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미국의 독립 - 독립선언(1)

구름위 2013. 1. 19. 11:20
728x90

 

1. 자치(自治)와 독립(獨立)

 

미국 독립기념일을 마지하여 찰스강 상공을 수 놓은 불꽃놀이, 2003. 7. 4. 보스턴(1)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차(tea - 茶/다)는 담배, 커피 등과 더불어 신경을 자극하는 세계적인 기호품(嗜好品)이다.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서 차가 유럽으로 들어간 것은 1610년, 그 특유의 맛과 향기가유럽인을 매혹시키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 났다고 한다.

 

차를 마신다고 해서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먹지 않는다고해서 죽을 일도 없다. 없으면 안 먹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 번 길들어진 입맛을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역겨운 냄새를 마다 않고 먹는 된장의 참맛을 이방인들은 알턱이 없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애연가의 심정을 헤아리기란 어렵다.

 

차의 원조(元祖)는 아무래도 중국이라는 것이 정설이다.차의 특유한 맛을 내기 위해서는 채집에서부터 끓이기 까지 몇 차례의 손을 거쳐야하는데, 19세기 중엽까지 유럽인 들은 그 기술을 전혀 몰랐고, 중국에서는 이를 철저히비밀에 부쳤다.

 

영국인들이 특히 즐기는 것은 블랙 티(Black Tea)라는발효차로서 우리들은 이것을 홍차(紅茶)라고 부른다. 홍차든 녹차든 이런 중국산의차가 아편전쟁(1840 ~ 42)의 원인을 제공하였고, 미국의 독립전쟁도 이런 차에서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1773년 12월 16일 밤, 달 밝은 보스턴 항에는 인디언 모습을 한 4, 50 명의 그림자가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정박 중인 동인도회사 소속의 2척의 배에 나누어 올랐다.배에 오른 이들은 일사불란한 행동으로 삽시간에 동인도회사가 싣고 온 차 상자 342개를 바다에던져 버렸다.이것이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의 전모(全貌)다.

 

인디언의 모습이라는 것은 이들이 인디언이 아니라 인디언을 가장한 식민지 사람들이고,동인도회사가 싣고 온 차를 바다에 버렸다는 것은 동인도회사에 감정이 있었다기 보다는이들이 싣고 온 차로 인한 피해가 염려됐기 때문이고, 보스턴의 티 파티(Boston Tea Party)라는것은 보스턴에서 차를 취급했던 상인이나 밀수업자들이 저질은 위와 같은 행위를말한다.

 

이들이 저지른 행위가 어렵게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간에새로운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고, 이것이 미국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렇다면 차를 취급했던보스턴의 사람들(Boston Tea Party)은 왜 이런 문제를 일으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을까? 여기에는 이런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앞글에서 밝힌바와 같이 1770년 문제의 타운센드 제법이 식민지의 완강한 반대로 폐지되었을 때, 유독차세(茶稅)만은 존속시키고 있었다. 영국의 생각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차세만으로도경쟁될 만한 식민지의 제조업은 억제될 수 있으며 재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공공연히 차를 밀수(密輸)했고,차 대신 커피를 마시자는 운동까지 전개하자 영국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렇지만영국 재정에는 별다른 영향은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메리카 식민지의 이런 행위에적극적인 단속이나 간섭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도경영에 나섰던 동인도회사가 심한 재정 압박을 받게 되자 영국의노스(North of Kirtling), Lord / North, Frederick / 1732 ~1792) 내각에서는 동인도회사의재정에도 도움을 주고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권위를 확인하는 의미에서 1773년5월, 차에 관한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 통과시켰다. 이것이 문제의 개정된 시행령,즉 새로운 차조례(茶條例 - Tea Act)라는 것이다.

 

이 법에 의하면, 동인도회사가 창고에 보유하고 있는 차 가운데 1700 만 파운드에한해서 중간상인을 배제(排除)하고 이를 직접 아메리카 식민지에 내다 팔 수 있는권한과, 여러가지 세제상의 특혜를 주었다. 중간상인이끼여 들지 않고 더 많은 세금이 면제 된다면 차값은 내리게 마련이고, 소비자 입장에서는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식민지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일차적으로 차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심하게 반발했다. 계속해서 동인도회사가차를 공급한다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고, 따라서 이들은 자멸하거나 직업을 바꾸지않으면 살길이 없어진다. 이런 영국의 조치를 이들은 식민지의 권익침해와 탄압을위한 정책이라 생각했고, 13개 식민지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기류에 휩싸이게 되었다.이런 분위기에서 위와 같은 소위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했다.

