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대륙(1) - 아메리카의 원주민들
1. 아메리카의 원주민(原住民)들
(1) 몽골계 인종
면적 4221만 ㎢, 인구 7억 6천만, 세계 육지면적의 31%, 세계 인구의 14%, 북미의 대평원과 남미의 팜파스 평원, 로키와 안데스 두 산맥, 미시시피와 아마존강, 복잡한 인종구성 등으로 알려진 이 거대한 대륙이 세상에 완전히 그 모습을 들어 낸 것은 불과 5백여년 전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전, 이른바 제 4 빙기(氷期)가 끝날 무렵 인류는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이행되었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만 5천년 내지 2만년 이전 사이, 즉 플라이스(Pleistocene Epoch - 洪績世) 말기에 몽골계 인종이 베링해를 건너 지금의 아메리카 땅으로 이주하면서 비롯되었고,
이들은 부족단위로 삶의 터전을 찾아 보다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북으로는 알래스카에서부터 남으로는 혼곶(Cape Horn)까지 광활(廣闊)한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정착, 독자적인 문화 유형(類型)을 만들어 갔다.
콜럼버스가 그들을 발견한 15세기 말경에는 1천만 내지 1천 5백만 정도의 인구가 대부분 부족단위로 남?북 아메리카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 비록 문화적으로는 신석기시대의 단계에 머물고 있었지만, 부족에 따라서는 나름대로의 특이한 문화와 생활방식도 갖이고 있었다.
지금의 북극해 일대에는 에스키모(Eskimo)족(族)이, 캐나다와 미국에는 Athapaska, Algonkin, Iroquor, Siou, Shoshoni, Muskogi 족(族)이 멕시코에는 Aztec, Tolteca, Zapoteca족(族)이, 남부멕시코와 중앙아메라카에는 Maya족이, 카리브해 연안과 베네주엘라, 콜럼비아 등지에는 Chibcha족이, 페루, 에콰토르, 볼리비아 등지에는 Inca족이, 아마존 하구에는 Tupi족이, 아마존 유역에는 Arhuacoa족이, 남부브라질, 파르과이, 아르헨티나 등지에는 Guarani족 등이 근간을 이룬 가운데 다시 여러 부족과 씨족으로 분화되어 언어와 문화가 각기 다른 수백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우리들이 이름이 남아 들어본 것은 Maya, Aztec, Inca 등이고 Eskimo는 전혀 낮설지 않으며, Ahtapaskan 인디언의 한 종족인 아파치(Apache), 다코타족(Dakotas)이라고도 불렀던 수 족(族 - Sioux) 등은 과거 미국 서부영화에서 관객을 동원하기 위해 다소 과장되긴 했으나 안장(鞍裝)없는 말위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인디언의 모습을 통해서 그 생활상을 일부남아 볼 수 있었다.
이들 모두는 피부색과 머리카락, 신장과 용모에서 황인종에 속하며, 어린아이의 엉덩이에 생기는 푸른 반점(斑點), 별 표정없는 얼굴모습, O 형(型)의 혈액형(血液型)이 많은 것 등으로 미루어 몽골계 아시아 황인종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으나 지역과 환경에 따라 인종적인 차이는 물론이고 생활 역시 매우 다양했다고 한다.
유목민(遊牧民)이 있는가 하면, 미시시피 유역에서 들소(buffalo) 등을 사냥했던 수렵(狩獵)족, 북대서양 연안에서 물고기도 잡고 농사도 지었던 반농반어(半農半漁)족, 고원지대에서 옥수수나 감자를 심고 살았던 고산 농경(農耕)족 등 매우 복잡했다는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캐나다와 미국에 해당되는 북미지역에 약 1백만명,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와 과테말라 등에 약 300만 명, 그 밖의 남아메리카 전역에 약 900만 명 이상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마야족과 아스텍족, 그리고 잉카족들은 다른 부족을 정복 혹은 병합하여 큰 정치세력으로 발전했고, 금속기구와 문자의 사용, 도시를 형성하여 고대 문명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2) 마야족과 마야문명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먼저 문명의 단계로 들어갔던 것은 마야(Maya)족(族)이라는 것에는 이의(異議)가 없다.
이들 마야족은 5천년 전부터 멕시코 동남부와 유카탄반도 일대에서 옥수수를 주식량으로 화전(火田)을 일구어 농경에 종사하면서 수시로 이동하였기에 그 중심도 지금의 멕시코 중앙지역과 유카탄반도의 북부 및 과테말라의 고지(高地),
그리고 차파스지방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지방 등 몇 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지역적으로 중앙아메리카에 해당되는 이곳의 자연적인 특징은 북위 15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위도상으로는 열대 혹은 아열대지방에 해당된다. 따라서 저지(低地)는 열대기후지대로서 밀림이 형성되고 생활환경이 열악하다. 이런 지역에서는 문명이 발생될 수가 없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마야인들은 이런 열악한 곳에서 문명의 꽃을 피웠던 것이다.
마야의 뒤를 이은 아즈텍인들이 세웠다는 아즈텍문명은 이른바 멕시코고원(Mexico Plat)이라고 부르는 수직(垂直) 고도가 1500m 내외의 고원(高原) 지역에서 항상 봄날처럼 따뜻한 온대기후가 옥수수 등 작물 성장에 적합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농경을 이루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동쪽에는 시에라마드레오리엔탈 산맥이 서쪽에는 시에라마드레옥시덴탈산맥이 각각 남북으로 치닫고 있고, 그 사이에 멕시코고원(Mexico Plat)이 자리잡고 있으며, 고원의 평균해발고도는 북부가 1500m내외, 남부는 3000m에 이르고, 남부에는 5,699 m의 오리사바산을 비롯하여 많은 고산(高山)들이 둘러 싸고 있고, 이런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있어서 농경과 주거환경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멕시코 고원을 아나와크라고도 부르는데 이 말은 물의 근처라는 뜻이라고 한다.
북아메리카에서 살던 작은 부족인 마야족이 남진하여 기원전 3000년 경 중반에 유카탄반도에 정착, 부근의 톨테카족(Tolteca)족을 압도하고 특이한 밀림문명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마야문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설이 있고, 증빙할 만한 자료들은 에스파냐 침략자들에 의해서 산질되어 그 실체를 정확하게 밝히는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희귀(稀貴) 하나마 최근 고고학적인 유적과 유물의 발견으로 편년(編年)이 재정립 되고 있고,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들이 정리되면 상세한 내용들이 밝혀질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것은 과테말라 페텐 주 북서부에 있는 티칼(Tikal)의 마야 유적지에서 발견된 석조구조물에 새겨진 연대(年代)로서, 가장 오래된 석조물은 A D 292년에, 가장 늦은 석조물은 889년에 만들어졌다. 약 600년에 걸친 이 기간 마야문화의 편년을 설정할 수 있고, 마야의 고전문화라는 것은 주로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을 정리한 것이다.
마야인들은 회화(繪畵), 조각(彫刻), 토기(土器), 석조건축 및 상형문자의 사용에도 능했는가 하면 산술실력도 뛰어나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영(0, 零 - zero)을 이용하였으며, 마야력(Mayan calendar)이라는 특이한 달력을 만들 정도로 천문학에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마야력에 의하면, 한 달을 20일로 정하여 1년을 18개월로 나누고, 나머지 5일을 첨가일로 덧붙여 1년을 365일로 만들고, 월(月)과 일(日)에는 각각의 이름을 붙였다. 나머지 5일도 일관하여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다음해가 되면 날의 명칭에는 다섯 개의 차이가 난다. 이것이 4년마다 제자리로 돌아오고, 별도의 윤일(閏日)은 두지 않았다.
이와은 별도로 1에서 13까지의 서수(序數)를 일관되게 사용하여 이듬해의 같은 달 같은 날에는 하나가 많은 수를 취하였다. 따라서 같은 날의 명칭과 같은 서수의 결합은 260일마다 일순(一巡)하고,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서수의 결합은 52년마다 제자리로 돌아 오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마치 10천간(天干)과 12지지(地支)를 결합하여 60갑자(甲子)를 만들었던 중국역법(中國曆法)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는데, 마야인들에게 52년이라는 주기는 매우 중요했고, 이 기간이 지나면 신관의 명령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이주했으며, 지구의 공전주기로 생기는 남는 시간은 84년마다 축제나 행사 등의 날짜를 1개월 늦추어 공백을 메꾸었다.
결국 마야의 역(曆)은 260일의 단력(短曆)과 365일의 장력(長曆)이 동시에 사용되었고 사람의 운명은 이를 짝맞추어 나타나는 4개의 부호(符號)에 따라 정해진다고 생각하였으며, 모든 의례(儀禮)는 이 역에 따라 시행되었다고 하는데. 의례중에는 처녀를 우물에 던져 수신(水神)에게 공양도 하였고, 남자의 심장과 피를 제단에 바쳐 태양신을 받들기도 했다.
이런 마야문화가 기원 1000년 경에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두고 역병(疫病), 혹은 외적의 침입, 혹은 자연재해 등 여러 이설이 있으나 다만 추측일 뿐 아직까지 분명히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마야문화가 인근에 전파되어 유럽인이 들어오기 이전까지 중남미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는 것은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3) 아스테크족과 그 문화
오늘날 멕시코의 북부와 중부에 자리잡고 있었던 아스테크족의 초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원래는 멕시코 북방의 아스틀란 지방에 살면서 수렵생활을 했던 만족(蠻族)이었고,
12세기경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여 13세기경에는 톨테카족을 압도하고 멕시코 중앙고원에 정착하여 주위의 많은 부족을 정복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한다.
14세기 초 아스테크족은 테스코코 호상(湖上)의 작은 섬에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 - 현 멕시코시티)이라는 도시를 세우고 예리한 청동제 무기와 수렵으로 단련된 기술을 전투술에 응용,
주변 농경민을 정복하여 세력을 확장, 16세기 초엽에는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이 6만의 호구(戶口)에 인구는 20만 이상의 대도시로 발전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런던의 인구가 약 20만이 였다니까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에는 군신(軍神)을 모신 대신전과 제왕(帝王)의 궁전이 있었으며, 호안의 중요 도시와는 세 개의 제방도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수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도시 북쪽에는 트라테롤코라는 상업지구가 있어서 이곳에서 시장이 서면 2만 내지 2만 5천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음식물, 의복, 깃털, 금은 보석으로 만든 새와 짐승들의 장식물 등이 거래되어 호화판을 이루었다.
토지는 기본적으로 공동관리되었고, 부족 평의회가 하급 씨족들에게 분배해 주면 각 씨족의 족장은 그것을 다시 각 가족에게 분배해 주었다. 그러던 것이 에스파냐인들이 이곳을 침입할 무렵에는 세습제의 수장이나 제사장(祭司長)의 권한이 다소 확대되어 그들의 개인소유지가 늘어나고 있었고 그들의 사유지에는 가난한 노동자나 전쟁포로들이 노동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족(蠻族) 출신인 아스테크족이 국가를 영위할 만한 능력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국가형성을 이룬 뒤에 만들어낸 종교체계나 천문·역법(曆法)·문학 등은 주로 마야문화를 전승한 톨테크계(系) 문화에 바탕을 두었다.
샤먼적인 제전(祭典)에서 많을 때는 2만에 가까운 사람들을 제물로 바쳤고, 따라서 인신공양을 위한 사람을 구하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정복이라는 목적 이외에도 인신공양에 필요한 재원(財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슬픈 사연도 담고 있었고, 정복지에서 거둔 조세는 이런 종교의식에 거의 소진되었다.
