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앵글로아메리카(Anglo America)

구름위 2013. 1. 1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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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사람들

 

(1) 프리 홀더(free hold)의 세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샌티 삼각주 근처의 케이프로맹 국립야생생물보호지에 있는 해안평원의 일부"거기에는 누구나 집과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태양은 언제나 빛난다......" 이것은 17세기 영국에서 애창되었던 이주자의 노래(Emigrant Song)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거기라는 것은 앵글로 아메리카를 말하는 것이고 앵글로아메리카에는 빛나는 태양과 아담한 집, 그리고 무한정의 일자리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런 매력적인 곳이 있다면 가난에 찌든 사람들 뿐만아니라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도전해보?은 욕망은 결코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유럽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종교 등 모든 면에서 불만이 있는 사람은 물론, 여타의 많은 사람들이 앵글로 아메리카로 향했다.

 

이들이 현지에 도착하면 땅은 무한정이고 간섭하는 사람도 간섭 받을 사람도 없었다. 제도라는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방과 자유의 이면에는 이들은 보호해줄 아무런 장치도 기구도 없었고 이에 따른 위험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땅을 개간하기 위해서는 아름들이 나무를 뿌리채 들어내야 하고, 독사(毒蛇)와 독충(毒蟲)을 비롯한 맹수(猛獸)의 위협은 잠시라도 한눈 팔 겨를조차 없었고, 낯선 이웃은 언제 변심할지 모르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리고, 예고 없이 등장하는 인디언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런 것이 초기 이민자들이 겪여야 했던 고통이다. 처지가 이렇다면 이들이 믿을 곳은 자신과 가족뿐,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총(銃 - rifle, gun)은 필수적이다. 흔히들 일본을 칼의 문화라고 한다면 미국을 총의 문화라고 한다. 지금도 미국에는 1억 정(錠) 이상의 총을 민간이 소지하고 있다고 하며 그 부작용 또한 매우 심각하지만 이를 회수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것이 미국의 전통인 동시에 힘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앵글로 아메리카는 이민 1세대가 겪었던 고통과는 아랑곳 없이 유럽의 구제도(봉건제도)가 없는 신천지로서의 각광을 받게 되었고 이런 매력에 이끌려 신천지를 찾아 현지에 도착하면 유럽에서는 한뼘의 땅도 갖지 못했던 사람들도 우선적으로 토지를 소유한 자유로운 지주(地主)가되었다. 이들 자유로운 지주들을 프리 홀더(free hold)라고 불렀다. 자신의 힘으로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했다는 점에서는 자작농(自作農)이라 할 수 있고, 농업이외에 다른 소득원(所得源)을 가지고 있거나 조세(租稅)를 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니국가의 전업 농부와는 차이가 있었다. 이런 부류가 앵글로 아메리카의 중요 구성원이 되었다.

 

일부 정기 계약에 의한 노동자나 노예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지주인 동시에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이른 바 프리 홀더였다. 실제로 뉴잉글랜드에서는 총인구의 90% 이상이 프리 홀더였고, 그 가운데 매사추세츠의 경우, 항구도시에만 약간의 노동자가 있었을 뿐 다른 곳의 주민들은 프리 홀더였다. 그리고 노동자라할지라도 노동임금에만 얽매인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어느 정도의 토지는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노동자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런 사정은 남부의 버지니아에서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몇 백, 몇 천, 혹은 몇 만 에이커를 소유한 이른 바 플린터(planter)란 이름의 대농장주는 400 명 정도에 불과했고, 주민의 대다수는 이런 프리 홀더였다고한다. 이것은 식민지인들의 경제적인 자립과 동시에 참정권(參政權)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하고 실제로 이들 식민지인들은 주민자치에 열심히 참여하여 새로운 정치문화를 이루어 나갔다.

 

다시 말하면 영국을 비롯한 당시의 유럽에서는 참정권을행사할 수 있는 것은 국왕을 위시해서 귀족이거나 부유한 재력가, 혹은 이에 버금가는 특수 집단의 전유물일 뿐, 일반 서민의 참정권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는데 앵글로아메리카에서는 주민들의 합의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졌고, 13개 주의 식민지 모두가 대의원을 선발하여 의회를 구성하고 정치적 자립 내지는 자치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세계최초로 공화정을 수립한 아메리카 데모클라시(American democracy)의 출발이다.

 

(2) 면역지대(quit rent - 免役地代)의 부과와 그 반발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면 비용이 들게 마련이고, 그비용 마련을 위한 제도로서의 세금(稅金- tax)은 피할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한다. 공공의 이익과 복지사회의 건설을 위한 비용염출, 혹은 소득재분배 등등 명분과 이유야 그럴 듯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반대급부없이 강제 징수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사연은 한 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미국의 독립전쟁도 이런 조세저항(租稅抵抗)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미국시민들은 독립 후 한푼의 세금도 내지않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조세부담은 더 늘어났다. 이런 이야기는 독립전쟁에서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고, 세금에 관한 한 붙박이로 한 곳에 머물러 살 수밖에 없었던 신분제 농본주의 사회일수록 하층민의 부담과 피해가 엄청나게 컸다. 중국의 5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 단궁(檀弓) 편에는 "가정맹어호야(苛政猛於虎也)"라는 글귀와이런 사연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5백년 전, 공자(孔子)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어느 험한 산 길을 지날 때, 갓 만들어진 무덤 앞에 한 여인이 너무도 애절하게 통곡하고 있기에 그 사연을 물었더니, "제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했고, 얼마전에는 제 남편 역시 호랑이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엇그제는 아들마저 호랑이에게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이런 산골에 살고 있는가?하고 물었더니 그 여인의 대답은 "그래도 여기는 포악한 관리들의 수탈은 없습니다....여기를 떠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갈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제자들에게 "포악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나운 것이다(苛政猛於虎也) 이점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가정(苛政)이란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는 세금을 부담케 하고 이를 강제로 빼았는 수탈, 즉가렴주구(苛斂誅求)를 말하며, 힘없는 민초(民草)들은 세리(稅吏)들이 올 수 없는 깊은 산간오지로 숨어들어 화전을 일구며 근근히 목숨을 이어갔다는 것은 근대 이전까지는 흔한 이야기에 속한다.

 

지금은 세계 여러나라가 예산을 편성하고, 조세법률주의라하여 국민들의 담세(擔稅) 능력에 따라 세액(稅額)을 법률로 정하고 징수함으로써어느 정도 균형도 유지되고 그 사용 목적도 분명해 졌지만, 우리의 경우 아직도 그 내용이 몹시복잡하여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세율을 산정하는 것도 어렵고, 국세와 지방세,직접세와 간접세, 소득세와 주민세, 소비세와 특별소비세, 법인소득세, 근로소득세, 취득세, 부가가치세, 양도소득세, 증여세, 상속세, 교육세, .... 등등 여간한 기억력을 가진 자가 아니면 그 많은 세금 이름을 알 수 조차 없고, 실제로 휘발유1리터에 혹은 맥주 한병에 어떤 이름의 세금이 얼마나 붙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주민등록증에 사진을 붙이고 지문까지 찍는 것은 행정편의주의적인 관료행정 이전에 동족상잔의 이념대립에서 빚어진 분단의 고통을 분담한다는 점에서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간첩을 식별할 수 있는 1차적인 증빙자료가 될 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각자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고유번호, 주민등록번호라는것은 내가 알기로는 지구상에서 우리만이 갖고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많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성명구조, 이를태면 홍길동이라는 성명은 수없이 많고, 이것을 한자로 분류하면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지만, 한글전용, 문자사대주의, 국어사랑 나라사랑,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고유명사로서의 성명이 일반명사(?)처럼 될 수도있고, 다소의 불편은 있지만 그렇다고 개인생활에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닌데, 왜 다시 고유번호를 만들었을까?

 

주민등록번호라는 것을 만든 것은 어느 세리(稅吏)가 탈세(脫稅) 방지를 위해 만들에 낸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그런데 주민등록번호가 아는 듯 모르는 듯 우리사회에서는 어느새 이름으로서의 행세를 단단히 하고 있다.....그런데도 세무조사(稅務調査 - 稅務査察)는 여전히 남아있고 이것이 때로는 기업의 목을 조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앵글로 아메리카의 식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되자 영국 정부에서는 이 식민지 농민들에게 면역지대(quit rent - 免役地代)라는 것을 부과하고 이를 미끼로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려 하였다.

 

면역지대란 봉건제도의 유습이다. 장원에 소속된 영국의 농민은 장원주인 영주와는 지배, 예속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1주일에 2 ~ 3일 정도는영주의 경작지에서 의무적으로 일을 해주어야 했다. 이를 노동지대라고 한다. 그러다가 봉건제도가 해체될 당시 이 노동지대가 현물지대로 바뀌었고, 다시 14 ~ 15세기가 되면 화폐경제의 진전과 함께 현물지대가 현금지대로 바뀌었다. 이것이 면역지대라는것이다.

 

글자 그대로 영주에게 부역인 노동봉사 대신에 수입의 일부를 현금으로 가늠하여 바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면역지대가 청교도혁명(1642~ 49) 기간에 영국에서는 없어졌다. 그러나 식민지는 국왕이나 영주의 봉토(封土)라는 억지 논리를 앞 세워 국왕령에서는 국왕에게, 영주령에서는 영주에게 면역지대를 바치라는 것이다.

