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발전 - 먼로주의(1)
나. 먼로주의(Monroe Doctrine)
1. 1812년 전쟁
(1) 영국의 추밀원 칙령과 미국의 대통령 매디슨
1809년3월,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 일컬어진 제임스 매디슨(Madison, James / 1751 ~ 1836)이 미국의 제 4대 대통령(1809 ~ 17)으로 취임했다.
매디슨이 태어난 곳은 외조모가 살고 있던 버지니아의 포트콘웨이, 그러나 그는블루리지 산맥이 바라다 보이는 몬트필리어에서 일생을 보냈다.
매디슨의 가계(家系)는 오린지군의 유지로서 5천 에이커의 방대한 농장과 많은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1769년 프린스턴대학의 전신인 뉴저지대학에서 4년의 교육과정 중 2년을 수료하고 당시 미국을 풍미하던 반영운동의 대열에 메디슨도 끼여들었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에는 버지니아 주 혁명위원회(식민의회의 전신)에 가담하여 종교의 자유를 역설하였고, 버지니아 주 의회 의원(84 ~ 86)과 버지니아 대표로 대륙회의에 참석(87 ~ 88)하였다.
1787년 대륙회의에서 미연방 헌법제정회의가 구성되었을 때 버지니아 대표로 출석하여 미국헌법의 초안(草案)을 맡았고, 각 주(州)가 사정에 따라 연방헌법의 비준을 미루자 A ,해밀턴, J, 제이 등과 함께 85편의 연작 논설 페더럴리스트(The Federalist Papers)의 집필 구성원이 되기도 했다.
그의 정치노선은 철저하게 제퍼슨을 따랐으며 제퍼슨의 행정부에서는 국무장관으로 지내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외모에서는 가냘픈 몸매에 앳된 음성이 제퍼슨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논리 정연한 그의 연설은 어느 웅변가 못지 않았다고 한다.
매디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독립선언 후 어느 듯 한 세대가 경과되어 독립전쟁의 주역들은 대부분 뒷자리로 밀려나고 소위 권력의 세대교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매디슨자신은 평화를 옹호했지만 헨리 클레이(Clay, Henry / 1777 ~ 1852)를 중심으로한 호전주의자(好戰主義者)들이 대거 등장하여 영국과의 일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급기야는 영국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1812년 6월에서 14년 말 까지 미국과 영국은 어떻게 보면 명분도 실리도 어정쩡한 전쟁을 치루어야 했는데 그 속 사정에는 대략 이런 내용들이 포함되고 있었다.
앞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에서는 1807년 추밀원칙령(樞密院勅令- order in council)을 발표하여 프랑스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고 중립국의 접근을 막았다. 나폴레옹이 베를린칙령으로 대륙을 봉쇄하여 영국을 고립시키고자 했다면 해군력이 우세한 영국은 바다를 봉쇄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고자 발표했던 것이 이때의 추밀원칙령이다.
유럽의 두 강자(强者) 영국과 프랑스가 팔츠계승전쟁(Pfalzischer Erbfolgekrieg- 1689 ~ 97) 이래 계속된 길고도 지루한 제 2의 백년전쟁에서 대미(大尾)를 장식한 것이 이른 바 나폴레옹 전쟁이었고, 그 불똥이 미국에까지 튀어 미국 상선이 공해상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해군에 의해서 나포되거나 영국해안으로 끌려가 비싼 관세를 물여야만 했다.
이에 항의하는 수단으로 당시의 제퍼슨 정부에서는 수출입금지법을 만들어 아예 교역자체를 중단해 버렸다가 임기를 불과 이틀 앞두고 통상금지법을 만들어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의 통상은 재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의 교역을 방해하는 한 미국의 대외수출입은 원활히 수행될 수가 없었다. 이에 매디슨은 대통령에 취임한지 불과 2주일 후 영국과 프랑스에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 비밀 접촉을 시도했고 프랑스로부터는 적국(영국)과의 무역이라 할지라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영국과의 교섭에서는 시작과결과가 전혀 딴판으로 내용이 뒤바뀌고 말았다.