아스테크의 제단(祭壇)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보다 규모가 크다. 전쟁의 포로를 이 제단 위에 반듯하게 ?여 놓고, 예리한 석제(石製) 칼로 가슴을 절개하여 심장과 그 피를 태양신에게 바쳤다. 세계의 본질인 허무의 암흑과 싸우는 태양에게 인간의 피와 심장을 바침으로서 활력을 주어 영원히 아스테크 시대를 지속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스테크족은 태양에게 인간의 심장과 피를 바치지 않으면 태양은 움직임을 멈추고 세계에 종말이 온다는 숙명적 신앙을 갖고 있었고, 아스테크족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피의 공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파렴치한 이런 범죄행위도 매우 정당하게 여기고 서슴없이 치렀다는 것이다.
이런 아스테크 사회의 변방에 속했던 서인도 제도의 곳곳에서는 1492년 10월 어느날, 낯선 이방인들이 찾아 들었다. 큰 날개를 세 개씩이나 단 배가 세 척이나 나타나 바다 멀찌감치에서 멈추드니, 그 배에서 다시 작은 배들이 나오고, 이 작은 배들이 뭍을 향해 오는데, 거기에는 흰얼굴에 수염이 가득하고 키가 큰 사람들이 모래사장에 깃발을 꽂고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중얼대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난생 처음 듣도 보지도 못했던 이런 광경을 목도했던 원주민들은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꿈에도 그렸던 케찰코아틀(Quetzalcuatl)의 재림(再臨)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들이 그렇게 믿게 된 것은 이런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9세기경 멕시코 고원에는 툴라라는 신정(神政)국가가 있었고, 이 왕국의 왕(王)이었던 케찰코아틀은 농경(農耕), 야금(冶金), 역산(曆算), 정치(政治)에 관한 지식을 전수(傳授)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군사계급과의 투쟁에서 패배하여 배를 타고 동방으로 떠나면서 “내 다시 꼭 돌아 오겠다”는 약속을 굳게 남겼다고 한다.
이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전설처럼 굳어져 신격화 되고, 사람들은 은연중 이제나 저제나 하고 케찰코아틀 왕이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차제에 콜럼버스 일행이 나타나자 원주민들은 이들이야 말로 동방에서 온 케찰코아틀의 화신이라 믿고 따랐으나 곧 거짓임이 탄로 났다.
(4) 잉카 제국
유카탄 반도와 멕시코 고원에서 마야, 톨테카, 아스테크가 교대로 번성할 무렵 남미(南美)의 페루와 볼리비아에 해당하는안데스산맥의 고원지대에는 잉카(Inca) 제국이 번성하고 있었다.
잉카란 부족의 명칭인 동시에 지배계급을 그렇게 불렀고, 후일 이들이 지배했던 모든 지역을 총칭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들은 군대의 조직이나 도로 건설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신세계의 로마인이란 별칭을 듣기도 했지만, 문자로서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종족의 연원이나 이동경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이들이 국가를 확립한 것은 대체적으로 120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옥수수 재배가 보편화 되고 농경이 시작되면서 비교적 기후가 온난한 페루의 안데스산맥 일대의 고원지대에는 크고 작은 부족국가들이 수 없이 등장하였고, 그 가운데 늦게 출발한 잉카족이 페루의 쿠스코(Cuzco)를 수도로 정하고 13세기경부터 주변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15세기, 잉카제국의 9대 황제 파차쿠티 재위기간 중 전 안데스산맥 일대에 걸친 통일제국을 수립하였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학계의 정설이다.
잉카족 역시 금, 은, 구리는 장식용으로 혹은 도구로 사용하였으나 철(鐵)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고, 문자도 없었다. 그러나 새끼의 매듭과 색깔로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했던 일종의 결승(結繩)문자가 사용되었는데, 문자라기 보다는 기호에 가까운 이런 문자를 갖이고도 복잡한 재정에서부터 인구의 동태 파악에 이르기까지 한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계산하여 공평하게 처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석재(石材)를 다루는 솜씨 또한 매우 뛰어났다.
사회적으로는 신성한 절대군주 잉카를 받들고, 친족인 지배층(잉카)과 일반평민으로 구성되는 계층사회를 형성하여 중앙집권적 전제정치가 시행되었으나 여니 고대사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평민을 위한 사회보장이 완비되어 있었고, 모든 토지는 원칙적으로는 황제의 소유이지만 경지(耕地)는 잉카(지배계급), 태양신을 받드는 제사(祭司), 일반국민으로 3등분하여 경작하였다. 취락의 인구는 10명, 100명, 1,000명 단위의 집단으로 구성되고, 각 집단은 수장(首長)을 두었는데 이들을 각각 충카·파차카·와랑카라고 불렀고, 그 장(長)은 그 지방에서 잉카 이전부터 있던 수장(首長)이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25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자들은 국가로부터 경작지를 받는 대가로 수확량의 일부를 국가에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사나 잉카의 경작지에서 노동을 하거나 도로·다리의 건설 등에 동원되는 일종의 부역으로 이를 탕감하였고 실제로는 공납이든 조세든 바친 것은 없었다. 때문에 천명 단위의 수장인 와랑카와 백명 단위의 수장인 파차카는 자신들이 관할(管轄)하고 있었던 부락에서 연령별로 인구를 파악하여, 매년 잉카(왕족)에게 보고하는 의무를 졌다.
일반 평민은 왕으로부터 지급된 토지를 경작하여 충분한 생활 물자를 얻었고, 과부·노인·고아 등에 대해서는 잉카와 제사(태양신)의 전답에서 얻은 수확물 일부를 식량으로 지급받았으며, 기근이 닥치면 국가의 창고를 풀어 구휼(救恤)하였다.
잉카제국의 모든 인간은 이와 같은 질서정연한 피라미드형 지배체계 속에 배치되었으나, 마마코나·아클라쿠나·야나코나라는 3종류의 집단은 지방수장의 감독하에서 벗어나 직접 쿠스코에서 파견되는 잉카의 지시를 받았다. 마마코나란 각 지방의 미혼여성 중에서 선출되어, 태양신전의 제례나 잉카 귀족들을 위한 의복·장식품·주류 등을 제조하기 위하여, 특별한 건물 안에 거주하게 되어 있는 처녀들을 말한다.
이 여성들은 결혼적령기가 되면 집단적으로 동네 남자들과 맞선을 보고 부부의 인연을 맺었는데, 그 중의 일부는 아클라쿠나(선택받은 여자)라 하여 그대로 남아 마마코나의 감독관이 되었다.
야나코나란 잉카 귀족에게 시종하던 하인과 그 사용인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 역시 거대한 신전을 세우고 태양신 등 여러 신을 모셨으나 마야나 아스테크와 같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도 없었다. 이상과 같은 체계적인 정치·사회조직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그런대로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다는 현대국가를 뺨칠 정도로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 있어서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던 그야말로 이상국가를 지향했던 것이 잉카들이 지배하는 나라, 즉 잉카제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경이로운 사실은 이들의 놀라운 토목기술이다. 에콰도르에서 북부 칠레까지와 북부 아르헨티나까지의 총 연장 1천 마일 내지는 1천 5백 마일이나 되는 2개의 간선도로와 많은 지선 도로를 만들어 중앙과의 연락을 원할히 했고, 해발 3천 미터 이상의 한랭한 고원에 관개(灌漑) 시설과 계단밭을 만들어 옥수수를 재배했다는 것은 지금의 상식으로서는 판단이 불가능하다.
이런 토목공사를 현대적인 장비를 가지고 평지에서 건설한다고 해도 보통의 역사(役事)가 아닌데 안데스산맥의 험준한 준령과 계곡을 교량과 현수교를 설치하여 도로를 건설하고, 관개수로와 다락 밭을 일구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밖에 달리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이런 도로의 건설에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고 그 고통 또한 만만치를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권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 제국(帝國)이라고까지 칭송된 잉카제국의 참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당시의 토목기술이나 여타 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이런 신권적 사회에 1520년대가 되면 느닷없는 폭풍우가 몰아쳤다. 아메리카원주민들이 처음에는 케찰코아틀(Quetzalcuatl)의 재림이라고 믿었던 유럽인들이 예수의 복음과 대포를 앞세우고, 황금에 눈이 뒤집힌 침략자로 변하여 침입하면서 수백년 혹은 수천년에 걸쳐 이룩된 문화는 하루 아침에 깡그리 파손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아메리카대륙(2) - 유린디아 문명(Eurindian civilization)(1)
1. 일확천금의 꿈
(1) 콜럼버스(Columbus, Christopher / 1451 ~ 1506)의 오판(誤判)
콜럼버스 이전에도 유럽인들 가운데는 그들이 신대륙이라고 불렀던 아메리카대륙을 여러 차례 들락거렸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이를테면 986년에는 노르웨이 계열의 바이킹들이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로 간다는 것이 길을 잘못 들어 북미대륙의 동북쪽 어느 곳까지 간적이 있었고,
1000년경에는 그 북미대륙 동북부에 갔다가 원주민들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십자군 원정(1096 ~ 1270) 기간에는 배가 표류하여 이 미지의 땅에 닿은 적도 있었고, 15세기 후반, 즉 콜럼버스가 인도에 다녀왔다고 큰소리쳤던 바로 20여 년 전에는 데인인(Danes-人 - 덴마크 바이킹)들이 역시 북미대륙 어느 곳에 표착(漂着)하는 등 이른바 신대륙에는 이미 유럽인의 발자취를 수없이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그곳이 아시아의 일부로만 알았을 뿐 신대륙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이 그렇게도 원했던 황금을 비롯한 값진 물건은 고사하고 깃털로 장식하고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감싼 아주 원시적인 원주민의 이상한 모습에 겁을 먹고 스스로 물러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역이든 약탈이든 돈이 될만한 것이 있었다면 사정은 훨씬 달라졌겠지만 그런 것이 없었기에 관심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이런 사실을 알고도 그 험난한 항해 길에 올랐는가?
대서양 넘어 아메리카 대륙이 있다는 것도 그 아메리카 대륙의 서쪽에는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바다가 있다는 것도 당시의 여니 유럽인과 마찬가지로 콜럼버스 역시 전혀 몰랐다. 콜럼버스가 찾아 나선 것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이라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었다.
지구가 둥글다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서 동쪽으로 가는 것 보다 서쪽으로 바로 가는 것이 거리가 훨씬 짧다고 생각했고, 그 판단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칼럼 제 40호에서 그 대략을 밝혔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사실을 다시 따라가 보기로 하자.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가 이끄는 세 척의 선단은 에스파냐의 팔로스(Palos)를 출발하여 대서양에 들어서자 남쪽으로 나아가 카나리아제도(Canarias, Islas)의 고메라 섬에 도착, 일단 닻을 내렸다.
9월 6일, 고메라 섬에서 닻을 올린 선단은 북위 28˚선상을 따라 계속 서진(西進), 공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가 본적이 없는 대서양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밤낮없이 계속되는 항해에 육지는 보이지 않고 거센 파도만이 넘실대자 선원들의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같다. 그러다가 한달을 조금 넘긴 10월 12일, 실로 오랜만에 섬을 발견하고 뭍에 올랐다.
