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독립선언
(1) 독립선언서(The Declaration Independence)
"인류사의 흐름은 하나의 인민(人民)이 지상(地上)의 세력들 사이에서 자연과 자연신의 법이 부여한 독립과 평등의 입장을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는 인류의 신념에 대해 엄정하게 고려해 보면서 다른 인민과의 정치적 결합을 해체하고 독립을 요청하는 여러 원인을 선언할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창조주에 의해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주어졌다, 이 권리 가운데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한진리로 받아들인다.
이런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은 정부를 세웠으며 정부의정당한 권력은 피치자(국민)의 동의로서 비롯된다.
어떤 형태의 정부이건 이 목적을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그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고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이룩할 수 있는 원칙에 기초를 둔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피치자의 권리이다....."
이상의 몇 구절은 1776년 7월 4일, 제 2차 대륙회의가 열린 펜실베어니아의 동쪽 끝 필라델피아의 주 의사당(State House - Independent Hall)에서 13개 주 대표가 만장일치로 채택 발표했다는 독립선언서 전문(前文)에서밝힌 내용이다.
영국의 지배가 식민지에 아무런 도움이 없고 자연과 신의 법에 어긋났다면, 이에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독립정부를 세우는 것이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진리에해당하기 때문에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27개의 조항을들어 피력했고, 대영제국의 국왕(조지 3세)의 잘못된 정책도 조목 조목 열거했다.(원문은 글말미에 게재, 참조 바람)
천부인권(天賦人權)과 혁명(革命)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으로서가진 권리를 정부가 이를 부정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국민은 이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구성할 권리가 있고, 이런 권리에 따라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제퍼슨(Jefferson, Thomas / 1743 ~1826), 애덤스(Adams, John /1735 ~ 1826), 셔먼(Roger Sherman / 1721~ 1793), 리빙스턴(Livingston, Robert R. / 1746 ~ 1813), 프랭클린(Franklin, Benjamin/ 1706 ~ 1790) 등 다섯 사람이 1776년 6월 7일 대륙회의로부터 위임받아 제퍼슨이 기초한 것을 애덤스와프랭클린이 수정하여 발표한 것이라고 한다.
외견상으로 흠 잡을 것이 없을 정도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강조하였기 때문에미국 인들에게는 연방헌법 다음으로 존중되는 귀중한 문서가 되었다. 하지만 로크(Locke, John / 1632 ~ 1704)의 사회계약설(社會契約說 - social contract, theoryof)과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낡은 사상이라는비판도 있고, 다수의 흑인 노예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언급도 없다는 것이 어쩌면 미국인 다운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누히 강조하면서 왜 노예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는가?
제퍼슨이 쓴 원안에는 이런 구절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조지3세) 인간성 자체에 대한 잔인한 싸움을 일으키고 또 그를 해롭힌 적이 없는 먼 곳의인민들이 가진 신성한 생명 및 자유의 권리를 침해하고, 그들을 사로잡아서 다른반구(半球)에 데려다 노예로 삼았다. 또 데려가는 도중에 툭하면 비참하게 죽이기도했다. 해적 같은 이런 전술과 배신적 권력의 오욕이야말로 인간이 매매되는 시장을확보하기로 결의한 크리스트 신자 영국왕의 전쟁이다...."
흑인이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들도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가있고 따라서 이들 역시 해방되고 인간으로서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제퍼슨은 천명했었다.
그러나 노예 소유자가 많은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루이지애나, 노예무역으로돈을 벌고 있던 뉴잉글랜드의 몇몇 대표들이 이 문안의 삭제를 요구했고 결국 이들의 요구가받아들여 제퍼슨의 이런 원안은 삭제되었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는데 하물며 인간으로서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일말의 수치심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정당하게취득한 재산(?)으로서의 노예를 포기할 수 없다는 합리적인 몰염치가 이를 삭제케했는지는 우리들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미국이 독립을 전후해서 노예제도에 대한찬반논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2)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의출발
1776년 7월 2일, 대륙회의는 버지니아 대표 리처드헨리 리( Richard Henry Lee / 1732 ~1794)가 제안한 독립선언을 결의 했을 때, 델라웨어대표는 밤새 폭풍우 속을 달려와 표결에 참가했고,
뉴욕은 영국군이 출동한다는소식을 듣고 기권했다.
독립선언을 결의한 이틀 후인 7월 4일, 대륙회의에서는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장일치로 이를 채택했고, 이후 미국에서는 이날을 독립기념일로정했다.
다민족국가인 미국에서 국가생일을 챙기는 것과 연방의상징인 국기(國旗 - 星條旗)를 받드는 것은 국민통합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다. 따라서독립기념일 행사와 국기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은 유별나다.