미국에서는 영국의 추밀원칙령이 즉각 철회되고 어떤 경우라도 통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으로 알았으나 영국에서는 미국이 대프랑스 통상금지규약을 변함없이 준수하며 영국의 적성국가들에 대한 전시무역을 중지하고 프랑스와의 교역을 시도하는 미국 상선들에 대한 영국의 나포권을 인정한다는 전제조건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합중국의 통상무역에 대한 영국 정부의 제재가 장래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매디슨은 1810년 11월 2일 영국과의 교류단절을 선포했고 같은 날 프랑스 정부에 영국이 통상제재조치를 철회하지 않는 한 전쟁의 위험도 불사하겠다는 요지의 외교전문을 영국에 발송했다.
(2) 서부로의 진출과 인디언과의 문제
1803년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서부로 이주했다. 이런 미국의 영토 팽창은 인디언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영토가 서쪽으로 확장될수록 인디언도 계속 서쪽으로 밀려났다.
이들 인디언들은 미국인의 말재주나 위스키에 흘려서 스스로 땅을 내놓기도 했고 혹은 싸움에 지고 처량한 몰골로 더 서쪽으로 옮겨 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15년 사이에 미국인들이 인디언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는 무려 4천 8백만 에이커, 인디언의 땅에 미국인들은 그들의 낙원을 건설하기에 여념이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인디언들이 미국인들의 달콤한 약속이나 위스키에 흘려서 땅을내준 것도 아니고 싸움에 지고 땅을 빼앗긴 것도 아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인디언 중에는 더욱 단합하여 삶의 터전을 지켜야 한다는 기운도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그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알공킨어를 사용했던 쇼니(Shawnee)족의 추장 테쿰세(Tecumseh,혹은 Tecumthe, Tikamthe, Tecumtha / 1768 ~ 1813)의 형제들과 이에 따랐던 다수의 인디언들, 미국인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했던 이런 인디언들에게 미국의 피해도 상대적으로 늘어났다.
1768년 오하이오 스프링필드 근처의 인디언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테쿰세는 그가 여섯 살이 되던 1774년 그의 아버지가 백인들에게 살해되었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부족 사람들을 따라 미주리로 떠난 후 행방이 묘연했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테쿰세는 누님의 보살핌으로 근엄한 인디언 교육을 받았고 형들로부터는 숲과 사냥에 대한지식을 익히면서 195 ㎝의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14살이 되던 해에 영국군에 가세하여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을 시작으로 미국인들과의 투쟁은 그의 일생일대의 과업이 되고 말았다. 부모를 앗아간 미국인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가 필수적인 인디언의 풍속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로잡힌 미국인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동족의 흉악한 모습에 소름을 느끼기도 하였고 미국인들이 만든 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위스키에 혼이 빠진 인디언에 대해서도 그의 시선은 곱지를 못했다.
그 자신은 늘 양가죽으로 만든 간소한 옷을 입었으며 허리에는 도끼와 은으로 된 자루가 달린 사냥용 칼을 차고다녔다. 그런 그가 인디언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1794년 8월 20일 오하이오 주 모미 강 부근 마이애미 요새 근처에서 있었던 폴런 팀버스 전투(Battle of Fallen Timbers)에서 북서 인디언 동맹이 미국의 앤소니 웨인(Anthony Wayne별명은 Mad Anthony Wayne./ 1745 ~ 1796) 장군이 이끈 미국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하고 1795년 8월 그린빌조약(Greenville, Treaty of)을 체결하여 오하이오의 대부분과 일리노이, 인디애나, 미시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잃고 난 후가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부연하면, 미국의 팽창주의에 맞서기 위해 인디언 부족이단합,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고 미국과의 일전을 치렀지만 당시의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미국을 자극한다는 것이 여러 면에서 이롭지 못했기 때문에 인디언을지원을할 수가 없었다. 이런 가운데 전투는 벌어졌고 2천명의 인디언 연합은 미치광이(Mad)라는별명을 가진 미국의 총사령관 앤소니 웨인에게 참패, 인디언 동맹을 대표한 마이애미족의 추장 리틀 터틀(Little Turtle - 작은 거북)을 상대로 미국은 그린빌 조약을 체결하고 캐나다의 인디언 문제는 그럭저럭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쇼니족의 추장 테쿰세는 조약체결의 교섭단계에서부터 미국과의 화평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조약이 체결된 후 건장한 체구와 능숙한 달변(達辨), 그리고 신적 영감까지 얻었다는 그의 형과 힘을 모아 많은 인디언들을 규합, 세를 늘리고 미국에 다시 대항했다. 결국 그린빌조약은 테쿰세에 의해서 파기된 모양새가 되고 인디언과의 산발적인 전투는 계속 벌어지고 말았다.
