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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맹자의 죽음
이에야스의 처자 살해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유지해 도쿠가와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한, 피나는 결정이었다. 이로써 이에야스에 대한 노부나가의 신뢰는 더욱 깊어져, 이에야스는 대망을 향한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1581년 끊임없이 변경을 위협하던 다카텐신(高天神) 성을 공략하여 엔슈(遠州) 일대를 평정한 이에야스는 그 이듬해 3만 5000의 대군을 거느리고 새로 동맹을 맺은 사가미(相模)의 호조(北條) 군 3만과 함께 다케다의 영지로 진입했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다케다 군단도 호전적인 가쓰요리의 거듭된 출격으로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백성들은 과중한 세납으로 원성이 높았으며 가신들도 크게 동요하는 빛을 보이고 있었다. 이를 아는 이에야스는 진격에 앞서 밀사를 보내 회유와 포섭을 시도했다. 그 결과 구노(久能), 에지리(江尻), 다나카(田中), 스루가 등 요새지의 성을 아무 저항도 없이 점령하고 본거지인 가이(甲斐)에 육박하게 되었다. 가쓰요리는 도주를 거듭하다, 이듬해 3월 자기를 따르던 33명의 가신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다케다 가문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고 스루가를 그의 영지로 삼도록 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미카와, 도토우미와 함께 스루가를 영유하여 일약 70여 만 석의 다이묘(大名)로 성장했다. 이에야스는 1582년 정월, 답례를 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거성인 아즈치(安土)로 향했다.
노부나가는 20여 년 동안 충실한 이 동맹자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며칠 동안 향연을 베풀고 교토, 오사카, 나라, 사카이(堺) 등지를 유람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코쿠(中國)의 모리(毛利) 일족을 토벌하기 위해 나가마쓰(長松)로 출동한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보내기 위해 교토로 올라갔다.
이에야스가 유람을 마치고 작별을 고하기 위해 교토로 향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6월2일 새벽, 교토의 혼노(本能)사에서 노부나가가 중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공격을 받아 자결했다는 것이었다.
급보를 받은 이에야스는 망연자실했다. 처자를 죽이면서까지 지켜온 20여 년의 맹약이 휴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영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는 불과 10여 명의 수행원이 있을 뿐이다. 당장 복수전에 나설 수도 없다. 잇따라 들어오는 보고에 따르면 미쓰히데의 반란 소식을 듣고 폭도로 변한 실직 무사와 토착민들이 혼란을 틈타 마구 살육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 히데요시에게 빼앗긴 선수(先數)
이에야스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키로 했다. 미카와로 가는 최단 코스인 이가(伊賀)를 지나 사건 이틀 후에 오카자키 성에 도착하여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열흘 뒤인 14일에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카자키 성을 출발했다.
가장 먼저 미쓰히데를 주살하는 자가 앞으로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으로 유리해진다. 이에야스는 서둘렀다. 그는 오케하자마의 전투를 상기했다. 요시모토 급사를 계기로 그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노부나가의 죽음은 요시모토의 죽음보다 훨씬 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한발 늦었다. 6월 19일 그가 오와리의 나루미(鳴海)에 이르렀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자가 도착했다. “다카마쓰에서 모리 일족과 대치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질풍처럼 군사를 되돌려 6월13일 미쓰히데 군을 야마자키(山崎)에서 섬멸하고 이미 교토 방면을 제압했다”고 사자는 통보했다. 이에야스가 군사를 일으키기 하루 전이었다.