 

이런 영국의 결정에 토지란 완전히 자기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프리 홀더들이 순순히 따를리가 없다. 특히 프리 홀더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뉴잉글랜드에서는 그 반발이 심하여 17세기 말이 되면 면역지대는 사실상 유명무실해 졌고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다면 영국정부는 왜 이런 불합리한 면역지대를 식민지 농민들에게 부과하고 강요 했는가? 여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17세기 초두까지만 해도 플로리다 북쪽의 북미대륙이란 유럽의 열강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쓸모없는 땅이라고 생각했던 이곳에서 대량으로 담배가 재배되고 쌀과 인디고 등상품작물이 각광을 받게 되자 사정을 금방 달라졌다. 네덜란드가 여기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했으나 군사력이 우수한 영국에게 밀려 물러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또 다른 유럽의 강자 프랑스가 17세기 중반, 뉴프랑스회사를 설립하고 캐나다를 중심으로 모피(毛皮)교역에 열을 올리더니 루이 14세의 친정으로 절대왕정을 확립한 17세기 후반에는 캐나다를 직할령으로 정하고 국왕이 임명한 총독을 파견, 일사불란한 지배체제를 굳히는가 하면 인디언과 손잡고 영국의 13개 식민지에도 심상치 않은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다시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의 길고도 지루한 싸움은 팔츠계승전쟁(1689 ~ 97), 에스파냐계승전쟁(1701 ~ 14), 오스트리아계승전쟁(1740~ 48), 그리고 7년전쟁(1756 ~ 63)이라는 이름과 맞물려 두나라간 이른 바 제 2의 백년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우열을 가리기 위해 부단히 투쟁하게된다.

 

1685년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2세는 뉴햄프셔에서 팬실베이니아에 이르기 까지의 북부와 중부 전채를 도미니언 뉴잉글랜드(Dominion of New England - 領)라하여 왕령으로 지정하고 국왕이 파견한 한 사람의 총독이 지배케 하였으며, 각주에 설치된 대의기구(代議機構 - 議會)는 폐지해 버렸다. 프랑스의 위협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는 중구난방으로 흩여진 것 보다는 일사불란한 일원적인 체제가 필요했기 때문이고, 면역지대를 강요한 것도 이런 프랑스의 도전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것은 뉴잉글랜드를 위시한 13개 주의 식민지는 영국의 영토이며, 따라서 프랑스는 아예 넘보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대의기구를 없앤 것은 자치권의 박탈이고 면역지대의 부과는식민지에 대한 차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그 반대 투쟁이 프리홀더를 중심으로 강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본국의 다른 사정으로 쉽게 풀렸다.

 

1688년, 영국에서는 의회와의 충돌로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망명했고 동시에 그가 결성했던 북미대륙의 도미니언 뉴잉글랜드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북부(뉴잉글랜드)에서는 면역지대까지 완전히 없어졌다. 이를 두고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라 했고, 북미대륙 식민지에서도 아메리카의 명예혁명이라 불렀다.

 

북부(뉴잉글랜드)와는 여러면에서 사정이 달랐던 중부와 남부는 본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순조롭게 면역지대를 납부하였으나, 명예혁명을 계기로 이곳 역시 면역지대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8세기 중엽까지 이런 봉건적인 면역지대가 앵글로아메리카의 모든 지역에서 폐지되어, 백인들은 유럽의 구습(舊習)을 떨쳐 버리고 꿈과 희망이 있는 그들만의 낙원을 만들어 갔다.

 

(3) 봉건적인 영주체제의 붕괴

 

13개 식민주 모두가 뉴잉글랜드나 버지니아처럼 민간회사를 따라간 민간인들이 세운 것은 아니다. 예컨데 메릴랜드는 1634년 볼티모어卿(Baltimore,George Calvert, 1st Baron / 1578? ~ 1632)이 자신의 영지로 차지했으며, 1664년 네덜란드로부터 빼앗은 뉴욕은 요크公(제임스 2세)의 영지에서 왕령으로 바뀌었고,1681년에 건설된 펜실베이니아는 윌리엄 펜(William penn / 1644 ~ 1718)이 세운 펜家의 사유지, 펜실베이니아에서 분리 독립한 델라웨어는 독립후에도 계속적으로 펜가의 지배를 받았으며, 1663년에 개척된 캐롤라이나와 뉴저지 등은 여러명의 영주들(영주단)이 공동으로 내 땅이라고 차지한 곳이다.

 

이들 지역을 차지한 영주들과 영주단의 권리는 국왕으로부터 받은 개척 허가서 한통이 고작이었지만 국왕의 별다른 다른 조치가 없는 한 이를 자기의사유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처분도 하고 영내의 프리 홀더로부터는 명분도 근거도 없는 조세를 받았다. 마치 중세적인 봉건영주처럼 행세했던 것이다.

 

북미대륙에는 국왕이 개척허가를 내준 것 이외에도 땅은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볼티모어경은 메릴랜드의 영주로서 아무에게도 개척허가서가 교부되지 않는 땅을 마음대로 차지하고 담배재배와 각가지 과세와 관세까지 받아 연 수입이 1만 2천 파운드나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연수입이 40 파운드만 되어도 놀고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입이 아닐 수 없다.

 

서유럽에서 조차 이미 사라지고 없었던 이런 영주제가 그  말많은 곳에서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결국 1729년 노스 캐롤라이나를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영주제가 왕령으로 바뀌었지만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 그리고 델라웨어 3개주는 독립전쟁때까지 영주제가 유지되다가 독립전쟁과 동시에 완전히 무너졌다.

 

그렇다면 그 많은 토지는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상속되었으며, 기독교가앵글로 아메리카에서는 어떤 형태로 이식되었을까? 그리고 중세적인 예민(隸民)보다 더 가혹했다는 노예제도는 어떻게,왜 발생했을 까?

인디언 전쟁

 

 (1) 평원(平原) 인디언(Plains Indian)

유럽인이들어오기 이전 북미대륙에는 100 만명 정도의 원주민들이 부족단위로 여기 저기 흩어져 살았던 것으로 알려저 있다.

 

그렇다면 영국이 식민을 시작한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 일대에는 어떤 부족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는가?

 

1497년 6월, 콜럼버스에 앞서 북미대륙에 첫 발을 들여 놓았다는 존 캐벗(JohnCabot - 이탈리아 명 Caboto, Giovanni / 1450~1498)이 뉴펀들랜드 섬 부근 어디에 도착 후,

 

 뉴잉글랜드에 해당하는 북위 38 °선까지 남하 하면서 해안 곳곳을 살펴보았으나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발견 했을뿐 막상 사람은 보지 못하고 돌아 왔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캐벗 역시 뉴잉글랜드 일대를 인도로 가는 어느 중간지점 정도로만 여겼을 뿐 신대륙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북미대륙의 인디언들은 16세기 이전, 즉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뉴멕시코와 플로리다 일대의 남부에서는 바스켓메이크 문화니 푸에블로 문화니 하는 이른바 신석기시대의 문명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으나, 그 북쪽은 그 보다 못한 수렵, 어로, 채집의 원시적인 생활이 주를 이루었다.

 

다만 씨족과 부족에 따라서는 옥수수를 재배하기도 하고 이동생활에서 일부 정착 단계로들어 서고 있는 등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중앙을 그레이트플레인스(Great Plains - 大平原)라 부른다. 남북 길이 5000 ㎞, 동서간의 폭이 넓은 곳은 1100 ㎞, 좁은 곳은 500 ㎞, 그 넓이가 290만 ㎢나 되기 때문에 거대한 평원이라는 뜻의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대평원에는 로키산맥 동부에서 미시시피강(江) 유역 중부에 이르는 온대 내륙에는 동서길이 약 1,000 km, 남북길이 약 2,000 km에 달하는 보다 좋은 넓은 초원이 발달되어 있는데, 이곳을 프레리(prairie)라고 한다. 프레리는 프랑스어(語)로서 목장이란 뜻 이다.

 

부연하면, 북미대륙의 동쪽에는 길이가 약 3200 km에 달하는 애팔래치아산맥(AppalachianMts.)이, 북미대륙의 서쪽에는 약 4500 km 길이의 로키산맥(Rocky Mts.)이 가로 막고 있어서 그 사이는 하나의 거대한 분지처럼 되어 있고, 대서양이나 태평양에서 넘어오는 습윤한 공기가 산맥을 넘어면서 수분을 뺏기기 때문에 강수량이 풍부하지 못한 고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것이 그레이트플레인스라고 부르는 스텝지역이다. 하지만 지형적인 영향에 따라 사막도 있고 깊은 골짜기도 있는 반면 넓은 초원도 있다. 이런 대평원지대를 관통하는 큰 강이 미시시피강이고,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유역일대에는 일망무제의 기름진 평야가 펼쳐지는데 이곳을 프레리라 하며, 프레리가 영어가 아니라 불어(佛語)라는 것은프랑스인들이 영국인들에 앞서 이곳에 식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곳은 땅이 좋은 만큼 유럽 열강이 일찍부터 군침을 삼키고 있던 곳이고, 지금의 미국에서도 최대의곡창지대가 되어 있는 곳이다.

 

프랑스가 이 지역에 들어온 것은 1682년 라살(La Salle, Robert Cavelier de /1643 ~ 1687)의 탐험에서 비롯되었고,

 

라살은 미시시피강 유역의 방대한 지역을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땅이라고 선언하고 이름을 루이지애나(Louisiana)라 했다.