뭍에 오른 일행은 에스파냐 국기를 게양하고 신에게 감사드리는 종교의식을 치루고 산살바도르 섬(San Salvador I.)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구세주의 섬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곳은 현재로는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 섬(Watling I.)이고 원주민들은 과나하니(Guanahani)섬이라고 불렀는데, 구경나온 원주민들의 황금 코걸이에 넋을 잃은 콜럼버스는 인도의 어느 곳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원주민이 코에 걸고 다닐 정도라면 황금은 무진장으로 있을 것이고 이런 땅을 찾게 해준 것은 신의 축복으로 믿었다. 원주민들과의 손짓 발짓을 통해서 남서쪽으로 더 나가면 황금이 많다는 정보를 얻고 이틀간 휴식을 취한 뒤 원주민 몇 명을 데리고 섬을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가 쿠바에 이르자 이곳을 치팡고(Cipango)라 믿었다. “황금이 나는 땅” 즉 오늘날의 일본(日本)을 그렇게 불렀고, 지금의 쿠바를 일본으로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쿠빌라이의 원(元)나라 조정에서 17년간 머물다가 1295년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간 마르코 폴로(Polo, Marco / 1254 ~ 1324)가 제노바와 베네치아 두 도시간의 싸움으로 포로 신세가 되어 옥중에 있을 때 루스티첼로라는 전기작가(傳記作家)를 만나 구술(口述)하고 편집하여 세계의 묘사(Divisament dou Monde)라는 이름으로 펴낸 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른바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북중국을 카타이(Cathay - Kitai - 거란), 남중국을 망기(Mangi or Manzi - 蠻族), 항저우를 킨사이(Khinzai - 行在所), 일본을 치팡고(Cipango - Japan)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치팡고가 일본이든 쿠바든 황금이 많은 곳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이 세상에 나오자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고, 연이어 수정판이 나오고, 여러 사람이 필사하는 과정에서 과장되고 윤색 가필되어 내용이 조금씩 다른 백 수십 종이 쏟아져 나오면서, 여행기라기보다는 모험과 신비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경이적인 동경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항해술과 함께 활판 인쇄술이 발달하여 누구나 손쉽게 이런 책을 구할 수 있었고, 항해가라면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충동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는 매력이었다. 그런가 하면 값비싼 향신료(香辛料)와 황금이 무진장이라는 그런 세계를 앞서 가야 한다는 경쟁심까지 유발하게 되었다.
고소득(高所得)에는 그만한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목숨을 담보하고 떠나온 콜럼버스가 황금과 향신료를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쿠바에서 황금을 얻지 못하여 실망한 일행은 남으로 더 내려가 12월 5일에는 히스파니올라(아이티) 섬의 산토도밍고에 도달, 여기에 작은 요새(要塞)를 구축하고 본격적으로 황금 찾기에 나섰다.
그러나 1492년 크리스마스 밤, 산타마리아호가 좌초하여 난파했고, 원정대간에 의견까지 대립하게 되자 콜럼버스는 원주민들로부터 수집한 약간의 금을 챙기고 44명의 인원을 남겨두어 계속 황금을 찾게 하고는 자신은 귀환 길에 올라 1493년 3월 4일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도착했다가 15일에는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콜럼버스가 리스본에 도착하자 곧 자신들은 서쪽으로 항해(航海)하여 인도에 다녀왔다고 호언장담하고 가져온 금을 보이자 유럽은 발칵 뒤집혔으며, 에스파냐로 들어 와서는 국왕 내외로부터 부왕(副王)의 작위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제 막 희망봉을 발견하여 인도항로개척에 첫발을 디뎠던 포르투갈로서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해(1493) 9월, 2차 항해 때는 이런 콜럼버스의 선전에 힘입어 17척의 선단에 1500 여명의 선원이 경쟁적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대 선단을 이끌고 다시 대서양을 가로 질러 현지에 도착했지만 사정은 전혀 달랐다.
케찰코아틀의 재림으로 믿었던 원주민들이 처음에는 그렇게 알고 따랐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순한 약탈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들의 분노는 증오로 바뀌어 남아 있던 44명 중 43명을 학살하였고, 나머지 한 명은 수풀 속으로 도망하여 초근목피로 겨우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결국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까지 갔다가 다시 산토도밍고에 들려 요새를 보강하고 다수의 원주민을 잡아서 노예로 본국에 보냈으나 국왕 내외로부터 분노만 사고 말았으며 아메리카 현지에서는 같은 유럽 인들끼리 치졸한 권력 쟁탈전까지 벌리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콜럼버스가 항해가로서는 훌륭했지만 재벌이 되기에는 운이 따라 주지를 못했다. 그 후에도 두 차례나 더 오늘날의 서인도제도에 갔고, 파나마 지협까지 배회했지만 아스테크나 잉카제국은 끝내 찾지 못했고 태평양이 있다는 것도 모른 체 1506년 일생을 마감했다.
(2) 지리상의 발견 시대
콜럼버스가 첫 항해에서 돌아왔던 1493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는 미지의 땅을 두고 설전(舌戰)을 되풀이 하다가 교황의 중제로 에스파냐의 북쪽에 있는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에서 양국은 담판을 시작,
1493년에는 아프리카 서단(西端) 베르데 곶에서 서쪽으로 100리그(League:약 500 km)에 위치한 카보베르데(Cabo Verde)제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경선(經線)을 긋고 그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에스파냐가 차지하기로 정했다.
이에 대해서 포르투갈이 반대하자 다시 베르데 곶에서 서쪽으로 370리그(약 1,850 km) 지점에 역시 남북으로 경선을 긋고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에스파냐가 차지하기로 합의하고 1494년 6월, 이른바 토르데시야스조약(Tordesillas, Treaty of)을 체결했는데 이렇게 그어진 경선을 교황자오선(敎皇子午線 - Line of Demarcation)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아프리카 서쪽 끝에서 서쪽으로 약 1850km 지점을 경계로 새로 발견된 땅은 발견자가 누구든 상관없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각각 갖는다는 것이고 이것을 교황에 승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허무맹랑한 조치에 유럽열강이 따를 만큼 교황의 권위가 절대적인 시대는 이미 지났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가 나름대로의 인도항로 개척에 나서게 됨으로서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 즉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과의 경쟁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진전되었다.
영국의 헨리 7세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출신의 항해가 캐벗(John Cabot / 1450~1498 : 이탈리아 명 - 조반니 카보토 : Caboto, Giovanni)에게 특허장을 주었고, 상인들은 항해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조달하였다.
1496년 캐벗은 1척의 배로 브리스틀 항을 떠나 항로를 서쪽으로 잡았다. 그러나 식량은 곧 바닥났고 악천후 까지 겹치자 선원들의 불만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차 항해에서 실패한 캐벗은 1497년 5월, 18명의 선원과 “매슈”라는 작은 배를 타고 다시 브리스틀에서 출항, 아일랜드를 돌아서 북쪽과 남쪽으로 항해를 거듭하여 6월 24일에는 북미대륙 동해안의 어느 지점에 도착하였다.
전혀 낯선 땅에 도착한 캐벗은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있을 뿐 막상 사람은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곧 이곳에 잉글랜드와 그의 조국 베네치아 기(旗)를 동시에 꽂았다.
콜럼버스가 아직도 카리브해(Caribbean Sea) 일대의 여러 섬을 전전하고 있을 무렵 캐벗이 북미대륙에 올라섰다는 것은 신대륙 발견에서 캐벗이 콜럼버스를 앞섰다는 것이 된다.
캐벗은 해안을 따라 탐사작업을 계속, 디스커버리 곶, 세인트존 섬, 세인트조지스 곶, 트리니티 제도, 그리고 잉글랜드 곶 등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름을 붙였다. 이 지역들이 캐나다의 동해안 세인트로렌스 만과 대서양을 잇는 지금의 캐벗 해협에 있는 노스 곶, 세인트폴 섬, 레이 곶, 생피에르앤드미클롱, 레이스 곶 등으로서, 훗날 영국이 캐나다의 영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1497년 8월 6일 브리스틀 항으로 돌아온 캐벗은 열렬한 환영과 함께 많은 상금도 받았다. 그러나 캐벗 역시 콜럼버스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북동해안 어느 곳에 갔다 왔다고 생각했을 뿐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은 모른 체 세상을 떠났다.
캐벗에 의해서 북미대륙 일부가 밝혀지자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조약에 따라 이곳이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1500년에는 코르테 리얼(Corte Real) 가(家)의 형제를 보내어 사실을 확인케 했으며, 콜럼버스가 발견했다는 카리브해의 섬에도 탐험가를 보내서 토르데시야스조약과 일치하는가를 조사케 했다. 교황자오선(敎皇子午線)의 동쪽에 있는 것은 모두 자기들의 소유라는 것이 포르투갈의 주장이다.
한편 포르투갈의 카브랄(Cabral, Pedro Alvars / 1467/68~1520)은 인도로 가기 위해 1500년 3월, 리스본을 출발했으나 풍랑으로 배가 표류하여 4월 22일 브라질 해안에 표착하였다.
카브랄은 이곳에 포르투갈 기를 꽂고 다시 대서양을 건너와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갔다가 이듬해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결국 코르테 리얼 형제와 이 카브랄에 의해서 콜럼버스가 찾아간 곳은 인도가 아니라 아시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대륙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에스파냐 역시 콜럼버스의 항로를 따라 신대륙의 탐험을 계속, 1513년에는 발보아(Balboa, Ferdinand / 1480 ~ 1521)가 카리브해에서 파나마 지협을 지나 태평양을 발견하였고, 19년에는 마젤란이 세계일주에 나섰으며, 신대륙의 에스파냐령에 영국이 진출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왕 카를 5세(에스파냐 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 / 1516 ~ 56)는 1520년과 25년 각각 사람을 보내어 그 진위를 파악케 하였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Francois I / 1515∼47)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출신의 탐험가 베라차노(Verrazzano, Giovanni da / 1485~1528)를 후원하여 그로 하여금 1523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뉴펀들랜드에 이르는 북미 연안을 탐험할 수 있게 하였고, 24년에는 뉴욕만(灣)과 내러갠셋만(灣) 등을 발견하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 북위 50도 지점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신대륙의 소유권을 프랑수아 1세에게 바쳤다.
1534년 4월에는 다시 카르티에(Cartier, Jacques / 1491 ~ 1557)에게 60명의 선원과 두 척의 배를 주어 신대륙에 보냈고, 그해 10월 뉴펀들랜드에 상륙한 카르티에는 세인트로렌스만과 강어귀를 돌아보고는 1497년 영국의 캐벗이 발견했던 캐나다의 해안에 상륙하여 십자가를 세우고 돌아와서는 이곳이 프랑스왕령이라고 선언했다.
1535년, 다시 대서양을 횡단한 카르티에는 몬트리올 부근까지 가게 되었고, 그의 탐험으로 캐나다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단서가 되었다.
콜럼버스에 의해서 대서양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유럽에서는 경쟁적으로 탐험이 계속되어 신대륙의 해안 곳곳을 누비고 다녔고, 이후 약 1세기 동안 신대륙은 유럽열강의 세력다툼의 새로운 장이 되었다.
리오그란데를 경계로 북쪽은 영국과 프랑스가 남쪽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개척하여 유럽의 문화가 이 미지의 땅에 스며들게 되었는데 16세기 이전까지는 그렇게 많은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유입되지 않아 원주민의 문화와 유럽문화가 혼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유럽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가 혼합된 유형을 유린디아문명이라 하고, 유린디아 시대에 가장 먼저 재미를 본 것은 에스파냐였다. 당시로서는 신대륙의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아스텍과 잉카 두 제국이 에스파냐에 의해서 정복되었고, 수많은 금은을 약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얼마나 많은 보물을 뺏어 갔는가?
