하는 섬 동쪽까지 찾이, 섬 전체를 장악했고 프랑스 혁명정부의 승인까지 받았다. 그러나 본국 프랑스가 나폴레옹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이곳의 사정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대륙에 식민제국을 건설할 꿈을 가졌던 나폴레옹은 1802년 군대를 파견, 아이티를 다시 점령하려 했다.

 

이런 나폴레옹의 계획은 황열병(黃熱病 - yellow fever)에 의해서 중지되고 말았는데, 일명 흑토병(黑吐病)이라고 불리는 악성 전염병이 때맞추어 기승을 부리자 1803년 프랑스군은 반란 지도자 투생을 사로잡아 본국으로 철수했다.

 

프랑스로 잡혀간 투생은 " 나 하나를 죽인다고 해서 흑인의 자유라는 나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단지 가지 하나를 잘라 내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자유의 나무는 뿌리가 깊어서 꺾인 가지에서는 곧 새로운 가지가 다시 돋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투생은 이런 말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않아 죽었지만 그의 예언대로 아이티의 흑인들은 나폴레옹정권과 싸워 1804년 1월1일 독립을 선포, 세계역사상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세웠고 아이티라는 국호는 이곳 원주민 언어인 이라와크어(語)에서 "산이 많다"는뜻이라 한다.

 

황열병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나폴레옹정부가 힘에 겨워서 아이티의 독립을 수수방관한 것은 물론 아니고 유럽대륙의 사정이 너무나 급했기에 방치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이티가 비록 독립은 했지만 안정된 정권을 수립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있었고 장피에르 보이에라는 인물이 통치했던 1813∼43년을 제외하면 19세기 동안 암살과 혁명으로 얼룩진 정권교체를 계속경험해야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른 바 라틴아메리카라고 부르는 중남미 일대와 앵글로 아메리카라고 부르는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는 모든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를 두고 근년에는 중남미 일대에서 종속이론(從屬理論 - dependencytheory)이라는 것도 제기되었고 해방신학(解放神學 - theology of liberation)이라는 색다른 논쟁도 일어났다.

 

잘살고 못사는 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수도 있고 거기에 걸맞는 이론을 정립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듯 하다.

 

주변환경과 사람에 따라 가난해 질 수도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가난하다고 불행한것도 아니고 부자라고 해서 꼭 행복한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미국이라는이웃 때문에 영토적으로 최대의 피해을 입었다는 멕시코의 사정은 어떻게 돌아가고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