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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에서 정치가로
전후의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다. 이때 이에야스에게 주어진 것은 호조의 옛 영지인 간토의 6개 지방이었다. 그 대신 지금까지 피땀을 흘려가며 다져온 5개 지방, 특히 그의 발상지인 미카와는 안타깝게도 환수되었다. 이에야스는 어느 쪽이 이익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영지는 늘어났으나 미개간 황무지보다는 옛 영지가 훨씬 좋다. 특히 가이(甲斐)에는 금광이 많아 이번 군사비도 그곳에서 나온 금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사실 간토로 가면 교토로 가는 길이 멀어진다. 하코네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간토로 내려가면 상경 희망은 거의 단절된다. 즉 전국제패의 꿈이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가신들의 불만은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태연했다.
“그다지 비관할 것 없다. 옛 영지보다 훨씬 더 광대해졌으니 언젠가는 상경할 날이 올 것이다”
히데요시에 대한 절대복종이란 성의를 보이면서도 마음속 깊이 간직한 불굴의 기백이 이 말 속에 숨어 있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그의 특징은 일단 결정하면 주저 없이 행동에 옮기는 데 있다. 이봉(移封)이 결정된 것은 7월13일, 그런데 20일도 지나지 않은 8월1일 에도(江戶) 입성을 끝마쳤다. 여기에는 히데요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순순히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더구나 신속히 간토로 직행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간토에 들어가자 즉시 직할령을 설정하고 가신에 대한 영지와 녹봉을 할당했다. 원칙적으로 에도 주변은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반란의 우려가 없는 후다이 가신들은 원방에 배치했다. 그리고 직할령에는 행정관을 두고 여기에는 다케다, 호조, 이마가와 등 구신을 등용했다. 이에야스가 가장 고심한 것은 간토 전역에 할거하는 소영주와 토호들에 대한 대책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호조와 다케다의 은덕을 입은 자들로 동화시키기가 용이치 않았다. 이에야스는 가이를 점령했을 때처럼 무리한 압박을 극력 피했다. 농촌에 대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서서히 지배력을 침투시켜 가신으로 포섭해 나갔다.
그는 또 토지조사를 단행해 정확한 곡물의 생산량을 산출함으로써 영지의 재정적 기틀을 다지고 부정행위를 방지하는데 힘썼다. 이어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켜 에도를 바다 쪽으로 넓혀 도시의 확장을 꾀했다. 이는 전국의 상인과 기술자들을 끌어들여 상공업의 번영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호조의 연고지인 간토에 옮겨 가게 함으로써, 토호의 반란을 유발시켜 이에야스의 몰락을 기대했다면, 이것은 큰 착각이다. 이에야스는 직할령 설정, 가신의 배치, 토지조사 등을 착착 진행했다. 특히 호조의 가신이던 토호에 대해 종래 신분을 인정해 불만을 제거함으로써 지배체제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 대한 굴복을 이익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간토 경영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 영지가 광대했던 만큼 이에야스의 지위를 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가 중앙무대에서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새로운 영지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 실력자의 죽음
규슈, 간토, 오우(奧羽) 등을 평정해 천하통일에 성공한 히데요시는 1592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7년에 걸친 이 무모한 전쟁은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 정권의 자멸을 초래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믿었다.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여 국내경제를 혼란에 몰아넣고 농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모처럼 복종시켰던 다이묘들의 신뢰를 잃었다. 천하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시대가 이미 ‘무인의 계절’에서 ‘정치의 계절’로 변했다고 판단하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재정과 민정에 밝은 문관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것이 반사적으로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친 무장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반감은 단순한 감정적인 대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이묘들의 독립성을 빼앗아 중앙정부의 전제화를 시도하려는 문관파에 대해, 중앙정부에는 복종하면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무장파의 반목으로 번졌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경계하며 반감을 품었던 무장파 장수들과 접촉하며 공공연히 그들을 옹호했다. 무장파들은 조선 출병에 비판적인 이에야스에게 신뢰를 보냈고, 이들이 이에야스에게 사태의 조속한 수습을 당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대륙침략의 실패로 심신이 피로해진 히데요시가 1598년 8월16일 6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5대 원로에게 맡기고 드디어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정치는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등 5대 원로의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미쓰나리,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 5명의 행정관이 서정을 집행하고, 그 중간에 3명의 주로(中老)가 양자간의 조종을 맡았다.
이처럼 5명의 원로가 정치의 최고 결정기관이 되었기 때문에 미쓰나리 등이 추진하려던 중앙정부의 전제정치 체제 확립은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더구나 합의제라고는 하나 그중에서도 이에야스의 발언권이 가장 강했다. 그는 최대의 영지와 최강의 군사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천하가 그의 기량과 무용을 인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에야스와 5대 원로라는 관계가 생겼다. 물론 5대 원로라고는 해도 이에야스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도시이에뿐이고 그 배후에는 미쓰나리가 있다. 따라서 합의 정치의 내면은 이에야스와 도시이에-미쓰나리의 대립관계였다.