 

1718년,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어귀에서 160km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 뉴올리언스(NewOrleans) 시를 세우는 등 식민활동을 본격적으로 착수 하였으나, 곧 이은 유럽대륙에서의 세력 경쟁에 밀려 이미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캐나다의 아카디아(노바스코샤)를 잃고 있었다.

 

그러나 아카디아가 영국으로 넘어가자, 프랑스어를 구사했던 많은 아카디아인들이 영국의 핍박을 피해 루이지애나로 이주해 와 루이지애나는 활기를 띄었고, 1731년 루이지애나가 프랑스 왕령식민지가 되었을 때 이 곳의 인구는 흑인 노예를 포함하여 8000명으로 늘어났다. 식민인구가 8천 명이라면 매우 많은 것이다.

 

그러나 7년전쟁(1756 ~ 63)의 패배로 결국 프랑스는 1762년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 넘겨주었으며, 1763년에는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토를 사실상 영국에게 넘겨주었다.

 

1800년10월 1일, 유럽의 강자로 부상한 프랑스의 통령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를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설득하여 루이지애나를 돌려받았다. 이때 카를로스 4세는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제3국에게 양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구두(口頭)로만 동의했다고 하는데, 산 일데폰소 조약(Treaty of San Ildefons)으로 알려진 이 영토 반환 조약으로 상업적으로 중요한 항구로 번창하고 있던 뉴올리언스 뿐만 아니라 전략 요지인 미시시피 강 어귀가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에 신생독립국가 미국이 그냥 넘길리가 없었고,1803년 나폴레옹은 국내외에 산적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1500만 달러를 받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게 팔아 버렸다. 이래서 루이지애나는 1812년 미국의 18번째 연방이 되었고, 프랑스는 북미대륙에서 물러났다.

 

 

그레이트플레인스 건 프로리 건 원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그들만의 생활풍습과 종교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곳이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들소(buffalo)를 사냥하거나 옥수수를 재배하였고, 유일한 가축은 개가 있었을 뿐이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은 물론, 총을 비롯한 무기는 17세기 중엽이후 유럽인들의 본격적인 이주와 함께 그들로부터 사거나 약탈한 것이다.

 

이곳에 살았던 인디언을 편의상 평원인디언(Plains Indians)이라 하고, 들소를 사냥해서 먹고 살았다고 해서 버펄로 인디언(Buffalo Indian)이라고도 한다.

 

이들이 전형적인 아메리카 인디언으로서 코만치(Comanche), 아라파호(Arapaho), 크로(Crow), 샤이엔(Cheyenne), 아파치(Apache)등의 종족이 여기에 포함된다.

 

종족간의 언어와 풍속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대부분의 평원 인디언은 이동생활을 하면서 주로 들소(버펄로)를 사냥했고, 그 들소로부터 식량과 천막, 옷감을 얻었으며 뼈로는 각종 도구를 만들었다. 버펄로야 말로 버릴 것이 없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귀한 짐승이었다. 그밖에 영양이나 사슴, 큰사슴도 사냥했다. 백인과 평원 인디언과의 싸움은 미국의 독립 후 19세기에 본격화 되었고, 17세기 식민초기의 사정이 이 때와는 사뭇 달랐다.

 

(2) 인디언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Pocahontas)와 인디언전쟁

 

영국인들이 처음 정착한 뉴잉글랜드 주변에는 이로쿼이(Iroquois)족이라해서 한 가옥에 여러가족이 집단으로 거주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의 언어를 이로쿼이어(語)라 하고, 이로쿼이어를 사용하는 부족으로는 카유카족, 체로키족,휴런족, 모호크족, 오나이다족, 오논디가족, 세네카족, 투스카로라족 등으로 우리들에게는 이름 조차 생소한 여러부족으로 다시 분류된다.

 

이들이 살았던 곳은 매우 넓어서 오대호 하류 주변의 광활한 지역으로부터 남동쪽의 저지대와 애팔래치아 고원지대까지 흩어져 있었다. 따라서 애팔래치아 고원지역에는 이른바 동부 삼림지대문화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반(半)정착민인 이들이 새로운 곳에 거주지를 만들면 남자들은 마을에 울타리를 치기도 하고, 집을 짓거나, 나무로 통을 만들거나, 카누(canoe)를 만들기도 하고, 뭉쳐서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에 나서기도 하고, 때로는 여행과 교역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전쟁과 도박으로 세월을 보냈다.

 

반면 여자들은 여자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을주변에서 옥수수, 콩, 호박 등의 농사일을 맡았다. 이렇게 남녀간의 역할이 분명했지만, 이들 종족의 남자들은 매우 호전적이고 잔혹했으며, 사람을 심하게 고문하거나 식인(食人)의 풍습까지 가지고 있었다.

 

처지가 이렇다 보니 영국의 식민자들이 당한 두려움이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인디언들과 영국의 식민자들 모두가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진 것은 아니고 언젠가는 타협할 수밖에 없는 숙명 또한 초기 식민지시대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초기 이민시절까지만 해도 인디언이 적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웠고, 이로 미루어 보면 16세기 이전까지 앵글로 아메리카에서는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구체적인 접촉이나 충돌은 없었던 것 같다. 버지니아 지도 및 해설(Map of Virginia with a Description of the Country - 1612)을 비롯해서 버지니아 식민 이야기를 많이 남긴 존 스미스의 기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1607년, 27세의 군인출신 존 스미스(Smith, John /1580 ~ 1631.6)를 포함한 일행 105명이 제임스 타운에 닿았던 바로 그날 밤 수십명의 인디언이 카누를 타고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다. 뒤이어 인디언 전사 2명이 다시 나타나 자기네의 추장이 곧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떠났다.

 

5일 후, 활을 든 인디언 전사 백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그 추장이 나타났다. 추장은 식민자들의 무기를 둘러보더니 기분이 상한 듯 무엇인가 지껄이면서 화를 내고 돌아갔다. 그 이튿날, 이번에는 반대로 식민자 몇 사람이 인근의 인디언부락을 찾아 갔지만 인디언들이 모두 도망감으로 담배만을 주워서 입에 물고 돌아왔다.

 

며칠 후, 존 스미스는 동료 12명과 함께 카누를 타고 제임스 강을 60 마일쯤 거슬러 올라가 한 인디언 부족과 접촉하여 제법 후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 사이 다른 인디언 400 여명이 제임스 타운을 기습하여 1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생겼다. 이에 놀란 식민자들은 인디언들과의 접촉을 끊었다.

 

그러나 그 해 가을, 식량은 떨어지고 굶주림에 견디지못한 식민자들이 다시 인디언들에게 옥수수라도 좀 얻을까하고 접촉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희생자만 내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인디언 전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의 승패는 무기에 달려 있고, 우수한 무기를 가진 식민자들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집요하게 게릴라전을 전개하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같은 식민자들로부터 총과 말을 구입하여 인디언의 전투력이 높아지면서 전투양상은 매우 치열했다.

 

초기 식민자들이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인디언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런 일에 익숙했던 존 스미스는1607년 12월에 동료 2명과 함께 치카호미니 강을 탐험하다가, 매복하고 있던 파우하탄 부족연합의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동료 2명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고 존 스미스는 부상은 당했지만 목숨만은 겨우 건져 그들의 추장인 와훈소나코크 한테 끌려갔다. 와훈소나코크를 백인들은 포우하탄으로 불렀다.

 

옥수수나 좀 얻을까하고 동료 2명과 함께 인디언을 찾아 나섰다가 인디언의 습격을 받고 동료 2명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고 존 스미스는부상을 입고 사로잡혀 추장에게 끌려가게 된 것이다. 추장에게 끌려간 그는 몸에지니고 다녔던 나침반을 이리 저리 보이면서 추장의 환심을 샀고 그 덕택에 죽음만은 면했다. 당시의 추장 포오하탄(Powhatan)은 128개 부락과 9000 여명의 인디언을 거느렸던막강한 인물이었다.

 

런데, 인디언 전사 하나가 중병을 앓게 되자 추장포우하탄은 존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너의 그 요물(나침반)로 환자를 살려라. 그러면 너를 살려서 보내 주겠다...

 

" 그러나 의사도 요술쟁이도 아닌 존 스미스가 환자를 살릴 재주는 없었다. 환자는 죽었고, 추장은 화를 내면서 존 스미스를 제단에 뉘이고 목을 칠려는 순간, 추장 포우하탄의 13세난 딸 포카혼타스(Pocahontas / 1595?~ 1617. 3)가 이를 가로 막고 나섰다.

 

어린 그녀가 왜 존 스미스를 구했는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여간에 포카혼타스의 덕택으로 그 날 존 스미스는 12명의 인디언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제임스 타운에 돌아왔고 이로 인해 백인과 인디언 간의 화해가 이뤄지는 듯 했다. 그러나 1609년 스미스가 영국으로 돌아가자 버지니아 정착민들과 포우하탄의 관계는 다시 냉랭해 졌다.

