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스크랩] [연재]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 제9회

구름위 2013. 1. 4.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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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권의 향방

이에야스의 본대가 오가키(大桓) 성 서북쪽의 아카사카(赤坂)에 포진한 것은 9월14일 아침이었다. 그때 이미 오가키 성에는 미쓰나리를 위시하여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포진하고 있고, 아카사키 서남쪽 구리하라(栗原)에는 조소카베 치카모리,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 나가쓰카 마사이에(長束政家), 다시 그 서쪽의 난구(南宮) 산에는 기쓰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지키고 있었다. 즉 도쿠가와 군은 동서로부터 협공을 받는 셈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동군은 10만, 미쓰나리의 서군은 8만 5000. 그러나 여기에 오사카에 있는 서군의 총수 데루모토가 참전하면 피아의 병력은 역전된다. 데루모토가 오지 않는다 해도 성을 공격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보급로가 끊기면 혼성부대이기 때문에 내부 붕괴가 일어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자멸할 수밖에 없다.

이에야스는 적을 성에서 끌어내 야전을 벌이는 단기전(短期戰)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날 밤 이에야스는 전군에 서진을 명했다. 오가키 성을 묵살하고 직접 오사카 성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위장했다. 동시에 사방에 첩자를 보내 적측에 오사카 진격 정보를 흘렸다.

적은 여기에 말려들었다. 미쓰나리는 성을 나와 나카센도(中山道)와 호쿠리쿠(北陸) 가도의 분기점인 세키가하라(關原)에 진입했다. 동군의 전진을 막으려는 작전이었다. 양군의 전투는 9월15일 아침 8시경부터 시작되었다. 동군의 선봉 다다요시, 마사노리 등이 돌격을 개시하고, 서군의 선봉 히데이에가 공격해 나왔다. 이어서 우익과 좌익이 가세한 가운데 약 10일에 걸쳐 난투가 벌어졌다.

오전 11시경에 미쓰나리의 진지에서 봉화가 올랐다. 마쓰오(松尾) 산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와 난구 산의 히로이에, 히데모토 등에게 미리 약속했던 대로 돌격을 명하는 신호였다. 히데아키가 동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히로이에 등이 배후를 찌르면 서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양쪽 모두 전혀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에야스에게 내응하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오경에 이번에는 이에야스 진영에서 마쓰오 산을 향해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약속대로 속히 내응하라는 독촉의 사격이었다. 히데아키는 그때까지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위협사격에 겁을 먹고 산에서 내려와 기슭에 포진하고 있던 서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의 배신은 전황의 추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드디어 오후 3시경 서군의 완패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미쓰나리는 후에 체포되어 처형되고 서군의 장수들도 목이 잘리거나 자살했다. 이 전투는 8만 5000의 서군 중에서 무려 5만이라는 사상 초유의 배신자를 내고 끝을 맺었다.


-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

그러나 이에야스에게는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히데요리를 지키며 아직 오사카에 남아 있는 서군의 총수 데루모토에 대한 처리였다. 여기서 그는 ‘승리는 5부를 최선으로 하고 10부를 최악으로 한다’는 신겐의 병법을 상기했다. 동군에 내응한 모리의 친척 히로이에와 나가마사 등을 오사카에 보내 데루모토를 설득하게 했다. 데루모토 역시 싸움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섭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영지의 현상유지를 조건으로 오사카에서 순순히 철수하고 말았다.

이에야스가 대군을 거느리고 오사카 성에 개선한 것은 9월27일, 그의 나이 59세 때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아카사카로 군사를 이동시켰을 때 그는 자신만만하게, “이제 야전에 있어서 나를 능가할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호언했다고 한다. 확실히 그는 미카타가하라에서 신겐에게 처참한 패배를 맛본 후 그의 전법을 깊이 연구하고 분석하여, 신겐이 죽은 후 자타가 공인하는 전략 전술의 일인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야전보다도 평화시의 통치와 지배에서 더 뛰어난 진가를 발휘했다. 그가 구상하는 도쿠가와 정권 영구화 전략은 ‘농민들을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농민으로 하여금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양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납으로 바치게 하여 재물이 남지 않도록, 그러나 부족하지도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라는 의미다. 이것은 농민뿐 아니라 공경과 다이묘에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적용한 정책이었다. 이에야스가 먼저 손을 댄 것은 히데요시가 배치했던 다이묘들의 영지에 대한 철저한 개혁이었다.