2.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
(1)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
지리상의 발견시대에 두 선두주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조약(Tordesillas, Treaty of)에 따라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에스파냐는 아메리카대륙에서 열성적으로 식민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차지할 수 있었으나 당시의 브라질에는 유목으로 연명하던 가난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을 뿐 황금을 비롯한 보물은 없었다.
다만 붉은 색 염료(染料)의 원료가 되는 브라질(brasil)이라는 나무가 발견되어 이곳의 이름을 브라질이라고 붙였다.
라틴아메리카라고 부르는 중·남미 대륙의 대부분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의해서 특히 에스파냐에게 정복되고 개발되었다는 것은 원주민들로서는 매우 불행한 사실이다.
왜냐 하면 이들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새로이 발견된 땅은 모두 왕령(王領)으로 취급하여 봉건적인 본국의 제도를 이식시켰는데, 엥코미엔다(encomienda)라는 토지제도와 아델란타도(adelantado)라는 관리(官吏)체계가 일차적인 수탈(收奪)의 도구가 되었으며 집요하게 기독교의 개종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과거사를 더듬어 볼 필요가 있는데, 역사가 긴만큼 그 내용도 매우 복잡하고 선 듯 이해하기도 어렵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개요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열거할 수 있다.
유럽의 서남쪽에 위치한 이베리아반도는 평균고도 800m의 메세타고원이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주거환경이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다. 그러나 지중해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의 교통상의 이점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여러 종족이 혼거(混居)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이곳에는 이베로(Ibero 영어로는 Iberian)라는 인도-유럽 어(語)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기원전부터 켈트인이 들어와 고원지대에서 목축을 했는가 하면, 그리스와 페니키아인들의 해상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에는 반도의 동남쪽 해안지대에 그들의 식민시(市)를 세우고 지중해 무역에 종사하여 세력을 크게 떨쳤다.
기원전 6세기경에는 페니키아인들이 북아프리카에 건설했던 카르타고 세력이 들어왔고, 제 2차 포에니 전쟁(218 ~ 201 B C)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에 패배한 후에는 로마제국에 편입되어 그 지배를 받았다.
4세기후반, 게르만의 이동시기에는 반달족이 이곳을 거쳐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의 옛 땅에 반달왕국을 세웠으며, 뒤를 이어 415년에는 갈리아지방을 프랑크족에게 빼앗긴 서고트족이 반도의 중심부인 톨레도를 수도로 정하고 이곳의 지배자가 되었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라틴어가 공용으로 사용되고, 그 방언(方言)으로 에스파냐어와 포르투갈어가 생겼으며, 서고트족과 함께 로마가톨릭이 들어와 신앙체계가 이룩되어 로망스 언어를 구사하는 라틴족에 합류하였다.
그러다가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 가까운 긴 세월동안에는 무어인(人 : Moors)이라고 불렸던 이슬람세력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게 되고, 이들로부터 오리엔트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중세라는 암흑의 긴 터널을 헤매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문명의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무어인들이 주민들에게 공납은 받았으나 이슬람교로 개종은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의 지배가 시작되자 종래의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의 북서부로 피신, 이곳의 도시 오비에도를 중심으로 반(反)이슬람운동을 전개하고, 718년 서고트족의 전설적인 영웅 펠라요를 왕으로 세우고 아스투리아스(Asturias)라는 기독교 국가를 재건하여 무어인들의 지배에 조직적으로 항거하였다. 왕국의 이름을 아스투리아스라고 한 것은 지명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고, 예부터 이 지역은 매우 외곬스런 고장으로서 로마제국에 대해서도 끝까지 항거한 곳이다.
이런 반(半)이슬람운동을 이베리아의 귀족들은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이라 하였으며, 10세기경에는 수도를 오비에도에서 레온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때부터 레온왕국((Kingdom of Leon / 914∼1230)이라 부르게 되었고 코르네유의 작품으로 더욱 유명해진 엘시드(El Cid / 1043 ~ 99)라는 영웅이야기도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이라는 왕국의 탄생도 레온왕국에서 비롯되었다.
카스티야(Castilla)란 성(城)의 뜻이라고 한다. 레온의 왕 오르도뇨 2세(914 ∼ 924)는 이슬람을 막기 위해 국경지대에 성(城), 즉 카스티야(Castilla)를 구축하고 부르고스 백작 페르난도 곤잘레스를 변경백(邊境伯)으로 보냈으나 곤잘레스는 서고트 귀족의 지배를 싫어하는 다른 귀족들과 합세하여 11세기 전반 그의 임지에서 왕국을 세웠는데 이것이 카스티야왕국이다.
우여곡절 끝에 15세기경에는 이슬람세력을 거의 축출하고 아라곤과 카스티야 두개의 큰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1479년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의 정략결혼으로 에스파냐 왕국이 탄생되었으며, 1492년에는 그라나다를 함락하여 이슬람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콜럼버스가 첫 항해 길에 나선 것은 그라나다가 함락된 직후였다.
한편 십자군원정이 시작될 무렵인 1095년, 레온의 왕이었던 알폰소 6세는 앙리 드 부르고뉴(부르고뉴의 앙리 / 1095~1112)라는 프랑스 왕족을 그의 서녀(庶女) 테레사와 결혼시키고 포르투갈 백작에 봉하였는데 앙리는 포르투갈에서 이슬람세력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포르투갈왕국의 기초를 세웠다.
앙리의 사후 그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시는 아직 미성년이기에 모후 테레사가 섭정으로서 포르투갈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아푼수가 성년이 되었는데도 모후는 아들에게 정권을 이양할 기미를 보이지 않게 되자 급기야는 권력을 둘러싼 모자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1128년 기마랑스 근처의 상마메데 전투에서 아들 아폰수가 승리하여 왕권을 회복하였다.
어머니와 싸워 이긴 아폰수는 1139년 주변의 이슬람교도를 정복하고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1147년 산타렘을 점령하고 그곳을 지나는 십자군의 도움을 받아 리스본 공략에 성공하고, 테주강(Tejo R) 북쪽을 평정하여 1249년에는 현재와 같은 포르투갈의 영역을 확정지었다.
그 후에도 포르투갈왕국은 이슬람과의 공방이 계속되었고 산수 1세(Sancho I / 1185~1211), 아푼수 3세, 4세를 지나 1383년 8대왕 페르난두가 사망하고, 그의 사위이자 카스티야의 왕인 후안 1세(Juan 1)가 포르투갈왕위를 겸하게 되자 이에 반발한 포르투갈 귀족들이, 페르난두의 서자(庶子)로서 아비스라는 기사단을 이끌고 있던 주앙 1세(Joao 1 / 1385∼1433)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이로써 포르투갈에서는 아비스왕조가 시작되고 카스티야로부터 벗어나 계속 독립을 유지하여 세력을 팽창하였고, 주앙 1세의 세 아들 중 막내가 항해의 왕(航海王)으로 널리 알려진 엔리케(1394 ~ 1460) 왕자다.
(2) 정복과 식민
그들이 말하는 국토회복운동과정에서 거칠고 잔인한 정서가 몸에 베어들었고,
이것이 미화되어 서슴없이 바다에도 나서게 되었으며, 큰 공을 세운 무사에게는 당대에 한하여 은급(恩級)으로 토지를 하사(下賜)하였는데,
왕과 신하 사이에 토지를 매개로 성립된 이런 질서를 엥코미엔다(encomienda)라 했다.
영구적인 세습이 아니라 일시적인 위탁(委託 - encomienda)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신대륙에 이런 제도가 들어가서는 봉건적인 세습제도로 변질되어 이후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503년 여왕 이사벨 1세는 원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 제도를 신대륙에 적용한다는 칙령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토지의 수용자가 되는 엥코미엔데로(Encomiendero)는 국왕과의 임대차계약을 통해서 토지를 분양받고 그 토지에서 일할 수 있는 원주민(인디언)도 정해진 인원만큼 할당받도록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탐험가나 정복자들이 개척한 땅이라 할지라도 그 소유권은 국왕에게 있으며, 다만 토지의 경작권, 광산의 채굴권, 노예의 사용권 등을 이들 개척들에게 위탁하여 대리 경영을 맡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차하면 국왕은 위탁을 취소하거나 잘못했을 경우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길도 열어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신대륙에서 행한 일련의 정복과 식민사업은 철저하게 국가단위로 이룩되었다는 것이며 초기의 탐험가나 정복자들을 아델란타도(adelantado)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전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면 그 곳에 마을을 세우고 도로를 정비하는 일과 시장(市場)을 설치하고 마을의 참사회를 조직하는 것 등이 아델란타도의 주요 임무였고, 그렇게 해서 개척지가 안정되면 대개는 그곳 총독으로 임명하고 부왕(副王 - viceroy)의 지시에 따르도록 했다.
부왕이란 국왕의 대리자로서 식민지 통치를 위탁받은 왕족이나 궁정의 주요인사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식민지에서 성직과 관리의 임면권, 포교감독권, 광산감독권 등 절대 권력이 주어졌다. 그러나 기본정책은 국왕 및 현지의 최고회의 결정에 따라야 했고, 성직이나 관리의 임면에는 국왕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다.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일대를 관장하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설치를 필두로 페루에는 페루 부왕령, 베네수엘라에는 누그레나다 부왕령, 그리고 아르헨티나에는 리오데 라플라타 부왕령을 두었다.
부왕 다음으로 식민지에 설치한 중요기관은 아우디엔시아(Audiencia)라는 일종의 고등사법재판소(高等司法裁判所)였다. 에스파냐 본국 출신의 판사가 책임자가 되어서 사법권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부왕이 없는 경우 식민지 행정까지 전담했고, 부왕의 견제 내지는 감독기능까지 갖고 있었다.
그 밖에도 레시덴시아(recidencia)라는 사법관, 비시타도르(Visitador)라는 국왕이 몰래 파견한 일종의 암행어사, 인텐덴테(intendente)라는 감독관 등이 부왕, 판사, 성직자, 관리, 군인 등이 저지르는 부정부패나 직권남용을 감시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신대륙을 포함한 새로운 개척지에 로마가톨릭을 전파시키는 일이다. 1501년 이사벨 여왕은 무어인과 유대인 등의 이교도나 유죄판결을 받은 죄수 등은 제외시키고 순수한 가톨릭신자만을 신대륙에 식민시키고 에스파냐문명 내지는 가톨릭을 신대륙에 보급시켜 국가 위신을 높이고자 했다. 따라서 도미니쿠스파와 프란체스코파, 그리고 예수회 소속의 성직자들도 신대륙으로 건너갔고 대개의 원정에는 이들 성직자들도 동행하였다.
이때의 로마교황은 네포티즘(Nepotism)과 피렌체출신의 종교개혁가 조반니 사보나롤라를 화형에 처하여 악명을 떨쳤던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 / 1492 ~1503)로서 에스파냐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교황직을 매수(買收), 자기가 낳은 네 명의 사생아를 조카(nepos)라고 속이고 이들을 시켜 로마냐 지방에 강력한 자신의 왕국을 건설코자 했던, 성직자라기보다는 너무나 세속적인 그런 인물이었다.
이사벨 여왕은 이런 교황으로부터 신대륙에서의 성직임면권과 교회문제에 대한 대부분의 결정권을 받아냈다. 그러나 1504년 이사벨은 타계하고 에스파냐의 통치는 이사벨의 남편이자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 1474∼1516)가 카스티야의 실권을 장악한 후, 1509년 이런 칙령을 발표했다.
“만일 식민지의 인디언이 순종하지 않으면 짐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할 것이며, 그렇게 해서라도 가톨릭교회와 에스파냐왕실에 굴복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가족은 잡아서 노예로 만들 것이다........”