 

그러자 정착민들은 인디언과 영구 평화협상을 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녀를 인질로 납치해갔다. 추장의 딸을 미끼로 쉽게 흥정을 해 보자는 수작이었다. 따라서 포가혼타스가 비록 포로로 잡혀 있었으나 아주 친철한 대접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리베카(Rebecca)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포카혼타스는 아버지가 몸값을 치른 뒤 풀려나기는 했지만, 거기있는 동안 유명한 담배 농장주(planter)인 동시에 식민지의 비서겸 서기였던 존 롤프(JohnRolfe / 1585 ~ 1622)라는 홀애비 사내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두 사람은 버지니아 총독 토머스 데일 경과 포우하탄 추장의 동의를 얻어 1614년 4월 5일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아들 토마스(Thomas Rolfe)를 얻었다.

 

결혼식장에 포우하탄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대신 언니가 참석했다고 한다. 이 두사람의 결혼으로 백인과 인디언 사이에는 평화가 오는 듯했고 실제로 1614년부터 22년까지 약 8년간 백인과 인디언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1616년 버지니아 총독은 이 매력적인 인디언 신부가 런던버지니아회사를 선전하는데 아주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아래 이들 일가의 런던여행을 추진하였고, 버지니아회사는 여행 경비를 지원하여 런던 여행을 하게 되었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국왕 제임스 1세를 배알하는 영광을 얻었고, 사교계에서는 명사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버지니아로 돌아오기 직전인 1617년 3월, 천연두는 아깝게도이 어린 인디언 신부의 목숨을 앗아갔다.

 

남편 존 롤프는 곧 버지니아로 돌아와 다른 여자와 재혼했고, 1621년 버지니아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622년 일어난 인디언 전쟁으로 버지니아의 버뮤다헌드레드에 있던 그의 농장은 파괴되었고 그도 죽었다.

 

그리고 포카혼타스와는 초혼이 아니고 재혼이었고, 담배재배는 포카혼타스와의 결혼이전부터 서인도제도에서 담배종자를 들여와 쓴맛을 제거한 것이 영국인들의 취향에 맞아 크게 성공했던 것이다.

 

포가혼타스의 아들 토마스는 영국의 삼촌 집에서 살다가1640년 버지니아로 건너가 담배 농가의 맥을 이었다고 한다.

 

이런 단순하고 평범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소재가 되면 한결 빛을 더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소위 포카혼타스의 신화라는 것이 만들어 졌다.

 

백인을 살려준 인디언 여자, 백인과 결혼한 인디언 여자, 담배 재배 기술을 백인에게 가르쳐준 인디언 여자,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디언 여자,.....포카혼타스의 만들어진 이런 전설은 그 넋을 기리기 위해 그 모습을 제임스 강가에 돌로 새겨 세웠는데, 지금도 이곳을 찾는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1622년 바로 그 포카혼타스 전설의 무대인 버지니아에서 대규모 인디언 전쟁(Indian War)이 일어났다. 포우하탄 추장이 사망하자 포우하탄의 철권지배와 백인들에 대한 유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많은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습격 했고, 이로 인해서 수천명의 식민자 중 약1/10에 해당하는 300 여명의 백인들이 인디언들에게 학살되었으며, 포카혼타스의 남편 존 롤프도 이때 목숨을 잃었다.

 

생명체가 영역을 두고 목숨을 건 싸움은 자연현상이라 할 수 있고, 앵글로 아메리카에서 인디언과 백인들의 싸움 또한 화해와 협력 이전에 삶의 터전을 뺏고 뺏기지 않으려는 원초적인 본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641년과 1676년에도 버지니아에서는 대규모의 인디언 전쟁이 있었으며, 그 북쪽 뉴잉글랜드에서도 1637년과 1675 ~ 76년에걸쳐 인디언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인디언들은 우세한 유럽의 전술과 무기를 당하지 못하고 철저히 무너졌으며 이들은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미국의 서부개척 과정에서 다시 이들과의 충돌은 악연의 연속으로 이어졌고, 19세기를 지나 20세기 까지도 반목과 투쟁은 계속되었으며, 지금의 인디언들은 보호구역내에서 생활하거나 미국문화에 동화되어 그 정체성을 점차 잃어 가고있다.

 

결과적으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투쟁은 백인들에게 미국적인 사고와 행동을 깨우치게 했고, 이런 경험이 쌓여 오늘날과 같은 강한 미국이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같은 백인이며 본국인 영국과는 마찰이 없었는가?

식민지 13개 주

 

가. 앵글로아메리카(Anglo-America)

 

(1) 북미대륙(North America)과 아나사지문화(Anasazi culture)

 

아스텍 유적 국립기념물에 있는 키바라고 불리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제의용 방면적 4,221만 ㎢, 세계육지면적의 31%, 남극해에서부터 북극해에 이르기까지 대륙으로 연결된 곳, 인종과 문화만큼이나 다양한 자연조건, 이런 것이 아메리카대륙이다.

 

아메리카대륙을 지리적으로 구분하면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로 나누고,

 

문화와 언어로 구분하면 리오그란데(Rio Grande)를 경계로 중·남미일대를 라틴아메리카, 멕시코 이북의 북미지역을 앵글로아메리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미국과 캐나다의 두 나라가 위치하고 있는 곳을 앵글로아메리카라 부르고 이 지역에는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이전 마야나 아스테크 보다는 여러 면에서 뒤지지만 나름대로의 원주민의 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을 아나사지 문화(Anasazi culture)라고 한다.

 

아나사지(Anasazi)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널리 사용했던 나바호 인디언의 언어로서 "옛 사람들"의 뜻이라고 한다. 지금의 미국의 동북 애리조나, 북서 뉴멕시코, 남동 유타, 남서 콜로라도 등의 지역에서는 기원전부터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는 인디언의 문화를 아주 옛날에 있었던 문화라해서그렇게 부르고 있고, 이 문화의 범주에는 바스켓메이크문화와 푸에블로문화를 포함하고있다. 그렇다면 바스켓메이크문화, 푸에블로문화란 무엇인가?

 

한국인이라면 미국에 대한 인지도는 매우 높다. 대통령과 수도의 이름에서부터 미시시피강, 록키산맥, 뉴욕과 맨허튼(Manhattan), 월街(Wall Street), L A 등은 오히려 우리나라의 어느 외진 곳 보다도 많이 들었고 그 만큼 귀에 익숙해 진 곳이다.

 

그러나 뉴잉글랜드라고 하면 50개의 주(州 - state)가운데 하나라고 잘못 이해하기 쉽고 워싱턴州가 곧 수도 워싱턴 DC와 같은 곳으로 착각할 수 있으며, 남부와 북부, 여러 지명과 인명, 제도와 문화 등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고 처음 들어본 말들도 수없이 많다. 세계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용어정리가 필수적인데, 원어(原語)를 쉽게 우리말로 풀이하는데는 한계가 있고 또한 풀어쓸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예컨대 democracy를 민주주의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북미대륙의 두 나라, 미국(美國)캐나다는 지금도 영국과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이들 나라들이 영국인(앵글로인)들에 의해서 식민되고 건설되었으며 따라서 문화적인 요소에서 영국의 영향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과 같이 영국이 북미대륙에 진출한 것은 1497년 존 캐벗의 탐험으로 비롯되었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국내 사정으로 이 미지의 신대륙에는 거의손을  떼고 있다가 어느정도 국내 문제가 안정된 17세기부터 본격화 되었다.

 

영국이 진출하기 이전까지 이곳에도 아메리카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원주민들이 나름대로 원시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들 원주민의 문화전승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북부지역에서는 수렵과 어로가 주를 이룬 듯 하고 보다 따뜻한 남쪽인 애리조나· 뉴멕시코 ·콜로라도 ·유타의 접경지역에서는 옥수수,호박, 콩 등을 재배하면서 정착 농경을 이루어 원시적인 문화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들 정착 농경 인디언이 남긴 문화를 바스켓메이커문화(Basket Maker culture), 푸에블로문화(Pueblo culture)라고 하고 그 전부를 아나사지문화(Anasazi culture)라고 한다. 바스켓메이크문화란 이들 농경 인디언들이 저장용이나 운반용으로 유별나게 많은 바구니(Basket)를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그 시기를 대략 다음과 같은 3기로 구분한다.

 

바구니 문화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잘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인디언들이 아직은 생활수단을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고 있었고 농경과 가축의 사육은 몰랐다. 이 시기를 제 1기라 하고, 대략 기원전 100년 이전의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다가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400년 경까지 약 500년에 걸쳐 수렵과 동시에 점차 옥수수 등을 재배하여 부족한 식량을 체웠으며 구덩이를 파서 움집도 지었다. 이른 바 반렵반농(半獵半農)의 상태에 머물렀던 이 시기를 제 2기라 한다. 그러나 아직 토기는 없었다.

 

이들이 토기를 만들어 정착생활에 들어가고, 취락(聚落)을 형성하여 농경이 안정기로 접어든 것은 기원 400년에서 700년 사이에 해당하고 이 시기를 제 3기라 한다. 다시 말하면 기원후 400년경부터 700년 사이에 농경과 목축, 토기의 제작을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 문화가 형성 되었다는 것이다.

 

기원후 700년 경 푸에블로(Pueblo)라는 인디언 부족은 기하학적인 무늬가 들어간 보다 우수한 도자기를 만들었고, 수백개의 방이 있는 집합주택도 지어 집단 취락을 이루었다. 그리고 키바(Kiva)라는 종교적인 행사에 사용된 특수구조의 지하실도 만들었다. 이때 부터를 푸에블로문화(Pueblo culture)라 하고 이런 상태의 문화를 유럽인이 들어 오기 시작한 16세기까지는 물론이고 근대까지도 이어졌다.