 

공공연한 식민지의 도전에 본국인 영국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격분한 영국의회와 정부는 잇달아 보복성의 법률을 발표, 걸핏하면 반영투쟁에 앞장서고,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매사추세츠 주를 아예 식민지에서 분리시키고 고립시킴으로서 자멸하도록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2)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 / Coercive Acts)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카스터 군에서 암만파 교도가 사용하는 4륜마차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뉴잉글랜드의 남부에 해당하는매사추세츠주는 1620년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던 청교도들,

즉 필그림파더스(Pilgrim Fathers)라고 불렀던 진취적인 사람들이 플리머스 식민지를 개척하면서시작된 곳이다.

 

1629년, 영국의 청교도들은 매사추세츠 만 회사를 설립하고 국왕으로부터 특허를 얻어더 많은 청교도들을 이주시켰고, 이들은 30년부터 보스턴을 건설,

이곳을중심으로 그들만의 교회(조합교회)를 세우는 한편, 규약을 만들어 주민자치를 행하다가 우여곡절 끝에1691년에는 다시 국왕 윌리엄 3세의 특허를 받아 플리머스까지 흡수하고 있었던 곳이다.

 

이들의 주된 이주 목적이 본국의 종교정책과 정치적인차별에 따르는 불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 보다는 개성이 매우 강했고이런 것이 전통으로 이어졌다. 뒤 집어 말하면 어떤 일이거나 타협이나 양보보다는 고집과 도전으로맞서기 일 쑤었다.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 정부는1774년 3월부터 6월 사이, 보스턴 항구법(Boston Port Bill), 매사추세츠 정부법(MassachusettsGovernment Act),재판운영법(Administration of Justice Act), 군대 숙영법(Quartering Act)을 만들어시행에 들어갔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이 기회에 본때를 보여주고 매사추세츠 식민지사람들의 반영적인 태도를뿌리채 뽑아 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매사추세츠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Acts), 혹은 강압적인 법(Coercive Acts)이라 하여 완강히 저항했고, 다른 식민지들까지이에 가세, 전 식민지가 단합할 수 있는 명분을 주어독립전쟁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법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첫째, 보스턴 항구법이란 바다에 내다 버린 차를 완전배상할 때 까지 보스턴 항구를 잠정 폐쇄한다는 것이다. 인디언을 가장하고 귀중한남의 차를 마구 바다에 내다 버렸으니 그것을 변상하라는 것이고, 변상하기 전에는보스턴 항구에는 어떤 배도 드나들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매사추세츠 정부법이란 1691년 매사추세츠에 부여한 식민지 건설 특허장을 폐기하여왕령 식민지로 격을 낮추고, 질서가 회복될 때 까지 잠정적으로 군정(軍政)을 실시하며, 사전승인 없는 주민회의(town meeting)를 금지하고,통신위원회의 활동을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셋째,재판운영법(Administration of Justice Act)이란 영국 관리가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영국 본국이나 다른 식민지에서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영국 관리들에게 일종의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을주어 그들을 보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넷째, 숙영법(Quartering Act)은 주둔한 영국군대를 민가에분산시켜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라는 것으로써, 1770년 폐지되었던 것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법이란 누가 어떤 목적에서 만들었던 간에 이를 지킬 때 그 의미가부여된다. 영국으로서는 매사추세츠의 적대 행위를 보다 엄격하게 단속하고, 전 식민지의지배를 강화할 목적에서 이런 법을 만들었지만, 식민지에서는 참을 수 없는 법, 혹은 강압적인 법이라 하여 수용할의사가 전혀 없었다. 영국이 법을 철회하거나 식민지가 따르지 않는 한 충돌은 피할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 의회는 여기에 덧붙여 1774년 6월에는퀘벡 법(Quebec Act)이라는 것을 하나 더 만들었다. 프렌치 - 인디언 전쟁 결과 얻어진프랑스령 아메리카 식민지를 영국에서는 인디언 보류지라하여 국왕의 선언으로 식민지정착 민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국왕선언에도 불구하고 출입을하고 있었는데, 이곳을 영국은 자국 영토로 편입하여 직접 통치하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캐나다에 해당하는 퀘벡주에는 프랑스계 이주민들이프랑스에서 파견된 총독과 총독자문회의에 따르고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었다. 따라서의회를 구성하려면 주민대표를 뽑아야 하는데,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으로서는 심사율에따라 가톨릭교도는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 따라서 주민의 다수가 가톨릭교도인 퀘벡에서는영국식의 대의제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들 전주민을 개종시킬 수도없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국의회는 퀘백에한해서 가톨릭을 허용하고, 프랑스의 민법을 채택하며, 의회제도를 없애는 대신 본국의해외주(海外州)로 간주하여 본국에서 직접 관할 하기로 하고, 그 범위를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 일대까지 확대 포함시켰다. 이런 것이 퀘벡 법의 요지다. 영국의사정이야 그렇다 치고, 이렇게 되면 식민지로서는 당장의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구성된 영국계주민들로서는 코 앞에 가톨릭교도들이 버젓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되고, 서쪽으로의 진출은사실상 봉쇄 당하며, 인디언과의 모피거래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본국의 조치에매사추세츠 주민뿐만 아니라 전 식민지인들이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영국왕 조지3세는 "주사위는 던져 졌다"라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이만하면 아메리카식민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기원전 49년 1월, 갈리아 총독 카이사르(Caesar, GaiusJulius - BC 100 ~ BC 44)가 본국의 소환 명령을 받고 고민하던 중 루비콘강을 건너면서던진 주사위는 성공을 했지만, 조지 3세가 던진 주사위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이로 인해서 식민지로서는 중대한 결단과 대안을 마련하고 있었고, 그것이 곧 현실로나타났다.