만약 이에야스가 상경해 있지 않고 자기 영지에 있었다면, 미쓰히데를 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먼저 왔을지도 모른다. 천하를 손에 넣을 기회를, 변고가 일어난 날 하필이면 쿄토에 있었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이에야스는 대권을 히데요시에게 양보하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하마마쓰로 군사를 돌렸다. 그리고 이미 군사가 동원체제에 있는 것을 기회 삼아 영지 확장을 서둘렀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그의 영지인 가이를 호조가 넘보자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워 점령하고, 다시 시나노(信濃)를 병합하여 5개 주, 138만 석에 달하는 판도를 가진 큰 다이묘로 성장했다. 여기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만 4000이나 되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가 서부 일본을 제압한다면 이에야스는 동부 일본의 패권을 잡겠다는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동부에서 5개 영지의 경영에 부심하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중앙 무대에서 눈부신 약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쓰히데를 토벌한 지 보름도 지나기 전에 히데요시는 중신들을 오와리의 기요스(淸州)로 소집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선출했다. 이 자리에는 히데요시를 비롯한 시바타 가쓰이에(紫田勝家), 니와 나가히데, 호리 히데마사, [다키가와 카즈마스(瀧川一益)는 호조家와의 대치로 불참],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등 중신과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信雄), 삼남인 노부타카(信孝) 등이 출석했으나, 이에야스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동맹자이기는 했으나 가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좌장격인 가쓰이에는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에 반대했다. 그는 혼노 사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장남 노부타다(信忠)의 어린 아들 히데노부(秀信)를 천거하여 출석자의 의견을 물었다. 장손을 후계자로 옹립해야 도리에 맞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히데요시의 주장이 채택돼 히데노부가 후계자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회의에 앞서 쓰네오키 등을 회유해 자기 편에 가담케 했기 때문이다.
- 거대한 적
후계자 결정에서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오다 정권의 계승자란 지위를 확보한 히데요시는 그해 12월 돌연 기후(岐阜) 성을 공격해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의 항복을 받아, 반대 세력의 결집을 미연에 방지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시즈케다케(賤岳)에서 가쓰이에를 죽였다. 이때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는 가쓰이에와 호응하여 다시 반기를 들었으나 패하여 할복을 명령받았다.
이어서 12월에는 그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아즈치 성보다 큰 오사카 성을 짓고, 인근 30여 영지의 다이묘들을 모아 충성을 맹세토록 했다. 이때 히데요시의 영지는 24개 주, 620만 석에 이르고 동원 가능한 병력은 15만 7000에 달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도 장애가 있었다. 첫째는 노부나가의 차남으로 오다 가문의 실질적인 계승자인 노부카쓰이고, 둘째는 20여 년에 걸쳐 노부나가의 맹우였던 동부의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가 볼 때 범용하고 경박한 노부카쓰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은연중에 실력을 쌓아나가는 이에야스는 방심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대결하지 않으면 안될 숙명적인 라이벌이었다.
천재적인 모략가 히데요시는 눈엣가시인 이에야스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조정에 주청하여 ‘정3품 참의(參議)’라는 위계를 그에게 내리도록 했다. 히데요시보다 높은 벼슬이었다. 그러나 실리주의자인 이에야스에게는 이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한 치의 땅만도 못한 그 따위 벼슬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회유에 실패한 히데요시가 이번에는 노부카쓰 주변에 모략의 손을 뻗었다. ‘히데요시가 노부카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소심한 노부카쓰는 그 소문을 믿고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이에야스 정도 되는 인물이 히데요시의 움직임을 그냥 보고만 있었을 리 없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의식하고 노부카쓰를 도발했듯이,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시를 적으로 보고 암암리에 노부카쓰를 부추겨 싸움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이에야스는 그 전부터 첩자를 잠입시켜 히데요시측의 정보를 자세히 탐지하는 한편, 평소 왕래가 잦은 반(反) 히데요시 세력과 밀약을 맺고 있었다. 