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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재]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 제7회

구름위 2013. 1. 4.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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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과 호랑이의 대결

전투는 그달 중순 히데요시 쪽의 이케다 쓰네오키가 오와리의 이누야마(犬山) 성을 점령함으로써 불이 당겨졌다. 그때 이세(伊勢)로 향하려던 이에야스는 방침을 바꾸어 나고야 북방의 평야에 혹처럼 돌출해 있는 고마키(小牧) 산에 포진했다. 그리고 적의 전진기지인 하구로(羽黑)를 급습하여 적을 쫓아냈다.

히데요시는 하구로의 패보에 접하자 직접 대군을 이끌고 이누야마 성으로 달려와 고마키에 대항하기 위해 각처에 요새를 구축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히데요시 군의 10만에 대해 이에야스 군은 1만 8000에 불과했으나 지리상의 이점이 있었다. 또 주변 백성이 게릴라가 되어 첩보원 노릇을 했기 때문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양군은 반 달 동안이나 대치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야전의 쌍벽’이라 불리는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인지라 상대의 전술을 다 알고 있어 쉽게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장수 중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교착상대를 타개해, 공을 세우려고 초조해 하는 자가 있었다. 쓰네오키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에야스를 고마키에 못박아두고, 그 사이에 미카와를 공격한다. 배후를 찔린 이에야스가 당황하여 철수하면 남아 있는 노부카쓰를 공격해 오와리를 쉽게 제압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작전이었다. 히데요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이 집요하게 주장하고, 더구나 그의 조카인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마저 자기가 이 작전을 총지휘하겠다고 나섰다. 히데요시는 할 수 없이 신속한 요격행동을 취하라는 단서를 붙여 이를 허가했다.

4월6일 밤 쓰네오키를 선봉으로 한 1만6000의 요격대가 어둠을 뚫고 진격했다. 이들은 아무 충돌 없이 9일 새벽 후지시마(藤島) 부근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이에야스의 이와자키(岩崎) 성이 있었다. 성병(城兵)은 300도 안 되는 소수였으나 그들은 용감히 대군에 도전했다. 쓰네오키는 이런 작은 산성 따위는 처음부터 묵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유탄이 그의 말에 명중하여 쓰러졌다. 쓰네오키는 분개하여 이성을 잃었다. 그는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말고 신속히 행동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잊고 전군에 이와사키 성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선봉이 성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제2대, 제3대, 제4대는 전진이 차단되어 각각 후방에 주둔, 전황을 살피게 되었다.

한편 이에야스 군은 사방에 내보낸 첩자로부터 유격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가 직접 1만의 군사를 지휘하여 4500의 미즈노 타다시게 군과 함께 추격에 나섰다.

9일 새벽 미즈노 군은 노부요시의 군사가 나가쿠테(長久手) 부근에 주둔한 것을 알고 이를 급습했다. 쓰네오키가 겨우 이와자키 성을 함락하고 잠시 방심하고 있을 때 이에야스 군이 돌입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쓰네오키가 군사를 돌려 나가쿠테 분지로 진격했다. 그러나 한때는 공세를 취했던 유격대도 이에야스의 본진이 측면으로 공격해 오자 대번에 무너지고 쓰네오키는 전사했다. 히데요시에게 패보가 전해진 것은 그날 정오 무렵이었다. 그는 서둘러 군사를 급파했으나, 이에야스 군은 이미 철수하고 난 다음이었다.


- 수면하의 싸움

나가쿠테의 패전 후 히데요시는 더욱 신중해져 5월에 접어들자 드디어 전군을 미노로 철수시켰다.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전면공격을 피한 것은 과연 히데요시다운 노련함이었다. 그는 기후, 오가키(大垣) 등으로 전진하면서 노부카쓰의 성을 연쇄적으로 공격했다. 마치 나가쿠테의 패전을 설욕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이에야스를 유인하기 위한 도발행위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오와리에서 나오지 않고 자중했다. 히데요시의 유도작전에 말려들까봐 경계했던 것이다.

그후 전장은 이세 방면으로 옮겨졌다. 소규모의 충돌이 있기는 했으나 대세에는 영향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드디어 방침을 변경하고 이에야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교묘한 수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노부카쓰를 회유하여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분개하여 노부카쓰의 경솔함을 나무랐으나 이미 강화를 맺은 다음이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을 잃고 말았다. 물론 히데요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노부카쓰와 강화하는 게 아니라 이에야스와 화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영지로 돌아가자 집요할 정도로 여러 가지 술책을 강구하여 이에야스와 접촉을 시도하며 강화를 요구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친(親) 이에야스 세력을 각개 격파하는 수단을 썼다. 그리하여 1585년에는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와 엣추(越中)의 사사 나리마사(佐佐成政)의 항복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의 세력권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후다이 중에서도 최고 원로인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數正)마저 끌어들였다. 카즈마사의 배신은 이에야스 진영에 큰 충격이었다. 내부분열의 조짐이 보이더니 결국 나가쿠테 전투에서 공을 세운 타다시게와 마쓰모토의 성주가 이탈했다.

이에야스는 가신의 결속 강화와 영내 통치의 개선을 통감하고, 즉시 카즈마사가 수비하던 오카자키 성으로 들어가 임전 체제를 폈다. 병력의 동요를 진정시킨 뒤 오와리와 접경 지역에 있는 미카와의 여러 성에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병력을 재배치하고 군법까지 개정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면하의 대치에 먼저 손을 든 것은 히데요시였다. 그는 동부지방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수 없었다. 규슈 평정이라는 대사업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규슈에 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에야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규슈를 평정하는 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런 때에 양쪽의 조정 사절로 노부카쓰가 이에야스를 찾아왔다. 히데요시는 그를 통해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대등한 위치에서 강화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이에야스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강화에 응했다. 1586년 정월의 일이었다.