 

1968년 1월, 원산 앞 바다의 공해상에서 미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 초계정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 있었다. 소위 푸에블로호 납치사건(Pueblo-號拉致事件)이라 일컫는 이 사태에서 북한은 미군 승무원들은 돌려 보냈지만 푸에블로호와 배에 탑재하고 있었던 최신 장비들은 모두 몰수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적이 있었다. 이때 문제의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의 이름이 푸에블로문화를 이룩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름을 딴 것이다.

 

푸에블로문화는 그 발전 상태에 따라 다시 5기로 나눈다. 700년~1050년 사이를 푸에블로 문화 형성기로 보고 이를 1기와 2기로 다시 구분한다. 이 시기에는 농경과 목축이 크게 발달하여 옥수수와 더불어 콩을 경작하고 칠면조의 사육이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수렵과 야생식물 채집은 현저히 줄었다.

 

1050년에서 ~1300년 사이를 푸에블로문화의 제3기라 하며 고전 푸에블로 시기라고도 한다. 건축에서 기둥과 벽의 재료가 진흙에서 석재로 바뀌었고, 키바(Kiva)라는 반(半)지하 예배장을 만들고 종교의식을 행하였으며, 또한 농경이 확대되어 목화 재배가 이루어졌고, 다양한 모양과 문양이 들어간 도자기를 만들었으며 종래의 바구니 사용은 점차 줄었다. 또한 이 시기에 직업이 생기고 그 영역이 점차 확대되었다.

 

1300년에서 1700년 사이를 푸에블로문화 4기라 하고, 퇴행 푸에블로 시기라고도 한다. 이 시기에는 남쪽과 동쪽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외적의 침입으로 리오그란데 계곡이나 애리조나의 화이트 산맥 지역으로 이동했고, 3기보다 가옥의 규모는 컸지만 벽 전체가 진흙으로 구성되는 등 그 모양이나 건축술은 오히려 조잡했다. 도자기 역시 기술은 여전했으나 모양은 변화되었고, 직물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유지되었다.그러나 전반적으로 그 전 시기에 비해서 수준이 떨어졌다고 한다.

 

1700년 이후 현재까지를 푸에블로문화의 5기라 하고 근대 푸에블로 시기라고도 한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에스파냐의 영향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700년대부터 전개된다. 에스파냐가 이 지역을 점령한 것은 1598년 이다. 아메리카의 여니 부족과 마찬가지로 문자로서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에 푸에블로족(族)에 대해서도 상세한 것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에스파냐가 점령할 당시 이들은 관개(灌漑) 시설을 갖추고 옥수수를 재배하고 있었으며, 진흙을 굳혀서 만든 2층에서 4층으로 된 집단취락(아파트형)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계(母系)혈통을 따르기도 했고부계(父系) 혈통을 따르기도 했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인디언 부족들에게 개종을 강요함으로써 각 부족들의 강한 적대감을 야기했으며 1680년대에는 반란이 일어나 에스파냐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1694년에는 에스파냐가 다시 통치하기 시작했고, 불안정한 조건이 1세기 정도 계속되면서 푸에블로족의 마을은 그 수가 70~80개에서 25~30개로 크게 줄어들었으나 백인과의 결혼을 기피하고, 그 문화와 기술의 상당 부분은 근대까지 유지되었다.

 

이런 것은 북미대륙 남서쪽에서 있었던 것 들이고 이후미국이 확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금은 미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다. 영국인들이 식민한 그 북동쪽은 이런 사정과는 전혀 달랐다. 혹심한 자연환경에 비해서 얻을 것이라고는 모피(毛皮)정도에 불과했고 정복할 만한 원주민도 금은을 포함한 귀금속도 없었다.

 

(2)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의 초기 식민자들

 

영국에서 신대륙에 식민이 본격화 된 것은 17세기 초, 1604년 에스파냐와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1606년에는 국왕의 칙허로 런던회사 만들어 졌고 런던회사는 곧 버지니아 런던 회사(VirginiaCompany of London)로 이름을 바꾸고 부지런히 영국인들을 이 신대륙에 실어 보냈다.

 

영국의 런던은 대략 북위 52도 선상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영국에서 곧바로 배를 띄워 대서양을 횡단하면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섬에 도달한다.

 

멕시코해류의 영향으로 영국의 겨울은 춥지 않지만 캐나다의 기후는 래브라도해류의 영향으로 냉온대 내지는 툰드라 기후에 속하고 겨울이 길고 춥기 때문에 앞글에서 밝힌대로 일찍 프랑스의 탐험가들이 이곳을 찾았다가 혹독한 추위에 견디지 못하여 철수한적이 있었다.

 

이런 추운 곳에 영국의 이민자들이 뿌리를 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간 곳은 보다 따뜻한 남쪽, 즉 미국의 남동부에 해당하는 버지니아가 목적지가 되었다.

 

따라서 1607년 최초로 버지니아 도착한 105명의 이민자들은 제임스타운을 건설하여 식민지 개척에 나섰고, 매릴랜드, 남북 캐롤라이나, 조지아 등지로 식민이 확대되고 목화와 담배, 인디고 등을 재배하여 큰 돈을 모았다. 이것이 미국 남부의 기원이다.

 

한편 1620년 필그림파더스(Pilgrim Fathers - 巡禮始祖)라 불리는 일단의 무리들은 지금의 메사추세스주 플리머스에 도착, 이곳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건설 하였고, 이일대를 확대해서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고 불렀다.

 

오늘날 메인·뉴햄프셔·버몬트·매사추세츠·코네티컷·로드아일랜드의 6주에 걸친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영국에서 주로 상인, 숙련기술자들이 이주하여 미국의 북부를 이루었다. 이들은 양키(yankee)라는이름으로 푸대접 받았으나 남북전쟁(1861 ~ 65) 후 거듭 발전, 지금은 세계경제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위치가 되었다. 이런 것은 지금에 와서 그렇다는 것이고 초기 이민자들의 고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의 이런 이야기들을 잠시 따라가 보기로 하자.

 

1606년 12월 20일, 런던회사의 이민선 수잔 콘스턴트호(Susan Constant - 號)라는 배에는 영국인 105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 영국인들이 대서양을 건너가 1607년 4월 26일에는 버지니아주 남동부에 있는 체서피크(Chesapeake)에 닿았고, 5월 14일에는 제임스강에 닿아 그 곳에 국왕 제임스 1세의 이름 딴 제임스타운(James town)을 세웠다. 이것이 영국이 신대륙에 세운 최초의 식민도시다.

 

이들 105명 가운데는 18명의 젠트리가 포함되어 있었고 나머지 87명은 농민, 상인,기술자(職人) 출신들이었다. 그 구성 인원으로 보아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떠났던 모험가 내지는 정복자라기 보다는 영국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이상적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떠난 이민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현지에 도착했을 때 날씨는 상상외로 무더웠고 음료수 사정이 좋지못해서 그 해 여름을 넘기는 동안 절반 가량이 목숨을 잃었고 가을부터는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 이래서 1607년 말경에는 겨우 32명만이 생존하고 있었다.

 

이 식민자들의 대열에는 당시 27세의 군인출신 존 스미스(Smith, John / 1580 ~ 1631)가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의 자전적 기록에 의하면 생존자 32명은 초근목피로 겨우 생명을 유지했고, 1606년부터 24년까지 18년간 버지니아 런던 회사가 신대륙으로 싣고간 이민자는 총 5,694명, 이들 중 대다수는 불순한 기후와 배고픔, 그리고 인디언과의 싸움에서 쓰러지고 1,095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들 생존자들 마저 일부는 이 신천지에 환멸을 느끼고 곧 귀국해 버렸고, 얼마 안되는 인원만이 버지니아에 뼈를 묻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승객을 태운 메이플라워호(Mayflower -號)라는 배가 영국의 플리머스항(Plymouth - 港)을 출발, 미국 버지니아를 향해 떠났다.그러나 겨울 폭풍우를 만나 12월 21일 예정 목표보다 훨씬 북쪽에 닿게 되었는데, 오늘날 매사추세츠주(州)에 있는 그곳을 플리머스(Plymouth)라고 이름짓고 여기에 정착했다. 이것이 뉴잉글랜드의 시작이다.

 

이들 102명 중 35명이 영국의 국교회정책에 반대한 급진파 청교도들이다. 다시말하면 이들 35명은 영국의 종교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레이덴으로 피신했던 영국분리주의 교회 성원들이었고, 2/3 정도는 비분리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이들과 함께 동승했던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90 ~ 1657)의 기록에 의해서 그 진가가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가 쓴 플리머스의 식민사(History of Plymouth Plantation 1620 ~ 47)는 신대륙에 이민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기록에 의하면 ",...수 십만 그루의 나무를 뿌리채 뽑아 버린 어마어마한 폭풍우가 닥쳤고, 무기를 인디언에게 팔아 넘겨서 동족을 위태롭게 하는 배신자가 있는가 하면 플리머스에 간지 1년만인 1621년 겨울에는 온전한 자가 겨우 6, 7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햇수로 3년이 지난 1622년에야 겨우 식량을 생산하여 굶주림을 면하는 듯 했는데 이번에는 모조리 도둑을 맞았다......."하지만 당시의 이런 사정이 플리머스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다른 곳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플리머스의 식민사가 가장 유명해졌고 뒷 날 이들 플리머스의 식민자들을 필그림파더스(Pilgrim Fathers - 巡禮始祖)라고 높게 받든 것도 윌리엄 브래드퍼드가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기록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초기의 영국 이민자들이 당한 고통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것 은 울창한 산림과 무서운 맹수, 그리고 사나운 인디언이 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신천지에는 관습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었고, 남에게 간섭 받을 일도 간섭할 일도 없었기에 마음껏 기량을 펼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것이 에스파냐의 신대륙 식민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고 또한 오늘날의 미국이 있게된 원동력이다.

