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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와의 독립
요시모토의 죽음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곧바로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마가와 군이 도주한 뒤 미카와의 최전선을 홀로 지키며, 요시모토 공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복수전을 벌여야 한다며 오다 쪽의 성채를 닥치는 대로 점령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까지 공격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보고 이에야스의 신의에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제스처였을 뿐이었다. 실은 미카와에 있는 오다의 영지를 빼앗아 마쓰다이라의 영지를 확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행히 노부나가는 오와리 수비에 급급하여 미카와에 점점이 구축한 작은 성에는 관심이 적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더욱 공격하기 쉬웠다.
요시모토가 죽었다고는 해도 그의 위협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에 대해 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빈틈없이 슨푸의 내정을 정탐했다. 그 결과 우지사네가 전의를 상실하고 주색으로 날을 보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야스는 기회가 왔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노부나가가 이에야스에게 동맹을 제의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원래 신중한 이에야스였으나 이때처럼 신중했던 적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모처럼 손에 넣게 된 미카와 전토를 잃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직까지도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마가와의 우산 밑에 있을 것인가.
가신들은 대부분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했다. 오다에 비해 이마가와가 훨씬 더 강대하다는 것, 이에야스의 부인이 이마가와 혈족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많은 가신들의 처자가 아직 슨푸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도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우지사네보다 노부나가의 기량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어디까지나 실리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물론 의리도 존중하지만, 그의 의는 인정을 우선하는 감상적인 의리가 아니라 실리를 동반한 신의였다.
결국 그는 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은밀히 노부나가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종전대로 이마가와의 충실한 수족인 양 행동했다. 그리고 1563년 봄에 별안간 이마가와 쪽의 우에사토(上鄕) 성을 공격해 함락했다.
이때서야 우지사네는 속은 것을 알고 격분해 이에야스 부인의 아버지(장인)에게 자결을 명하고 인질로 남아 있던 이에야스 가신의 처자들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이 신경질적인 보복이 이에야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복수전을 펼 구실이 생긴 것이다.
- 도발과 회유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단교를 선언하고, 이름마저 모토야스에서 ‘이에야스’로 바꾸었다. ‘모토’라는 이름은 요시모토로부터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독립선언이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에야스에게 가장 먼저 닥친 시련은 1563년 가을에 발발한 광신적인 불교 종단 잇코슈(一向宗)의 폭동이었다. 이 폭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에야스가 그들의 총본산인 조쿠(上宮) 사에 대해 과다한 식량을 징발했기 때문이었다.
잇코슈 신도들은 영주 못지 않은 조직과 군비를 갖고 있었다. 또 구원을 믿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단을 수호하겠다는 각오가 투철했다. 잇코슈의 폭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이 폭동은 통상적인 전투와는 달랐다. 연일 각지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한 탓에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쪽의 병력 소모가 많았다. 이에야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호족과 이마가와 쪽의 내응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야스도 직접 창을 들고 싸워야 하는 긴박한 사태에 몰리기도 했다 한번은 폭도의 총탄을 맞은 것도 모르고 난전(戰)을 벌이다가 오카자기 성에 돌아와 갑옷을 벗었을 때 탄환 두 알이 땅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이에야스를 더욱 괴롭힌 것은 가신들 중에도 잇코슈 교도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폭동에 가담한 가신들은 이런 혈투 중에도 이에야스에게만은 창을 겨누지 않았다. 그들은 이에야스를 만나면 도주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하치야 한노조(蜂屋半之丞)도 이에야스를 보고 도주했는데, 그러다 그를 추격해오는 것이 일반군사인 것을 알고 돌아서서 찔러 죽였다. 쓰치야 시게하루(土屋重治)도 폭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야스가 고전하는 것을 보자 죽어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군을 돕겠다며 그를 지키다가 전사했다. 이렇게 이에야스에 대한 가신들의 충절은 신앙보다 강했다.
처절하기 짝이 없던 잇코슈의 폭동도 이듬해 2월, 6개월만에 강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끝이 났다. 그러나 폭동에 가담한 무사들의 영지는 몰수되지 않았고, 사찰과 승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폭동 주모자를 처단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이에야스가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애당초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 조건이란 폭동 진압을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지킨 것이 있다면 첫째 조항 정도였다. 자기에게 칼을 겨눈 가신이지만 관대하게 회유했다.