유사시에는 이에야스의 궐기에 호응하여 동부와 남부에서 오사카를 견제하고 협공하자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카쓰가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청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1584년 3월7일 이에야스는 ‘노부나가 공의 유아 노부카쓰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의로운 군사’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하마마쓰 성을 출발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도 이를 공공연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출병을 명하고, 11일에 고노미(近江)의 사카모토(坂本)까지 진출했다. (계속)
이에야스의 처자 살해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유지해 도쿠가와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한, 피나는 결정이었다. 이로써 이에야스에 대한 노부나가의 신뢰는 더욱 깊어져, 이에야스는 대망을 향한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1581년 끊임없이 변경을 위협하던 다카텐신(高天神) 성을 공략하여 엔슈(遠州) 일대를 평정한 이에야스는 그 이듬해 3만 5000의 대군을 거느리고 새로 동맹을 맺은 사가미(相模)의 호조(北條) 군 3만과 함께 다케다의 영지로 진입했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다케다 군단도 호전적인 가쓰요리의 거듭된 출격으로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백성들은 과중한 세납으로 원성이 높았으며 가신들도 크게 동요하는 빛을 보이고 있었다. 이를 아는 이에야스는 진격에 앞서 밀사를 보내 회유와 포섭을 시도했다. 그 결과 구노(久能), 에지리(江尻), 다나카(田中), 스루가 등 요새지의 성을 아무 저항도 없이 점령하고 본거지인 가이(甲斐)에 육박하게 되었다. 가쓰요리는 도주를 거듭하다, 이듬해 3월 자기를 따르던 33명의 가신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다케다 가문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고 스루가를 그의 영지로 삼도록 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미카와, 도토우미와 함께 스루가를 영유하여 일약 70여 만 석의 다이묘(大名)로 성장했다. 이에야스는 1582년 정월, 답례를 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거성인 아즈치(安土)로 향했다.
노부나가는 20여 년 동안 충실한 이 동맹자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며칠 동안 향연을 베풀고 교토, 오사카, 나라, 사카이(堺) 등지를 유람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코쿠(中國)의 모리(毛利) 일족을 토벌하기 위해 나가마쓰(長松)로 출동한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보내기 위해 교토로 올라갔다.
이에야스가 유람을 마치고 작별을 고하기 위해 교토로 향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6월2일 새벽, 교토의 혼노(本能)사에서 노부나가가 중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공격을 받아 자결했다는 것이었다.
급보를 받은 이에야스는 망연자실했다. 처자를 죽이면서까지 지켜온 20여 년의 맹약이 휴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영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는 불과 10여 명의 수행원이 있을 뿐이다. 당장 복수전에 나설 수도 없다. 잇따라 들어오는 보고에 따르면 미쓰히데의 반란 소식을 듣고 폭도로 변한 실직 무사와 토착민들이 혼란을 틈타 마구 살육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 히데요시에게 빼앗긴 선수(先數)
이에야스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키로 했다. 미카와로 가는 최단 코스인 이가(伊賀)를 지나 사건 이틀 후에 오카자키 성에 도착하여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열흘 뒤인 14일에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카자키 성을 출발했다.
가장 먼저 미쓰히데를 주살하는 자가 앞으로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으로 유리해진다. 이에야스는 서둘렀다. 그는 오케하자마의 전투를 상기했다. 요시모토 급사를 계기로 그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노부나가의 죽음은 요시모토의 죽음보다 훨씬 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한발 늦었다. 6월 19일 그가 오와리의 나루미(鳴海)에 이르렀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자가 도착했다. “다카마쓰에서 모리 일족과 대치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질풍처럼 군사를 되돌려 6월13일 미쓰히데 군을 야마자키(山崎)에서 섬멸하고 이미 교토 방면을 제압했다”고 사자는 통보했다. 이에야스가 군사를 일으키기 하루 전이었다.