겨우 유지되고 있던 균형상태는 1599년 3월에 이르러 도시이에의 죽음으로 무너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기회를 엿보던 무장파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 이른바 7인방이 미쓰나리를 죽이려 했다. 이에 미쓰나리는 놀랍게도 후시미(伏見)로 도망하여 적대시하고 있던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했다.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여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佐和山)로 무사히 돌려보냈다.
도시이에가 죽고 그 배후의 실력자 미쓰나리가 실각하자 중앙정부에서 이에야스와 대결할 힘을 가진 자가 사라졌다. 이를 전후하여 도시이에의 뒤를 이어 원로가 된 그의 아들 도시나가(利長)가 자기 영지로 돌아가자, 나머지 원로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등 유력한 장수들도 각각 영지로 내려갔다.
- 이에야스의 변신
그들이 돌아간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조선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힘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전국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상하고 군비를 확충하기 위해, 또는 이에야스의 정권장악을 암암리에 승인하고 중앙에서 멀어지기 위해… 등등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본 이에야스는 그해 10월, 후시미 성을 둘째 아들 히데야스(秀康)에게 맡기고, 오사카 성에 들어갔다. 드디어 그는 후시미와 오사카 두 성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조선 출병을 면하여 경제력도 소모시키지 않고 착실히 영지 경영에 진력하여 실력을 축적한 그는 중앙무대를 지키며 천하의 정치를 독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4대 원로와 미쓰나리가 중앙 정계에서 멀어진 뒤 이에야스는 거의 독재적으로 정무를 처리했다. 지금까지 모든 일에 관용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가혹한 숙청을 단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복종한 지 12년 만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한 이에야스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는 미쓰나리 편이면서도 자기와 은밀히 뜻을 통하고 있던 행정관인 나가모리를 이용했다. 이에야스로부터 정보 제공을 의뢰받은 그는 충성을 나타내려고 도시나가가 모반의 기색을 보인다고 밀고했다. 결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야스가 계속 정보를 재촉하는 바람에 확증도 없이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쾌재를 불렀다. 그로서는 정보의 확실성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도시나가 일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돼, 그의 막료들이 유배를 가거나 감금되었다. 이어서 도시나가와, 그의 편을 들었다는 다다오키에 대해 토벌군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깜짝 놀란 다다오키는 곧 상경하여 서약서를 제출하고 전혀 반의가 없다는 것을 호소하는 한편 도시나가에 대해서도 극구 변명했다. 이에야스는 다다오키의 성의를 무시하면서까지 출병할 수는 없어, 양쪽이 인질을 보내는 조건으로 타협했다. 두 사람 모두 싸우지도 않고 이에야스에게 굴복한 결과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다음 발화점을 찾았다. 그러나 도시나가 사건으로 모두 신중을 기했기 때문에 출병할 구실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좋은 구실이 생겼다. 히데요시의 명으로 아이즈(會津)에 옮겨진 5대 원로의 하나인 가게카쓰의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새 영지 정비를 이유로 돌아갔던 그는 서둘러 성채를 수축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는가 하면 병력을 증강시켜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다.
이것을 안 이에야스는 사자를 보내 그의 상경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게카쓰는 해명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군비를 확충하며 일전불사의 태도를 보였다. 이에야스는 그 강경한 태도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는 아이즈 토벌을 결심하고 6월16일에 오사카를 떠나 후시미 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18일에는 61세의 노장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에게 불과 2000의 군사를 주어 성을 지키게 하고 에도를 향해 출발했다. 천천히 행군하던 그는 7월2일 에도에 도착해 20일이나 성에 머물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은 아이즈로 향하고 있으나 마음은 오사카에 있었다. 아이즈 토벌이 목적이라면 항상 과감 신속하게 행동하는 이에야스가 이처럼 느긋하게 작전을 전개할 리 없다. 실은 미쓰나리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미쓰나리는 반(反) 이에야스 세력의 규합에 성공하여 데루모토를 명목상의 총수로 추대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아이즈로 출동한 것을 기회로 데루모토를 오사카에 입성케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후시미성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했다.