반란 세력을 해체시킨 후 이에야스는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갑자기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와 신도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이에 종단측이 약속위반이라고 항의했으나 이에야스는 “전에 들판이던 곳을 원상 회복시켰을 뿐”이라고 일소에 부쳤다.
조쿠 사에 대해 쌀을 과다하게 징수한 것은 이에야스가 일부러 도발한 것이라고 한다. 첫째 목적은 잇코슈와 그 신도의 일소에 있었다. 그러나 이 도발을 통해 영내에 잠재하는 반대 세력의 가면을 벗길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과연 그때까지 지하에 숨어 이마가와 쪽과 내통하던 토호와 반대세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 유일한 패전
이에야스는 그들을 소탕하고 동부 미카와로 군사를 보내 그들의 거점인 요시다(吉田) 성을 점령함으로써 미카와 전체를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미카와 통일은 대대로 품어온 염원이었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도발과 회유 양면작전으로 불과 4년 만에 달성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리고 3년 후인 1565년,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정3품 미카와노카미(三河守)라는 벼슬을 받고, 성도 마쓰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바꾸었다. 그리고 당당한 다이묘(大名)의 반열에 올랐다.
미카와에 기반을 다진 이에야스의 다음 목표는 이마가와의 비옥한 영지였다. 그는 1568년 도토우미(遠江)로 진공을 개시하여 그해 겨울 히쿠마(引馬)를 점령하고 이듬해 5월에는 가케가와(掛川)를 공략해 우지사네를 이즈(伊豆)로 몰아냈다. 그리고 1570년에는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오카자키를 떠나 히쿠마로 옮겨, 그곳을 하마마쓰(浜松) 성으로 개명하고 적극적으로 이마가와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마가와의 영지는 당시 일본 최강인 고슈(甲州) 군단을 거느리고 있던 북부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도 노리고 있었다. 신겐은 교토 부근을 장악한 노부나가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대립하게 된 것을 기화로, 아시카가를 옹립하여 반(反) 노부나가 전선을 형성한 후 그 선두에 서서 교토 진입을 꾀하고 있었다.
따라서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이에야스와 신겐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에 양군 사이에는 스루가(駿河)와 도토우미, 미카와 북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다 1572년 드디어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계속)
요시모토의 죽음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곧바로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마가와 군이 도주한 뒤 미카와의 최전선을 홀로 지키며, 요시모토 공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복수전을 벌여야 한다며 오다 쪽의 성채를 닥치는 대로 점령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까지 공격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보고 이에야스의 신의에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제스처였을 뿐이었다. 실은 미카와에 있는 오다의 영지를 빼앗아 마쓰다이라의 영지를 확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행히 노부나가는 오와리 수비에 급급하여 미카와에 점점이 구축한 작은 성에는 관심이 적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더욱 공격하기 쉬웠다.
요시모토가 죽었다고는 해도 그의 위협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에 대해 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빈틈없이 슨푸의 내정을 정탐했다. 그 결과 우지사네가 전의를 상실하고 주색으로 날을 보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야스는 기회가 왔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노부나가가 이에야스에게 동맹을 제의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원래 신중한 이에야스였으나 이때처럼 신중했던 적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모처럼 손에 넣게 된 미카와 전토를 잃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직까지도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마가와의 우산 밑에 있을 것인가.
가신들은 대부분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했다. 오다에 비해 이마가와가 훨씬 더 강대하다는 것, 이에야스의 부인이 이마가와 혈족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많은 가신들의 처자가 아직 슨푸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도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우지사네보다 노부나가의 기량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어디까지나 실리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물론 의리도 존중하지만, 그의 의는 인정을 우선하는 감상적인 의리가 아니라 실리를 동반한 신의였다.
결국 그는 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은밀히 노부나가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종전대로 이마가와의 충실한 수족인 양 행동했다. 그리고 1563년 봄에 별안간 이마가와 쪽의 우에사토(上鄕) 성을 공격해 함락했다.
이때서야 우지사네는 속은 것을 알고 격분해 이에야스 부인의 아버지(장인)에게 자결을 명하고 인질로 남아 있던 이에야스 가신의 처자들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이 신경질적인 보복이 이에야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복수전을 펼 구실이 생긴 것이다.