만약 이에야스가 상경해 있지 않고 자기 영지에 있었다면, 미쓰히데를 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먼저 왔을지도 모른다. 천하를 손에 넣을 기회를, 변고가 일어난 날 하필이면 쿄토에 있었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이에야스는 대권을 히데요시에게 양보하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하마마쓰로 군사를 돌렸다. 그리고 이미 군사가 동원체제에 있는 것을 기회 삼아 영지 확장을 서둘렀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그의 영지인 가이를 호조가 넘보자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워 점령하고, 다시 시나노(信濃)를 병합하여 5개 주, 138만 석에 달하는 판도를 가진 큰 다이묘로 성장했다. 여기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만 4000이나 되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가 서부 일본을 제압한다면 이에야스는 동부 일본의 패권을 잡겠다는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동부에서 5개 영지의 경영에 부심하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중앙 무대에서 눈부신 약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쓰히데를 토벌한 지 보름도 지나기 전에 히데요시는 중신들을 오와리의 기요스(淸州)로 소집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선출했다. 이 자리에는 히데요시를 비롯한 시바타 가쓰이에(紫田勝家), 니와 나가히데, 호리 히데마사, [다키가와 카즈마스(瀧川一益)는 호조家와의 대치로 불참],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등 중신과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信雄), 삼남인 노부타카(信孝) 등이 출석했으나, 이에야스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동맹자이기는 했으나 가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좌장격인 가쓰이에는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에 반대했다. 그는 혼노 사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장남 노부타다(信忠)의 어린 아들 히데노부(秀信)를 천거하여 출석자의 의견을 물었다. 장손을 후계자로 옹립해야 도리에 맞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히데요시의 주장이 채택돼 히데노부가 후계자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회의에 앞서 쓰네오키 등을 회유해 자기 편에 가담케 했기 때문이다.
- 거대한 적
후계자 결정에서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오다 정권의 계승자란 지위를 확보한 히데요시는 그해 12월 돌연 기후(岐阜) 성을 공격해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의 항복을 받아, 반대 세력의 결집을 미연에 방지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시즈케다케(賤岳)에서 가쓰이에를 죽였다. 이때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는 가쓰이에와 호응하여 다시 반기를 들었으나 패하여 할복을 명령받았다.
이어서 12월에는 그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아즈치 성보다 큰 오사카 성을 짓고, 인근 30여 영지의 다이묘들을 모아 충성을 맹세토록 했다. 이때 히데요시의 영지는 24개 주, 620만 석에 이르고 동원 가능한 병력은 15만 7000에 달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도 장애가 있었다. 첫째는 노부나가의 차남으로 오다 가문의 실질적인 계승자인 노부카쓰이고, 둘째는 20여 년에 걸쳐 노부나가의 맹우였던 동부의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가 볼 때 범용하고 경박한 노부카쓰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은연중에 실력을 쌓아나가는 이에야스는 방심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대결하지 않으면 안될 숙명적인 라이벌이었다.
천재적인 모략가 히데요시는 눈엣가시인 이에야스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조정에 주청하여 ‘정3품 참의(參議)’라는 위계를 그에게 내리도록 했다. 히데요시보다 높은 벼슬이었다. 그러나 실리주의자인 이에야스에게는 이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한 치의 땅만도 못한 그 따위 벼슬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회유에 실패한 히데요시가 이번에는 노부카쓰 주변에 모략의 손을 뻗었다. ‘히데요시가 노부카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소심한 노부카쓰는 그 소문을 믿고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이에야스 정도 되는 인물이 히데요시의 움직임을 그냥 보고만 있었을 리 없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의식하고 노부카쓰를 도발했듯이,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시를 적으로 보고 암암리에 노부카쓰를 부추겨 싸움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이에야스는 그 전부터 첩자를 잠입시켜 히데요시측의 정보를 자세히 탐지하는 한편, 평소 왕래가 잦은 반(反) 히데요시 세력과 밀약을 맺고 있었다. 유사시에는 이에야스의 궐기에 호응하여 동부와 남부에서 오사카를 견제하고 협공하자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카쓰가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청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1584년 3월7일 이에야스는 ‘노부나가 공의 유아 노부카쓰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의로운 군사’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하마마쓰 성을 출발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도 이를 공공연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출병을 명하고, 11일에 고노미(近江)의 사카모토(坂本)까지 진출했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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