 

또 하나 1607년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을 세운 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라는 인디언추장 딸과의 스릴있는 사랑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식민지 13개 주(2)

 

나. 영국 식민지 건설

 

(1) 남부의 4개 주(州 - States)

 

 명예혁명 후 권리장전(Bill of Rights - 權利章典)이 발표되었던 1689년, 이 당시 북미대륙의 영국식민지는 오른편 지도에서 보인 것처럼 북위 34도에서 45도 사이의 대서양 연안 일부에 불과했다.

 

아메리카대륙에 식민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진출한 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열강 모두가 시도한 것이고 그 가운데 영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럽의 열강은 이 미지의 대륙을 선점하기 위해 부지런히 땅을 차지했고, 대부분 토착 인디언들한테서 생존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기술을 가르쳐준 인디언들은 대개 백인에게 동화되거나, 우세한 유럽의 화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쫓겨났다.

 

에스파냐는 당시 유럽의 최강자답게 1513년 이미 플로리다에 상륙했고, 1540년에는 뉴멕시코에 도착하여 기선을 잡았다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하고 1624년, 포르트오라녜(지금의 뉴욕 주 올버니)에 뉴네덜란드를 건설했다.

 

이에 뒤질세라 프랑스인들은 1673년에 광대한 미시시피 강 유역을 탐험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인들은 1741년에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이런 유럽열강의 북미대륙 식민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은 유럽대륙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세력경쟁에서 네덜란드와 프랑스 그리고 에스파냐를 제치고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굳힘과 동시에 이 신대륙에서도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해 나갔다.

 

1664년, 네덜란드가 세운 뉴네덜란드를 점령해 버렸고, 7년전쟁(1756 ~ 63)과 때를 같이했던 프렌치-인디언전쟁(1754 ~ 63)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캐나다와 미시시피강 동쪽을 확보했다. 이렇게 해서 13개 주의 아메리카 영국식민지가 건설되었다.

 

1776년, 13개 주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미국이 된 후, 1803년 나폴레옹 1세로부터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에 매입했고, 1819년 에스파냐로부터 플로리다를 할양받았으며, 48년에는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뉴멕시코를 점령했다.

 

그리고 1867년에는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720만달러를 주고 샀다......남북전쟁(1861 ~ 65)을 전후해서는 오늘날과 같은 북미대륙에서의 윤곽이 들어났다.(클릭하면 확대과정의 미국 지도를 볼 수 있음)

 

백만장자도 어려웠던 과거는 있기 마련이다. 광활한 영토와 천연자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미국이라해서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번영을 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의 경우만 해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가 플리머스에 상륙하기 6년 전인 1614년, 우연한 인연으로 네덜란드인들이 이곳에 정착했던 곳이다.

 

1621년 네덜란드는 서인도회사(West India Co)를 세우고 오늘날 뉴욕 시뿐만 아니라 주변의 코네티컷,·뉴저지,·롱아일랜드에 이르는 지역까지를 포함하여 24년에는 뉴네덜란드를 건설했고, 26년 이곳의 네덜란드 총독은 인디언 원주민에게 60길더(24달러 정도) 상당의 겉만 번드르르한 물건들을 주고 맨해튼 섬을 사가지고

 

모피와 흑인 노예를 무역하는 한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보물선을 해적질하여 주가를 높이더니 헐값으로 사들인 맨해튼 섬을 1653년 2월에는 뉴네덜란드의 주도(州都)로 삼고 뉴암스테르담이라 불렀다. 오늘날 뉴욕의 전신인 뉴암스테르담의 당시의 인구는 고작 800명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로서는 본국에서 이주한 식민 인원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계속적인 투자가 이어지지 못하여 세력의 약화되었다. 이를 즈음 1664년에는 요크공(公 - 뒤에 제임스 2세가 됨)이 보낸 영국해군에 의해서 점령되었으며 영국은 이곳을 점령한 후 이름을 뉴욕이라 고쳐 불렀다. 이와 같이 미국의 독립당시까지 성립되었던 13개 주(州)란 어떤 계획에 의해서 어느날 동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사정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다.

 

같은 영국인들이 살았던 대서양연안이라 할지라도 위치에 따라 자연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크게는 남부와 북부의 2개 지구로 나누고, 여기에 중간에 해당하는 중부를 별개의 지역으로 다시 나누어 통상 3개로 구분하는데 1607년 영국의 첫 번째 식민지가 된 버지니아(Virginia)를 비롯해서 메릴랜드(Maryland / 34년 건설)와 노스(North) 사우스(South) 양(兩)캐롤라이나(Carolina / 63년), 그리고 13번째 주가 되었던 조지아(Georgia / 1733년)주(州)를 합해서 통상적으로 남부라 한다.

 

반면 뉴잉글랜드에는 1620년 플리머스 식민지가 개척된 이래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 1630년)와 코네티컷(Connecticut / 31년),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 36년)와 뉴햄프셔 (New Hampshire / 38년) 주(州)를 합쳐서 북부라 하며,

 

그 사이에 있는 뉴네덜란드 지역인 뉴욕(New York / 1624년)과 뉴저지(New Jerser / 38년), 그리고 펜실베니아(Pennsylvania / 81년)주(州)를 편의상 중부라 한다.

 

남부건 북부건 어느 곳 할 것 없이 식민초기에는 살기가 매우 어려웠다. 북부의 뉴잉글랜드지방은 겨울이 길고 골짜기는 좁으며 구릉(丘陵)과 돌이 많았으며, 반대로 남부는 여름이 길고 늪과 진흙이 많았으나 울창한 수목이 버티고 있었다. 농지로 개간하기 위해서는 돌을 들어내고 나무를 베어내어 땅을 일구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만큼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버지니아 식민지를 세운 런던회사는 적자를 면할 수 없었고, 더 많은 사람들을 이 신대륙으로 보내어 노동력을 확보하고 지원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1609년과 1612년, 국왕으로부터 특허를 받아 계약을 수정하고, 복권을 발행하여 부족한 재정에 보충하는 한편, 스스로 경비를 마련하여 신대륙으로 건너간 사람들에게는 50 에이커(1 acre는 1224.2 평, 4046.8 평방미터)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배삯을 위시해서 최소 필요경비를 마련치 못하여 신대륙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회사가 우선 비용일체를 부담하고 현지에 대려간 후 7년간 의무적으로 봉사케 하고, 기간이 지나면 역시 50 에이커의 땅을 할당해 주었다.

 

인덴슈어드 서어번트(indentured servant)라고 부르는 이들을 연기계약봉직자(年期契約奉職者), 계약고용자(契約雇用者), 혹은 독립계약고용자(獨立契約雇用者) 등으로 우리들은 번역하여 부르는데, 이런 계약은 그들의 오랜 전통인 도제제도(徒弟製度)에서 비롯되었으며,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도착한 102명 가운데 2/3가 이런 계약에 의해서 건너간 자들이며, 당시 이민자의 70%가 이들 연기계약봉직자들이었다.

 

1619년 네덜란드인들이 흑인노예 20명을 싣고 왔으나 이들 역시 연기계약봉직자로 받아들였으며 노예라는 개념이 아직은 없었고, 같은 해 담배재배를 시작하였으나 런던회사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왕실에 떠넘겨 1624년에는 버지니아가 영국의 왕령(王領)이 되었다.

 

결국 런던의 상인들이 출자해서 경영했던 회사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 것을 버지니아 주민들이 담배 경작을 열심히 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마지못해 영국의 국왕이 인수한 셈이다.

 

그러나 매릴랜드에서 조지아주로 이어지는 남부의 기후와 토양은 담배, 쌀, 인디고(Indigo - 염색 원료) 재배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따라서 런던회사의 이런 고초를 몇 세대가 지난후 그 후손들은 몇갑절로 되돌려 받았는데, 특히 높은 기온과 충분한 수분으로 잡초처럼 자라는 담배는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노스캐롤라이나 등지에 많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1680년대부터 쌀을 생산하였으며, 직물의 염색 원료가 되는 인디고는 남부 어느 곳에서나 잘 자랐다.

 

영국본토에서는 생산되지 않았던 담배, 쌀, 인디고가 이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고마운 효자 작물이 되었고, 영국의 상인들은 다투어 이곳에 투자하였다. 이들로부터 돈을 빌린 농장경영자들은 점진적으로 농장을 확대했다.