이에야스는 내심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모토타다에게 소수의 병력으로 후시미 성을 수비케 한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사석(捨石)’ 작전이었다. 모토타다의 희생으로 그는 비로소 미쓰나리를 토벌하는 대의명분을 얻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토벌의 결심을 밝히고 에도를 출발했다. 동시에 동북 지방에 있던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도 서진(西進)을 명했다. (계속)
전후의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다. 이때 이에야스에게 주어진 것은 호조의 옛 영지인 간토의 6개 지방이었다. 그 대신 지금까지 피땀을 흘려가며 다져온 5개 지방, 특히 그의 발상지인 미카와는 안타깝게도 환수되었다. 이에야스는 어느 쪽이 이익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영지는 늘어났으나 미개간 황무지보다는 옛 영지가 훨씬 좋다. 특히 가이(甲斐)에는 금광이 많아 이번 군사비도 그곳에서 나온 금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사실 간토로 가면 교토로 가는 길이 멀어진다. 하코네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간토로 내려가면 상경 희망은 거의 단절된다. 즉 전국제패의 꿈이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가신들의 불만은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태연했다.
“그다지 비관할 것 없다. 옛 영지보다 훨씬 더 광대해졌으니 언젠가는 상경할 날이 올 것이다”
히데요시에 대한 절대복종이란 성의를 보이면서도 마음속 깊이 간직한 불굴의 기백이 이 말 속에 숨어 있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그의 특징은 일단 결정하면 주저 없이 행동에 옮기는 데 있다. 이봉(移封)이 결정된 것은 7월13일, 그런데 20일도 지나지 않은 8월1일 에도(江戶) 입성을 끝마쳤다. 여기에는 히데요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순순히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더구나 신속히 간토로 직행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간토에 들어가자 즉시 직할령을 설정하고 가신에 대한 영지와 녹봉을 할당했다. 원칙적으로 에도 주변은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반란의 우려가 없는 후다이 가신들은 원방에 배치했다. 그리고 직할령에는 행정관을 두고 여기에는 다케다, 호조, 이마가와 등 구신을 등용했다. 이에야스가 가장 고심한 것은 간토 전역에 할거하는 소영주와 토호들에 대한 대책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호조와 다케다의 은덕을 입은 자들로 동화시키기가 용이치 않았다. 이에야스는 가이를 점령했을 때처럼 무리한 압박을 극력 피했다. 농촌에 대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서서히 지배력을 침투시켜 가신으로 포섭해 나갔다.
그는 또 토지조사를 단행해 정확한 곡물의 생산량을 산출함으로써 영지의 재정적 기틀을 다지고 부정행위를 방지하는데 힘썼다. 이어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켜 에도를 바다 쪽으로 넓혀 도시의 확장을 꾀했다. 이는 전국의 상인과 기술자들을 끌어들여 상공업의 번영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호조의 연고지인 간토에 옮겨 가게 함으로써, 토호의 반란을 유발시켜 이에야스의 몰락을 기대했다면, 이것은 큰 착각이다. 이에야스는 직할령 설정, 가신의 배치, 토지조사 등을 착착 진행했다. 특히 호조의 가신이던 토호에 대해 종래 신분을 인정해 불만을 제거함으로써 지배체제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 대한 굴복을 이익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간토 경영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 영지가 광대했던 만큼 이에야스의 지위를 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가 중앙무대에서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새로운 영지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 실력자의 죽음
규슈, 간토, 오우(奧羽) 등을 평정해 천하통일에 성공한 히데요시는 1592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7년에 걸친 이 무모한 전쟁은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 정권의 자멸을 초래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믿었다.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여 국내경제를 혼란에 몰아넣고 농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모처럼 복종시켰던 다이묘들의 신뢰를 잃었다. 천하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시대가 이미 ‘무인의 계절’에서 ‘정치의 계절’로 변했다고 판단하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재정과 민정에 밝은 문관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것이 반사적으로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친 무장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반감은 단순한 감정적인 대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이묘들의 독립성을 빼앗아 중앙정부의 전제화를 시도하려는 문관파에 대해, 중앙정부에는 복종하면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무장파의 반목으로 번졌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경계하며 반감을 품었던 무장파 장수들과 접촉하며 공공연히 그들을 옹호했다. 무장파들은 조선 출병에 비판적인 이에야스에게 신뢰를 보냈고, 이들이 이에야스에게 사태의 조속한 수습을 당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대륙침략의 실패로 심신이 피로해진 히데요시가 1598년 8월16일 6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5대 원로에게 맡기고 드디어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정치는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등 5대 원로의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미쓰나리,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 5명의 행정관이 서정을 집행하고, 그 중간에 3명의 주로(中老)가 양자간의 조종을 맡았다.
이처럼 5명의 원로가 정치의 최고 결정기관이 되었기 때문에 미쓰나리 등이 추진하려던 중앙정부의 전제정치 체제 확립은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더구나 합의제라고는 하나 그중에서도 이에야스의 발언권이 가장 강했다. 그는 최대의 영지와 최강의 군사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천하가 그의 기량과 무용을 인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에야스와 5대 원로라는 관계가 생겼다. 물론 5대 원로라고는 해도 이에야스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도시이에뿐이고 그 배후에는 미쓰나리가 있다. 따라서 합의 정치의 내면은 이에야스와 도시이에-미쓰나리의 대립관계였다.