 

(3) 대륙회의(大陸會議 - Continental Congress)와커먼 센스(Common sense)

 

사뮤엘 애덤스(Adams, Samuel - 1722 ~ 1803)가 지도하고있던 통신위원회가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스턴 태생인 그의 활약으로많은 물자들이 다른 식민지로부터 매사추세츠에 들어오고, 버지니아 의회에서는 보스턴항이폐쇄된 6월 1일을 단식(斷食)과 기원(祈願)의 날로 정했다. 가재는 게편이라 버지니아가가 영국의 처사에 반발해서 매사추세츠를 옹호했던 것이다.

 

버지니아 총독은 버지니아 의회를 해산시키고 의사당을폐쇄해 버렸다. 의원들은 폐쇄된 의사당 주변에 모여 회의를 열고, 13개주 대표자회의를 필라델피아에서 열 것을 결의하고 이를 각 식민지에 통보했다. 버지니아 의회의제안에 따라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는 조지아주를 제외한 식민지 대표 56명이모였다.

 

비밀리에 진행된 회의에서 귀족출신으로서 버지니아하원의원과 통신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던 페이턴 랜돌프(Peyton Randolph / 1721 ~ 1775)를 만장일치로의장으로 선출하고 회의에 들어갔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회의와 의장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대표들은 몇 가지의 현안문제를 다음과 같은 선언(宣言)과 결의(決議)의 형식으로 채택했다.

 

통상에 관한 영국 의회의 규제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하고, 식민지인들의 자유, 생명과 재산, 집회의 권리 및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받을권리 등을 선언하고, 이를 국왕에게 청원키로 했으며, 영국 상품의 불매운동, 쌀을제외한 미국 상품의 영국 및 영국령 식민지에 수출을 금지하고, 대륙협회(ContinentalAssociation)의 결성과 주(州)의 크기에 관계없이 대표는 1명으로, 다음 회의는 1775년5월에 열기로 결의하고 해산했다. 이것을 제 1차 대륙회의, 혹은 필라델피아 대륙회의라고하며, 대륙이란 말은 개별 식민지가 아니라 식민지 전체라는 의미라고 한다.

 

제 1차 대륙회의에서 독립이란 말은 거론조차 하지않았다. 섣불리 독립을 꺼냈다가 본전은 고사하고 더 혹독한 징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두려움도 있었고, 13개의 식민지가 제가끔 독립하여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게 되면혼란만 가중할 뿐,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는 이해득실도 한 몫을 거들었다.국왕이라는 우산 밑에서 독자적인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는 주민자치를 희망했고,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를 바랬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던 그와는 상관없이분위기에 밀리면 입도 벙긋 못하고 그 대열에 합류하고 만다. 보스턴 서북방 약 30킬로미터지점에 위치한 콩코드(Concord)에는 애국파라고 지칭했던 반영단체가 식민지의 군수물자를보관하고 있었다. 이런 정보가 영국군에게 알려지자 1775년 4월 18일 밤, 영국군은애국파의 지도자를 체포하고 무기를 비롯한 군수물자를 압수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출동시켰다.