독립선언서를 통해 인류 최초로 국민이 정부를 선택하는 권리가선언되었고, 대륙회의는 만장일치로 이를 승인, 발표(7월 8일)함으로써, 각각의13개 주(州 - State)는 정부를 구성했고, 이로써 북미대륙에는 13개의식민지가 아닌 연방국가(United States of America) 미국의 모습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8월 2일,대륙회의 의장 핸콕(Hancock, John / 1737 ~1793)을 시작으로 서명을받기 시작했다.그는 큼직하게 서명(sign)하고 "이만하면 영국의 국왕도 안경없이 내이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독립선언서의 첫 서명자가 되었고, 여러 달에걸쳐 56명이 최종적으로 서명했다.
핸콕이 큼직한 글자로 자신의 성명을 기록한 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더욱 유명해 졌고, 이후 미국에서는 자필서명(autograph)을 할 때 사인이라는 말 대신에 핸콕이란 단어를 쓴다고 한다.사인해 주세요 할 때 Give me your sign이아니라 Give me your John Hancock이 바른 표현이라고 한다.
선언만으로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국인 영국은물론이고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아 독립을 이루기 까지는 8년이라는 세월과 12차례의큰 전투, 13개 연방 모두가 피해를 입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내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반대했거나관심이 없었다. 대표자 56명이 서명하는데 여러 달이 걸렸다는 것은 예측불허의 불안감이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거나 좀더 관망하겠다는 신중한 자세라고도 할수 있고, 여차하면 등을 돌리고 영국편에 가담 하겠다는 이중적인 속뜻을 내포하고있었다는의미도 된다.
13개 연방이 힘을 합쳐도 막강한 영국의 군사력과 맞서싸우기에는 조직과 장비,인원에서 열세인 판국에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면 연방군의 승산(勝算)은 낮을수밖에 없고, 전쟁에 이기지못하면 독립은 고사하고 가혹한 처벌이나 보복이 기다린다는 것도 많은 사람들의결단을 늦추는 요인이 되었다.
독립선언서가 공포하기 하루 전인 7월 3일, 증원된영국군은 보라는 듯이 롱아일랜드(Long Island)에서 뉴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2개월 뒤에는 13개 연방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뉴욕을 점령해 버렸다. 전쟁을 오기(傲氣)나명분(名分)만으로 이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취약했던 연방군이 어떻게영국군을 물리치고 독립을 얻을 수 있었던가? - 다음 호에 계속 -
3. 1 운동과 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
1919년 3일 1일, 이땅에 서도 일제로부터 독립을하겠다는 취지의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라고도 불리는이 문서를 초안했던 사람은 최남선(崔南善 / 1890 ~ 1957)이고, 서명했던 사람은손병희(孫秉熙 / 1862 ~ 1922), 이승훈(李昇薰 / 1864 ~ 1930), 한용운(韓龍雲 /1879 ~ 1944) 등 33인이었다. 이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를 각각대표하고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기초(起草)한 최남선은 베드로란 세례명을가진 천주교 신자다. 따라서 33인에 들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학자답게 해박한 지식과유려한 필치로 독립의 당위성과 이를 밝히기 위한합법적인 절차로서 한민족이 독립을 선언하게된 배경과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헌병경찰제도라는 준(準)계엄적인 살벌한 일제의총독통치하에서 이것이 그대로 받아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전쟁이라도하겠다는 선전포고도 아니었다.
1919년 1월, 제 1차 세계대전의 당사국들이 전쟁의결과 처리를 위해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열었고, 미국대통령 윌슨은 14개 조항의 원칙을제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을 식민지쟁탈전쟁이라고도 한다. 식민지라는 먹이를 두고 시작된 싸움은 승자든 패자든 너무나큰 상처만을 남기고 끝나게 되었고, 전쟁에서 진 나라는 식민지를 포기할 수밖에없었다. 자칫 잘못되면 패전국이 포기한 식민지를 두고 승전국들끼리 식민지 재분할문제를 두고 다시 물고 뜯는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제시된 것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다.패전국에속해 있던 식민지는 계속해서 식민지로 남거나, 위임통치를 받거나, 독립을 하거나어떤 경우라도 승전국이라 해서 이를 넘보지 말고 그 민족(국가)의 판단에 맡기라는것이다. 놀란만한 이런 정보가 국내에 전해지고, 이에 고무된 인사들은 독립을 선택하겠다는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독립의사를 밝히기는 밝혀야 하겠는데 이것을 청원의 형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선언의 형식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다가 선언이란 형식을 취하기로 하였고, 청원이든선언이든 독립의사를 밝히는 것만이 주된 임무라고 생각했던 33인은 기꺼이 서명은했지만 그 중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못한 사람도 있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이라는 것도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투르크의 식민지에 한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고, 승전국의 식민지는 처음부터해당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당시의 일제는 패전국이 아니라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파리강화회의에참석하고 있었고,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반도 역시 처음부터 민족자결주의원칙과는 거리가멀었다.