겨우 유지되고 있던 균형상태는 1599년 3월에 이르러 도시이에의 죽음으로 무너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기회를 엿보던 무장파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 이른바 7인방이 미쓰나리를 죽이려 했다. 이에 미쓰나리는 놀랍게도 후시미(伏見)로 도망하여 적대시하고 있던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했다.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여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佐和山)로 무사히 돌려보냈다.
도시이에가 죽고 그 배후의 실력자 미쓰나리가 실각하자 중앙정부에서 이에야스와 대결할 힘을 가진 자가 사라졌다. 이를 전후하여 도시이에의 뒤를 이어 원로가 된 그의 아들 도시나가(利長)가 자기 영지로 돌아가자, 나머지 원로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등 유력한 장수들도 각각 영지로 내려갔다.
- 이에야스의 변신
그들이 돌아간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조선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힘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전국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상하고 군비를 확충하기 위해, 또는 이에야스의 정권장악을 암암리에 승인하고 중앙에서 멀어지기 위해… 등등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본 이에야스는 그해 10월, 후시미 성을 둘째 아들 히데야스(秀康)에게 맡기고, 오사카 성에 들어갔다. 드디어 그는 후시미와 오사카 두 성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조선 출병을 면하여 경제력도 소모시키지 않고 착실히 영지 경영에 진력하여 실력을 축적한 그는 중앙무대를 지키며 천하의 정치를 독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4대 원로와 미쓰나리가 중앙 정계에서 멀어진 뒤 이에야스는 거의 독재적으로 정무를 처리했다. 지금까지 모든 일에 관용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가혹한 숙청을 단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복종한 지 12년 만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한 이에야스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는 미쓰나리 편이면서도 자기와 은밀히 뜻을 통하고 있던 행정관인 나가모리를 이용했다. 이에야스로부터 정보 제공을 의뢰받은 그는 충성을 나타내려고 도시나가가 모반의 기색을 보인다고 밀고했다. 결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야스가 계속 정보를 재촉하는 바람에 확증도 없이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쾌재를 불렀다. 그로서는 정보의 확실성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도시나가 일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돼, 그의 막료들이 유배를 가거나 감금되었다. 이어서 도시나가와, 그의 편을 들었다는 다다오키에 대해 토벌군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깜짝 놀란 다다오키는 곧 상경하여 서약서를 제출하고 전혀 반의가 없다는 것을 호소하는 한편 도시나가에 대해서도 극구 변명했다. 이에야스는 다다오키의 성의를 무시하면서까지 출병할 수는 없어, 양쪽이 인질을 보내는 조건으로 타협했다. 두 사람 모두 싸우지도 않고 이에야스에게 굴복한 결과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다음 발화점을 찾았다. 그러나 도시나가 사건으로 모두 신중을 기했기 때문에 출병할 구실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좋은 구실이 생겼다. 히데요시의 명으로 아이즈(會津)에 옮겨진 5대 원로의 하나인 가게카쓰의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새 영지 정비를 이유로 돌아갔던 그는 서둘러 성채를 수축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는가 하면 병력을 증강시켜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다.
이것을 안 이에야스는 사자를 보내 그의 상경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게카쓰는 해명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군비를 확충하며 일전불사의 태도를 보였다. 이에야스는 그 강경한 태도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는 아이즈 토벌을 결심하고 6월16일에 오사카를 떠나 후시미 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18일에는 61세의 노장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에게 불과 2000의 군사를 주어 성을 지키게 하고 에도를 향해 출발했다. 천천히 행군하던 그는 7월2일 에도에 도착해 20일이나 성에 머물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은 아이즈로 향하고 있으나 마음은 오사카에 있었다. 아이즈 토벌이 목적이라면 항상 과감 신속하게 행동하는 이에야스가 이처럼 느긋하게 작전을 전개할 리 없다. 실은 미쓰나리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미쓰나리는 반(反) 이에야스 세력의 규합에 성공하여 데루모토를 명목상의 총수로 추대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아이즈로 출동한 것을 기회로 데루모토를 오사카에 입성케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후시미성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했다.
이에야스는 내심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모토타다에게 소수의 병력으로 후시미 성을 수비케 한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사석(捨石)’ 작전이었다. 모토타다의 희생으로 그는 비로소 미쓰나리를 토벌하는 대의명분을 얻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토벌의 결심을 밝히고 에도를 출발했다. 동시에 동북 지방에 있던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도 서진(西進)을 명했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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