국왕의 칙령이 없더라도 온갖 방법이 동원되는 마당에 이런 칙령이 발표되자 에스파냐인들은 그야 말로 신이났다. 에스파냐인들이 먼저 정복한 곳은 콜럼버스가 거쳐간 산토도밍고,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 서인도제도에 산재한 20여개의 섬이었고, 백여만 명의 이곳의 원주민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되어 백인들의 모진 학대를 받아 살해되거나 중노동에 시달려 불과 50년만에 거의 다 죽고 말았고, 리오그란데로부터 호온곶에 이르기까지 에스파냐인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육지거나 섬이거나 약탈과 지배라는 두 가지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일련의 정책들을 통해서 1570년대까지 신대륙에 식민시킨 에스파냐인은 대략 16만 명, 이들이 새로이 건설한 도시가 약 200 여개, 노예가 된 인디언은 수백만 명,.....그 중 단연 압권(壓卷)은 아스텍과 잉카를 멸망시킨 코르테스와 피사로, 불과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이들은 기적처럼 정복에 성공했다.
(3) 코르테스의 아스텍 정복
헤르난 코르테스(Cortes, Hernan / 1485 ~ 1547)가 신대륙의 아이티에 간 것은 1504년, 당시의 그의 나이 19세, 메델린(Medellin)의 하급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4세 때 살라망카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2년 만에 중단하고 말았다.
천성적으로 난봉(難捧) 끼가 있는 그에게 딱딱한 법률공부란 도대체 마음에 들지를 않았고 당시의 에스파냐 청소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항해에는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아이티에 도착 후 처음 몇 년간은 농사를 짓는 등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다가 1511년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ze / 1599 ~ 1660)의 쿠바정복에 가담, 벨라스케스가 쿠바총독이 되면서 그에 눈에 들게된 코르테스는 쿠바의 수도인 산티아고의 사법행정관(alcade)이 되었다가 다시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천성적인 그의 바람 끼는 매독이라는 지독한 병에 걸려 숱한 어려움과 함께 다른 곳의 원정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한때는 여자문제를 두고 벨라스케스와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 같은 이야기도 남기도 있다.
1518년 10월, 총독 벨라스케스는 발견 된지 얼마 안 된 멕시코에 2차 원정대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그 대장에 코르테스를 임명했다. 원정대장에 임명된 코르테스는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벨라스케스의 의중을 간파하고 자신의 재력으로 발 빠르게 원정대를 구성, 1519년 2월 19일 11척의 배와 508명의 병사, 선원 백여 명, 말 16필, 대포 10문, 철포 16문 등을 갖추고 쿠바를 떠나 유카탄반도로 향했다.
타바스코 해안에 상륙해서 최초로 인디언과의 전투를 치루고 여자 노예 20명을 얻었다. 이 속에 마야어와 아스텍어에 능통한 여자 노예가 있어서 언어의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고 아스텍의 사정이나 인디언의 사고방식도 이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원정대 내부에서 표출된 갈등으로 의견이 엇갈리자 코르테스는 육지에 상륙한 후 타고 온 배 11척을 모두 불태워 버렀다. 일종의 배수진을 친 셈인데,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핵서 내부 결속을 다진 일행은 4월 22일, 비야에르모사(Villahermosa - 산후안바우티스타)에 도착, 여기서 금과 은으로 된 세공품을 들고 온 아스텍 왕의 사절을 만났는데 사절은 값진 보물을 코르테스 일행에게 건네고 즉시 퇴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정은 정반대, 보물에 눈이 휘둥그레진 일행은 퇴각은커녕 본격적인 정복의 야심을 굳히고 그 전진기지로서 베라크루스(Veracruz)의 건설을 결정하고 착수에 들어갔으며 여기서 선출된 시회(市會 - Cabildos)의 결정으로 코르테스는 멕시코 정복의 권한과 총사령관의 지위를 얻었다.
멕시코 정복에 발판을 굳힌 코르테스는 북쪽으로 올라가 아스텍의 압제에 시달리던 토토나코족을 해방시키고 그들과 동맹을 맺어 세를 늘린 후, 8월 31일 보병 4백, 기병 15, 토토나코족의 전사 다수를 이끌고 아스텍과 사이가 나쁜 다른 부족을 정복, 이들과 다시 동맹을 맺었다.
10월 14일, 세를 늘린 코르테스는 원주민 전사 1천명을 거느리고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향해 진군 중 무장 하지 않은 원주민 3천여 명을 학살하고, 11월 8일에는 테스코코 호수에 그림처럼 위치한 아스텍의 수도에 도착했다.
아스텍의 왕 몬테수마 2세(Montezuma II / 1504∼20)는 갈대의 해(1519년은 아스텍의 역으로 갈대의 해에 해당된다고 함)에 그들의 신 케찰코아틀이 돌아온다는 전설을 믿었고, 때맞추어 온 에스파냐의 침략자들을 케찰코아틀의 재림이라고 믿어 정중하게 맞아들였고, 코르테스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라 독방에 갇혔다.
코르테스의 일방적인 행동에 분노 겸 질투를 느낀 쿠바총독 벨라스케스는 부하를 보내어 코르테스를 체포하려했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의 부하를 물리치고 안도의 숨을 체 쉬기도 전에 이번에는 그들 내부에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코르테스의 부하 80 여명이 어떤 이유에서 원주민을 학살하자 원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당황한 코르테스는 감금 중인 몬테수마 2세를 불러내어 원주민들을 설득코자 했지만 신임을 잃은 몬테수마 2세는 오히려 그의 백성들로부터 돌과 화살 세례를 받고 중상을 입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그도 얼마 후 목숨을 잃게 된다.
이에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에서 철수하기로 결심, 혼란 속에 겨우 몸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것이 멕시코 역사에서 슬픈 밤(노체트리스테)으로 알려진 유명한 유혈 사태의 내용이다.
아스텍은 몬테수마 2세의 동생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고 에스파냐의 침략자들에게 강도 높게 대항했다. 겨우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출한 코르테스 일행은 틀락스칼라(Tlaxcala)에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이곳 원주민들의 원조로 테노치티틀란이 있는 테스코코 호수 외각을 포위했다.
포위당한 원주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천연두의 만연으로 몬테수마 2세의 동생을 위시해서 많은 전사가 쓸어져 전열에 이상이 생겼다. 이에 25세의 한 청년(쿠와우테모크)이 남은 시민들을 동원, 75일간을 버텼지만 에스파냐 전사 6백과 아스텍의 압제에 반발한 다른 부족의 원주민 병사 10만을 거느린 코르테스에게 결국은 굴복,
1521년 8월 13일, 아름답던 호수 속의 도시 테노치티틀란은 끝내 에스파냐의 침략군에게 점령되고, 에스파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도시에 에스파냐식의 새로운 도시 멕시코시티를 건설하였다.
코르테스의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고 이후에도 본국 및 같은 에스파냐 인들로부터 모함과 질시를 수없이 받았으나 많은 재산을 모았고 후작으로 봉해졌으며, 만년에는 고향에 돌아가 62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리고 아즈텍족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서 태양에게 인간의 심장과 피를 바쳤던 끔찍한 인신공양도 왕국의 멸망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4) 피사로의 잉카제국 정복
정복자들, 이른바 콘키스타도레스(conquistadores)를 꼽는다면 코르테스에 버금가는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한 피사로(Pizarro, Francisco / 1478 ~ 1541)를 제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명세와는 달리 에스파냐의 트루히요(Trujillo)에서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곤잘로 피사로가 어느 미천한 여인과 관계하여 사생아(私生兒)로 태어났다는 것 뿐 그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결코 축복 속에 태어나지 못했던 피사로는 유년시절에는 그의 조부 밑에서 돼지사육에 종사하였다고 하며 따라서 체계적인 교육은 받지를 못했다. 돼지 사육은 이 지방 젊은이들의 일상적인 일이지만 이를테면 그가 불학무식했던 것은 사실이다.
1502년 20대의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새로이 임명된 총독과 함께 아이티로 건너가서 여러 차례 원정에 가담, 1513년에는 발보아 원정대에 참가하여 태평양을 발견한 27명의 에스파냐인 가운데 들기도 했고, 새로이 건설된 파나마시의 관리와 시장도 역임하여 40대 후반에는 할당받은 토지와 노예만으로도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재산도 모았다. 그러나 이렇게 생활이 안정되자 그에게는 황금의 나라를 찾겠다는 의욕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1522년 에로난도 데 루케(Luque Hernando de)라는 성직자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Almagro, Diego de / 1475 ~ 1538)라는 군인과 손을 잡은 피사로는 황금을 찾아 남쪽을 항해, 화려한 복장을 한 원주민을 발견하자 곧 이들을 정복하기 위해 파나마 총독에게 많은 병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고생만 하고 그냥 돌아왔다.
몇 년 뒤 뜻을 같이하는 13인의 동맹자를 다시 규합한 피사로는 남쪽으로 다시 항해를 계속, 남위 4도 선상에 있는 페루의 북단 툼베스(Tumbus)에 닿았다. 다행히 마을의 주민들은 대단히 친절하여 환대를 받았으나 거대한 성체와 신전, 질서정연한 도시의 모습에 일행은 압도당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을 페루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질서정연한 국가조직이 있다면 보물 또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파나마 총독에게 이곳을 정복할 수 있는 병력을 요구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이에 피사로는 본국으로 돌아가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설득, 원정군 총사령관 겸 정복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때 우연한 기회에 멕시코를 정복한 코르테스를 만났고 그의 조언도 받았다고 한다.
1531년 1월, 3척의 배에 병사 180명 그리고 말 27필을 싣고 파나마를 떠났다. 탐험대는 에콰도르 북부 해안에 상륙하여 툼베스에 도달하기까지 적도의 험한 산악 길을 고생해서 답파하고 툼베스에서 계속 답파하여 카하마르카(Cayamarca)의 어느 계곡에 이르러 여기서 운 좋게도 잉카제국의 왕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의 잉카제국은 왕위계승을 두고 형제간에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형 아타우알파(Atahuallpa / 1502 ~ 1533)는 지금의 에콰토르 수도인 키토에 그의 아우 우아스카르(Huascar)는 페루의 수도인 쿠스코에 각각 본거지를 정하고 치열한 공방전 공방전을 벌린 결과, 형인 아타우알파가 승리하여 잉카의 왕위를 지켰으나 동생과의 전쟁으로 몹시 지친상태였다.
잉카의 왕은 태양의 아들로서 받들어졌고 그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국가의 조직과 군사력은 겨우 문명단계에 들어선 국가답지 않게 매우 강건했다. 이런 잉카의 왕이 불과 2백 명도 안 되는 피사로의 에스파냐 정복자들을 가볍게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잉카인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대포가 에스파냐 군에게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몇 차례 교섭이 오간 끝에 양측은 우선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기로 합의하는데 성공했다. 만나기로 된 날짜가 1532년 11월 15일, 피사로는 회견장 요소에 대포를 설치한 후 밤 세워 미사를 드리고 이튿날 아침 정해진 회견장에서 아타우알파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피사로는 스스로를 에스파냐 국왕의 사자라고 소개하고, 잉카왕에게 크리스트교로 개종할 것과 에스파냐 국왕에 대한 신종례를 요구하고, 동행했던 성직자를 시켜 성서를 잉카왕에게 내밀었다.