 

이들 농자주들을 플랜터(Planter)라 불렀고, 이들 플랜터가 경영하는 대농장, 서양인의 기술과 자본, 원주민의 노동력이 결합해서 단일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이른 바 플랜테이션(Plantation - 栽植農業)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남부에서 가장 수익이 높은 것은 담배였다. 영국에 담배를 들여온 것은 월트 롤리(Walter Raleigh / 1552? ~ 1618)라는 인물이다. 그는 군인인 동시에 탐험가로서의 명성도 떨쳤고, 서정시인 스펜서(Spenser, Edmund / 1552? ~ 1599)와 교분이 두터울 정도로 시작에도 능했으며, 세계사를 쓸 정도로 산문(散文)에도 뛰어났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값진 망토를 진창길에 깔아 엘리자베드 1세 여왕이 지나가게 할 정도로 기지와 아첨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복잡한 그런 사람이다.

 

롤리가 엘리자베드 1세의 총애를 받아 1585년에는 작위를 받고 기사(騎士)가 되더니, 87년에는 근위대장까지 지냈다. 그러나 여왕 몰래 결혼하여 아들을 낳게 되자 결혼이 들통났고 여왕의 질투로 1592년 런던탑에 수감되기도 했다. 여왕이 죽은 후 제임스 1세(1603 ~ 25)가 즉위하자 평화주의자였던 제임스 1세는 반에스파냐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롤리를 중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롤리는 국왕을 갈아치울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1603년 다시 런던탑에 수감되었고, 1616년 풀려났으나 반역사건에 대한 완전사면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태에서 1618년 남미의 오리노코강을 탐험을 시도했으나 더위와 열병에 견디지 못하여 실패하고 귀국, 이 과정에서 그 부하들이 에스파냐령에서 난폭행위를 저질러 항의를 받게되자 에스파냐와의 충돌을 싫어했던 제임스 1세에 의해서 월터 롤리는 결국 처형되었다. 처녀지란 뜻의 버지니아라는 이름은 그가 지은 것이다.

 

작위를 받기 2년전인 1583년, 롤리는 이복형인 험프리 길버트(Gilbert, Humphrey / 1539~1583)와 같이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섬에 식민지를 건설코자 건너갔으나 실패하고 귀국도중 아조레스제도의 근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길버트는 죽었다.

 

1584년에는 북미대륙의 플로리다북부를 버지니아라 부르고 엘리자베드 1세로부터 소유권을 얻었고, 85년에는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로어노크섬에 식민지를 세우려다가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이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버지니아라는 이름과 담배와 감자를 처음으로 영국에 전하여 지금까지 그 명성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전래된 것은 17세기 초 광해군(1608 ~ 23) 년간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는지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남초(南草), 남령초(南靈草), 왜초(倭草)라른 기록이 옛 문헌에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을 경유해서 들어왔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에서는 게이초(慶長 - 1594년 이후 몇 년간 사용된 일본의 연호) 년간에 조선에 출병했던 토요토미의 부하들이 조선인들로부터 담배를 배웠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담배를 서초(西草)라고 기록한 것이 우리의 문헌에도 있는 것을 보면 중국에 와 있던 서양인들로부터 배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담배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지만 의약품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근대시절에는 구충제나 지혈제, 혹은 진통제로서도 널리 상용되었고, 지금은 간접흡연의 피해까지 들먹이며 협박에 가까울 정도로 금연운동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역설적으로 애연가들의 담배에 대한 매력 또한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는 담배덕택에 살아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독립전쟁(1775 ~83) 직전까지 담배 수출량은 약 4만톤, 금액으로 따져 13개 주의 수출량 절반을 담배가 차지하였고, 영국의 상인들은 웃돈까지 얹어 주면서 담배재배를 장려하였다.

 

그 결과 역시 독립전쟁 직전까지 13개주가 영국상인들로부터 빌린 돈이 5백만 파운드스털링(pound sterling), 이 중 5/6가 남부에서 그것도 담배재배를 위해 빌려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남부는 농업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으며, 농장을 경영하는 플랜터(planter)에 의해서 사회는 주도되고 농업사회의 뿌리가 내렸다.

 

여담이지만 얼마전까지만해도 영국의 통화단위는 매우 복잡했다. 정식 호칭인 파운드스털링(pound sterling)을 줄여서 파운드, 또는 스털링이라고 부른 것 까지는 좋은데, 1파운드는 20실링(shilling), 1실링은 12펜스, 21실링을 1기니, 5실링을 1크라운, 2실링 6펜스를 반크라운, 2실링을 플로린.......

 

덧셈이외의 다른 수리계산능력이란 형편없는 그들 주제에 어떻게 이런 복잡한 통화단위를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세계 1차대전(1914 ~ 18) 이전까지 영국의 국력과 함께 런던은 세계금융시장의 중심이 되었고 국제간 무역거래에서 결제수단으로 파운드화가 널리 쓰여 기축통화(基軸通貨 - key currency)로서의 역할을 단단히 하였다.

 

1차대전후 세계경제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가 미국의 달러(dollar)가 그 화려한 영광을 물려받게 되자, 영국의 파운드는 1971년 2월 15일을 고비로 종래의 복잡한 단위를 버리고 10진법으로 단순화 하여 100페니를 1파운드로 고쳤으며 실링은 사라졌다....그리고 1980년대는 외환부족으로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리기도 했다.....

 

남부에 비해서 본국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는 상품작물이 없었던 북부로서는 먹고사는 길이 바다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 방법으로 고기잡이를 하거나 더 많은 돈벌이를 찾아 밀무역과 노예무역으로 나서게 되었다.

식민지 13개 주(3)

 

나. 영국 식민지 건설

 

북부와 중부의 9개 주(九個 州 - States)

 

(2) 북부(New England)의 5개주

 

 

미국 대서양연안의 도시 보스턴(Boston) 중심으로 그 일대를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 하고,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존 스미스(Smith, John / 1580 ~ 1631)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 예일대학(Yale university) 그리고 M I T라고 줄여서 부르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등이 자리잡고 있는 일대의 주변을 뉴잉글랜드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뉴잉글랜드의 중심도시가 보스턴이고, 보스턴은 미국 독립운동의 요람으로서 지금도 해마다 4월 19일이면 "애국의 날"이라 하여 그 행사의 일환으로 마라톤 경기를 실시하고 있다. 일명 보스턴마라톤(Boston Marathon)라른 것이 이것이다.

 

4월 19일은 4. 19의거, 4. 19 혁명이라 하여 시대 상황에 따라 이름을 달리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학생들의 유혈 데모로 무너뜨린 날이고 그 기념행사도 매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미국의 보스턴마라톤 대회는 미국독립 전쟁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1775년 4월 19일, 렉싱턴전투(Lexington, Battle of)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사정이고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세계적인 이 대회에 1947년(제51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는데, 서윤복(徐潤福) 선수가 2시간 25분 39초라는 기록으로 1위를 하였고, 남승룡(南昇龍 -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 동메달리스트, 이때의 1위가 손기정) 선수는 10위(2시간 48분 40초)를 차지하여 마라톤 강국의 입지를 확인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4월, 제54회 대회에 참가한 한국의 건아들은 함기용(咸基鎔)이 2시간 32분 39초의 기록으로 1위, 송길윤(宋吉允)은 2시간 35분 58초의 기록으로 2위, 최윤칠(崔崙七)은 2시간 39분 45초라른 기록으로 3위로 입상하여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해방에 덧붙여 그 감격의 물결이 2002년 월드컵 4강신화에 조금도 못지 않았다.

 

1, 2, 3위를 싹쓸이 했다는 것이 헐벗은 강산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고, 그 눈물어린 감격은 마라톤의 노래를 지어 행복한 표정으로 전국민이 부를 만큼 열광적이었다......

 

1607년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을 세웠던 존 스미스가 1614년 이곳을 탐험하여 영국처럼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뉴잉글랜드라 이름짓고, 모피(毛皮)를 가지고 영국(잉글랜드)으로 돌아가 크게 환영을 받으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것은 존 스미스의 일방적인 판단이고 당시의 이곳 사정이 지금과는 달리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었고 모피역시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태에서 영국의 뉴잉글랜드 식민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1606년 4월, 영국의 제임스 1세는 북위 38 ~ 45° 사이의 아메리카 동부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특허를 런던과 플리머스의 상인들에게 주었다. 식민지역을 북위 38 ~ 45° 사이로 한정한 것은 국제분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보다 더 남쪽을 내려가면 에스파냐와,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프랑스와 충돌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의 특허를 받은 상인들은 회사를 설립하고 버지니아(Virginia)의 제임스타운을 시작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식민초기에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는 것은 앞글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그렇다면 버지니아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뉴잉글랜드에서 식민사업에 성공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런던과 플리머스 상인들이 투자는 각각 했지만 목적은 신대륙에서, 그것도 버지니아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설립했기 때문에 이들 회사를 통칭 버지니아회사(Virginia Companies)라고 부른다.

 

어쨌거나 런던회사는 의욕적으로 신대륙(버지니아)에 식민자를 보냈지만 결국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1624년부터 왕령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앞글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다. 한편 플리머스 상인들이 투자했던 플리머스회사 역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출발 1년만에 사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불모지와 다름 없는 이런 지대에 다시 도전장을 낸 것은 퍼디낸도 고지스경(卿 - Sir Ferdinando Gorges / 1566 ~ 1647)이란 인물이다.

 

1620년 고지스는 자신은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신대륙에 이상적인 제국 건설을 계획하고 국왕으로부터 특허장을 받아낸 후, 플리머스·브리스틀·엑서터의 지방의 지주들인 젠트리를 설득, 이들을 주요 주주(株主)로 구성하고 뉴잉글랜드회사(Council for New England)라는 합자회사를 설립, 그 관할 범위를 북미대륙의 북위 40~48°로 정하였다.