테쿰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809년에는 미국의 새로운 대개간지로 이동, 새로운 낙원을 건설코자 모여 들었던 미국인들을 아연 긴장시켰다. 그러다가 1811년 11월에는 인디애나 서쪽을 흐르는 티피커누 강(Tippecanoe R) 기슭에서 미국과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티피커누 전투(Battle of Tippecanoe)라고 부르는 이 싸움에서 쇼니족은 참패를 면치못했고 미국은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런 인디언의 돌발적인 태도에 많은 미국인들도 피해를 입었으며 뒤에서 영국이 이들 인디언들을 부추겼기 때문이라는 속단을 내렸다.
영국이 뒤에서버티고 있는 한 인디언과의 전쟁은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강한 주장을 하게 되고, 인디언과의 전쟁을 근원적으로 없애기 위해서는 그 배후세력인 영국을 걲어야 된다는 색다른 논리가 전개되었다. 이들 강경론자들을 매파라고 불렀다.
(3) 1812년 전쟁
1812년 합중국 대통령 매디슨은 영국과의 밀약설로 곤혹스러운 가운데 연임에는성공했으나 그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1812년 6월, 영국과의 전면전을 선언하는 선전포고에 서명, 영국과의 전쟁에 돌입함으로서 국면타개를 시도했다.
매파의 주장대로 영국이 인디언을 부추겨 미국에 도전케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캐나다의 영국인 총독이 다른 사정으로 테캄세의 쇼니족을 지원하고 인디언 연합전선의 결성을 돕기는 했지만, 1794년 폴런 팀버스 전투에서도 인디언을 지원하지않았듯이 이후에도 영국은 인디언에게 무기를 공급하거나 전쟁을 부추기고 지원한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을 원했던가?
서부와 남부의 농업지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매파들이 노린 것은 그들이 군침을 삼키고 있던 서부에 펼쳐있는 광활한 인디언의 땅을 얻고자 함이고,
여기에 인디언전쟁으로 부모형제 및 처자식을 잃은 많은 사람들의 원성이 힘을 실었으며 남부의프랜터들은 그들의 제 2의 고향 플로리다가 스페인의 수중에 있었고, 그 스페인이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었다는 것도 변수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영국의 해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경험했던 뉴잉글랜드의 상인이나 제조업자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한사코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이야 말로 나폴레옹의 야심을 막아주는 최후의 희망이라 여겼다. 이렇게 엇갈린 가운데 시작된 대영 전쟁에서 미국은 전쟁기간 정규군 5만, 지원병 1만, 주 방위군 45만을 동원했고 영국은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했을 때라 할지라도 1만 7천명을 넘지 않았다.
그럼에도 초기 전황에서 미국은 절반의 승리에만 머물러야 했고 체서피크만 일대의 해안은 영국의 육해군에게 봉쇄당했으며 1814년 8월 24일에는 수도 워싱턴 D C가 2백명의 영국군에게 짓밟히고 공공건물이 불타는 수모까지 당했다. 그렇다고 영국이 얻은 것도 없었다.
별 성과 없는 전쟁에 지친 두 나라는 1814년 12월 24일 벨기에의 겐트에서 조약(條約)을 체결하고 전쟁을 끝냈다. 두 나라의 전력이 비슷한 상태에서 맺어진 겐트조약(Treaty of Ghent)에서 어느 쪽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양보를 상대방에게 얻어내지는 못했고, 전쟁 전의 상태를 유지하는데만족해야만 했다. 이 전쟁을 당시의 반대파 페더럴리스트들은 매디슨씨 전쟁(Mr.Madison's War)이라 혹평했고 영국에서는 1812년 전쟁이라 불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영미전쟁 혹은 제 2의 독립전쟁으로 부르기도 했다.