성서를 들여다 본 잉카의 왕이 성서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에스파냐의 대포에서는 굉음과 함께 포탄이 잉카군의 진영에 떨어졌고 삽시간에 회견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에스파냐의 정복군은 잉카의 왕을 사로잡았고 2천여 명의 잉카 군을 살육해 버렸으며 나머지는 혼비백산 도망가고 말았다. 잉카의 왕은 아스텍과는 달리 자신이 신이고 하는 말이 곧 법이다. 이런 절대권력자를 포로로 만든 것은 피사로에게는 그 자체가 큰 보물이었다. 그를 통해서 얼마든지 많은 재물을 수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 17피트, 높이 22피트의 큰 방에 황금을 체우면 왕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우선 금을 모으기로 했다. 하지만 이 약속도 에스파냐 정복군의 일방적인 위반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잉카인들은 왕을 위해서 황금을 가득 채웠으나 에스파냐의 침략군은 그가 크리스트교 개종을 거부했고 에스파냐인들을 살해하고자 했다는 죄목을 씌워 1533년 8월 29일 끝내 그를 처형해 버렸다.
그해 11월 피사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점령했다. 이렇게 해서 고도의 고원문명을 이루었다는 잉카는 멸망되고, 그들이 신전은 가톨릭의 교회로 개조되었으며, 각가지 세공으로 만들어진 황금은 운반에 편리하도록 녹여서 금괴로 만들어 일부는 본국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정복자들이 나누어 가졌다.
아무리 공정하다 해도 분배에는 불평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여러 가지 불만이 불거지고, 목숨을 걸고 원정 길에 나섰던 동료들이 이제는 전리품이라는 값진 보물 앞에 제각기 눈이 어두워 적이 되어 서로간 한치의 양보없이 다투게 되면서, 일차적으로 피사로의 부하들이 제거되고 피사로 역시 암살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에스파냐식으로 완전 개조된 쿠스코를 중심으로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세력을 계속 확대, 1540년대 초반까지 에콰토르, 볼리비아, 칠레, 콜럼비아, 베네수엘라 등지를 정복했고, 다시 동남쪽으로 발길을 옮겨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등에도 식민지를 건설했다.
유럽열강의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과 쟁탈
(1) 에스파냐와 라틴아메리카
지리상의 발견, 이 말은 유럽인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붙여진 이름이지만 결과적으로 두 개의 인도(India)가 지도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의 카리브해 일대를 서인도라고 부른 것은 아무래도 이치에 맞지 않고 거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인도인(Indian)이라 부른 것은 더더구나 말도 안된 소리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저항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아마 이것이 콜럼버스의 공적이라면 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처음 닿은 이곳을 인도라고 여겨 그렇게 불렀던 것을 그 후에도 계속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아스텍과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많은 것을 얻은 에스파냐로서는 일찍 유례가 없었던 대제국을 건설, 이른 바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에스파냐는 이 신대륙으로부터 무엇을 얼마나 챙겼고 그 영향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아스텍과 잉카에서 거둬들인 금과 은이 일차적인 수입이다. 수치적인 통계가 없어서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많은 양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에스파냐 국왕과 그 관리들, 그리고 식민자들과 상인들은 원주민을 기름짜듯 착취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엽에 이미 포토시(Potosi)와 구와나후아토(Guanajuato) 등지에 은광(銀鑛)을 개발하고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원주민의 노동력을 혹사, 수은아말감 제련법으로 예상외의 많은 은을 얻었다. 이것이 에스파냐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다.
어떤 통계의 의하면 16세기 이래 약 3세기간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유럽에 보내진 금은 약 3백 5십만 킬로그램, 은(銀)은 약 1억 킬로그램,....
향신료는 없었지만 이곳 특유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상품작물을 이식 재배했는가 하면 일부 품종은 유럽으로 도입 재배하여 의식주의 일대 변혁을 가져온 것 또한 놀라운 사실이다.
쿠바를 중심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처음에는 큰 이익을 챙겼으나 곧 생산과잉으로 값은 폭락했지만 대중화 되었고, 담배와 땅콩 감자가 유럽으로 들어와 식생활과 풍속도 까지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다고 보면 서양인들의 주식인 감자가 유럽에 전래된 것이 그렇게 오래 전의 이야기도 아니고 기호품이면서도 지금 현재 너무나 천대 받는 담배 또한 그 역사가 길지는 않다.
다량의 은이 유럽으로 유입되고, 이것이 통화내지는 무역결제수단이 되면서 그들의 왕성한 무역로를 따라 세계도처에 보급되었다. 유럽에서는 은화의 가치가 폭락하여 물가가 2배 내지는 3배로 치솟았다. 이를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이라 한다. 그리고 그 영향이 아시아까지 미쳐 중국의 명대 말기 신종 만력제때 처음 실시했다는 일조편법과 청대의 지정은제도 등은 이런 은의 유입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지금에 와서 그렇다는 것이고 당시의 에스파냐에서는 식민지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서 라틴아메리카에는 에스파냐 이외의 다른 나라 무역선의 출입을 원천 봉쇄하였고 에스파냐 무역선이라 할지라도 식민지에서 돌아오면 먼저 에스파냐를 들린 후 목적지에 가게 만들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식민지의 무역항을 콜럼비아의 카르타에나(Cartagena), 파나마의 디오스(Nombre de Dios), 멕시코의 베라크루스(Veracruz) 등 세곳으로 제한하였다. 이렇게 해서 가장 벌이가 좋았던 것은 에스파냐 왕실이었다.
에스파냐 왕실에서는 식민지를 왕령으로 정하고 위탁 경영을 시켰기 때문에 식민지에서 수집한 각종 보물의 절반을 가로챘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물품은 예외없이 2%의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것이 4%, 6%로 높아지다가 18세기에는10%가 되었다.
결국 식민지에서 얻는 전체 수입의 1/4 정도가 에스파냐왕실의 몫이 되었는데, 에스파냐왕실에서는 이 돈으로 산업에 재투자하거나 주민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호화로운 왕실의 치장과 사치 그리고 위신을 높이기 위한 대외 전쟁에 소비해 버렸기 때문에 그 영광 또한 생명이 길지 못하고 17세기를 고비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포르투갈의 대브라질 건설
인도항로를 가장 먼저 연 것은 포르투갈이다. 그러나 신대륙에는 에스파냐에 한 발 늦게 브라질을 발견하고, 에스파냐와 토르데시야스조약(Tordesillas, Treaty of)을 체결, 원주민들의 별 저항없이 쉽게 정복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브라질의 남쪽 다른 곳에는 또 다른 대륙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찾았지만 대륙은 없었다.
이에 실망한 포르투갈에서는 대서양 연안에서 브라질이라는 붉은 색 염료만 체취할 수 있는 이곳의 식민사업도 소흘히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이 근처에 진출할 기미를 보이자 이를 봉쇄하는 한편 갑자기 내륙으로 진출, 식민지 건설을 서둘었다.
1530년 소사(Sousa, Martim Afonso de,)라는 군인을 보내어 이곳의 방비를 더욱 견실히했고, 1532년 소사는 상비센테를 건설했다.
1534년 포르투갈 국왕은 브라질 전토를 12개의 영토(領土)즉 카피타니아(capitania)로 분할하여 그의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런 봉건제에 의한 개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6세기 중엽에는 이를 폐지하고 총독제를 채택했다. 그러다가 1580년 에스파냐의 필레페 2세(Felipe II / 1527 ~ 1598)가 포르투갈의 상속자가 되어 포르투갈 왕(재위 1580∼98)이 되고 펠리페 1세라 불렀다.
이렇게 되자 브라질은 이때부터 1640년까지 약 60년간 당연히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家)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에스파냐식의 식민지 통치조직이 그대로 이식되었으며,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한 브라질의 북동부 연안은 이미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시기에 사탕공장까지 설립되어 있었던 것을 더욱 본격화하여 파센텔로라고 불렀던 식민지의 정치 및 경제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자들이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지배했다.
사탕수수의 재배확대로 노동력이 부족하자 다시 아프리카로부터 흑인 노예가 대량으로 수입하여 이에 충당하였으며, 1640년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와 인연을 끊고 영국, 네덜란드 등에게 인도를 빼앗긴 손해를 메우기 위해 브라질 개척에 전념하면서 회사를 만들어 식민지 무역을 독점하고 본국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 경제를 강화, 정치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당시 예수회 선교단은 인디언을 교화교육시키고, 인디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등 적지 않은 자취를 남겼다.
내륙을 향한 팽창은 상파울루 시민인 반데이란테가 노예로 쓸 인디언을 납치하고 금을 비롯한 진귀한 귀금속을 찾아내려고 대규모 탐험대를 조직하여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이루어졌다.
(3) 프랑스의 아메리카 대륙진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보물을 챙기고 있을 때인 16세기 전반, 또 다른 유럽의 강자 프랑스와 영국은 보고만 있었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Karl V/ 1500 ~ 1558)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Francois I / 1515∼47) 및 영국의 헨리8세(Henry VIII / 1509 ~ 1547) 등이 대표적인 군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했던 것은 카를 5세로서그의 영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해서 에스파냐와 나폴리 네덜란드 등을 차지하고 있었고 신대륙의 에스파냐 식민지까지 상속으로 물려 받았다. 그리고 1519년 프랑수아1세와 경합해서 승리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까지도 차지해 버렸다. 이로 인한 두사람의 악연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자리를 카를 5세에게 빼았긴 프랑수아1세로서는 심기가 결코 편치는 않았고, 거기에 그의 영지는 카를 5세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천성이 명랑하고 활달하여 뭇 여인들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호방한 무인(武人)인 동시에 예술적인 감각도 뛰어나 프랑스의 르네상스 아버지라는 칭송까지 받았지만 그 일생을 수난의 연속이었다.
앞글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프랑스는 1534년 프랑수아1세(Francois I / 1515∼47)가 카르티에를 후원하여 이 미지의 신대륙에 보내어 센트로렌스 만과 강 어귀를 탐색한 바 있고, 1541년에는 로베르발이라는 탐험가가 지금의 퀘벡 북방12마일 지점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를 프랑수아 1세에게 바쳤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이곳의 혹독한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곧 철수해 버렸다.
프랑수아 1세가 신대륙의 잇권을 두고 카를 5세에게 도전한 것은 바다에 해적선을 띄우고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에스파냐의 보물선을 약탈하면서 시작되었다. 공공연한 해적행위에 에스파냐가 프랑스에 대해서 항의하자 프랑수아 1세의 대답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바다는 모든 나라의 공도(公道)이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포함한 어떤 나라도 지구상에 미발견지점까지 독점할 권리는 없다.....태양이 모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짐(朕)을 위해서도 빛나고 있듯이 지구상의 미발견 부분에 짐의 몫이 없다는 말이 하나님(Adam)의 유언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보여달라,....."
프랑수아 1세의 이런 도전에 대한 카를 5세의 답변 또한 강경했다. "프랑스 인들이 만약 날짜변경선 서쪽에 들어서기만 하면, 경계선을 침범한 죄로 모조리 체포할 것이고, 잡히는 대로 극형에 처할 것이다......"
카를에 대한 프랑수아의 앙금은 결투까지 신청하여 사생을 결판내기로 작정, 희대의 결투가 될뻔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무산되고, 프랑수아1세는 1547년 3월 31일,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보다 여섯 살 연하였던 카를 5세 역시 1558년 9월 21일 60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 식민지를 포함한 양국간의 문제는 그들의 뒤를 이은 아들들, 즉 앙리 2세와. 펠리페 2세에게 유산으로 넘겨졌다.