- 도발과 회유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단교를 선언하고, 이름마저 모토야스에서 ‘이에야스’로 바꾸었다. ‘모토’라는 이름은 요시모토로부터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독립선언이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에야스에게 가장 먼저 닥친 시련은 1563년 가을에 발발한 광신적인 불교 종단 잇코슈(一向宗)의 폭동이었다. 이 폭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에야스가 그들의 총본산인 조쿠(上宮) 사에 대해 과다한 식량을 징발했기 때문이었다.
잇코슈 신도들은 영주 못지 않은 조직과 군비를 갖고 있었다. 또 구원을 믿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단을 수호하겠다는 각오가 투철했다. 잇코슈의 폭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이 폭동은 통상적인 전투와는 달랐다. 연일 각지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한 탓에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쪽의 병력 소모가 많았다. 이에야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호족과 이마가와 쪽의 내응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야스도 직접 창을 들고 싸워야 하는 긴박한 사태에 몰리기도 했다 한번은 폭도의 총탄을 맞은 것도 모르고 난전(戰)을 벌이다가 오카자기 성에 돌아와 갑옷을 벗었을 때 탄환 두 알이 땅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이에야스를 더욱 괴롭힌 것은 가신들 중에도 잇코슈 교도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폭동에 가담한 가신들은 이런 혈투 중에도 이에야스에게만은 창을 겨누지 않았다. 그들은 이에야스를 만나면 도주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하치야 한노조(蜂屋半之丞)도 이에야스를 보고 도주했는데, 그러다 그를 추격해오는 것이 일반군사인 것을 알고 돌아서서 찔러 죽였다. 쓰치야 시게하루(土屋重治)도 폭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야스가 고전하는 것을 보자 죽어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군을 돕겠다며 그를 지키다가 전사했다. 이렇게 이에야스에 대한 가신들의 충절은 신앙보다 강했다.
처절하기 짝이 없던 잇코슈의 폭동도 이듬해 2월, 6개월만에 강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끝이 났다. 그러나 폭동에 가담한 무사들의 영지는 몰수되지 않았고, 사찰과 승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폭동 주모자를 처단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이에야스가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애당초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 조건이란 폭동 진압을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지킨 것이 있다면 첫째 조항 정도였다. 자기에게 칼을 겨눈 가신이지만 관대하게 회유했다.
반란 세력을 해체시킨 후 이에야스는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갑자기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와 신도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이에 종단측이 약속위반이라고 항의했으나 이에야스는 “전에 들판이던 곳을 원상 회복시켰을 뿐”이라고 일소에 부쳤다.
조쿠 사에 대해 쌀을 과다하게 징수한 것은 이에야스가 일부러 도발한 것이라고 한다. 첫째 목적은 잇코슈와 그 신도의 일소에 있었다. 그러나 이 도발을 통해 영내에 잠재하는 반대 세력의 가면을 벗길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과연 그때까지 지하에 숨어 이마가와 쪽과 내통하던 토호와 반대세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 유일한 패전
이에야스는 그들을 소탕하고 동부 미카와로 군사를 보내 그들의 거점인 요시다(吉田) 성을 점령함으로써 미카와 전체를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미카와 통일은 대대로 품어온 염원이었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도발과 회유 양면작전으로 불과 4년 만에 달성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리고 3년 후인 1565년,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정3품 미카와노카미(三河守)라는 벼슬을 받고, 성도 마쓰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바꾸었다. 그리고 당당한 다이묘(大名)의 반열에 올랐다.
미카와에 기반을 다진 이에야스의 다음 목표는 이마가와의 비옥한 영지였다. 그는 1568년 도토우미(遠江)로 진공을 개시하여 그해 겨울 히쿠마(引馬)를 점령하고 이듬해 5월에는 가케가와(掛川)를 공략해 우지사네를 이즈(伊豆)로 몰아냈다. 그리고 1570년에는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오카자키를 떠나 히쿠마로 옮겨, 그곳을 하마마쓰(浜松) 성으로 개명하고 적극적으로 이마가와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마가와의 영지는 당시 일본 최강인 고슈(甲州) 군단을 거느리고 있던 북부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도 노리고 있었다. 신겐은 교토 부근을 장악한 노부나가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대립하게 된 것을 기화로, 아시카가를 옹립하여 반(反) 노부나가 전선을 형성한 후 그 선두에 서서 교토 진입을 꾀하고 있었다.
따라서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이에야스와 신겐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에 양군 사이에는 스루가(駿河)와 도토우미, 미카와 북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다 1572년 드디어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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