미국전쟁사에서 악평을 받았던 이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미국은 많은 것을 얻었다. 미국은 이 전쟁의 결과로 어느 나라를 상대하건 실질적으로 독립국가의 대우을 받았고 조약의 내용에는 인디언에 대한 어떤 언질도 없었으나 실제로는 미국의 포장마차가 루이지애나를 향해서 마음놓고 달려갈 수 있었고, 그 결과 북서부에 있던 영국의 땅이 모두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어 이 지역으로의 팽창을 바랐던 매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리고 전쟁에는 영웅을 탄생시킨다. 이 전쟁에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한 것이 앤드류 잭슨(Jackson, Andrew / 1767 ~ 1845), 이 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그는 1829년 미국의 7대 대통령이 되어 소위 미국의 잭소니언 데모크라시(Jacksonian Democracy)의시대를 열었다.
또 하나 미국의 국가(國歌)인 "성조기의 영원하라"는 가사가 1814년 프란시스 스콧트 키(Francis Scott Key / 1779~ 1843)에 의해서 쓰여졌고, 술을 찬양하는 영국 노래 "천상의 아나크레온에게(To Anacreon in Heaven)"의 가락에 붙인 이 가사는 곧 미국 전역에 퍼졌다. 이것을 미국의 육해군이 국가로 채택했고, 1931년에 의회가 공식국가로 채택하여 지금의 미국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먼로주의(2)
나. 먼로주의(Monroe Doctrine)
2. 먼로선언
(1) 화합의 시대(Era of Good Feelings)와 대통령먼로(Monroe, James / 1758 ~ 1831)
1815~25년 사이의 기간을 미국에서는 화합의 시대라 한다.
1812년 전쟁 혹은 제2의 독립전쟁이라 불리는 영국과의 전쟁도 그럭저럭 잘 해결되었고 모처럼 유럽의정치와 군사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과의 전쟁은 이를 반대했던 뉴잉글랜드가 연방에서 탈퇴할 조짐까지보임으로서 합중국 자체가 해체 될 위기까지 몰고 갔었다.
매디슨 정부가 서둘러 영국과 겐트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 하게 된 이면에는 이런 국내문제도 해결하지않으면 안될 절박한 사정도 포함하고 있었다.
자칫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더라면 남북전쟁(Civil War)이라는 내전(內戰)이 50년 앞당겨 이때일어났거나 두 개의 합중국(미국)으로 갈라서는 분열을 초래할 뻔했었다.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독립 후 반세기를 이어면서 연방파는 몰락하고 사실상 버지니아를 축으로하는 남부의 공화파가 모든 것을 독점하면서 정쟁(政爭)은 사라지고 국론(國論)은 통합되는 듯 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화합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1816년 대통령을 뽑는 선거인 단은 공화파인 먼로(Monroe,James / 1758 ~ 1831)를 대통령으로 당선 시켰고, 1817년 대통령에 취임한 먼로는 20년에는 단 한명이 반대했을 뿐 절대다수가 지지하여 연임에 성공하는 기염을보였다.
먼로 역시 버지니아의 웨스트모어랜드 출신으로서 대학 재학중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1776년부터 독립전쟁에 참전, 이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매디슨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하다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버지니아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3대 토마스 제퍼슨, 4대 제임스 메디슨에 이어 5대 먼로까지 잇달아 4명의 대통령을 배출하여 합중국의 대통령을 싹쓸이 하다싶이 함으로서 굳건한 기반을 다져 나갔고 이것을 어떻게 보면 지역편중이라 할 수 있지만 일관된 정책의 기조(基調)가 화합의 시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먼로 대통령의 재임기간은 그들이 화합의 시대라고 말하는 1817년부터 25년까지 8년간이다. 그렇다면 이 기간 합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불평없이 글자 그대로 화합(Good Feelings)된 분위기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역감정까지 겹치는 갈등의 시대가 또한 이 시기에 해당한다.
갈등의 뿌리는 합중국 정부가 탄생하고 그 이듬해가 되는 1790년 합중국은행(United States, Bank of the)의 설립문제와 뒤이어 등장한 프랑스혁명 전쟁의 지원을 둘러싸고 이미 시작되었다.