그래서 1559년에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사이에 문서가 아닌 구두(口頭)로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유럽에서는 국제법이 적용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아직 그럴 수는 없다. 유럽 여러나라의 조약은 유럽에서만 유효할 뿐이다"라고 하는 2개의 영역주의(Doctrine of Two spheres)가 채택되어 이후 유럽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국제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유럽대륙과 식민지와는 분리해서 논의되고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이 1823년 먼로선언(MonroeDoctrine)에 의해서 다소 수정될 때까지 지켜졌다는 것이다.
캐나다의 혹독한 추위에 지레 겁을 먹은 프랑스는 따뜻한 남쪽으로 발 길을 돌려 1555년에는 브라질 연안까지 도달, 그 곳에 있는 섬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고, 1562년에는 2개의 영역주의 원칙에 따라 미국의 플로리다에 진출, 1564년에는 그곳에 카르린느 성채(Ft, Caroline)를 세우고 식민활동을 서둘렀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플로리다의 소유권을 장악했다고 자랑하고 있던 에스파냐가 프랑스의 이런 처사를 그냥 보고만 있지를 않았다. 다시말하면 플로리다를 프랑스는 주인없는 땅이리고 생각했고 에스파냐는 이미 자기들의 소유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며 당시의 에스파냐는 플로리다를 북미대륙의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즉시 산토아구스틴(St, Augustine)성채 건설을 명령하고 프랑스에 맞섰다. 플로리다가 프랑스의 손으로 넘어가면 에스파냐로서는 쿠바나 멕시코로부터 들어오는 보물선이 해적들에게 약탈 당할 위험이 있고, 프랑스가 건설하려는 플로리다(북미대륙)는 원래가 에스파냐의 몫이었다는 것이 에스파냐의 생각이었다.
이에 프랑스에서는 그들이 세운 성채를 지키고 이곳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에스파냐가 세운 성채를 파괴해야 된다는 판단에서 원정대를 파견, 그러나 도중에서 폭풍우를 만나 큰 피해를 보았고, 나머지 병력 3백 여명은 에스파냐군에게 살해되고 뒤이어 카르린느 성채마저 에스파냐군의 습격을 받고 파괴되는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프랑스로서는 당분간 신대륙에 대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최대의 내전 위그노전쟁(Huguenots Wars / 1562 ~98)이 너무도 다급했기 때문이다.
위그노 전쟁이 막바지 이른 1584년에 캐나다에 탐험대를 파견하여 다시 진출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탐험대는 1534년 카르티에가 개척하려다가 혹독한 겨울 날씨 때문에 포기한 센트 로렌스 만 일대를 돌아보고 그냥 돌아왔고,1598년 다시 탐험대를 파견, 노바스코샤(Nova Scotia)까지 진입, 이곳을 아카디아(Acadia)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1603년에는 노바스코샤에 로열 항(Port Royal)을 건설했고, 이어서1608년에는 퀘벡(Que bec)을 건설했다. 이렇게 해서 17세기초 캐나다의 동남부 연안에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개척되었다.
(4) 영국의 신대륙 진출
앞에서 보았듯이 영국의 헨리 7세는 이탈리아의 항해가 캐벗(John Cabot / 1450~1498 : 이탈리아 명 - 조반니 카보토 : Caboto, Giovanni)에게 특허장을 주어 인도항로 개척에 나서게 하여 1497년 이미 케이프브레턴 섬을 발견하였다.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에 후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영국의 헨리 7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2세에게 동시에 손을 내밀었던 것이 다급했던 이사벨이 먼저 콜럼버스와 계약하는 바람에 헨리 7세는 그 대안으로 캐벗을 보냈다고 한다.
어쨋거나 16세기 전반 영국에서는 헨리 7세,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로 이어지는 동안 국내문제가 너무나 복잡하여 신대륙에는 손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국내 문제가 다소 안정되고 절대왕정의 틀이 잡힌 엘리자베드 1세(1558 ~ 1603) 시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해외활동이 추진되었다.
1560년경 영국인들은 서쪽으로 항해해서 신대륙에 도달하여 태평양에 진출할 수 있는 가를 검토했고 아프리카에도 진출을 모색했다. 이때까지 영국이 신대륙에서 얻는 이익이란 아프리카 기니에서 노예를 모아 서인도제도에 팔아 넘기는 일이며, 이런 노예장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호킨스(Sir Hawkins, John/ 1532~1595)라는 젠트리 출신이다. 그러다가 아프리카 기니(Guinea)문제로 포르투갈과 다투게 되고 결국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때 영국은 포르투갈에게 이렇게 주장했다.
"영국은 영국상인들이 되도록 포르투갈 영토에 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실제로 식민활동을 하고 있지 않는 지역이라면 영국인 누구나 갈 수 있다....." 이런 것을 효과적 점령주의(Doctrine of EffectiveOccupation)라 한다. 다시 말하면 임자 없는 땅이라면 먼저 보는 사람이 주인이지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하겠느냐는 것이다.
프랑스가 신대륙에 진출하기 위해서 에스파냐에게 2개의 영역주의를 주장했다면 영국은 포르투갈에게 이런 효과적 점령주의를 주장하여 트집부터 잡고, 결국 1576년 영국은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약체 포르투갈을 굴복시키고 아시아와 신대륙에 드나들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당시의 최대강국 에스파냐에 대해서는 이런 것도 통할 수가 없었다.
에스파냐는 영국의 노예상선 검색을 밥먹듯 하고 걸핏하면 선원을 체포하거나 물품을 압수하는가 하면 태평양에는 자국 이외의 어떤 다른 나라의 선박에 대해서는 항해를 금지시키고 있었다. 특히 호킨스가 그의 친척 드레이크(Sir Drake,Francis / 1545? ~ 1596)와 3번째 노예무역선을 타고 서인도 제도에 갔을 때(1567~69)는 에스파냐에게 큰 재난을당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어 국민감정으로 까지 비화되었다.
카리브 해에서 노예들을 팔고 난 뒤 호킨스 일행은 배를 수리하고 식수를 공급받기 위해 멕시코의 베라크루스 근처에 있는 산후안데울루아에서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때 스페인 함대의 공격을 받아 6척 가운데 호킨스와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2척만이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고, 나머지는 에스파냐에 의해서 나포되거나 파괴되었다. 이 네척의 선단에는 엘리자베드 1세의 선박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영국에서는 상선인지 해적선인지 구분이 모호한 호킨스 일행에게 사나포선(私拿捕船 - privateer)의 권한을 주어 에스파냐 선박을 나포할 수 있는 특허장을 주었으며, 1572년 드레이크는 두 척의 배를 이끌고 파나마에 있는 중요 도시 놈브레데디오스를 약탈, 에스파냐의 엄청난 재물을 노획하여 돌아오자 국왕 이하 런던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지난날 당했던 치욕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이를 해적으로 간주, 그 처벌을 영국에 요구했으나 묵살되자, 스코틀랜드 왕위를 아들인 제임스 6세(영국 왕으로서는 제임스 1세)에게 양위하고 잉글랜드로 망명, 엘리자베드 1세의 식객으로 있던 메리(Mary/ 1542 ~ 1587)를 영국왕위에 오르게 하여 가톨릭왕국을 세울 계획을 하게 되었다. 이를 즈음 영국은 기네문제로 포르투갈과 전쟁까지 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영국이 승리했지만 아직도 에스파냐는 강국이었다.
1576년 영국의 프로비셔(Sir Martin Frobisher / 1535?~ 94)는 배 3척을 이끌고 태평양으로 가는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영국을 떠난 후 래브라도와 배핀 섬을 둘러보고 영국으로 돌아가 금광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1577, 1578년 같은 지역에 대한 2차례의 원정으로 허드슨 만을 발견했지만 금을 찾지는 못했고, 식민지를 건설하려던 그의 계획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호킨스(Hawkins, John / 1532~1595)와 드레이크(Drake,Francis / 1545? ~ 1596) 등 영국의 선박들은 효과적 점령주의와 에스파냐 선박을 사략(私掠)할 수 있는 권한을 방패 삼아 에스파냐의 식민지에 수시로 들락거렸고, 영국의 탐험가들 또한 미국과 캐나다에서 에스파냐의 몫을 넘보고 있었으며, 에스파냐 본국에서 네덜란드 독립이 일어났을 때 영국이 직, 간접으로 네덜란드를 후원하자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는 영국을 정면에서 협박했다.
영국인이 북미대륙(플로리다)에 상륙하면 신, 구교도 가리지 않고 잡히는 즉시 극형에 처하겠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플로리다를 대서양 연안 전체로 보고 있었다. 이런 협박에도 엘리자베드 1세는 눈섭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망명 중인 메리를 처형하자(1587) 펠리페 2세는 영국을 강도 높게 응징하기 위해서 1588년 무적함대를 도버해협으로 보냈다.
이로부터 양국간의 전쟁은 엘리자베드 1세가 죽은 뒤가 되는 160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에스파냐는 몰락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유럽 제 1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새로이 영국왕위를 이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1세(1603 ~ 25)는 1604년 에스파냐와 런던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때 제임스 1세는 효과적 점령주의를 고집했고, 에스파냐에서는 인도와 서인도의 어느 땅도 영국에게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고집을 내세웠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지친 양국 모두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고 말았다. 다만 서로가 자신들의 주장을 상대방이 충분히 인식하고 받아들인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어물쩍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1607년 영국인 105명이 버지니아로 건너가 제임스타운(Jamestown)을 건설하자 에스파냐가 즉각 반발, 런던조약을 파기했다고 주장했고 영국은 런던조약을 충실히 지켰다고 맞섰다. 눈을 닦고 보아도 에스파냐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없는 곳에 영국인을 보낸 것이 뭣이 잘못인가 하는 것이 영국의 주장이고 플로리다 일대를 북미대륙 전체로 보았던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도전과 다름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유야 뭐든간에 이때도 에스파냐가 힘이 있었다면 일찍이 프랑스가 세웠던 카르린는 성채를 허물 듯이 제임스타운을 무력으로 쓰러버리고 그 자리에 에스파냐 식민지를 만들면 그 뿐이지만 에스파냐로서는 이미 그럴만한 힘도 여유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벽두부터 북미대륙에는 영국의 식민이 이어졌고, 앵글로아메리카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Latin America의 명암(明暗)
1. 메스티소(mestizo)와 물래토(mulatto)
(1) 인디오(Indio)와 니그로(Negro)
아이노코(合子 - あいのこ), 알모즈(兩毛子), 메스티소(mestizo), 물라토(mulato),...아메리카 원주민을 영어에서는 인디언(Indian) 에스파냐어에서는 인디오(Indio)라 부른다.
아이노코는 일본인과 아이누인, 알모즈는 중국인 과러시인, 메스티소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에스파냐계 백인, 물라토는 아프리카 흑인과 유럽계백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混血兒)를 가르키는 말이다.
대개의 혼혈은 정복에 나선 군인들이 현지 여인들과의 통정(通情)에서 생겨난 부수적인 현상이다.
다소 역설적이긴 하지만 한(韓)민족은 통일신라 이래 수 많은 침략만 당했을 뿐 외국을 정벌하기 위한 파병은 물론이고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한 노예의 수입도 없었다. 따라서 외국에 뿌린 씨앗(?)도 거두어 갈무리 할 수확(?)도 없었고 그 덕에 인종문제로 고심한 적도 없었다.
다만 침략을 당하거나 귀화 외국인에 의한 혼혈은 있었지만 우리들과 모습이 비슷한 중국인이거나 일본인 등 아시아계 인종들이었기에 쉽게 동화되고 말았다. 실제로 우리들의 많은 성씨 가운데는 외국에서 귀화한 사람을 조상으로 모시고 족보까지 만들어 제법 양반이라고 자처하는 집안(門中)도 있고, 한때는왕실에서 까지 기자(箕子)를 민족의 조상으로 모시고 제사까지 지낸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외국인과 혼혈아에 대해서 얼마나 관대할까?