 

영국군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서 통신위원들의 눈빚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보스턴의북교회(north church)의 종루(鐘樓)에 숨어 망을 보던 매사추세츠 통신위원의 눈동자에 영국군의이동은 즉시 포착되었고, 교회의 종루에서는 찰스 강변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통신위원에게불빛 신호로 이를 알려주었다. 신호를 받은 찰스 강변의 통신원 폴 리비아는 말을타고 급히 달려 콩코드에 이 사실을 알렸고, 콩코드에서는 한 밤 중에 민병대를 소집했다.

 

영국군과 콩코드 민병대가 자정을 지나 19일 이른새벽, 보스턴 서북쪽 16킬로미터 지점의 렉싱턴에서 부닥쳤다. 누가 먼저 발포했던전투는 시작되었고, 콩코드민병 8명이 전사하여 독립전쟁 최초의 희생자를 내고 민병대는 콩코드로 물러났다. 이것이아메리카 독립전쟁에 불을 당긴 렉싱턴 전투(Lexington, Battle of)의 전말이다.

 

콩코드로 밀려난 민병대 400 여명은 콩코드 강의다리를 사이에 두고 7000 여명의 영국 정규군과 맞섰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73명이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민병대는95명이 죽거나 다쳤다. 전투소식이 알려지자 각처에서 소집된 민병대가 콩코드로밀려들었다. 영국군을 지휘했던 토마스 게이지(Gage, Thomas/ 1721 ~ 1787) 대령은 세(勢)가 불리함을 느끼고 겨우 퇴각함으로써 전투는 하루만에끝났다.

 

1775년 5월 10일, 약속대로 펜실베이니아에서 제 2차대륙회의가열렸다.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가 있었던 직후에 열렸기 때문에 관심은 당연히 본국과의화해문제에 초점이 모아졌다. 식민지 대표들은 "무력저항의 이유와 필요의 선언"이라는결의문을 채택하고, 영국국왕에게는 "평화의 청원"이란 형식으로 자신들의뜻을 전했다. 이때까지도 독립이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식민지 대표들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6월 15, 아메리카 연합군(Continental Army)을조직하고 조지 워싱턴(Washington, George / 1732 ~ 1799)을 사령관에 임명하였으며,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교섭하기 위해 외교 사절의파견 및 통화발행을 결의했다.

 

그러나 영국의 태도는 강경했다. 아메리카 연합군이창설되고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던 바로 그 때, 독립전쟁의 대회전이라할 수 있는 벙커힐 전투(Bunker Hill, Battle of)가 일어났다. 찰스타운에 위치한벙커힐은 보스턴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영국군이 이곳에진지를 구축한다는 소문이 돌자 민병대가 먼저 이곳을 차지하고 영국군과 일대 격돌을펼쳤다.

 

1775년 6월 16일 밤부터 17일 새벽까지, 치열한 전투가계속되고 결과는 훈련과 장비, 숫적으로 열세인 민병대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피해는 영국군이 훨씬 컸고 민병대에게는 새로운 자신감을 주었다. 세계의 최강 영국의정규군이 일개 민병대에게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수치가 될 수 있다.영국군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병력과 장비를 보강하고 보스턴의 수비를 한층 강화했다.

 

보스턴을 둘러싼 영국군과 민병대간의 전투는 1775년4월,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를 시작으로 76년 3월, 영국군이 보스턴에서 철수할 때까지 1년간 계속되었고 이것을 미국에서는 보스턴 포위 전(Siege of Boston)이라한다.영국군이 점령 주둔하고 있는 보스턴 외각을 민병대가 포위하여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

 

1776년1월, 워싱턴의 아메리카 연합군이 보스턴의 외각을 다시 포위하고 공격의 태세를갖추고 있을 때, 토마스 페인(Paine, Thomas / 1737 ~ 1809)은 커먼 센스(Common Sense- 常識)라는 이름으로 50쪽 정도의 소책자를 발간하여 독립을 고취하기 시작했다.

 

자치권을 얻기 위한 반영투쟁이 독립으로 방향을 급선회한것이다. 6월 7일 버지니아 대표 리처드 헨리는 식민지는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State)가되어야 하고,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결의안을 제출했고, 3일 뒤 대륙회의는 토마스제퍼슨을 위시해서 5명의 인원을 독립선언문의 기초위원으로 임명했다.

'역사 ,세계사 > 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의 독립 - 독립전쟁(1)   (0) 2013.01.19
미국의 독립- 독립선언(2)   (0) 2013.01.19
앵글로아메리카(Anglo America)   (0) 2013.01.19
아메리카대륙-중남미  (0) 2013.01.19
잉카 제국의 멸망   (0) 2013.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