제퍼슨을 대부(代父)로 하는 이른 바 주권론자(州權論者)들, 즉 강력한 중앙집권보다는 지방분권을 주장했던 일련의 정파들은 합중국은행의 설립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 프랑스 혁명전쟁의 지원은 적극 찬성, 이에 반해서 해밀턴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연방정부의 구성을 원했던 사람들은 합중국은행의 설립을 강력히 주장, 프랑스혁명전쟁 지원은 절대 불가, 이런 입장 차이를 두고 공화파와 연방파로 갈라졌고 이것이 미국의 양대정당 민주당과 공화당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렇게 의견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1791년 해밀턴은 의회를 설득하여 20년간의 기한부 연방은행을 필라델피아에 설립하고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고, 프랑스혁명전쟁의 지원문제는 대통령 워싱턴의 중립 선언으로 겨우 무마되었다. 사정이야 어쨌든 연방파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1811년 연방은행의 기한이 만료되자 당시의 대통령 제퍼슨은 이를 연장하지 않아 연방은행은 없어지고 주(州) 단위의 개별은행들이 발권(發卷)을 포함한 은행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바로 화합의 시대라고 불리는 1816년 대통령 매디슨은 권한이 강화된 20년 기한의 연방은행을 다시 설립했고, 미국 사상 최초로 보호관세법을 제정했다.
제퍼슨의 분신이나 다름 없었던 매디슨 역시 연방은행의 설립이나 보호관세는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가 반대했던 이유는 연방은행을 설립하면 지방정부가 약화되고,보호관세를 만들면 물가를 앙등시키고 국민생활이 어려워 진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연방은행을 설립하고 보호관세법을 만들었다.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보호무역 정책이 필요했고 은행의 과잉신용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중앙은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건 비판은 쉽지만 성공하기란 힘든다. 훈수(訓手)꾼이아닌 국정의 책임을 맡은 매디슨 일파로서는 이런 강수(强手)를 쓸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은행이란 예금보다는 통화발행(發卷)이 주된 임무였기 때문에 은행이 고객에게 대부하는 은행권이 화폐로서 유통되었으며 이런 은행권이 총통화 유통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것이 경제규모가 커지 않을 때는 그런대로 유지가 가능했다. 그러나 독립 후 미국은 면방(綿紡)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공업화가 진전되고 제퍼슨의 수출입금지법은 국내 산업을 더욱 촉진시켰다.
급속한 경제 성장은 보다 많은 대출수요를 발생케 했으며 이것이 은행의 과잉신용팽창으로이어지면서 많은 문제들이 불거졌다. 은행이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마구잡이 대출에 열중하다 보면 유동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돈을 갚아야 할 고객이 제때 갚지 않으면 부실(risk)을 초래하게 되고 예금고객이 한꺼번에 돈을 찾으려고 하면 은행은 도산한다. 은행이 도산하면 그 영향은 일파만파로 이어진다.
따라서 은행이 무리하게 신용을 확대해서 은행권을 남발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 매디슨으로서는초미의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합중국은행이 없어지고보니 문제는 더욱 난감했다. 그래서 이런 궁색한 변명으로 보다 권한이 강화한 합중국은행을 만들었다. "해밀턴은 국민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합중국은행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연방의회가 승인하고 국민적 합의가 이룬 상태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위헌(違憲)은아니다,......"
국민의 합의라고 매디슨은 주장했지만 그 반대는 극심했고 이것이 1832년 대통령선거에서 중요 쟁점으로 부상되어 당락의 영향까지 미쳤다. 이것을 미국에서는 은행전쟁(BankWar)이라 한다.
(2) 먼로선언(Monroe Doctrine)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화합의 시대라고 불렀던 미국의 5대 대통령 먼로의 재임기간(1817~ 25)이 그들이 말한 대로 결코 평화로운 시기는 아니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817년에는 소위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이라 하는 플로리다인디언과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1819~21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 획득, 1820년에는 노예제도의 존폐여부를 두고 벌어진 미주리 타협, 1822년의 라틴아메리카 신생독립국 승인, 1823년 12월 2일 공표된 외교선언등을 들 수 있다.
미국의 국내문제를 두고 보면 아무래도 남북전쟁의 서막이라 할 수 있는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이 가장 격렬했고 따라서 관심의 대상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그들의 국내문제이고 우리들이 관심을가지는 것은 미국 외교의 방향을 설정했다는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이라 할수 있다.