19세기 말부터 국가적인 식민사업이 아니라 제각기 살길을 찾아 가깝게는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멀게는 미주(美洲)에까지 한민족의 발길이 닿았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 땅에는미군을 축으로 많은 외국군이 들어왔고 혼혈도 생겨났다.
그런가 하면 월남전(越南戰 - Vetnam war / 1965 ~ 75)에 참가하면서 베트남에는 따이한(大韓)의 씨앗도 그곳에 남겼고 1960년대부터 시작된 이민 장려정책, 경제성장에 따르는 시장의 확대,사업, 유학, 선교, 회사주재 등의 여건에 따라 많은 한국인이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가히 글로벌(Global)시대에 걸맞게 구색을 갖춘 셈이다.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을 외형상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들과의 혼인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그로 인해서 태어난 2세들, 즉 혼혈아에 대해서도 별다른 거부감은 없다. 그러나 상대가 서양인, 특히 흑인 이라면 사정은 금방 달라진다. 무조건 반대, 절대반대라는 주변의 권고를 무시하고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이들에게는 차거운 시선을 보내게 되고, 그 영향은 2세들에게 까지 미친다.
그런가 하면, 조상들이 당했던 수모에 대한 앙갚음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중국인을 되놈(胡人), 일본인을 왜놈(倭人), 서양인을 양놈(西洋人) 혹은 양코백이, 깜둥이라 부르기도 하고, 은연중 조건없는 거부감까지 가지고 있어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세계도처에서 뿌리를 내린 화교(華僑)들 조차도 각기 다른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결국 이땅에서 대부분 철수하고 말았다. 애국심에 앞서 실용주의 측면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아이노코나 알모즈와 같은 용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이나 중국은 오래전부터 혼혈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따라서 혼혈에 대한 인식이 우리들 보담은 낳았던 것 같다. 특히 몽고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채택한 인종주의에서 이란계 및 아랍계 제 종족을 색목인(色目人)이라 하여 우대하였는데 색목인이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이나 중국에서 이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혼혈, 혹은 다른 인종이라 할지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원주민에게 동화되어 그 흔적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그런데 인종전시장이라 할만큼 다양한 종족이 혼거하고 있는 지역들, 이를테면 미국을 위시한 아메리카대륙이나 가까운 동남아시아만 하더라도 우리들의 세계와는 전혀 딴판이다.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흑·백 인종문제가 심각한 곳은 미국과 남아연방 등이고, 같은 유럽계 백인들에 의해서 개척 식민된 남미(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인종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도 않고 그럴만한 기미도 별로 없다. 주민의 대부분이 메스티소, 물라토 등으로 불리는 혼혈이고 90% 이상이 로마가톨릭을 신봉하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개념자체가 우리들과는 다르고 문화적으로도 큰 차이가 없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그렇다면 라틴아메리카에는왜 이런 혼혈이 많아졌는가?
신대륙으로 건너간 이베리아 식민자들이나 정복자들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째는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는 일이고, 둘째는 이곳의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대부분은 가족을 동반하지 않고 홀로 신천지로 떠났으며, 신대륙에서의 성직자 임면(任免)과 교회의 운영은 에스파냐 국왕이 로마교황으로부터 위임받고 있었다.
말하자면 가족은 본국에 남겨두고 단신으로 신대륙에 건너가 돈도벌고 미개한 원주민을 교화시켜 문명의 혜택을 나누는 동시에 가톨릭의 세력을 확대코자 했던 것이다. 이민(移民)이 아니라 일시 머물다가 한 밑천 잡으면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 왔기 때문에 요즘말로 하면 역(逆)기러기 아빠가 된 셈이고 결과적으로 이런 것이 라틴아메리카 주민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신대륙에서 라틴아메리카가 성립될 당시, 즉 16세기 전반 유럽에서는 1517년 독일을 시작으로 스위스, 영국, 네덜란드 등 여러 곳에서 줄기차게 반(反)가톨릭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른 바 종교개혁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온 이베리아의 가톨릭국가들은 그 반동적인 영향으로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했다. 스스로 구교(로마가톨릭)의 옹호자를 자처하고 같은 크리스트교도라 할지라도 가톨릭 이외의 종파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종교재판(inquisitio - 宗敎裁判)이란 이름으로 이교도 뿐만 아니라 많은 신교도를 박해하여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에스파냐에서 건너간 식민자들이나 정복자들 모두가 마치 흡혈귀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 원주민을 혹사한 것은 아니다. 국왕으로부터 현지관리를 위임받은 엥코미엔다르가 식민지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면 당연히 교회를 세우고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원주민들을 50명 내지100명 단위로 편재하여 지휘에 따르게 하고, 광산이나 농장에서 일을 시켰으며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게 하였다. 그 결과 원주민들이 원시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문명의 햇볕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백인지도자에게 반항하거나 전쟁에서 포로가 되면 노예로 전락하여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았고 그 착취의 정도가 가혹했기 때문에 거기에 따른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살해되거나 정글로 사라진 뒤 다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런 복합적인 사연으로 원주민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여 산토도밍고의 경우, 정복당시 약 20만의 인구가 20년이 지난 후에는 1만 4천명으로 줄었고, 30년 후에는 겨우 2백명에 불과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산토도밍고의 경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보면, 원주민의 보호차원이 아니라 노동력 부족이라는 점에서 식민자들에게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검은 상아(象牙 -black ivory)라고 불렀던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이 꾀나 비싼값으로 수입되었는데 이런 흑인 노예 무역으로 재미를 본 것은 영국인들이었다. 이들 영국인들은 자국산 직물이나 술, 사치품 등을 가지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그곳 추장과 노예교역을 하거나 직접 사냥(?)으로 다량의 노예를 확보하고, 이를 라틴아메리카로 팔아 넘기는 삼각무역으로 톡톡히 돈을 모았다.
이런 삼각무역의 경험을 축적한 영국인들이 18세기 이래 대(對)중국무역에서 만성적인 적자가 발생하자 자국산 상품을 인도에 팔고, 그 돈으로 인도산 아편을 대량으로 구입, 이를 중국에 팔아 그 돈으로 중국산 차(茶)를 사서 유럽으로 가지고 가 역시 큰 돈을 벌었다. 이런 영국적인 상술에 중국이 그냥 넘어갈리는 없다. 그래서 아편전쟁(1840 ~ 42)이 일어났지만 결과는 영국의 대포에 중국의 청조(淸朝)는 굴복하고 쇠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인종적인 단합을 이룰 만한 경험도 지식도 없었고 이를 이끌 만한 지도자도 없었다. 따라서 이들의 종착은 노예로 되는 길만 남게 되었고, 1720년을 고비로 이들 모두는 노예로 전락하여 대부분 멕시코와 안데스 일대에서 혹사당하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 흑인노예를 처음으로 수출(?)한 것은 앞글에서 잠깐 언급한 것과 같이 16세기 중반 영국의 호킨스와 드레이크 등 이다. 그러다가 노예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는 아프리카의 앙골라(Angola)에서, 18세기에서 19세기에는 주로 기니Guinea)에서 흑인노예들이 대량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낙인(烙印)이 찍히고 쇠사슬에 묶인체 노예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신대륙에 도착하면 쿠바, 푸에르토리코, 산토도밍고, 자매이카 등 주로 서인도제도의 농장이나 광산으로 팔려나가 가축처럼 취급당했으며, 평균 수명은 6년 정도였다고 한다. 심한 중노동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거나 심한 체력의 소모로 신체가 약해지고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 병을 얻어 죽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브라질에서 사탕수수가 재배되고부터는 흑인 노예의 다수가 브라질에도 들어갔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렇다고 모든 노예들이 착취만 당한 것은 아니다. 어떤 원칙에도 예외는 있는 법이다. 곳에 따라서는 노예가 주인을 바꿀 수도 있었고, 돈을 모아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다. 또하나 간과 할수 없는 사실은 단신으로 건너간 보통의 남자들이 생리적인 배설(排泄)만은 어쩔 수 없었기에 현지 원주민 여인을 처로 삼았다가 어느날 기약 없이 훌쩍 떠나고 말았다. 애정이 담기지는 못했다고 해도 2세는 태어나기 마련이고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 2세는 다시 3세를,....이렇게 대를 이어면서 그 숫자 또한 놀랄 정도로 불어났다.
(2) 라틴아메리카의 혼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던 북미대륙의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플로리다를 비롯해서 중·남미 전역에는 이베리아식의 봉건제가 이식되어 광산이나 대농장을 경영하는 에스파냐의 엥코미엔다르나 포르투갈의 파센텔로 등은 인디언과 니그로 노예들을 혹사시켜 모은 돈으로 도시에서 풍족한 사치생활을 즐겼다.
그러는 사이 이곳에서 산출된 금(金)과 은(銀)을 비롯해서 여타의 돈될 만한 원료는 유럽으로 실려가고 필요한 물품은 유럽으로부터 들어왔다. 전형적인 원료의 공급지와 상품의 판매시장으로 전락했을 뿐 이렇다 할 산업을 육성하지 못했다. 이것은 식민자들에게는 엄청난 실책이었고 이로 인해서 라틴아메리카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시적인 정착으로 끝났지만점차 정착단계에 접어들면서 백인중심의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고 계급도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이들 새로운 백인사회와 그 지도자들이 수시로 바뀌는 본국의 정정(政情)에 언제까지나 얽매일 수는 없고 자신들의 활로를 찾아야 되는데 전혀 그런 준비가 되지를 못했다.
당시 라린아메리카의 식민지에는 국왕의 승인 없이는 누구도 갈 수 없었다. 독일의 지리학자 훔볼트(Humboldt, Alexander von / 1769 ~ 1859)는 어렵게 에스파냐 국왕의 승인을 받아 1799년부터 1804년까지 라틴아메리카 곳곳을 탐사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19세기 초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식민지의 총인구는 1700만, 이 가운데 인디언이 750만, 물라토가 530만, 백인이 320만, 흑인이 77만이었고, 320만의 백인 가운데 피닌슐러(Peninsular)라고부르는 본국 출신의 순수백인이 30만, 크리올(Creole)이라고 불렀던 식민지 태생의 백인, 크리올과의 혼혈 크리올(creole - 소문자로 표시),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 메스티소 등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1807년, 프랑스의 나폴레옹군대는 피레네산맥을 넘어 에스파냐에 침공했고 본국 에스파냐는 나폴레옹과의 게릴라전으로 여럽게 지내고 있을 때, 시장확대를 노린 영국은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에 독립을 부추겼다. 그결과 1811년 파라과이를 시작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고, 다른 나라들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체제가 성립되어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에 간섭하고 이를 저지코자 했기 때문에 독립은 어렵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미국대통령 먼로는 1823년 이른 바 먼로선언(Monroe doctrine)을 발표하여 이에 정면 도전, 그 결과로 대부분의 나라들이 독립을 하게 되었고, 독립운동은 현지태생의 백인들, 즉 크리올(Creole)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을가졌으면서도 경제는 윤택을 잃었고 정치는 항상 불안했다.
'역사 ,세계사 > 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의 독립 - 독립선언(1) (0) | 2013.01.19 |
---|---|
앵글로아메리카(Anglo America) (0) | 2013.01.19 |
잉카 제국의 멸망 (0) | 2013.01.08 |
잉카 최후의 저항 (0) | 2013.01.08 |
미영전쟁 (War of 1812) (0) | 2013.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