 

다시 말하면 버지니아 회사가 런던과 플리머스의 상인들이 투자하여 만들어졌다면, 고지스가 설립한 뉴잉글랜드회사는 영국의 플리머스 지방의 지주(地主)를 중심으로 만들어 졌고, 그 관할 범위를 뉴잉글랜드로 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지스는 이 신대륙에 봉건적 제후령을 만들기 위해 40명의 주주(株主)들에게 땅을 분배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만큼 수익은 고사하고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1626년 이 회사의 주주(株主)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식민지 사람들에게 팔아넘겼다. 결국 고지스가 세운 뉴잉글랜드 회사는 식민지와 영국왕실과의 중계역할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서 1629년에는 국왕의 특허를 받은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 만 회사를 세웠고, 또 다른 비국교도들이 필그림스 회사(Pilgrims:1620)를 세워 국왕으로부터 특허를 얻어 뉴잉글랜드에 합법적인 식민을 하게 되었다. 고지스가 세운 뉴잉글랜드 회사의 관할지역에 다시 두 개의 회사가 더 성립되어 경쟁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를 고비로 고지스의 뉴잉글랜드회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됨으로써 왕실과 식민지간의 중계자로서의 역할도 끝나고, 1630년대 부터는 주로 매사추세츠만(灣) 회사가 뉴잉글랜드의 식민사업을 맡았다. 하지만 이곳 뉴잉글랜드의 플리머스에는 이와는 상관없는 다른 식민자들이 들어와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초기,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플리머스(1620), 매사추세츠(1630), 코네티컷(1631), 로드아일랜드(1636), 뉴햄프셔(1638) 그리고 메인(1640) 등의 식민주가 차례로 건설되면서 버지니아 등 미국의 남부와 대칭해서 북부라고 불렀다.

 

그러나 남부와는 달리 기후, 토양, 환경 모두가 대규모 농장개척에는 부적합했고,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하천도 없었으며, 본국인 영국에 수출할 수 있는 농산물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서 이곳에 정착한 영국인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흔히들 고대그리스의 아테네라 할말큼 미국인들에게는 뉴잉글랜드가 마음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식민초기에는 사람이 살기에는 매우 어려웠던 곳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곳에 영국인들이 찾아 들었고 그 후예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1620년 버지니아 런던회사(Virginia of London Company)가 주선한 메이플라워호(May flower - 號)를 타고 버지니아를 향해 영국의 플리머스를 떠났던 102명의 식민자들은 그해 11월, 상륙에 앞서 메이플라워 서약서(Mayflower Compact - 誓約書)라는 것을 만들고 같은 배를 탄 성인남자 전원이 서명, 자주적 식민정부를 수립하고 다수결 원칙에 따라 운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척박한 땅에 처음부터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겨울폭풍으로 배가 항로를 이탈하여 원래의 목적지 버지니아를 벗어나 그 보다 훨씬 북쪽에 닿게 되자 버지니아 런던회사와 맺은 인덴슈어드 서어번트(indentured servant - 年期契約奉職者)로서의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들 식민자들이 일정기간 회사에 봉직(奉職)해야되는 의무는 없어졌지만 동시에 이들을 보호해줄 아무런 장치도 없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들 식민자들은 도착한 곳을 플리머스라 이름짓고 열심히 척박한 토양을 일구어 씨앗을 뿌렸지만 식량을 얻는 것 조차 어려웠다. 그렇지만 메이플라워호 서약은 스튜어트왕조의 절대주의와 영국국교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당시의 영국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1629년, 영국의 청교도(淸敎徒 - puritan)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힘을 모아 매사추세츠만(灣) 회사를 설립하여 국왕 찰스 1세로부터 매사추세츠만(灣) 식민지(Massachusetts Bay Colony) 건설의 특허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부유한 젠트리출신으로서 변호사로 있었던 존 윈스럽(Winthrop, John - 1588 ~ 1649)이란 인물이 청교도라는 이유만으로 면직되어 이에 동참하자 청교도들은 1629년 10월 윈스럽을 총독으로 선출하고, 1630년 봄 아벨라호라는 배를 타고 천여명이 대서양을 건너 보스턴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땅, 이것이 뉴잉글랜드라는 것이며, 메이플라워서약은 이후 플리머스 식민지의 기본법이 되어 1691년 이 지역이 매사추세츠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되었으며, 이후 미국 정치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 1691년은 매세추세츠만 회사가 경영했던 이 지역이 자치식민지에서 영국의 왕령(王領)으로 바뀌었고 플리머스 역시 매사추세츠에 흡수되고 말았다. 사사건건 본국에 반기를 드는 이런 식민지를 그냥 보고만 넘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정신마져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북부의 사람들은 가난에 시달리며 잿물을 받아 비누로 사용하고 구두는 손수 만들어 신었다. 이렇게 생필품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과정에서 자립 내지는 독립의 정신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고, 본국의 부질없는 간섭은 단호히 거절하는 기풍이 몸에 베게 되었다.

 

다수의 영국국교회의 분리주의자(급진 청교도)들은 자신들 만의 이상적인 신정(神政) 정부를 수립하고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그렇다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영국국교회의 분리주의자들(급진 청교주의자)만은 아니었다.

 

영국국교회의 범주내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다시 이들 급진청교주의자들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이들과 결별, 코네티컷과 로드아일랜드라는 자치주(自治州)로 갈라서게 된다. 이런 것이 당시 영국 본국에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상과 같은 것은 주로 식민초기, 이민 1세대들이 살았던 17세기 전후반에 있었던 일들이고, 18세기가 되면 노예무역과 서인도제도와의 밀무역 등으로 자본도 축적하고, 이에 수반해서 공업도 크게 발전하여 뉴잉글랜드가 미국의 모체로서의 모습을 서서히 들어내게 된다.

 

당시 최대의 돈벌이는 노예무역이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구하기 위해서는 럼(rum)이라는 술이 있어야 하고 이 럼이라는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밀(糖蜜)이 있어야 한다. 서인도제도에서 헐값으로 구입한 당밀을 실은 배가 뉴잉글랜드 항구로 들어오면 우선 당밀을 원료로 럼주를 만들고, 럼주를 실은 배가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르러 럼주를 매개로 그곳 추장과 거래를 하거나 이를 미끼로 직접 노예사냥(?)에 나선다.

 

이렇게 해서 노예가 확보되면 이를 싣고 라틴아메리카로 가서 이들 노예를 팔고 다시 서인도제도에서 당밀을 사온다. 이런 삼각무역에 에스파냐가 그냥 있을리는 없다.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국왕의 허락없이는 어느 누구도 라틴아메리카에 갈 수 없도록 엄한 칙령을 발표해 놓고 있었다. 그래서 뉴잉글랜드와 라틴아메리카의 이런 무역도 국가간에 정식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라 밀무역(密貿易)의 형태로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이 밀수든 밀무역이든 이로 인해서 뉴잉글랜드에서는 조선업(造船業)이 호황을 누렸으며, 부수적으로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목재업(木材業)과 제철업(製鐵業)이 발달하여 본국 선박 톤수의 1/3 가량을 건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병행해서 직물과 신발 등 소비재공업도 발달하여 본국인 영국으로부터의 생필품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했다.

 

따라서 식민지의 남부가 플랜터(planter)라는 대농장 경영주를 중심으로 본국과의 긴밀한 관계에서 농업중심의 사회를 이룩했던 것과는 달리 북부에서는 부유한 상인들이 본국의 부당한 간섭에 저항하면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어 남북간에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이런 양자의 모순이 일단 힘을 모아 독립을 쟁취한 후, 남북전쟁(Civil War / 1861 ~ 65)으로 마무리 되었다.

 

(3) 중부(New Netherland)의 4개 주

 

남부와 북부의 중간에 위치한 뉴욕(1624년 네덜란드가 건설), 뉴저지(1638년 스웨덴이 건설), 펜실베이니아(1681년 펜가의 사유지), 델라웨어(Delaware 1704년 펜실베이니아에서 분리) 등의 4개주는 네덜란드와 스웨덴, 영국 등이 번갈아 가면서 식민개척 한 곳으로 통상 뉴네덜란드라고 부르는 지방이다.

 

영국에 앞서 네덜란드와 스웨덴이 이곳에 들어 왔으나 결국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독립전쟁 당시에는 13개 식민지의 구성 멤버가 되기 까지의 변천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앞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뉴욕이 원래는 네덜란드인 들이 개척한 곳이라는 것만 이해하고 넘어가자.

 

중부는 남부와 북부를 절충한 것 처럼 양쪽의 자연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어서 토지는 평탄하고 비옥하여 일반작물의 재배가 용이하고 가축의 사육에도 적합했다. 따라서 백만 에이커나 되는 초대형 농장이 있었는가 하면 곡류와 육류 등을 서인도제도에 수출할 수 있었고, 대규모의 공장도 건립되어 부유한 상인도 많이 생겼다.

 

이처럼 13개 식민지는 서로가 달랐지만 전체로서는 나름대로의 유형(類形 - pattern)이 있었고 이런 유형은 유럽과도 달랐고 라틴아메리카와도 달랐다. 이것이 오늘날의 미국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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