먼로선언, 먼로주의라고 부르는 이 선언이 향후 미국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고보기 때문이다.
먼로선언 혹은 먼로주의라고 부르는 먼로 독트린의 내용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불간섭 정책이 그 기본 골격이다. 1823년 12월 2일 먼로가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먼로는 이렇게 밝혔다.
"자유와 독립을 선택하고 이를 유지해온 라틴아메리카제국(諸國)은 앞으로 유럽 어느 나라의 식민지도 될 수 없다. 아메리카 여러 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형태를 갖춘 유럽의 여러 나라가 아메리카 대륙에 이를 확대하려 한다면 이것은 곧 미국의 안전과 평화에 대한 위협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유럽 어느나라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듯이 앞으로도 개입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이것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미국은 유럽 열강의 국내문제나 열강 사이의 세력다툼에 개입하지 않는다.
②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기존 식민지와 보호령을 인정하고 간섭하지않는다.
③ 장차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식민지 건설을 엄금한다.
④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의 어떠한 나라라도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면, 이는미국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될 것이다.
이것이 비록 선언이라고는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유럽 열강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은 것이다. 이런 배경이 등장한 이면에는 미국으로서는 풀어야 할 세가지의 과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미국의 영역에 관한 그들의 욕심이다. 미시시피 이동을 그들의 조국으로 정하고 그 밖의 지역들, 이를태면 캐다다를 포함한 북서부지역과 남서부를 포함한 전 라틴아메리카에는 반드시 공화국이 들어서야 하고, 그공화국은 미국의 영향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서부쪽에서는 러시아와 남쪽에서는 멕시코를 교섭대상으로 내심 삼고 있었던 일이 틀어지게되었다.
남쪽의 멕시코는 복잡한 국내문제로 여력이 없었고 북쪽으로는 러시아가 아니라 영국이 계속해서 캐나다를 거점으로 세력확대를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 물러 날 것으로 믿었던 영국이 계속 버티고 있는 한 교섭의 대상은 갓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러시아가 아니라 껄끄러운 영국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대륙이 경황이 없는 사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던 아이티가 1807년 독립을 선언하여 흑인공화국을 세운것을 시작으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독립정신을 수입해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부터 잇달아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들 신생국가들 모두가 독재와인종차별로 다시 거센 반발이 일어났고 거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게 되자 이번에는 이런 틈을 노리고 유럽의 열강들이 라틴 아메리카에 진출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의 영역주의는 처음부터 차질이 생길 뿐만 아니라 코 앞에 강력한국가가 등장하면 안보에도 큰 위험이 따르게 된다.
셋째, 라틴 아메리카의 시장은 미국으로서도 매력적인 곳이다. 급속도로 성장한 미국의 산업은 새로운 시장을 필요로 했고 그 시장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곁에서 찾는 것이 훨씬 편하고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런 눈치를 감지한 영국의 외상 캐닝(Canning, George/ 1770 ~ 1827)은 미국에 대해서 이런 제의를 했다.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가 라틴 아메리카를 넘보지 못하도록 영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자......."
영국으로부터 이런 제의를 받은 제퍼슨 등의 미국의 원로들은 영국의 제의를 받아들일 뜻이 있었다. 그러나 국무장관으로 있었던 존 퀸시 애덤스(Adams, John Quincy / 1767 ~1848)는 이런 제안을 받아 들일 경우, 합중국의 팽창이 제한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의 체제가 유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이유로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갑론을박 끝에 애덤스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의 공동제의를 거부함과 동시에 미국 단독으로 성명서를 내기로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23년 12월 3일, 대통령의 연두 교서 형식으로 발표된 미국의 대(對)유럽 성명서, 이것이 먼로 선언이다.
발표는 먼로 대통령의 이름을 붙였지만 내용과 문안의작성은 미국의 2대 대통력 존 애덤스의 장남으로서 먼로 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있던 존 퀸시 애덤스의 작품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유럽의 여러나라를 여행한 경험이 있었고 이런 바탕에서 이룩된 탁월한 그의 외교능력은 먼로의뒤를 이어 1825년 미국의 6대 대통령 자리에 그를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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