- 강화의 조건

그러나 이에야스는 여전히 완고하게 자기 자세를 견지했다. 화의에는 응했으나 상경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초조했다. 이에야스가 상경하여 신종(臣從)의 예를 올리지 않으면 화의를 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히데요시가 오다의 판도를 상속하여 중앙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에야스라는 존재와 그 향배를 무시한 채로는 천하통일이라는 대사업을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새로운 수단을 강구했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는 44세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姬)를 강제로 이혼시켜 이에야스의 정실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는 마지막 카드로 늙은 어머니를 인질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효자로 알려져 있던만큼, 이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라 해도 좋았다.

이렇게 되자 이에야스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간파쿠(關白)란 최고의 벼슬에 오른 히데요시가 이렇게까지 애걸하다시피 하게 만든 것은 이에야스의 무게를 천하에 알리는 것이 된다.

이에야스는 1586년 10월26일, 6만의 군사로 대형을 편성하고 당당히 서쪽으로 향했다. 오사카에서 그를 맞이한 히데요시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직접 마중 나가 이에야스의 손을 잡고 감사의 뜻을 표하며 그가 벗어놓은 신을 가지런히 놓는 등 신경을 썼다.

이튿날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에 들어가 여러 장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종의 예를 올렸다.이에야스는 지난 3년간에 걸친 히데요시와의 대결을 깨끗이 청산하고 그의 천하통일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야망을 버린 것은 아니다. 대망을 가슴 깊이 숨기고 우선은 한 다이묘로서 히데요시에게 신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돌이켜볼 때 고마키 나가쿠테의 싸움은, 전투 그 하나만 보면 이에야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전쟁은 총력전이다. 무력 외에도 정치, 외교, 경제 등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야스는 국지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대국적인 ‘전쟁’에서는 오히려 통렬하게 일격을 당했다. 노부카쓰가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음으로써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의 수호’라는 명분을 잃게 된 것이다. 고립작전 때문에 내부 붕괴의 조짐을 맞았다. 또한 임전체제를 강화하는 바람에 영민들은 세납과 부역이 가중되어 농촌경제가 위험수위에 다다랐다. 형세 판단에 밝은 이에야스가 이런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신겐이나 노부나가 등 무력 일변도인 지도자와는 다른, 군사와 외교를 융합한 노련한 책략가 히데요시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이에야스의 특징은 인내라고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눈에 띄는 것이 재빠른 행동력이다. 상경해 히데요시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돌아간 그는 재빨리 지금까지의 거성이던 하마마쓰 성을 나와 12월에 스루가로 옮겼다. 이것은 교토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겠다는 의미로, 히데요시에 대한 복종을 뜻한다. 상경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으면 의혹을 살 우려가 있다.

히데요시는 크게 만족하고 이듬해 3월 규슈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나서, 불과 5개월 반 만에 규슈 전토를 평정하고 개선했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상경해 히데요시의 개선을 축하했다.

규슈 평정 뒤에는 당연히 동쪽으로 시선이 간다. 하코네(箱根) 너머는 아직 히데요시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광대한 처녀지다. 그중에서도 간토 전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호조 우지마사(北條氏政)- 우지나오(氏直) 부자가 가장 강적이었다. 그들은 1582년에 이에야스와 화해하고 이에야스의 둘째 딸을 우지나오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따라서 히데요시가 이 두 강호의 유대에 쐐기를 박지 않을 리 없었다.


- 사돈과의 전쟁을 자청한 이에야스

호조에게 창을 겨누면 이에야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이것은 히데요시로서는 반드시 해야 할 시험이었고 이에야스도 각오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왔는데,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지난해 준공한 오사카의 저택으로 천황을 초청하고 그 자리에서 여러 다이묘에게 간파쿠(히데요시)의 명령은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물론 이에야스도 참석하여 서명했다. 그러나 호조는 참석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사자를 보냈지만 호조는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군비를 확충하고 군사를 증강시켰다. 이것은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히데요시가 동원령을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야스가 호조에게 번의(飜意)를 촉구하는 사자와 서신을 보냈는데도 성과가 없었다. 이에야스는 말로만 번의를 촉구하는 것은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로부터 ‘화평을 위장하고 실은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하려고 획책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런 의혹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에 그는 곧바로 상경해 호조 토벌군의 선봉을 자청했다. 스스로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하여 10만의 대군과 300척의 배를 이끌고 호조의 거성이 있는 오다와라(小田原)로 향했다.

오다와라 전투가 벌어진 것은 1590년 7월이었다. 성을 지키는 호조 군은 3만 5000, 이를 포위한 히데요시 군은 무려 30만. 그야말로 들판을 덮고 골짜기를 메운 대접전이었다.

호조 측은 적은 대군이므로 지구전으로 나가면 식량공급이 어려워 자멸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육로와 해로를 충분히 정비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히데요시의 완벽한 수송작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도리어 보급의 어려움은 자신에게 있었다. 히데요시는 주위의 작은 성채를 모두 파괴하여, 본성(本城)과의 연락을 차단하는 ‘말려 죽이기’ 작전을 폈다.

화공이나 수공 등 무리한 전법은 동원하지 않고 적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이 작전은 성공했다. 대규모의 포위작전에 겁을 먹은 호조 군은 갑자기 전의를 상실했다. 그리고 내응하는 자가 속출해 전투가 시작된 지 4개월 만에 성을 열고 항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에 대한 전후 논공행상에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근거지를 환수하고 호조의 영지를 하사함으로써 그동안 미카와에서 닦아놓았던 도쿠가와 가문의 토대를 무너뜨리고자 하는데, 여기서 다시 이에야스의 위기가 닥치게 된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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