첫째 대상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수격이던 데루모토였다. 이에야스는 오사카 입성 때 그에게 영지의 현상유지를 약속했었지만, 그가 미쓰나리 등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20만 석의 영지 중에서 83만 석을 삭감했다. 원래는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으니 할복을 명해야 할 것이지만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목숨을 살려주고 8개 영지 중에서 두 곳을 준 것이다. 이에야스는 거대한 세력을 지닌 데루모토가 살 수 없게, 그러나 죽지도 않게 했던 것이다. 데루모토에 버금가는 강자였던 가게카쓰에 대한 처분도 가혹하여 120만 석 중에서 고메자와(米澤)의 30만 석을 제외하고 아이즈 지방의 90만 석을 전부 몰수했다. 그리고 5대 원로 중 하나로 서군의 부원수격인 히데이에는 57만 석을 모두 몰수당했다.


- 다이묘의 영지 3분의 1회수

5명의 행정관 중에서 나가마사는 동군편이었으므로 처분과 관계가 없었다. 마에다 겐이(前田玄以)는 거사에 참가하지 않아 무사했다. 그러나 그 밖에 미쓰나리, 마사이에의 영지는 모두 회수되고, 나가모리는 내통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20만 석을 빼앗긴 뒤 부자가 유폐됐다. 이렇게 해서 서군에 속했던 87명의 다이묘가 영지를 몰수당했는데 그 총계가 640만 석에 달했다. 당시 전국의 다이묘가 소유했던 영지는 모두 1800만 석이었다고 한다. 3분의 1 이상의 영지가 강제로 회수당한 것이 된다.

도요토미 가문만은 전투의 책임을 묻지 않고 영지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전후 처리가 끝난 시점에 그 영지는 200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줄었다. 도요토미 가문에서는 영지에 직접 대관(代官)을 보내 통치하는 경우가 적었다. 각지의 다이묘에게 맡겨 지배와 세납의 징수를 대행시킨 것이다. 때문에 그 영지를 맡아보고 있던 다이묘들이 제거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봉되자 그 토지와 도요토미 가문의 관계가 끊어져 직접 지배하던 65만 석만 남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가 몰수한 토지를 재분배하는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후다이 가신들의 배치였다. 그들을 본거지인 간토와 종래 정치의 중심지인 교토 오사카를 연결하는 지역 등 요충지에 폭넓게 배치하여, 2중 3중의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이묘의 대량생산이 불가피했다. 이에야스는 39명이던 후다이 다이묘를 일약 63명으로 증원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다이묘로 발탁된 사람은 180명이었는데 그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인원이다. 그중 26명이 간토 일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미쓰나리의 거성이던 사와야마에는 소위 4천왕(天王)의 한 사람인 이이 나오마사(伊井直政)를, 이세에도 역시 4천왕의 하나인 혼다 다다카쓰(本多忠勝)을 보내 도요토미 세력의 준동을 막게 했다. 또 오와리에는 4남인 다다요시, 에치젠(越前)에는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미토(水戶)에는 5남인 다케다 노부요시를 배치하여 도사마(外樣) 다이묘, 즉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등용된 도요토미 계열의 다이묘를 위협했다.

이에야스는 동군을 도와 공을 세운 도사마 다이묘들에 대해서도 과감히 배려했다. 5대 원로 중에서 유일하게 동군에 가담한 도시나가는 83만 석에서 119만 석,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58만 석에서 60만 석, 가모 히데유키(蒲生秀行)는 18만 석에서 60만 석,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는 24만 석에서 57만 석 등 대폭적인 가자(加資)가 이루어졌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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