어쨌든 선언을 하기 위해서는 장소가 있어야 되고,얼마간의 군중도 모여야 한다. 그래서 파고다 공원, 3월 1일, 오후 2시라는 장소와시간이 정해졌지만 모여든 군중이 취지를 잘못 알고 소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이들이일제로부터 받아야 하는 처벌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소란이 내란으로 비화되면 이들은내란수괴죄(內亂首魁罪)에 해당되고, 가벼운 소란으로 끝난다면(선언으로 끝난다면)단순 소요죄(騷搖罪)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형 혹은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내란수괴죄와구류 몇 일, 혹은 몇 년 이하의 징역이라고 하는 소요죄가 이들의 갈등을 부추겼다.갑론을박 끝에 이들 33인이 선택한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 그러나 3월 1일, 오후2시에 이들이 모인 곳은 파고다 공원이 아니고 꾀나 고급스러운 명월관의 별관(태화관),모인 사람은 33인 중 4명이 불참한 29명,....오후 3시경 한용운의 간단한 취지 설명으로선언식은 불과 몇분 사이에 끝내고 말았다.
선언식을 끝낸 이들은 사전에 계획한 자원피착(自願被捉)에따라 종로경찰서에 연락, 연행되었고 재판결과 이들이 받은 최고 형량은 3년 징역이었다.스스로 손발을 묶고 자수했다는 것이 자원피착이지만 이들 스스로 손발은 묶지는않았으나 사전에 연락하여 출동한 일경에게 순순히 손을 내밀고 수갑을 차고는 연행됨으로서자수(自首)의 형식을 취했고, 소요에 대한 2차적인 책임은 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온통 북새통을 이루고 난리가 난 것은 파고다공원이었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민족대표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자 어떤 학생이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뒤이어 시위의 물결이 거리를 메웠다. 물론시위의 선두에도 대열 어디에도 33인은 그림자도 없었다. 이것이 3, 1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선언서(독립선언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있는가? 吾等은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서 世界萬邦에告하여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서 子孫萬代에 誥하여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하노라......千百世 祖靈이 吾等을 陰佑하며 全世界氣運이 吾等을 外護하나니, 着手가 곳 成功이라. 다만, 前頭의 光明으로 驀進할따름인뎌.
1762자(字)나 된다는 이 선언서를 보면 우선 접속사와 토씨를 빼고는 어려운 한문으로 되었기 때문에여간 한 한학자가 아니고서는 뜻은 고사하고 읽기조차 어렵다. 정신을 가다듬고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내용이 집약된다. 첫째,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은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라 세계적인추세에 따랐다는 것, 둘째, 한반도의 독립이 중국과 일본을 위시한 동양평화에 유리하다는것, 셋째, 독립의사를 밝히는 것 이외에는 어떤 다른 목적도 없다는 것...특히다른 목적이 없다는 것을 더욱 명백히 밝히기 위해 원안에는 없었던 공약 3장까지달았다.
이를 두고 일부 비판적인 시각에서 민족대표 33인을비난하기도 하고, 민족대표 중 친일로 전향한 인사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매질을 서슴지않는 것이 작금까지도 이어진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나라가 망했다고 대성통곡했던수 많은 인사들과 순국(殉國)한 의사와 열사들의 귀한 목숨과 눈물에 보답하기위해 서라면 3, 1 운동과 때를 같이 해서 발족한 임시정부의 정체(政體)가 제국(帝國)내지는 왕국(王國)이 되어야 한다.
망한 나라를 되 찾는 것이라면 어느 왕손을 데려다가조선왕조를 부활하거나 이와 비슷한 최소의 모양새라도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과는거리가 먼 공화정을 채택했다.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면 이것이야 말로새로운 혁명이라 해야 할지? 아둔한 본인으로서는 그 답을 찾기가 힘들고 독립운동자체의 목표설정이 아리송해 진다. 하지만 아직도 국내학자들간에는 일제의 탄압정책만강조할 뿐 여기에 대한 해답이 없다.
다만 미국의 독립선언 배경에는 무장한 민병대가 있었다.그러나 3, 1운동 당시의 이땅에는 찌든 가난과 착취에 울부짖는 힘없는 민초들만있었을 뿐 제국주의 일본군대에 대항할 만한 변변한 총 한자루도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에 서명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부여될 것이다.어렵기는 미국의 독립선언서나 기미독립선언서나 마찬가지지만 원문을 아래 실었으니뜻있는 독자께서는 한번쯤 내용을 풀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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